푸른 봄

[쿱정전력 청춘예찬]

 

 

            

w. (@HYEMM_SVT)

 

 

 

 

 

조별과제 공고가 붙었다. 주제는 청소년 문화에 대한 심층적 이해’. 게시판 앞에 선 방년 스물 셋, 과대 최승철은 줄줄 늘어진 글자들을 침착하게 눈에 담는다. 어떻게 복학하자마자 조별과제냐. 옆에서 어깨를 두드리는 동기들이 내적 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지는 사실이어서, 승철은 그 손을 단호하게 내쳤다. 아니, 복학하자마자 과대 일을 다시 떠맡은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조별과제야 과 특성 상 많은 게 당연한 거니까 그것도 별 상관 없었다.

그런데, !

 

 

 

[수강생들의 공평한 참여를 위하여 조는 임의로 편성하였으니 아래 붙임을 확인 후 과제를 수행하기 바랍니다.]

 

 

 

교수가 지 맘대로까놓고 말하면 조교가 랜덤 프로그램 돌린 게 확실하겠지만조를 정하냐 이 말이다. 승철은 왼쪽 눈에서 오른쪽 눈으로 지나가는 글자를 세 번이나 붙잡은 후에야 입속말로 욕설을 읊조려 보았다. 시발 뻐킹. 나지막한 음성에 동기들은 웃기다고 또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자신들도 랜덤 프로그램의 희생양임을 깨닫고 다급하게 손을 뻗어 공고 앞장을 넘긴다. 죽 늘어선 학번을 손끝으로 훑어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서로 같은 조가 되었다고 기뻐하다가도 제사 뒤진다. 집안 행사 뒤진다.’ 따위의 문장을 반쯤 장난 식으로 내뱉는 동기들도 있었다. 그리고 승철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제 학번을 찾아 글자들을 스캔하다가, 마지막 조 맨 위에서 굴러가던 눈동자를 멈추었다.

 

 

 

[6

 

조장 14017024 최승철

조원 14017016 윤정한

……]

 

 

 

그리고 승철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그의 등 뒤에서 난리 굿을 하던 동기들도 나열된 문자를 인식하고서 적당히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대여섯 명이 모인 게시판 앞이 조용해진 이유라면, 승철의 이름 아래에 1순위로 적힌 이의 이름자 때문이었다.

하아……. 적막을 깨듯 한숨을 내쉰 승철의 두 눈에 다시금 들어차는 이름의 주인공윤정한은, 조별과제를 하는지 마는지는 제 알 바가 아니라는 느낌으로, 과방에서 가장 구석지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가장 볕이 잘 드는 창가 근처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휴대폰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간간히 그 액정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더랬다.

 

 

 

 

 

그러니까, 청소년교육과 14학번 윤정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간단하게는 승철과 그 무리들의 동기였다. 그 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를 돌이켜 보자면, 임시 과대로 뽑혀 버린그의 대표 운명은 이때부터였을 지도 모른다승철이 듣기로 남자 신입생이 가장 많은 해라고 했었다. 얼만큼 가지고 놀 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신나 보이는 여자 선배들과 달리 남자 선배들은 어떻게 여학생이 세 명 뿐이냐며 이를 득득 갈았으나, 언제 왔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히 구석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윤정한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었다. 사실 그것은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승철이 길을 잘못 알려준 탓으로아슬아슬하게 참석한 동기들은 물론 승철과 함께 마지막으로 들어온 여자 임원진 선배들까지도 모두 똑같이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웬만한 여자도 어울리기 힘든 단발머리를 하고서 창 밖을 바라보는 얼굴에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다가, 선배들이 들어오자 슬쩍 미소를 짓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뻤던 것을 승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임원들 사이에 끼어서, 아마 그 때 승철은 정한의 웃는 얼굴에서 토끼나 새끼 고양이 따위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쟤는 귀여운 것만 닮았네, 하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다가 혼자 놀라 작게 소리를 질러 버린 것 또한 기억에 남아있을 테지.

