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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소재, 후반부 유혈 묘사 있습니다 //

 






김민규 × 윤정한 × 이석민

 

 

 

성년은폐(成年隱廢) ; 성년을 감추어 깨뜨리다.

 

 

 

 

 

w. (@hyemm_is_yoonr)

 

 

 

 

 

 

 

 

 

 

1.

 

 

 

2016. 인간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금방이라도 늘어질 듯하면서도 끊기지 않는, 팽팽한 대치상태. 낭떠러지를 등진 소년 셋은 무채색의 연구복 차림인 남자 다섯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정한이 손을 뒤로 뻗어 석민의 옷깃을 쥐고 끌어당긴다. 민규는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보다 픽 웃었다. 윤정한, 무서워? 농담조의 물음에 정한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민규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일순 낮게 깔렸다. 지랄하지 마. 정한의 손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긴 석민이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민규가 아래로 떨어뜨린 손을 세게 말아 쥔다. 반쯤 고개를 비틀어 석민을 스치듯 마주하고서 가볍게 웃어 보인 정한이 곧 잡고 있던 옷깃을 놓고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잔뜩 긴장한 상대의 얼굴을 쭉 훑은 그가 차분하게, 그러나 명확한 음성을 뱉었다.

 

 

 

 

 

차라리 기계 연구를 계속 하시지 그러셨어요. 우리보다 멍청하고, 감정도 없고, 심지어 도망치지도 않을 텐데.”

“S1004, 들어가서 얘기하지.”

인간은 바보가 아니에요. 감정도 있고, 그러니까 도망치는 거죠. 이제 인정하시겠어요?”

 

 

 

 

 

그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아오던 세계를 똑같이 살아가는 민간인과, 그 민간인이 소위 일컫는 초능력이라는 것을 가졌다는 이유로, 세계에 복종하도록 키워지는 이능력(異能力). 보통의 민간인은 이능력자의 화려한 겉치장만을 보므로정확히는 정부가 그렇게 선전하므로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거나, 그 이능력자 집단을 동경하고 더 나아가 질투하기도 한다.

 

 

 

 

 

백설화명(白雪花明), 절경의 설원으로.”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공중으로 하얗게 김을 내며 부서졌다. 그 순간정한의 까만 눈동자로부터 흰 빛이 일어, 고리 모양을 그리며 그의 몸을 감쌌다. 질겁하는 연구원들을 향해 정한은 한 쪽 입 꼬리만을 끌어올려 웃었다. 곧 빛의 고리가 강하게 수축하고 이완하여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듯 퍼져 나간다. 보도블럭과 그것을 딛고 선 발 사이의 아주 얇은 틈으로까지 빛이 흘러넘치고 나서야, 세상은 한순간에 하얗게 뒤덮인다. 땅도 하늘도 온통 백색으로 뒤덮여, 이따금씩 큼지막한 눈송이가 내리는그야말로 절경의 설원이 된 것이다. 정한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민규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재밌겠는데? 단정하게 채워져 있던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어 내리던 그의 팔을 왼쪽에 선 석민이 잡아 제 쪽으로 세게 당겼다. 함박눈이 두텁게 쌓여 묵직하기까지 한 언덕 위로 몸이 반쯤 파묻힌 민규가 미간을 좁혔다.

 

 

 

 

 

좀 기다려, 김민규.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 없잖아?”

또 뭔데?”

아직 불안정해. 윤정한이 뒤로 물러나면 그 때 가도 안 늦어.”

 

 

 

 

 

그러나 그 이면은 정반대.

 

 

 

 

 

관철복사(觀徹復事), 예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석민의 두 눈이 일순 형형하게 빛났다. 민규는 걸치고 있던 검은색 교복 마이 위에 앉은 눈을 손으로 툭툭 털었다. 두께가 얇은 탓에 금세 녹은 눈이 스며들어 군데군데 색이 짙어져 있었다. 석민은 민규를 제 쪽으로 좀 더 끌어당기고 언덕 뒤로 몸을 숨긴 채 두 눈만을 아슬하게 내어 반대쪽의 동태를 살폈다. 정한의 주위로 빛의 파장이 한 번 이완할 때마다 연구원들이 밟고 선 눈밭이 높게 솟아올랐다. 석민의 눈동자 위로 푸른빛이 스치고, 기관총을 꺼내 드는 군인의 잔상이 스친다. 인력 낭비네, 고작 우리 셋을 잡겠다고. 그는 입술을 감쳐물고 잘근, 뼈가 울려 소리가 들리도록 이에 힘을 주어 씹었다. 그 옆에 긴 몸을 접은 채 습관처럼 손가락뼈를 꺾던 민규가 몸을 틀어 물어왔다.

 

 

 

 

 

그래서 난 언제 나가면 되는데?”

앞으로 30초 뒤, 지원군이 합류할 거야.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적다고도 할 수 없어. 얼핏 봐도 스무 명은 되는 것 같았으니까.”

, 존나 쓸데없는 짓은 사서 하네.”

지금부터 10초 뒤에 윤정한이랑 자리 바꿔.”

 

 

 

그 다음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잘 하는 거 있잖아?

 

 

 

 

 

보통은 6세에서 13세 사이에 이능력이 발현된 아이들을 교외의 특수행정과 산하 연구기관, 통칭 이능력개발원으로 보내는 것이 최선의 방침. 기관으로 보내진 아이들은 이능력자만을 모아둔 학교에서 자라며, 궁극적으로는 정부의 친위대로 키워진다.

 

 

 

 

 

입 꼬리를 당겨 늘 하던 대로 웃어 보인 석민이 민규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등 뒤에서는 눈이 날리고, 밟히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섞이는 구둣발 소리. , , . 민규의 입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숨에 마지막 숫자가 섞임과 동시에, 눈밭에 파묻혀 버둥대는 연구원들 앞으로 전투 군인 이십 여 명이 죽 늘어서서 옆구리에 낀 기관총을 일제히 장전했다. 귀에 거슬리는 금속 마찰음이 한데 섞여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입술 끝을 깨물고 그 사이로 작게 욕지거리를 뱉은 정한이 제 어깨에 손을 짚은 민규를 돌아보았다.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술 끝이 이질적이어서, 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민규야, ‘그거할 거야?”

달리 할 게 있어?”

아니, 없지.”

네가 나한테 집착하는 유일한 이유잖아, 내 능력. 틀려?”

 

 

 

양화작열(煷火灼熱), 마지막 불꽃놀이를.

 

 

 

 

 

이능력개발원이 하는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최근 10년간 기술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기관은 6세에서 10세 사이의 아이들을 데려와, 실험을 통해 이능력을 심는다. 극한의 실험 과정에서 성공한 아이들은 이능력자 가운데에서도 상급으로 칭송받고,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한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줘 그를 등 뒤로 밀쳐낸 민규가 평소보다 반 톤 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뱉었다. 곧 눈동자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붉은 빛이 민규의 몸을 감싸고, 한 걸음 내딛자 빛으로부터 불길이 치솟아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화염의 구체가 떠올랐다. ‘사격 준비!’, ‘사살하라!’ 따위의 거친 외침이 민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한쪽 입 꼬리만을 당겨 올린 그가 오른손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리고 엄지와 검지를 맞부딪치자, 둥글게 뭉쳐 있던 화염체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공중으로 치솟았다. 빛의 파장에 둘러싸인 민규가 선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작게 소리 내어 키득이며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깨어진 화염체 파편은 연구원들이 파묻힌 설원과 일렬로 늘어선 전투 군인 쪽으로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강한 불꽃이 설원에 처박혀 눈발이 튀고 날렸다. 민규의 등 뒤에 서 있던 정한이 두 걸음을 내딛어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다정하고 사근한 음성이 전투의 소음에 섞여 들었다.

 

 

 

 

 

오늘도 멋있네, 불꽃놀이’.”

안 멋있으면 아마 꼰대들이 열 꽤나 받을 걸.”

그러겠지, 확실히 너한테는 애정이 꽤 있는 것 같던데?”

지랄, 애정보다는 실험욕이 아닐까.”

 

 

 

 

 

죽은 아이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알 수 없다.

 

 

 

 

 

날카로운 민규의 대답에 정한이 소리 내어 웃는다. 잔뜩 접혔던 두 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정한의 눈동자는 다시금 눈부시게 빛났다. 민규는 제 붉은 빛을 삼키는 정한의 빛 파장에서 시선을 떼어 멀리 상대 쪽을 응시했다. 선혈이 스민 눈발이 다시 하늘 위로 튀어올라 마치 분홍빛 눈이 내리는 것도 같았다. 사람 죽이는 주제에 예쁘긴 존나게 예뻐요. 씹어뱉듯 읊조린 혼잣말을 들었는지 정한이 꾹 다문 입술 새로 웃음을 흘렸다. 머리 위로 쳐든 그의 오른손 위로 민규의 화염체보다도 더 큰 빛의 구체가 형형하게 설원 위를 비추고 있었다.

