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 윤정한

 

 

 

 

 

0730, 이별 이지훈의 기록

[우정전력 :: 읽지 않은 메시지 1]

 

 

 

 

 

 

 

w. (@hyemm_is_yoonr)

 

 

 

 

 

 

 

 

 

 

 

 

 

 

 

요 즈음 형은 한동안 쓰질 않던 휴대폰의 문자 기능을 자주 사용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를 끝마치고 인턴을 하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짤막한 밥 때에, 그 외의 언제든 휴대폰을 들어 올리면 항상 읽지 않은 메시지 1, 이라는 글자가 잠금화면 위에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간단한 용건이라도 목소리로 전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었으나, 형에게서 문자가 와 있을 때면 그저 별 수 없이 엄지를 놀려 답장을 꾹꾹 써 내려갈 뿐이었다. 형도 물론 전화를 더 좋아해서 얼마 전까지도 혼자 한 시간 씩이나 재잘재잘 제 얘기를 하고는 했다.

허나 이제는 그럴 수가 없을 테지. 나는 어렴풋이 생각만 할 뿐이었다.

 

 

 

 

 

[지훈아, 오늘도 밥 잘 챙겨먹고 있지? 형은 오랜만에 학원 나왔어. 트레이너 형이랑 이것저것 얘기도 하고, 잠깐 병원도 다녀오기로 했다? 근데 있지, 그 형이 네가 있는 병원으로 가자는 거야. 원래는 비밀로 하고 몰래 너 찾아가기로 했는데 바쁠까봐, 혹시나 싶어서 말해주는 거다, 알지? 시간 괜찮으면 잠깐 얼굴 봤음 좋겠다. ;; 오늘 못 봐두 내일 보기로 했으니까 기다릴 수 있어! 답장두 기다릴게, 이지훈 파이팅!]

 

 

 

 

 

형의 문자는 늘상 이런 식이어서 나는 대화를 할 때마다 편지를 뜯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꾸역꾸역 글자 수를 넘겨 MMS로 넘어가는 게 답 텀이 느린 내 탓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는 단어 하나에서 형의 목소리를 듣고, 조그만 이모티콘 하나에서 형의 표정을 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곧 사로잡힌다. 말려드는 입 꼬리를 저 하고 싶은 대로 두고서 자판 위로 양 엄지를 올렸다. 보낼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어느 순간 습관이 되어 있었다.

 

 

 

 

 

으음, 오늘은, 내가 곧, 회진 있어서, 힘들 것 같구

이지훈, 뭐 하냐? 또 문자질?”

 

 

 

 

 

자그마한 휴대폰 화면과 숙직실 벽의 절반을 채운 화이트보드달력처럼 생겨서, 일정표로 쓴다.를 번갈아보던 중, 어깨 위로 팔을 턱 걸친 전원우가 화면 위로 시선을 던지며 물어왔다. 저 새끼는 꼭 나 문자하고 있을 때만 친한 척 하더라. 얼굴을 팍 구기자 팔을 치우고 몸 사리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는 꼴이 웃겨, 나는 급하게 문장을 맺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책상 위로 휴대폰을 뒤집어 놓자 그제야 시선이 가셨다.

 

 

 

 

 

정한이 형이야, 잠깐 병원 들른대서.”

그래? 그럼 잠깐 내려가서 얼굴 보고 와. 너 또 거절했지, 바쁘다고.”

, 사실이잖아. 여기서 놀고먹는 것도 걸리면 아작인데, 그리고 난 이제 인턴 1년차거든요, 전원우 선배님. 너랑 나랑 같냐?”

그래도 너 요새 정한이 형 목소리도 잘 못 듣는다며. 그 형 아프다 그랬나?”

어어, 한 이 주 쯤 전에 감기 걸렸다 그래서 몰래 약 타줬는데, 잘 안 떨어지나 봐. 예민할 때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았는데, 좀 심각한가 보네.”

 

 

 

 

 

내 맞은편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고개를 주억거리는 전원우는 레지던트 6개월 차, 굳이 덧붙이자면 내 직속 선배이다. 개인 사정 상 군대를 면제받은 덕에, 내가 군 생활 하고 휴학하는 동안 인턴을 마쳤단다. 정한이 형과는 총학생회에서 만나 어째저째 아는 사이라고 했던 것 같고. 물론 인턴만 하겠냐만은 그래 봤자 정식 의사 된 지 1년도 못 채운 전원우가 자주 놀고먹는 것 같아 사실은 좀 고깝다. 그래도 형 얘기에 토 안 다는 게 어딘가 싶기도 하고. 전원우는 가운 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만년필을 습관적으로 손에 쥐고 빙글빙글 돌리며 퍽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정한이 형 목소리 들어 보긴 했어?”

, 전에 약 타줄 때랑, 지난 주 쯤이었나, 전화하다가 목 아프다고 그래가지고 끊었을 때랑. ?”

아니 뭐, 이런 얘기는 좀 그런데 감기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싶어서.”

……뜬금없이?”

원래 사람 아픈 건 뜬금없잖아. 물론 감기가 잘 안 떨어질 수도 있기는 한데, 그 전화 좋아하는 사람이 맨날맨날 그렇게 정성스럽게 문자하는 거 보면 답 나오지 않냐고.”

 

 

 

 

 

아이, , 나야 일개 레지라서 판단은 못 내리니까 그냥 생각은 해 두라고. 형 바빠서 가 본다.

제 딴에는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불편했는지, 전원우는 빙빙 돌려서 어물어물 말을 맺더니 이내 숙직실을 쏙 빠져나갔다. 나는 가만히 뒤집힌 휴대폰을 들어 본다. 14 : 38. 가는 선이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휘어져 숫자를 그려낸 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곧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밀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짧게 울리는 진동은 모른 척 했다. 사실은, 생각을 해 보지 않은 적 없어서 조금 착잡했거든.

 

 

 

 

 

나는 의과에 진학을 한 이후로부터, 전공 수업을 지겨울 만큼 들었던 시절을 지나, 인턴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항상 어떠한 딜레마에 사로잡혀 있었다. 병원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는 곳이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생을 마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전혀 상관없는 사이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세 부류의 사람이 단란한 가족인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후자의 경우에, 누군가의 삶을 쥐고 뒤흔들 만한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줄곧 고민해 왔다. 마치 내가 상대의 생명을 재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목적 없이 휴학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 전원우는 특유의 늘어지는 투로 내게 같은 말을 되풀이했었다. 어차피 사람은 한계가 있는 거고, 우리는 그냥 그 한계를 전달해 줄 뿐이지. 나는 머리로는 그 문장을 전부 이해하면서도, 끝끝내 내 맞은편에 앉은 형을 상상하고서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원우에게 되묻길 수십 번 했었지. 네가 나라면, 정한이 형한테 그런 말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느냐고.

 

 

그 때 전원우가 뭐라고 했더라. 답지 않게 멋있는 말이어서 좀 놀려줬었는데

 

 

 

 

 

훈아,”

…….”

지훈아!”

, . 죄송합니다.”

아냐, 안 그래도 오늘 힘들었지.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겨 버려서. 너무 마음 쓰지 말고, 퇴근해도 좋아. 수고했다.”

 

 

 

 

 

정신이 좀 팔려 있던 모양이다. 인턴 지도를 담당하시는 최 과장님은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 곧 제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뾰족한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과 닿아 공명하는 소리가 점차 옅게 흩어졌다. 나는 로비에 멍하니 선 채 목적 없이 시선을 옮기다가, 곧 숙직실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은, 그래, 일주일 정도 특정 범위의 병실 회진을 돌면서 인사를 몇 번 주고받았던 환자가 갑작스런 발작으로 급히 옮겨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서 있었다. 물론 내가 개입할 일은 아니었지만, 조금, 무서웠달까. 그 사람은 아마 지금쯤, 현대 의학이 손을 뻗어준 덕으로 가는 숨이나마 내쉬고 있으려나. 목에 걸린 명찰을 빼내어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는데, 뒷주머니에 꽂힌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짧고, 일정하게, 여러 번. 나한테 전화하는 사람 없는데, 중얼거리며 손을 옮겨 휴대폰을 쥐었다. 어깨로 숙직실 문을 밀어 들어가는 순간 진동이 멎었고, 액정 위에 떠 있는 몇 개의 단어. 참 낯익은데, 그만큼 낯설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 3]

[부재중 전화 1]

 

 

 

 

 

나는 배정받은 침대 위에 몸을 던지듯이 누이고, 내 옆으로 가운을 집어던지며 부재중 전화 발신자부터 확인했다. 저장이 되어있지는 않으나 낯익은 번호, 형의 학원 트레이너일 것이다. , 나한테, 전화를? 한 음절씩 뚝뚝 끊어 중얼거리며 메시지 창을 누르고서,

 

나는 잠시 동안 손가락이 굳어, 차마 메시지를 읽지 못하고 휴대폰을 허벅지 위로 떨어뜨렸다.

 

 

 

 

 

[지훈아 형 지금 병원 앞이야 벤치에 앉아있어]

[지훈 씨 바빠요? 전화 안 받으셔서 문자 남깁니다 정한이랑 방금 병원 들렀]

 

 

 

 

 

형에게서 온 문자는 두 통이었는데, 가장 최근에 온 문자가 그 전 것을 덮어 나는 다만 형이 병원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밖에 알지 못했다. 그리고 트레이너에게서 온 문자는 방금 전에 막 도착한 것이었고나는 굳이 그것을 열어보지 않아도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물어 본다. 적어도, 이것은 꿈이 아니며, 나의 상상도 아니나, 실재 가능한 상황 중 최악이다. 휴대폰을 세게 쥔 채, 나는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숙직실을 박차고 병원 밖으로 달렸다. 두 다리를 바삐 움직이는 동안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생각은 그것이었다. 주저앉지 않아서 다행이다.

 

 

 

 

 

형은 다 낡아빠진 가로등이 깜빡거리는 아래에 앉아, 병원 로비를 하염없이 응시하면서,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 꼬리를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공기 중에 드러난 팔 위로 꿉꿉한 감촉이 달라붙었다. 짜증이 확 솟구친다. 그럼에도, 나는 벤치에 걸터앉은 형의 어깨 위로 팔을 둘러, 할 수 있는 한 세게 형을 끌어안았다. 형은 가만히 품에 얼굴을 묻고서, 옅게 웃을 뿐이었다.

 

 

 

 

 

…….”

…….”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제발.”

 

 

 

문자, 안 읽었지. 그럴 줄 알았어. 이십 분이나 늦고.”

 

 

 

 

 

천 따위에 입술이 반쯤 막혀 웅얼거리는 형의 목소리가 들린다. 명백하게 거친, 목이 잔뜩 긁히는 쇳소리가 음성을 타고 흐른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두워진 시야 위로 가로등 불빛의 잔상이 어지럽게 점멸한다. 형은 여전히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 팔을 옮겨 가만가만 내 등을 두드리고, 성치도 않은 목소리를 자꾸만 내었다.

 

 

 

 

 

지훈아, 형이 항상 말하잖아. 너는 뭐를 해도 잘 할 거라고. 뭐를 해도, 성공할 거라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 스스로한테 좀 관대해졌음 좋겠어. 알지?”

……,”

그리고 덥다구 에어컨 빵빵 틀어놓고 자지 말구. 그러다가 감기 걸리고 냉방병 걸리는 거, 하아, 금방이니까, 몸 챙기면서 일 해.”

, 잠깐만,”

 

 

 

 

 

등을 토닥이던 형의 손이 멎는다. 곧 내 어깨를 쥐어 밀어내는 탓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눈가를 조금 찌푸린 형이, 시선을 당겨 저보다 위에 있는 나를 올려다본다. 눈가가 발간 게 누가 봐도 운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 와중에 입 꼬리가 예쁘게 말려 올라가 있어서, 나는 타의로 닫은 입술을 조금 벌려 헛웃음을 뱉었다. 곧 형이 나를 끌어당기어, 내 입술 위로 열이 오른 제 입술을 붙였다 뗀다. 보는 눈 운운하며 손잡는 것도 거절하던 그 답지 않아서, 나는 조금 울 것 같았다. 형은 입술을 반쯤 벌려 억지로 호흡을 고르고서, 몸을 일으켜 반쯤 돌아선다. 붙잡아야 하는데, 나는 머리가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서도 겨우 손만 뻗은 채 황망히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덥다, 들어가서 몸 식혀, 지훈아.”

……, 잠깐만요,”

 

 

 

 

 

억지로 팔을 뻗었을 때, 손가락 끝이 형의 어깨를 스치고, 그대로 공기를 한 움큼 쥐어 갈랐다. 나는 여전히 초점이 반쯤 나간 눈으로, 멀어지는 형의 모습을 한참 담다가, 점멸하는 가로등이 완전히 꺼지고서야 등을 돌린다. 숙직실로 향하는 몸이 무겁고, 다리가 무겁고, 전하지 못한 말들이 가득 쌓인 마음이 제일 무거웠다.

 

 

 

잔뜩 구겨진 가운이 널린 침대 위로 몸을 붙여 본다. 휴대폰을 어찌나 꽉 쥐고 있었는지, 열을 받아 뜨거운 기계를 침대 위로 떨어뜨리자 손바닥에 가득 땀이 배어났다. 나는 답답하게 막힌 침대 위를 멀거니 올려다보다가, 이불을 타고 느껴지는 진동에 고개를 돌린다. 읽지 않은 메시지, 3. 그 가운데 두 건은 형이 보낸 것이고, 나는 곧 그 문자들을 지울 것이다. 방금 온 것은 발신자표시제한. 나는 겨우 고개만 옆으로 돌린 채 화면 위로 시선을 꽂고, 길게 숨을 뱉는다. 정한의 이름자 위로 검지를 갖다 대고, 길게 그 위를 눌렀다. 손이 떨려서 입술을 깨문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고 침대 위로 얼굴도 묻어 버렸다.

마지막 문자는, 영원히 읽지 않을 것이다.

 

 

 

 

 

문득 전원우가 했었던, 멋진 말이 떠올랐다.

만약 정한이 형이 아프다 치자. 내가 너면 무조건 같이 있어줄 건데? 무섭잖아, 당사자가 아닌 사람도 무서워 죽겠는데, 선고 받는 당사자는 어떻겠어. 그러니까 옆에 있어 줘야지. 손도 잡아 주고, 울면 눈물도 닦아 주고.

나는 전원우의 목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지는 동안, 눈가가 뜨거워 쉬이 잠들지 못했다.

 

 

 

이것으로 이별, 이었다.

 

 

 

 

 

 

 

 

 

 

-

[발신자 표시제한

 

지훈아형이랑만나줘서고마웠어더잘해주지못해서미안해형이너많이사랑]

 

 

 

fin.

// 계간윤른 겨울호 참여글 업로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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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소재, 후반부 유혈 묘사 있습니다 //

 






김민규 × 윤정한 × 이석민

 

 

 

성년은폐(成年隱廢) ; 성년을 감추어 깨뜨리다.

 

 

 

 

 

w. (@hyemm_is_yoonr)

 

 

 

 

 

 

 

 

 

 

1.

 

 

 

2016. 인간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금방이라도 늘어질 듯하면서도 끊기지 않는, 팽팽한 대치상태. 낭떠러지를 등진 소년 셋은 무채색의 연구복 차림인 남자 다섯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정한이 손을 뒤로 뻗어 석민의 옷깃을 쥐고 끌어당긴다. 민규는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보다 픽 웃었다. 윤정한, 무서워? 농담조의 물음에 정한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민규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일순 낮게 깔렸다. 지랄하지 마. 정한의 손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긴 석민이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민규가 아래로 떨어뜨린 손을 세게 말아 쥔다. 반쯤 고개를 비틀어 석민을 스치듯 마주하고서 가볍게 웃어 보인 정한이 곧 잡고 있던 옷깃을 놓고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잔뜩 긴장한 상대의 얼굴을 쭉 훑은 그가 차분하게, 그러나 명확한 음성을 뱉었다.

 

 

 

 

 

차라리 기계 연구를 계속 하시지 그러셨어요. 우리보다 멍청하고, 감정도 없고, 심지어 도망치지도 않을 텐데.”

“S1004, 들어가서 얘기하지.”

인간은 바보가 아니에요. 감정도 있고, 그러니까 도망치는 거죠. 이제 인정하시겠어요?”

 

 

 

 

 

그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아오던 세계를 똑같이 살아가는 민간인과, 그 민간인이 소위 일컫는 초능력이라는 것을 가졌다는 이유로, 세계에 복종하도록 키워지는 이능력(異能力). 보통의 민간인은 이능력자의 화려한 겉치장만을 보므로정확히는 정부가 그렇게 선전하므로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거나, 그 이능력자 집단을 동경하고 더 나아가 질투하기도 한다.

 

 

 

 

 

백설화명(白雪花明), 절경의 설원으로.”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공중으로 하얗게 김을 내며 부서졌다. 그 순간정한의 까만 눈동자로부터 흰 빛이 일어, 고리 모양을 그리며 그의 몸을 감쌌다. 질겁하는 연구원들을 향해 정한은 한 쪽 입 꼬리만을 끌어올려 웃었다. 곧 빛의 고리가 강하게 수축하고 이완하여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듯 퍼져 나간다. 보도블럭과 그것을 딛고 선 발 사이의 아주 얇은 틈으로까지 빛이 흘러넘치고 나서야, 세상은 한순간에 하얗게 뒤덮인다. 땅도 하늘도 온통 백색으로 뒤덮여, 이따금씩 큼지막한 눈송이가 내리는그야말로 절경의 설원이 된 것이다. 정한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민규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재밌겠는데? 단정하게 채워져 있던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어 내리던 그의 팔을 왼쪽에 선 석민이 잡아 제 쪽으로 세게 당겼다. 함박눈이 두텁게 쌓여 묵직하기까지 한 언덕 위로 몸이 반쯤 파묻힌 민규가 미간을 좁혔다.

 

 

 

 

 

좀 기다려, 김민규.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 없잖아?”

또 뭔데?”

아직 불안정해. 윤정한이 뒤로 물러나면 그 때 가도 안 늦어.”

 

 

 

 

 

그러나 그 이면은 정반대.

 

 

 

 

 

관철복사(觀徹復事), 예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석민의 두 눈이 일순 형형하게 빛났다. 민규는 걸치고 있던 검은색 교복 마이 위에 앉은 눈을 손으로 툭툭 털었다. 두께가 얇은 탓에 금세 녹은 눈이 스며들어 군데군데 색이 짙어져 있었다. 석민은 민규를 제 쪽으로 좀 더 끌어당기고 언덕 뒤로 몸을 숨긴 채 두 눈만을 아슬하게 내어 반대쪽의 동태를 살폈다. 정한의 주위로 빛의 파장이 한 번 이완할 때마다 연구원들이 밟고 선 눈밭이 높게 솟아올랐다. 석민의 눈동자 위로 푸른빛이 스치고, 기관총을 꺼내 드는 군인의 잔상이 스친다. 인력 낭비네, 고작 우리 셋을 잡겠다고. 그는 입술을 감쳐물고 잘근, 뼈가 울려 소리가 들리도록 이에 힘을 주어 씹었다. 그 옆에 긴 몸을 접은 채 습관처럼 손가락뼈를 꺾던 민규가 몸을 틀어 물어왔다.

 

 

 

 

 

그래서 난 언제 나가면 되는데?”

앞으로 30초 뒤, 지원군이 합류할 거야.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적다고도 할 수 없어. 얼핏 봐도 스무 명은 되는 것 같았으니까.”

, 존나 쓸데없는 짓은 사서 하네.”

지금부터 10초 뒤에 윤정한이랑 자리 바꿔.”

 

 

 

그 다음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잘 하는 거 있잖아?

 

 

 

 

 

보통은 6세에서 13세 사이에 이능력이 발현된 아이들을 교외의 특수행정과 산하 연구기관, 통칭 이능력개발원으로 보내는 것이 최선의 방침. 기관으로 보내진 아이들은 이능력자만을 모아둔 학교에서 자라며, 궁극적으로는 정부의 친위대로 키워진다.

 

 

 

 

 

입 꼬리를 당겨 늘 하던 대로 웃어 보인 석민이 민규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등 뒤에서는 눈이 날리고, 밟히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섞이는 구둣발 소리. , , . 민규의 입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숨에 마지막 숫자가 섞임과 동시에, 눈밭에 파묻혀 버둥대는 연구원들 앞으로 전투 군인 이십 여 명이 죽 늘어서서 옆구리에 낀 기관총을 일제히 장전했다. 귀에 거슬리는 금속 마찰음이 한데 섞여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입술 끝을 깨물고 그 사이로 작게 욕지거리를 뱉은 정한이 제 어깨에 손을 짚은 민규를 돌아보았다.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술 끝이 이질적이어서, 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민규야, ‘그거할 거야?”

달리 할 게 있어?”

아니, 없지.”

네가 나한테 집착하는 유일한 이유잖아, 내 능력. 틀려?”

 

 

 

양화작열(煷火灼熱), 마지막 불꽃놀이를.

 

 

 

 

 

이능력개발원이 하는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최근 10년간 기술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기관은 6세에서 10세 사이의 아이들을 데려와, 실험을 통해 이능력을 심는다. 극한의 실험 과정에서 성공한 아이들은 이능력자 가운데에서도 상급으로 칭송받고,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한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줘 그를 등 뒤로 밀쳐낸 민규가 평소보다 반 톤 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뱉었다. 곧 눈동자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붉은 빛이 민규의 몸을 감싸고, 한 걸음 내딛자 빛으로부터 불길이 치솟아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화염의 구체가 떠올랐다. ‘사격 준비!’, ‘사살하라!’ 따위의 거친 외침이 민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한쪽 입 꼬리만을 당겨 올린 그가 오른손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리고 엄지와 검지를 맞부딪치자, 둥글게 뭉쳐 있던 화염체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공중으로 치솟았다. 빛의 파장에 둘러싸인 민규가 선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작게 소리 내어 키득이며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깨어진 화염체 파편은 연구원들이 파묻힌 설원과 일렬로 늘어선 전투 군인 쪽으로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강한 불꽃이 설원에 처박혀 눈발이 튀고 날렸다. 민규의 등 뒤에 서 있던 정한이 두 걸음을 내딛어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다정하고 사근한 음성이 전투의 소음에 섞여 들었다.

 

 

 

 

 

오늘도 멋있네, 불꽃놀이’.”

안 멋있으면 아마 꼰대들이 열 꽤나 받을 걸.”

그러겠지, 확실히 너한테는 애정이 꽤 있는 것 같던데?”

지랄, 애정보다는 실험욕이 아닐까.”

 

 

 

 

 

죽은 아이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알 수 없다.

 

 

 

 

 

날카로운 민규의 대답에 정한이 소리 내어 웃는다. 잔뜩 접혔던 두 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정한의 눈동자는 다시금 눈부시게 빛났다. 민규는 제 붉은 빛을 삼키는 정한의 빛 파장에서 시선을 떼어 멀리 상대 쪽을 응시했다. 선혈이 스민 눈발이 다시 하늘 위로 튀어올라 마치 분홍빛 눈이 내리는 것도 같았다. 사람 죽이는 주제에 예쁘긴 존나게 예뻐요. 씹어뱉듯 읊조린 혼잣말을 들었는지 정한이 꾹 다문 입술 새로 웃음을 흘렸다. 머리 위로 쳐든 그의 오른손 위로 민규의 화염체보다도 더 큰 빛의 구체가 형형하게 설원 위를 비추고 있었다.

 

 

 

 

 

마지막인데 좀 더 예쁜 걸 보고 죽는 게 훨씬 낫지 않아?”

……싸이코냐.”

그럴 리가. 그저 내 따뜻한 마음이고 배려의 일종인 걸?”

말이나 못 하면.”

백설화명(白雪花明), 설원 위의 빛으로 수렴하라.”

 

 

 

 

 

기관은 이런 식으로 생명을 다루는 것에 죄책감이 없기 때문에, 이능력이 늦게 발현되어 폭주한 민간인을 사살하는 권한을 정부로부터 빼앗았다. 그리하여 아주 드물게 중고등학교 등지에 그러한 민간인이 출현할 경우, 그가 얼마만큼의 피해를 줬는지에 상관없이 그를 사살한다. 또는 기관의 연구 대상으로서, 처참하게 파헤쳐진다.

 

 

 

 

 

감정이 지워진 얼굴을 하고서 헛웃음을 뱉는 민규를 따라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정한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곧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구체가 하늘 위로 빠르게 솟았다가, 점점 더 붉게 물드는 설원 위로 내리꽂힌다. 튀어 오른 눈 결정과 빛의 파편이 부딪쳐 강한 광선으로 바뀌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광선은 세 소년이 마주하고 있던 사 층짜리 건물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창문이 깨지고 벽돌이 으깨지는 소음이 바닥마저 진동시킨다. 언덕 뒤로 몸을 피하고 있던 석민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고, 가만히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보고 선 민규는 제 허리에 팔을 감아오는 정한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정한은 제 쪽으로 틀어진 민규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접어 웃었다. 굉음이 울리며 설원이 조각조각 깨어지기 시작했고, 발밑으로 도톰하게 쌓여 있던 눈이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아주 희미하게, 건물이 부서지는 틈으로 찢어지는 비명이 섞이기 시작한 것도 같았다.

 

 

 

 

 

가자.”

 

 

 

 

 

가운데 층이 뚝 잘려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을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하던 석민이 먼저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얇은 운동화 밑창에 닿는 보도블럭의 질감이 낯설었다. 정한은 민규에게 반쯤 기댄 채 몇 걸음 걷는 듯 하다가, 이내 손을 뻗어 석민의 교복 마이 자락을 꾹 쥐었다. 운동화 뒤축을 질질 끄는 소리가 민규의 걸음 뒤로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정부를 거스르려는 이유이다.

 

 

 

 

 

, 일련의 포격음이 터진다. 터질 것이었다. 석민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한 해의 끝자락이자, 명백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2.

 

 

 

성탄을 맞은 기숙사는 어수선하게 들떠 있었다. 사감이며 감시 전담 연구원들이 거의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머리가 좀 컸다 싶은 애들은 저마다 조를 짜서 교외로 놀러 나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개중에는 새로 출시된 FPS 게임을 할 생각에 들뜬 중학생도 있었고, 소위 말하는 데이트를 위해 남자친구의 손을 잡아끌고 먼저 걸음을 옮긴 여자애도 있었다. 사실 이것은 매 해 성탄절이 돌아올 때마다 일어나는 연례행사와도 같은 일탈이었다. 다만 올해는

 

 

 

 

 

좀 더 계획적으로 바뀐 것 같지?”

……그래?”

뒤 봐 주는 애도 있고, CCTV 꺼 주는 애도 생겼고. 다들 머리를 쓰기 시작한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어차피 저렇게 나가는 애들 중에 제대로 돌아오는 거 절반도 안 돼. 우리가 신경 쓸 일 아냐.”

 

 

 

 

 

기숙사 방에 작게 난 쪽창을 방충망까지 열어젖히고, 그 아래로 빠르게 걸음을 놀리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정한은 평가하듯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명백하게 긍정을 요구하는 물음 뒤로 민규는 던지듯 대꾸하며 제 침대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낡은 매트리스가 푹 꺼지며 삐그덕 듣기 싫은 소음이 울린다.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며 입술을 삐죽이는 정한에게, 석민은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솔직히 김민규 말도 맞잖아, 그게 팩트니까. 다정하게 방 안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별안간 꼴사나워서 민규는 입술 끝을 씹으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뒤척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질 만큼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창 밖에서 여과되지 않은 총성과 어린 아이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그 사이를 강하게 찢고 들어왔다. 정한은 금세 감정이 싹 지워진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망설임 없이 창문을 닫았다. 민규야, 그러니까 네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야. 창문에 등을 기대고 돌아 서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가 조금 들뜨게까지 느껴지는,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탈출을 하려면, 좀 더 체계적으로 해야지. 어차피 우리도 오늘 간 좀 보다가 괜찮다 싶으면 나가려고 했던 거잖아?”

…….”

우리야 저 애들보다 등급이 높다 치지만, 그래도 무작정 나갈 수 있다고 믿었으면 아마 지금쯤,”

다 죽었겠지. 한 명 쯤은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정한과 석민이 서 있는 창가로 걸음을 옮긴 민규가 뿌옇게 흐려져 반투명하기까지 한 창문 너머를 곁눈질하며 그렇게 대꾸했다. 뒷말을 채인 정한이 눈가를 가볍게 찡그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민규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건조해진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는 석민이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고개를 내저었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아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식어 갔고, 그 아래 시멘트 바닥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얇은 벽을 타고 세 사람보다 좀 더 어린 비명이 흘러들었다. 입 안쪽 여린 살을 가볍게 씹던 석민이 퍽 소란스러운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자동 소총 같은 걸 들여왔다고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았는데, 저런 데 쓰일 줄은 몰랐네.”

그거라면 소문으로 났었지 않아? 평소에는 CCTV와 같은 용도로 쓰이다가 여차하면 사람을 쏴 버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근데 단순히 이탈자가 발생한다고 해서 총을 쏘는 건 아닐 거야,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정한이 너도 봐서 알겠지만, 저 애들 중에는 탈출한 무리도 있고 그러지 못한 무리도 있어. 죽은 애들 공통점이 뭐인 것 같아?”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녹이 슨 창틀을 짚고 곁눈질로 창밖 어딘가를 응시하며, 석민은 민규에게 반쯤 가려진 정한에게 물음을 던졌다. 정한은 제 시야를 절반은 가리고 선 민규 쪽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굳게 닫아 뒀던 창문을 반쯤 열고 방충망 틈으로 1층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아플 만큼 선명한 적색의 시멘트 바닥, 그리고 선혈로 물드는 회색 교복을 걸친 대여섯 명의 아이들을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하던 정한이 느리게 미간을 좁힌다. 설마, 낮게 씹어뱉은 단어에 민규가 낮게 웃음을 뱉었다. 그렇게 눈썰미가 없어서야 탈출은 하겠냐? 반쯤 비아냥대는 투에 정한의 어금니가 까득, 소리를 내며 갈렸다.

 

 

 

 

 

지금 죽은 저 애들, 모두 교복 색이 회색이야.”

그 정도는 나도 봐서 알거든?”

그러니까 등급이 높다는 거잖아? 낮아 봤자 B 정도일 테고, 보통은 A급이겠지.”

……, 탈출했을 때 더 위험할 것 같은 애들만 죽인다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딸린 CCTV가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으니까 구별할 수 있는 건 기껏 해봤자 교복 색 정도일 테고. 그럼 우리가 저 문으로 빠져나간다 치면

 

 

 

 

 

즉사겠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냉정한 민규의 마지막 말이 차게 식은 내부 공기와 섞여 보이지 않는 곳으로 흩어졌다. 석민은 비틀린 입술 끝을 감쳐물고 정한이 열었던 창문을 굳게 닫았다. 다시금 정적이 내부로 스며들어, 서서히 세 사람의 목을 죄어 온다. 윤정한은, 그런 정적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민규의 말에 오류는 없었고, 그것이 사실이며, 곧 그 사실이 제 앞에 놓인 상황이다. 결말이 단 하나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어쨌든 정한은 죽음 앞에서 망설이게 되는 저 자신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삶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저 스스로 민규를 찾아온 그 날 부로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얇은 셔츠가 감긴 마른 몸이 느리게 움직여 민규와 석민을 마주하고, 일부러 물들인 듯 붉은 입술이 어울리지 않는 밝은 투의 음성을 뱉어낸다. 감정이 사라진 것만 같던 입 꼬리는 어느 사이에 예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근데 뭐, 살아 나갈 수 있었으면 진작에 나갔어야지. 지금 이 나이로 살아서 여길 걸어나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불가능한 거 아냐?”

…….”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엿 먹이자는 게 우리 목표잖아. 맞지?”

, 네 말이 맞아.”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 없네. 저 애들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죽지 않으려면, 좀 더 철저하게 계획해야지.”

 

 

 

 

 

생긋 미소 짓는 얼굴, 웃는 상으로 반쯤 접힌 두 눈. 그런 표정을 하고도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뱉는 정한을 민규는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제 날카로운 옆얼굴이 담긴 것도 같은 그 새까만 눈동자에서, 민규는 문득 살기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입술을 잘근 씹었다. 윤정한의 본질인 것 같으면서도 꾸며낸 것만 같은 낯선 기운은 정한이 민규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부터였을까. 정한에게 긍정하는 석민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도 구하려고했던 걸까. 이층침대 울타리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던 검은색 마이를 꿰어 입는 정한의 뒤통수를 응시하는 민규의 입술이 아프게 깨물렸다. 곧 단정하게 마이 단추를 채운 정한이 반 바퀴 돌아 민규의 앞에 선다. 아까보다도 더 밝은 미소가 그의 얼굴을 잔뜩 뒤덮고 있었다.

 

 

 

 

 

민규야,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해야 될 일은 연습밖에 없어.”

……알아.”

가자, 연습하러.”

 

 

가자, 올해의 끝자락에서 나랑 같이 죽으러.

 

 

 

 

민규는 어디선가 날카로운 이명과 더불어 뒤틀린 감정이 담긴 환청을 들은 것만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주머니에 꽂았던 제 손을 먼저 끌어당긴 정한이 먼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리하지 마, 민규의 뒤통수에 대고 충고하듯 말을 던져 뱉은 석민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규는 이제 그 시선 쯤 못 본 척 지나칠 수 있었다.

 

고쳐 잡은 정한의 손은 언제나처럼 차다. 그러나 김민규는이 손을 놓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

 

 

 

 

 

 

 

17세의 가을은 예년보다 유난히 더 추웠다. 다 낡은 방충망이 고작인 한 겹의 창문을 매서운 바람이 쥐고 흔들었다. 어느 방에서는 바람 때문에 창문이 깨져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소문마저 돌기 시작했다. 그런 탓으로 사감 측에서 창가로 접근하지 말라는 공지까지 내려졌으나

김민규는 그 날도 어김없이 낡은 걸상에 걸터앉아 창문 너머 흔들리는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로 내리깐 눈동자는 상념이 이리저리 뒤섞여 탁한 회색이다. 무채색으로 물든 그 옆얼굴을 마주하는 석민은 자꾸만 드는 묘한 괴리감에 입술을 자주 깨물었다. 세찬 바람이 창문을 뒤흔드는 소음 위로 민규의 목소리가 꽤 묵직하게 얹혔다. 이석민, 저거 보여? 바깥을 가리키는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자리에는 차체도 창문도 모두 검은색으로 덮인 승합차 한 대가 막 주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저 차, 지난주에도 저기다가 차를 댔던 것 같은데. 뭐에 쓰는 거지?”

꼰대들 타고 다니는 차 아냐? 아니면 일반 연구원 전용…… ?”

 

 

 

 

 

어느새 민규 가까이 몸을 붙이고 선 석민이 의뭉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뚝 끊기듯 시동이 꺼진 승합차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물음에 단순하게 대꾸하던 민규는 차 문이 열리기 무섭게 바깥으로 쏟아져 내리는 흰 빛에 눈을 크게 뜨며 하던 말을 멈추었다. 놀란 것은 석민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급하게 창문을 열어젖히고 방충망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거의 차에서 집어 던져진 사람은 그리 나이가 많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우선은 그 성별조차 파악하기 힘들 만큼 눈부신 빛이 그의 몸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비척이며 몸을 일으키고 선 그를 둘러 싼 고리 모양의 빛 파장이 제멋대로 이완하고 수축하기를 반복하더니, 곧 연구원 몇이 남아 있던 승합차 위로 묵직한 함박눈이 쏟아졌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승합차는 지붕이 반쯤 내려앉았고, 빛이 세상을 집어삼키듯 한 번 퍼질 때마다 연구원들이 밟고 선 자리에 눈이 쌓인 언덕이 솟아올랐다. 낯선 사람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괴로워하더니, 곧 무릎이 팍 꺾이며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다.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이 일순 자취를 감추면서 그가 만들어 냈던 눈 또한 빛 조각으로 부서져 사라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연구원 하나가 비척비척 걸어와 그에게 무언가를 채우고, 그대로 두 사람의 시야를 벗어났다. 그들은, 그제야 드물게 보이던 검은 승합차가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알 것만 같았다.

 

 

 

 

 

……, 이석민. 우리 지금 좀 봐서는 안 될 걸 본 것 같은데,”

저 사람, 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자인가 봐.”

근데 저렇게 폭주했으니까 아마 꼰대들이 가만 안 둘 걸?”

아니, 폭주해서가 아닐 거야.”

그럼?”

원래부터 죽을 운명이었어, 저 사람.”

 

 

 

 

 

입술을 세게 깨문 채 잇새로 꾹꾹 눌러 뱉은 말에 민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개소리야. 죽음에 잔뜩 민감해진 그가 억누르지 못한 감정을 마구 뒤섞인 음성을 씹어 뱉었다. 석민은 낯선 이가 사라진 자취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겨우 민규의 옆얼굴을 마주하며 냉정하게 대꾸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나이 대에 기관 쪽으로 오는 경우는 한 가지 경우, 그러니까 민간인 사이에서 능력이 발현된 것밖에 없어. 거기다가 그 사람은 여기서도 폭주했고. 즉 통제력이 전혀 없다는 건데. 석민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추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민규의 건조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서 부서졌다.

 

 

 

 

 

나도 알아.”

……,”

근데 마침 그 사람이 우리가 처음 들어올 때 입었던 흰 교복이 아니라,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지.

사살 대상이다. 그러니까 난 지금 그 사람 구하러 갈 거야. 넌 어떡할래?”

……? 너 미쳤어? 그러다가,”

구할 수 있어.”

 

 

 

 

 

확실한 미래를 무시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다시 안 해. 그러니까 넌 어떻게 할래?

 

 

민규는 가끔, 무서울 정도로 단언하는 제 친구가 낯설 때가 있었다. 바다와 닮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던 그는 대답 없이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뒀던 마이를 걸쳤다. 석민의 입 꼬리가 가볍게 당겨 올라갔다. 그가 보는 것은 언제나 가장 정확한 미래의 어느 시점. 그렇기 때문에 민규는 믿어야만 했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석민은 입술을 꾹 닫은 채 마이 단추를 채우는 제 친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이라기보다는눈에 보인 미래의 잔상이라고 하는 게 맞을 지도. 그의 눈동자에서부터 시작된 푸른색의 빛이 일렁이듯 퍼져 나와 그의 몸을 감싸고 흘렀다. 몸을 반쯤 틀어 석민을 마주한 민규는 그 시린 빛에 눈가를 찌푸렸다. 얘나 쟤나 존나게 눈부시네. 농담조로 뱉은 투에 석민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곧 그를 감쌌던 빛이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자취를 감춘다. 걸상 위로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킨 석민이 민규보다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가자. 단단한 음성이 가라앉은 공기 위로 하얗게 부서졌다.

 

 

 

 

 

석민이 본 미래를 밟아 간 곳은 지하 1층이었다. 필라멘트가 곧 끊길 듯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알전구가 드문드문 걸려 있고, 어디선가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다가 끊기는 것을 반복하는, 전체적으로 스산한 층이었다. 민규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기숙사 동 지하에 격리 시설 비슷한 게 있다는 건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진짜였을 줄이야. 작게 씹어뱉으며 아래로 떨어뜨린 주먹을 꾹 쥐자 석민이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김민규, 무섭냐? 그 말투가 시비가 아니라는 것쯤은 간단하게 알 수 있어서, 민규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곧 앞으로 뻗은 왼손 끝에서 조그마한 불길이 일어 시야를 밝게 비추었다.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 본 석민이 정면을 보고서 입을 열었다.

 

 

 

 

 

내 미래가 정확하다면,”

정확하니까 그런 사족 달 시간에 본론부터 말하는 걸로.”