 

그러나 개강 이후 맞은 윤정한은 오리엔테이션 때의 첫인상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도 선배들 앞에서는 적당히 웃어주고 적당히 대답해주는 것도 같은데, 다수의 동기들 가운데 문장으로 구성된 대답을 받아본 사람은 승철이 알기로 없었다. 정말, 없었다. 우선은 과방에 1학년 다수가 남게 되면, 윤정한은 마치 제 지정석인 것 마냥 볕이 잘 드는 구석 자리로 가서, 고고하게 다리를 꼬아 앉아서는 다음 강의가 있을 때까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는 했다. 이따금씩 누군가에게 문자나 카톡을 보내는 것도 같았고, 이따금씩 정체 모를 게임을 하는 것도 같았다. 간간히 미소를 띠는 것은 시종일관 바라보는 액정 속에 그 원인이 있을 터였고, 누가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어 보려고 앞을 얼쩡거린다 싶으면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다. 일례로 승철의 동기 중에 제일 인생 막 산다 싶은 놈이 고만고만한 다른 과 애들하고 윤정한 웃는 거 받기라든가, 되도 않는 내기를 했다면서 과감하게 구석 자리로 다가갔었는데, 휴대폰 속에 뭐가 들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말갛게 웃던 정한은 그가 가까이 와서 제 어깨를 두드리기가 무섭게 표정을 싹 지우고 적당히 긴 머리를 찰랑이며 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은 위협이라기 보다는,

 

 

 

— 야, . 나 지금 숙주 뽑는 거 안 보여?

……어, ?

너 때문에 이거 이거 다 못 뽑아서 죽었잖아. 네가 책임질 거야?

 

 

 

정확하게, 아주 정확하게 새끼 고양이가 다 자라지도 않은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한 마디로 앙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찰나의 정적, 이후 윤정한이 휴대폰 액정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과방을 울리고, 절망에 빠진 동기 놈이 무리 속으로 터덜터덜 걸어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승철을 포함한 나머지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삼켜 내려 갖은 미친 짓을 다 하고 있었다. 물론 다시 게임에 빠져든 윤정한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안중에도 없었고. 승철은 왜 웃느냐며, 자긴 진지하다며 울분을 토하는 동기 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결국 과방을 박차고 뛰어나와야 했다. 물론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앉은 동기 놈이 웃긴 이유도 있었으나, 복도 구석 자판기 앞에서 참았던 웃음을 뱉어내는 최승철을 건드린 것은 당연하게도 윤정한이었다. 게임 하느라 바쁘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스무 살 남자가 말을 저렇게, 귀엽게 하지? 누가 보면 미친 놈이라고 혀를 찼을 정도로, 승철은 정한이 뱉었던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으며 한참을 웃으며 제 옷으로 바닥 청소를 다 하고서야 과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청소년교육과 14학번 윤정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간단하게는 승철의 동기였고, 조금 덧붙이자면 하는 행동이며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여운 생명체임에도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줄곧 발톱을 세우는 새끼 고양이와도 같은 사람이다,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승철은, 잠깐의 과거 여행을 끝마치고서 자신의 위치를 절감한다. 2년 전의 제가 바닥 청소를 다 해가며 웃었던 그 일의 최대 피해자인 동기 놈이 저를 보면서 아까 전부터 징그럽도록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조별과제까지도 좋다, 같은 조가 된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윤정한은 과 내에서 5등 안에 들 만큼 학점이 좋았다—. 그러나 현재 휴대폰에 두 눈동자를 박은 이는 조별과제 공고가 떴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고, 따라서 조장인 승철이 직접 가서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건데, 다시금 돌아본 윤정한은 현재 게임으로 추정되는 활동에 매우 열중하고 있었다. 또 다시 고뇌에 빠진 승철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숙이는데, 그때 그 피해자였던 동기를 필두로 눈치를 깐 나머지 무리들이 그의 어깨를 반쯤 성의 없이 두드려 주었다. 그나마 승철과 마음이 잘 맞는다 싶은 동기가 그를 위로한답시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어차피 너는 그래도 좀 덜 쪽팔릴 거 아니냐. 그 때 저 새끼는 쟤한테 수작 걸어볼라고 간 거고, ? 너는 임마, 정당한 사유가 있잖냐.”

……같잖은 위로 안 받는다, 가라.”

, 그래. 빠이.”