 

 

 

 

 

마지막인데 좀 더 예쁜 걸 보고 죽는 게 훨씬 낫지 않아?”

……싸이코냐.”

그럴 리가. 그저 내 따뜻한 마음이고 배려의 일종인 걸?”

말이나 못 하면.”

백설화명(白雪花明), 설원 위의 빛으로 수렴하라.”

 

 

 

 

 

기관은 이런 식으로 생명을 다루는 것에 죄책감이 없기 때문에, 이능력이 늦게 발현되어 폭주한 민간인을 사살하는 권한을 정부로부터 빼앗았다. 그리하여 아주 드물게 중고등학교 등지에 그러한 민간인이 출현할 경우, 그가 얼마만큼의 피해를 줬는지에 상관없이 그를 사살한다. 또는 기관의 연구 대상으로서, 처참하게 파헤쳐진다.

 

 

 

 

 

감정이 지워진 얼굴을 하고서 헛웃음을 뱉는 민규를 따라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정한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곧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구체가 하늘 위로 빠르게 솟았다가, 점점 더 붉게 물드는 설원 위로 내리꽂힌다. 튀어 오른 눈 결정과 빛의 파편이 부딪쳐 강한 광선으로 바뀌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광선은 세 소년이 마주하고 있던 사 층짜리 건물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창문이 깨지고 벽돌이 으깨지는 소음이 바닥마저 진동시킨다. 언덕 뒤로 몸을 피하고 있던 석민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고, 가만히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보고 선 민규는 제 허리에 팔을 감아오는 정한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정한은 제 쪽으로 틀어진 민규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접어 웃었다. 굉음이 울리며 설원이 조각조각 깨어지기 시작했고, 발밑으로 도톰하게 쌓여 있던 눈이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아주 희미하게, 건물이 부서지는 틈으로 찢어지는 비명이 섞이기 시작한 것도 같았다.

 

 

 

 

 

가자.”

 

 

 

 

 

가운데 층이 뚝 잘려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을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하던 석민이 먼저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얇은 운동화 밑창에 닿는 보도블럭의 질감이 낯설었다. 정한은 민규에게 반쯤 기댄 채 몇 걸음 걷는 듯 하다가, 이내 손을 뻗어 석민의 교복 마이 자락을 꾹 쥐었다. 운동화 뒤축을 질질 끄는 소리가 민규의 걸음 뒤로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정부를 거스르려는 이유이다.

 

 

 

 

 

, 일련의 포격음이 터진다. 터질 것이었다. 석민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한 해의 끝자락이자, 명백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2.

 

 

 

성탄을 맞은 기숙사는 어수선하게 들떠 있었다. 사감이며 감시 전담 연구원들이 거의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머리가 좀 컸다 싶은 애들은 저마다 조를 짜서 교외로 놀러 나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개중에는 새로 출시된 FPS 게임을 할 생각에 들뜬 중학생도 있었고, 소위 말하는 데이트를 위해 남자친구의 손을 잡아끌고 먼저 걸음을 옮긴 여자애도 있었다. 사실 이것은 매 해 성탄절이 돌아올 때마다 일어나는 연례행사와도 같은 일탈이었다. 다만 올해는

 

 

 

 

 

좀 더 계획적으로 바뀐 것 같지?”

……그래?”

뒤 봐 주는 애도 있고, CCTV 꺼 주는 애도 생겼고. 다들 머리를 쓰기 시작한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어차피 저렇게 나가는 애들 중에 제대로 돌아오는 거 절반도 안 돼. 우리가 신경 쓸 일 아냐.”

 

 

 

 

 

기숙사 방에 작게 난 쪽창을 방충망까지 열어젖히고, 그 아래로 빠르게 걸음을 놀리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정한은 평가하듯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명백하게 긍정을 요구하는 물음 뒤로 민규는 던지듯 대꾸하며 제 침대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낡은 매트리스가 푹 꺼지며 삐그덕 듣기 싫은 소음이 울린다.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며 입술을 삐죽이는 정한에게, 석민은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솔직히 김민규 말도 맞잖아, 그게 팩트니까. 다정하게 방 안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별안간 꼴사나워서 민규는 입술 끝을 씹으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뒤척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질 만큼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창 밖에서 여과되지 않은 총성과 어린 아이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그 사이를 강하게 찢고 들어왔다. 정한은 금세 감정이 싹 지워진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망설임 없이 창문을 닫았다. 민규야, 그러니까 네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야. 창문에 등을 기대고 돌아 서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가 조금 들뜨게까지 느껴지는,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탈출을 하려면, 좀 더 체계적으로 해야지. 어차피 우리도 오늘 간 좀 보다가 괜찮다 싶으면 나가려고 했던 거잖아?”

…….”

우리야 저 애들보다 등급이 높다 치지만, 그래도 무작정 나갈 수 있다고 믿었으면 아마 지금쯤,”

다 죽었겠지. 한 명 쯤은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정한과 석민이 서 있는 창가로 걸음을 옮긴 민규가 뿌옇게 흐려져 반투명하기까지 한 창문 너머를 곁눈질하며 그렇게 대꾸했다. 뒷말을 채인 정한이 눈가를 가볍게 찡그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민규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건조해진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는 석민이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고개를 내저었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아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식어 갔고, 그 아래 시멘트 바닥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얇은 벽을 타고 세 사람보다 좀 더 어린 비명이 흘러들었다. 입 안쪽 여린 살을 가볍게 씹던 석민이 퍽 소란스러운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자동 소총 같은 걸 들여왔다고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았는데, 저런 데 쓰일 줄은 몰랐네.”

그거라면 소문으로 났었지 않아? 평소에는 CCTV와 같은 용도로 쓰이다가 여차하면 사람을 쏴 버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근데 단순히 이탈자가 발생한다고 해서 총을 쏘는 건 아닐 거야,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정한이 너도 봐서 알겠지만, 저 애들 중에는 탈출한 무리도 있고 그러지 못한 무리도 있어. 죽은 애들 공통점이 뭐인 것 같아?”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녹이 슨 창틀을 짚고 곁눈질로 창밖 어딘가를 응시하며, 석민은 민규에게 반쯤 가려진 정한에게 물음을 던졌다. 정한은 제 시야를 절반은 가리고 선 민규 쪽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굳게 닫아 뒀던 창문을 반쯤 열고 방충망 틈으로 1층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아플 만큼 선명한 적색의 시멘트 바닥, 그리고 선혈로 물드는 회색 교복을 걸친 대여섯 명의 아이들을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하던 정한이 느리게 미간을 좁힌다. 설마, 낮게 씹어뱉은 단어에 민규가 낮게 웃음을 뱉었다. 그렇게 눈썰미가 없어서야 탈출은 하겠냐? 반쯤 비아냥대는 투에 정한의 어금니가 까득, 소리를 내며 갈렸다.

 

 

 

 

 

지금 죽은 저 애들, 모두 교복 색이 회색이야.”

그 정도는 나도 봐서 알거든?”

그러니까 등급이 높다는 거잖아? 낮아 봤자 B 정도일 테고, 보통은 A급이겠지.”

……, 탈출했을 때 더 위험할 것 같은 애들만 죽인다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딸린 CCTV가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으니까 구별할 수 있는 건 기껏 해봤자 교복 색 정도일 테고. 그럼 우리가 저 문으로 빠져나간다 치면

 

 

 

 

 

즉사겠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냉정한 민규의 마지막 말이 차게 식은 내부 공기와 섞여 보이지 않는 곳으로 흩어졌다. 석민은 비틀린 입술 끝을 감쳐물고 정한이 열었던 창문을 굳게 닫았다. 다시금 정적이 내부로 스며들어, 서서히 세 사람의 목을 죄어 온다. 윤정한은, 그런 정적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민규의 말에 오류는 없었고, 그것이 사실이며, 곧 그 사실이 제 앞에 놓인 상황이다. 결말이 단 하나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어쨌든 정한은 죽음 앞에서 망설이게 되는 저 자신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삶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저 스스로 민규를 찾아온 그 날 부로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얇은 셔츠가 감긴 마른 몸이 느리게 움직여 민규와 석민을 마주하고, 일부러 물들인 듯 붉은 입술이 어울리지 않는 밝은 투의 음성을 뱉어낸다. 감정이 사라진 것만 같던 입 꼬리는 어느 사이에 예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근데 뭐, 살아 나갈 수 있었으면 진작에 나갔어야지. 지금 이 나이로 살아서 여길 걸어나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불가능한 거 아냐?”

…….”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엿 먹이자는 게 우리 목표잖아. 맞지?”