, 아무튼 지금 여기에는 CCTV도 담당 연구원도 없어. 물론 배치된 병력도 없고. 격리라기보다는 방치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설 같아.”

꼰대들도 귀찮은가 보지. 위에서 쨍알대는 애들 관리하기도 바쁜데.”

그리고 아까 끌려간 그 사람은 여기서부터 열 번째, 왼쪽 방에 있어. 아마 실신한 상태일 거야. 그대로 두면 발현된 능력이 다시 폭주해서 아까보다 더 처참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구한 뒤에는 어떻게 할 건데? 그것도 다 봐 뒀어?”

본 건 아니지만, C등급은 워낙 사람도 많고 그만큼 많이 죽어 나가니까, 저 애 한 명쯤 끼워 둬도 괜찮지 않을까? 데이터 없는 애들도 널렸잖아.”

그래, ……. 꼰대들이 C등급 애들 하나하나 봐줄 만큼 한가한 놈들은 아니지.”

 

 

 

 

 

꼰대들이란 단어를 씹어뱉는 민규의 손에서 피어났던 불길이 크게 일렁이자 그는 입술을 비틀어 깨물었다. 반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곧 석민이 일러준 열 번째 왼쪽 방 앞에 별 어려움 없이 섰다. 문에 작게 난 창문 너머로 앳된 얼굴을 한 남자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그제야 남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민규는 망설임 없이 제 손에 피워 올렸던 불길을 구체 형태로 뭉쳐 문고리 쪽으로 집어 던졌다. 낡은 스테인리스 재질의 문고리가 압축된 화염에 순식간에 녹아 문 아래로 흘러 내렸다. 석민이 발을 들어 문 가운데를 세게 차자 굳게 잠겼던 것은 손쉽게 안쪽으로 밀렸다. 숨 막히는 냉기가 방 안에 고여 있다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두 사람을 감쌌다. 불길이 사라진 왼손이 빠르게 식는다. 민규는 입술을 깨물고 맨바닥에 웅크린 남자 앞에 발을 딛고 섰다. 석민 또한 남자의 머리맡에서 그를 내려다보다가, 곧 자세를 낮춰 창백하게 질린 뺨 위로 제 손을 가져다댔다. 석민의 눈동자에서부터 흘러 방 전체를 감싸듯 퍼져나가는 청색의 빛은 아까와 달리 다정하고 포근했다.

 

 

 

 

 

관철복사(觀徹復事), 치유.”

 

 

 

 

 

석민의 입에서 뱉어진 음성이 옅은 푸른색을 띠며 방을 가득 채운 빛 속으로 녹아들고, 곧 그의 손에 닿았던 남자의 뺨이 극단적인 백색에서 흰 기가 섞인 살굿빛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석민은 손을 거두고 잔기침을 하는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곧 그가 눈을 뜨자 어느 사이에 푸른 기가 싹 사라진 눈동자로 그를 마주했다. 민규는 반걸음 쯤 물러선 자리에서 남자가 눈을 뜨는 것을 바라보고만 서 있다가, 썩 유쾌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오른손 검지 위로 작은 불씨를 피워 올렸다. 텅 비어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가 닿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민규는 남자의 발목을 죈 낡은 금속 위로 불씨를 옮겼다. 반쯤 녹이 슬었던 족쇄는 자그마한 불씨가 스치고 지나가자 빠른 속도로 녹아 남자의 발목에서 뚝 떨어졌다. 뻐근한 발목을 몇 번 돌려 보던 남자는 곧 무릎을 모아 웅크렸다가, 석민이 내민 손을 어색하게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낯선 옷이 군데군데 찢긴 게 의아한 듯 입술을 깨물며 눈동자를 굴리는 그에게, 반쯤 등을 돌리고 선 민규가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이능력개발원에 온 걸 환영해. 환영할 곳은 못 되지만, 어쨌든 당신은 사살 위기에서 살아남은 거야. 아마 폭주 상태의 기억은 전혀 없을 테고. 그럼 그냥 궁금해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살아가면 돼. 지금 당신이 할 일은 그 다친 다리를 어떻게든 움직여서 3층의 빈 방으로 향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흰색 교복을 찾아 입는 것. 나머지는 같은 옷을 입은 애들이 가르쳐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몇 초 정도 남았지?”

전속력으로 달리면 1분 정도는 벌 수 있을 걸?”

그렇대.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남아.”

 

 

 

 

 

그 눈, 다시 보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민규는 뒷말을 꾹 눌러 삼키고 석민의 손을 쥔 채 냉기에 몸을 덜덜 떠는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어색하게 몇 발을 내딛은 그는, 곧 문 바로 앞에 멈춰 서서 입술을 잘근 씹다가 석민과 민규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망설이는 듯 달싹이던 입술이 열리고, 하얀 숨과 함께 작은 음성이 그의 입술 끝에서 부서졌다.

 

 

 

 

 

저기, ……윤정한이야.”

 

 

 

 

 

던지듯이 이름을 뱉고서, 남자정한은 금방이라도 꺾일 것만 같은 다리로 달려 나갔다. 그가 남긴 발소리가 복도 위로 빠르게 퍼지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석민은 오래 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내 답답하게 채워져 있던 마이 단추를 두어 개쯤 풀었다. 정적이 흐르는 방 안으로 초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무렵, 두 층쯤 위에서부터 귀에 거슬리는 포격음이 흘러들었다. 석민은 입술을 비틀었다. 바지 주머니 안으로 양 손을 꽂은 민규가 그보다 두 걸음 쯤 앞에 서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석민,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어떻게 신경이 안 써지냐?”

여기서 살아가는 건 쟤가 이겨낼 일이고, 더 이상 우리가 도와줄 일은 없어. 운이 좋았다면 지금쯤 3층에 도착했을 거야. 언젠가는, 볼 수도 있겠지.”

…….”

가자.”

 

 

 

 

 

그리고 그 날 이후, 윤정한이란 남자는 더 이상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다.

 

 

 

 

 

 

 

 

 

 

3.

 

 

 

그로부터 6개월 뒤유난히 춥던 그 해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윤정한이 민규와 석민의 앞에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면 정한이 두 사람을 찾아 온 것이었다. 최근 6개월 간 훈련 성과가 세 배 이상 수직상승한 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 참이었다. 설마, 그게 진짜일 줄이야. 석민은 현관에 선 정한을 마주하고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민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물론 소문이 진짜일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6개월 전 김민규는, 위층에서 포격음이 들린 순간부터 정한이 살아남았을 가능성을 어느 정도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저와 같은 검은색 교복을 걸친 정한은 처음 봤을 때보다 머리칼이 단발 수준으로 자라 있었고, ()를 담고 있던 눈동자는 형광등 불빛을 받아 예쁘게 빛났다.

 

그리고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해사한 미소. 민규는 말려 올라간 입 꼬리를 마주하며 찰나 동안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의식적으로 공기를 들이마셔야만 했다.

 

 

 

 

 

안녕. ……, 잘 지냈어? 나 기억하지, 그때 그 윤정한.”

 

 

 

 

 

현관 문지방을 밟고 선 채 대답을 기다리던 정한은 석민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두 걸음 앞으로 옮겨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정한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가 방 안을 훑고 지나간다. 민규는 등 뒤로 숨긴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주먹을 쥐었다. 곧 그 시선이 석민과 마주치자, 정한은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묘한 냉기를 띠는 까만 눈동자는 석민의 마이 왼쪽에 달린 명찰 위로 내려앉았다.

 

 

 

 

 

“S0218……. 하여튼 정이 없어, 여기 사람들은.”

…….”

나 네 이름 알아. 이석민, 맞지? 진급할 때 담당 연구원한테 물었더니 금방 가르쳐 주더라고. 어차피 S등급은 우리 셋밖에 없다나. 그때 나 살려줘서 고마웠어.”

, . , 그럴 때 아니면 언제 쓰겠어, 전투용도 아닌 능력.”

그리고 옆에 너는 김민규. 화염 능력자라고 들었는데,”

 

 

 

나 사실 너 찾아온 거야, 민규야.

 

 

 

 

 

정한의 두 눈이 어색하게 웃는 석민을 스치고 지나가 민규를 올곧게 마주했다. 여전히 비어있는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 위로 민규의 잔상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상대의 눈에 비친 저를 마주하면서 입술 끝을 감쳐문다. 웃음기가 담겨 예쁘게 휜 눈꼬리가 매력적인 만큼 이질적이었다. 그 불편한 느낌은, 윤정한의 시선이 바른 만큼 잔뜩 뒤틀린 감정만이 눈 안에 남아있기 때문인 걸까. 민규는 문득 과거의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음성을 떠올렸다. 무엇이든 얻게 되면, 또 무엇이든 잃게 되는 법이지. 사람으로서 얻지 말아야 할 것을 얻게 된다면, 사람으로서 반드시 가져야할 무언가를 결국 잃게 될 거란다. 그래도 하겠니? 귓가에 스치는 음성을 애써 무시한 민규의 입가에서 내뱉은 숨이 하얗게 부서진다. 대체, 저 윤정한은

정의(正義)가 통하지 않는 이 세계의 꼭대기에 서기 위해서, 뭘 얼마나 버린 것일까. 민규는 제게로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이는 정한의 어깨를 차마 밀어낼 수 없어서, 손바닥 위로 투박하게 자란 손톱을 몇 번이고 박아 넣을 뿐이었다.

 

 

 

 

 

 

민규야, 내 능력과 네 능력을 합치면 아무도 이길 수 없대.”

…….”

나랑, 전부 다 이기고 나서, 같이 죽자.”

 

 

 

 

 

웃는 낯으로 잘도 그런 무서운 소리를 뱉는 정한을, 민규는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따라서 처음 한 순간에는 그를 동정했으나, 그의 웃는 얼굴을 마주했을 때 민규는 동정하는 것을 포기했다. 감정을 흡수당한 것 마냥, 그의 입술 새로 공허한 웃음이 샜다. 그것이 석민에게는 조소(嘲笑) 쯤으로 비쳤을까. 민규는 왠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를 설명할 길은 없었지만.

 

 

 

 

 

정한이 석민과 민규를 찾아온 그 날 밤은 여느 밤처럼 왁자지껄하지도, 금세 고요한 숨소리로 채워지지도 않았다. 긴장감이 쏟아져 흐르는 적막이 방 안 가득 고여 있을 뿐이었다. 민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뒤척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한참동안 입을 닫고 있던 터라 낮게 가라앉은 석민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았다.

 

 

 

 

 

……김민규, 넌 어떡할래?”

뭐를.”

윤정한을 우리 계획에 끌어들일래, 아님 거절할래?”

…….”

난 후자 쪽이 좀 더,”

윤정한 데려갈 거야.”

 

 

 

 

 

차분하게 흘러나오던 음성을 뚝 끊은 민규가 허공에 대고 꽂아 넣듯 말을 끝맺었다. 석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민규가 누워 있는 침대 쪽을 돌아다본다. 여전히 그는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였다. 석민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민규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했던 말을 거둬들이지도 않고서 석민의 입이 열릴 때까지 가만히 흰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김민규, 그의 목소리로 뱉어지는 제 이름이 퍽 낯설 만큼 낮아서, 민규는 꾹 다문 입술 새로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너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

윤정한이랑 너, 상극이야. 넌 결국 걔 파장 못 이겨.”

알아.”

죽을 수도 있어.”

나도 알아. 어차피 인간 이하로 살다가 죽는 거, 운명일지도 모르는 사람하고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잖아?”

 

 

 

 

 

농담조로 뱉고 키득 웃는 목소리가 어딘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음을 석민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민규는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여 시야를 막는다. 까맣게 죽은 그 위로 소리의 잔상이 스쳐 곧 소음을 만들어낸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윤정한의 능력은 실제로도 강력하고, 그것을 품고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강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김민규의 능력은 충분히 강하지만, 그가 원래부터 품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능력이 이식된 민규의 몸은, 그의 말대로 인간 이하로 죽어가고 있다. 민규는 거기까지 자각하고 있었다. 석민의 선택도 이해가 갔다. 저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인 동시에, 정한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겠지. 어쩌면 이석민은……, 미래를 본 그때부터 정한이 살길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지난 6개월간 윤정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어둡게 내려앉은 시야 위로 끊임없이 상념이 밀려든다. 민규는 낡은 침대 시트를 세게 그러쥐었다.

 

 

빨려 들어가듯이 잠에 들기 직전 마주한 정한의 얼굴을, 민규는 피하지 못했다. 앞으로 영원히 그를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될 운명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제 눈앞에 별안간 그런 식의 문장이 떠오르기 무섭게, 민규는 끝없이 잠식해가던 몸을 일으키고 제 발밑의 땅을 디뎠다.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는 순간 저를 빨아들이는 공간 틈으로 흰 빛이 비치고, 조각나 사라지는 어둠의 끝에

 

 

윤정한이 있었다.

 

 

 

 

 

민규야, 괜찮아?”

……뭔데.”

그냥 누워있는 게 좋을 걸.”

 

 

 

 

 

회백색의 낡은 형광등 불빛 아래, 민규는 찬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가 상복부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입술을 씹으며 등을 대고 누웠다. 제 손을 꽉 쥔 정한은 표정이 잔뜩 굳은 채 입술 끝을 자꾸만 감쳐물었고, 머리맡에서 석민이 다가와 자세를 낮춰 앉았다. 눈 감는 편이 좋을 걸? 장난스러운 투였으나 꽤 진지한 눈빛이 닿자 민규는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 다시금 까맣게 차단되는 시야 위로 따뜻한 빛이 내려앉는다. 곧 흑백의 기억이 조각조각 꺼내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한이 이끄는 대로 훈련장에 도착했던 것 같고, 서로의 파장이 무너지지 않게 합을 맞췄던 것 같고, 그러다가 윤정한의 파장이……, 저를 베고 지나간 빛은 붉은색이었던가? 미간을 찌푸리는 민규의 귓가로 석민의 나지막한 음성이 닿았다.

 

 

 

 

 

관철복사(觀徹復事), 상실자에게 치유의 숨결을.”

 

 

 

 

 

온기를 지닌 빛이 몇 번이나 민규의 몸을 감싸고 흘러내렸다. 정한은 가만히 무릎을 모으고 앉은 채 그 푸른빛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바싹 마른 목 안쪽 어딘가에 숨결이 불어오는 것 같더니, 곧 쏟아져 흐르던 따스함은 공기 중으로 부서져 자취를 감추었다. 민규는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회백색의 형광등 불빛이 눈부시고, 정한의 까만 눈동자가 아래로 닿아오고, 동그랗게 깎여 있던 손톱이 잔뜩 물어뜯어 흉해져 있었으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석민은 침대에 기대어 천천히 숨을 골랐다. 민규는 잔기침을 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전체적으로 뻐근한 감이 있었지만 그런 대로 견딜 만한 것 같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석민의 음성이 귓가에 와 부서졌다.

 

 

 

 

 

기억은 났어? 아마 다 잊었을 거라고 정한이가 그러던데.”

, 대충은.”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얼마 안 남았

나도 알아. 내 몸은 내가 챙기니까, 너도 나 같은 데다 괜한 체력 쏟지 말고 네 몸이나 챙겨, 이석민.”

 

 

 

 

 

나 잔다, 민규는 툭 던지듯 덧붙이고 비척비척 제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어 썼다. 벽을 보고 돌아누운 뒤통수를 가만히 응시하던 석민이 다문 입술 새로 헛웃음을 흘렸다. 꼭 고마우면서 저런다, 츤데레 새끼. 석민은 침대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현관문 바로 옆에 달린 스위치 가까이 다가섰다. 끌어 모은 무릎 위로 턱을 괴고서 의미 없이 창밖을 내다보던 정한은 안 자? 묻는 석민의 말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밟았다. 침대에 누워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당기자 스위치를 눌러 불을 끈 석민이 제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은 것처럼, 방 안에도 어둠이 내려앉아 희미하게 새어든 달빛을 서서히 잡아먹었다. 민규는 봤을까, 창밖이 이렇게나 어두워졌다는 걸. 눈가를 찌푸린 정한이 석민의 침대가 놓인 쪽으로 돌아누웠다. 정한아, 피곤할 텐데 얼른 자.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자야지……. 잠이 안 와서.”

그래, 오늘은 좀 놀랐겠지만

나도 알아, 민규가 왜 그랬는지. 너 없었으면 아마 민규죽었을 거야.”

정한아, 나는 네가 살았으면 해.”

나는……, 민규가 살았으면 해.”

 

 

 

 

 

하지만 민규만큼, 내 부탁을 들어줄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정한은 뒷말을 억지로 삼키며 눈을 질끈 감고 등을 돌려 누웠다. 아주 희미하게, 누군가의 입술 끝을 타고 쓴웃음이 샌 것 같았다. 정한은 석민에게 고마워할 수도, 미안해할 수도 없었다. 민규에게는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고, 그가 놔야만 했던 것들이 있다. 윤정한은 그 모든 것을 갖고 싶었고, 가져야만 했다. 그래서 김민규를죽음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살기를 바라면서도. 아마 석민도 같은 마음이 아닐까, 깊은 어둠 속으로 잠식하는 정한의 마지막 의식 끝에 그런 추측이 걸렸다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엇갈리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다 한데 엉켜버린 채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는 밤이었다.

 

 

 

 

 

 

 

 

 

 

4.

 

 

 

명백한 한 해의 끝자락이다.

 

 

창밖으로 시리도록 파아란 하늘에 눈부신 해가 타오르듯 발광하는, 그야말로 아주 맑은 날씨였다. 마른 몸 위로 주섬주섬 교복을 걸친 정한은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시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눈을 굳게 감은 채 적막과도 비슷한 고요 가운데에 앉은 석민이 있었고, 까만 눈동자가 닿은 종착지에는 퍽 낯설어진 페트병에서 막 입을 떼는 민규가 있었다. 마실래? 민규가 별안간 다정한 투로 물어 오며 탄산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액체가 담긴 녹색 페트병을 내민다. 정한은 그것을 받아들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나 이거 마시면 너랑 간접키스 하는 거네? 민규는 늘 그래왔듯이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곧 석민이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떠 올린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희미하게 푸른빛이 섞여 있었다. 정한은 민규가 건넨 사이다 병을 입술 끝에 걸친 채 고개를 뒤로 젖혀 안에 담긴 액체를 들이키다가, 문득 바다와 닮은 그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바다보다는……, 오늘 한정으로 우주가 더 나으려나. 이제 먼저 고개를 돌리는 이는 정한이었다. 굳은 움직임으로 교복 마이 단추를 채우는 민규의 귓가로, 방 안을 가득 채운 낯선 비장감 위로 석민의 단단한 음성이 얹혔다.

 

 

 

 

 

우리가 밟아야 할 곳은 딱 두 군데야. 우선은 기숙사 동 1, 동편 복도 끝에 위치한 제어실. 거기에 있는 제어장치의 잠금을 풀면 이쪽으로 전력이 다량 이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아마 연구동 쪽은 적어도 정전일 거야. 그 때,”

연구동으로 가서, 무능력한 연구원 나부랭이를 좀 상대해 주다가 건물을 폭파하고 도망친다. 맞지?”

, 맞아. 우리가 연구동을 폭파하는 데까지는 걸리는 시간이 있으니까, 다른 아이들은 아마 그때 도망칠 거야.”

그 애들이 살고 죽고까지는 신경 못 써, 이석민.”

나도 알아. 그냥, 어차피 관여할 수 없는 거 좀 더 좋은 쪽으로 기울었으면하고 바라는 거지, . 사실은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석민에, 민규는 대답 대신 입 안쪽 여린 살을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릎을 모으고 앉아 그것을 올려다보던 정한이 작게 키득이며 몸을 일으키고 섰다. 민규야, 부끄러워? 자존심 상해? 한 발짝 민규 가까이 다가선 그가 허리를 조금 낮춰 그 단단한 어깨 위로 제 턱을 괴고 장난치듯 물었다. 민규는 망설임 없이 제 어깨를 털어 꽤 묵직하게 얹힌 정한의 얼굴을 떼어내고 대꾸했다. 윤정한, 지랄하지 마. 눈앞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긴 정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달리 덧붙이지 않고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얼마 안 가 웃음이 잦아든 방 안의 공기가 빠르게 식어 간다. 얇은 천 재질의 교복 마이 안으로 추위가 겹겹이 파고든다. 교복 마이 단추를 채우고 아래로 떨어진 석민의 손끝을 스치듯이 쥔 정한이 그보다 두 걸음 앞으로 나서서 민규의 옆에 나란히 섰다. 꽤 가파르게 경사가 진 시선이 찰나의 순간 맞닿는다. 정한은, 늘 그랬던 것처럼 눈을 접어 맑게 웃어 보였다.

 

 

 

 

 

출발하자, 이제.”

 

 

 

 

 

바닥으로 잠식하는 민규의 음성이 내부의 찬 공기를 울리고 그 안에서 부서진다. 먼저 발을 옮겨 현관문을 열어젖힌 그의 뒤로 정한과 석민의 발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였다. 곧 현관문이 세게 닫히고, 느리게 점멸하던 형광등이 필라멘트 타는 소릴 내며 꺼진다.

 

 

 

명백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

 

 

 

 

 

 

 

금방이라도 늘어질 듯하면서도 끊기지 않는, 팽팽한 대치상태. 낭떠러지를 등진 소년 셋은 무채색의 연구복 차림인 남자 다섯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정한이 손을 뒤로 뻗어 석민의 옷깃을 쥐고 끌어당긴다. 민규는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보다 픽 웃었다. 윤정한, 무서워? 농담조의 물음에 정한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민규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일순 낮게 깔렸다. 지랄하지 마. 정한의 손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긴 석민이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민규가 아래로 떨어뜨린 손을 세게 말아 쥔다. 반쯤 고개를 비틀어 석민을 스치듯 마주하고서 가볍게 웃어 보인 정한이 곧 잡고 있던 옷깃을 놓고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잔뜩 긴장한 상대의 얼굴을 쭉 훑은 그가 차분하게, 그러나 명확한 음성을 뱉었다.

 

 

 

 

 

차라리 기계 연구를 계속 하시지 그러셨어요. 우리보다 멍청하고, 감정도 없고, 심지어 도망치지도 않을 텐데.”

“S1004, 들어가서 얘기하지.”

인간은 바보가 아니에요. 감정도 있고, 그러니까 도망치는 거죠. 이제 인정하시겠어요?”

 

 

 

백설화명(白雪花明), 절경의 설원으로.”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공중으로 하얗게 김을 내며 부서졌다. 그 순간정한의 까만 눈동자로부터 흰 빛이 일어, 고리 모양을 그리며 그의 몸을 감쌌다. 질겁하는 연구원들을 향해 정한은 한 쪽 입 꼬리만을 끌어올려 웃었다. 곧 빛의 고리가 강하게 수축하고 이완하여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듯 퍼져 나간다. 보도블럭과 그것을 딛고 선 발 사이의 아주 얇은 틈으로까지 빛이 흘러넘치고 나서야, 세상은 한순간에 하얗게 뒤덮인다. 땅도 하늘도 온통 백색으로 뒤덮여, 이따금씩 큼지막한 눈송이가 내리는그야말로 절경의 설원이 된 것이다. 정한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민규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재밌겠는데? 단정하게 채워져 있던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어 내리던 그의 팔을 왼쪽에 선 석민이 잡아 제 쪽으로 세게 당겼다. 함박눈이 두텁게 쌓여 묵직하기까지 한 언덕 위로 몸이 반쯤 파묻힌 민규가 미간을 좁혔다.

 

 

 

 

 

좀 기다려, 김민규.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 없잖아?”

또 뭔데?”

아직 불안정해. 윤정한이 뒤로 물러나면 그 때 가도 안 늦어.”

 

 

 

 

 

관철복사(觀徹復事), 예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석민의 두 눈이 일순 형형하게 빛났다. 민규는 걸치고 있던 검은색 교복 마이 위에 앉은 눈을 손으로 툭툭 털었다. 두께가 얇은 탓에 금세 녹은 눈이 스며들어 군데군데 색이 짙어져 있었다. 석민은 민규를 제 쪽으로 좀 더 끌어당기고 언덕 뒤로 몸을 숨긴 채 두 눈만을 아슬하게 내어 반대쪽의 동태를 살폈다. 정한의 주위로 빛의 파장이 한 번 이완할 때마다 연구원들이 밟고 선 눈밭이 높게 솟아올랐다. 석민의 눈동자 위로 푸른빛이 스치고, 기관총을 꺼내 드는 군인의 잔상이 스친다. 인력 낭비네, 고작 우리 셋을 잡겠다고. 그는 입술을 감쳐물고 잘근, 뼈가 울려 소리가 들리도록 이에 힘을 주어 씹었다. 그 옆에 긴 몸을 접은 채 습관처럼 손가락뼈를 꺾던 민규가 몸을 틀어 물어왔다.

 

 

 

 

 

그래서 난 언제 나가면 되는데?”

앞으로 30초 뒤, 지원군이 합류할 거야.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적다고도 할 수 없어. 얼핏 봐도 스무 명은 되는 것 같았으니까.”

, 존나 쓸데없는 짓은 사서 하네.”

지금부터 10초 뒤에 윤정한이랑 자리 바꿔.”

 

 

 

그 다음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잘 하는 거 있잖아?

 

 

 

 

 

입 꼬리를 당겨 늘 하던 대로 웃어 보인 석민이 민규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등 뒤에서는 눈이 날리고, 밟히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섞이는 구둣발 소리. , , . 민규의 입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숨에 마지막 숫자가 섞임과 동시에, 눈밭에 파묻혀 버둥대는 연구원들 앞으로 전투 군인 이십 여 명이 죽 늘어서서 옆구리에 낀 기관총을 일제히 장전했다. 귀에 거슬리는 금속 마찰음이 한데 섞여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입술 끝을 깨물고 그 사이로 작게 욕지거리를 뱉은 정한이 제 어깨에 손을 짚은 민규를 돌아보았다.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술 끝이 이질적이어서, 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민규야, 연습하던 거 할 거야?”

달리 할 게 있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없지.”

네가 나한테 집착하는 유일한 이유잖아, 내 능력. 틀려?”

 

 

 

양화작열(煷火灼熱), 마지막 불꽃놀이를.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한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줘 그를 등 뒤로 밀쳐낸 민규가 평소보다 반 톤 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뱉었다. 곧 눈동자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붉은 빛이 민규의 몸을 감싸고, 한 걸음 내딛자 빛으로부터 불길이 치솟아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화염의 구체가 떠올랐다. ‘사격 준비!’, ‘사살하라!’ 따위의 거친 외침이 민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한쪽 입 꼬리만을 당겨 올린 그가 오른손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리고 엄지와 검지를 맞부딪치자, 둥글게 뭉쳐 있던 화염체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공중으로 치솟았다. 빛의 파장에 둘러싸인 민규가 선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작게 소리 내어 키득이며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깨어진 화염체 파편은 연구원들이 파묻힌 설원과 일렬로 늘어선 전투 군인 쪽으로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강한 불꽃이 설원에 처박혀 눈발이 튀고 날렸다. 민규의 등 뒤에 서 있던 정한이 두 걸음을 내딛어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다정하고 사근한 음성이 전투의 소음에 섞여 들었다.

 

 

 

 

 

훨씬 멋있네, 네 불꽃놀이.”

안 멋있으면 아마 꼰대들이 열 꽤나 받을 걸.”

그러겠지, 확실히 너한테는 애정이 꽤 있는 것 같던데?”

지랄, 애정보다는 실험욕이 아닐까.”

 

 

 

 

 

날카로운 민규의 대답에 정한이 소리 내어 웃는다. 잔뜩 접혔던 두 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정한의 눈동자는 다시금 눈부시게 빛났다. 민규는 제 붉은 빛을 삼키는 정한의 빛 파장에서 시선을 떼어 멀리 상대 쪽을 응시했다. 선혈이 스민 눈발이 다시 하늘 위로 튀어 올라 마치 분홍빛 눈이 내리는 것도 같았다. 사람 죽이는 주제에 예쁘긴 존나게 예뻐요. 씹어뱉듯 읊조린 혼잣말을 들었는지 정한이 꾹 다문 입술 새로 웃음을 흘렸다. 머리 위로 쳐든 그의 오른손 위로 민규의 화염체보다도 더 큰 빛의 구체가 형형하게 설원 위를 비추고 있었다.

 

 

 

 

 

마지막인데 좀 더 예쁜 걸 보고 죽는 게 훨씬 낫지 않아?”

……싸이코냐.”

그럴 리가. 그저 내 따뜻한 마음이고 배려의 일종인 걸?”

말이나 못 하면.”

백설화명(白雪花明), 설원 위의 빛으로 수렴하라.”

 

 

 

 

 

감정이 지워진 얼굴을 하고서 헛웃음을 뱉는 민규를 따라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정한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곧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구체가 하늘 위로 빠르게 솟았다가, 점점 더 붉게 물드는 설원 위로 내리꽂힌다. 튀어 오른 눈 결정과 빛의 파편이 부딪쳐 강한 광선으로 바뀌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광선은 세 소년이 마주하고 있던 사 층짜리 건물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창문이 깨지고 벽돌이 으깨지는 소음이 바닥마저 진동시킨다. 언덕 뒤로 몸을 피하고 있던 석민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고, 가만히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보고 선 민규는 제 허리에 팔을 감아오는 정한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정한은 제 쪽으로 틀어진 민규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접어 웃었다. 굉음이 울리며 설원이 조각조각 깨어지기 시작했고, 발밑으로 도톰하게 쌓여 있던 눈이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아주 희미하게, 건물이 부서지는 틈으로 찢어지는 비명이 섞이기 시작한 것도 같았다.

 

 

 

 

 

가자.”

 

 

 

 

 

가운데 층이 뚝 잘려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을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하던 석민이 먼저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얇은 운동화 밑창에 닿는 보도블럭의 질감이 낯설었다. 정한은 민규에게 반쯤 기댄 채 몇 걸음 걷는 듯 하다가, 이내 손을 뻗어 석민의 교복 마이 자락을 꾹 쥐었다. 운동화 뒤축을 질질 끄는 소리가 민규의 걸음 뒤로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 일련의 포격음이 터진다. 터질 것이었다. 석민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만큼이나 시린 빛이 그의 몸을 감싸고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민규는 걸음을 멈춰 선 석민의 뒤통수를 지그시 응시하며 아래로 떨어뜨린 손을 세게 그러쥐었다. 눈부시게 점멸하던 청색의 빛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제 옆에 선 정한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긴 석민이 한동안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를 내질렀다.

 

 

 

 

 

김민규, 엎드려!!”

 

 

 

 

 

순간 석민의 품에 반쯤 안긴 채 바닥에 무릎을 찧은 정한이 잔뜩 찌푸려진 인상을 하고서 제 왼손을 높이 쳐들었다. 민규의 등 뒤로 일제히 늘어선 친위대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그들과 민규 사이의 좁은 틈 위로 높게 눈 언덕이 솟아올랐다. 차갑고 거친 시멘트 바닥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는 정한의 머리 위로 묵직한 눈송이가 내려앉고, 한쪽 무릎이 꺾인 민규의 다리가 두텁게 쌓인 눈밭 위로 처박혔다. 정한을 감싼 백색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셔서 민규는 미간을 좁혔다. 등 뒤로, 두텁게 내려앉은 눈 더미를 뚫고 날카로운 금속의 마찰음이 거슬리도록 울렸다.

 

 

 

 

 

민규야, 괜찮아? 다친 데 없어?”

……, 보시다시피. 그러는 너는, 윤정한.”

나도 멀쩡해, 보시다시피!”

 

 

 

 

 

그러니까, 한 번 더 하자. 불꽃놀이.

 

 

표면이 거친 시멘트 바닥에 세게 찧은 무릎과 오른손 손바닥에서 핏빛이 비치고 있었으면서도, 정한은 애써 입 꼬리를 당기며 마치 주문이라도 외듯 그렇게 덧붙였다. 눈 위로 손을 짚어 몸을 일으킨 민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한의 옆에 선 석민이 입술을 짓씹으며 표정을 굳혔다. 김민규, 너 미쳤어? 아까보다 좀 더 갈라진 음성이 허공을 찢듯이 터져 나왔다.

 

 

 

 

 

그럼, 네가 어떡할 건데?”

, 그치만 그건 너무,”

나 다치면 네가 살리면 되잖아, 멍청아!”

……,”

그러니까 네 몸 간수나 잘 해!”

 

 

 

 

 

단호한 끝맺음에 석민의 입술이 아프게 씹혔다. 그의 옆에서 어색하게 웃어 보인 정한이 곧 제 오른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나는, 민규 믿어. 민규가 살려낼 거라고 믿어. 나지막한 음성은 석민에게만 겨우 닿을 정도로 작았다. 곧 치켜든 오른손 위로 내리는 눈이 소복소복 쌓여 공 모양을 하고 점점 그 크기를 키워 갔다. 그러니까, 하고서 잠시 말을 멈춘 정한이 찬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니까 다치지 마, 석민아. 거대한 구 형태의 눈덩이가 민규의 등을 지켰던 언덕을 반쯤 부수고 친위대 쪽으로 메다 꽂혔다. 그 순간 친위대의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긴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으며, 눈밭을 구른 민규의 눈동자에서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강하게 회오리치는 눈보라 속에서 친위대의 기관총은 공중으로 불을 뿜다가 이내 눈밭 깊숙이 박혔다. 여과되지 않은 총성이 땅을 울린다. 다시금 몸을 일으켜 서는 민규의 발밑으로 푸른 불꽃이 일었다. 입술을 깨문 정한의 머리 위로 태양과도 닮은 빛의 구체가 거대하게 그 살을 붙이고 있었다.

 

 

 

 

 

민규야, 뒤로 나와! 아님 내가 갈까?”

……윤정한,”

?”

그냥, 거기 있어. 오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씹어뱉는 민규의 목소리가 거칠다. 정한은 머리 위로 제 몸집만큼 커진 빛의 구체를 왼손으로 옮겨 들며 한 발을 떼었다. 그와 동시에 석민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아 지그시 눌렀고, 걸음이 막힌 정한이 이유를 묻기도 전에 민규를 감싼 적색의 빛이 강하게 이완하며 열기를 공기 중으로 쏟아 부었다. 선명한 적색을 띠는 빛이 닿는 곳곳마다 강하게 불이 옮겨 붙었다. 정한은 제 발 바로 앞 눈밭에 붙은 불씨를 내려다보고, 느리게 고개를 돌려 석민을 응시했다. 녹아 흐를 것만 같은 열기에 눈가를 찌푸린 석민이 낮게 목소리를 뱉었다.

 

 

 

 

 

……저건 아마, 김민규의 능력이 폭주한 상태일 거야.”

그치만, 얼마 전에는 저 정도도 아니었다고.”

지가 원했겠지. 널 살리고 싶다든가, 뭐 그런 거. 가끔은 간절히 원하면 들어주잖아.”

그럼, 그럼,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폭주는 나도 어떻게 못 해. 앞으로 김민규가 어떻게 할지 전혀 보이지도 않아. 꼭 도와주고 싶으면, 친위대와 김민규의 거리가 최대한 멀어졌을 때 날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조금이라도 가까우면 네 파장이랑 김민규 파장이 정면으로 부딪칠지도 모르거든.”

 

 

 

 

 

들어 올린 왼손을 꾹 쥐어 빛 파장의 끝을 쥔 정한이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길게 호흡했다. 정면으로 바라본 민규는 손을 치켜드는 족족 뜨겁게 이는 화염체를 되는 대로 집어던지고 있었다. 그가 지나간 눈밭 위로 자취를 그리듯 선혈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정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휘청거리는 민규는 곧 무릎이 꺾일 듯 꺾이지 않고 위태롭게 선 채 서서히 크기를 키워 가는 화염체를 머리 위에서 조각내어 눈앞으로 내리 꽂았다. 친위대가 임시방편으로 덮어둔 것 같은 보호막이 유리창 깨지듯 균열로 일그러졌다. 입술을 열어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 정한이 민규가 선 반대쪽으로 쥐고 있던 빛의 구체를 집어 던졌다.

 

 

그 순간, 아주 찰나의 순간에, 민규가 고개를 돌려 정한을 똑바로 마주했다. 입가를 타고 흐른 선혈이 민규의 발 아래로 뚝뚝 흘러내린다. 붉게 물든 그 입술이 느리게 열리고, 몇 번이나 달싹이던 입술이 하려는 말은 강한 폭발음이 집어 삼킨다. 무방비한 상태로, 흰 빛과 붉은 빛이 이리저리 뒤섞인 파장에 얻어맞은 정한이 시멘트 바닥을 몇 바퀴 쯤 굴렀다. 흔적도 없이 부서진 설원, 미동이 없는 친위대, 그리고……

 

 

 

 

 

, 정한……, 도망쳐……!!”

 

 

 

 

 

완전히 갈라지고 찢어져, 공중을 가르는 민규의 날카로운 음성. 정한은 급하게 시멘트 바닥 위로 다쳤던 손바닥을 세게 짓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가, 하복부를 찢는 통증에 비명 비슷한 것을 내지르며 한쪽 팔을 꺾고 엎드렸다.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감각이 목 내부를 타고 역류하는 것만 같다. 몇 번의 잔기침 끝에 뱉는 것은 묵직한 핏덩이였다. 정한은, 손목이 반쯤 꺾여 너덜너덜한 오른손을 들어 입가를 훔쳤다. 잔뜩 흐트러져 가려진 시야 왼쪽으로 석민이 다가오고 있었다. 숨을 깊게 집어 삼킨 그가 그나마 멀쩡한 왼발에 힘을 줘 몸을 일으켰다. 어깨를 감싸 안는 석민의 손끝에서 푸른색의 빛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정한아, 괜찮아?”

나는, 아마, 괜찮을 거야……. 너는?”

난 그렇게 직접적으로 파장을 맞은 건 아니라서, 아직 견딜 만 해.”

민규, 하아, 김민규는, 저렇게 죽는 거야?”

 

 

 

 

 

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아랫입술을 다시금 앞니로 찍어 누른 정한이 멀리서 타오르는 불길로 시선을 던졌다. 핏빛의 불꽃 내부는 시린 파랑으로 발광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안에, 김민규가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걸까,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타오르는 불꽃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과격하게 몸을 뒤트는 민규의 음성은 열기에 먹힌 지 오래였다. 정한은 뻐근한 턱을 움직여 입 안쪽 여린 살을 씹었다. 혀끝에서 비릿하게 피 맛이 나는 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변명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석민을 올려다보는 뒷목이 뻐근하고 코끝이 찡하니 아려서, 정한은 그저 뿌예진 눈동자 가득 타오르는 민규를 담으며 입을 열었다.

 

 

 

 

 

……석민아.”

가자, 정한아.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그동안 말해주지 못해서, 그것도 미안해.”

 

 

 

그치만, 나는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야. 그렇지?

 

 

 

 

 

제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은 석민의 팔을 떼어낸 정한이 그를 똑바로 마주하고, 눈을 접어 웃는다. 차오른 눈물이 예쁘게 휜 눈꼬리를 타고 뺨 위로 흘렀다. 석민을 처음 만났던 열일곱의 추운 가을처럼정한은 금방이라도 꺾일 듯 힘이 다 빠진 다리를 질질 끌어 숨통을 죄는 열기에 다가 섰다. 머리를 감싼 채 악을 쓰던 민규가 파장의 경계에 선 정한을 돌아보고, 고개를 젓는다. 안 돼, 오지 마, 돌아가, 달싹이는 입술이 그런 류의 단어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정한은 따라 고개를 저으며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울면서 웃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그의 얼굴에 내려앉은 그 자체가 극도로 아름다워서, 민규는 고통스러운 와중에 헛웃음을 뱉었다. 발광하는 태양의 색을 띤 파장 안으로 손끝을 밀어 넣은 정한이, 곧 입을 열어 나지막히 속삭인다.