 

 

 

그러나 이미 당사자가 된 승철에게 그 따위 위로가 통할 리 없었다. 이미 명당자리에 진치고 앉은 동기들은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저를 보며 잔뜩 비웃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무드 없는 남자기로서니 제가 거절해도 상투적인 멘트를 하나쯤은 더 뱉어줄 것만 같았던 동기 녀석도 가란다고 인사까지 건네며 명당자리로 발을 옮겼다. 이 와중에도 윤정한은 이 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제 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액정을 향해 반짝 빛나는 두 눈이 참 귀엽게도 생겼다, 고 승철은 무의식 중에 그렇게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결심한 듯 호흡을 골랐다. 이게 뭐라고 다가가는 몇 걸음이 그렇게 비장한지 저도 모를 일이었지만, 동기들 다 모인 앞에서 개 쪽 팔기는 싫었던 승철은, 정한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어깨 너머로 휴대폰 액정을 곁눈질하며 있는 대로 눈치를 다 보다가, 겨우 오른손을 뻗어 눈앞에 놓인 그의 어깨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때물고기들이 유영하는 화면을 지그시 바라보며 평화롭게 스크롤을 내리던 윤정한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그 바람에 스크롤이 한없이 위로 올라가며 얼떨결에 액정을 꾹 누른 탓에 이미 열 마리나 보유하고 있는 물고기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최승철은 어깨 너머로 이름 모를 게임 화면에서 빛이 번쩍이며 물고기 형상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는 걸 곁눈질하며, 속으로 절망한다. 창조된 물고기가 확대되어 화면 안을 헤엄치는 것을 잠시 동안 바라보고 앉았던 윤정한은, 누가 봐도 새침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반쯤 돌려 승철을 올려다보았다.

 

 

 

, . 나 지금 어비스리움 하는 거 안 보여?”

……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지금 너 땜에 분홍 돌고래 못 사고 블루탱 산 거 안 보이냐구.”

……아니,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니고—“

이거 생명력 모으려면 반나절은 더 걸리는데, 네가 책임질 거야?”

 

 

 

그 표정만큼이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침한 말투에, 승철의 등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앉은 동기들은 역시나 웃음을 삼키느라 갖은 난리 굿을 하느라 바빴고, 윤정한은 최승철의 뒷말 따위 듣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매몰차게 돌렸으며, 최승철은 그 자리에 선 채 그렇게 생각했다. , 좆됐다. 그 와중에도 어깨 너머로 곁눈질한 윤정한은 여전히 화면 속 바다를 누비는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홀드시키고 바닥에 놓인 제 가방을 집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차게 식어 있는 승철을 곁눈질하고서 인상을 조금 찌푸린 채 거기 서서 뭐 해?” 하고 물은 것은 어찌 보면 희망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아니, 그…… 우리 조별과제 공고 떴어.”

근데?”

그니까, 너랑 나랑 같은 조라고……. 그거 말하려고 했었는데,”

그래? 카톡 방 열면 답 할게, 앞으로 거기서 얘기해.”

아니, , 그건 당연한 건데, 그게 아니라—“

할 말 다 했지? 나 간다.”

 

 

 

하지만 그것이 희망이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한은 빠르게 제 의사를 전달하고서 승철과 나머지를 지나 과방을 벗어났다. 철제 문 닫히는 소리가 육중하게 울려 퍼지기 무섭게 둘러앉은 동기들은 참았던 웃음을 뱉어내느라 거의 울고 있었고, 승철은 정말로 이게 뭐지 싶어 멍하니 정한이 앉았던 자리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쯤 되니 그 때 그 동기 놈이 이런 기분이었나 싶기도 해서 승철은 되도 않는 연민의 심리까지 갖고 있었으나, 등을 돌려 이미 반쯤 오열하는 동기들을 바라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심각한 수치심을 느꼈다. 이대로 땅이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 발 한 발을 떼는 동안 동기들은 손등으로 촉촉해진 눈가를 훔치며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 아…… 존나 웃기네, 그래도 너는 저 새끼보단 말 더 많이 섞은 거 아니냐?”

그니까, 너 이 새끼 성공했다?”

, 최승철 윤정한이랑 말 섞었으니까 기념주 안 마시냐?”

저 새끼 지갑 훔치자. 아 존나 웃었네. 이번 달 중에 제일 웃겼다.”

근데 난 최승철 반응도 웃긴데 윤정한이 오졌다고 본다. 솔직히 스물 세 살 먹고 누가 저렇게 말하냐?”