, 네 말이 맞아.”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 없네. 저 애들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죽지 않으려면, 좀 더 철저하게 계획해야지.”

 

 

 

 

 

생긋 미소 짓는 얼굴, 웃는 상으로 반쯤 접힌 두 눈. 그런 표정을 하고도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뱉는 정한을 민규는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제 날카로운 옆얼굴이 담긴 것도 같은 그 새까만 눈동자에서, 민규는 문득 살기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입술을 잘근 씹었다. 윤정한의 본질인 것 같으면서도 꾸며낸 것만 같은 낯선 기운은 정한이 민규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부터였을까. 정한에게 긍정하는 석민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도 구하려고했던 걸까. 이층침대 울타리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던 검은색 마이를 꿰어 입는 정한의 뒤통수를 응시하는 민규의 입술이 아프게 깨물렸다. 곧 단정하게 마이 단추를 채운 정한이 반 바퀴 돌아 민규의 앞에 선다. 아까보다도 더 밝은 미소가 그의 얼굴을 잔뜩 뒤덮고 있었다.

 

 

 

 

 

민규야,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해야 될 일은 연습밖에 없어.”

……알아.”

가자, 연습하러.”

 

 

가자, 올해의 끝자락에서 나랑 같이 죽으러.

 

 

 

 

민규는 어디선가 날카로운 이명과 더불어 뒤틀린 감정이 담긴 환청을 들은 것만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주머니에 꽂았던 제 손을 먼저 끌어당긴 정한이 먼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리하지 마, 민규의 뒤통수에 대고 충고하듯 말을 던져 뱉은 석민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규는 이제 그 시선 쯤 못 본 척 지나칠 수 있었다.

 

고쳐 잡은 정한의 손은 언제나처럼 차다. 그러나 김민규는이 손을 놓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

 

 

 

 

 

 

 

17세의 가을은 예년보다 유난히 더 추웠다. 다 낡은 방충망이 고작인 한 겹의 창문을 매서운 바람이 쥐고 흔들었다. 어느 방에서는 바람 때문에 창문이 깨져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소문마저 돌기 시작했다. 그런 탓으로 사감 측에서 창가로 접근하지 말라는 공지까지 내려졌으나

김민규는 그 날도 어김없이 낡은 걸상에 걸터앉아 창문 너머 흔들리는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로 내리깐 눈동자는 상념이 이리저리 뒤섞여 탁한 회색이다. 무채색으로 물든 그 옆얼굴을 마주하는 석민은 자꾸만 드는 묘한 괴리감에 입술을 자주 깨물었다. 세찬 바람이 창문을 뒤흔드는 소음 위로 민규의 목소리가 꽤 묵직하게 얹혔다. 이석민, 저거 보여? 바깥을 가리키는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자리에는 차체도 창문도 모두 검은색으로 덮인 승합차 한 대가 막 주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저 차, 지난주에도 저기다가 차를 댔던 것 같은데. 뭐에 쓰는 거지?”

꼰대들 타고 다니는 차 아냐? 아니면 일반 연구원 전용…… ?”

 

 

 

 

 

어느새 민규 가까이 몸을 붙이고 선 석민이 의뭉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뚝 끊기듯 시동이 꺼진 승합차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물음에 단순하게 대꾸하던 민규는 차 문이 열리기 무섭게 바깥으로 쏟아져 내리는 흰 빛에 눈을 크게 뜨며 하던 말을 멈추었다. 놀란 것은 석민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급하게 창문을 열어젖히고 방충망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거의 차에서 집어 던져진 사람은 그리 나이가 많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우선은 그 성별조차 파악하기 힘들 만큼 눈부신 빛이 그의 몸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비척이며 몸을 일으키고 선 그를 둘러 싼 고리 모양의 빛 파장이 제멋대로 이완하고 수축하기를 반복하더니, 곧 연구원 몇이 남아 있던 승합차 위로 묵직한 함박눈이 쏟아졌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승합차는 지붕이 반쯤 내려앉았고, 빛이 세상을 집어삼키듯 한 번 퍼질 때마다 연구원들이 밟고 선 자리에 눈이 쌓인 언덕이 솟아올랐다. 낯선 사람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괴로워하더니, 곧 무릎이 팍 꺾이며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다.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이 일순 자취를 감추면서 그가 만들어 냈던 눈 또한 빛 조각으로 부서져 사라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연구원 하나가 비척비척 걸어와 그에게 무언가를 채우고, 그대로 두 사람의 시야를 벗어났다. 그들은, 그제야 드물게 보이던 검은 승합차가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알 것만 같았다.

 

 

 

 

 

……, 이석민. 우리 지금 좀 봐서는 안 될 걸 본 것 같은데,”

저 사람, 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자인가 봐.”

근데 저렇게 폭주했으니까 아마 꼰대들이 가만 안 둘 걸?”

아니, 폭주해서가 아닐 거야.”

그럼?”

원래부터 죽을 운명이었어, 저 사람.”

 

 

 

 

 

입술을 세게 깨문 채 잇새로 꾹꾹 눌러 뱉은 말에 민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개소리야. 죽음에 잔뜩 민감해진 그가 억누르지 못한 감정을 마구 뒤섞인 음성을 씹어 뱉었다. 석민은 낯선 이가 사라진 자취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겨우 민규의 옆얼굴을 마주하며 냉정하게 대꾸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나이 대에 기관 쪽으로 오는 경우는 한 가지 경우, 그러니까 민간인 사이에서 능력이 발현된 것밖에 없어. 거기다가 그 사람은 여기서도 폭주했고. 즉 통제력이 전혀 없다는 건데. 석민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추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민규의 건조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서 부서졌다.

 

 

 

 

 

나도 알아.”

……,”

근데 마침 그 사람이 우리가 처음 들어올 때 입었던 흰 교복이 아니라,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지.

사살 대상이다. 그러니까 난 지금 그 사람 구하러 갈 거야. 넌 어떡할래?”

……? 너 미쳤어? 그러다가,”

구할 수 있어.”

 

 

 

 

 

확실한 미래를 무시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다시 안 해. 그러니까 넌 어떻게 할래?

 

 

민규는 가끔, 무서울 정도로 단언하는 제 친구가 낯설 때가 있었다. 바다와 닮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던 그는 대답 없이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뒀던 마이를 걸쳤다. 석민의 입 꼬리가 가볍게 당겨 올라갔다. 그가 보는 것은 언제나 가장 정확한 미래의 어느 시점. 그렇기 때문에 민규는 믿어야만 했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석민은 입술을 꾹 닫은 채 마이 단추를 채우는 제 친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이라기보다는눈에 보인 미래의 잔상이라고 하는 게 맞을 지도. 그의 눈동자에서부터 시작된 푸른색의 빛이 일렁이듯 퍼져 나와 그의 몸을 감싸고 흘렀다. 몸을 반쯤 틀어 석민을 마주한 민규는 그 시린 빛에 눈가를 찌푸렸다. 얘나 쟤나 존나게 눈부시네. 농담조로 뱉은 투에 석민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곧 그를 감쌌던 빛이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자취를 감춘다. 걸상 위로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킨 석민이 민규보다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가자. 단단한 음성이 가라앉은 공기 위로 하얗게 부서졌다.

 

 

 

 

 

석민이 본 미래를 밟아 간 곳은 지하 1층이었다. 필라멘트가 곧 끊길 듯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알전구가 드문드문 걸려 있고, 어디선가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다가 끊기는 것을 반복하는, 전체적으로 스산한 층이었다. 민규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기숙사 동 지하에 격리 시설 비슷한 게 있다는 건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진짜였을 줄이야. 작게 씹어뱉으며 아래로 떨어뜨린 주먹을 꾹 쥐자 석민이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김민규, 무섭냐? 그 말투가 시비가 아니라는 것쯤은 간단하게 알 수 있어서, 민규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곧 앞으로 뻗은 왼손 끝에서 조그마한 불길이 일어 시야를 밝게 비추었다.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 본 석민이 정면을 보고서 입을 열었다.

 

 

 

 

 

내 미래가 정확하다면,”

정확하니까 그런 사족 달 시간에 본론부터 말하는 걸로.”

, 아무튼 지금 여기에는 CCTV도 담당 연구원도 없어. 물론 배치된 병력도 없고. 격리라기보다는 방치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설 같아.”

꼰대들도 귀찮은가 보지. 위에서 쨍알대는 애들 관리하기도 바쁜데.”

그리고 아까 끌려간 그 사람은 여기서부터 열 번째, 왼쪽 방에 있어. 아마 실신한 상태일 거야. 그대로 두면 발현된 능력이 다시 폭주해서 아까보다 더 처참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구한 뒤에는 어떻게 할 건데? 그것도 다 봐 뒀어?”