 

 

 

 

 

백설화명(白雪花明)

 

 

()에서 무()로 수렴하라.

 

 

 

 

 

붉은 빛 안으로 반쯤 몸을 담근 정한의 등 뒤로, 마치 백색의 날개라도 펼쳐지듯 강한 빛이 쏟아져 공기 중으로 흘렀다. 강한 빛이 두 사람이 밟고 선 땅을 집어삼키고, 유난히 맑던 하늘을 집어삼키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비참한 표정을 한 석민마저 집어삼킨다. 두 파장이 완벽하게 겹쳐지는 찰나의 순간민규의 팔이 정한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윤정한, 낮게 읊조리는 음성에 정한이 파묻었던 고개를 든다. 핏빛으로 물든 민규의 입술이 열리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집어삼킨 빛이 저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고 강하게 찢어져 나간다.

석민은 조각난 파장이 제게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것을 피할 힘도, 귓가를 짓누르는 이명을 멈출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가, 공중에서 내던져지듯 시멘트 바닥 위로 처박혔다. 목소리 대신 터져 나온 잔기침 끝에 눈이 아플 만큼 새빨간 선혈이 흩뿌려졌다. 음성을 내는 법을 잊은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눈꺼풀을 들어올려, 최후를 맞은 다른 두 소년을 응시하는 것뿐. 찢어진 입술 끝으로 바람 빠지듯 헛웃음이 샌다. 이석민은, 김민규가 윤정한에게 최후에 반드시 했을 한마디를 알 것 같았다. 그거, 아마……,

 

 

 

고백, 이겠지.

곧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시야를 가린다. 억지로 말아 올린 입 꼬리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지막까지 시멘트 바닥을 짓누르고 몸을 지탱했던 왼손이 미끄러지면서, 석민은 끝없는 어둠으로 잠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민규가 가졌을 윤정한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석민의 낡은 손목시계는 유난히 초침 소리가 컸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혈향(血香)이 섞인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고, 유리판이 반쯤 부서진 시계는 잘도 그 톱니바퀴를 굴려댔다. 째깍, 째깍, 예리한 마찰음을 내는 날카로운 바늘 끝이 한 바퀴를 돌아12를 가리킨다.

 

 

 

어른이 되지 못한 세 소년의 손끝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 새해의 시작이었다.

 

 

 

 

 

 

 

 

 

 

혹시 그거 들어본 적 있어?

보나마나 또 소문이겠지, 전혀 신빙성 없는.

신빙성 없지 않다니까? 여기, 이능력개발원 말야, 스물이 되면 두 가지 길을 선택하게 해 준대.

, 그거라면 나도 들어본 적 있어. 아마, 친위대 쪽하고 민간인 쪽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진짜 도시전설 아냐?

믿기 싫으면 믿지 마세요, 김민규 씨. 하여튼 내가 알기로는 친위대 입대를 선택하든가, 아님 모든 능력과 기억을 지우고 민간인으로 살아가든가,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 해준대.

어디든 맘에 안 드니까 난 그냥 그 전에 도망칠래.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딨냐? 좀 슬프지만, 난 차라리 민간인으로 살래.

그래도 석민이 능력은 지우기에 좀 아깝다. 꽤 유용한 거잖아.

, 윤정한. 그러는 너는 뭘 고를 건데?

, 솔직히 말하면 어느 쪽도 고르고 싶지 않아. 군의 개가 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기억을 모두 잃는 건 너무 슬프잖아?

 

 

그러니까, 그냥 그 전에 죽자.

 

 

 

나랑 같이 죽자, 민규야.

 

 

 

 

 

소원이 이루어진 기분이 어때? 윤정한.

 

어떠냐고?

 

 

행복해. 진심으로.

 

 

 

 

 

성년은폐(成年隱廢), .

// Across the MilkyWay 참여글 업로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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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옆의 인물이 각 챕터를 이끕니다. 1인칭의 경우 이들의 시점에서 서술됩니다.

시점은 1인칭 3인칭 1인칭 순으로 변화됩니다.

BGM List : 불꽃심장 비밀, Stardust 별의 눈물 / 세븐틴 떠내려가 / 엄지 The Way

 

 

 

 

 

가자, 나락으로

 

 

 

w. (@hyemm_is_yoonr)

 

 

 

 

 

 

 

 

 

 

#1. 2학년 8반 이지훈

 

 

 

 

 

우리 학교에서 사람이 죽었다.

 

 

옥상에서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최근에 가지치기를 해서 뼈대만 겨우 남은 앙상한 나무 위로 사람이 곤두박질쳤다고 했다. 그 앞의 1학년 교실에서 몇 명이 흔들리는 커튼 틈으로 의식이 없는 몸뚱이가 나뭇가지에 처박히고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고도 했다. 현재 패닉에 빠져 넋이 나간 그 애들이 힘겹게 전한 바에 의하면, 상처로 얼룩져 지저분한 얼굴은 우는 듯 웃는 듯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더랬다.

이 모든 일이 한 시간 전에 일어났으며, 그런 이유로 학교가 숨 막히게 시끄러웠다. 나를 비롯해 동아리 실에 모인 이들은 숨을 죽인 채 눈만 굴리고, 입술만 씹어댔다. 우리에게 모든 사실을 전달해 준, 동아리 담당 교사 전원우를 올려다본다. 흐트러진 셔츠 위에는 점처럼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누군가의 손톱이 표면과 마찰하여 듣기 싫은 소음을 냈고, 순영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으며, 내 대각선에 앉은 지수가 책상 위로 머리를 박았다. 약간 열린 창문 틈으로 희미하게 앰뷸런스 사이렌이 새어드는 것 같았다. 이제야 도착하다니. 입속에서 맴도는 말을 삼키며 어색하게 입 꼬리를 당겼다. 실감은 전혀 나지 않는데, 입 꼬리가 잘게 경련하는 것이 느껴진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 공기가 습하다. 내 쪽으로 무너진 승관을 끌어당기고 느리게 어깨를 토닥였다. 전원우의 표정은, 뭐랄까, 눈이 시리도록 아팠다.

 

 

곧 굳게 닫힌 문을 박차고 형사 두 명이 동아리 실 내부로 들어왔다. 전원우는 그들에게 짧게 목례하나 싶더니 이내 동아리 실을 나가버렸다. 서로가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공중에서 뒤엉킨다. 나이가 꽤 되어 보이는 형사가 우리를 살피는 듯하더니, 함께 온 젊은 형사로부터 두께감이 있는 종이뭉치를 건네받았다. 반으로 포개놓은 것을 대강 펼쳐들고서, 그가 입을 열었다.

 

 

 

, 이것은 피해자의 투신 장소로 추정되는 옥상에서 피해자의 휴대전화 옆에 놓여 있었던 대본입니다. 이것이 단편영화 제작부 부원 여러분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여러분들을 피해자 윤정한의 자살 사건 참고인으로

……누가, 죽었다고요?”

 

 

 

울음이 잔뜩 섞인 순영의 물음. 일순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순영의 옆에 앉은 민규가 힘이 다 빠진 손을 들어 그를 말려보려 애쓰는 것 같았는데, 거의 제정신이 아닌 순영에게 그것이 먹힐 리 없었다. 겨우 눈물을 그쳤던 승관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가가 뻐근하게 시렸다.

 

 

 

다시, 다시 말해 봐요. 누가…… 죽었다구요?”

권순영, 그만 좀 해!”

흐윽, 이거 놔 봐! 넌 믿겨? 믿기냐고! 정한이 형이, 그 형이 왜 자살을 해, ……!”

 

 

 

순영은 처절했고, 그를 말리려던 민규의 눈가에도 금세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승철이 형사들 쪽으로 다가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아마 우리들의 진술이 필요한 것일 테다.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 승철이 우리 쪽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 고갯짓을 해 보였다. 거부할 수 없어 주춤주춤 중년의 형사를 따라 나가는데, 우연히 고개를 돌렸을 때 승철이 입모양으로 끝나고 전화해.’ 하는 것만을 겨우 포착할 수 있었다. 주머니 안에 차갑게 식었던 휴대폰을 꾹 쥐어본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쌩쌩 불어 들어오는 복도에 서서 형사는 주위를 두리번대다가, 곧 나에게 후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정문 쪽은 현장 수습이 한창일 테니 극도로 복잡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순순히 그를 후문으로 안내했다. 왠지 사건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면, 나를 여기까지 오도록 버티게 만든 무언가가 깨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세찬 바람으로 잘게 떨고 있는 유리문을 밀어 뒤뜰로 몸을 밀어 넣으면서, 형사는 내게 춥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는 최소한의 대화만을 할 것이다. 사실은, 바람을 맞아 붉어진 살갗보다도 마음이 더 추웠다. 창문 밖으로 내다 본 하늘이 꾸물꾸물 흐렸다.

 

 

 

우리 학교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의 이름은 윤정한, 그는 내가 속한 단편영화 제작부의 작가였다.

 

 

 

 

 

 

 

**

 

 

 

 

 

 

 

취조실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자그마한 알전구 하나가 아슬하게 매달려 있었으며, 차갑고 눅눅한 공기에서는 짙은 담배 향이 났다. 지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들으라는 듯 잔기침을 하며 주머니 안에 든 휴대폰을 꾹 쥐었다. 좀 전부터 울리던 진동이 멎은 걸로 보아 누군가 전화를 걸고서 받지 않으니 끊어버린 것 같았다. 형사의 무표정한 얼굴을 곁눈질하던 그가 별 수 없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고 의자를 당겨 앉자, 책상 위에 손바닥 크기의 수첩을 내려놓은 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 학생 학년 반 이름이 뭐죠?”

……2학년 8, 이지훈이요.”

그래요, 지훈 학생. 학생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3학년 7반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 소환된 상태시고, 정황 상 타살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진술 과정에서 크게 부담을 가지거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실 수 있지만, 대답 가능한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을 솔직히, 진실 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형사는 낡은 만년필을 쥐고 수첩에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써 넣었는데, 그 탓으로 말과 말 사이가 계속해서 벌어졌다. 지훈은 양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두고 그 위로 시선을 꽂은 채 묵묵히 형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형사의 물음에 대한 답은 시간이 약간 흘렀을 때 짤막하게 터져 나왔다. 만년필을 고쳐 쥔 형사가 수첩을 한 장 넘기고 맨 윗줄에 무언가를 휘갈기더니 곧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우선은이 단편영화 제작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지훈 학생이 무슨 일을 했었는지에 대해 좀 듣고 싶습니다.”

저희는, 정말 별 거 없이, 영화를 만드는 동아리예요. 학교에서 애물단지 취급하고, 친구들은 신기해하고, 뭐 그런 거요. 다들 취미로 모인 거고, 그래서 그냥 열심히만 했어요. 즐거우니까. 하다 보니까 영화 같은 게 만들어졌고, 그래서 출품했더니 우연히 상을 받아서그래서 지금까지 폐부(閉部) 안 되고 살아남아 있는 거겠죠. 저는 몇 달 전에 들어왔는데, 컴퓨터를 좀 할 줄 알아서 보통 영상 편집을 했어요.”

편집을 했다. 그렇군요. 편집은 보통 누구와 함께 했나요?”

편집은 저희 동아리 부장인 승철 선배하고 같이 했어요. 제가 들어오기 전에는 선배 혼자서 하시다가, 제가 들어온 이후로 나눠서 했어요.”

그럼 평소에 동아리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좀 구체적으로 답해 주셨으면 하는데.”

동아리 분위기……, 별다른 말을 덧붙일 것 없이 너무나 좋았어요. 제가 말했다시피 저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다들 편하게 대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게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어요. 저와 학년이 같은 친구들은 원래 다 알고 지내던 사이라서 그 친구들도 제가 적응할 수 있게 많이 도와 줬고요. 의지할 부분이 많고, 서로 다 형제처럼 지냈던 사이예요.”

 

 

 

어둠이 내려앉은 취조실 안으로 차분한 지훈의 목소리가 공중에 맴돌다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발밑으로 제 한 마디 한 마디가 쌓이는 것만 같아 그는 형사가 모르게 운동화 앞코를 간헐적으로 바닥에 내리찧었다. 형사는 알아보기 힘들 것 같은 필체로 수첩에 진술 내용을 휘갈겨 썼다. 만년필이 종이에 닿아 사각거리는 소리만 자그맣게 들릴 때쯤, 지훈의 휴대폰이 다시금 진동을 울렸다. 곧 끊어진 것이 아무래도 전화보다는 문자인 것 같았다. 안 받습니까? 묻는 형사에게 지훈은 고개를 내저었다. 문자를 카카오톡 메신저처럼 낭비하는 사람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형사는 곧 기록을 마치고 책상 위로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지훈은 그의 어깨 너머로 걸려 있는 시계를 올려다본다. 시침이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 7로 향하고 있었다.

 

 

 

, 그러면동아리 얘기는 이쯤하기로 하고,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의 관계는 어떠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지훈 학생.”

 

 

 

피해자, 윤정한. 형사의 한 마디에 지훈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진다. 형사는 그것을 마주하고 있으나, 별달리 덧붙이지 않고 그저 지훈을 낮게 깔린 시선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지훈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극도로 세게 깨문 탓에 결국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이 이 끝에 긁혀 터졌다. 혀를 타고 기분 나쁜 피 맛이 밀려든다. 지훈은 답답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사실 저는 정한이 형하고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냥 동아리 선후배에서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된 정도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먼저 다가와 준 쪽이 정한이 형이었어요. 저는 워낙 낯가림이 심해서 선배들하고는 말을 늦게 텄는데, 형이 먼저 말 걸어 주고 살갑게 대해 줘서 다른 선배들하고도 친해질 수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고마운사람이죠.”

특별히 친해지게 된 계기 같은 건 없나요?”

계기라기보다는…… 제가 들어오고 나서 영화제 출품 때문에 다들 영화 제작에 매달리고 있었어요. 그 때 승철 선배가 주연을 맡으셔서 늘 촬영을 해야 했으니까, 저는 승철 선배 대신 촬영도 하고, 편집도 하고 그랬었죠. 한두 시간 만에 끝나는 게 아니니까 주말에는 밤을 새서 편집하고 다시 들어 엎고 몇 번 했었는데, 어느 날 정한이 형이 저한테 쉬엄쉬엄 하라고 주스를 사 주시더라고요. 그 날 같이 저녁도 먹었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좀 오래 같이 있었더니 그 날 이후로는 먼저 인사를 건네고 싶어졌어요. 이것도 계기라면 계기겠죠.”

 

 

 

과거를 더듬는 지훈의 표정이 묘했다. 행복한 것도 같고, 슬픔을 애써 삼키는 것도 같은,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않게 일그러진 얼굴. 형사는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만년필을 들어 수첩 끄트머리에 피해자와의 특이사항 없음.’ 이라고 휘갈겼다. 지훈은 책상 아래로 떨어뜨린 손에 힘을 줘 주먹을 쥐며 울음을 삼켰다. 입술을 깨물 때마다 상처가 난 입술 안쪽 살이 함께 씹혀 들어갔다. 형사는 색이 조금 바랜 경찰 유니폼 점퍼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훈은 자신도 휴대폰을 꺼내어 문자에 답장이나 할까 생각했다가, 곧 관두기로 했다. 형사에게 어느 정도 예의를 차려서 나쁠 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따라 붙었다. 독수리 타법마냥 검지를 뻣뻣하게 펴 자판을 두드리던 형사는 문자를 성공적으로 전송하고서 휴대폰을 뒤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영화 얘기를 해 볼까 하는데. 넌지시 던진 그의 음성에 지훈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최근에 제작하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 있었어요. 아까 형사님이 주워 오신 대본, 그게 어제까지 저희가 만들던 세 번째 영화였어요.”

이 영화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실…… 저는 그 영화를 잘 몰라요. 정한이 형이 대본을 전부 썼다는 거하고, 정한이 형이랑 민규가 주연을 맡은 거 하고, 또 승철 선배가 책임지고 디렉팅이랑 편집까지 전부 다 하시겠다고 한 거하고, 이 정도 뿐이에요. 근데 이건 저 말고 다른 부원들한테 물어 보셔도 다 같은 대답일 거예요. 저는 이번 영화랑 아예 거리가 멀어서……, 아마 승철 선배나 민규가 제일 정확하게 알고 있을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그런 거 말이에요.”

한 마디로 영화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 말이네요. 맞죠?”

그런셈이겠죠. 왜요?”

 

 

 

지훈이 고개를 들어올린다. 수첩 한켠에 물음표를 크게 그린 형사가 만년필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지훈을 마주한다. 두 갈래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닿았다가 금세 엇갈렸다. 길게 자라 곧 부러질 것 같던 손톱을 기어이 부러뜨려 뜯어내던 지훈이 먼저 고개를 떨어뜨렸다. 형사는 다시금 만년필을 집어 들고 입을 연다. 공기가 탁해서 눈이 시린 것 같아, 지훈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떠올렸다.

 

 

 

피해자와의 관계도 그렇게 가깝지 않은 것 같고, 진행 중이던 영화에 대해서도 중심적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왜 피해자의 마지막 통화가 이지훈 학생인가요. 그것에 대해서 혹시 아시는 게 있다면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왜 형이 제게 전화를 걸어야만 했는지, 저에게도 의문으로 남은 부분이에요. 아마 정말로 죽기 직전이었다면, 가장 최근에 연락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을 거예요. 제가 아까 네 시 반쯤 형에게 원고를 갖다 줬었거든요.”

영화 원고를 갖다 줬다……?”

……, 형이 저한테 먼저 문자를 보냈었어요. 어디 있냐길래 교실이라고, 곧 동아리 실로 갈 거라고 했더니 그럼 지금 가서 편집실 안에 있는 원고를 자기한테 갖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걸 가져다가 형네 반에 갖다 준 게 다예요. 아마도 그게 형의 가장 최근 기록이어서 저한테 전화를 걸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때 휴대폰을 교실에 두고 와서 전화가 온 줄도 몰랐어요. 동아리 실에 있다가 승관이랑 휴대폰을 찾으러 갔던 게 여섯 시 넘어서였거든요.”

 

 

 

지훈은 거기까지 말하고서 입을 꾹 닫았다. 작게 한숨이 흘러나온다. 수첩을 한 장 앞으로 넘겨, 동아리 부원들의 이름이 명렬표처럼 죽 나열된 데에서 지훈의 이름을 찾은 형사는 그 옆에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손톱이 다 뜯겨 흉해진 손을 내려다보던 지훈은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 형사가 만년필 뚜껑을 닫고 그것을 수첩과 함께 점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가시죠, 하는 말에 지훈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내젓고 자리에서 일어나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경찰서 정문까지 지훈을 바래다주면서, 형사는 그에게 대뜸 그렇게 물었다.

 

 

 

지훈 학생, 배 안 고픕니까?”

……? 무슨

별 건 아니고, 아까 마지막 질문 이후로 좀 힘들어 보이는 것 같아서.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다고 해 주고 싶었습니다. 아마 피해자도 지훈 학생의 사정을 이해했을 거예요. 너무 걱정 말고, 혹시나 누가 연루되어 있다면 그건 우리 측에서 밝혀야 할 일이니까, 학생들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잘 버티고 있으면 된다고 전해 줘요. 다른 친구들도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고. 그럼 난 들어가 볼 테니까, 저녁 꼭 챙겨 먹어요.”

 

 

 

제 할 말만을 줄줄 늘어놓은 형사는 곧 지훈에게 손을 휘휘 흔들고서 건물 내부로 자취를 감추었다. 로비 계단 위에 서서, 지훈은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승철이 끝나고 전화해, 하던 것이 떠올라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 한 통, 문자 세 통. 발신자는 전부 승관이었다. 반대쪽 주머니를 뒤적여 이어폰을 연결한 지훈은 승철에게 전화를 걸면서 승관의 문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눈물을 의미하는 이모티콘이 주를 이룬 가운데 읽을 수 있는 거라고는 젊은 형사가 남아 있다, 승철과 한참을 얘기하는 것 같더니 우리를 하교시켰다, 정도뿐이었다. 자판 위에 손가락을 올려 둔 지훈이 느리게 답장을 입력하는데 승철이 전화를 받았다. 주위가 생각보다 시끄러워서 지훈은 이어폰 한 쪽을 빼 들고 볼륨을 몇 칸 낮추었다.

 

 

 

, 끝났어?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좀 전에 끝났어요. 선배 어디세요? 거기 되게 시끄러운데.”

, 지훈아. 형 지금 장례식장이야. 너도 와야지, 정한이네 부모님 두 분 다 해외에 계셔서 들어오기 힘드실 것 같다고 연락 왔거든. 우리라도 지키고 있어야지, 어떡하겠어.

……그럼, 제가 지금 거기로 갈까요?”

그럴래? 형이 자리 비우기가 좀 그래서. 너 도착하기 전에 지수 올 거니까 내가 병원 앞에 나가 있을게. 병원 위치 문자로 보낼 테니까 택시 타고 와, 형이 택시비 줄게. 돈은 있어?

카드 있어요. 지금 바로 택시 잡아서 타고 갈게요.”

 

 

 

, 하는 승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훈은 되는 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후우, 하고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길고 깊었다. 온 몸에 들어찬 산소를 다 빼내는 느낌으로 숨을 내뱉은 그가 곧 이어폰을 깊게 끼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플레이리스트를 뒤적이다가 랜덤 재생을 선택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으니 지난 두 번째 출품작의 메인 테마였던 인디밴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도로가에 서서 지훈은 택시 몇 대를 멍하니 떠나보내고, 네 번째 택시가 먼저 제 쪽으로 다가와 탈 거냐고 물을 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그 안에 올라탔다.

 

 

실감이 나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무심코 바라본 창 밖에서 가는 눈발이 바람에 실려 날아다니고 있었다.

 

 

 

 

 

 

 

**

 

 

 

 

 

 

 

내가 택시에서 내렸을 때 승철은 병원 밖으로 막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발견했으나 그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반쯤 흐트러진 넥타이를 억지로 조여 맨 승철은 죽 늘어선 커피 자판기로 걸음을 옮겨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곧 자판기에 동전을 밀어 넣었다. 자판기 버튼을 눌러 놓고 그는 도로가를 마주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선 자리에 주저앉았다. 떨어지는 고개, 길게 내쉬는 듯한 한숨. 나는 가만히 서서 승철을 바라보고 있다가,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레 승철의 맞은편에 멈추자,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그가 내 운동화 앞코를 보고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길이가 짧은 차양이 막아주지 못한 눈발이 그의 머리 위에 앉았다가 순식간에 녹았다.

 

 

 

왔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좀 더 걸릴 줄 알았더니.”

택시가 바로 잡혀서요. 선배 자리 비워도 되는 거 맞아요?”

, 좀 전에 지수 왔어. 밑에 지수랑 승관이 있으니까 괜찮아. 어차피 오고 가는 손님도 몇 명 안 되니까. 너 저녁 먹어야지.”

괜찮아요, 생각 없어요.”

 

 

 

인사치레 비슷한 말들이 이어진다. 그런 진부한 대사의 나열, 그리고 내 단호한 대답에 승철은 별달리 할 말이 없었는지 작게 바람 빠지듯 웃어 보이고 자판기 안에 들어있던 종이컵을 꺼내어 내 쪽으로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핫초코가 종이컵을 반 정도 채운 채 찰랑거리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커피를 잘 못 마신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 손으로 종이컵을 쥐어 차게 식은 손끝을 녹이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퍽 퉁명스레 말이 나간 것 같아 금세 미안해졌으나, 승철은 다 이해한다는 느낌으로 내게 시선을 건네고 있었다.

 

 

 

고마워요, 선배. 잘 마실게요.”

에이, 뭐 그런 거 가지고. 다음에 너도 커피 쏴, 그럼 되지?”

알겠어요, 다음에는 자판기 커피 말고 비싼 커피 사 드릴게요.”

 

 

 

내 딴에는 꽤 진지하게 뱉은 말에 승철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기억해 둬야지. 하는 투가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느낌이 달랐다. 핫초코를 쥐고 한 모금, 입술을 적셔 본다. 금방이라도 질릴 것 같은 단 맛에 추위마저 잠시 잊히는 듯했다. 승철의 어깨 너머로 아까보다 굵어진 눈발이 휘날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날 잡아 끄는 탓에 이상한 스텝을 밟아 차양의 바운더리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승철이 먼저 나무 벤치에 걸터앉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물었다.

 

 

 

지훈아, …… 잘 하고 왔어? 어때?”

그냥, 생각보다 별 거 없던데요? 아는 대로만 말하면 될 것 같아요. 형사님도 꽤 좋은 분이신 것 같고.”

혹시, 우리 애들 중에 관련 있는 사람이 있을까?”

관련은 다 있겠죠. 그래도 타살처럼 보이지는 않는다고형사님께서 그렇게 말해 주셨으니까 일단은 믿어 보려고요.”

그래. 난 우리 애들 의심하고 싶지가 않다. 혹시나 관련이 있다고 해도.”

저도요. 그럼 형은 언제가세요?”

일단 내일은 순영이랑 지수가 다녀오기로 했어. 남아있던 젊은 형사가 그렇게 하자고 하더라고. 난 좀 뒤로 밀릴 것 같은데, 차라리 그게 낫지 싶다.”

 

 

 

특정한 단어가 쏙 빠진 대화였음에도, 우리는 끝까지 그 단어를 입에 담지 않은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마 내가 그렇듯이, 승철 또한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동아리의 부장으로서 누구보다 짊어지고 가야 할 감정이 많을 그는 그래 봤자 나보다 고작 한 살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사실, 난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단지 기분이 이상할 뿐이었다. 정말로, 이상하다고밖에 서술할 수 없는, 그런 기분.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종이컵 끝을 씹으며 멀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올려다보는데, 승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께에 앉은 눈을 털어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무릎에도 하얗게 눈발이 앉아 있었다.

 

 

 

지훈아. 혹시 집에 들어가 봐야 된다거나, 그런 거 있어?”

아뇨, 없어요. 열두 시 전까지만 들어가면 돼요.”

그래? 그럼 너도 밑에 잠깐 들렀다 가.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당연히 가야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승철이 내게 시선을 건넬 때 나는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다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을 뿐이다. 그 바람에 종이컵을 미처 버리지 못하고 벤치 위에 두고 왔다. 아마 바람에 날아갔겠지. 병원 특유의 이질적인 공기에 절로 입술이 깨물린다. 반쯤 멍한 정신을 하고 승철의 뒤를 따라 땅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찬바람에 바싹 마른 입술이 앞니에 깨물려 또 사방으로 갈라지는 것을 느낀다. 만약에, 정한을 마주했을 때에도 눈물이 나지 않거나 슬프지 않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잠깐 동안 십 수 번은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가장 조용한 구석자리, 사람이 없어 공허하게 빈 방 안에 널린 모포담요와 일회용 식기 몇 개, 딱 세 개 놓인 흰 국화, 그 위로 검정 테두리의 액자 안에 걸린 정한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짐을 느끼고 그 앞에 절망하듯이 주저앉아야만 했다. 이것은, 일종의 불가항력이었다. 걱정하던 대로 눈물이 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죽고 싶을 정도로 맘이 저렸다. 벽에 기대어 선잠이 들었던 지수가 내 무릎이 꺾여 바닥과 충돌하는 소리에 눈을 떠 이쪽으로 다가왔다. 지훈아, 괜찮아? 하는 물음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온 시간 가운데 가장 해사하게 웃고 있는 정한의 사진은, 지난 영화제 참가 후 그가 내 휴대폰을 가져다가 찍어 놓은 사진이었다. 제 머리 위로 팔을 높게 쳐들어 휴대폰을 휘젓던 그의 손, 사진을 단체 채팅방에 유포하겠다는 내 진지한 말에도 그러라며 웃어넘기던 그의 얼굴, 기어이 올라오고 만 그의 사진을 다 함께 저장하며 웃던 우리들. 그 모든 것이 영상 클립 재생하듯 눈앞으로 스치고 지나간다. 왠지 조용한 장례식장 한 구석에서 정한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국화를 쥐고, 한 단 아래에 내려 두고, 자세를 깊이 낮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이후 내가 피운 향이 반 토막 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정한의 영정 앞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실감이 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어디에선가 그가 나타날 것만 같고, 그의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 것만 같지만,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기분. 윤정한은 이제 정말로 곁에 없다, 라는 사실이 뇌리에 도장 찍히듯 강하게 박혔다. 밖에는 더 거세진 눈이 바람에 섞여 휘날릴 것이다.

 

날이 춥다. 그리고 맘이, 내 마음이 춥다.

끝까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2. 2학년 4반 권순영

 

 

 

 

 

정한이 형이 세 번째 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것은 지난 7, 영화제 참가 차 부산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였다.

방을 미리 예약하지 못해 겨우겨우 찾은 민박은 남자 고등학생 7명이 구겨서 잔다고 해도 너무나 비좁은 4인실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대한 몸을 웅크려 둘러앉은 채 가운데 빈 공간에 영화제 수상 트로피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숙소에 들어온 것만 해도 10시가 다 되었으니까, 두 시간 쯤 지나자 지수 형이 먼저 앉은 자리에서 상체를 뒤로 눕혀 몸을 구기더니 잠을 청했다. 내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승관은 곧 내 허벅지를 베개 삼아 지수 형과 다리를 이리저리 겹치더니 그대로 숙면에 빠져 들었다. 한 시 반 쯤 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나와 정한이 형, 승철이 형 정도였다. 민규는 눈은 뜨고 있었으나 부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쉴 새 없이 떠든 탓에 이미 정신은 잠에 든 것 같았다.우리는 소중한 트로피를 부엌 싱크대 옆에 놔두고 이리저리 뒤섞여 잠에 든 부원들을 굴리고 밀어 한데 모은 뒤에, 최소한의 베개를 머리 아래에 끼워 주고 최소한의 이불을 덮어 주었다. 거의 부엌으로 밀린 상태에서 다시 다리를 접고 몸을 웅크린 우리 셋은 각자 하나씩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기로 약속을 하고서, 탈탈 소리가 나는 낡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한 시간 정도 더 대화를 나누었다. 제 무릎에 턱을 괸 채 꾸벅꾸벅 졸던 민규가 점차 미끄러져 쿵 소릴 내며 바닥에 머릴 박고서도 잠을 잘만 자고 있을 때, 그런 민규를 잠깐 돌아본 형이 조용한 목소리로 먼저 그 얘길 꺼낸 것이었다. 다들 자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특유의 팔랑거리는 투가 사라진 목소리는 작으면서도 어딘가 진중한 느낌까지 들었었다.

 

 

 

, 세 번째 대본 쓸 거야. 이거 너네한테 처음 말하는 건데, 어때?

어떻긴, 우리야 네가 대본 쓴다고 하면 너무너무 좋지.

맞아. 형 대본이 그냥 나오는 거 아닌 거 우리도 다 알잖아. 혹시 계속 쓰고 있었어?

아니? 이제부터 쓰기 시작하려고. 그 전부터 구상은 대충 해뒀는데, 최근에 플롯이 제대로 잡혔어. 그거 조금 손 보고, 8월 초부터 작업 시작하려고.

, 진짜 멋있어. , 형은 진짜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프로다운 사람인 것 같아.

에이, 내가 뭘. 그냥 취미로 쓰는 건데. 딱히 재미있는 내용을 다루는 것도 아니잖아.

 

 

 

형은 내 칭찬에 겸손한 말들로 대꾸하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진심, 그것도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동아리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 이유라면 딱 하나, 역시 호기심으로 읽었던 정한이 형의 대본 습작 때문이었다. 맘대로 들춰본 것에 대해 사과할 생각도 못 하고, 그 날 이후로 형의 1호 팬을 자처하며 홍보를 가장해 승관, 민규, 지훈까지 동아리로 끌어 들였었지. 문득 잘 뒤섞여 자고 있는 애들을 돌아보았다. 이상하게도 나의 정한이 형 팬 활동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해 주는 승철이 형이 키득키득 웃으며 시답잖게 손을 들어 내 머리칼을 죽죽 쓸어 내렸다.

 

 

 

, 네 대본 좋잖아. 그래서 권순영이 너 1호 팬 할 거라면서, 저 애들 다 끌고 들어온 거 아냐. 순영이 아니었음 우리 동아리 벌써 없어졌을 걸?

아아맞아, 그건 인정. 그런 점에서 내가 순영이 많이 좋아하잖아, 그치?

, 순영이 심쿵!

 

 

 

새벽이라 그런지 다들 목소리도 낮고 분위기가 착착 가라앉는 것이 못내 맘에 걸려서 일부러 과장하며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더니 예상치 못하게 두 형 모두 박장대소했다. 괜히 뿌듯한 기분에 어깨를 펴고 으쓱이자 그걸 정면으로 마주한 정한이 형이 바닥을 때려가며 웃어댔다. 쓸 데 없이 우울한 분위기는 역시 우리 동아리에 어울리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며 형들이 진정하는 동안 팔을 쭉 뻗어 잠에 든 네 사람 위에 엉성하게 걸쳐진 이불을 곱게 펴 덮어 주었다.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승관의 팔을 고집스레 이불 속으로 밀어 넣고 나서 다시 형들 쪽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우리들 가운데에 놓인 승철이 형의 휴대폰이 길게 진동을 울렸다. 발신자는 담당 선생님. 승철이 형은 휴대폰을 조심스레 들어 전화를 받았다. 굳이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지 않아도 주위가 워낙 조용한 탓에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꽤 선명하게 들려왔다.

 

 

 

「― , 승철아. 혹시 자다 깼니?

아니요, 저 지금 정한이, 순영이하고 조용히 얘기하고 놀고 있었어요. 좀 이따 자려고요. 쌤 서울 도착하셨어요?

「― . 방금, 10분 전에 도착했어. 지금 집이야. 너희 내일 학교 안 간다고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너무 걱정 마세요. 내일 기차 예약 시간에 늦지 않게 준비시켜서 서울 안전하게 올라갈게요. 쌤 얼른 주무셔야죠, 벌써 시간이 두 신데.

「― 이거 끊고 바로 자려고. 승철이랑 나머지, 정한이랑 순영이도 전화 끊으면 씻고 얼른 자, 피곤하겠다. 잘 자고, 내일 조심히 올라오고.

쌤 순영이예요. 안녕히 주무시고 낼 모레 학교에서 봬요.

뭐야, 인사하는 거야? 쌤 저 정한이고요, 안녕히 주무세요.

 

 

 

승철이 형이 곧 전화를 끊을 것 같아 멋대로 끼어들어 인사를 한 탓에, 정한이 형도 급하게 쌤께 인사를 건넸다. 전화 너머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곧 잘 자, 하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휴대폰 상단에 뜬 시계가 두 시 반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야 눈이 좀 뻐근해 손등으로 이리저리 부비고 있으려니까, 내 가까이에 떨어져 있던 베개를 집어 든 정한이 형이 내 팔을 당겨 베개 위로 날 눕게 했다. 약간의 공간이 남은 구석자리에 누운 꼴이 되었을 때,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이불을 덮음으로써 말린 정한이 형이 그냥 자, 하고 덧붙였다. 반쯤 눈을 감은 채 그럼 형은 대체 어디서 잘 건데요, 하고 묻자 형은 어디서든 자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왠지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는지, 승철이 형이 정한이 형을 당겨 내 가까이에 눕게 하고 자기도 그 근처의 공간에 몸을 끼워 넣었다. 결국 우리 셋도 난잡하게 뒤섞인 채 누운 꼴이 된 것이다. 먼저 잠든 넷과 별 다를 바가 없자 누운 상태에서 웃음이 터졌다. 불 꺼진 방, 잠깐 동안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맴돌다가 서서히 흐려졌다.

 

 

 

잘 자, 얘들아. 내일 열 두 시 전에는 일어나야 된다. 알지?

너나 늦잠 자지 마, 승철아. 순영이 잘 자고.

형들 잘 자. 나 발로 차면 안 돼, 알겠지?

 

 

 

 

끝까지 제 할 말만 남기고, 각자 잠을 청하느라 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잠자리가 불편해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하려 눈을 꾹 감고 있었고, 승철이 형은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벌써 잠에 든 것 같이 저 멀리서 거센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눈을 감은 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점점 잠이 드는 것 같았다. 아마 정신이 먼저 꿈나라로 가 버렸을 때였나, 꿈을 꾸는 것처럼 정한이 형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영아, ? 자나.

형이 너한테, 세 번째 대본…… 제일 먼저 보여줄게.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세 번째 대본이 있다는 것 정도만 겨우 알고 지내왔었으니까.

 

아마 꿈이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진실을 밝힐 수 없는, 너무나도 생생한 꿈.

 

 

 

 

 

 

 

**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각, 쪽창 하나 없는 취조실은 그것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어두컴컴했다. 교복을 입은 채 취조실 안으로 주춤주춤 들어오는 순영은 여전히 눈가가 발갰다. 지칠 만큼 울었을 테니 어쩌면 눈가가 잔뜩 부어있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만년필을 손에 쥐고 굴리던 형사는 조심스레 의자를 끌어당기다 듣기 싫은 소리가 나자 화들짝 놀라는 순영을 바라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웃지 마세요. 민망했던 듯 작게 터져 나온 목소리가 반쯤 잠겨 있다. 형사는 만년필을 수첩 옆에 내려놓고 넌지시 물었다.

 

 

 

어제 많이 울었나 보네, 괜찮아요?”

, 진짜……. 저 진짜 괜찮아요, 앞에 보일 거 다 보이고.”

알겠어요, 알겠어. 눈이 안 보인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몰라요, 학교에서 오는데 승관이가 자기가 보호자 해야 된다고 박박 우겨서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하여튼 진짜…….”

 

 

 

순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고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며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겨울바람에 차게 식은 손이 눈에 닿아 뜨끈한 눈가가 그런 대로 식는 것 같았다. 형사는 작게 소리 내어 웃다가 곧 만년필을 손에 쥐고서 수첩을 열었다. 빈 종이에 숫자 2를 그린 그가 순식간에 진지해진 음성으로 본론을 꺼내었다.

 

 

 

, 그럼 시작해 봅시다. 친구도 기다리니까 빨리 하고 나가야지. 학생 학년 반 이름 말해 주세요.”

, 2학년 4반 권순영이요.”

그래, 순영 학생. 학생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의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서 현재 이곳에 와서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본 형사가 묻는 질문에 대해서 가감 없이, 진실 되게만 말해주시면 되고, 묵비권을 행사하실 수 있으니 억지로 다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순영 학생이 속한 단편영화 제작부에 대해서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평소 동아리 분위기가 이랬다든가, 그런 거 위주로요.”

 

 

 

시선을 둘 데가 없어 수첩 위로 만년필이 휘날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순영은 책상 아래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둔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서 한참을 꼼지락대며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곧 비장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형사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서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 그렇게 보시니까 또 웃겨서. 암튼 저희 동아리는요, 진짜로 빠지는 사람 하나 없이 다들 친하고, 분위기는 늘 좋았어요. 형들이 저 포함해서 2학년 친구들도 많이 챙겨 주셨고, 저희도 형들이랑 장난도 치고 잘 따르고 해서 늘 화기애애했어요.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있었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기억에 남는 일은 전부 다 웃고 즐기고 했던 것밖에 없어요. 저희 진짜 다 친했거든요.”

동아리 분위기가 꽤 좋았나 보네요. 그럼 거기서 순영 학생은 무슨 일을 했죠?”

저는 진행 팀이었어요. 민규랑 같이. , 진행 팀이 뭐 하는 거냐면요, 우선 처음 들어왔을 때는 슬레이트 치는 것부터 했었어요. 그러고서 촬영 장비도 옮기고, 장비 철수도 하고, 촬영장 정리 같은 것도 하고 그랬죠. 어쨌든 진행 팀이 영화 촬영 진행이 원활하도록 발 벗고 나서서 돕는 스텝이니까 특히 궂은일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심부름이라든가, 뭐 사오고 그런 거요.”