 

 

 

제가 얼만큼 가까이 왔는지도 모르고 저들끼리 웃기 바쁜 동기들의 말을 가만히 선 채로 곱씹으면서, 승철은 무의식 중에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고 머리칼이 흩날리도록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과방을 뛰쳐나가든가 바닥에 머리를 박든가 혀라도 깨물든가 셋 중 하나는 하고 싶었다. 최소 2년은 더 볼 동기들 앞에서 쪽 판 건 그거대로 미치겠는 거였고, 무엇보다 동기 녀석의 말을 인용하자면스물 세 살 먹고 저렇게 말하는 윤정한이 제게 망신을 주는 와중에도 극도로 귀여워서 그거대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거 뭔 기분이 이 따위야. 얼굴을 잔뜩 구긴 승철이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기합 비슷한 것을 내지르자, 그때까지도 그가 가까이 있는 줄 몰랐던 동기들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몸을 뒤로 빼며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야, 최승철 왜 저래? 미쳤대?”

몰라, 존나 쪽팔린갑지.”

 

아 씨발! 다 싸물어, 이 도움 안 되는 새끼들아!”

 

 

 

최승철, 결국 폭주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내뱉고 가방도 챙기지 못한 채 과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쿵 소리를 내며 닫히는 철문 너머로 얼 빠진 듯한 동기들의 헛웃음이 들려온 것도 같았으나 그런 걸 신경 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과거 제 동기를 비웃었던 복도 끝 자판기 앞으로 달려가서, 또 한 번 옷으로 바닥 청소를 하며 실성한 듯 웃다가, 다시금 절망했다. 나 이제 쟤들은 둘째 치고 윤정한 얼굴은 어떻게 봐……. 고장 나 켜지지 않는 형광등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승철의 눈가가 약간, 아주 약간 촉촉한 것도 같았다.

 

휘몰아치던 감정이 조금 진정된 후에 주머니를 뒤져 찾아낸 잔돈으로 캔커피를 하나 뽑은 그는, 그래도 돈이 있어서 다행이다—,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과방으로 돌아왔다가, 텅 빈 내부에 제 가방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을 보고 낮게 욕지거리를 읊조렸다. 나 다음 필수전공인 거 왜 까먹었대……? 두꺼운 전공 책이 든 가방을 들쳐 메고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승철은 속으로 내질렀다.

 

 

 

시발, 나 오늘 왜 되는 일 없어!!

 

 

 

 

*

 

 

 

 

 

 

조별과제를 시작한 후로 3일이 지났다. 생각 외로 승철이 조장인 6조의 과제 상황은 굴곡 없이 평탄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승철은 사실상 하는 일이 없었다. 최승철 이십삼 세 인생 들어서 온갖 수모를 다 겪은 3일 전 저녁에 단체 카톡방을 열었을 때, 씻고 온 사이에 역할 배분이 끝난 걸 보고서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 보겠다고 제안했던 그는, [절대 안 돼] 라고 1초 만에 도착한 답장의 주인공이 윤정한인 것을 확인하고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가 한 일이라고는 자료 조사 때문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후배들을 불러다가 밥과 술을 사준 것, 과방에서 틈나는 대로 노트북을 붙잡고 프레젠테이션을 만드는 윤정한에게 커피며 각종 음료수를 사다 나른 것이 전부였다. 승철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도 않고, 괜히 무임승차하는 기분이 들어 정한을 마주칠 때마다 저도 프레젠테이션을 함께 만들겠다는 의사를 대놓고 비추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정한은 딱 잘라 거절하고서 그를 지나쳤다. 또 무시당한 건가, 중얼거리는 그에게 옆에 서 있던 동기는 어깨를 두드려 주며 그렇게 대꾸했다.

 

 

 

네 새끼 컴맹인 거 쟤도 모를 일 없지 않겠냐. 보노보노나 안 넣으면 다행이지, 그냥 닥치고 돈이나 써.