본 건 아니지만, C등급은 워낙 사람도 많고 그만큼 많이 죽어 나가니까, 저 애 한 명쯤 끼워 둬도 괜찮지 않을까? 데이터 없는 애들도 널렸잖아.”

그래, ……. 꼰대들이 C등급 애들 하나하나 봐줄 만큼 한가한 놈들은 아니지.”

 

 

 

 

 

꼰대들이란 단어를 씹어뱉는 민규의 손에서 피어났던 불길이 크게 일렁이자 그는 입술을 비틀어 깨물었다. 반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곧 석민이 일러준 열 번째 왼쪽 방 앞에 별 어려움 없이 섰다. 문에 작게 난 창문 너머로 앳된 얼굴을 한 남자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그제야 남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민규는 망설임 없이 제 손에 피워 올렸던 불길을 구체 형태로 뭉쳐 문고리 쪽으로 집어 던졌다. 낡은 스테인리스 재질의 문고리가 압축된 화염에 순식간에 녹아 문 아래로 흘러 내렸다. 석민이 발을 들어 문 가운데를 세게 차자 굳게 잠겼던 것은 손쉽게 안쪽으로 밀렸다. 숨 막히는 냉기가 방 안에 고여 있다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두 사람을 감쌌다. 불길이 사라진 왼손이 빠르게 식는다. 민규는 입술을 깨물고 맨바닥에 웅크린 남자 앞에 발을 딛고 섰다. 석민 또한 남자의 머리맡에서 그를 내려다보다가, 곧 자세를 낮춰 창백하게 질린 뺨 위로 제 손을 가져다댔다. 석민의 눈동자에서부터 흘러 방 전체를 감싸듯 퍼져나가는 청색의 빛은 아까와 달리 다정하고 포근했다.

 

 

 

 

 

관철복사(觀徹復事), 치유.”

 

 

 

 

 

석민의 입에서 뱉어진 음성이 옅은 푸른색을 띠며 방을 가득 채운 빛 속으로 녹아들고, 곧 그의 손에 닿았던 남자의 뺨이 극단적인 백색에서 흰 기가 섞인 살굿빛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석민은 손을 거두고 잔기침을 하는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곧 그가 눈을 뜨자 어느 사이에 푸른 기가 싹 사라진 눈동자로 그를 마주했다. 민규는 반걸음 쯤 물러선 자리에서 남자가 눈을 뜨는 것을 바라보고만 서 있다가, 썩 유쾌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오른손 검지 위로 작은 불씨를 피워 올렸다. 텅 비어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가 닿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민규는 남자의 발목을 죈 낡은 금속 위로 불씨를 옮겼다. 반쯤 녹이 슬었던 족쇄는 자그마한 불씨가 스치고 지나가자 빠른 속도로 녹아 남자의 발목에서 뚝 떨어졌다. 뻐근한 발목을 몇 번 돌려 보던 남자는 곧 무릎을 모아 웅크렸다가, 석민이 내민 손을 어색하게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낯선 옷이 군데군데 찢긴 게 의아한 듯 입술을 깨물며 눈동자를 굴리는 그에게, 반쯤 등을 돌리고 선 민규가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이능력개발원에 온 걸 환영해. 환영할 곳은 못 되지만, 어쨌든 당신은 사살 위기에서 살아남은 거야. 아마 폭주 상태의 기억은 전혀 없을 테고. 그럼 그냥 궁금해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살아가면 돼. 지금 당신이 할 일은 그 다친 다리를 어떻게든 움직여서 3층의 빈 방으로 향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흰색 교복을 찾아 입는 것. 나머지는 같은 옷을 입은 애들이 가르쳐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몇 초 정도 남았지?”

전속력으로 달리면 1분 정도는 벌 수 있을 걸?”

그렇대.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남아.”

 

 

 

 

 

그 눈, 다시 보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민규는 뒷말을 꾹 눌러 삼키고 석민의 손을 쥔 채 냉기에 몸을 덜덜 떠는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어색하게 몇 발을 내딛은 그는, 곧 문 바로 앞에 멈춰 서서 입술을 잘근 씹다가 석민과 민규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망설이는 듯 달싹이던 입술이 열리고, 하얀 숨과 함께 작은 음성이 그의 입술 끝에서 부서졌다.

 

 

 

 

 

저기, ……윤정한이야.”

 

 

 

 

 

던지듯이 이름을 뱉고서, 남자정한은 금방이라도 꺾일 것만 같은 다리로 달려 나갔다. 그가 남긴 발소리가 복도 위로 빠르게 퍼지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석민은 오래 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내 답답하게 채워져 있던 마이 단추를 두어 개쯤 풀었다. 정적이 흐르는 방 안으로 초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무렵, 두 층쯤 위에서부터 귀에 거슬리는 포격음이 흘러들었다. 석민은 입술을 비틀었다. 바지 주머니 안으로 양 손을 꽂은 민규가 그보다 두 걸음 쯤 앞에 서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석민,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어떻게 신경이 안 써지냐?”

여기서 살아가는 건 쟤가 이겨낼 일이고, 더 이상 우리가 도와줄 일은 없어. 운이 좋았다면 지금쯤 3층에 도착했을 거야. 언젠가는, 볼 수도 있겠지.”

…….”

가자.”

 

 

 

 

 

그리고 그 날 이후, 윤정한이란 남자는 더 이상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다.

 

 

 

 

 

 

 

 

 

 

3.

 

 

 

그로부터 6개월 뒤유난히 춥던 그 해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윤정한이 민규와 석민의 앞에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면 정한이 두 사람을 찾아 온 것이었다. 최근 6개월 간 훈련 성과가 세 배 이상 수직상승한 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 참이었다. 설마, 그게 진짜일 줄이야. 석민은 현관에 선 정한을 마주하고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민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물론 소문이 진짜일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6개월 전 김민규는, 위층에서 포격음이 들린 순간부터 정한이 살아남았을 가능성을 어느 정도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저와 같은 검은색 교복을 걸친 정한은 처음 봤을 때보다 머리칼이 단발 수준으로 자라 있었고, ()를 담고 있던 눈동자는 형광등 불빛을 받아 예쁘게 빛났다.

 

그리고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해사한 미소. 민규는 말려 올라간 입 꼬리를 마주하며 찰나 동안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의식적으로 공기를 들이마셔야만 했다.

 

 

 

 

 

안녕. ……, 잘 지냈어? 나 기억하지, 그때 그 윤정한.”

 

 

 

 

 

현관 문지방을 밟고 선 채 대답을 기다리던 정한은 석민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두 걸음 앞으로 옮겨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정한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가 방 안을 훑고 지나간다. 민규는 등 뒤로 숨긴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주먹을 쥐었다. 곧 그 시선이 석민과 마주치자, 정한은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묘한 냉기를 띠는 까만 눈동자는 석민의 마이 왼쪽에 달린 명찰 위로 내려앉았다.

 

 

 

 

 

“S0218……. 하여튼 정이 없어, 여기 사람들은.”

…….”

나 네 이름 알아. 이석민, 맞지? 진급할 때 담당 연구원한테 물었더니 금방 가르쳐 주더라고. 어차피 S등급은 우리 셋밖에 없다나. 그때 나 살려줘서 고마웠어.”

, . , 그럴 때 아니면 언제 쓰겠어, 전투용도 아닌 능력.”

그리고 옆에 너는 김민규. 화염 능력자라고 들었는데,”

 

 

 

나 사실 너 찾아온 거야, 민규야.

 

 

 

 

 

정한의 두 눈이 어색하게 웃는 석민을 스치고 지나가 민규를 올곧게 마주했다. 여전히 비어있는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 위로 민규의 잔상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상대의 눈에 비친 저를 마주하면서 입술 끝을 감쳐문다. 웃음기가 담겨 예쁘게 휜 눈꼬리가 매력적인 만큼 이질적이었다. 그 불편한 느낌은, 윤정한의 시선이 바른 만큼 잔뜩 뒤틀린 감정만이 눈 안에 남아있기 때문인 걸까. 민규는 문득 과거의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음성을 떠올렸다. 무엇이든 얻게 되면, 또 무엇이든 잃게 되는 법이지. 사람으로서 얻지 말아야 할 것을 얻게 된다면, 사람으로서 반드시 가져야할 무언가를 결국 잃게 될 거란다. 그래도 하겠니? 귓가에 스치는 음성을 애써 무시한 민규의 입가에서 내뱉은 숨이 하얗게 부서진다. 대체, 저 윤정한은

정의(正義)가 통하지 않는 이 세계의 꼭대기에 서기 위해서, 뭘 얼마나 버린 것일까. 민규는 제게로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이는 정한의 어깨를 차마 밀어낼 수 없어서, 손바닥 위로 투박하게 자란 손톱을 몇 번이고 박아 넣을 뿐이었다.