 

 

 

줄줄 얘기를 늘어놓는 순영은 어느새 추억에 젖은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있었다. 형사는 저도 모르게 슬쩍 입 꼬리를 끌어당기며 만년필을 쥐고 그의 이름이 적힌 아래에 특이사항 없음.’ 이라고 써 내렸다. 곧 만년필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그가 지그시 순영을 응시하고서 다음 질문을 입에 담았다. 공중에 떠돌다 흩어지는 음성에 순영의 얼굴이 차게 굳어 갔다.

 

 

 

그럼 순영 학생,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 해야죠. 정한이 형은, 어떻게 보면 저한테 정말 은인이고, 고마운 사람이고, 항상 존경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사실 이 동아리에 호기심으로 들어왔었는데, 우연히 정한이 형이 쓴 대본을 봤거든요. 그걸 본 이후로 동아리에 들어온 걸 후회하지 않아요. 형의 대본과 영화가 저를 지금까지 이끌어준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예요.”

정한 학생의 시나리오가 순영 학생을 완전히 매료시켰다는 거네요. 맞습니까?”

, 맞아요. 그래서 제가 자칭 타칭 정한이 형 1호 팬이다, 하고 다녔어요. 형도 저 많이 챙겨 주셨고, 저번에 영화제 출품작에서 제가 조연을 맡았었는데 그 때도 직접 연기 지도까지 해 주면서 격려 많이 해 줬었어요. 형은 정말, 그 자체로 너무나 좋은 형이에요.”

특히 더 상심이 컸겠네요.”

. 아직까지도 형이 왜 그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가요. 믿기지도 않고.”

 

 

 

정한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영의 얼굴은 웃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말을 마치고 금세 촉촉이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부비는 게 못내 안쓰러워서, 형사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의심사항 전무.’라는 글귀를 덧붙였다. , 나 왜 자꾸 울지? 혼자 중얼거리며 눈가를 꾹꾹 누른 순영이 겨우 눈물을 삼키고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아래로 떨어뜨린 손을 단단하게 쥐어, 그는 그때부터 제 허벅지를 간헐적으로 쿵쿵 두드리기 시작했다.

 

 

 

슬픈 게 당연하지, . 괜찮아요. 다 울고 털어내는 건데.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순영 학생?”

괜찮아요, 진짜! 저 아까만 잠깐 그랬고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좀 전에 언급한 민규라는 친구는 순영 학생과 어떤 사이인가요?”

, 민규요? 민규는 제 친구예요. 저랑 민규랑 승관이랑 같은 중학교를 나왔거든요. 그래도 제가 민규를 제일 오래 봐왔을 거예요. 제 간곡한 부탁으로 동아리에 들어 왔는데, 워낙 성격이 싹싹해서 형들이랑도 잘 어울리고 동아리의 핵심 인물이 됐죠. 민규 좋은 애예요. 근데 왜요?”

앞서 지훈 학생의 참고인 진술 과정에서 현재 진행 중이던 세 번째 영화에 대한 정보를 최승철 학생이나 김민규 학생이 갖고 있을 거란 얘기가 나왔습니다. 본 형사가 김민규 학생과 윤정한 학생 사이의 관계에 대해 조사해야 할 점이 있다고 판단되었는데, 둘 사이의 관계는 평소 어떻던가요?”

……. 저도 지켜보고 추측만 한 거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정한이 형이 민규한테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았어요. 정한이 형이 이번 영화 주연 맡은 것도 다 민규가 옆에서 많이 응원해 주고 도와준 덕분이었거든요.”

그럼 원래 윤정한 학생이 주연을 맡은 적은 없었다는 말인가요?”

, . 저도 승철이 형한테 들은 건데, 형이 원래는 연기자가 꿈이었대요. 근데 재작년에, ……,”

왜 그러시죠?”

이건, 이건제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아니라서……. 나중에 승철이 형한테 물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죄송해요.”

 

 

 

평소와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조심 말을 이어가던 순영은 곧 제가 뱉은 말에 제가 놀라 급하게 입을 꾹 다물었다.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굴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그는 이내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책상 위에 왼손을 두고 간헐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형사는 그런 순영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만년필을 들어 수첩 제일 아래에 과거 기록 조사 필요라는 문구를 덧붙여 적었다. 책상 아래로 내린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한참이나 손장난 치며 제 운동화 앞코를 응시하던 순영은, 곧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밀어 넣었다.

 

 

 

이제…… 끝난 거 맞죠?”

, 수고했어요, 순영 학생. 가 봐도 좋아요. 아까 친구가 기다린다고 했지 않나?”

 

 

 

, 그럼 저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애써 입 꼬리를 당겨 웃어 보이며 밝게 인사를 건넨 순영은 조금 비틀대듯이 어색한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그 좁고 어두운 공간을 빠져나갔다. 희미한 알전구 불빛 아래, 형사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서 만년필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곧 그의 만년필 펜촉이 지나간 수첩의 새 페이지에는 윤정한, 김민규, 과거라는 단어들이 차례로 휘갈겨져 있었다.

 

 

 

 

 

 

 

**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왠지 죄 짓는 기분이 들어 도망치듯이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승관은 경찰서 로비 계단에 쭈그려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발소리를 죽이고 뒤에서 다가가 어깨를 밀어버린다든가 하는 장난을 쳤을 테지만 그런 기분이 아니어서 그냥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을 뿐이다. 승관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슬쩍 입 꼬리를 당겨 웃어 주었다. 그의 전화가 길어지는 동안 그 옆에 비슷한 자세로 쭈그려 앉아 휴대폰을 꺼내 드니, 승철이 형과 지훈의 문자가 차례로 쌓여 있었다. 다들 본인 같은 문자를 보냈다 싶어 절로 터지는 웃음을 입술 새로 흘리며 답장을 하고 있으려니까, 승관이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키며 내게 물었다.

 

 

 

너 혹시 다시 학교로 간다거나, 그럴 생각은 없지? 지금 등교 거부한 애들도 좀 많아서 학교에서도 자체 휴교 생각 중이라는데. 어떻게 할 거야?”

학교 안 가면 어디로 가?”

어딜 가긴, 너 어제 그러고 울다가 장례식장도 한 번 못 들렀잖아. 그래도 얼굴은 봐야지. 승철이 형이 너랑 같이 오냐고 묻던데, 갈 거지?”

 

 

 

장례식장, 이란 단어를 억지로 한 귀로 흘리며 지훈의 문자에 대한 답장을 타이핑하고 있었는데, 퍽 태연하게까지 느껴지는 승관의 음성이 귓가를 떠날 생각을 않았다. 피하려고 피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닌데,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데, 어쩌면 나는 내 감정에 휘둘려 형을 피하려고 했던 거였나? 하는 생각이 수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승관은 이내 제 손을 아래로 내밀었다. 그것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같은 자세로 구겨져 있던 다리가 저릿하다. 두터운 패딩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은 승관은, 멀리 도로가를 바라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괜찮아. 나는…… 그렇더라고.”

?”

마음이 편하지 않은 거 나도 알아. 나도 어제 너 보내고 승철이 형이랑 둘이 가서 많이 울었어. 형이 나보고 그러다 네가 죽겠다고, 그만 좀 울라고 타박도 했어. 근데, 그러고 나니까 좀 괜찮아 지더라고.”

……그래도, 너랑 나랑 같겠냐.”

지금 당장 인정하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서 얼굴은 봐야 맘이 좀 덜 불편할 거 아냐. 내가 형 맘 편하게, 좋은 데 가서 살게 해 주려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 그런 얘기도 들려 줘야지. 형이 어디선가 듣고 있을 지도 모르잖아? 너 엄청 대견해할 걸? 우리 순영이 잘 했다하고.”

 

 

 

그렇게 말하고서, 승관은 아직까지 다리가 저려 허벅지를 콩콩 두드리고 있는 날 바라보며 입 꼬리를 끌어당겼다. 왠지 그 웃음에서 정한이 형의 얼굴이 비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시답잖은 몇 마디에 정체 모를 용기 같은 게 차오르는 것이었다. 그래, 울더라도 가서 얼굴 보고 울어야지, 싶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패딩에 몸을 파묻은 승관의 팔을 당겨 경찰서 건물을 천천히 벗어나면서 왠지 모르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귀신의 존재를 믿기를 잘했다는, 아마 승관이 듣는다면 한동안 이상한 놈 취급할 만한 생각. 도로가에 서서 승관이 콜택시에 전화를 거는 동안, 나는 햇빛이 반쯤 가려진 채 또 눈을 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저 위 어디에선가 정한이 형이 내 유치한 생각마저 모두 엿듣고서 혼자 키득키득 웃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승관이 분명히 생각보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병원 특유의 분위기가 싫어 병원을 가지 않는 나로서는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 자체가 이물감이 들었다. 조금 산소가 적은 공기가 내 몸을 감싼 느낌이랄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으려니까 승관이 엘리베이터의 하강 버튼을 누르고서 손을 뻗어 내 미간을 문질러 폈다. 인상 좀 펴라, 하는 말에 보란 듯이 입 꼬리를 당겨 웃어 주기는 했는데, 보나마나 엄청 이상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올 때까지만 해도 나를 둘러싸고 있던 원인 모를 용기가 병원 정문에서 다 털어져 나간 것 같았다. 불안, 초조, 그리고 그 비슷한 단어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배회하는 가운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승관은 내 등을 떠밀어 네모진 기계장치 안으로 날 집어넣으면서 옆에 착 달라붙었다. 아마 그에게는 내 기분이 저 바닥까지 깔릴 대로 깔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건 뭐랄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있지, 나 안 괜찮을 것 같아.”

? , 뭐가?”

무서워,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막연하게.”

…….”

눈을 감고 걸어가야 할까?”

 

 

 

장례식장이 늘어선 복도를 상상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들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승관이 내 말에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그냥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효과음을 내며 지하 2층에 멈춰 섰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병원 로비와는 다른 공기가 훅 불어 들어온다. 사람 향기가 많이 배어 있기는 한데, 어딘가 모르게 슬프고, 눅눅한 느낌. 무의식중에 승관의 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승관은 내게 왼쪽 팔을 붙잡힌 채 어색한 자세로 코너를 돌아 복도 끝으로 나를 이끌었다. 스쳐가는 사람들의 음성들. 어느새 뻗어진 승관의 팔이 내 어깨를 간헐적으로 두드리며 조심스레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기어이 도착한, 복도 구석 자리의 빈소 안에는, 흐트러진 셔츠를 걸치고 진녹색 모포 담요를 두른 채 선잠에 든 승철이 형과, 의미 없이 숟가락질을 하는 지훈과,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보이는 단상 위로 흰 국화에 둘러싸인 채 환하게 웃는 정한이 형의 얼굴이, 있었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 현실과 희망이 강하게 부딪쳐 희망이 산산조각 났고, 나는 그대로 입구에 주저앉았다. 그래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마치 불가항력의 힘이 나를 내리누른 느낌이었다. 승관은 내 옆에 서서 내게 시선을 주는 듯하다가, 곧 먼저 신발을 벗고 나를 지나쳐 갔다. 차라리 그게 낫다. 내 눈이 울고 있는지, 내 마음이 울고 있는지, 그마저도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제보다 눈물은 적게 났지만, 심장을 누군가 손으로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숨이 턱턱 막혔다. 눈물이라도 나면 좋을 텐데. 나는 단지, 형의 얼굴을 아주 잠깐 마주쳤을 뿐이었는데, 저 사진을 마주했던 우리들의 추억이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하자 견딜 수가 없어졌다. 고개를 숙여 좁아진 시야로 다가오는 지훈의 발이 눈에 들어온다. 선명하던 그의 발이 금세 뿌옇게 흐려졌을 때, 나는 그제야 내가 울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깨 위로 닿는 지훈의 손이 느리게 등을 쓸어내리고,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견뎌야 하는 현실이 무겁게 버티고 있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나는 지훈을 끌어안아 버렸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차라리 소리 내서 울어. 그게 나아.”

……, 지훈아, …… 나 너무 무서워.”

나도 무서워, 나도 무섭고승관이도 무섭고, 너도 무서워. 원래 다 그런 거야.”

다시, ……, 형이 다시 못 온다는 게, 너무 무서워…….”

그래, 그치만……, 저 선택을 한 선배는 얼마나 무서웠을까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선배를 좋은 곳으로 보내 줘야만 해.

차분한 지훈의 음성이 그의 품에 안긴 내게로 큰 잔향을 남기며 울려 퍼졌다. 순간, 심장을 옥죄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좀 전에 들었던 승관의 말들이 한쪽 귓가에서, 또 지훈의 잔향이 한쪽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 잘 하고 있는 거겠죠? 형이 어디선가 듣고 있을 거라고, 아니듣고 있어야만 한다고 집요하게 바라고 또 바랐다. 환청처럼, 어디선가 잘 하고 있어, 잘 했어, 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삶을 살아온 이래로 가장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또 울었다. 견뎌낼 수 없는 나의 공포감만큼,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던 형의 공포감을 위로해줄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이만큼이나 당신처럼 두려워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몸이 힘들도록 울었던 것 같다. 내 등을 규칙적으로 토닥이는 지훈도, 어쩌면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오고 가는 발길이 없어 조용하기 그지없는 장례식장을 채운 나의 설움에 승철이 형이 잠에서 깬 것 같았다. 흐려진 시야로 형이 다가오는 것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승철이 형은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나와 눈을 맞추는 듯하다가, 입 꼬리를 당기며 내 어깨를 느리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내 대신 단상 앞으로 가서, 정한이 형과 눈을 맞추고, 국화를 들어 한 단 아래에 내려놓고는 새 향을 피워 올렸다. 향냄새가 조용히, 서서히 이 안의 공기와 섞여 들고, 지훈은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부볐으며, 나는 입술을 깨물어 정한이 형의 영정을 마주하고서,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내 등 뒤를 스쳐 지나가는 승철이 형이 문득 승관에게 그렇게 물었다. 뒤를 따르는 승관의 발소리가 바닥을 타고 울린다.

 

 

 

승관아, 혹시 민규 연락 돼? 형 전화 계속 안 받는데.

그러니까요, 저도 어제 밤이랑 오늘 아침에 해 봤는데 안 받더라고요. 전원이 꺼져있는 건 아닌데…….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내 머릿속에도 흘러가듯이 의문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민규는, 어제 저녁 날 바래다 준 이후부터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으니까.

 

 

 

 

 

 

 

 

 

 

#3. 3학년 7반 홍지수

 

 

 

 

 

정한이 새 대본을 완결 냈다고 우리에게 공식적으로 알린 것은 원서 접수가 끝난 9월 말 어느 오후였다. 그가 세 번째 대본을 쓰고 있더라는 건 8월 초쯤엔가 지나가듯이 나와 승철에게 말해줬던 적이 있어서, 그 선언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저 대본 작업이 빨리 끝났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평소처럼 남는 책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던 정한은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서 놀란 표정의 후배들특히 승관과 순영을 바라보며 키득키득 소리 내어 웃었다. 사실 정한의 대본 작업이 끝났다는 말은 공공연히 촬영 시작이라는 말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승철도 의아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촬영한다고? 승철이 묻자 그제야 정한이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일단 그렇다고 알려주는 차원에서 얘기 꺼낸 거야. 당장 내일부터 촬영하기에는 승철이가 너무 힘드니까. 촬영은 10월 초부터 하고 싶어. 이번에는 내가 연기할 거거든.

「……네가?

, 연기 해보려고. 지난 번 출품작 촬영하는 거 보니까 다들 재밌어 보여서. 무지 탐나는 거 있지?

 

 

 

정한은 눈을 접어 샐쭉 웃어 보이고, 측면에 앉아 있던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 이제 괜찮아.’ 하고서 입모양으로 말해 주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난 믿을 수 없어서 그렇게 되물으려다가, 동아리 실에는 그 일을 몰라야 할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나와 반대쪽 측면에 앉은 승철이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게 나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터지면서도 왠지 짠했다. 우리 말고 유일하게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순영이 눈을 크게 떠올리고 정한을 올려다보는데, 그는 나에게 했던 것처럼 순영에게도 괜찮아, 하고서 소리 내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조금 뒷자리에 앉아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지훈이 입을 열었다.

 

 

 

근데, 그럼 선배 혼자 주연 하시는 거예요?

아니, 투탑이야. 개인적으로 난 민규랑 같이 하고 싶은데, 어떤 것 같아, 승철아?

, 난 지수가 출품작 하면서 꽤 안정적으로 연기했다고 생각해. 그래서 지수가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정한은 자신이 이름을 뱉은 민규에게로 넌지시 시선을 던졌다가, 승철이 나를 거론하자 곧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길을 잠깐 동안 마주하고 있던 민규의 표정이 묘했다. 의아한 것도 같고, 조금 당황스러운 것도 같았달까. 하지만 배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으로써는 나 또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부원 모두의 시선이 승철과 정한 사이 어딘가로 집중되었고,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이 몇 갈래 느껴지자 승철이 멋쩍게 웃으며 선택권을 정한에게 넘겼다.

 

 

 

근데 지금 배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니까, 우리 작가님이 제일 어울릴 것 같은 사람으로 선택하시면 되겠다. 그치? 네가 주연이기도 하니까 배역이랑 잘 맞으면 연기하기도 편할 거고.

, 역시 그렇겠지? 내가 그 말 하려고 했었거든. 난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에는 민규가 지수보다 잘 어울릴 것 같아. 민규야, 같이 연기 할 거지?

? , . 열심히 해 볼게요, 감사해요.

 

 

 

주춤주춤, 눈치를 보던 승관이 와아아하며 분위기를 띄우듯 박수를 치자 그에 동조하듯 박수 소리가 서서히 커졌다가 잦아들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박수를 치면서도, 나는 왠지 어딘가 모르게 켕기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조금 전, 제안이 아닌 확인의 의미를 띄었던 정한의 물음과 어색하게 따라 붙은 민규의 대답. 아마도 상대 배역이 이미 정해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나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정한이나 민규를 의심할 마음은 없다. 원서 접수를 하느라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기분 탓이리라, 생각하고서 모임을 파하고 동아리 실을 빠져나가는 승철과 정한의 뒤를 따라 복도로 걸어 나왔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그 때 느꼈던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진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확히 10월 초, 세 번째 영화 촬영이 시작된 1일 이후로 정한과 민규, 그리고 감독인 승철을 뺀 나머지 네 사람은 동아리 실에 가는 일이 매우 드물어졌다. 정한이 새벽 세 시 쯤엔가 단체 채팅방에 영화는 우리들끼리만 단출하게 찍고 싶다는 뉘앙스로 글을 올린 것을 다들 나중에서야 보고 발걸음을 알아서들 끊은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주로 음악실에서 촬영되었고, 공식적인 동아리 모임 시간에 나를 포함한 우리 네 사람은 동아리 실에 덩그러니 앉아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교실로 돌아오고는 했다. 처음에는 오늘 하루겠지, 내일까지겠지, 했던 게 일주일 쯤 지나자 동아리 모임 시간이 되면 우리 넷은 저마다 문제집을 싸 들고 동아리 실로 들어왔다. 고요한 분위기,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밖에 울리지 않는 가운데 괜한 궁금증이 들어 나는 지훈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훈아, 너 혹시 승철이가 이번 영화 편집에서 빠지래?

? 아뇨,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건 아닌데, 이번 영화는 길이가 별로 안 길어서 혼자 작업해도 될 것 같다고만 말하셨어요.

, 근데 저도 얼마 전에 승철이 형이 진행 팀 별로 할 일 없으니까 동아리 시간에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따로 갠톡 왔었어요. 이거 뭐 있는 거 아니에요?

그래, 나도 승철이가 예술 팀 할 일 따로 없다고 하긴 했어. 배경음악만 좀 찾아주고, 상처 분장만 좀 해 주면 된다고 하긴 하던데.

 

 

 

지훈이 대답을 줄줄 늘어놓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순영이 무료하게 샤프 돌리고 있던 것을 멈추고 기다렸다는 듯 제 할 말을 뱉었다. 정말로 며칠 전에 승철이 내게 따로 연락해 그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나 그 얘기를 덧붙이니, 내게서 그것을 전달받았던 승관이 옆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들은 서로 엇갈리는 시선 가운데 뭔가 이상하지, 뭔가 이상한데, 같은 맥락의 말들만 줄줄 늘어놓다가 곧 이 묘한 기분을 촉발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문제집으로 시선을 꽂아야만 했다.

동아리 모임 시간이 끝나고, 청소를 위해 교실로 가려는데 문득 제 문제집을 챙기던 승관이 내 팔을 붙잡아 세웠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한참을 손장난만 치며 머뭇대던 그는 퍽 비장한 투로 내게 물어왔다.

 

 

 

, 혹시 영화 내용 뭔지 알아요? 승철이 형이나 정한이 형이 그런 얘기 안 해주나 싶어서요.

……, 승관아. 이게 진짜 이상한 게, 내가 정한이랑 늘 같이 다니는데 정한이가 영화 관련된 얘기는 전혀 안 하더라고. 애가 기분이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원래는 대본 쓰면 내용도 말해 주고 하던 게 이번에는 없더라고. 그래서 나도 내용에 대해서 들은 게 전혀 없어. 승철이는 아는 눈치인 것 같은데 내가 눈 마주치려고 하면 좀, 피하더라고.

그러니까, 이거 좀 이상하잖아요. 저번 주 토요일에, 형 원서 접수 때문에 바쁠 때 저 혼자 동아리 실에 있었거든요. 그때 정한이 형이 분장 좀 도와 달라고 해서 음악실까지 올라갔었는데, 얼굴이랑 손목인가, 그런 데에 진짜 상처가 막 있더라고요. 그래서 치료를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또 형이 해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틴트 꺼내서 칠해주긴 했는데 그건 진짜 상처였어요. 대체 어디서 다쳐 오셨는지…….

 

 

 

승관은 잔뜩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서 말을 마치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래, 얼마 전부터 정한의 몸 구석구석에 다치고 긁힌 상처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무심코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가 길게 긁힌 상처가 있기에 어디서 다쳤냐고 물었더니 말을 돌렸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어 인상을 구기고 있으려니, 내가 어지간히도 착잡해 보였는지 승관이 조심조심 다가왔다. 애초에 정한이 왜 연기를 쉬다가 다시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애한테 더 큰 부담을 줄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승관의 어깨에 장난스레 팔을 두르고 동아리 실을 벗어나 그의 반이 있는 방향으로 함께 걸어갔다. 별 일 없겠죠? 승관은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별 일 없을 거야. 애들이 누군데, 아마 내용에 엄청난 반전이 있어서 나중에 우리들한테 정식으로 보여주고 싶은 거겠지. 넌 너무 걱정 마. 혹시나 무슨 일 있을 거 같으면 형이 친구들한테 물어 볼게.

「…알겠어요. 형도 얼른 청소하러 가셔야죠.

, 이따 일 있으면 보자.

 

 

 

승관은 조금 찝찝한 듯 했으나 곧 표정을 풀고 내게 손을 흔들며 교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층 위인 우리 반으로 느리게 올라가면서 지금까지 내가 느꼈던 이상함을 논리적으로 끼워 맞추려 했지만, 그 구조 사이에 어딘가 텅 빈 공간이 자꾸만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될 대로 되겠지, 그렇게 치부하며 생각하는 걸 때려치우고 청소가 거의 끝나가는 교실에 들어가 앉았다. 내 대각선 앞자리인 정한은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변덕스런 날씨 탓에 접어올린 그의 교복 소매 밖으로 크게 붙은 반창고가 눈에 띄었다. 저기는 대체 어디서 다치고 온 거야. 금방이라도 정한을 깨워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굳이 건들지 않기로 했다. 이맘때쯤이면 정한도 저 나름대로 생각이 복잡해질 테니까. 어거지로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가 눈에 들어오는 게 하나도 없어, 나도 정한과 비슷한 자세로 엎드렸다.

 

 

우리의 세 번째 영화는 진행 팀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예술 팀은 다친 상처를 치료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

 

 

 

 

 

 

 

일교차가 큰 탓에 저녁 늦게 취조를 받으러 온 지수는 교복 위에 두꺼운 가디건과 패딩을 겹쳐 입고서 취조실 안으로 들어왔다. 의자를 끌어 당겨 앉은 그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어 무음 모드로 설정을 변경해 두고 조심조심 패딩을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 두었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고개를 든 형사가 수첩을 새 페이지로 넘기고 만년필을 돌리며 별 생각 없이 물었다.

 

 

 

저녁 먹고 오는 길이에요? 학교에서 온 건가, 교복이네.”

, 오늘은 계속 장례식장에 있었어요. 학교에서도 등교하지 말라고 해서……. 그래서 승철이랑, 아시죠? 저희 동아리 부장인데, 하여튼 걔랑 같이 저녁 먹고 여기 온 거예요. 형사님은 저녁 드셨어요?”

조사 끝내고 먹을 예정입니다. 그래서 지금 상당히 배고픈 상태고요. 질문이 빨라지더라도 이해 좀 해 줘요.”

 

 

 

형사의 너스레에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는 제 옆에 놓인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두들겨 모서리를 맞추고 그 위로 수첩을 올려놓고서 만년필을 바르게 쥐었다. 지수는 왠지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할 것만 같아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을 가지런히 허벅지 위로 내려놓았다. 형사가 곧 지수에게로 시선을 잠시 던졌다가 아래로 떨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학생 학년 반 이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3학년 7반 홍지수입니다.”

, 지수 학생. 학생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 수사에 도움을 줄 진술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본 형사의 질문에 진실 되게만 답해주시면 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면 묵비권을 행사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본인이 아는 대로 솔직하게만 답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아시겠죠?”

 

 

 

좀 전에 형사가 장난처럼 말한 대로 말이 좀 빨라진 것 같아, 지수는 멍하니 듣고 있다가 고개를 짧게 내젓고 곧 위아래로 끄덕였다. 동의를 표한 것을 확인한 형사가 수첩 위로 그의 이름을 써 넣고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최근에 촬영 중인 영화가 있었죠. 그 영화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근데 저는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고, 영화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들은 게 없어요. 정한이가 대본을 다 썼다는 얘기를 9월 말쯤21일이었나? 그 때쯤 하고 101일부터 촬영을 했거든요. 근데 촬영은 정한이랑 민규, 그리고 승철이 셋이서만 했어요. 저랑 다른 부원들은 동아리 실에서 자습을 할 정도로 할 일이 전혀 없었어요. 승철이가 따로 연락해서 다 뺐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 몰라요. 음악실에서 주로 촬영을 했다는 거 정도?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게 다예요.”

그렇다면 그 영화에 무언가 관련성이 있겠네요. 지수 학생은 동아리 내에서 어떤 역할을 했죠?”

저는 승관이라는 친구와 같은 예술 팀이요. 주로 배우 아이들의 의상을 점검해 주거나, 간단한 화장과 분장을 도맡아 했었죠. 영화 편집 때 쓸 만한 백 그라운드 뮤직을 찾는 일도 했어요. 그리고 제가 사진 찍는 게 취미라서 영화 스틸 사진도 몇 번 찍었었고, 승관이가 손재주가 좋아서 영화 포스터 제작도 했었어요. 아마 동아리 내에서는 제일 편한 일들을 해왔을 거예요

 

 

 

지수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제가 나열해 놓은 추억들이 눈앞에 선연했던 탓이리라. 미간을 찌푸린 채 퍽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고민하던 형사는 만년필 끝으로 책상을 쿵쿵 내리찍듯이 두드리다 지수의 이름 아래에 영화 관련 조사, 최승철이라고 써 넣었다. 맞은편에서 그것을 바라보던 지수는 형사의 손이 워낙 빠른 탓에 다 날아간 글씨를 해석하는 것을 포기하고 시선을 여기저기로 굴렸다. 쪽창 하나 없이 밀폐된 좁은 방, 희미한 알전구 불빛, 형사의 어깨 뒤 벽에 걸린 시계는 벌써 여덟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유 모를 싸늘함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아 지수는 입술 끝을 감쳐물었다. 형사는 곧 만년필을 손으로 빙빙 굴리며 두 번째 질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

 

 

 

지수 학생, 평소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의 관계는 어떠했죠?”

정한이랑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쭉 같은 반이었어요. 승철이가 정한이를 더 오래 알기는 했지만, 아마 저랑 가까이 붙어 지낸 시간이 더 길 거예요. 셋 다 다른 것 같으면서도 잘 맞는 데가 있어서 금방 친해졌고, 그래서 승철이랑 정한이가 동아리 만든다고 했을 때도 제가 제일 먼저 들어가겠다고 했죠.”

그럼 최승철 학생은 윤정한 학생을 고등학교 이전부터 알고 지냈단 말인가요?”

, 제가 알기로는 중학생 때부터 친구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승철이가 정한이를 더 잘 알기는 해요. 약간 뭐랄까, 먼저 나서서 챙겨주는 쪽이라고 보시면 돼요. 저나 정한이나 승철이가 많이 챙겨줬죠. 저는 뒤에서 얘기를 들어주고, 그런 쪽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정한이가 저한테 털어 놓은 비밀 얘기가 좀 많아요. 물론 나중에 승철이한테도 말하고 같이 머리 싸맸긴 한데, 그래도 정한이가 저한테 제일 먼저 와서 기대고, 또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었죠.”

상당히 친한 사이였네요. 그런데도 영화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얘기가 없었습니까?”

있었다면 제가 말씀드렸겠죠. 원래 정한이가 대본을 쓰면 저한테 먼저 와서 내용도 얘기해 주고, 이것저것 묻고 하는 앤데, 이번에는 대본이나 영화 관련된 얘기를 절대로 꺼내지를 않더라고요. 먼저 물어볼까 생각도 해 봤는데, 영화 촬영 시작되고 많이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그냥 때가 되면 알려주겠지, 했어요.. 근데 이렇게되어 버린 거죠.”

 

 

 

지수는 말을 마무리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한이 그렇게 되기 하루 전까지도 기분이 묘했고 짚이는 점은 많았으며 문제가 답답하게 막혀 풀리지를 않고 있었다. 어쩌면 제가 먼저 묻고 그를 챙겼어야 했던 걸까. 다 지난 후에 드는 후회 비슷한 생각에 반쯤 깨문 입술 새로 실소가 샜다. 조금은 자조적인 웃음이다. 형사는 가만히 지수를 응시하다가, 만년필을 수첩에 박은 채 가만히 있었던 탓에 잉크가 번진 부분을 손끝으로 괜히 문질러 보고, 위에 적었던 승철의 이름 밑으로 밑줄을 몇 개 더 그렸을 뿐이다. 만년필을 내려놓은 그는 이내 옆에 정리해 둔 서류 뭉치를 들어 몇 장을 휙휙 넘겼다. 형사는 시선을 옮겨 깨알같이 늘어선 글자들을 훑어 읽더니, 곧 거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수에게 물었다.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고 했죠?”

, 그 때 1학년 7반이었어요.”

윤정한 학생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달간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데, 무슨 일이었죠?”

 

 

 

형사의 입을 타고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질문에 책상 모서리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던 지수의 시선이 마구잡이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허벅지 위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던 손의 움직임도 일순 멎었다. 형사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손에 힘을 줘 만년필을 쥐어 들었다. 입술을 감쳐물길 몇 번, 망설이던 지수의 입에서 한숨처럼 대답이 새어 나왔다.

 

 

 

……그건, 제가 얘기해도 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정한이가 자기 멋대로 학교를 빠진 건 아니었고,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생각하기도 싫고, 입에 담기도 싫은 일인데 제가 먼저 알아채지 못해서 정한이가 많이 힘들어 했었어요. 이번 일이 그거랑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때 이후로 정한이가 연기자 하고 싶다는 얘기를 아예 꺼내지도 않았어요. 많이힘들었겠죠. 지금도 저는 그 때 생각하면 많이 힘들어요. 개인적으로 죄책감도 많이 느끼고.”

본인의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 제 불찰만 아니었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지 않았을까, 항상 생각해요. 그래서 혹시라도 정한이가 이렇게 된 게, 그 때 일과 관련 있을까 싶어서. 아직 제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죄책감을 덜지 못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지수 학생의 진술에 의하면 윤정한 학생이 고등학교 1학년 이후로 연기를 관뒀다는 거네요. 그런데 어째서 이번 영화에 주연을 맡게 된 거죠? 혹시 아는 것이 있나요?”

아마……, 제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민규가 많이 도와준 것 같아요.”

“2학년 김민규 학생 말입니까?”

, 민규는……, 걔는 좀 신기한 애였어요. 어린 것 같으면서도 생각이 좀 어른스러웠죠. 그래서 말도 잘 통하고, 특히 은근히 손 가는 데가 많은 정한이를 잘 챙겼어요, 민규가. 둘이 친한 건 알지만 그렇게 각별한 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정한이가 이번 영화 주연 결정하는 데 민규가 도움을 많이 줬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민규랑 같이 주연 후보에 올랐었는데, 정한이가 민규랑 같이 연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민규를 선택했어요. 그 상황에서 배역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고, 무엇보다 대본을 직접 쓴 정한이가 지목했기 때문에 저는 그러라고 했죠. 연기에 대한 미련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렇군요. 혹시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뭔가 더 아는 점은 없습니까?”

, 말씀드렸다시피. 죄송해요,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 것 같아서요.”

 

 

 

흐트러진 서류를 챙기는 형사를 따라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가 패딩을 챙겨 입으며 멋쩍게 웃었다. 형사는 만년필을 빙빙 돌리다 수첩 맨 아래 여백에 윤정한 과거에 김민규와 연관 있는지 조사라는 문구를 깨알같이 적어 넣고 뚜껑을 닫았다. 취조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지수를 올려다본 형사가 이제 가 봐도 좋아요, 조심히 들어가요. 하고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 주자, 지수는 그제야 짧게 목례하고서 취조실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시간은 9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경찰서 로비에 서서 올려다본 하늘은 새까만 가운데 굵직한 눈을 흩뿌리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차게 식은 휴대폰을 꺼내 들자 승철의 문자 두 통이 쌓여 있었다. 여기로 올 거지? 하고 물은 마지막 문자에 간단하게 긍정의 대답을 찍어 보낸 지수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눈송이들을 올려다보다가 곧 휴대폰을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고 바깥으로 몸을 내던졌다. 택시를 기다리느라 도로가에 서 있는 지수의 머리와 어깨 위로, 하얗게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쌓여 갔다.

 

 

 

 

 

 

 

**

 

 

 

 

 

 

 

내가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왔을 때, 승철은 집에 간 줄 알았던 승관과 함께 떡볶이를 집어 먹고 있었다. 날이 추운 탓에 한참 찬바람을 맞고 있었던 두 뺨이 얼얼하기까지 했다. 손을 내밀어 날 당겨 앉힌 승철이 어깨와 머리에 앉은 물기를 가볍게 털어 주었다. 내가 두 시간쯤 전에 경찰서로 향할 때 지쳐 잠든 순영을 업고서 무거워 죽겠다 툴툴거리면서도 그를 집까지 바래다 줬던 승관이 여기로 다시 돌아온 게 의아해서, 나는 어깨 위에 묵직하게 걸려 있던 패딩을 벗으며 물었다.

 

 

 

승관아, 너 집에 간 거 아니었어?”

, 저 순영이 네 들렀다가 집에 갔긴 갔었거든요. 근데 부모님 두 분 다 안 계시고, 장례식장에 승철이 형 혼자 있다고 하니까 누나가 막 가 있으라고 내쫓아서 여기 왔어요. 형한테 전화했더니 배고프다고 해서 오는 길에 떡볶이 좀 사왔는데, 형도 드실래요?”

아니, 지금 말고. 내 거 남겨 놔.”

 

 

 

얇은 이쑤시개에 빨간 물이 든 떡 하나를 쿡 찍어 내게 내미는 승관의 손을 잡아 그의 입가로 밀어 주고서, 나는 패딩을 구석자리에 내려놓고 다시 애들 근처로 돌아왔다. 멍하니 벽에 기대어 승철과 승관을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정한의 사진을 바라보기를 몇 번, 반 정도 남은 떡볶이 그릇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을 덮은 승관이 테이블 한 쪽으로 그것을 밀어 놓으며 내 맞은편으로 다가와 앉았다.

 

 

 

형은 집에 안 가보셔도 돼요?”

괜찮아, 부모님도 다 아셔. 어제 밤도 승철이 혼자 지켰는데, 오늘 밤에는 나라도 같이 있어 줘야지 덜 미안하지. 너도 여기서 자고 가려고?”

, 아까 누나한테 전화 왔었는데, 누나가 좀 이따가 데리러 온대요. 밖에 눈 많이 온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우산을 안 가져 왔거든요.”

 

 

 

승관은 퍽 애교 있는 투로 대꾸하고 옅게 웃어 보이다, 문득 제 옆에 놔둔 휴대폰이 징징 울자 내게 잠시만요, 말을 남기고서 전화를 받으며 장례식장 밖으로 나갔다. 테이블이 즐비한 식장 안쪽에서 다 쓴 나무젓가락 따위를 정리해 묶은 승철이 내 쪽으로 걸어와 앉았다. 승관이 어디 갔냐고 묻기에 전화 받으러 갔다고 하자 승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둘은 잠시 비슷한 자세를 하고 멍하게 흰 벽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승철의 손이 내 쪽으로 무언가를 잡아 내밀었다. 손때를 탄 흔적과 구겨진 흔적이 역력한 종이 뭉치 위에는 ‘<가자, 나락으로>’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너 아직 이거 안 봤지? 한 번 볼래?”

……봐도 돼?”

안될 게 뭐가 있어. 정한이도 아마 언젠가는 꼭 보여주려고 했을 거야. 난 너 읽으면 그 다음에 읽어 보려고. 사실 나도 시놉밖에 안 읽어 봤었거든.”

 

 

 

승철은 그렇게 말하고서 제 휴대폰을 두드리더니, 곧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다시 식장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수신자는 지훈인 것 같았다. 나는 대본을 든 채 덩그러니 앉아 있다가, 괜히 정한의 사진이 놓인 쪽으로 몸을 조금 틀고서 대본 표지를 넘겼다. 첫 페이지에는 주인공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정한이 맡은 역할로 보이는 세하라는 이름에 노랗게 형광펜 칠이 되어 있었다. 그 위를 손가락으로 괜히 문질러 보고, 나는 한 장을 더 넘겼다. 2페이지부터 시작되는 대본은 정한이 늘 써 오던 형식대로, 긴장감이 적은 신(Scene)들의 나열이었다. 경쟁하는 1등과 2, 아마 그것이 내용의 주일 것이다.

 

그러나, 세네 장쯤을 더 넘겼을까, 정한이 맡은 세하가 누군가의 음모로 손을 다치고 난 후의 신들을 마주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왠지 마음 저 아래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감쳐물었다. 세워 모은 무릎에 대본을 내려놓고, 오른손 검지를 세워 글자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머릿속으로 집어넣기 시작한다. 수평선을 긋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S# 31. 세하와 세하 친구, 불 꺼진 음악실에 나란히 앉아있다. 붕대가 감긴 손을 내려다보는 세하. 친구는 그 옆에서 말없이 어깨를 감싸고 세하를 끌어당길 뿐이다. 곧 입술을 깨무는 세하. 작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다.

 

 

세하 (잠시 망설이다가, 퍽 결연한 듯) 나 이제 피아노 그만 두려고.

세하 친구 ……?

세하 때려 칠 거야. 아니, 때려 쳤어. 내가 뭐라고 그걸 해.

세하 친구 아니, 그래도, 세하야다친 손은 나으면 그만이고, 의사 선생님도 재활하면 다시 음악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세하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울먹이는 듯이) 지수야, 나 요새 무서운 꿈을 자주 꿔.