 

 

 

순간 발끈해 치켜 올라갔던 주먹은 말 없이 끄덕여지는 고개와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동기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이 사실이었다. 전자기기라고는 휴대폰밖에 사용할 줄 몰랐던 최승철이 1학년 때 발표 과제를 거하게 말아먹은 것을 같은 과라면 모를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날이면 날마다 지갑을 몇 번이고 열었다. 사다 나르는 음료수를 말 없이 받아 준 정한이 이제는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오늘, 과방 한 구석윤정한의 지정석에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앉은 승철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옆에 선 정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USB를 꽂는 손이 떨리는 것처럼 보여서, 살짝 웃었던 것도 같았다. 승철은 USB를 조심스레 연결 포트에 밀어 넣고, 감전이라도 되는 마냥 손을 급하게 떼고 후하후하 심호흡을 해댔다. 생 지랄이야, 지랄. 멀리서 외쳐 대는 동기의 조롱 섞인 목소리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이유라면, 정한이 3일 간 승철이 사다 준 커피와 음료 따위를 받아 마시면서 제작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제 노트북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심장께를 붙잡고 호흡을 느리고 길게 뱉는 승철을 또한 내려다보면서, 정한은 웃는 듯 마는 듯 알 길 없는 표정을 하고 마우스에 손을 얹어 느리게 커서를 움직였다.

 

 

 

“폴더가 빨리 안 뜨네……. 이거 폴더 뜨면 그냥 끌어다가 너 바탕화면에 옮기고 USB 빼서 나한테 주면 돼. 그 정도는 하지?

“어우, 그 정도는 당연히 하지.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멍청이 맞는 거 같은데…….

“아, 아니거든? 너도 나 놀리냐?

“아님 말구. 미안.

 

 

 

, 또 당했다. 윤정한 특유의 화법에 다시금 넋을 놓고 앉았던 승철은 —제 표정이 웃긴 게 분명했다조금 웃는 것도 같은 정한을 올려다보다가 그의 손가락이 화면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거기로 시선을 옮겼다. 띠링, 단조로운 알림과 함께 노트북 귀퉁이에 USB 실행 선택 창이 뜬 것이었다. 뭐 누르면 되지? 순식간에 당황스러워진 승철이 눈동자만 굴리며 허공에서 손을 휘젓고 있을 때, 정한은 그보다 빠르게 마우스를 잡아 ‘폴더를 열어 파일 보기’를 클릭했다. 그러고서 승철이 하는 짓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눈이 마주쳤고, 정한은 결국 못 이기고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아, 너 진짜 바보 같아.

“……기분 탓일 걸?

“컴퓨터로 아무것도 못 하면서 노트북은 사양 좋은 걸로 산 것도 신기해.

“아, 아까부터 자꾸 나 놀리냐고.

“안 놀리는데? 사실이잖아. , 폴더 떴다.

 

 

 

한 번은 이겨볼라 치면 금세 새침하게 표정을 바꾸는 정한에 승철이 작게 한숨을 내뱉는데, 때마침 화면 위로 떠오른 폴더를 커서 끝이 가리켰다. 줄곤 마우스를 붙잡고 있던 정한은 제 손을 떼고 승철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후하후하, 다시금 심장께에 손을 둔 채 심호흡을 내뱉던 승철은 너무나도 어색하게 제 마우스를 붙잡고 조심스레 커서를 움직였다. 한 발자국 옆에 선 정한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화면을 들여다보고 조종이라도 하는 것마냥 가만가만히 내뱉었다.

 

 

 

“이제 그거 문서 꾹 눌러서, , 바탕화면에 놓고 마우스에서 손 떼.

“……이거 꾹 누르라고?

“어, 두 번 말고 한 번만 클릭해서 폴더 밖으로 끌고 가.

“……이렇게?

“……”

“야, 제발 맞다고 해 줘…….

“어, 그거 하고 이제 손 떼.

 

 

 

마우스를 쥔 오른손을 벌벌 떨면서도 생각보다 시키는 대로 잘 해낸잘 해냈다고도 볼 수 없을 만큼 쉬운 작업일 테지만승철은 마우스에서 급하게 손을 떼고 상체를 뒤로 빼며 이동 진행 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막대 바에 색이 채워지며 순조롭게 파일이 이동되고 있는 것을 함께 바라보며, 정한은 특유의 새침한 말투로 “잘 했네.” 하고 던지듯 내뱉었다. 여전히 긴장을 놓지 못하고 화면을 바라보던 승철은 순간 노트북 화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띠링띠링 알림음을 울리다가 이내 저 알아서 종료되는 것 또한 멀거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그것을 함께 보고 서 있던 정한은 순간 당황한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이내 넋이 반쯤 나간 것처럼도 보이는 승철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 너 노트북 충전기 있어?