 

 

 

 

 

 

민규야, 내 능력과 네 능력을 합치면 아무도 이길 수 없대.”

…….”

나랑, 전부 다 이기고 나서, 같이 죽자.”

 

 

 

 

 

웃는 낯으로 잘도 그런 무서운 소리를 뱉는 정한을, 민규는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따라서 처음 한 순간에는 그를 동정했으나, 그의 웃는 얼굴을 마주했을 때 민규는 동정하는 것을 포기했다. 감정을 흡수당한 것 마냥, 그의 입술 새로 공허한 웃음이 샜다. 그것이 석민에게는 조소(嘲笑) 쯤으로 비쳤을까. 민규는 왠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를 설명할 길은 없었지만.

 

 

 

 

 

정한이 석민과 민규를 찾아온 그 날 밤은 여느 밤처럼 왁자지껄하지도, 금세 고요한 숨소리로 채워지지도 않았다. 긴장감이 쏟아져 흐르는 적막이 방 안 가득 고여 있을 뿐이었다. 민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뒤척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한참동안 입을 닫고 있던 터라 낮게 가라앉은 석민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았다.

 

 

 

 

 

……김민규, 넌 어떡할래?”

뭐를.”

윤정한을 우리 계획에 끌어들일래, 아님 거절할래?”

…….”

난 후자 쪽이 좀 더,”

윤정한 데려갈 거야.”

 

 

 

 

 

차분하게 흘러나오던 음성을 뚝 끊은 민규가 허공에 대고 꽂아 넣듯 말을 끝맺었다. 석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민규가 누워 있는 침대 쪽을 돌아다본다. 여전히 그는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였다. 석민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민규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했던 말을 거둬들이지도 않고서 석민의 입이 열릴 때까지 가만히 흰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김민규, 그의 목소리로 뱉어지는 제 이름이 퍽 낯설 만큼 낮아서, 민규는 꾹 다문 입술 새로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너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

윤정한이랑 너, 상극이야. 넌 결국 걔 파장 못 이겨.”

알아.”

죽을 수도 있어.”

나도 알아. 어차피 인간 이하로 살다가 죽는 거, 운명일지도 모르는 사람하고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잖아?”

 

 

 

 

 

농담조로 뱉고 키득 웃는 목소리가 어딘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음을 석민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민규는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여 시야를 막는다. 까맣게 죽은 그 위로 소리의 잔상이 스쳐 곧 소음을 만들어낸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윤정한의 능력은 실제로도 강력하고, 그것을 품고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강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김민규의 능력은 충분히 강하지만, 그가 원래부터 품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능력이 이식된 민규의 몸은, 그의 말대로 인간 이하로 죽어가고 있다. 민규는 거기까지 자각하고 있었다. 석민의 선택도 이해가 갔다. 저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인 동시에, 정한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겠지. 어쩌면 이석민은……, 미래를 본 그때부터 정한이 살길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지난 6개월간 윤정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어둡게 내려앉은 시야 위로 끊임없이 상념이 밀려든다. 민규는 낡은 침대 시트를 세게 그러쥐었다.

 

 

빨려 들어가듯이 잠에 들기 직전 마주한 정한의 얼굴을, 민규는 피하지 못했다. 앞으로 영원히 그를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될 운명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제 눈앞에 별안간 그런 식의 문장이 떠오르기 무섭게, 민규는 끝없이 잠식해가던 몸을 일으키고 제 발밑의 땅을 디뎠다.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는 순간 저를 빨아들이는 공간 틈으로 흰 빛이 비치고, 조각나 사라지는 어둠의 끝에

 

 

윤정한이 있었다.

 

 

 

 

 

민규야, 괜찮아?”

……뭔데.”

그냥 누워있는 게 좋을 걸.”

 

 

 

 

 

회백색의 낡은 형광등 불빛 아래, 민규는 찬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가 상복부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입술을 씹으며 등을 대고 누웠다. 제 손을 꽉 쥔 정한은 표정이 잔뜩 굳은 채 입술 끝을 자꾸만 감쳐물었고, 머리맡에서 석민이 다가와 자세를 낮춰 앉았다. 눈 감는 편이 좋을 걸? 장난스러운 투였으나 꽤 진지한 눈빛이 닿자 민규는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 다시금 까맣게 차단되는 시야 위로 따뜻한 빛이 내려앉는다. 곧 흑백의 기억이 조각조각 꺼내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한이 이끄는 대로 훈련장에 도착했던 것 같고, 서로의 파장이 무너지지 않게 합을 맞췄던 것 같고, 그러다가 윤정한의 파장이……, 저를 베고 지나간 빛은 붉은색이었던가? 미간을 찌푸리는 민규의 귓가로 석민의 나지막한 음성이 닿았다.

 

 

 

 

 

관철복사(觀徹復事), 상실자에게 치유의 숨결을.”

 

 

 

 

 

온기를 지닌 빛이 몇 번이나 민규의 몸을 감싸고 흘러내렸다. 정한은 가만히 무릎을 모으고 앉은 채 그 푸른빛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바싹 마른 목 안쪽 어딘가에 숨결이 불어오는 것 같더니, 곧 쏟아져 흐르던 따스함은 공기 중으로 부서져 자취를 감추었다. 민규는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회백색의 형광등 불빛이 눈부시고, 정한의 까만 눈동자가 아래로 닿아오고, 동그랗게 깎여 있던 손톱이 잔뜩 물어뜯어 흉해져 있었으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석민은 침대에 기대어 천천히 숨을 골랐다. 민규는 잔기침을 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전체적으로 뻐근한 감이 있었지만 그런 대로 견딜 만한 것 같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석민의 음성이 귓가에 와 부서졌다.

 

 

 

 

 

기억은 났어? 아마 다 잊었을 거라고 정한이가 그러던데.”

, 대충은.”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얼마 안 남았

나도 알아. 내 몸은 내가 챙기니까, 너도 나 같은 데다 괜한 체력 쏟지 말고 네 몸이나 챙겨, 이석민.”

 

 

 

 

 

나 잔다, 민규는 툭 던지듯 덧붙이고 비척비척 제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어 썼다. 벽을 보고 돌아누운 뒤통수를 가만히 응시하던 석민이 다문 입술 새로 헛웃음을 흘렸다. 꼭 고마우면서 저런다, 츤데레 새끼. 석민은 침대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현관문 바로 옆에 달린 스위치 가까이 다가섰다. 끌어 모은 무릎 위로 턱을 괴고서 의미 없이 창밖을 내다보던 정한은 안 자? 묻는 석민의 말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밟았다. 침대에 누워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당기자 스위치를 눌러 불을 끈 석민이 제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은 것처럼, 방 안에도 어둠이 내려앉아 희미하게 새어든 달빛을 서서히 잡아먹었다. 민규는 봤을까, 창밖이 이렇게나 어두워졌다는 걸. 눈가를 찌푸린 정한이 석민의 침대가 놓인 쪽으로 돌아누웠다. 정한아, 피곤할 텐데 얼른 자.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자야지……. 잠이 안 와서.”

그래, 오늘은 좀 놀랐겠지만

나도 알아, 민규가 왜 그랬는지. 너 없었으면 아마 민규죽었을 거야.”

정한아, 나는 네가 살았으면 해.”

나는……, 민규가 살았으면 해.”

 

 

 

 

 

하지만 민규만큼, 내 부탁을 들어줄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정한은 뒷말을 억지로 삼키며 눈을 질끈 감고 등을 돌려 누웠다. 아주 희미하게, 누군가의 입술 끝을 타고 쓴웃음이 샌 것 같았다. 정한은 석민에게 고마워할 수도, 미안해할 수도 없었다. 민규에게는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고, 그가 놔야만 했던 것들이 있다. 윤정한은 그 모든 것을 갖고 싶었고, 가져야만 했다. 그래서 김민규를죽음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살기를 바라면서도. 아마 석민도 같은 마음이 아닐까, 깊은 어둠 속으로 잠식하는 정한의 마지막 의식 끝에 그런 추측이 걸렸다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엇갈리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다 한데 엉켜버린 채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는 밤이었다.

 

 

 

 

 

 

 

 

 

 

4.

 

 

 

명백한 한 해의 끝자락이다.