세하 친구 (조금 두려운 듯이, 세하에게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간다.) 뭔데.

세하 네가, 나를 남겨두고 떠나가는 거야. 자꾸만, 더 먼 곳으로…… 떠나가.

세하 친구 (말을 잃은, 흔들리는 시선)

세하 나를……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지수야, 너는 나를안 떠날 거지?

 

 

 

거기까지 읽고서 나는 황급히 대본을 덮었다. 무릎 아래로 미끄러진 대본이 바닥과 부딪쳐 차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괜찮게 보이던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꺼림칙함과, 이유 모를 기시감. 정한이 직접 쓴 대본, 대사, 그리고 극 중 세하의 친구, 지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마주한 정한의 사진 위로, 생기를 잃은 음성 몇 마디가 재생되는 것을 느낀다.

 

 

 

나 연기 안 하려고. 때려 쳤어. 내가 뭐라고 그걸 해.

지수야, 나 요새 되게 무서운 꿈을 자주 꿔. 뭔지 알아?

너랑 승철이가, 나를 남겨두고 떠나가는 거야.

……, 나 두고 떠나지 마, 지수야.

 

 

 

나는 그 순간, 내가 두 눈으로 마주하고 있는 윤정한의 웃는 얼굴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두려워졌다. 저 웃음 속에 얼마나 큰 아픔을 숨기고 있었던 거니.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겨우 덮어 가렸다. 눈가가, 촉촉하다. 금세 뿌예진 시야로 보이는 정한의 사진은 여전히 해사한 웃음을 담고 있었다. 승철이 곧 내 옆으로 다가와, 흐트러진 대본을 정리하고, 내 어깨 위로 손을 짚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키는 동안에도, 두 손은 여전히 찬바람을 맞은 양 빠르게 저 자신을 떨어대고 있었다.

 

 

 

정한의 마지막 공간에 놓여 있던 대본, 그것이 어쩌면 정한의 자기 고백이 아니었을까. 마지막까지 남기려던 말들이, 숨겨 왔던 비밀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또 한 번 혼자 남은 정한을 먼저 발견해주지 못해서그래서 맘이 아팠다.

하루가 다르게 날은 추워져만 갔고, 눈발은 아직까지 그치지 않고 쌓일 것이다.

지나가는 말들로, 민규가 아직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4. 2학년 6반 부승관

 

 

 

 

 

한창 영화 촬영이 진행되고 있던 10월 초 쯤에 있었던 일이다.

 

그 날 나는 두 층 위의 음악실에서 하루 종일 영화를 찍는다기에 팔자에도 없는 주말 자습을 동아리 실에서 지훈과 단 둘이사실 지훈은 학교에 올 일이 없었으나 내가 멋대로 끌고 왔다.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지훈은 두꺼운 수학 기출 문제집을 풀었고, 나는 탐구 과목 문제집을 펼쳐 놓은 채 샤프를 굴리다 문제집 귀퉁이에 낙서도 좀 해 보고, 쉬는 시간 종이 치면 잠도 좀 자고 하는 식으로 설렁설렁 자습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연락이 올까 싶어 책상 모퉁이에 뒀던 휴대폰에는 애꿎은 순영의 문자만 잔뜩 와 댔고, 정작 우리 팀이 필요할 것 같다던 정한이 형이나 민규는 이름조차 비추지를 않았다. 아마 지금쯤 지수 형은 대학 면접 준비로 바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현재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은 내 자신이 좀 한심해지는 것도 같아서, 이번 시간은 문제집을 열심히 풀기로 마음을 먹고 샤프를 굳게 쥐었다. 생각보다 문제가 잘 풀려 벌써 문제집 두 장이 넘어가고 있을 때, 머리 위로 희미하게,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게 울렸다. 순간 놀라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지훈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 한 쪽을 빼며 내게 물어 왔다. 무슨 일 있냐기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데, 그와 동시에 책상 위에 뒀던 내 휴대폰이 길게 진동을 뱉어냈다. 발신자는 승철이 형. 지훈은 조금 의심하는 눈초리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 , 승관아. 지금 동아리 실이야?

, 그런데요? 형 혹시 학교세요? 아까 좀 전에 위쪽에서 쿵 소리가―」

「― , 들었어? 나 지금 교무실인데, 음악실 근처에서 큰 소리가 났다고 하더라고. 지금 정한이랑 민규 둘 다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런데, 네가 한 번 올라갔다 와 줄 수 있을까? 형은 지금 프린트 중이라 자리뜨기가 좀 그래. 부탁한다.

아아, 그럼 제가 바로 다녀와서 연락 다시 드릴게요!

 

 

 

형의 목소리가 꽤 다급하게 들려 나도 덩달아 맘이 조급해졌다. 누가 다치기라도 했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탓이었다. 지훈은 내가 전화를 끊자 그제야 의심을 거두고 내게 물었다. , 뭔데? 나는 일단 마음이 급하기도 했고 지훈이 괘씸하기도 해서, 나중에 말해 주겠다고 둘러대 놓고 동아리 실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두 칸씩 올라 음악실 앞에 선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어 젖혔다.

 

음악실 안은 난장판이었다. 대체 무슨 장면을 찍고 있었던 거지, 싶을 정도로 책걸상이 반쯤 엎어지고 뒤집어져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카메라 삼각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앞에 묵직한 카메라가 반쯤 분리된 렌즈를 겨우 달고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문 앞에 서서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써 보는데, 책걸상 안쪽 피아노 근처에서 들썩이는 누군가의 어깨가 눈에 띄었다. 절로 입술이 깨물린다. ‘촬영의 일부분이 맞기는 한 걸까부터 시작해 혹시 도둑이 든 건 아닐까까지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하며 발소리를 죽여 가까이 다가가는데, 짙은 밤색의 머리칼이 어깨 선 근처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제야 쓸 데 없는 상념이 반 정도는 지워진 것 같았다. 형의 등 뒤에 멈춰 서서 조심스레 정한이 형, 하고 불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형의 얼굴 여기저기에는 엊그제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상처가 더 늘어 있었고, 무엇보다

 

형이 꾹 쥐고 있는 오른손 손목 위로 손가락 가운데 마디가 뭐에 눌리기라도 한 것 마냥 새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 승관아. 어떻게 알고 왔어?

승철이 형이, 가보라고 해서……, 근데 손 이거 뭐예요? 어떻게, 무슨 일 있었어요?

, , 아니, 그냥 촬영하다가…….

이건 그냥이 아니잖아요!

 

 

 

자꾸만 말끝을 흐리고 시선을 피하는 정한이 형이 답답해 괜한 마음에 소리를 빽 지르고 형의 손을 끌어당겨 쥐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손에서는 뜨끈하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형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으면서도 손을 자꾸만 움직이려 하는 게 뼈가 부러지거나, 그 정도로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급한 대로 손부채질을 하며 형을 일으키고 피아노 의자를 끌어다 앉혔다. 문득 뚜껑이 닫힌 피아노 쪽을 돌아보니 불빛에 비쳐 무언가가 반짝 빛나는 것도 같았다. 형은 자꾸만 다친 손을 움직이려 애쓰면서 입술을 잘근 씹어댔고, 나는 여전히 난장판인 음악실 안을 둘러보다가 역시 사람이 더 중요하지 싶어 형의 성한 왼손을 잡아끌었다. 당혹으로 가득 찬 시선이 날 올려다보기에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었다.

 

 

 

, 손에 파스라도 바르러 가요.

승관아, 형 괜찮아. 진짜 괜찮으니까 가 봐도 돼. 잠깐 놀란 걸 거야.

아니, 지금 이렇게 손이 빨갛고 열도 나고 하는데 뭐가 괜찮아요. 빨리 일어나요, 잠깐만 갔다 오면 되잖아, ?

그래도, 지금 카메라도, 떨어졌고……」

카메라야 주워서 다시 조립하면 되는 거고, 형 손 다치면 오래 갈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오른손잡이인 사람이 당장 오늘 저녁을 어떻게 먹을 건지 걱정해야 될 상황인데 지금!

 

 

 

평소 같았으면 조그마한 상처에도 있는 대로 엄살을 부리며 내게 치료를 닦달했을 정한이 형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답지 않는 소리만 하길래 듣는 내가 더 답답해져서 또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감정이 격해지면 말이 빨라지는 습관이 있어서 순식간에 지나간 내 말을 멍하니 곱씹는 것 같던 형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렸다. 어지럽게 엎어진 책걸상 사이를 지나 형을 먼저 음악실 밖으로 내보내고, 안에서 문을 잠근 뒤 열쇠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서 문을 닫고 보건실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정한이 형은 늘어뜨린 머리칼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채 계속해서 오른손을 움직이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금방이라도 내 손을 뿌리치고 되돌아갈까 싶어 차오르는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보건실에 도착해, 나는 아무 파스나 찾아 형의 오른손이 번들거리도록 잔뜩 파스를 뿌려 주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왼손으로 모서리를 꾹 쥔 형은 미간을 구기다가 곧 내 시선을 마주하며 멋쩍게 웃었다. 아마 내 표정이 있는 대로 화가 나 차게 식어 있었을 것이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보건일지에 다 날아가는 글씨로 형의 이름을 적어 놓고, 서랍을 뒤져 압박붕대를 찾아냈다. 형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내 고집에 져 가만히 손을 맡겼다. 괜한 노파심이 일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 놔야 할 것만 같았다. 거의 감으로 붕대를 서툴게 감으며, 나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고 골라 겨우 형에게 물었다.

 

 

 

촬영 잘 되어 가요?

「……, 그런 대로. , 궁금해?

당연히 궁금하죠. 시놉도 비밀, 배역도 비밀, 전부 다 비밀이잖아요. 좀 알려주면 안 돼요? 내가 비밀 지킬 테니까 나한테 살짝만 스포해 줘요.

「……미안, 승철이랑 약속했어. 완성된 이후에 공개하기로. 이거 어기면 나 걔한테 밥 사야 돼.

돈 쓰기 싫어서 사랑하는 동생의 알 권리를 거절한다 이거네? 형 진짜 너무했다.

그래도 진짜 미안, 약속은 약속이잖아. 그리고 이제 이런 일 없을 거야. 오늘은 좀, 위험한 장면이긴 했거든. 이제 그런 거 없어, 진짜로.

 

 

 

위험한 장면이라서 손도 다치고, 카메라도 떨어지고 책상도 다 들어 엎어요?

금방이라도 그 질문을 덧붙여 묻고 싶었지만, 형의 손에 투박하게 감긴 붕대가 끝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고 테이핑 밴드를 찾아 붕대 끝을 잘 고정시켰다. 묵직한 오른손을 몇 번 들어 올려 보던 형은, 나보다 먼저 보건실 출입문 쪽으로 걸어 나가며 한숨 쉬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촬영은 더 못 하겠네. 나는 걸음을 빨리 해 형 옆으로 따라 붙으며, 일부러 애교 섞인 투로 더 촬영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 쉬라고 말해 주었다. 기어이 웃음을 지어 보인 형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었다.

 

 

 

사실그 때 그 상황에서, 난장판이 된 음악실보다 제일 맘에 걸렸던 건 따로 있었다.

 

형이 그렇게 다쳐서 아파할 동안, 대체 김민규는 어디에 있었던 거지?

 

 

 

 

 

 

 

**

 

 

 

 

 

 

 

 

익숙지 않은 장판 바닥에서 얇은 모포 하나만으로 버티느라 밤새 잠을 설친 탓에, 패딩 위로 목도리를 칭칭 둘러 싸맨 승관이 뻑뻑한 눈을 부비며 취조실 안으로 들어왔다. 빈속에 자판기 커피를 들이붓고 있던 형사는 막 들어오는 승관과 눈이 마주치고서 짧게 목례하는 그의 인사를 눈인사로 받았다. 자리에 앉아 목도리를 풀어낸 승관은 문득 제 앞에 놓인 종이컵을 발견하고서 수첩을 뒤적이는 형사에게 물었다.

 

 

 

, 형사님. 이거 저 마셔도 돼요?”

당연히 되죠. 학생 마시라고 내가 뽑아다 둔 건데. 아침이라 피차 피곤할 거 아닙니까. 집에서 온 것 같지도 않구만.”

 

 

 

형사의 예리한 말에 고개를 어색하게 끄덕인 승관이 그럼 잘 마실게요,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고서 종이컵을 들어 그 안에서 찰랑거리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헤이즐넛 향이 강한 커피가 입 안으로 퍼지는 게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찬바람에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아 축인 승관이 종이컵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세를 바르게 해 앉았다. 수첩을 뒤적이다 빈 페이지를 찾아 낸 형사가 만년필 뚜껑을 열어 그 옆에 내려놓고, 제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는 승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학생 학년 반 이름부터 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학년 6반 부승관이에요.”

승관 학생, 학생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서 진술에 참여할 예정이며, 이 사건이 현재까지는 타살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학생 본인이 아는 한 진실 되게만 말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 친구들한테 물어 보고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왔습니다.”

신경 많이 쓰고 있었나 보네.”

 

 

 

기다렸다는 듯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승관을 보며 가볍게 웃음 짓던 형사는 곧 만년필을 들어 수첩 맨 윗줄에 승관의 이름을 적어 넣고 웃음기를 적당히 덜어낸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피곤해하는 순영과 지훈을 닦달하길 잘 했다, 싶어 괜히 뿌듯해졌던 승관은 형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자 금세 허리를 쭉 펴고 바르게 앉으며 허벅지 위에 둔 두 손을 모아 쥐었다. 만년필을 단단히 쥔 형사가 수첩에 무언가를 더 적으며 입을 열었다.

 

 

 

승관 학생이 속한 동아리에서 최근에 제작하던 영화가 있었죠. 그 영화에 대해서, 특히 내용적인 측면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근데 저는 내용은 진짜 몰라요.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어요. 전해들은 것도 없고, 그냥 영화를 찍는구나, 촬영 장소가 주로 음악실이구나, 그 정도밖에 몰라요. , 민규가 이번 영화 촬영 들어가고 나서 저한테 피아노는 대체 어떻게 치는 거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피아노 치는 학생들의 얘기겠구나, 하고 추측한 건 있었어요.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이에요. 저는 그냥, 예술 팀으로써 자꾸 늘어나는 상처에다 더 크게 다친 것처럼 틴트 칠을 해 줘야 하는 게 너무 속상했어요.”

승관 학생도 예술 팀이었나 보네요. 거기에서 어떤 일을 주로 했죠?”

, 지수 형이 말했겠구나. 저도 형이랑 같이 예술 팀이었는데, 솔직히 저희 팀이 크게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온 건 아니었어요. 화면에 배우를 담았을 때 좀 더 사실감 있으면서도 예쁘게 나오도록 하는 게 저희의 제일 큰 역할이었죠. 의상 점검하고, 아까 말했듯이 분장 간단하게 해 주고, 그런 정도였어요. 사실 저희 동아리에서 제가 민규 다음으로 손재주가 좀 있어서, 영화 제목을 손 글씨로 써서 직접 포스터를 만들어 본 적도 있었어요.”

 

 

 

승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형사는 역시나 그의 이름 아래에 특이 사항 없음이라는 문구를 써 넣었다. 승관은 둥글게 말아 쥔 손으로 제 허벅지를 콩콩 두드리다가 이내 오른손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수첩 위에 만년필을 내려놓은 형사가 다시금 질문을 꺼내었다.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는 어떤 관계였죠?”

, 정한이 형과는 집 방향이 같아서 항상 같이 하교를 했었어요. 형이 늦게 마치면 제가 정독실에서 한 시간 더 기다려 주고 그랬었죠. 정한이 형은 진짜 좋은 형이었어요. 장난삼아 툭툭 내뱉는 말 속에도 상대를 생각해주는 게 있고, 그런 마음이 항상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느껴졌어요. 그리고 항상 동아리 분위기도 밝게 만들어주고, 사람을 마주치면 먼저 인사하고 웃어주는 사람이어서 저는 형한테 아픔이라든가 상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승관 학생은 윤정한 학생의 자살 원인이 내적 상처라고 생각하는 군요.”

그렇지 않으면, 형이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넘겨짚는 걸 수도 있겠지만,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겠죠.”

그래요……, 그럼 승관 학생과 김민규 학생은 어떤 사이였나요?”

민규요? 민규는 저랑 순영이랑 같은 중학교를 다니면서 친해진 친구예요. 원래는 저랑 순영이랑만 친했는데 순영이가 민규라는 친구를 소개시켜 줘서 셋이 친해졌고, 그래서 같은 고등학교에도 오게 된 거예요. 민규는 우리 중에서 제일 어른스러운 면이 많은 친구예요. 타박하고 잔소리하면서도 먼저 나서서 챙겨주고, 초등학생 같은 면이 있으면서 또 멋진 말을 가끔씩 해 주더라고요. 성격도 좋아서 특히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하고 금방금방 친해지는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승관은 거기까지 말을 마무리하고서 괜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며칠 째 그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는 민규 때문이었다. 어디서 뭐 하나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어 기분이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을 애써 숨기기 위해, 그는 입술을 감쳐물어 잘근 씹어댔다. 수첩의 여백 위로 승관과 순영, 민규의 이름을 쓰고 그 사이를 실선으로 연결해 놓은 형사가 곧 수첩 앞장을 뒤적이는가 싶더니 승관에게 추가로 질문을 던졌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승관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키고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민규 학생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민규의 과거……, 사실 민규는 딱히 그런 모난 데가 있는 애는 아니었어요. 공부를 좀 못 하긴 했지만. , 생각났다!”

…….”

사실 이게 관련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민규 얘기는 아니고 민규 형 얘기예요. , 민규 형이 예전에 이 학교를 다니다가 정학 먹고 나서 연락이 뚝 끊겼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이 학교에서 소문처럼 떠도는 안 좋은 일에 민규 형이 끼어 있었나 봐요. 3 때 한 일주일이었나, 민규가 학교 안 나온 적이 있어서 새벽에 전화했더니 형 때문에 학교 못 가고 있다고, 집안 다 뒤집혔다고 했었어요. 오히려 그 일 있고 나서 민규가 형 몫까지 다 하느라 더 열심히 사는 것 같던데요?”

 

 

 

승관은 객관적으로 바라보기에도 민규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다. 형사는 조심스러운 투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정보들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낸 승관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무안해진 그가 먼저 시선을 피하고 나서야 저도 고개를 떨어뜨려 수첩 위로 시선을 두고 만년필을 종이 위로 톡톡 두드리다가 지난 지수의 진술 때와 같은 문구를 써 내려갔다. ‘윤정한과 김민규 형의 연관성 조사 필요라는 문구가 빈 여백을 가득 채웠다. 종이컵을 아예 쥔 채 커피를 홀짝홀짝 비워내던 승관은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쭉 들이키고서 입 안에 퍼지는 값싼 단 맛에 눈가를 가볍게 찡그렸다. 종이컵을 제 앞에 내려놓으려다 문득 형사의 앞에 비워진 종이컵이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 위로 제 컵을 겹쳐 두고, 마침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을 울리기에 수첩을 뒤적이기에 여념이 없는 형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 형사님. 저 잠시만 문자 답장 빨리 보내도 될까요?”

, . 그러세요.”

 

 

 

형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몸을 반쯤 돌린 채 휴대폰을 꺼내 든 승관은 예상치도 못한 지훈의 문자가 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눌러 화면 가득 띄웠다. [나 지금 경찰서 가는 길, 언제 끝나?] 무뚝뚝하게 물어오는 게 누가 봐도 지훈 같다 싶어 옅게 웃음을 흘린 승관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곧 끝날 것 같아, 하고 답장을 보내주었다. 휴대폰을 책상 위로 뒤집어 놓고 가만히 형사를 바라보는데, 그때까지도 수첩을 뒤적이던 형사가 문득 승관에게 물었다.

 

 

 

부승관 학생, 혹시 좀 전에 얘기했던 김민규 학생 형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아는 게 없는 거죠?”

, 그 때 민규한테 물어보려고도 했었는데, 민규가 너무 힘들어하고 그래서 차마 말을 못 꺼내겠더라고요. 미안하잖아요, 그런 거 괜히 들쑤시면. 그래서 그냥 안 좋은 일이었나 보다, 하고 넘어갔죠. 근데 왜요?”

아닙니다, 결과 추후에 나오면 다 알게 되실 겁니다. 참고인 조사는 이것으로 끝이고, 이제 가 보셔도 좋습니다.”

, . 아침부터 수고하셨어요. 식사 챙겨 가시면서 일 하세요, 형사님!”

 

 

 

늘 그렇듯이 애교 있게 끝인사를 덧붙인 승관이 제 목도리를 대충 두르고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서 취조실을 빠져나왔다. 내부가 한참은 어두웠던 터라 몇 배는 더 밝은 형광등 불빛에 눈가를 찌푸리던 그는, 곧 징징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들어 발신자가 지훈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 지금 나갈게, 여기 앞이야. 그 뒤에 뭐라 더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알았어, 빨리 와, 하는 말만 남기고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던 승관은 다문 입술 새로 픽 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조금 빨리 해 경찰서를 빠져나갔고, 오랜만에 맑게 갠 하늘 아래 사방으로 퍼지는 햇살을 받으며 도로가에 선 지훈에게로 다가갔다. 낯익은 번호의 차 안으로 올라탄 두 사람은날씨 탓인지 답지 않게 들뜬 것도 같았다.

 

 

 

 

 

 

 

**

 

 

 

 

 

 

 

나와 지훈이 장례식장으로 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순영과 승철이 형이 있었다. 형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끊임없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댔는데, 곧 입술을 눌러 깨물고서 빈소 밖으로 향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훈이 나서서 아침 먹은 흔적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순영의 옆에 앉아 그의 휴대폰 액정을 곁눈질하듯 들여다보았다. 다이얼과 최근 통화 목록을 번갈아 띄우던 순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민규가, 아직 연락이 안 돼.”

……아직도?”

아까 전부터 승철이 형이랑 민규 아는 친구들한테 전화 돌리고 있었어. 지수 형은 입시 때문에 학교 갔는데, 형도 혹시나 학교에 있을까 싶어서 찾아본다고는 하더라. 너한테도 연락 없어?”

……, 전화도 안 받고 문자에 답장도 안 와.”

 

 

 

민규는 정확히 삼 일째 연락이 뚝 끊긴 상태였다. 휴대폰을 꺼둔 건 아니었으나 전화, 문자, 하물며 페이스북 메시지까지 보내 봤는데도 전혀 답장이 없었다. 그 탓으로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순영은 기계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좌우로 번갈아 넘기다가, 곧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홀드시키고 바닥에 엎어 두었다. 얼핏 지나친 화면 위로 민규의 이름 옆에 십 몇의 숫자가 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식기들을 간이 싱크대 안에 담가두고 온 지훈이 우리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지훈아, 너도 민규한테서 연락 받은 거 없어?”

없어, 내가 민규 마지막으로 본 건 그 날 음악실에서였어. 나 끌려갔잖아, 조사받으러.”

굳이 따지면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봤긴 한데, 그 때 민규가 나 데려다주고 집에 간다고 했었단 말야. 자기가 연락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왜 연락이 없을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지훈에게도 내가 받은 질문을 건넸으나 기대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대신 내 얼굴이 어지간히도 구겨져 있었는지 지훈의 손가락이 다가와 미간을 눌러 펴 주었을 뿐이었다. 일부러 어감이 강한 단어로 자신의 행적을 요약한 그는 곧 배가 고프다며 빈소 안쪽으로 들어갔고, 다시 나와 순영 둘만 남아 멍하니 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영의 말이 옳듯이, 나도 그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던 민규의 뒷모습과 저음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민규가 사실만 말했더라면 그는 그 날 집으로 갔어야만 했고, 제가 먼저 순영에게 집에 왔노라고 연락을 했어야 하며, 지금쯤 이 곳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근데, , 무슨 이유로? 애꿎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아무 연락도 와 있지 않는 것에 실망하며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는데, 순영이 초점이 흐린 눈을 하고서 독백하듯 뱉었다.

 

 

 

김민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나. 진짜 어디 있기는 있겠지?”

, 민규 형 있다고 하지 않았냐? 형한테 간 거 아냐?”

 

 

 

그래, 민규에게는 한 살 터울의 형이 있었다. 좀 전에 내가 진술 받을 때 털어놓고 온, 바로 그 사람. 아마 순영은 민규의 형이 정확하게 어떻게 되었는지 모를 것이다. 연락만 안 될 뿐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하는 뉘앙스로 저렇게 물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민규의 형이 대략적으로 어떤 결말을 맞았는가 하는 것을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적이 있었다. 불현 듯 그런 생각이 스치자 반사적으로 안 돼!’하고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생각 자체를 멈추라는 경고인 것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겨우 붙잡은 것만 같은 순영의 얼굴에 대고, 하는 수 없이 사실을 털어 놓았다. 급하게 입을 다무는 걸 마주하는 게, 난 아무래도 형사 같은 건 못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규 형, 아마 여기…… 없을 거야.”

?”

민규가 지나가는 말로 그랬거든, 형 죽었다고.”

…….”

아냐, 민규 오겠지, 올 거야. 그치?”

그래, 걔가 김민규가 맞으면 와야지.”

 

 

 

우리는 뭐랄까, 허상을 진짜라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신도들 같았다. 순영은 그렇지 않았겠지만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왠지 민규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아주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서, 이상한 사람처럼 고개를 내젓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순영은 내려놓았던 휴대폰을 들어 아무 감정 없이 그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며 시간을 소모하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았다. 마침 승철이 형이 다시 빈소 안으로 들어왔으며, 한참을 부시럭대는 것 같더니 기어이 사과 두 개를 깎아 온 지훈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가져다 준 사과를 집어 먹으며 우리 넷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다시 내려놓고,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가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길 반복했다. 원하는 답이 언제쯤 되돌아올지 가늠할 수 없이, 시간이 무한대로 소모되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꼬박 삼 일을 보냈으니 이제 형을 보내줄 때가 되었으나, 승철이 형은 긴 말 대신 나와 지훈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병원 측에서 현재 대기자가 밀려 법적 보호자가 없는 우리 쪽을 우선순위로 당겨줄 수 없다고 했단다. 형은 쓰게 웃으며 학교로는 안 갈 테니 집에 가서 푹 쉬고 있으면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어젯밤 늦게 빈소를 찾은 지훈도, 결국 누나의 연락을 받지 못한 나도 승철이 형의 곁을 지키느라 새벽녘에 겨우 눈을 붙였기 때문에, 하룻밤 따뜻한 집에서 푹 자고 온 순영과 바통 터치를 하는 기분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지훈은 내 옆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시 이십분 쯤 된,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이어서 정류장에는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서 있었다. 교복을 입은 우리 둘을 곁눈질하는 것 같던 두 사람은 곧 시선을 돌렸고, 지훈은 발돋움을 해 제 눈높이보다 조금 위에 있는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10분 뒤에 이 정류장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땅 위로 처박히는 지훈의 운동화 앞코를 바라보며, 나는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혹시 있잖아, 민규랑 정한이 형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야 모르지, ?”

아니, 그냥. 의심하는 건 아닌데, 형사님이 굳이 민규를 콕 집어서 물어 보시더라고.”

그래? 나한테는 그런 질문 안 하던데. 아마 뭔가 발견됐겠지.”

그런가……. 그냥, 왠지 모르게 민규네 형이랑 정한이 형이 관련 있는 것 같아.”

……부승관, 혹시 너 뭐 아는 거 있어?”

 

 

 

주절주절, 진짜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은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지훈이 마치 나를 의심하는 것처럼 물어 오기에, 나는 예상치 못한 화살표 방향에 놀라 급하게 도리질부터 쳤다. 에이나도 잘 몰라, 추측이지 추측. 어색한 투로 대꾸하는데 지훈이 그제야 표정을 풀고 픽 웃음을 흘린다. 그러더니 제 손을 뻗어 내 손을 끌어내렸다. 모르는 새에 깨물어서 반쯤 부러진 손톱을 내려다본다. 손톱 무는 버릇을 지훈에게 걸릴 때마다 잔소리를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얼른 손을 등 뒤로 숨겼다.

 

 

 

, 내가 손톱 물지 말랬지.”

, 진짜 미안. 무의식중에,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내가 너 보고 의지가 약하다고 하는 거야, 알겠어?”

! 지훈아, 버스 간다!”

 

 

 

, 또 맨날 같은 레퍼토리. 지훈은 어쩜 그렇게 내가 손톱 깨무는 버릇을 눈엣가시로 생각하는지 모를 따름이다. 조금 과장된 투로 지훈의 어깨 너머 떠나가고 있는 버스물론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아니다를 가리키며 말하자 고개를 휙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던 지훈이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 너 이제 나를 속이는구나. 나는 그 말에 조금 자세를 움츠리며 장난스레 키득거렸다. 지훈의 의심은 정말로 장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소모적인 얘기를 나누며 지훈과 집에 가는 내내, 그에게 민규의 형 얘기를 꺼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괜한 의심을 사게 만든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내가, 그렇게 되도록, 민규를.

 

 

사람이 적은 버스는 라디오 방송도 켜 두지 않아서 침묵 속에 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우리 둘도 덩달아 묵언수행을 하며 동네 정류장에 얼른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 소음이 가득한 침묵 속에서,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싶어졌다.

지지난 달쯤, 민규가 나에게 숨기듯이 흘린 영화 이야기 중에서, 그의 배역 이름을 들었던 것만 같았다. 그 때 내가 민규의 배역 이름이그의 형 이름과 좀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둘 중 어느 것도 기억나지를 않았다. , 뭐였는데. 한참동안 재, 뭐였지, , 뭐였을까, 하고 입속말로 중얼거리다가 결국 포기해 버렸다.

 

오랜만에 날씨가 맑다 싶더니곧 두터운 구름 떼가 태양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5. 3학년 3반 최승철

 

 

 

 

 

나는 종종 동아리 실에서정확히 말하자면 동아리 실에 딸린 편집실에서 밤을 꼬박 새고는 했다. 편집을 하다가 하루를 넘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쯤 포기하고 그 안에 구겨져 있었던 것에서 비롯된 그 습관은, 우선 선생님들이 대체로 우리 동아리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건드리지 않는 데다 컴퓨터 사양이 월등히 좋았으며 학교가 낡아서 새로 지은 신관에 딸린 동아리 실과 편집실까지 방범 설비가 미치지 않는다는 점들로 인하여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 가끔은 지훈과 번갈아 잠을 자며 편집을 했고, 때로는 경비 아저씨가 돌아다니기 직전에 학교로 숨어 들어온 승관이나 순영과 밤을 샌 적도 있었다. 물론 그런 일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나 혼자서 긴긴 밤을 신 단위로 끊긴 영상물들과 함께 새야만 했다. 처음 동아리를 만들면서 내가 선택한 임무, 혹은 숙명 같은 것이었다. 같은 편집 팀 소속인 지훈에게도 밤샘 작업이라는 짐을 지워주기는 싫었다. 이상한 고집이었다.

 

 

 

그 날 밤도 매점에서 사 온 과자를 책상 위에 잔뜩 쌓아 놓고 오랜만에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이번 영화는 이전과는 달리 정한이 며칠을 들여가며 내게 부탁해 온 것 때문에 단 한 번도 촬영 현장에 함께하지 못했고, 따라서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러이러한 줄거리로 흘러가는 것이리라, 하고 반쯤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정한이 그다지도 간곡히 부탁하던 것은 그 자신과 민규 두 사람만이 촬영장에 남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들 이면에 무언가가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로 영화 촬영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카메라는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있는지, 영상을 통째로 날려버리지는 않았는지, 기타 잡다한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내게서 카메라를 빌려 간 101일부터 대략 이 주쯤 흘렀을 때, 그제야 정한으로부터 촬영분이 담긴 메모리 카드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우리 반으로 직접 찾아와 그것을 건넨 정한의 얼굴에 늘어가는 상처를 마주하며 나는 묻고 싶은 것이 더 늘어가는 기분을 느꼈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내키지도 않던 질문을 내던져 버렸다. 촬영 언제 끝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내 반응에 정한은 조금 반가워하는 것도 같이, 이번 달 안에 끝난다는 말을 남기고 제 반으로 돌아갔다.

 

 

어쨌든묻고 싶은 것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영화의 내용을 알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촬영 분 편집 작업을 꼭 해야 했다. 내 손바닥 반의 반 크기만큼 작은 메모리 카드를 본체에 꽂아 넣자, 좁고 어두운 편집실 안이 하드디스크 돌아가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수 분 뒤에 발광하는 모니터 위로 일련의 영상물이 담긴 폴더가 새 창을 띄웠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서른 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영상들 가운데에서, 나는 늘어선 썸네일을 꼼꼼히 살피며 이번 영화에서 내 손이 닿은 유일한 신인트로 촬영 분을 찾아내어 바탕화면으로 쭉 끌어당겼다. 우선은 촬영 분의 순서를 파악해 그것을 순서대로 폴더에 담아놓는 작업이 급했기 때문에, 일단 날짜순으로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해 뜨기 전에는 끝나겠지, 독백처럼 중얼거리고서 팔을 뻗어 과자 봉지를 뜯었다. 키보드 왼쪽에 과자를 두고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을 날짜대로 바탕화면에 당겨 오고 있는 와중에, 책상 끄트머리에 두었던 휴대폰이 짧게 두어 번 진동을 울렸다. 깊게 깔린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던 휴대폰은 곧 다시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무시할 수도 없게 긴 진동을 울려 댔다.

 

 

 

이 시간에 누구야, 대체.

 

 

 

머릿속으로 착착 정리되던 계획이 와르르 무너지려는 것을 겨우 잡아 세우고, 나는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었다. 아들의 부재를 이제야 안 엄마라든가, 동아리와 전혀 관련 없이 게임하느라 밤을 새우는 친구 놈들일 거라 생각했건만, 발신자는 정한이었다. 부르르 떨며 환한 빛을 뿜어내는 휴대폰 액정 위로 윤정한이름 세 자가 박혀 있자 반사적으로 전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모드를 스피커폰으로 바꿔 놓고 그것을 키보드 옆에 둔 채 마우스를 다시 잡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잡음에 문득 섞이지 말아야 할 소리 같은 게 섞인 것 같아 손이 멈췄다. 모니터를 곁눈질해 확인한 시간은 열두 시 이십삼 분. 정한은 소리를 잔뜩 죽인 채 울고 있었다.

 

 

 

「……정한아.

「― ……,

「…윤정한, 너 울어?

「― ……, 철아.

, 나 듣고 있어. 괜찮아? 무슨 일 있어?

 

 

 

― ……, 있잖아, 무서운 꿈을 꿨어. 엄청 무서운 꿈…….

휴대폰 사양이 썩 좋지 않아 잡음이 잔뜩 섞인 채 띄엄띄엄 들려오는 정한의 울음 섞인 음성에, 나는 본능적으로 컴퓨터에서 손을 떼야만 한다고 느꼈다. 팔을 뻗어 모니터 전원을 눌러 끄고, 완전한 어둠 가운데에서 양 손으로 휴대폰을 꾹 쥔 채 정한에게 물었다. 재촉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괜찮으니까 일단 설명해 달라고, 무슨 꿈인지 말해 달라고, 오래 전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처럼 울던 정한을 달랬을 때처럼 다정하게 묻고 또 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 동안 소리를 잔뜩 죽인 흐느낌이 들려오다가, 그저 무서운 꿈이었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나는, 지금 당장 그를 만나러 갈 수 없는 것에 한탄하며 깊게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숨이 넘어가듯이, 끅끅대는 정한의 울음이 애처로웠다.

 

 

 

「― , ……, 승철아, 나 진짜, 너무 무서웠어…….

그래, 그래. 그거 꿈이야, 꿈이잖아, 정한아. 지금 나랑 이렇게 전화하고 있잖아. 괜찮아, 다 괜찮아.

「― 네가, ……, 전화를, 받아서 다행이야…….

 

 

 

나는 왠지, 그 말을 들으면서 과거의 일이 자꾸만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다 털어낸 줄로만 알았던 상처가 지금의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에는 분명히 계기가 있고 이유가 있을 터, 그러나 마지막 말과 비슷한 대답을 입 밖으로 끌어내면서 눈은 우는 가운데 입 꼬리를 당겼던 정한의 얼굴이 공중에 떠오르는 것만 같아 객관적인 생각이 우선 불가능해졌다. 자꾸만 흐느낌을 목 뒤로 삼키는 그가 견딜 수 없이 애처로워서, 한참 동안은 어린 애처럼 소리 내어 울게 내버려 뒀다. 괜찮아, 괜찮아, 하는 단어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그저 그 슬픔을 받아내고 있는 편이 그에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날 끌어안고 그칠 듯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냈던 2년 전처럼, 그 날 새벽의 정한은 통화 시간이 30분을 넘어가는 동안 몇 마디 말도 하지 않고서 울음만을 뱉어냈다. 까맣게 빛이 죽은 편집실에 덩그러니 앉은 나는, 다만 그 꿈이 그의 과거 일이었겠구나어설프게 추측만 하며 그 슬픔을 마음으로 묻고 또 묻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기를 또 5분 쯤, 울음이 좀 잦아든 정한이 다 잠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 ……승철아, 최승철.

, 듣고 있어. ?

「― 나 걱정, 안 해도 돼. ……이제 괜찮아졌어, 진짜.

진짜 괜찮아졌어? 기분 좀 나아졌어?

「― , 진짜. 진짜로, 고마워, 전화 받아 줘서. 편집 때문에 바쁠 텐데.

에이, 그래도 네 전환데. 편집은 내가 알아서 할게, 걱정 말고. 이제 다시 자야지.

「― ……. 웬만하면, 지수한테는 내가 전화했다고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딴 건 아니고, 그냥, 쪽팔리잖아.

 

 

 

어느새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 같은 정한이 마지막 말은 장난처럼 내뱉고 작게 웃었다. 그 옅은, 바람소리와도 비슷한 웃음에 그제야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꿈 얘기를 좀 더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정한의 상처를 다시 들쑤시고 싶지 않아 말을 삼켰다. 우리는 이 이후로 십여 분 정도 시답잖은 얘기를 더 나누다가, 내가 먼저 정한을 재웠다. 전화가 끊어지자 편집실 안은 숨 막히는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 찼다. 잡음 하나 없이, 바깥과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좁은 방. 나는 그 안에서 왠지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겨우 팔을 움직여 휴대폰을 책상 위에 엎어둔 채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선잠에 들었다가 정확히 두 번 잠에서 깼다. 두 시 오십 몇 분 쯤, 그리고 네 시 반쯤. 두 번째로 깼을 때 정신을 차리고 편집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나는 그냥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대로 날이 밝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편집실에 발을 댈 수가 없었다. 나와 정한, 지수는 수능을 쳤고, 면접을 봤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체에 꽂혀 있던 메모리 카드는 제 자리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러니까나는 카메라가 기록하고 있던 것을 단 하나도 꺼내 볼 수 없었다.

 

 

 

 

 

 

 

**

 

 

 

 

 

 

 

한 평 남짓 되어 보이는 캄캄한 취조실 안으로 들어서며, 승철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2년 동안 방과 후 일상의 대부분을 보낸 편집실과 느낌이 매우 닮아있는 탓이었다. 피로감에 찌든 것이 역력해 보이는 형사는 승철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오늘 아침처럼 자판기 커피를 몸 안으로 쏟아 부으며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 뭉치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그 위로 해독 불가능해 보이는 글씨가 휘갈겨진 수첩이 놓여 있었다. 승철은 형사가 수첩을 들어 새 페이지를 찾는 동안 뒷면으로 비치는 글씨를 해석해 보려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으나, 곧 포기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빈 여백을 찾은 형사가 수첩을 서류 뭉치 위로 내려놓았고, 그 위로 희미한 알전구 불빛이 비쳤다. 적막 가운데 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학생 학년 반 이름부터 말씀해 주세요.”