“……어, ?

“충전기 있냐구! 아 씨, 왜 충전을 안 하고 다니는 거야!

“아니, , 잠깐만, 기다려 봐봐.

 

 

 

이동 중이던 파일이 통째로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는 정한을 따라 저도 맘이 급해진 승철은 제 가방을 마구잡이로 뒤적여 겨우 노트북 충전기를 찾아냈다. 그것을 들고서 눈만 굴려 콘센트를 찾던 승철이 답답한 모양인지, 정한은 그의 손에 들려있던 충전기를 반쯤 뺏어 들어 제일 가까운 콘센트에 꽂고 노트북 전원을 켰다. 전력이 공급되자 노트북은 언제 제 맘대로 꺼졌냐는 듯 평소대로 부팅되었고, 마우스를 쥔 채 커서가 뜰 때까지 이리저리 그것을 움직이던 정한은 완전히 부팅된 이후 바탕화면 그 어디에서도 이동된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찾을 수 없어서 입술을 꾹 다물고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슬쩍 돌아본 승철은 이미 완전히 넋이 나가 마우스를 어색하게 쥐고 커서를 움직여 바탕화면 위를 마구 휘저었다. 할 말이 없어 입술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있는데, 뒤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던 정한이 승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서 야, 하고 부르는데 처음으로 위압감 비슷한 걸 느낀 승철이 몸을 반쯤 돌려 그를 마주하기 무섭게 정한의 두 손이 승철의 어깨를 잡아 그를 짤짤 흔들어 댔다.

 

 

 

“야, 최승철! 너 내가 3일 동안 맨날 과방에서 이거 만든 거 몰라서 이래?

“으억, 아니, 정한아, 잠깐만, 이거 놓고

“이제 파일 다 날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되는데 네가 책임질 거야 뭐야!

“아니, , 책임은 지는데,

“아 씨, 책임 지든가 말든가 난 모르겠으니까 너 알아서 해!

 

 

 

승철을 정말로 짤짤 흔들면서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톡톡 쏘아 붙인 정한은 그를 집어 던지기라도 하듯 놓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제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승철은 넋이 나갈 대로 나가서 이미 화면 보호기를 띄워내는 제 노트북 한 번, 전공 교재며 보조 배터리 따위를 주섬주섬 챙겨 제 가방에 밀어 넣는 윤정한을 한 번 바라보다가 이내 제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개를 양 무릎 사이로 처박았다. 나 새끼 왜 살아, 왜 살아!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머리채를 잡아 뜯는 동안, 짐을 다 챙긴 정한은 입술을 앙 다문 채 가방을 들쳐 메고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승철의 곁을 스쳐 과방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동기들도 저마다 과제를 이유로 과방을 빠져나갔고, 내부에 덩그러니 남은 승철은 휴대폰이 카톡 알림음을 울려 댔음에도 차마 그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덮어진 노트북 위에 제 머리를 처박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최승철을 내버려 두고 나온 윤정한은, 사실 오갈 데 없어 복도 끝 자판기로 향했다가, 주머니에 늘 있던 잔돈도 하필 오늘따라 보이지가 않아서 애꿎은 자판기를 운동화 앞코로 툭 건드리며 화풀이를 하고서 자리를 떴다. 무의식 중에 휴대폰 홀드를 풀었다가 승철과 한 카톡 대화창이 떠 있어서, 정한은 눈가를 찌푸리며 다시 휴대폰을 홀드시키고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다. ,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되는 일이 없어, 진짜. 부루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복도 벽에 부딪혀 울렸다가, 금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

 

 

 

 

 