 

 

창밖으로 시리도록 파아란 하늘에 눈부신 해가 타오르듯 발광하는, 그야말로 아주 맑은 날씨였다. 마른 몸 위로 주섬주섬 교복을 걸친 정한은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시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눈을 굳게 감은 채 적막과도 비슷한 고요 가운데에 앉은 석민이 있었고, 까만 눈동자가 닿은 종착지에는 퍽 낯설어진 페트병에서 막 입을 떼는 민규가 있었다. 마실래? 민규가 별안간 다정한 투로 물어 오며 탄산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액체가 담긴 녹색 페트병을 내민다. 정한은 그것을 받아들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나 이거 마시면 너랑 간접키스 하는 거네? 민규는 늘 그래왔듯이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곧 석민이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떠 올린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희미하게 푸른빛이 섞여 있었다. 정한은 민규가 건넨 사이다 병을 입술 끝에 걸친 채 고개를 뒤로 젖혀 안에 담긴 액체를 들이키다가, 문득 바다와 닮은 그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바다보다는……, 오늘 한정으로 우주가 더 나으려나. 이제 먼저 고개를 돌리는 이는 정한이었다. 굳은 움직임으로 교복 마이 단추를 채우는 민규의 귓가로, 방 안을 가득 채운 낯선 비장감 위로 석민의 단단한 음성이 얹혔다.

 

 

 

 

 

우리가 밟아야 할 곳은 딱 두 군데야. 우선은 기숙사 동 1, 동편 복도 끝에 위치한 제어실. 거기에 있는 제어장치의 잠금을 풀면 이쪽으로 전력이 다량 이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아마 연구동 쪽은 적어도 정전일 거야. 그 때,”

연구동으로 가서, 무능력한 연구원 나부랭이를 좀 상대해 주다가 건물을 폭파하고 도망친다. 맞지?”

, 맞아. 우리가 연구동을 폭파하는 데까지는 걸리는 시간이 있으니까, 다른 아이들은 아마 그때 도망칠 거야.”

그 애들이 살고 죽고까지는 신경 못 써, 이석민.”

나도 알아. 그냥, 어차피 관여할 수 없는 거 좀 더 좋은 쪽으로 기울었으면하고 바라는 거지, . 사실은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석민에, 민규는 대답 대신 입 안쪽 여린 살을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릎을 모으고 앉아 그것을 올려다보던 정한이 작게 키득이며 몸을 일으키고 섰다. 민규야, 부끄러워? 자존심 상해? 한 발짝 민규 가까이 다가선 그가 허리를 조금 낮춰 그 단단한 어깨 위로 제 턱을 괴고 장난치듯 물었다. 민규는 망설임 없이 제 어깨를 털어 꽤 묵직하게 얹힌 정한의 얼굴을 떼어내고 대꾸했다. 윤정한, 지랄하지 마. 눈앞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긴 정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달리 덧붙이지 않고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얼마 안 가 웃음이 잦아든 방 안의 공기가 빠르게 식어 간다. 얇은 천 재질의 교복 마이 안으로 추위가 겹겹이 파고든다. 교복 마이 단추를 채우고 아래로 떨어진 석민의 손끝을 스치듯이 쥔 정한이 그보다 두 걸음 앞으로 나서서 민규의 옆에 나란히 섰다. 꽤 가파르게 경사가 진 시선이 찰나의 순간 맞닿는다. 정한은, 늘 그랬던 것처럼 눈을 접어 맑게 웃어 보였다.

 

 

 

 

 

출발하자, 이제.”

 

 

 

 

 

바닥으로 잠식하는 민규의 음성이 내부의 찬 공기를 울리고 그 안에서 부서진다. 먼저 발을 옮겨 현관문을 열어젖힌 그의 뒤로 정한과 석민의 발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였다. 곧 현관문이 세게 닫히고, 느리게 점멸하던 형광등이 필라멘트 타는 소릴 내며 꺼진다.

 

 

 

명백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

 

 

 

 

 

 

 

금방이라도 늘어질 듯하면서도 끊기지 않는, 팽팽한 대치상태. 낭떠러지를 등진 소년 셋은 무채색의 연구복 차림인 남자 다섯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정한이 손을 뒤로 뻗어 석민의 옷깃을 쥐고 끌어당긴다. 민규는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보다 픽 웃었다. 윤정한, 무서워? 농담조의 물음에 정한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민규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일순 낮게 깔렸다. 지랄하지 마. 정한의 손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긴 석민이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민규가 아래로 떨어뜨린 손을 세게 말아 쥔다. 반쯤 고개를 비틀어 석민을 스치듯 마주하고서 가볍게 웃어 보인 정한이 곧 잡고 있던 옷깃을 놓고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잔뜩 긴장한 상대의 얼굴을 쭉 훑은 그가 차분하게, 그러나 명확한 음성을 뱉었다.

 

 

 

 

 

차라리 기계 연구를 계속 하시지 그러셨어요. 우리보다 멍청하고, 감정도 없고, 심지어 도망치지도 않을 텐데.”

“S1004, 들어가서 얘기하지.”

인간은 바보가 아니에요. 감정도 있고, 그러니까 도망치는 거죠. 이제 인정하시겠어요?”

 

 

 

백설화명(白雪花明), 절경의 설원으로.”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공중으로 하얗게 김을 내며 부서졌다. 그 순간정한의 까만 눈동자로부터 흰 빛이 일어, 고리 모양을 그리며 그의 몸을 감쌌다. 질겁하는 연구원들을 향해 정한은 한 쪽 입 꼬리만을 끌어올려 웃었다. 곧 빛의 고리가 강하게 수축하고 이완하여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듯 퍼져 나간다. 보도블럭과 그것을 딛고 선 발 사이의 아주 얇은 틈으로까지 빛이 흘러넘치고 나서야, 세상은 한순간에 하얗게 뒤덮인다. 땅도 하늘도 온통 백색으로 뒤덮여, 이따금씩 큼지막한 눈송이가 내리는그야말로 절경의 설원이 된 것이다. 정한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민규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재밌겠는데? 단정하게 채워져 있던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어 내리던 그의 팔을 왼쪽에 선 석민이 잡아 제 쪽으로 세게 당겼다. 함박눈이 두텁게 쌓여 묵직하기까지 한 언덕 위로 몸이 반쯤 파묻힌 민규가 미간을 좁혔다.

 

 

 

 

 

좀 기다려, 김민규.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 없잖아?”

또 뭔데?”

아직 불안정해. 윤정한이 뒤로 물러나면 그 때 가도 안 늦어.”

 

 

 

 

 

관철복사(觀徹復事), 예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석민의 두 눈이 일순 형형하게 빛났다. 민규는 걸치고 있던 검은색 교복 마이 위에 앉은 눈을 손으로 툭툭 털었다. 두께가 얇은 탓에 금세 녹은 눈이 스며들어 군데군데 색이 짙어져 있었다. 석민은 민규를 제 쪽으로 좀 더 끌어당기고 언덕 뒤로 몸을 숨긴 채 두 눈만을 아슬하게 내어 반대쪽의 동태를 살폈다. 정한의 주위로 빛의 파장이 한 번 이완할 때마다 연구원들이 밟고 선 눈밭이 높게 솟아올랐다. 석민의 눈동자 위로 푸른빛이 스치고, 기관총을 꺼내 드는 군인의 잔상이 스친다. 인력 낭비네, 고작 우리 셋을 잡겠다고. 그는 입술을 감쳐물고 잘근, 뼈가 울려 소리가 들리도록 이에 힘을 주어 씹었다. 그 옆에 긴 몸을 접은 채 습관처럼 손가락뼈를 꺾던 민규가 몸을 틀어 물어왔다.

 

 

 

 

 

그래서 난 언제 나가면 되는데?”

앞으로 30초 뒤, 지원군이 합류할 거야.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적다고도 할 수 없어. 얼핏 봐도 스무 명은 되는 것 같았으니까.”

, 존나 쓸데없는 짓은 사서 하네.”

지금부터 10초 뒤에 윤정한이랑 자리 바꿔.”

 

 

 

그 다음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잘 하는 거 있잖아?

 

 

 

 

 

입 꼬리를 당겨 늘 하던 대로 웃어 보인 석민이 민규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등 뒤에서는 눈이 날리고, 밟히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섞이는 구둣발 소리. , , . 민규의 입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숨에 마지막 숫자가 섞임과 동시에, 눈밭에 파묻혀 버둥대는 연구원들 앞으로 전투 군인 이십 여 명이 죽 늘어서서 옆구리에 낀 기관총을 일제히 장전했다. 귀에 거슬리는 금속 마찰음이 한데 섞여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입술 끝을 깨물고 그 사이로 작게 욕지거리를 뱉은 정한이 제 어깨에 손을 짚은 민규를 돌아보았다.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술 끝이 이질적이어서, 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민규야, 연습하던 거 할 거야?”

달리 할 게 있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없지.”

네가 나한테 집착하는 유일한 이유잖아, 내 능력. 틀려?”