, . 저는 3학년 3반 최승철입니다.”

승철 학생, 본인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서 현재 진술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본 형사의 질문에 대해서 진실 되게만 대답해 주시면 감사하겠고, 혹시 본인이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이 있다면 애써 얘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시겠죠?”

, 알겠습니다.”

 

 

 

형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승철이 짧게 끊어 대답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수첩 아래에 깔린 서류 뭉치를 각 맞춰 정리한 형사가 수첩 맨 위에 승철의 이름을 휘갈겨 쓰고 그 앞을 뒤적이며 첫 번째 질문을 건네었다.

 

 

 

최근에 촬영하던 영화가 있었죠? 그 영화에 대한 설명이 좀 듣고 싶은데.”

영화는, 저도 구체적으로 말할 입장이 안 돼요. 지금까지 진술 받았던 다른 친구들보다는 많이 알고 있겠지만, 사실 저도 촬영장에 머물렀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최승철 학생은 동아리 내에서 감독 일을 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그랬죠. 그랬는데, 이번 영화는 정한이가 먼저 부탁을 해왔었어요. 카메라를 설치해 두고 자릴 비워 달라고 했었거든요. 뭔가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는데,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제가 아는 것만 말씀드리면, 피아노를 치는 학생들의 이야기예요. 1등과 2등이 등장하고, 그 사이에서 얽히고설키는 관계가 있겠죠. 인트로 영상은 제가 찍었기 때문에 이 정도만 알고 있어요. 이 이후의 내용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는 게 없어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마 민규한테 물어 보시면 영화 관련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거예요. 돌아올 테니까요, 그 애는.”

 

 

 

그런 말을 덧붙인 승철은 민규의 귀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도 같았고, 그렇게 해서라도 내면의 불안감을 덜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같았다. 승철을 응시하던 형사는 전자보다 후자 쪽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의 이름 아래에 영화 : 김민규라고 써 넣었다. 책상 위에 손을 두고 간헐적으로 그 위를 톡톡 두드리던 승철에게로 두 번째 질문이 꺼내어졌다.

 

 

 

승철 학생이 동아리 내에서 한 역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데요.”

, 저는 일단 동아리 부장이에요. 부원들을 최종적으로 통솔하고 이끄는 자리죠. 그러면서 영화 총 감독이었어요. 촬영도 하고, 편집도 하고. 여러모로 바빴죠. 하지만 좋은 친구들이랑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더라고요. 아예 안 힘든 건 아니었는데, 두 배, 세 배로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이 아이들하고 같이 영화를 만들 수 있기를 항상 바라고 있었는데, 이제 그럴 일은 없게 되어 버렸네요.”

 

 

 

말을 마친 승철의 표정은 금세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아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형사는 만년필을 들어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글귀를 써 넣고 다시금 수첩을 뒤적였다. 차르륵,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희미한 잔향을 남기고 퍼져나간다. 승철은 문득 주머니에서 짧게 진동이 울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을 애써 확인하지는 않았다. 형사는 수첩의 다른 페이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럼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 승철 학생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정한이는 제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예요. 제가 지방에 살다가 전학 왔는데, 그땐 제가 사투리를 심하게 썼었죠. 근데 정한이가 먼저 다가와 주더라고요. 다른 친구들과 조금 다르게 말하는 너도 재밌는 것 같다고 말해준 걸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 알고 지낸 지는 한 5, 6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고등학교 입학 이후로는 같은 반이 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던데요.”

, 맞아요. 운명의 장난인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먼저 정한이를 찾아서 챙기는 편이었어요.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애였거든요. 정한이가 소개시켜준 지수랑도 의외로 잘 맞는 부분이 있어서, 처음 동아리를 열 때는 부원이 그렇게 달랑 세 명이었어요. 지수도 그랬지만 정한이는 특히 제가 하는 일에 있어서 누구보다 신뢰와 응원을 아까지 않았던, 그런 애였어요.”

 

 

 

승철은 여전히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건 채 대답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그 웃음에서는 왠지 자판기 커피 맛이 날 것만 같았다. 극도로 달고, 헤이즐넛을 가득 들이부었으면서도, 뒷맛이 묘하게 쓴. 그러니까 어쩌면, 인생의 축소판을 맛보는 느낌. 형사는 종이컵을 들어 반쯤 남은 커피를 한 숨에 모두 들이키고서 승철을 마주한다. 저 아이는, 저렇게도 어린 나이에 세상의 표면과 이면을 다 담은 얼굴을 할 수가 있었다. 괜히 기분이 쓴 탓에 형사는 질문을 잠시 멈추고 던지듯 뱉었다. 그동안 상심이 컸겠어요. 제 말이 위로가 되길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어색하게 웃어 보인 승철이 짧게나마 감사를 표하자 형사도 따라 입 꼬리를 당겼다.

 

 

 

승철 학생도 웃으니까 좀 낫네. 앞으로 자주 웃고 다녀요, 사건 끝나면. 아마 친구도 그걸 더 좋아할 거야.”

감사해요, 진짜. 저나 저희 애들한테 많이 신경 써 주셔서.”

아닙니다, 이게 내 일인데 뭐. ……, 그럼 혹시 승철 학생이 바라보는 피해자와 김민규 학생의 관계는 어떠했었나요?”

, 민규요? ……저는 사실, 민규가 맘에 많이 걸려요. 그러니까, 의심된다는 건 아닌데, 뭐랄까, 정한이가 민규와 사이가 많이 가까워진 이후로 평소답지 않은 행동들을 많이 했거든요. 이번에 주연 맡은 것도 그렇고.”

윤정한 학생 장래희망이 연기자라고 했었죠?”

,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항상 연기를 할 거라고 했었어요.”

정한 학생에게 연기를 포기할 만한 사건이 있었나 봅니다.”

그걸, ……, 아마 지수는 그걸 말 못 했겠네요. 저라고 정한이의 일을 남한테 전할 만한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관련이,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없지 않아 보이거든요.”

 

 

 

거기에서 말을 끊은 승철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책상 모서리에 반쯤 걸쳐진 손에 힘이 들어간다. 형사는 미리 정리해 두었던 서류 뭉치를 뒤적여 정한의 증명사진이 붙은 학교생활기록부를 펼쳤다. 맨 첫 페이지, 출결현황에 기록된 단문의 문구. ‘14.06.12 ~ 14.07.13 무단 결석 처리.’ 그것을 내려다보는 형사의 시선 위로 낮게 가라앉은 승철의 목소리가 천천히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재작년에그러니까 저랑 정한이랑 지수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이에요. 저희 학교가 남고인데다 정한이가 머리도 길고 외모적으로 여성스러운 부분이 좀 있었거든요. 그래서 정한이가 질 낮은 애들한테 괴롭힘을 당했었어요. 그 때 지수가 같은 반이어서, 지수는 자기 딴에 그걸 막아본다고 계속 먼저 정한이 챙겨서 다녔었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그 놈들이 지수한테도 협박 비슷하게 한 것 같더라고요.”

집단 따돌림 같은 겁니까?”

아뇨, 그런 느낌이라기보다는, 정한이가 맞기도 좀 맞고, 그런…… 성적인 괴롭힘이, 좀 많았어요. 어쩌면 그게 주였을 지도 모르죠. 그래서 정한이가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 놈들이, 여러 모로, 못할 짓을 많이 해서요. 한동안 병원 치료도 받았는데 정한이가 먼저 마음을 닫더라고요. 아예 고개를 못 들고 다녔어요. 저희 앞에서도 겨우 웃고. 그래서 연기도 그 일 때문에 때려 치겠다고 했었어요.”

그런 윤정한 학생이 먼저 나서서 연기를 다시 하겠다고 했지 않았나요?”

, 맞아요. 그런 애가, 다시는 연기 안 하겠다고 했던 애가 민규 때문에 다시 연기를 하더라고요. 많이 놀랐죠. 저도 모르고 지수도 모르고, 정한이랑 민규만 아는 무언가가 있었을 거예요. 사실 짐작도 안 가요,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래도 민규는 착한 애니까, 아마 정한이가 못 다 이룬 꿈을 펼치도록 뒤에서 많이 도와줬을 거예요.”

 

 

 

숨 대신 말을 뱉듯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승철은 매듭을 지은 후에야 깊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형사는 만년필을 들어 정한의 학교생활기록부 위, 무단결석을 알리는 문구 아래에 학급 내 집단 성폭력, 입원 치료, 왜 무단?’이라는 문구를 써 넣었다. 승철은 건조해진 두 눈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다, 이내 마른세수를 하며 길게 한숨을 뱉었다.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던 짐이 덜어진 것 같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어깨가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형사는 무언가 더 묻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추가 질문은 하지 않고 그대로 서류를 덮어 버렸다. 수첩을 들어 다 날아가는 글씨로 무언가를 써 내려간 형사는 두 줄쯤 더 적을 수 있는 여백을 남겨 두고서 승철에게 질문 하나를 더 던졌다.

 

 

 

혹시 담당교사 전원우 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 사실……,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전 굳이 의심하라고 하면 저희 쌤을 지목할 것 같아요.”

평소에 의심 가는 행동을 하셨던 적이 있나요?”

아뇨, ……. 그런 건 아니에요. 사실 쌤이 젊은 축에 속하시는데 수업도 잘 해 주시고, 또 저희 동아리도 잘 챙겨 주시거든요. 좋은 사람이에요. 근데이 얘긴 지수한테서 들은 건데, 정한이 그 일 관련해서요.”

 

 

 

승철은 또 한 번 말을 멈추고, 벅차도록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형사는 만년필 뚜껑 쪽으로 책상을 툭툭 소리 나게 두드리고 있었고, 그의 시야에 들어온 승철의 주먹 쥔 두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입술 끝을 비틀어 깨물었다 놓은 그가 말을 잇기 시작했다.

 

 

 

사실 지수가 많이 힘들어했던 게 협박받은 것도 있지만, 정한이가 정말 큰 상처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거든요.”

큰 상처라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폭력적 행위가 있었던 건가요?”

, , 그런……, 때리고 밟고 그런 것보다는, , 성적인그런 일이 있었죠.”

유사 성행위가 있었나 보군요. 이 일에 대해서는 제가 좀 더 조사하도록 하죠.”

, 아무튼, 저랑 지수랑 과제하느라 정한이 전화를 못 받아서, 일이 틀어진 거거든요. 그니까 그 놈들이 오기 전에 정한이를 구해줄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못 구해줬던 거죠. 그래서 그거 때문에 지수는 아직까지도 죄책감 갖고 있을 거예요, 아마. 암튼 그 날 지수가 나중에 전화 받고 먼저 정한이한테 갔었는데, 정한이가 정신 잃기 전에 지수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원우 쌤이 자기를 보고서 그냥 지나쳤다는 식으로. 깨어났을 때 정한이는 그 순간의 기억을 통째로 지워서 다시 물어볼 수는 없었죠.”

윤정한 학생 1학년 때 7반이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 그러니까요. 그래서 그냥 그것 때문에, 가끔씩 꺼림칙한 기분이 들긴 해요.”

 

 

 

말을 마친 승철이 손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풀고 숨을 고르는 동안, 형사는 문득 엎어 놓았던 서류를 다시 들어올렸다. 맨 첫 페이지, 출결현황 바로 위에 적힌 학생 이력,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적힌 ‘1학년 7, 담임 전원우.’ 형사는 그 위로 만년필을 대어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승철의 이름이 적힌 수첩의 마지막 여백에 전원우 윤정한 관련성 조사 필요라고 써 넣었다. 사각거리며 만년필이 종이 위에 닿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승철은 책상 아래로 몰래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9시 반이 넘어가고 있다. 빈소를 혼자 지키고 있을 순영에게로 괜히 걱정이 뻗쳐 간단하게 문자를 넣은 승철이, 수첩을 마구 뒤적이는 형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 형사님. 이거 언제쯤 끝나나요?”

혹시 바쁜 일 있습니까? 아마 오늘쯤이면 빈소 정리해야 할 텐데.”

, 내일 새벽에 정리하고 보내주기로 해서지금 후배가 잠깐 자리 지켜주고 있거든요.”

잠시만요. , 최승철 학생, 수고하셨고 이제 가 봐도 좋습니다.”

, . 수고하셨어요, 형사님.”

 

 

 

발인할 때 내가 못 들르지 싶어서, 미안해요. 친구가 승철 학생 많이 의지되겠어.

취조실을 빠져나가려 막 문고리를 잡은 승철의 뒤통수에 대고 형사가 그렇게 덧붙였다. 문득 고개를 돌린 승철은 형사와 눈이 마주치고서, 씨익 웃는 그를 따라 입 꼬리를 당겨 올렸다. 건물을 빠져나와 로비 앞에 서서, 승철은 조금 전에 문자를 넣었던 순영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상단바에 깨알 같은 글씨로 21:49 라는 숫자의 나열이 자리하고 있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새까맸고, 강하게 부는 바람 속에 먼지처럼 가는 눈송이가 섞여 날리고 있었다.

 

 

 

, 순영아. 형 지금 끝났어. , 택시 잡아서 바로 갈게. 좀만 기다려 봐. 어어, 끊는다.”

 

 

 

큰 의미가 없는 말들을 나열하고서 전화를 끊은 승철은 잠깐 동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바깥 공기 속으로 제 몸을 밀어 넣었다. 날이 춥고 바람이 세게 불어서, 도로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주머니 가장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정한의 장례가 이어지는 근 삼 일 간, 빠짐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

 

 

 

 

 

 

 

내가 빈소로 막 돌아왔을 때, 순영은 장판 바닥에 앉아 사과와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쟁반 위로 뚝뚝 끊긴 사과 껍질이 한가득, 조각하듯이 깎은 사과 한 개가 플라스틱 접시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반쯤 껍질이 깎여 나간 두 번째 사과를 든 채 한숨을 푹푹 내쉬던 그는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 환하게 웃었다. , 나 사과 깎아 줘! 패딩을 벗기도 전에 다짜고짜 사과부터 들이미는 게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나는 그냥 웃어버렸다.

 

 

 

기다려 봐봐, 형 이거 옷 정리 좀 하고. 밖에 눈 와서 택시 기다릴 때 다 맞았단 말야.”

, 밖에 눈 또 와? 오늘은 안 온다더니, 일기예보도 믿을 게 못 되네.”

근데 깎던 건 마저 깎으면 안 되냐? 도전정신이 있어야지, 사람이.”

 

 

 

패딩을 벗어 차곡차곡 접으며 장난스레 내뱉자 순영은 사과를 든 채 입술을 비죽이며 입속말로 꿍얼거렸다. 그 표정이며 행동들이 막연하게 귀엽고 웃겨서 나는 또 한 번 소리 내어 웃었다. 아마 요 근래 들어 가장 크게 웃는 것일 테다. 순영의 패딩과 교복 마이가 널브러진 빈소 구석 자리에 내 패딩을 겹쳐 두고 그의 옆으로 와 앉자, 순영은 기다렸다는 듯 칼과 반쯤 깎인 사과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오랜만에 집중력을 발휘해 껍질을 깎는 동안, 순영은 제가 깎아 놓은 사과를 들어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있었다. 사각사각하는 소리가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소리가 공기 중으로 느리게 퍼져나갔다.

 

 

 

, 형 사과 진짜 잘 깎는다. 형 올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다, 그치?”

배고팠어? 배고프고 졸리면 집에 가라니까, 왜 굳이 남아 있겠대?”

아니, 좀 그렇잖아. 나 혼자 집에 가기도 싫고. 형 그렇게 놔두는 건 더 싫단 말이야.”

어이구, 그랬어? 고마워 죽겠네. 근데 우리 잠 못 자, 알지?”

, , 피곤한데……. 그럼 우리 지금부터 뭐 해?”

 

 

 

한 입 가득 사과를 베어 물어 아삭아삭 씹던 순영이 반쯤 뭉그러진 발음을 하고서 물어 왔다. 딱히 생각해 놓은 대책 같은 게 없어서 그러게, 뭐 하지, 하고 김빠지는 답을 뱉은 난 다 깎은 사과를 들고 한 입 베어 물며 눈을 굴렸다. 3일 간 달라진 것이 없는 빈소 안의 풍경들, 그 가운데 정한의 영정이 놓인 단상 가까이 바닥에 내던져진 것처럼 놓인 종이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어제, 지수가 읽다 말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것이 저기까지 떠내려간 것이었다. 곧 순영이 바닥에 반쯤 눕다시피 하고 팔을 길게 뻗어서 대본을 집어 왔다. 이거 봐도 돼? 묻는 말에 나는 접시 위에 사과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보여준다고 했었다며, 좀 전에 저녁을 먹으면서 나눴던 얘기를 상기시키자 순영은 말끝을 흐리며 어물거렸다. 꿈일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당시 눕자마자 잠들어 버렸던 나로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대화였지만, 꿈이 아니었을 것만 같은 생각확신이 사라지지 않는다. 팔을 뻗어 순영을 끌어당기고, 나란히 앉아 표지를 넘겼다. 맨 앞장에는 내가 정한으로부터 받았던 시놉시스와 간단한 배역 설명이 적혀 있었다. 순영이 그것을 읽는 동안 나는 사과를 씹어 삼켰고, 그 뒤부터는 우리 둘 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으므로 곧 빈소 내부에는 사과 씹는 소리에 간헐적으로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영화의 내용은 내가 추측한 것만큼 간단하지가 않았다. 우선 정한이 맡은 세하역은 그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는 피아노 천재였고, 민규가 맡은 재연역은 항상 세하의 뒤를 쫓아야만 하는 만년 2등이자 비운의 영재였다. 초반부의 내용은 이 둘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신 몇 개가 들어가 있고, 둘이 그다지 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재연이 마냥 세하를 시기하지만은 않는다는 것 또한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1등과 2등의 클리셰다. 그러나 영화 중반부, 밤늦게 학교에서 연습을 하고 있던 세하가 누군가의 음모로 손을 다치고 한동안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면서 영화의 느낌 자체가 완전히 뒤집혔다. 누가 본대도 전형적인 클리셰였는데, 이쯤부터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갈변하고 있는 사과 심지를 잘근잘근 씹던 순영은 깊게 들이마신 숨을 깊게 내쉬고, 가득 쌓인 사과껍질 위로 그것을 내려놓으며 제 머리를 짚었다. , 머리 안 아파? 묻는 말에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머릿속에서 뒤엉키기 시작하는 문장 가운데 틈을 뚫고 빠져나온 것들은 전부 눈에 익었다. 2년 전, 정한이 입버릇처럼 해대던 말들이었다.

 

 

 

, 이거 뭔가, , 위험하지 않아?”

…….”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영화 대본 같지는 않은데, 형은 뭔가 알고 있을 거 아냐.”

……맞아, 아니야.”

 

 

 

뒷장으로, 더 뒷장으로 종이가 넘어갈수록 나는 묵직하게 내려앉는 심장을 더 이상 잡고 버틸 수 없었다. 추측이 확신으로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은, 절망하던 세하에게 손을 내밀고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재연이 자신을 다치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에서였다. 그것은, 어쩌면 비뚤어진 동경, 또 어쩌면 심각한 애증.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본 속의 재연 위로, 누군가가 겹치는 기분이 들었다. 정한이 그려가고 있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픽션이 아닌 팩트였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세하재연을 음악실로 불러낸다.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으므로, ‘세하와의 독대는 재연에게 꿀과 같은 시간일 것이다. ‘재연이 음악실로 들어서고, ‘세하가 문을 잠근다. 등 뒤로 두 손을 숨긴 채, ‘세하는 달콤한 말들로 재연의 발을 묶는다. 곧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러 껴안은 세하, 손 안에 숨기고 있던 것을 밖으로 꺼내든다. 그것은 라이터, 음악실 안 바닥에 찰랑이는 투명의 액체 위로 세하는 라이터를 주저 없이 내던진다. 빠르게 불이 붙고, 타오르는 교실 안에서 두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대본을 쥐고 있던 순영이 그것을 떨어뜨려서, 차르륵 하고 종이가 바닥에 부딪쳐 흩어졌다. 확신, 그래, 나는 정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문득 순영을 돌아본다. 넋이 빠진 얼굴을 하고 휴대폰을 집어든 그는, 전화 버튼을 눌러 질리도록 많이 누른 일련의 번호를 눌렀다가 지웠다.

 

정한이 우리에게 말하려던 것은 2년 전의 이야기다. 2년 전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그것은 현재의 이야기다. 다시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정한과, 그를 그 자리로 이끌어 준그러면서도 정한에게 또 하나의 깊은 상처를 남긴 민규와, 그리고

 

 

 

……, 나 기억났어.”

뭐가?”

민규, 형이, 2년 전에 우리 학교 다녔었다고 했잖아. 1학년 7.”

, 근데 그게 왜?”

 

그 형 이름이, 재연이잖아. , 재연.”

 

 

 

끝까지 비열한 얼굴을 거두지 않던, 자신의 비뚤어진 감정을 몰랐던, 2년 전 나와 같은 색 명찰을 달고 있던, 재연. 영화는 절대로 풀릴 수 없게 단단히 묶인 두 사건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정한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처음이자 마지막 수단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정리되고 나서, 나는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지워지는 것을 느낀다. 언어를 모두 까먹은 기분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액자 속의 정한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 웃음 뒤에 가려진 어둠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어쩌면 정한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 눈물이 날 자격이 있긴 한 걸까.

 

적막이 숨을 죄어오는 가운데, 바닥으로 미끄러진 순영의 휴대폰이 경쾌한 알림음을 두세 번 연속으로 울려 댔다. 초점을 잃고 떠돌던 순영의 눈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심스레 휴대폰을 주워드는 그의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발신자는 승관, 급한 일이 있을 때면 으레 문자 메시지를 카카오톡 메신저처럼 쓰는 버릇이 있어 이번에도 문자 세 통이 쌓여 있었다. 순영은 휴대폰을 꼭 쥔 채 내 쪽으로 몸을 조금 돌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문자 아이콘을 꾹 눌렀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화면 위로 떠오르는 글자의 나열. 그것이 구성하는 의미가 머릿속으로 입력되자 감쳐문 입술 새로 웃음이 샌다. 그것은, 명백한 절망. 내 옆에서 순영이 작게 탄식했다.

 

 

 

[순영아!! 민규 찾았대!! ㅠㅠㅠㅠㅠㅠ]

[근데 민규 지금 경찰서로 바로갔다는데]

[무슨일이야?? 혹시 아는거있어?]

 

 

 

발광하는 기계장치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것은명백한 절망. 벽에 걸린 시계가 세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6. 담당교사 전원우

 

 

 

 

 

정한의 발인은 동이 막 틀 무렵에 시작되었다.

담배를 한 갑 가까이 피워 대며 새벽을 지새우던 내게 승철의 연락이 닿은 것은 새벽 네 시 쯤, 어두운 방 안에 별안간 휴대폰 액정이 빛을 발하기에 확인한 문자는 뚝뚝 잘려나간 문장 몇 개를 담고 있었다. 감정이 잘려나간, 냉정한 투의 문자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선생님 정한이 발인 5시쯤 시작한대요. 장례식장도 한번 안 오셨는데 마지막 가는 건 보셔야죠.]

 

 

 

독한 니코틴을 술 마시듯 해도 또렷해지지 않던 정신은 문자를 받은 순간부터 발악하듯이 맑아졌다. 오가는 사람이 적은 새벽의 도로를 마구잡이로 질주해 병원에 도착했을 때가 네 시 사십 분이었다.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삼 일 동안 꾸준히 눈이 왔었다고 하더니, 아직 어두운 하늘은 질척한 진눈깨비를 뿌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자판기가 늘어선 자그마한 차양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주머니를 뒤적여 값싼 맛이 나는 자판기 커피를 빈속에 들이붓는다. 승철이 일러준 시간까지는 십여 분이 더 남았다.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거기에서 그 각도로 고개를 쳐든 채 눈발이 점점 굵어지는 것을 마주하다가, 다섯 시 하고도 십 분이 더 지나서야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벤치에 내버려 둔 종이컵이 바람에 날려 굴러가는 소리가 선연했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 막 화장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정한의 부모와 동아리 부원들만이 모인 가운데, 벌써부터 아이들 쪽에서 간간히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장의사가 정한을 닮은, 짙은 밤색의 나무 관을 가마 안으로 밀어 넣는다. 정한의 어머니가 아래로 무너졌고, 아이들의 고개가 모두 아래로 떨어졌다.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두 발자국 물러선다. 관이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질 무렵, 나는 없었던 사람처럼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저기 모인 아이들은 내가 왔었는지 모를 것이다. 몰라야만 했다. 그런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시린 눈을 굳게 떠 올리고, 병원 로비로 나섰다. 완전히 밝아진 하늘은 옅은 회색이었고, 굵직한 눈송이가 바람을 타고 유유히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정한이 과연 눈을 좋아했는가를 생각해 보다가, 나는 곧 생각을 멈추었다.

 

 

나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정한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애도하는 일 모두.

입 밖으로 작게 한숨이 터져 나온다. 나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종이컵을 든 채 입가에서 홀짝이던 중년의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일찍 나오셨네요. 오래 걸리실 것 같다더니.”

아닙니다, 제가 뭘 잘했다고 거기 계속 있겠습니까.”

포기하신 겁니까, 아니면

저는 그냥, 제게 책임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서에 가서 하시죠.”

 

 

 

승철의 연락이 오기 전에, 미리 나에게 연락해 왔던 정한의 사건 담당 형사였다. 서로의 말이 자꾸만 끊어질 무렵 형사가 대화를 정리하고 먼저 눈 내리는 바깥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그 쪽으로 내밀었던 오른쪽 손목은 여전히 텅 빈 채 시린 바람을 맞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내 몸을 실은 차는 경찰차가 아니었고, 형사는 수갑을 차 뒷좌석에 던져놓은 채 시동을 걸었다. 차 안은 고요했고, 엔진이 가동되는 소음만 간간히 울렸다. 나는 입술을 자꾸만 눌러 깨물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잘한 것이 없었으므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속이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

 

 

 

 

 

 

 

아침에 진눈깨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취조실이 습했다. 차갑고 눅눅한 공기가 피부에 닿자 원우는 반사적으로 눈가를 찌푸렸다. 먼저 들어와 자리에 앉은 형사가 알아보기 힘든 글씨들로 가득 찬 수첩을 뒤적이다가, 혹시나 싶어 챙겨 온 이면지를 펴 들었다. 의자를 빼내어 앉은 원우는 차게 식은 양 손을 맞잡았다. 곧 만년필을 꺼내어 뚜껑을 연 형사가 그것을 쥐고 원우를 마주한다. 엇갈리던 시선의 방향이 완전히 틀어질 때쯤, 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름과 나이, 소속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십 칠 세 전원우, 직업은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전원우 씨, 본인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서 현재 본 형사의 질문에 따라 진술을 할 예정입니다. 그저 진실 되게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고, 본인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셔도 무방합니다. 아시겠습니까?”

,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단편영화 제작부 내에서 전원우 씨의 역할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원우 위로 형사의 첫 번째 질문이 내려앉았다. 입술 끝을 비틀어 깨문 채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던 그는 차게 식은 손끝을 손바닥 안쪽으로 말아 넣어 꾹 주먹을 쥐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를 내는 원우의 입가에서 하얗게 김이 퍼졌다.

 

 

 

저는, 동아리 담당 교사였습니다. 아이들이 영화를 촬영하는 데 필요한 장비나 기자재를 구해 주는 일과 장소 대관을 주로 했습니다. 지난 영화제 출품 때처럼 학교장의 승인이 필요한 교외활동을 할 경우에 제가 그걸 결재 받는 일도 했었어요. 제가 초임 교사라 부족한 점이 항상 많은데, 아이들이 동아리를 잘 꾸려나가 줘서 특별히 손 가는 건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동아리 내에서도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정한이는…… 제가 처음으로 담임을 맡은 반의 학생이었어요. 입학 성적도 좋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꿈이 확고한 데다 그걸 포기하지 않고 펼쳐나가려는 게 기특해서 담임으로서, 교사로서 눈이 많이 갔던 아이입니다. 하지만……

 

 

 

원우는 거기까지 뱉고서 말을 멈추었다. 숨이 막힌 것처럼 말끝이 뚝 잘리자 시선을 아래에 둔 채 무언가를 휘갈겨 적던 형사가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입술을 비틀며 피가 몰리도록 잘근잘근 씹던 그가, 퍽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어떤 죄도 달게 받겠습니다. 단단하게 뱉어진 음성, 그 아래로 다리 위에 둔 원우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본인이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겁니까?”

……, 그렇습니다.”

윤정한 학생이 과거에 동급생으로부터 성적 괴롭힘을 당하고, 유사 성행위를 당한 사실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까?”

, 알고 있었습니다. 정한이가 직접 제게 와서 상담도 몇 번 한 적이 있었어요. 많이 힘들어 하더라고요. 아시다시피 저희 학교가 남자 학교인 데다, 질 낮은 학생들이 적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 해 다른 담임들도 쉬쉬했었죠. 개인적으로라도 처벌을 하려고 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처벌이 많이 약해졌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조사해 본 결과 당시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 가운데 대부분은 증거불충분으로 처벌조차 못 받고 풀려났네요.”

, 그래서 정한이가…… 상처를 크게 받았을 거예요. 저로서는 그 아이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죠. 제 능력이 부족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선생으로서 들지 말아야 할 감정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켜주고 싶었고, 그토록 유능한 아이가 서서히 무너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그 마음이란 게……, 순식간에 변질되더군요. , 이 아이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구나, 그런 생각으로 시작해서 나밖에 없어야 해, 결국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근데 그런 사람이 피해자를 최초로 발견하고도 그냥 지나치셨습니까?”

 

 

 

순식간에 원우의 표정이 굳는다. 완전히 경직된 얼굴, 흔들리는 눈동자는 한 곳에 초점을 두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굴러가고 있었다. 형사의 예리한 시선이 원우에게로 닿고, 그가 그것을 피하자 형사는 수첩을 뒤적여 승철의 진술이 적힌 페이지를 열었다. 쉽사리 터지지 않는 원우의 뒷말을 기다리며, 형사는 좁은 여백에다 전원우, 최초발견 O’를 덧붙여 적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급하게 숨을 고르던 원우는 겨우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그건, ……제 잘못이라고밖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한 번 마음을 비뚤하게 먹으니 쉽게 바로잡아지지 않더라고요. 그 때 제가 정한이를 처음으로 목격한 것이 맞습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찾아다닌 건 아니었고, 우연히 가해자 중 몇 명이 그 근처로 향하는 걸 알고는 있었죠. 반신반의해서 거기로 가 봤던 건데,”

피해자가 있었겠네요. 유사 성행위를 당했을 테니 성한 상태는 아니었을 테고.”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한이를 선뜻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를, 제가 지켜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피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단지 그런……, 감정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제가 그 자리를 뜬 이후에 바로 지수와 승철이가 왔다고 하더라고요. 정한이는 그 날 저와 마주친 일을 기억하지 못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전원우 씨께서는 죄책감이 크셨겠네요. 혹시 김민규 학생과 윤정한 학생의 관계는 알고 계셨습니까?”

, 그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정한이가 먼저 말한 적 있었거든요. 민규가, 요새 힘들게 한다는 식으로. 그때 제가 먼저 그 아이에게 묻고 나서서 도와줬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발 아래로 떨어뜨린 채, 원우는 말을 마치고 겨우 고개를 들어 형사의 얼굴을 마주한다. 비참한 얼굴과 비참한 목소리. 형사는 쓰게 웃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 원우가, 곧 책상 위로 이마를 박았다. 철제 책상과 맞부딪치는 소리가 잔향을 남기며 길게 공명했다. 형사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만년필 뚜껑을 닫고 제 수첩과 이면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원우의 표정은 담담했으나, 그의 입술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울 자격이, 없다. 입속말로 중얼거리는 원우의 두 눈에 빨갛게 핏발이 섰다.

그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

 

 

 

 

 

 

 

정한은 내 첫 제자였다.

 

 

2년 전, 초임 교사인 나는 집에서 거리가 좀 있는 남자 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었다. 책임질 것이 많고, 아직 포기하는 법을 모르는 나에게는 이끌고 나가야 할 아이들도 있었다. 1학년 7반의 스물여덟 명. 나는 그들 가운데 윤정한이라는 아이를 눈에 먼저 담기 시작했다.

 

정한은 입학 성적이 꽤 좋았다. 교탁에서 두 번째 자리, 가장 눈에 잘 띄는 명당자리에 앉아 항상 눈을 빛내며 수업을 들었다. 교무실에서도 그의 칭찬을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수업 태도가 정말 좋더라, 성격도 바르고 싹싹하더라,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것 같던데, 하는 말들을 머릿속에 꼭꼭 담아 두는 것이 일상의 낙이 되어갔다. 으레 그렇듯이 학기 초에 상담을 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정한은 진로가 명확하고 성격이 낙관적이었다. 연기가 하고 싶다며, 언젠가 유명해지면 날 잊지 않고 찾아오겠다며 너스레를 떠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아직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한이 동아리를 열겠다고 했을 때, 내게 담당 교사를 부탁했을 때 망설임 없이 수긍할 수 있었다. 그가 함께 데려온 아이들은 내 반의 학생인 지수와 1반 승철이었다. 학기 초 정한의 자기소개서에 그 둘의 이름이 적혀 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던 것도 같았다. 한동안 동아리에는 그 세 사람밖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항상 내가 동아리 실을 들를 때마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갖은 책임을 다 지며 동아리의 폐부를 반대했던 건,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십오 년간의 삶과 정확히 반대되는 행동들일 지도 몰랐다. 정한으로 하여금, 나라는 사람이 어느 정도 바뀌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정한을 조금 더 눈에 자주, 오래 담았다. 단지 그는 나의 제자, 그래내가 아끼는 제자였다.

 

 

정한을 향한 감정에 탁한 색이 들고 각도가 비틀어진 건 1학기 중반쯤 이었다. 그 당시 우리 반에는 학생부를 제 집처럼 드나들던 질 낮은 아이들이 한데 모여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정한이 괴롭힘을 당하더라 하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고 그런 애들이 끼어있는 만큼 질 낮은 소문이겠거니, 하고 넘겼던 것은 두 배 세 배가 되어 돌아왔다. 도를 넘은 얘기들이 교무실에까지 들어갔음에도 교사들은 쉬쉬했다. 징계위원회를 열고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학교 이미지 입장에서 좋을 일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개중에는 그때까지도 소문을 부정하는 교사 몇이 있었고,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던 내 믿음이 산산이 부서진 것은 정한이 교무실을 방문했을 때였다. 다 나아가는 상처 위로 또 몇 개의 상처를 달고, 정한은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아 교무실 밖 복도로 이끌었다. 극도로 불안해하는 그를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라, 나는 어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정한의 손을 붙잡고 교사 휴게실로 들어가 앉혔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오로지 나뿐임을 계속해서 확인하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 ……너무 힘들어요.

정한아, 무슨 일인데 그래. 선생님이 비밀 지켜줄 테니까 천천히 말해 봐.

혹시, 소문 같은 거…… 들어보신 적 없으세요?

「…소문?

그거, 소문 아니에요…….

 

 

 

……김재연이, 저를 괴롭혀요. 김재연이랑, 같이 다니는 애들도, 저를 괴롭혀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쥐어짜듯 뱉어낸 정한의 한마디에, 나는 무언가 이질적인 감정 두 개가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손대면 부서질 것만 같고, 깨질 것만 같은, 지금 내 눈앞에서 참았던 울음을 토해내는 이 아이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내 학급의 질 낮은 무리재연과 그 무리들이 정한을 망가뜨리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 나는 필사적으로 후자를 밀어내고 전자를 내 머릿속에 세뇌시키며 정한을 달랬다. 도와주세요, 를 반복하는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정한아, 쌤이 더 알아보고 꼭 도와줄게.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나는 그 허울과도 같은 약속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아 버렸다. 이전처럼 정한을 눈에 담는 느낌이 달라졌다. 이전과 똑같이 좀 더 오래, 좀 더 자주 그를 눈에 담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 한켠이 불편하게 저리고 숨이 막혔다. 정한은 그 이후로도 나에게 몇 번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고는 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제자를 사랑하여 그를 지키고 싶었으나 결국 그럴 수 없었던 나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던 정한에게 깊게 벤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악몽 같은 만남. 평소와 같이 교무실로 걸음을 옮기던 중 재연의 무리가 오래 전에 통행이 금지된 별관 쪽으로 향하는 것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딘가 상기된 듯한 그들의 표정이 꺼림칙했으나 나에게는 주어진 수업과 일이 있었으므로 더 돌아보지 않고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쯤 뒤였을까, 그 근처를 지나칠 일이 있어 걷고 있던 나의 발걸음을 붙잡는 희미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숨소리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한 그것은, 조금만 유심히 보면 충분히 보일만한 폐쇄구역 모퉁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느리게 걸음을 옮겨 모퉁이 너머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진다. 복도에 난 쪽창에서 빛이 들어와 내부를 비추었고, 나는 그 안에서 반쯤 뜯어진 교복을 겨우 걸친 채 헝클어진 머리를 한 정한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래서, 자리를 떴다. 그 순간 자리를 떠야만 한다고,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린 것 마냥 걸음이 빨라졌다. 교무실로 돌아와 나는 책상 위로 머리를 쿵쿵 처박았다.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나 나약한 존재였던가, 이렇게나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였던가. 후회하는 와중에도 나를 정확히 마주하고 뭐라 내뱉으려던 정한의 상처 받은 얼굴이 잔상처럼 남아 괴로워졌다. 얼마 안 가 지수가 내게 전화를 했다. 정한을 발견했다는 말을 하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 날 그렇게 학교가 뒤집힌 이후로 정한은 입원 치료를 받았고, 학교에서는 사건을 덮기 위해 그의 병결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따금씩 병원에 들렀을 때 그는 나에게도 그 부서질 것 같은 입 꼬리를 당겨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어 주었다. 사건 당시 나를 마주친 것을 기억에서 지워 버려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나를 저주했다.

 

 

 

정한이 사건 당일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치료가 끝난 이후 학교에 돌아왔을 때 여전히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것은 그렇게 확신해오던 연기자로서의 장래희망을 포기하겠다는 것. 나뿐만 아니라 같은 동아리 부원이었던 승철과 지수도 정한을 설득했지만 그는 그저 연기 때려 쳤어요, 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래서 정한을 촬영 현장 안으로 이끌고 들어간 민규가 마음에 걸릴 따름이었다. 민규는 작년 여름방학 때쯤 입부한 정한의 한 학년 후배였는데, 서로 하는 일이 달라 처음에는 정한과 그렇게나 친한지도 알지 못했었다. 1년 쯤 지난 후에야 저렇게 친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었던 것 같다. 영화제에 다녀온 이후로 복도를 지나면서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을 꽤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정한의 옆에서 그저 말갛게 웃는 민규를 붙잡고 무슨 속셈으로 정한을 촬영장으로 이끌었느냐 물을 수 없었다. 단지 추측뿐이었고, 다만 정한이 나에게 조금 더 많이 의지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지난 10월 쯤, 정한은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 민규한테서,

김재연이 보여요.

 

나는 그 말을 하는 정한의 짙은 밤색 눈동자를 마주하다가, 별달리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정한이 민규로부터 상처받기를, 그리하여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려주기를 바랐는데.

그래, 나는 울 자격이 없다. 그를 지켜주고 싶었던 마음에 까맣게 물이 든 이후부터 줄곧.