그 후 또 다시 3일이 지나는 동안, 승철은 주기적으로 정한에게 갠톡을 보내 용서를 구했다. 물론 정한은 그것을 읽지 않고, 그저 알림이 울리면 울리는 대로 내버려 뒀다. 일부러 사람 미치게 만들려는 속셈은 아니었고, 다만 컴퓨터를 못 다뤄도 너무 못 다루는 승철이 괘씸했을 뿐이다. 그렇게 냅두고 가도 내일쯤 되면 다시 커피 같은 걸 사 들고 제게 와서 치근덕댈 줄 알았건만, 요 사이 일부러 과방에 들러도 승철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더랬다. 갠톡을 씹느라 단체 카톡방마저 확인을 못 하고 있었던 윤정한은 내심 그의 행방이 궁금하면서도 속으로 미쳤나 봐, 따위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원래 하던 대로 얼굴에 철판 깔고 치근덕대면서 웃는 얼굴로 사과나 하면 제 노트북에 틀만 잡아놓은 게 있으니 내용만 입력하면 된다하고 언질이라도 줄 텐데. 아예 등교를 안 하는 것 같아 정한은 여러모로 기분이 복잡했다. 제가 괜히 심하게 굴었나 싶기도 하고, 그랬다가도 고개를 내젓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낮이 되어서야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단체 카톡방에 들어가 버리고 만 윤정한이었다. , 읽을 생각 없었는데. 중얼거리며 입술을 꾹 물었다 놓고서 말과는 다르게 메시지 하나 하나를 꼼꼼히 읽는 게 저 스스로도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띄는 메시지는 이틀 전쯤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김민규

정한선배 어디계세요ㅜㅜ    오후 11:28

김민규

저지금 도서관인데 승철선배 프레젠테이션 만드신다는데여     오후 11:28

김민규 

제가좀도와드리고 기숙사 들어가시라고 햇는데 이거 다만들고 가신다고 하셔서요ㅠㅠㅠㅠ     오후 11:29

부승관

선배 어제도 밤새신거 같던데ㅜㅜ 무슨 일 잇엇어요???    오후 11:31

김민규

그거 나도 궁금해서 물어봣는데 선배 그냥 한숨쉬시고 그래서 그냥 더 안물어봣어..    오후 11:31

……]

 

 

 

그 아래로도 비슷한 내용으로 울음바다를 만들어 놓은 후배들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가, 맨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서 정한의 두 엄지가 액정 위로 놓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른 시각에 보내진 메시지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승철이었다.

 

 

 

[최승철

드디어 다만드럿ㅅ다     오전 3:47]

 

 

“……진짜 바보 아냐, 최승철.

 

 

 

습관처럼 입술을 꾹 물었다 놓은 정한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빠르게 손을 움직여 그 아래 메시지를 하나 보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지갑을 챙겨 들었다. 제가 책임 지라고 했다고 정말로 3일 밤을 새며 지지리도 못 하는 컴퓨터를 다룬 최승철이 답답하기도 하고, 왠지 대견한 것도 같고, 여하튼 이상하리만치 복잡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 지금 과방갈게] 하고 보낸 메시지를 읽었는지 카톡 알림음이 주구장창 울려 댔지만, 정한은 그것을 굳이 확인하며 느긋하게 걷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아, 더워, 최승철 있어?

“어……, 정한이 진짜 왔네.

 

 

 

평소 같으면 기숙사에서 빨리 걸어도 15분 내외로 도착할까 말까 한 과방에 10분 컷으로 도착한 정한은 제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벌컥 문을 열고 승철을 찾았다. 생각보다 꽤 넓은 과방을 쭉 둘러보던 그의 시선 끝에, 항상 제가 앉던 구석 자리에 책상과 반쯤 합체가 되어 마우스를 휘두르던 승철이 걸렸다. 다 잠긴 그의 목소리가 넓은 과방 내부로 울려 퍼졌다. 윤정한은 웃음인지 실소인지 모를 것을 앙 다물었던 입술 새로 흘려내며, 저 보라는 듯 노트북을 반대로 돌리고 마우스를 움직여 커서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승철을 바라보고서 이내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픽 웃어 버렸다.

 

 

 

“아…… 졸려 뒤질 거 같은데 어쨌든 다 만들었다.

“……야, 너 진짜,

“내가 어? 그래도 후배들이 많이 도와 줘서…… 볼 만 하게는 만들었는데, 그래도 맘에 안 들면 어쩔 수 없는 거긴 하고……. 암튼 그 때 좀 미안해서 밤 좀 새 봤다…….

“내가 그거 그냥 책임 지라고만 했지, 만들라고는 안 했는데,

“책임 지는 게 만드는 거지 뭐. 어차피 잘못 내가 한 거 맞는데

 

“아……. 너 지금 진짜 웃겨. 진짜로.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어기적어기적 제게 걸어와 선 승철을 똑바로 마주하며, 정한은 그 피곤과 잠에 찌든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귀엽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눈이 반쯤 풀린 채 정한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고 섰던 승철은 잠시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잘 지어지지도 않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평소 하듯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 밀었다.