 

 

 

양화작열(煷火灼熱), 마지막 불꽃놀이를.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한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줘 그를 등 뒤로 밀쳐낸 민규가 평소보다 반 톤 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뱉었다. 곧 눈동자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붉은 빛이 민규의 몸을 감싸고, 한 걸음 내딛자 빛으로부터 불길이 치솟아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화염의 구체가 떠올랐다. ‘사격 준비!’, ‘사살하라!’ 따위의 거친 외침이 민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한쪽 입 꼬리만을 당겨 올린 그가 오른손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리고 엄지와 검지를 맞부딪치자, 둥글게 뭉쳐 있던 화염체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공중으로 치솟았다. 빛의 파장에 둘러싸인 민규가 선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작게 소리 내어 키득이며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깨어진 화염체 파편은 연구원들이 파묻힌 설원과 일렬로 늘어선 전투 군인 쪽으로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강한 불꽃이 설원에 처박혀 눈발이 튀고 날렸다. 민규의 등 뒤에 서 있던 정한이 두 걸음을 내딛어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다정하고 사근한 음성이 전투의 소음에 섞여 들었다.

 

 

 

 

 

훨씬 멋있네, 네 불꽃놀이.”

안 멋있으면 아마 꼰대들이 열 꽤나 받을 걸.”

그러겠지, 확실히 너한테는 애정이 꽤 있는 것 같던데?”

지랄, 애정보다는 실험욕이 아닐까.”

 

 

 

 

 

날카로운 민규의 대답에 정한이 소리 내어 웃는다. 잔뜩 접혔던 두 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정한의 눈동자는 다시금 눈부시게 빛났다. 민규는 제 붉은 빛을 삼키는 정한의 빛 파장에서 시선을 떼어 멀리 상대 쪽을 응시했다. 선혈이 스민 눈발이 다시 하늘 위로 튀어 올라 마치 분홍빛 눈이 내리는 것도 같았다. 사람 죽이는 주제에 예쁘긴 존나게 예뻐요. 씹어뱉듯 읊조린 혼잣말을 들었는지 정한이 꾹 다문 입술 새로 웃음을 흘렸다. 머리 위로 쳐든 그의 오른손 위로 민규의 화염체보다도 더 큰 빛의 구체가 형형하게 설원 위를 비추고 있었다.

 

 

 

 

 

마지막인데 좀 더 예쁜 걸 보고 죽는 게 훨씬 낫지 않아?”

……싸이코냐.”

그럴 리가. 그저 내 따뜻한 마음이고 배려의 일종인 걸?”

말이나 못 하면.”

백설화명(白雪花明), 설원 위의 빛으로 수렴하라.”

 

 

 

 

 

감정이 지워진 얼굴을 하고서 헛웃음을 뱉는 민규를 따라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정한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곧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구체가 하늘 위로 빠르게 솟았다가, 점점 더 붉게 물드는 설원 위로 내리꽂힌다. 튀어 오른 눈 결정과 빛의 파편이 부딪쳐 강한 광선으로 바뀌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광선은 세 소년이 마주하고 있던 사 층짜리 건물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창문이 깨지고 벽돌이 으깨지는 소음이 바닥마저 진동시킨다. 언덕 뒤로 몸을 피하고 있던 석민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고, 가만히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보고 선 민규는 제 허리에 팔을 감아오는 정한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정한은 제 쪽으로 틀어진 민규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접어 웃었다. 굉음이 울리며 설원이 조각조각 깨어지기 시작했고, 발밑으로 도톰하게 쌓여 있던 눈이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아주 희미하게, 건물이 부서지는 틈으로 찢어지는 비명이 섞이기 시작한 것도 같았다.

 

 

 

 

 

가자.”

 

 

 

 

 

가운데 층이 뚝 잘려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을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하던 석민이 먼저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얇은 운동화 밑창에 닿는 보도블럭의 질감이 낯설었다. 정한은 민규에게 반쯤 기댄 채 몇 걸음 걷는 듯 하다가, 이내 손을 뻗어 석민의 교복 마이 자락을 꾹 쥐었다. 운동화 뒤축을 질질 끄는 소리가 민규의 걸음 뒤로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 일련의 포격음이 터진다. 터질 것이었다. 석민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만큼이나 시린 빛이 그의 몸을 감싸고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민규는 걸음을 멈춰 선 석민의 뒤통수를 지그시 응시하며 아래로 떨어뜨린 손을 세게 그러쥐었다. 눈부시게 점멸하던 청색의 빛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제 옆에 선 정한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긴 석민이 한동안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를 내질렀다.

 

 

 

 

 

김민규, 엎드려!!”

 

 

 

 

 

순간 석민의 품에 반쯤 안긴 채 바닥에 무릎을 찧은 정한이 잔뜩 찌푸려진 인상을 하고서 제 왼손을 높이 쳐들었다. 민규의 등 뒤로 일제히 늘어선 친위대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그들과 민규 사이의 좁은 틈 위로 높게 눈 언덕이 솟아올랐다. 차갑고 거친 시멘트 바닥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는 정한의 머리 위로 묵직한 눈송이가 내려앉고, 한쪽 무릎이 꺾인 민규의 다리가 두텁게 쌓인 눈밭 위로 처박혔다. 정한을 감싼 백색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셔서 민규는 미간을 좁혔다. 등 뒤로, 두텁게 내려앉은 눈 더미를 뚫고 날카로운 금속의 마찰음이 거슬리도록 울렸다.

 

 

 

 

 

민규야, 괜찮아? 다친 데 없어?”

……, 보시다시피. 그러는 너는, 윤정한.”

나도 멀쩡해, 보시다시피!”

 

 

 

 

 

그러니까, 한 번 더 하자. 불꽃놀이.

 

 

표면이 거친 시멘트 바닥에 세게 찧은 무릎과 오른손 손바닥에서 핏빛이 비치고 있었으면서도, 정한은 애써 입 꼬리를 당기며 마치 주문이라도 외듯 그렇게 덧붙였다. 눈 위로 손을 짚어 몸을 일으킨 민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한의 옆에 선 석민이 입술을 짓씹으며 표정을 굳혔다. 김민규, 너 미쳤어? 아까보다 좀 더 갈라진 음성이 허공을 찢듯이 터져 나왔다.

 

 

 

 

 

그럼, 네가 어떡할 건데?”

, 그치만 그건 너무,”

나 다치면 네가 살리면 되잖아, 멍청아!”

……,”

그러니까 네 몸 간수나 잘 해!”

 

 

 

 

 

단호한 끝맺음에 석민의 입술이 아프게 씹혔다. 그의 옆에서 어색하게 웃어 보인 정한이 곧 제 오른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나는, 민규 믿어. 민규가 살려낼 거라고 믿어. 나지막한 음성은 석민에게만 겨우 닿을 정도로 작았다. 곧 치켜든 오른손 위로 내리는 눈이 소복소복 쌓여 공 모양을 하고 점점 그 크기를 키워 갔다. 그러니까, 하고서 잠시 말을 멈춘 정한이 찬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니까 다치지 마, 석민아. 거대한 구 형태의 눈덩이가 민규의 등을 지켰던 언덕을 반쯤 부수고 친위대 쪽으로 메다 꽂혔다. 그 순간 친위대의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긴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으며, 눈밭을 구른 민규의 눈동자에서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강하게 회오리치는 눈보라 속에서 친위대의 기관총은 공중으로 불을 뿜다가 이내 눈밭 깊숙이 박혔다. 여과되지 않은 총성이 땅을 울린다. 다시금 몸을 일으켜 서는 민규의 발밑으로 푸른 불꽃이 일었다. 입술을 깨문 정한의 머리 위로 태양과도 닮은 빛의 구체가 거대하게 그 살을 붙이고 있었다.

 

 

 

 

 

민규야, 뒤로 나와! 아님 내가 갈까?”

……윤정한,”

?”

그냥, 거기 있어. 오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씹어뱉는 민규의 목소리가 거칠다. 정한은 머리 위로 제 몸집만큼 커진 빛의 구체를 왼손으로 옮겨 들며 한 발을 떼었다. 그와 동시에 석민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아 지그시 눌렀고, 걸음이 막힌 정한이 이유를 묻기도 전에 민규를 감싼 적색의 빛이 강하게 이완하며 열기를 공기 중으로 쏟아 부었다. 선명한 적색을 띠는 빛이 닿는 곳곳마다 강하게 불이 옮겨 붙었다. 정한은 제 발 바로 앞 눈밭에 붙은 불씨를 내려다보고, 느리게 고개를 돌려 석민을 응시했다. 녹아 흐를 것만 같은 열기에 눈가를 찌푸린 석민이 낮게 목소리를 뱉었다.

 

 

 

 

 

……저건 아마, 김민규의 능력이 폭주한 상태일 거야.”

그치만, 얼마 전에는 저 정도도 아니었다고.”

지가 원했겠지. 널 살리고 싶다든가, 뭐 그런 거. 가끔은 간절히 원하면 들어주잖아.”