 

 

 

 

 

 

 

 

 

 

#7. 2학년 4반 김민규

 

 

 

 

 

형의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 신, 형이 맡은 세하가 내가 맡은 재연을 껴안은 채 음악실에 불을 질러 함께 그 속에서 죽어가는 장면이다. 그 날도 나는 우리 둘과 CCTV같은 카메라만이 남은 음악실 책상에 걸터앉아서 대본을 팔랑팔랑 넘기고 있었고, 형은 무릎을 끌어 모은 채 의자에 앉아 내 쪽을 제 시야 절반 정도에 담고 있었다. 동아리 내 촬영 장비 중에서 가장 비싼 승철이 형의 촬영 카메라는 빨간 불을 빛내며 녹화 중이라는 것을 발악하듯이 알렸고, 나는 그 쪽으로 다가가 녹화 정지 버튼을 눌렀다. 오른손을 들어 손톱을 씹는 형의 교복 소매 사이로 빨갛게 그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 그 장면 찍을 거예요?

어떤 거?

마지막 장면이요.

 

 

 

몸을 돌려 고개를 들어 올린 형을 마주했다. 느리게 끄덕여지는 고개, 나는 그것을 두 눈에 천천히 담는다. 여전히 형의 소매 안으로 다 낫지 않은 상처의 붉은 색이 선연하다. 내가 다시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형의 입에서 나지막히 내 이름이 흘러 나왔다. 특유의 나긋한 음성으로 담는 내 이름을 듣기 위해서, 나는 형의 곁에 지독하게도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민규야.

, . 왜요?

나는 네가 그만했으면 좋겠어.

뭐를요?

「……알잖아, 그만 해 줘.

 

 

 

오랜만에 형의 시선이 오롯이 내 쪽으로 향했다. 눈물이 맺힌 두 눈을, 물기에 젖은 시선을 완전히 받아내며 나는 피하지 않고 형을 응시했다. 곧 형의 시선이 먼저 아래로 떨어졌다. 날 피하듯이 고개를 돌린 형의 머리칼 사이로 입술이 반쯤 깨물리는 게 보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형 쪽으로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기 위해 손을 뻗는데, 형의 오른손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아 내렸다. 나는 그 손목을 꾹 눌러 쥐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가, 애써 참아냈다. 형의 두 눈, 핏발 선 가운데 물기가 어린 두 눈이 나를 다시금 올려다본다.

 

 

 

손목 다친 건 왜 치료 안 해요, 아프게.

「……다친 거 아니야, 너도 알잖아.

알아요, 그러니까 왜 치료 안 하고 가만히 두냐고요.

「…난 진짜, 민규야,

형은 상처가 나면 상처가 난 만큼 예쁜데, 그런 상처는 볼 때마다 맘 아프단 말이에요.

 

 

 

나를 피하려고, 내게서 도망가려고 한 흔적이니까.

뒷말을 꼭꼭 씹어 삼키며 형의 교복 소매 위로 발갛게 비치는 상처 위에 엄지를 댔다. 한 겹의 천 아래 길게 그어진 흔적 위로 형의 심장이 느리게 박동했다. 형은 잠깐 인상을 찌푸리다가 곧 제 손목을 돌려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형의 손이 공중에서 맴돌다가 끌어 모은 무릎 위로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다시 손을 뻗어 꽤 길게 자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지난 8월 이후로 형이 머리를 묶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언젠가 형의 머리를 꼭 묶어줘야지, 하고 또 한 번 마음먹었다. 형의 짙은 밤색 눈동자는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카메라 근처에서 잠시 멈추고, 다시 나에게로 향한다. 눈동자 속에 내가 비친다는 건,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민규야. 이제 진짜 그만 둬.

뭐를요?

「……나는 네가 그만했으면 좋겠어. 의도가 뭐가 됐든 간에,

그치만 나는 형을 좋아해요.

 

 

 

하루에 한 번씩, 형이 그만두라고 할 때마다 내뱉는 나의 대답이었다. 내 마음을 가장 간단한 문장으로 서술한다면, 저 정도로 담백한 말이 될 것이다. 형을 좋아해, 사랑해, 같은 거. 내 말에 형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어쩌면 명백한 실소, 아니면 비소, 그것도 아니면 자조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평면적으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형은 자꾸만 내게 들으라는 듯이,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다.

 

 

 

민규야,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냐.

, 사랑의 의미는 그렇게 평면적인 게 아니에요.

네가 하는 건 사랑이 아니잖아.

사랑이라는 건 항상 전형적인 것만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아니라고, 민규야.

 

 

 

그 날은, 낯설도록 시선이 많이 마주쳤다. 스치고, 엇갈리다가도, 어느 순간 형이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형의 말투는 절박했고 눈빛은 간절했으나그에 반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늘 그래왔듯 달콤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 그래, 나는 형을 사랑하지. 항상 그래왔듯이, 형을 좋아하고 사랑하지, 그치 민규야? 마음 한켠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내게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속말로 중얼거리던 것을 내뱉어 본다. , 나는 형을 사랑해요. 내게 닿았던 형의 시선이 순식간에 유리창이 깨지듯 조각조각 나 부서졌다.

 

 

 

「……민규야.

, .

나는, 있잖아. 네가 그만두지 않는다면 말야.

어떻게 할 건데요?

난 나를 죽일 거야.

 

 

 

형은 그 말을 밖으로 뱉어내고서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휴대폰을 챙긴 채 음악실 출입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근래 들어 형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저것이었다. 나에게서 도망치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 같은 말들. 하지만 나는 형이 내게서 도망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씩 그것을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 근데 그럴 일 없을 거예요.

「…….

형도 날 좋아하잖아요.

 

 

 

문득, 고개를 돌린 형이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두 눈이 나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형의 어깨선 근처에서 길게 자란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끼이익, 기괴한 소리와 함께 음악실 문이 열렸고, 형은 그 밖으로 제 몸을 밀어 넣었다. 이것도 어쩌면 예상했던 결말. 며칠 째 나보다 먼저 촬영장을 뜨는 형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다시 돌아오니까.

 

나와, 값비싼 기계장치만 남아,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허한 음악실. 형 몫의 종이 대본이 창문 틈으로 새어 든 바람에 날려 차르륵, 소릴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

 

 

 

 

 

 

 

쪽창 하나 없이 자그마한 취조실, 그 안으로 잔뜩 피곤에 절은 형사가 들어서며 벽에 붙은 스위치를 눌렀다. 파밧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달린 알전구에 불빛이 들어오고, 그것이 다 퍼져 희미하게 철제 책상 위로 쏟아진 형사의 서류 뭉치를 비출 무렵 고개를 떨어뜨린 민규가 취조실 내부로 몸을 밀어 넣었다. 등 뒤로 뒷짐을 진 그의 왼손에 걸린 수갑이 저들끼리 부딪쳐 차가운 느낌의 소음을 냈다. 달랑 교복 셔츠 하나만을 걸친 그의 입에서 가늘게 숨이 흘러나올 때마다 입가에 하얗게 김이 피어났다. 형사는 재킷 주머니를 뒤적여 조그마한 열쇠 하나를 민규 쪽으로 내밀었고, 곧 시선을 돌려 수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이나 민규가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앉아 있자, 곧 형사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원래 수갑 풀고 조사받는 거예요, 김민규 학생.”

…….”

당신 아직 용의자 아니고 참고인이에요, 참고인.”

 

 

 

겨우 빈 페이지를 찾아낸 형사가 수첩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만년필 뚜껑을 열며 말을 마쳤다. ‘참고인이라는 단어에 악센트가 들어간 것을 모를 리 없는 민규가 입술 끝을 가볍게 깨물며 손을 뻗어 열쇠를 쥐었다. 수갑의 연결부에 나 있는 자그마한 구멍에다 열쇠를 밀어 넣어 돌리자 찰칵, 하는 소리를 내며 민규의 손목을 죄고 있던 철제 장치가 떨어져나갔다. 팔을 뻗어 수갑을 회수한 형사가 점퍼 주머니에다 그것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만년필을 들었다. 낮게 가라앉은 공기 위로 민규의 호흡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참고인 진술 시작하겠습니다. 학생 학년 반 이름 말씀해 주세요.”

……2학년 4, 김민규입니다.”

김민규 학생, 본인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의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서 현재 진술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본 형사의 질문에 대하여 진실만을 말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혹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수첩 맨 윗줄에 민규의 이름을 써내려간 형사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고 묻는다. 형사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고 있던 민규는 우연히 시선이 맞닿자 입술을 잘근 씹으며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추위에 건조해진 입술이 바싹 말라 파고들어간 잇새를 경계로 갈라지는 것을 느끼며, 민규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선 동아리 내 민규 학생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진행 팀이었어요, 순영이랑 같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슬레이트를 쳤고, 주로 촬영 세트를 정리했어요. 조금 적응된 후에는 쌤을 도와서 촬영 기자재를 구하고, 그걸 또 학교로 날라 오고. 그런 것도 했죠. 순영이보다는 제가 힘이 세니까. 그리고 또대본 인쇄, 포스터 인쇄 같은 것도 했어요. 늘 행정실이나 교무실을 들락날락 거려서 교내에서 좀 유명했죠. 사고치는 애들 같았는데 어디서 상도 타 오고 하니까 쌤들도 나중에는 넘어가시더라고요.”

권순영 학생의 권유로 동아리에 입부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 맞아요. 순영이가 하도 부탁을 해서 속는 셈 치고 들어갔었는데, 너무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지금도 후회는 안 해요.”

적응이 꽤 빨랐던 모양이군요. 부원 가운데에서도 피해자와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였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수첩 위로 시선을 꽂은 채 동아리 내 특이사항 없음.’이라고 써 넣은 형사는 곧 수첩에서 펜을 떼며 민규를 바라보고 두 번째 질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 정자세로 앉아 있던 민규는 그의 입에서 피해자라는 단어가 흘러나올 때부터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형사의 말이 끝을 맺자 가지런히 뒀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비틀린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던 그는, 곧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한층 깊어진 시선이 형사를 응시하며, 민규의 입이 열렸다.

 

 

 

어떤 게 듣고 싶으세요?”

가능하면 전부 다.”

저랑 정한이 형은…… 일단 형 동생 사이예요. 지난 8월에 영화제 마치고 형이 대본 작업 시작하면서부터 더 친해졌어요. 사실 제가 가서 막 들이댔거든요. 맨날 옆에 붙어서 말 걸고, 물어보고, 뭐 그런 거요. 그랬는데 형이 귀찮아하지도 않고 늘 대답해주고, 저한테도 마음을 열어 줘서 그건 너무 고마웠어요.”

 

 

 

행복하고 즐거웠던 과거를 되짚어 늘어놓는 민규의 표정이 옅은 미소를 머금어 밝았다가, 금세 어두워지며 입을 꾹 닫았다. 굳게 다물린 입은 한참동안 열리지 않았다. 형사는 만년필 뚜껑을 수첩 위에 간헐적으로 두드릴 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고, 민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 안에서 모래처럼 까끌하게 굴러다니는 말들을 겨우 되삼켰다. 그의 입 꼬리가 당겨져 자조처럼 작게 웃음이 흘러나온 뒤에야, 집어삼킨 말들이 한숨처럼 뱉어졌다.

 

 

 

그치만……, 제가 형한테 해서는 안 될 짓을 많이 했죠. , 말씀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시작하세요.”

형이, 고등학교 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어요. 제가 그걸 알고 있었거든요, 알면서도, 형을 좋아해 버린 거죠. 그러니까, 형 동생 사이를 넘어서, 더 깊은…… 마음이 들었어요.”

피해자를, 사랑했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렇게 표현을 했었고, 형은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했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그냥 순수하게, 형을 더 많이 알고 싶었어요. 더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사람이…… 착하고, 너무 예쁘잖아요. 그랬는데, 형이 안 받아줄 줄 알았으면서도, 한 번 거절당하고 나니까 그때부터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독해졌다고 해야 하나, 마음이 좀 변질된 거죠.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가져야겠다, 그런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곁에서 감싸주는 척 하면서 둘만 있을 때 형을 많이 힘들게 했어요. 옛날 일도 건드려 보고, 막무가내로 고백도 해 보고, 교실도 들어 엎어 보고, 형한테 손도 대 보고…….”

지금 그 진술은 민규 학생 본인이 피해자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는 소립니까?”

, 딱 한 번. 촬영을 가장해서 형을 좀 과하게 때린 적이 있었어요. 생각보다 얼굴에 상처가 많이 남지는 않아서다른 형들이나 친구들도 다 쉬쉬하고 지나갔어요.”

알겠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확인이 힘들 것 같겠군요.”

 

 

 

형사는 입 꼬리를 당겨 쓰게 웃고, 만년필을 들어 수첩 위에 폭행 사실 시인, 증거 X’라고 써 넣었다. 오늘 새벽에 정한의 화장이 진행되었으니 상처를 찾으려면 한참 전에 찾았어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민규는 또 한 번 입술을 깨문다. 기어이 갈라진 입술이 터져 잇새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교복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자꾸만 진동했으나, 그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대본 작업 막바지였을 때니까, 아마 그래서 영화 내용이 형 상황이랑 많이 비슷했던 것 같아요. 형 딴에는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겠죠. 하지만 형이 먼저 마음을 닫아 버렸어요. 저를 배우로 컨택한 것도 형이었으니까, 일단은 둘이 해결할 일로 본 거겠죠. 형이 항상 하는 말이 있었어요. 네가 그만두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죽일 거야, 라고요.”

자살에 대한 암시인가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저는 형이 그렇게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형은 모든 걸 계획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그래서 영화를, 이런 식으로 흘러가게 만들어 뒀겠죠. 이 영화가 형의 유서 같은 역할을 하도록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김민규 학생, 혹시 김재연이라는 분에 대해서 아는 게 있습니까? 2년 전에 이 학교 다니다가 정학 처분이 내려진 걸로 아는데요.”

……저희 형이에요. 2년 전, 정한이 형 사건의 주동자였던.”

당시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형이 사라지고 나서 알게 됐어요. 저는 그때 중학교 3학년이었으니까. 정한이 형도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걸 아주 멀리서만 봤죠. 그때는 우리 형이 많이 원망스러웠어요. 한 번도 얘기 나눠본 적 없었지만 정한이 형한테 그냥 미안하기만 했고. 형은 잠수를 탔다가 자살한 상태로 발견됐어요. 시간이 지나서야 죄책감이 컸겠죠.”

 

 

 

저는 어쩌면지금 형이랑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는지도 몰라요.

체념한 듯 담담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진술을 이어간 민규는 마지막 말을 뱉고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것은 명백한 고소(苦笑), 또는 자조. 형사는 수첩 가득 민규의 진술 내용을 요약해 적었고, 다시금 적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만년필이 종이에 닿는 소리만 사각사각 울렸다. 민규는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형사를 바라보다가, 그가 만년필 뚜껑을 닫고 서류를 챙길 무렵 수갑이 채워져 있었던 왼손을 내밀었다. 형사님, 하는 소리에 형사가 고개를 돌렸고, 민규의 얼굴에 묻어난 웃음은 어쩐지 아프게 느껴졌다.

 

 

 

왜 부릅니까, 김민규 학생.”

지금 잡아넣으세요. 지금 아니면, ……안 될 거예요, 아마.”

 

 

 

형사는 헛웃음을 짓고, 그대로 등을 돌려 출입구 앞에 섰다. 연락하기 전까지 자택에서 기다리세요, 당신 아직 용의자 아닙니다. 딱 잘라 내뱉은 형사는 곧 고개를 슬쩍 돌려 민규를 곁눈질하다가,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김민규는, 한참동안 같은 표정을 하고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계속해서 잘게 떨리고 있었다.

 

 

 

 

 

 

 

**

 

 

 

 

 

 

 

되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내가 서 있는 곳은 경찰서 근처, 한강을 가로지르는 어느 다리 위였다.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는 탓으로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 위에 걸친 패딩이 무색하도록 교복 셔츠 안까지 뚫고 들어왔다. 내가 집에서 죽은 듯이 숨어 있던 삼 일 동안은 줄창 눈이 내렸었다고 했다. 지금은, 날이 맑다. 푸르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이 부셔 관뒀다.

 

저 위에, 형이 있겠지.

다시는 떠올려서는 안 되는, 형의 이름을 가만히 그리고 있으니까 우연처럼 4일 전형이 자살하기 하루 전날 나눴던 대화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민규야.

 

형은 그 날도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내 이름을 나지막히 불렀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형을 마주했다. 늘상 눈물이 맺힌 채 상처받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던 형은, 그 날 짙은 밤색의 눈동자 안에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조금 웃는 것도 같이. 항상 똑같이 네, , 하고 대답한 나에게 형은 별안간 그런 말을 했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사랑을 하지 못할 거야.

왜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 생각이 날 테고, 내 생각이 나면 넌 아파질 테니까.

왜 그렇게 단정 지어요, 내가 영원히 형만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형의 음성을 따라가듯, 내 목소리도 그날따라 낮게 내려앉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형은 가만히 듣고 있기에 너무도 마음 아픈 말만을 이어가서, 나는 차마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고 형의 앞에 가 섰다. 내려다보는 형의 얼굴은 어제와 같이 예뻤다. 그런데 오늘은머리를 묶고 있어서, 더 예뻤다.

 

 

 

민규야, 네가 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거짓말 마요.

형은 있잖아, 네가 좀 더 기다리면, 나를 기다려 주면……, 노력해 볼 생각도 있었어.

……거짓말.

근데 네가 날 기다려주지 못했잖아. 그래서 너한테 그만두라고 하는 거야.

…….

형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힘들어.

 

 

 

아팠다, 마음 한켠이 묵직하게 아렸다. 누가 본대도 아프게 웃는 얼굴로 날 올려다보면서 그런 말을 하는 형이 낯설 정도로 슬퍼 보여서,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등 뒤로 손을 숨겨 세게 주먹을 쥐어 보았다. 손바닥 위로 깎지 않은 손톱이 깊게 파고 들어가는 감촉이 선연했다. 그래서 제가 옆에 있어 주잖아요. 늘 하던 맥락의 말을 뱉는 게, 그 순간만은 모래를 삼키는 것처럼 힘겨웠다. 이런 낯선 감정을 느끼는 와중에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본 형은 너무나도 예뻤다. 그래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형은 머리 묶는 게 더 예뻐요하고 말해주기 위해서.

하지만 형은 또 한 번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나는 왠지 그 이름을 듣는 순간이 더 이상 없을 것 같아서 조급해졌다. 형에게 제일 해 주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한참을 찾다가 툭 던지듯 뱉은 것은 형의 이름. 사실은, 형의 이름만큼 간절하게 담고 싶은 것이 없었다. , 정한이 형, 하고 대답하며 형의 눈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형의 시선이 나를 향해 또렷한 화살표를 그리고 있었다.

 

 

 

네 형 이름이잖아, 네 배역.

…….

넌 형과 다르길 바랐는데, 내가 마지막에 바꿨어.

정한이 형,

네가……, 형을 너무나도 똑같이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형은, 아마 그 말을 남기고 음악실을 빠져나갔었지.

파란 하늘 위로 정갈하게 머리를 묶은 형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다가 곧 완전히 사라졌다. 나를 끝없는 회상에서 끌어올려 준 것은 주머니에 든 작은 기계장치.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진동에 무감각해 질만 하건만 오히려 더 생경하게, 형을 더 이상 추억하면 안 된다는 듯이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교각 난간에 두 팔을 걸친 채,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 세 통, 읽지 않은 메시지는 열 개가 넘게 쌓여 있었다.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서 문자메시지 보관함으로 들어갔다. 순영, 승철이 형, 승관의 문자가 차례로 쌓여 있었다. 가장 이른 시간에 도착한 순영의 문자부터 눌러 본다. [김민규전화받아] 하고, 띄어쓰기가 전혀 되지 않은 문자에서 순영이 많이 화가 난 것이 선연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냥 답장을 생략하고 승철이 형의 문자를 눌렀다. [민규야 전화 좀 받아 봐] 로 시작해서 [형이랑 얘기 좀 하자] 로 끝나는 일련의 문자, 그 속에서 승철이 형은 참 여전하게도 다정한 투였다. 나는 승철이 형에게도 답장을 생략하고, 조금 전에 마지막 문자를 보낸 승관의 이름을 눌렀다. 문자를 카톡처럼 보내는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못하고, 승관은 저 혼자 대여섯 통을 보내 놓았다. 승관에게는 왠지 답장을 보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양 손 엄지를 액정 위에 댔다.

 

 

 

[김민규 어디야?? 전화좀받아!!]

[민규야]

[너 살아는있지?]

[문자 답장이라도해라]

[너 이 문자 보면 나한테나 승철이형한테 바로전화해 알겠어?]

[야 김민규 너 진짜 죽었냐?? 답장 좀 하라고!! ㅠㅠㅠㅠㅠ]

 

 

 

누가 봐도 부승관이겠구나, 싶은 말투에 희미하게 웃음이 샜다. 뭐라고 문자를 보내야 승관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를 잠깐 동안 고민하다가, 나는 곧 그것을 때려치우고 내 맘대로 자판을 눌렀다. 몇 번을 썼다 지운 끝에 남은 글자는 단 두 자, 미안. 하지만 나는 그 짧은 단어가 내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생각해, 망설임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문자가 전송되었다는 알림이 뜨자, 나는 휴대폰을 손에 꾹 쥐었다가 반항하듯이 손을 폈다. 내 악력에 의지했던 기계장치가 보도블록 위로 곤두박질친다. 용케도 배터리가 분리되지 않은 채, 그것은 여전히 승관과의 문자 대화창을 띄워 놓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가, 바닥에 초라하게 떨어진 휴대폰을 돌아다보았다. 고요하던 그것은 곧 시끄럽게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미안.”

 

 

 

나지막하게, 뱉어 봤다. 승관이 내 심정을 이해해 줬으면 했다. 푸른 하늘이 쏟아질 것처럼 파래서, 나는 왠지 더 서러워 졌다. 목적지를 상실한 채 옮기는 걸음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지기를 반복했다.

 

 

 

미안, 했어요.

입 속에서 모래처럼 돌아다니는 말은 결국 끊임없이 목 뒤로 삼켜지고, 삼켜지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에는,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없어졌으므로.

내가…… 없앴으므로.

 

 

 

 

 

 

 

 

 

 

#8. 2학년 8반 이지훈

 

 

 

 

 

사건이 종결되었다.

민규는 2심까지 올라갔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고 했다. 직접 연락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복도를 걷다 마주친 민규의 담임이 내게 말해 준 것이다. 원래 정학이었던 그의 징계 수위는 며칠 전에 퇴학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전원우가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곧 사직서를 낼 것이라고, 마치 비밀 애기를 하듯이 우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착잡한 표정을 한 승철만이 동아리 실을 나가는 그에게 조심히 가세요, 하고 대꾸해 줬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정한의 발인 이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전원우가 떠난 후 남은 동아리 부원들은 방학에도 아랑곳 않고 꾸준히 동아리 실에 모였다. 주로 동아리의 존속 여부에 대한 얘기를 매일매일, 아주 오랫동안 나누었다. 늘 결론은 나지 않았고, 끝에는 행복했던 날들을 추억하다가 되레 슬퍼져서, 서로 말을 줄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했다. 결국 동아리를 폐쇄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귀결된 것은 나와 순영, 승철이 참석한 바로 오늘. 순영은 아쉬움이 큰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든 동아리를 잘 꾸려 보고자 했던 마음을 아는 나로서는 별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하지만 핵심 인물들이 듬성듬성 빠진 데다 제대로 낙인이 찍혀 버린 동아리가 앞으로 잘 굴러가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날 내 옆에서 입속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던 순영은 다만 승철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이 곧 입을 다물었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고서 고개를 숙인 채 먼저 동아리 실을 빠져나갔다. 승철은 책상 위에 걸터앉아 순영이 나간 출입구를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패딩 주머니를 뒤적여 자그마한 열쇠 하나를 꺼낸 그는, 내게로 그것을 내밀었다. 3개월 간 그 혼자만이 사용해 왔던 편집실 열쇠였다. 지훈아, 반쯤 잠긴 그의 목소리에 문득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영상…… 네가 알아서 처리해. 형 먼저 갈게.”

 

 

 

그는 내 손바닥 위로 열쇠를 떨어뜨리고, 입술을 콱 깨물며 동아리 실 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입술을 깨물어 본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서, 조심스레 열쇠를 꽂아 돌리고 편집실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왠지 이 안에, 정한의 영혼이라도 담겨 있는 것만 같아 절로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편집실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은 취조실과 같이 쪽창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이고, 전체적으로 어두우며, 스위치를 누르면 낡은 형광등이 건진지가 다 된 손전등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빛을 뿌렸다. 멍하니 출입구에 서서 스위치를 달칵달칵 움직여보다가, 기계처럼 걸음을 더 옮겨 컴퓨터를 켰다. 승철이 미리 넣어 둔 것으로 보이는 카메라 메모리 카드가 본체에 꽂혀 있고, 컴퓨터는 부팅되기가 무섭게 그것을 읽어 왔다. 폴더 안에 저장된 영상은 대략 사오십 개 정도인 것 같았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마우스를 움직여 폴더 내부에 줄지은 영상들 위로 푸르게 블록을 씌웠다. 모든 영상이 선택된 상태가 되자, 이내 키보드 위로 손을 내려놓는다. Shift 키와 Delete 키 위로 손가락이 느리게 얹어지고, 나는 힘 줘 그것을 눌렀다.

 

 

 

[이 파일을 완전히 삭제하시겠습니까?]

 

 

 

마치 나를 위협하듯이, 낭떠러지로 내몰 듯이 다시금 물어오는 경고 창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이며 Enter 키를 눌렀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영상들은 흔적 없이 날아가 버렸다.

 

 

 

……이제 안녕.”

 

 

 

텅 빈 편집실에서, 한참동안 닫고 있던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어 본다. 건조한 목소리가 마르게 편집실 안으로 퍼져 잔향을 남겼다. 나는 컴퓨터를 종료시키고, 마이 주머니 안에 불편하게 접혀 있던 종이쪽지를 꺼내어 느리게 펼쳤다. 사건이 종결된 직후에, 정한의 납골당을 다녀 간 젊은 형사가 유리 문 틈에 꽂아놓고 간 것이었다. 공책을 찢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 위에는 낯익은 필체가 얹혀 있어서, 나는 황급히 그것을 뒤집어 키보드 옆에 내려놓았다. 기계 특유의 소음을 내며 돌아가던 컴퓨터가 완전히 꺼지자 내부는 금세 어두워졌다. 형광등이 곧 나갈 것처럼 머리 위에서 깜빡거린다. 나는 손에 쥐고 있어서 뜨끈뜨끈해진 열쇠를 편지 위에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쪽에서 문을 잠근 뒤에 그것을 닫고 동아리 실로 다시 되돌아왔다.

다시는, 그 누구도 편집실로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문 앞에 서서 길게 한숨을 뱉는데, 내 뒤통수로 익숙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언제 왔었는지도 모르게,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두드리던 승관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나.”

?”

학년 부장이 너랑 나랑 조퇴하래.”

 

 

 

오늘, 49재잖아. 정한이 형. 너도 같이 갈 거지?

휴대폰 화면 위로 시선을 꽂은 채 띄엄띄엄 끊어 내뱉는 승관이, 어떤 심정인지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자신이 책임져야 할 때면, 마치 어린 애처럼 후나, 하고 나를 부르고는 했다. 나는 굳이 티를 내지 않고, 다만 승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먼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승관이 같이 가하고, 인위적으로 톤을 끌어올리며 내게 걸음을 맞추었다. 동아리 실 열쇠는 내 패딩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손에 쥔 채 등 뒤로 손을 뻗어, 손바닥이 보이도록 한 번 펼쳤다가 다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짤랑, 하는 소리가 우리 둘 뿐인 복도에 가볍게 울렸으나나와 승관 중 어느 한 사람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서 사람이 죽었다.

우리 학교에서, 사람들이 죽었다.

 

 

 

 

 

 

 

 

fin. 


안녕, 윤정한이야.

수신인이 부정확한 편지를 쓰는 건, 너희들이 나를 아프고 슬프게 기억할 것 같아서야. 누구든지 한 사람은 이 편지를 읽게 되겠지. 그럼 이건 그 사람을 향해 쓴 게 될 테니까, 그냥 그런 걸로 해 둬. 난 이 편지가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걸 원하지 않거든.

 

내가 쓰고 내가 연기한 세 번째 영화, <가자, 나락으로>는 어쩌면 내 얘기일 수도 있고, 내 얘기가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통해서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담은 건 맞아. 2년 전의 일에 대한 흉터 위로, 전혀 관련이 없는 줄 알았던 민규가 남긴 상처를, 더 가만히 놔둘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이게 너희들에게 도움을 청한 수단이 됐을지도 몰라. 미리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해.

사실 나는 너희 모두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어. 너희들이 좀 더 내 대본에 대해서, 내 이야기에 대해서 궁금해 했으면 했는데, 아마 다들 놀랐던 걸 거야. 연기를 한다고 한 것도 나름대로 상징이었고 암시였는데, 잘 전달되지 못한 점은 지금도 아쉬워. 마지막으로 내가 지훈이에게 전화를 걸었던 건, 지훈이와 주고받은 문자가 내 최근 통화기록 맨 위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야. 이 편지를 쓰기 직전 내가 느꼈던 극단의 공포 속에서 전화를 걸 사람을 고른다는 것 자체가 생각도 나지 않았었어. 결국 지훈이는 전화를 받지 않더라고. 오래 전 내 전화를 받지 않던 지수가 떠올랐어. 나는 다만, 그 둘이 큰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해. 이것도 어쩌면 내 운명일지도 몰라.

나는, 있잖아,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민규와 원우 쌤의 처벌을 원하는 건 아냐. 만약 원했다면 죽지 않고 필사적으로 버텼을 거야. 아마 그들이 처벌을 원한다 해도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될 거야. 나는 그저, 두 사람이 죄책감을 갖고 살기를 바라. 이 편지의 발신인이 될 너희들은 행복했으면 좋겠어. 민규가 이 편지를 볼 일이 없기 때문이 덧붙이자면, 나는 민규를 좋아했기 때문에 민규가 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너무 괴롭지는 않게. 나는 민규가 날 따라오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누가 됐든 민규를 꼭 잡아줬으면 해.

 

다들 고마웠어. 너희들이 남은 세상에는 세찬 겨울이 지나고 곧 새 봄이 올 거야. 내가 걷게 될 길에도 봄이 오겠지. 여기는 항상 봄이었으면 좋겠어. 혼자서 이겨내기 힘들 때는 꼭 서로에게 의지하길 바라. 나는, 여기서 행복하게 지낼게. 행복했던 우리를 잊지 말아줬으면 해.

안녕, 나의 나락은 낙원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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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노리플라이, 타루 - 조금씩, 천천히,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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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두근두근

[쿱정전력 별이 아름답네요]

 

 

 

 

 

w. (@HYEMM_SVT)

 

 

 

 

 

 

 

 

 

 

네에, 승철 씨. , , 이제 잘 거예요. 공부요? 맨날 하던 건데요, 그럼 잘 돼 가죠. 으응, 너무 걱정 마요. , 아 진짜, 제가 어린 애도 아니고. 안 잡아 가요, 걱정 마. , , 지금은 어디예요?

 

 

 

, 저 지금은 영국이에요. 이틀 뒤에 스페인으로 가려고요.

 

 

 

서울 변두리 달동네, 끝없이 늘어선 계단을 숨이 차도록 밟고 밟던 정한이 마지막 계단을 오름과 동시에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귀에 딱 붙인 휴대폰 아래 마이크를 막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것은 자꾸만 저를 걱정하려 드는 승철을 위한 일종의 연기인 셈이다. 조금 전에 도착해서 점심 먹을 시간을 놓쳐 버렸다는 승철의 은근한 투정에 몰래 미소 지으며, 정한은 손목시계를 곁눈질하고서 머리를 굴렸다. 아마 영국은 한 시 반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은 지금 열한 시 반. 정한의 머리 위로 달빛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밥 거르면 안 돼요. 승철 씨 영국 가면 피시앤칩스 먹어 본다고 했었지 않아요?”

, , 맞네, 그랬었죠? , 역시 사람은 정한 씨처럼 똑똑하고 봐야 돼. 제가 그럼 점심으로 먹어보고 어땠는지 꼭 말해 줄게요.

네에, 승철 씨 후기 기다리고 있어야겠다.”

, 뭐야. 아깐 곧 잔다면서요. 전화 끊고 바로 안 자면 내가 혼낼 거예요, 알았죠?

 

 

 

……알게써요오오. 승철이 단호하게 반문한 탓에 입술을 삐죽 내민 정한이 누가 들어도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다른 무엇보다 전화를 끊어야 할 타이밍이 다가오는 탓에 맘이 쓰린 까닭이다. 입술을 달싹이던 정한은 고개를 들어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보름이 다가오는 모양인지 통통하게 차오른 달이 낡은 가로등보다도 더 밝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겠다는 승철을 붙잡은 정한의 입 밖으로 오늘도 실없는 문장이 흘러나왔다.

 

 

 

, , 승철 씨.”

, 왜요?

, 여기 있잖아요, 오늘 달이 되게 예뻐요.”

, 진짜요? 그럼 사진 찍어서 보여 줘요. 이번에는 꼭 보내 줘야 돼요, 알았죠? 그럼 나 진짜 밥 먹으러 갈게, 이따 봐요!

 

 

 

늘 그랬듯이 사진을 찍을 것을 당부하며 마지막 인사를 남긴 승철에게 정한은 휴대폰 액정 위로 손바닥을 펴 휘휘 흔들었다. 아마 식당을 수소문하기 위해 발걸음을 막 옮길 승철 또한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휴대폰 위에다 손을 흔들 것이었다. 그래, 그 웃음에는 파란 하늘이 담겨 있고, 눈이 부신 달빛이 묻어 있고, 승철이 좋아해 마지않는 별빛이 물결치고 있겠지. 멀리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달을 올려다보던 정한이 금세 뻐근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천천히 발을 떼었다.

 

 

 

오늘도 실패했어, 오늘도. 윤정한 멍청이 아냐?”

 

 

 

장난스레 자책하는 말끝에 울음이 섞여들 것 같아서, 정한은 어깨 위에 무겁게 걸린 가방 끈을 꾹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작게 흐르는 한숨이 공기 중으로 빠르게 섞여 들었다. 달동네 꼭대기, 조그마한 옥탑방으로 향하는 정한의 걸음 뒤로 달빛이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가난한 내가 반짝반짝한 승철 씨를 사랑해서, 수백 번은 읽고 또 읽었던 시구를 농담처럼 중얼거린 그가 이내 자조하듯이 웃음을 흘리고 그 자리에 다시금 멈춰 선다. 휴대폰을 꺼내 들어 카메라 어플을 켜고, 한 뼘이 조금 안 되는 자그마한 프레임 안으로 달을 밀어 넣어 본다. 카메라 사양이 좋지 않아 달빛이 이리저리 산란되는 게 썩 보기 좋은 건 아니었지만, 중얼중얼 혼잣말을 뱉으면서도 승철에게 사진을 전송하는 정한의 입 꼬리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살짝 말려든 것도 같았다. 액정 위로 빠르게 움직인 손가락이 덧붙이는 문장 몇 개를 만들어냈지만, 정한은 다시 옥탑방 쪽으로 발을 떼며 그것을 모두 지웠다. 새로이 만들어진 말들은 늘상 반복되던 것들의 반복. 입술을 감쳐문 그가 열쇠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마당에 버려진 낡은 평상 위에 올려 두고서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둠 가운데 밝게 빛나는 채팅방에는 정한이 보낸 두어 장의 달 사진과, 그 아래 [사진 이상하죠ㅠㅠ][그래도 달이 예뻐요][그렇죠?] 하는 말들이 덧붙여져 있었다. 평상 위로 무거운 전공 책이 든 가방을 뒤엎고 나서야 열쇠를 찾아낸 정한이 손등으로 잘게 땀방울이 맺힌 이마 위를 쓸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액정 위로 그가 보낸 말풍선 옆의 숫자 1이 노랗게 떠 있다가 지우개로 지운 듯이 사라졌다. 쏟아 부은 것을 하나하나 챙겨 넣으며, 그는 승철이 제 꾸준한 달 얘기의 진의(眞意)를 모르길 바랐다. 액정 위로 승철의 말풍선이 통통 튀어 올랐다.

 

 

 

[와 달 ㅠㅠ 진짜 예뻐요 서울 가고 싶다..]

[거기는 안 더워요? 여기는 비가 와서 그런지 해 지면 쌀쌀해질 것 같아요]

[너무 걱정은 마요 조심할게요 ㅋㅋㅋㅋㅋ]

[이건 어제 찍었던 별 사진이에요 벨기에에서 ㅋㅋㅋ 벨기에 와플 짱 맛있었어요!]

[별도 예쁘죠?]

 

 

 

열쇠를 왼손에 꾹 쥔 채 가방을 한 쪽 어깨로만 둘러메고서 굽혔던 허리를 일으킨 정한이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액정을 내려다보며 작게 키득였다. 승철은 언제든지 말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말투로 문장을 구성해 왔었다. 그가 보낸 사진 위로 까만 하늘에 점찍은 듯 반짝이는 별들을 엄지로 괜히 문질러 본 정한이 조금 느려진 속도로 자판 위를 톡톡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별이 아름답네요, 하는 문장이 말풍선에 담겨 액정 위로 퐁 튀어 올랐다. 홀드 키를 눌러 화면이 까맣게 죽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은 정한이 그제야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츠메 소세키에 관한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달이 예쁘네요, 당신을 사랑해요.’ 라는 뜻으로, 그리고 별이 예쁘네요, 당신은 내 마음을 모르겠죠.’ 라는 뜻으로 번역했다는, 듣기만 해도 마음이 간질간질 떨리는 그런 이야기.

지난달에 만나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승철과 연락을 주고받는 동안 꾸준히 그런 말들을 남기고 있는 정한은, 오늘도 어제처럼 혼자 보내야 할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언제쯤 고백을 하겠냐고 늘 저를 자책하면서도, 지난달에 만났을 때부터 쭉 사랑에 빠져 버린 제 맘을 승철에게 들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을 안고서.

 

 

 

 

 

 

 

**

 

 

 

 

 

 

 

그러니까, 정한이 승철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5월 독일에서였다.

 

 

티오Table of Organization, 편성표라는 뜻이지만 주로 구직자들이 사람을 뽑다.’ 라는 뜻으로 씁니다가 늘 부족해서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3년 연속으로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나니 공부가 한순간에 딱 질려버린 탓이었다. 미친 척 하고 그날 부로 짐을 꾸렸다. 원래대로라면 시험에 합격한 이후 떠나려고 했던 독일 여행에 대해 정한의 부모님은 별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뒀다. 아마 제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로 들어가며 재밌게 놀고 올게, 했던 그의 눈가가 젖어있던 걸 아셨던 것일 테다. 생각보다 맛이 없었던 기내식을 푹푹 퍼 먹으면서 조금 울었던 것도 같았다. 대학교에서 수석 소리 듣던 건 전부 부질없다는 걸 독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겨우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울음을 삼킨 탓에 목이 잔뜩 멘 채 정한은 잠에 들었었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누가 잡아가도 모를 만큼 숙면을 취하고 있어서 승무원이 그를 깨워 줬었다. 어딘가 결연한 듯이 여행 가이드북을 손에 꾹 쥐고 게이트를 빠져나온 그의 첫 번째 행선지는 뒤셀도르프였다. 처음 여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베를린이나 뮌헨보다도 이곳이 먼저 눈에 들어온 까닭이라면 몇 가지를 들 수 있었다. 현지에 사는 한국인이 많아 여행하기가 편할뿐더러 국제 상업 도시인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한의 마음을 잡아 끈 것은 뒤셀도르프 소재의 톤 할레(Tonhalle)’였다. 클래식 연주회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콘서트가 열리는 이곳에 대해 음악적으로 끌린 것은 아니었고, 재건되기 전의 톤 할레에 세계 최대 규모의 천문대가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었다. 단지 그런 이유로 독일 여행을 계획한 것에 대해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측근들이 실없지 않냐는 말들을 똑같이 뱉고는 했지만, 다음 생에는 꼭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유년기의 다짐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는 정한으로서는 이곳이 최적이었다.