 

 

 

“와, 윤정한 웃었네. 웃었다. 이거 화 풀린 거 맞지?

“아, 좀 저리 가, 너 진짜 너무 웃겨

“내가 3일 동안 갠톡 보냈는데 계속 안 읽어줘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 근데 화 풀렸네, 아 신기해. 나 이제 몸 그만 사려도 되는 거 맞지? 그치?

 

 

 

정말로 그 동안 많이 불안해 했었는지, 승철은 정한이 손을 뻗어 어깨를 밀고 얼굴을 잡아 돌리는데도 아랑곳 않고 그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며 화가 풀렸음을 확인 받고자 했다. 잔뜩 웃은 터라 급격하게 땅겨 오는 두 뺨을 양 손으로 감싸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정한은 승철의 어깨를 잡아 저를 등지도록 돌려 놓고서, 어색하게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렇게 대꾸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승철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질 만큼, 그 말투는 이전처럼 새침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 그거 만들어준 거는 고마운데, 나는 너한테 그냥 책임 지라구만 했지 만들라고는 한 적 없다?

“어어, 알았어, 알았어.

“그리구 내가 화 났다고 한 적도 없다, ……뭐.

 

 

 

정한은 그렇게 말꼬리를 얼버무리고 제 머리를 헝클이며 돌아서다가, 여전히 저와 출입문을 등지고 선 승철에게로 다가가 그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근데 사실 나 할 말 있어.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얘기를 하는 게 저도 모르게 어려워서, 정한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가 겨우 말을 꺼내 놓고 승철을 먼저 과방 밖으로 떠밀었다. 복도 끝, 불이 고장 난 자판기 아래로 향하면서 정한은 승철보다 두세 걸음 늦게 걸으며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고 또 빗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 여전히 알 수 없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할 말이 뭔데? 해 봐, 여기 진짜 덥다.

 

 

 

자판기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음료를 고르는 정한의 뒤로, 어쩌면 놀리는 듯한 승철의 말들이 날아왔다. 정한은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등 뒤로 고개를 홱 돌리고서, 나 지금 음료수 고르고 있잖아! 하고 톡 쏘아 붙이고서는, 고심 끝에 캔 커피 하나와 탄산음료 하나를 뽑아 들었다. 차가운 표면에 몽글몽글 맺힌 물방울이 손바닥으로 스미는 것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가, 윤정한은 제 손에 들린 음료수를 승철 쪽으로 모두 내밀며 그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한 채 입을 열었다.

 

 

 

“이거 먹고 싶은 거 골라서 먹어.

“아, 나 주는 거야? 뭐 먹지.

“그리구 나 말 안 끝났어. ……사실 내가 그 때 너무 막, , 너 잡고 짤짤 흔들고 그래서 괜히 그런 거 같아서 이거 주는 거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 안 했음 좋겠어. 그리구, , 나 솔직히 기분 좀 이상해서 잘 모르겠긴 한데, 그래도 너 정도면 나 귀찮게 안 할 것 같아서 말 하는 거거든?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니까, 너 이제 나 옆에 와서 건드려도 되구, 나랑 같이 다녀도 되구……. 암튼 그렇다고.

 

 

“아, 그래서 우리 썸 타자고?

 

 

 

, ! 최승철 진짜 미쳤나 봐! 괜히 말했어!

잘 정리되지도, 듣기 좋게 여과되지도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놓고서 고개를 돌린 정한을 대놓고 놀리는 듯 그렇게 되물은 승철에게, 정한은 캔커피를 든 손을 높이 치켜 들었다가 입술을 앙 다물며 그를 등지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 팔이 높이 올라갔을 때 캔커피를 뺏어 든 승철은 등 뒤에다 대고 잘 먹을게—, 특유의 장난기 어린 말투로 중얼거리며 한 모금을 쭉 들이켰다. 아직 찬 기가 남은 탄산음료를 끌어 올려 조금 붉어진 듯한 제 뺨에 가만가만 대고서, 정한은 분명 날이 더워서 뺨이 뜨끈한 거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두 사람 사이만 봄인 듯 아닌 듯,


스물 세 살 최승철과 윤정한의 청춘(靑春)이 흘러가고 있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