그럼, 그럼,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폭주는 나도 어떻게 못 해. 앞으로 김민규가 어떻게 할지 전혀 보이지도 않아. 꼭 도와주고 싶으면, 친위대와 김민규의 거리가 최대한 멀어졌을 때 날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조금이라도 가까우면 네 파장이랑 김민규 파장이 정면으로 부딪칠지도 모르거든.”

 

 

 

 

 

들어 올린 왼손을 꾹 쥐어 빛 파장의 끝을 쥔 정한이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길게 호흡했다. 정면으로 바라본 민규는 손을 치켜드는 족족 뜨겁게 이는 화염체를 되는 대로 집어던지고 있었다. 그가 지나간 눈밭 위로 자취를 그리듯 선혈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정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휘청거리는 민규는 곧 무릎이 꺾일 듯 꺾이지 않고 위태롭게 선 채 서서히 크기를 키워 가는 화염체를 머리 위에서 조각내어 눈앞으로 내리 꽂았다. 친위대가 임시방편으로 덮어둔 것 같은 보호막이 유리창 깨지듯 균열로 일그러졌다. 입술을 열어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 정한이 민규가 선 반대쪽으로 쥐고 있던 빛의 구체를 집어 던졌다.

 

 

그 순간, 아주 찰나의 순간에, 민규가 고개를 돌려 정한을 똑바로 마주했다. 입가를 타고 흐른 선혈이 민규의 발 아래로 뚝뚝 흘러내린다. 붉게 물든 그 입술이 느리게 열리고, 몇 번이나 달싹이던 입술이 하려는 말은 강한 폭발음이 집어 삼킨다. 무방비한 상태로, 흰 빛과 붉은 빛이 이리저리 뒤섞인 파장에 얻어맞은 정한이 시멘트 바닥을 몇 바퀴 쯤 굴렀다. 흔적도 없이 부서진 설원, 미동이 없는 친위대, 그리고……

 

 

 

 

 

, 정한……, 도망쳐……!!”

 

 

 

 

 

완전히 갈라지고 찢어져, 공중을 가르는 민규의 날카로운 음성. 정한은 급하게 시멘트 바닥 위로 다쳤던 손바닥을 세게 짓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가, 하복부를 찢는 통증에 비명 비슷한 것을 내지르며 한쪽 팔을 꺾고 엎드렸다.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감각이 목 내부를 타고 역류하는 것만 같다. 몇 번의 잔기침 끝에 뱉는 것은 묵직한 핏덩이였다. 정한은, 손목이 반쯤 꺾여 너덜너덜한 오른손을 들어 입가를 훔쳤다. 잔뜩 흐트러져 가려진 시야 왼쪽으로 석민이 다가오고 있었다. 숨을 깊게 집어 삼킨 그가 그나마 멀쩡한 왼발에 힘을 줘 몸을 일으켰다. 어깨를 감싸 안는 석민의 손끝에서 푸른색의 빛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정한아, 괜찮아?”

나는, 아마, 괜찮을 거야……. 너는?”

난 그렇게 직접적으로 파장을 맞은 건 아니라서, 아직 견딜 만 해.”

민규, 하아, 김민규는, 저렇게 죽는 거야?”

 

 

 

 

 

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아랫입술을 다시금 앞니로 찍어 누른 정한이 멀리서 타오르는 불길로 시선을 던졌다. 핏빛의 불꽃 내부는 시린 파랑으로 발광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안에, 김민규가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걸까,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타오르는 불꽃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과격하게 몸을 뒤트는 민규의 음성은 열기에 먹힌 지 오래였다. 정한은 뻐근한 턱을 움직여 입 안쪽 여린 살을 씹었다. 혀끝에서 비릿하게 피 맛이 나는 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변명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석민을 올려다보는 뒷목이 뻐근하고 코끝이 찡하니 아려서, 정한은 그저 뿌예진 눈동자 가득 타오르는 민규를 담으며 입을 열었다.

 

 

 

 

 

……석민아.”

가자, 정한아.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그동안 말해주지 못해서, 그것도 미안해.”

 

 

 

그치만, 나는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야. 그렇지?

 

 

 

 

 

제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은 석민의 팔을 떼어낸 정한이 그를 똑바로 마주하고, 눈을 접어 웃는다. 차오른 눈물이 예쁘게 휜 눈꼬리를 타고 뺨 위로 흘렀다. 석민을 처음 만났던 열일곱의 추운 가을처럼정한은 금방이라도 꺾일 듯 힘이 다 빠진 다리를 질질 끌어 숨통을 죄는 열기에 다가 섰다. 머리를 감싼 채 악을 쓰던 민규가 파장의 경계에 선 정한을 돌아보고, 고개를 젓는다. 안 돼, 오지 마, 돌아가, 달싹이는 입술이 그런 류의 단어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정한은 따라 고개를 저으며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울면서 웃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그의 얼굴에 내려앉은 그 자체가 극도로 아름다워서, 민규는 고통스러운 와중에 헛웃음을 뱉었다. 발광하는 태양의 색을 띤 파장 안으로 손끝을 밀어 넣은 정한이, 곧 입을 열어 나지막히 속삭인다.

 

 

 

 

 

백설화명(白雪花明)

 

 

()에서 무()로 수렴하라.

 

 

 

 

 

붉은 빛 안으로 반쯤 몸을 담근 정한의 등 뒤로, 마치 백색의 날개라도 펼쳐지듯 강한 빛이 쏟아져 공기 중으로 흘렀다. 강한 빛이 두 사람이 밟고 선 땅을 집어삼키고, 유난히 맑던 하늘을 집어삼키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비참한 표정을 한 석민마저 집어삼킨다. 두 파장이 완벽하게 겹쳐지는 찰나의 순간민규의 팔이 정한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윤정한, 낮게 읊조리는 음성에 정한이 파묻었던 고개를 든다. 핏빛으로 물든 민규의 입술이 열리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집어삼킨 빛이 저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고 강하게 찢어져 나간다.

석민은 조각난 파장이 제게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것을 피할 힘도, 귓가를 짓누르는 이명을 멈출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가, 공중에서 내던져지듯 시멘트 바닥 위로 처박혔다. 목소리 대신 터져 나온 잔기침 끝에 눈이 아플 만큼 새빨간 선혈이 흩뿌려졌다. 음성을 내는 법을 잊은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눈꺼풀을 들어올려, 최후를 맞은 다른 두 소년을 응시하는 것뿐. 찢어진 입술 끝으로 바람 빠지듯 헛웃음이 샌다. 이석민은, 김민규가 윤정한에게 최후에 반드시 했을 한마디를 알 것 같았다. 그거, 아마……,

 

 

 

고백, 이겠지.

곧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시야를 가린다. 억지로 말아 올린 입 꼬리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지막까지 시멘트 바닥을 짓누르고 몸을 지탱했던 왼손이 미끄러지면서, 석민은 끝없는 어둠으로 잠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민규가 가졌을 윤정한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석민의 낡은 손목시계는 유난히 초침 소리가 컸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혈향(血香)이 섞인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고, 유리판이 반쯤 부서진 시계는 잘도 그 톱니바퀴를 굴려댔다. 째깍, 째깍, 예리한 마찰음을 내는 날카로운 바늘 끝이 한 바퀴를 돌아12를 가리킨다.

 

 

 

어른이 되지 못한 세 소년의 손끝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 새해의 시작이었다.

 

 

 

 

 

 

 

 

 

 

혹시 그거 들어본 적 있어?

보나마나 또 소문이겠지, 전혀 신빙성 없는.

신빙성 없지 않다니까? 여기, 이능력개발원 말야, 스물이 되면 두 가지 길을 선택하게 해 준대.

, 그거라면 나도 들어본 적 있어. 아마, 친위대 쪽하고 민간인 쪽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진짜 도시전설 아냐?

믿기 싫으면 믿지 마세요, 김민규 씨. 하여튼 내가 알기로는 친위대 입대를 선택하든가, 아님 모든 능력과 기억을 지우고 민간인으로 살아가든가,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 해준대.

어디든 맘에 안 드니까 난 그냥 그 전에 도망칠래.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딨냐? 좀 슬프지만, 난 차라리 민간인으로 살래.

그래도 석민이 능력은 지우기에 좀 아깝다. 꽤 유용한 거잖아.

, 윤정한. 그러는 너는 뭘 고를 건데?

, 솔직히 말하면 어느 쪽도 고르고 싶지 않아. 군의 개가 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기억을 모두 잃는 건 너무 슬프잖아?

 

 

그러니까, 그냥 그 전에 죽자.

 

 

 

나랑 같이 죽자, 민규야.

 

 

 

 

 

소원이 이루어진 기분이 어때? 윤정한.

 

어떠냐고?

 

 

행복해. 진심으로.

 

 

 

 

 

성년은폐(成年隱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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