 

그래서거의 즉흥적으로, 아주 패기롭게 가이드북 하나만 든 채 뒤셀도르프 시내에 들어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 뭐야. 여기 아까 봤던 것 같은데.”

 

 

 

보기 좋게 길을 잃어버린 꼴이 되어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주위에서 다들 걱정할 때 큰소리를 뻥뻥 쳐댔던 정한은 과거의 자신을 자책하며 세 번째로 같은 골목에서 빠져나오고 나서 도로가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가이드북에서는 분명히 이 쪽 골목으로 들어가라고 했는데…….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퍽 아기자기한 그림체로 그려진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죽죽 그어 대던 정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여행 중인 한국인이라든가 현지에 사는 한국인이 지나갈까 싶어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따라 붙여 보았지만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이 몇 명 지나가지도 않았고, 그마저도 모두 출근하는 것처럼 정갈하게 옷을 차려 입은 누가 봐도 서양인들이었다. 자꾸만 터져 나오는 한숨을 애써 막지 않고 한참을 도로가에 앉아 있던 정한은 다리가 저려 올 때쯤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요금제 변경하고 올 걸……. 잔뜩 울상을 지은 채 가이드북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시야에, 문득 좀 전에도 이 길을 지나면서 스쳤던 것 같은 남자가 들어왔다. 유난히 검은 색 머리카락에 유난히 흰 피부, 딱 떨어지는 흰 셔츠에 차콜 색 슬랙스를 걸친 그는 셔츠 소매를 두 번 정도 걷어 접고서 목에 건 카메라를 들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피사체를 찾는 것 같았다. 사진작가인가. 작게 중얼거린 정한은 잘생겼네, 하는 뒷말이 나오려는 것을 급하게 입술을 깨물어 삼키고서 제 등 뒤를 두리번거렸다. 하필 이 타이밍의 도로가에는 저 남자와 그 둘 뿐이었다. 정한은 가이드북을 쥔 채 큰 결심이라도 한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봤자 그의 등 뒤에서 소심하게 손가락을 뻗어 어깨를 두드리고서 황급히 손을 숨겨 버렸지만.

 

 

 

……, 저기, , 익스큐즈 미.”

“Yeah, what’s the matter with you, sir?” (, 무슨 일이세요?)

, 그러니까, 캔 유……, 아 뭐였지?”

 

 

, 혹시 한국인이시면 편하게 하세요. 저도 한국인이거든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이름 대면 대개 감탄하는 대학교의 국어교육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한은 영어 수업도 곧잘 따라가는 명석한 학생이었으나, 안타깝게도 3년 간 내뱉지 않았던 기초회화가 급격히 퇴화된 탓에 영어 단어가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뒤섞였다. 목소리를 잔뜩 집어삼킨 채 한국말로 사족을 덧붙이며 누가 들어도 한국 사람이다 싶은 느낌으로 영어를 내뱉은 그에게, 눈앞의 남자는 입 꼬리를 당겨 웃음을 터뜨리며 별안간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정한의 눈동자가 흔들리다 못해 지진이 난 것처럼 요동치는 것을 마주하고 있던 남자는 이내 호탕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혹시 저 외국인인 줄 아셨어요? 그런 눈친데, 딱 보니까.”

, , 네에……. , 뭐랄까, 되게 외국인같이 생기셔서…….”

그런 소리 많이 들어 봤어요. 그치만 전 혼혈도 아니고 진짜 토종 한국인이에요. 고향은 대구고. 이제 편하게 물어 보세요, 제가 아는 한에서는 가르쳐 줄게요.”

 

 

 

조금 어색한 듯하면서도 유한 투로 대꾸하는 남자의 말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정한이 손에 쥐고 있던 가이드북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그 짧은 사이에 손바닥 위로 땀이 배어나와 허리춤에 손을 문질러 닦은 정한이 펼쳐진 가이드북 위로 지도에 그려진 궁전 모양의 건물을 손으로 짚었다. 저 여기 가려구요, 톤 할레. 근데 길을…… 자꾸 잃어버려서요. 금세 또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어뜨리는 정한에게, 남자는 양 볼의 보조개가 깊게 패도록 해사하게 웃어 보이고 가이드북을 덮어 제 옆구리에 꼈다. 멀거니 저를 바라다보는 정한과 시선을 맞추며, 남자는 마치 어느 영화에서나 나올 장면처럼 그렇게 내뱉었다.

 

 

 

따라 와요, 톤 할레라면 저도 자주 가는 곳이거든요. 이렇게 된 김에 오늘 하루 제가 가이드 해 주면 되겠다, 그죠?”

? ,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릴게요.”

 

 

양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꾸벅 숙인 정한에게 또 한 번 호탕하게 웃어 준 남자는, 가이드북을 아예 제 카메라 가방 안으로 밀어 넣고서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정한은 일단 이름도 모르는 마당에 고향이 대구인 것만 아는 이 남자를 따라가게 된 것이었다. 남자가 이끄는 길은 가이드북에 그려진 약도와는 정반대였는데, 얼마 안 가 정한이 그렇게나 찾던 톤 할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하고 웅장한 크기면서도 지붕처럼 얹어진 돔이 유려한 곡선을 그려내는 건물의 외양에 정한의 입이 천천히 벌어져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남자는 입구 앞에 서서 한참동안 위를 올려다보며 감탄해 마지않는 정한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다가, 이내 손가락을 들어 그가 제게 처음 말을 걸었던 것처럼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 저기, 안 들어갈 거예요? 웃음기 섞인 물음에 정한은 고개를 내저었으나,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야 끄트머리로 남자가 자꾸만 웃음을 짓는 게 왠지 묘한 기분이 들어서, 정한은 이리저리로 시선을 굴렸다.

 

 

 

아니, 근데 여기 진짜 멋져요…….”

안에는 더 멋질 텐데요?”

역시 그렇겠죠? 근데 정말, 정말로…… 벅찬 느낌이에요. 저 여기 꼭 와 보고 싶었거든요.”

, 진짜요? 보통은 베를린이나 뮌헨에 들렀다가 뒤셀도르프로 오던데, 오늘이 첫째 날이에요?”

, . 저 그, 뒤셀도르프 공항으로 바로 왔거든요. 여기가 예전에는 천문대였다고 해서 죽기 전에 꼭 와 보고 싶었어요. 제가 좀 그런 거에 대한 동경이 있거든요.”

아아, 그러시구나. , 근데 저희 일단 통성명부터 할래요? 일단 오늘 하루는 같이 다닐 텐데 저기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그죠?”

 

 

 

뭐에 홀린 듯 제 얘기를 쏟아 붓기 시작하는 정한의 눈이 빛나는 것을 그 모르게 응시하며, 남자는 먼저 한 발을 뻗어 계단 위를 밟았다. 어느새 시야 정면으로 들어온 남자의 물음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정한은 등 뒤로 둘러 멘 백팩 끈을 꾹 쥐고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스물여섯 윤정한이에요, 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마저도 남자가 직업이 뭐냐는 식으로 끊임없이 캐묻는 탓에 3년 연속 임용고시에 낙방했다는 것까지 다 말해 버렸지만.남자의 이름은 최승철이라고 했다. 우연찮게도 나이는 정한과 같고, 여행 작가라는 말을 덧붙였다. 보기와 다르게 퍽 낮은 그의 목소리가 두 사람이 막 몸을 밀어 넣은 공연장 내부의 텅 빈 공간으로 울려 퍼졌다. 정한은 남자의 이름승철, 을 입속에서 몇 번 굴려 보다가, 승철 씨, 하고 내뱉어 보았다. 꽤 기분 좋은 울림이 혀끝에서 맴돌다가 사라진다. 생긋 웃는 정한의 손목을 가볍게 끌어당기며, 승철 또한 그의 이름을 담았다.

 

 

 

정한 씨, 여기 안에 분위기 장난 아닌 카페 있는데, 아세요?”

, 검색하면서 본 것 같아요.”

잠깐 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가요, 우리. 제가 사실 여행 다니면서 별 사진을 찍은 게 몇 장 있는데, 그것도 보여 줄게요. 어때요?”

, 진짜요? 가요, 가요!”

 

 

 

별 사진이라는 단어에 다시금 잔뜩 들뜬 정한을 마주한 승철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마냥 차분한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걸음이 팔랑대는 정한에게 맞춰 주려 걸음을 빨리 하는 승철과, 그가 자연스레 잡아 쥔 손목이, 정한은 퍽 기분이 좋아서 그냥 웃어 버렸다.

왠지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아, 그의 웃음 속에는 파란 하늘이 물들어 있으니까. 무심코 떠오른 문장에 제가 놀라 고개를 내저은 정한은어쩌면 그 때부터 승철에게 반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승철은 정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프로페셔널한 여행 작가인 것 같았다. 특히 독일이 사진 찍기에 최적이라며 세 달째 살고 있다던 그는 거의 현지 가이드나 다름없었다. 이쯤 되면 팁이라도 줘야 되는 것 아니냐며 또 눈동자를 굴리던 정한에게 승철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오랜만에 여행하는 기분인데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고서 씩 웃는 승철을 마주하는 게 낯설도록 묘한 느낌이어서 정한은 괜히 잘 묶여 있던 머리를 풀어 다시 묶기를 또 몇 번 반복했다. 여행 첫째 날, 승철의 집 근처에 있다는 자그마한 식당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서 두 사람은 정한의 캐리어를 찾으러 공항 근처 전철역으로 향했다. 어찌 보면 혼자 가겠다는 정한에게 장난스레 길치를 들먹인 승철이 따라 붙은 셈이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지갑을 꺼내어 남아 있는 지폐를 세던 정한은 문득 승철에게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가성비 좋은 숙박시설 같은 거 있어요?

 

 

 

, 따로 호텔 예약 안 했어요?”

, 그런 편이 더 나은 것 같아서요. 계속 뒤셀도르프에 있을 것도 아니고, 베를린 쪽으로 갔다가 다시 여기로 와서 네덜란드로 갈 거거든요. 현지에서 직접 부딪쳐 보려고 했는데, , 사실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 혹시 정한 씨만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잠깐 있다 가실래요? 제가 쓰는 방 말고 다른 방 하나 비어 있거든요. 그래도, 혼자 다니면 좀 무섭고, 그러잖아요.”

 

 

 

일단 말을 던져 놓고서 생각보다 장황하게 이유를 끌어와 덧붙이는 승철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그를 바라보던 정한이 곧 표정을 풀고 입술 새로 웃음을 흘렸다. 승철 씨만 괜찮으면 그렇게 할게요. 진짜, 고마워서 어쩌지. 내일 아침에 제가 더 일찍 일어나서 밥 할까요? 장난스레 덧붙인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쉰 것도 같은 승철이 따라 키득 웃었다. 정한 씨 요리 잘 해요? , 아니요? 뭐예요, 그게. 그럼 승철 씨는 요리 잘 해요? , 아니요? , 진짜. 뭐예요. 시답잖은 대화 끝에 전철이 승철의 동네에 멈춰 서고, 그의 집으로 향하면서도 두 사람은 큰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웃는 일을 반복했다.

 

 

그런 영화 같은 만남이 자연스러워지고 익숙해질 무렵, 타지에서의 시간은 벌써 열흘이나 지나가 있었다. 승철은 4일간의 독일 여행 이후 네덜란드로 가겠다는 정한에게 또 한 번의 가이드를 자처했고, 네덜란드에서도 승철의 여행 작가다운 면모가 그가 찍어 놓은 별 만큼이나 빛나서 정한은 또 몇 번이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 일주일 여행을 계획하고 온 터라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공항 면세점에서 쇼핑을 해도 될 만큼 돈이 남아돌자 정한은 다시금 승철에게 엄지를 세웠다. 승철 씨 진짜 짱이었어요, 하는 말에 머쓱하게 웃는 승철의 등 뒤 창밖으로, 어제부터 내리던 봄비가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정한 씨 비행기 몇 시라고 했죠?”

, 저 두 시 비행기요. 직항이니까 한숨 자고 일어나면 한국일 거예요, 아마. 올 때도 그랬었거든요.”

잠이 되게 많으신가 봐요, 맞죠? 여행하는 동안은 어떻게 그렇게 일찍일찍 일어나셨대.”

, 그야 승철 씨 밥 챙겨 주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장난을 곧잘 쳐오던 승철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정한은 역시나 농담 섞인 투로 대꾸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손에 들린 여권과 그 사이에 끼워 둔 비행기 티켓을 내려다보는 것 같던 승철은 이내 시선을 끌어올리고 제 손을 뻗어 정수리 위로 붕 뜬 정한의 머리카락을 슥슥 빗어 내렸다.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 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 본 정한이 의자 옆에 뒀던 백팩을 당겨 멨다. 웃고 떠드는 사이에 벌써 한 시를 향해 분침이 달려가고 있는 탓이었다. 정한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승철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분신처럼 목에 걸린 카메라를 슬쩍 곁눈질하던 정한은 게이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승철에게 넌지시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의아해하는 승철에게, 정한은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는 못하고 띄엄띄엄 문장을 뱉었다.

 

 

 

아니, . 사진 있잖아요, 사진. 보내 준다면서요. 번호를 알아야 보내 주죠.”

, . 지금 정한 씨 내 번호 따 가는 거예요?”

아니 뭐, , , 아무튼요. 약속은 지켜야 되는 거예요, 알죠?”

알죠, 알죠. 입력했으니까 한국 도착해서 전화 한 통만 줘요. 안 자고 기다릴게요.”

에이, 피곤할 텐데 자야죠. 제가 문자 남길게요. , 이제 가 봐야겠다. 저 들어갈게요, 승철 씨. 여행하는 동안 진짜 재밌었고 고마웠어요!”

조심히 가요, 정한 씨. 나도 정한 씨 덕분에 진짜 재밌었어요. 한국 가서 열심히 공부해요, 내가 한국 들어가면 꼭 선생님 되어 있어야 해요. 알았죠?”

 

 

 

 

, 그러면 한 3년 쯤 뒤에 한국 들어오셔야 하는데?

왠지 아쉬움이 가득 남은 것 같은 승철의 표정을 풀어 보려 농담을 뱉은 정한에 결국 그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애매한 시간 탓에 조금 한산한 공항 게이트 앞에서 승철은 정한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여행하는 동안 늘 반쯤 접혀 있던 정한의 두 눈이 다시금 접혀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승철의 손을 맞잡아 흔들어 준 정한은 정말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승철 씨, 집에 조심히 들어가요. 꼭 연락할게요, 알았죠? 고개를 끄덕인 승철이 문득 등 뒤로 창밖을 돌아다보고 입을 열었다.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여행 마지막 날이고 많이 오는 것도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맞아요, 다행이야.

 

 

 

승철 씨, 저 진짜 들어갈게요. 집에 조심히 가세요!”

, 정한 씨도 조심히 들어가요. 안녕.”

 

 

 

머리 위로 손을 휘휘 흔들며 해맑게 웃어 보인 정한이 게이트를 통과하는 인파 속으로 섞여 모습을 감출 때까지, 승철은 그 자리에 서서 정한이 사라진 방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씁쓸해 보일 때쯤 등을 돌려 공항을 빠져나가는 승철의 손목에서, 엊그제까지 정한의 손목에 걸려 있었던 단색의 끈 팔찌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봄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아, 하루 종일 비를 뿌렸다.

 

 

 

 

 

 

 

**

 

 

 

 

 

 

 

잠에서 깬 정한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승철이 남긴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귀국한 후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일주일 쯤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잠이 덜 깨 오타 가득한 답장이 오지 않는 게 승철 쪽에서 오히려 더 어색하다고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별 사진 이후로 승철은 점심으로 챙겨 먹은 피시앤칩스와 트라팔가 광장의 사진이 차례로 도착해 있었다. 사진 아래에 달린 코멘트를 겨우 반쯤 뜬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정한은 옆으로 돌아누워 휴대폰을 쥐고 자판을 두드렸다.

 

 

 

[일어나보니까 2시네요ㅠㅠ 이게뭐야...]

[승철씨 진짜 제가 보고싶다한거 다 봤네요 그죠... 트라팔가 광장 진짜로 가보고 싶었는데 88]

[7시니까 아마 일어나셨겠죠? 저는 지금이라도 도서관 가려구요ㅠㅠ 공부 안 하면 안 되니까...]

[아침 꼭 챙겨 먹어요 알겠죠? 오늘도 좋은 하루 되기!]

 

 

 

예상치 못한 숙면으로 피로가 풀린 탓인지 잠이 확 깨 오타는 거의 없었다. 고심 끝에 노란 얼굴의 토끼와 초록색 공룡 비슷한 것이 종이 꽃가루를 뿌리고 있는 이모티콘을 골라 보낸 정한은 휴대폰을 뒤집어 베개 위에 두고 몸을 일으켰다. 아마 지금 씻고 나가면 적어도 세 시에 도착……. 난 대체 왜 알람을 끄고 다시 잔 거야! 어제의 다짐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개운한 몸이 괜히 원망스러워 침대 위를 쿵 내려치는데, 별안간 베개 위에 둔 휴대폰에서 짧고 경쾌한 알림음이 연달아 울렸다. 광고 문자겠거니, 하고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든 정한은 승철과의 채팅방 위로 왼쪽에 정렬된 말풍선 몇 개가 뜨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정한씨 잠꾸러기]

[저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났어요 벌써 아침도 먹었고]

[출발해야 되니까]

[근데 그 도서관 어디라고 했었죠?]

 

 

 

복숭아 모양의 이모티콘이 한껏 얄미운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는 이모티콘 아래로 달린 말풍선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정한은 별안간 던져진 물음에 조금 의아한 듯 했지만, 이내 손을 들어 답장을 써 내려갔다. 톡톡 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가볍게 울리고, 말풍선이 떠오르기 무섭게 숫자 1이 싹 사라졌다.

 

 

 

[? 저 그 정독도서관이라고]

[집에서 한 20분 거리? 종로구 쪽일 거예요 아마]

 

 

 

별 생각 없이 메신저와 연동된 검색 기능을 써 주소까지 찍어 준 정한은 다시금 제 말풍선 옆에 1이 생기자 홀드 버튼을 눌러 휴대폰 화면을 까맣게 죽였다. 그럼 그렇지, 우연의 일치였겠구나, 싶은 마음에 괜히 입맛이 씁쓸했다.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휴대폰이 몇 번의 알림음을 더 울려 댔지만 정한은 그것을 한 귀로 흘리고서 욕실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 이후로는 나갈 준비를 하느라 이렇다 할 겨를이 없었고, 승철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때는 마을버스에 몸을 실은 지 삼십 분이나 지났을 때였다.

 

 

 

[그냥 궁금했어요 집이랑 많이 먼가 싶어서ㅋㅋㅋㅋㅋ 힘들잖아요 먼 데 다니면]

[쉬엄쉬엄 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변함없이,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승철 특유의 말투에 정한은 괜히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래 봤자 한국 올 것도 아니면서, . 입으로는 툴툴대면서도 손으로는 하트 모양 이모티콘을 찾아 헤매는 게 우스워서 종국에는 자조에 가깝게 웃어버리고 만 정한이었다. 이번에는 말풍선 옆에 숫자 1이 사라지지 않고 붙어 있는 게 좀 야속해서, 정한은 그것을 엄지로 문질러 보다가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만큼 무거운 가방을 메고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침부터 내린 비 탓에 덥고 습했으며, 바지 뒷주머니에는 데이터 사용으로 뜨끈해진 휴대폰이 잠들어 있었다. , 승철 씨 어디냐고 안 물어 봤네. 금세 무거워진 다리를 겨우 움직여 꼭대기에 도착한 정한이 도서관 로비로 들어서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 지금쯤 스페인이겠지. 손을 들어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는 에어컨 바람이 쌩쌩 부는 정독실 안에 가방을 내려 두고 지하 매점으로 향했다. 더워 죽겠네, 7, 8월에는 어떡하려고 이래? 손부채질을 하며 바삐 걸음을 옮기는 정한의 휴대폰은 여전히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지하 매점에 들어선 자그마한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정독실로 올라온 정한은 버릇 탓에 다 접힌 빨대가 꽂힌 커피 컵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방에서 전공 책을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 이른 시간도 아니건만, 평일이라 그런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이 어제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안 그래도 적막한 공기가 아예 바닥으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두툼한 책 세 권을 모두 꺼내어 칸막이에 세워 두고, 정한은 서랍 위쪽을 더듬어 스위치 버튼을 눌렀다. 자그마한 형광등이 팟소리를 내며 책상 위를 밝게 비추었다.

그리고 그 위에, 정한이 가져오지 않은 무언가가 책상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조심스레 의자를 끌어당겨 엉덩이를 걸친 그가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회색이 많이 섞인 연보라색 상자는 크기에 비해 생각보다 묵직했고, 그 위에 나뭇잎 같은 그림이 문양처럼 프린팅 되어 있었다. 가운데에 적힌 영어를 눈으로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정한은 무심코 작게 탄성을 내뱉고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WHITTARD위타드라 하면, 승철이 지난주 쯤 영국에 간다고 했을 때 농담 삼아 사오라고 했던 영국산 차() 브랜드였던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상자를 이리저리 돌리던 그는, 상자 뒷면에서 낯익은 글씨를 발견하고 입술을 꾹 눌러 깨물었다. 급하게 쓴 티가 나는 것 같으면서도 남자치고 꽤 정갈한 글씨체에, ‘여기도 비가 그치질 않네요.’ 라고 읊조린 문구는,

 

 

승철의 것이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정한은 상자를 꾹 쥔 채 정독실을 빠져나갔다. 급하게 일어난 탓에 의자가 바닥과 마찰해 기분 나쁜 소리를 냈지만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로비로 빠져나와 출입문을 마주하고 서기까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은 멎을 것처럼 벅차게 차올랐다. 정신없이 굴리던 시선을 비가 내리는 출입구 쪽으로 고정한 그 때, 정한의 시야 안으로 노란색 우산을 쓴 남자가 들어왔다. 아니그는 마치 정한이 자신을 담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적막한 로비 안으로 정한의 발소리가 잔향을 울리고 흩어졌다. 유리 문 하나만을 둔 채 가까이 다가섰을 때, 우산을 든 남자의 손목에는 조금 빛이 바랜 끈 팔찌가 걸려 있었고,

 

 

우산 사이로 드러나는 남자의 얼굴은, 양 볼에 보조개가 깊게 파이도록 끌어당긴 입 꼬리는, 그 모든 것을 통칭하는승철의 웃음은, 파란 하늘과 환한 달빛과 그가 좋아해 마지않는 별빛을 모두 담고 있었다. 제 심장께에 손을 댄 채 급하게 문을 열어젖힌 정한이, 승철이 채 우산을 끄기도 전에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 왜 말 안 했어요.”

저기, 정한 씨, 나 우산 좀 끄고,”

왜 말 안 했냐구요! 한국 올 거면 온다고 하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 아니 뭐, 그래도 다 알고 오면 재미없잖아요. 놀래켜 주려고 그랬죠. 난 정한 씨 눈치 빨라서 도서관 물어 볼 때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잔뜩 심통이 나 목소리가 한껏 높아진 정한을 겨우 떼어 낸 승철이 우산을 접어 제 손목에 걸고 그 유한 얼굴로 대꾸했다. 정한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잘근잘근 씹어 가며 눈물을 참아내려 애를 썼으나, 곧 비가 떨어진 것처럼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앞에 다가선 승철이 정한의 어깨를 감싸 제 품으로 끌어 당겼다. 울음을 삼키고 삼키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서, 정한은 괜히 주먹을 꾹 쥐어 승철의 어깨 위를 쾅쾅 내리쳤다.

 

 

 

정한 씨, 미안해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진짜 미안. 그래서 내가 이거, 위타드 들러서 이것도 사 왔잖아요.”

몰라요, 승철 씨 진짜 나빠……. 이런 게 어딨어요, 진짜.”

미안해요, 요새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나도 며칠 전에 급하게 결정한 거였어요. 그때라도 말해 줄 걸 그랬는데.”

진짜…… 승철 씨 바보예요? 그렇게, 사람 마음 갖고 놀고, 흐윽, 내가 뭐가 돼요 그럼…….”

 

 

 

울음이 잔뜩 섞여 반쯤 뭉그러진 발음으로 웅얼거리던 정한이 제 감정에 못 이겨 꼭꼭 숨겨 뒀던 마음을 터뜨리자 가만히 그걸 들으며 정한의 등을 쓸어내리던 승철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믿을 수 없게도 잉잉 소리 내어 우는 와중에 용케 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정한이 다시금 주먹을 쥐어 승철의 어깨를 내리쳤다. 결국 참지 못하고 아, 귀여워, 소리를 낸 승철이 그의 어깨를 잡아 제 품에서 떼어내고 눈물이 퐁퐁 솟아나 흘러내리는 두 눈과 시선을 겹쳤다. 점차 굵어지는 빗소리가 섞인 승철의 음성이 정한 씨, 하고 나지막히 흘러나올 때 정한은 입술을 꼭 문 채 손등으로 눈가를 부벼 댔다.

 

 

 

정한 씨, 내가 할 말이 있었어요. 두 달 만에 하게 돼서 진짜 미안한데, 혹시 그거 알아요?”

뭐요, 뭔데요 또!”

비가 그치지 않네요, 라는 말. 조금 더 곁에 있고 싶어요, 라는 뜻이에요.”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네요.

 

 

 

문득, 정한은 승철의 음성 위로 한 달 전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던 승철의 또 다른 목소리가 겹치는 것을 느끼고서 눈을 크게 떠 올렸다. 악력에 못 이겨 손에 쥔 상자가 다 구겨질 동안, 승철은 항상 메고 다니던 카메라 가방을 뒤적여 자그마한 책 한 권을 꺼내었다. 멍하게 저를 바라보고 선 정한의 눈앞으로 손을 휘휘 흔들고, 곧 초점이 돌아오자 승철은 그에게로 손에 들린 책을 내밀었다. 흰 배경에 하늘색 물감이 퍼져나가듯 일렁이는 표지 위로, ‘당신은 이런 내 마음을 모르겠죠.’ 라는 문구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색하게 손을 움직여 책을 받아 든 정한이 두어 장을 넘겨보는데, 낯익은 사진들과 함께 익숙한 손 글씨가 사진 아래 공간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다시금 입술을 감쳐물고 울음을 삼키느라 푹 떨어뜨린 정한의 고개 위로 승철의 음성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두 달 동안 찍었던 별들이에요. 정한 씨 천칭자리 맞죠? 그거 전부 천칭자리예요. 그 아래는 내 일기 같은 건데, ……, 사실 조금 더 모으려고 했거든요. 근데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급하게 제본 맡겼어요. 이 책은, 그러니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에요.”

……이게, 뭐예요.”

내 고백이에요. 그동안 숨기느라 나도 진짜 힘들었어요. , 그러니까 이제 돌려 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해주면 안 돼요?”

……, ?”

맨날 했던 거 있잖아요. 다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는데도 왜 모른 척 했냐고 물어 볼 거죠? 그냥, 한국 가면 듣고 싶었어요. 정한 씨가 이렇게 울 줄도 알았거든요.”

 

 

 

나긋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든 정한이 울음을 삼키며 승철의 두 눈을 마주했다. 이렇게 날이 흐리고, 하늘이 잔뜩 어두운 와중에도 승철의 두 눈은 별을 박은 듯 반짝반짝 빛났고, 그 속에 그를 마주하고 선 정한이 비쳤다.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정한이 겨우 사, 하고 운을 띄웠다가, 이내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가리며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 사는 동안 돈 많이 버세요!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승철이 유쾌하게 소리 내어 웃으며 정한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손목을 쥐어 가볍게 떨어뜨리고, 승철은 지그시 시선을 맞춘 채 속삭이는 것처럼 내뱉었다.

 

 

 

정한 씨, 내가 많이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첫눈에 반했거든요. , 그러니까, 이제 계속 내 옆에 있어 줘요. 내가 잘해줄게요.”

……, 아 진짜…….”

정한 씨, 내가 지금도 많이 사랑해요. 진짜로요.”

 

 

 

나도, 나도…… 많이 사랑해요, 승철 씨. 진짜 고마워요, 와 줘서 고마워요.

비에 젖은 듯 물기가 잔뜩 어린 채 터져 나온 서툰 고백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승철이 정한을 다시금 끌어안았다. , , 크고 빠르게 울리는 심장 박동이 맞닿은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것 같아서 정한은 벅차오른 숨을 내뱉고 또 내뱉었다. 엄지를 들어 정한의 눈가를 가볍게 문질러 닦은 승철이 입 꼬리를 끌어 올린다. 눈가가 발개진 채, 정한도 그를 따라 웃었다.

 

 

 

장마 같은 여름비가 시원하게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고, 조용한 도서관 로비에 선 두 사람은 가만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과 승철의 손 글씨가 담긴 차() 상자를 한 팔로 안은 정한은 제 머리칼을 넘겨주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고,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 버렸다. 따라 웃는 승철의 웃음은, 그래비 내린 후 맑게 갤 파란 하늘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정한 씨, 머리 잘랐네요. , 어때요? 이상해요? 아니요, 깔끔하고 예뻐요. 잘 어울려. , 진짜요? 다행이다. 고마워요, 승철 씨. ……, 있잖아요. 왜요? 손잡아도 돼요? ……, 뭐야. 그런 건 안 묻고 그냥 덥석 잡아 버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또 울 까봐 무서워서 물어 봤다, 됐어요? 아아, 진짜, 놀리지 마요. 싫어요, 앞으로 계속 놀릴 건데? , 승철 씨!

 

 

 

, 승철 씨는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저요?”

 

 

 

비가 그치지 않는 곳으로요. 구름 속에 가려진 달이라도, 참 예쁘네요하고 말할 수 있게.

 

 

 

 

 

fin.


// 월간쿱정 참여글 업로드합니다. 주석을 꼼꼼히 읽은 후에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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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설명 (작가 임의로 정한 단어에는 * 표시가 달려 있습니다.)

슈케이스 = 카드 슈 ; 포커류의 게임에서 카드를 담아두는 케이스를 칭하는 말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다른 뜻일 수 있으나 이 글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시프트 : Shift Time, 교대 시간을 뜻합니다.

드라이 진 : Dry GIn, 이 글에 자주 등장한 마티니를 만드는 주재료입니다. 도수는 40도 안팎으로 굉장히 높습니다. ()

스택 : 카드를 쌓아놓은 것을 뜻합니다.

오픈 카드 : 패가 모두에게 공개되는 카드입니다. / 히든카드 : 패가 공개되지 않는 카드입니다. 받는 사람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메이드 : 포커 게임에서 특정 족보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족보 : 포커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드는 카드 조합을 통칭합니다.

Die : 포커 게임에서 게임 진행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 : 포커 게임에서 상대가 베팅한 금액과 똑같이 베팅하는 것입니다. 즉 앞사람의 베팅 금액을 받겠다는 뜻이죠.

 

*게임에서 사용된 칩은 임의로 정한 머니 칩(금액이 명시된 칩)입니다. 글에 등장한 녹색 칩은 10달러, 회색 칩은 100달러, 검은색 칩은 5000달러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포커 룰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1. 카드는 A부터 K까지 총 13장이 4문양 당 사용됩니다. 즉 같은 숫자/기호가 4장씩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2. 숫자의 가치는 2 3 4 5 6 7 8 9 10 J Q K A 순서입니다. A 카드는 1 또는 K보다 높은 카드로 사용 가능합니다. 문양의 가치는 스페이드-하트-다이아몬드-클로버 순입니다.

3. 족보에 대해 간략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하이카드 : 어떠한 조합도 가능하지 않을 때 1장의 카드로 가장 가치가 높은 것

원 페어 : 값이 같은 2장의 카드

투 페어 : 페어가 두 개 있는 것

트리플 : 값이 같은 3장의 카드

스트레이트 : 문양이 다른 카드 5장의 숫자가 연속한 것

플러쉬 : 값이 다른 카드 5장이 모두 같은 문양인 것

풀 하우스 : 트리플 하나와 원 페어

포 카드 : 값이 같은 4장의 카드

스트레이트 플러쉬 : 문양이 같은 카드 5장의 숫자가 연속한 것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 문양이 같은 카드 5장이 10 J Q K A 순서인 것

4. 게임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세 장의 카드를 받습니다. 각자 카드를 확인한 후, 한 장을 오픈합니다.

오픈한 카드 가운데 가장 높은 패를 가진 플레이어가 먼저 오픈카드를 받습니다.

패가 높은 순서대로 베팅한 후 두 번째 오픈카드를 받습니다.

패가 높은 순서대로 베팅한 후 세 번째 오픈카드를 받습니다.

패가 높은 순서대로 베팅한 후 히든카드를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베팅한 후 7장의 카드로 원하는 패를 만들어 오픈합니다. 이것으로 승패가 가려집니다. 승리한 사람이 베팅 칩을 모두 가지며, 다음 게임의 선 플레이어가 됩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장면의 BGM입니다. 순서대로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디오테잎(IDIOTAPE) - Melodie

이디오테잎(IDIOTAPE) - Even Floor

Fall Out Boy - Centuries

 

 

 

 

 

 

[월간쿱정]

 

 

 

 

 

투 페어, 풀 하우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w. (@HYEMM_SVT)

 

 

 

 

 

MGM? 시끄럽지. 요란스럽고, 너무 눈부셔.

그러면서 거기 가서 뭐 하게?

너보다 더 돈 많은 남자 꼬셔서 인생 펴 보려고. , 맘에 안 들어?

 

 

 

3년 전쯤이었을까, 윤정한은 도심 한복판의 클럽 지하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와도 같던 도박판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에 반쯤 묻혔으면서도 그렇게 선명할 수 없었던 승철의 음성을 기억한다. 반문하는 저에게 누가 봐도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 내고서, 일부러 독한 담배연기를 제 얼굴 가까이 불어대던 것을 기억한다. 저는 그때 그에게 뭐라고 대꾸했더라, 자리를 벗어나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서 정한은 승철의 뒤통수를 집요하게 쫓으며 그랬었다.

 

 

 

꼬우면 너도 라스베가스 오든가! 빡쳤다고 나 놔두고 가겠다는 거야, 지금?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애 같은 발언이었음을, 정한은 잘 알고 있다. 승철은 아무 룸이나 박차고 들어가서 아무 술이나 잡아 따고서, 그걸 잔에다 부었던가. 제 머리 위로 쏟아지던 뜨겁고 싸한 알코올의 감촉을 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라스베가스 가서 딜러 하겠다는 너나, 위에서 몸 파는 년들이나.

 

 

 

고개를 내젓는 얼굴이 웃는 듯 하면서도 싸늘하게 굳어있었던 것 같았다고, 정한의 기억은 거기서부터 희미하게 흩어졌다. 제 머리칼 위로 쏟아져 얼굴이며 어깨를 잔뜩 적신 술이 드라이 진(Dry Gin)이었다는 건 반 쯤 취한 척 승철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뜬 이후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시답잖은 말싸움은 어떻게 끝이 났더라?

 

 

 

 

 

그 때 네가 그랬잖아, 잘생기고 돈 많은 양키 꼬셔서 인생 펼 거라고.”

물론 그러려고 했는데, 막상 와 보니까 잘생기면 돈이 없고, 돈이 많으면 못생겼더라고.”

 

 

 

3년 후윤정한은 과거 최승철의 품에서 취한 척 잠을 청했던 때와 비슷한 자세를 하고서 그를 올려다보고 작게 키득이며 대꾸한다. 좁은 침대 위에 긴 다리를 전부 올려두려고 잔뜩 접고 웅크린 꼴이 웃겨, 승철은 그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헤집으며 픽 웃었다. , 머리 꼬지 마. 짜증 섞인 정한의 앙탈 비슷한 것이 방 안으로 울려 퍼졌다.

 

 

 

그런 식으로 말꼬리 늘려 봤자 나한텐 안 통하니까 가만히 좀 있어.”

아아, 그러면 머리 엉킨단 말야.”

됐고, 그래서 나 봤을 때 느낌이 어땠어? 이거 한 세 번은 더 물은 것 같은데.”

안 말해줄 거야, 너 짜증나.”

 

 

 

인상을 팍 찡그린 정한이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키며 손을 들었다. 그대로 승철의 이마를 퍽 소리 나도록 세게 밀자 그의 몸이 밀렸다. 상체가 뒤로 넘어가 완전히 누운 꼴이 되면서도 승철은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했다. 입술을 앙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떠 그를 흘기며, 정한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고 손목에 걸린 머리끈으로 그것을 모아 묶었다. 그러고서 다시금 상체를 눕히자, 정한의 어깨에 아랫배가 눌린 승철이 부러 죽는 소릴 냈다.

 

 

 

안 들려, 안 일어날 거야. 너 진짜 짜증나.”

어차피, 내쫓지도 못할 거면서, 괜히 힘 빼는 거다, 그거. 어우 씨, 좀 일어나 봐.”

, 싫다고! 바라는 게 많아, 진짜.”

 

 

 

제 아래에 이상한 자세로 누운 승철이 몸을 뒤트는 게 어지간히 불편했는지, 정한은 인상을 팍 쓴채 날 선 투로 대꾸하면서도 자세를 고쳐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침대 밖으로 달랑거리는 다리를 착착 접어 끌어 모으자 다시금 상체를 일으킨 승철이 그의 눈가를 가린 머리칼을 쓸어 귀 뒤로 넘겼다.

 

 

 

대답은 언제쯤 해 줄 건데, 여왕님. 고고한 척이고 아양이고 나한테는 다 어린 애 지랄이라고 했잖아.”

네가 날 그 따위 난잡한 호칭으로 안 부르면.”

조건이 까다롭네, 고민 좀 해 봐야겠는데?”

지랄, 말이나 못 하면.”

 

 

 

정한이 실소 비슷한 것을 입술 끝으로 가늘게 흘리자 승철은 그것을 내려다보고서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예쁘게 접히는 두 눈가를 곧은 손가락으로 잘게 찔러 대던 윤정한은 닿아 오는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고 화제를 돌려 물었다. 근데 당신, 내일부터 게임하러 나올 거랬나?

 

 

 

, 네 근무 시간에 딱 맞춰서. 어때?”

할 수 있음 해 봐. 혹시 승부조작 같은 거 바라나?”

 

당연한 거 아냐? 당신이랑 짜고 치려고 온 건데, 싫다면 아쉽네.”

 

 

 

승철은 사실 그 이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윤정한이 딜러 일을 해서 돈 많은 남자를 꼬드길 수 있는 방법이라 하면, 오로지 그만을 위한 판을 만들어주는 것즉 짜고 치는 게임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았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는 더더욱. 그랬기 때문에 먼저 게임 얘기를 꺼내고 일부러 튕기듯이 물은 진의를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러 미련 없는 척 침대에서 일어나려 몸을 뒤척이는 최승철의 손목을, 당연하게도 윤정한이 먼저 잡아당겼다.

 

 

 

내가 언제 싫다고 했나? 그치, 자기야.”

끼 부려 봐야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입력이 안 돼?”

, 라스베가스 애칭이거든? 무드 없는 새끼. 게임 때 네 말 하나도 안 들을 거야.”

해 봐, 할 수 있으면. 난 털어버리고 한국 가면 그만인데.”

 

 

 

 

침대 위에 앉아 자리에서 일어선 승철을 올려다보는 정한의 미간이 구겨진다. 입술 끝을 비틀어 깨문 그가 침대 시트를 초조하게 구겨 쥐다가, 그러쥔 승철의 손목을 느리게 놓았다. 손을 거두었음에도 서로를 마주한 두 갈래의 시선은 한참동안 물러서지 않았다. 미묘한 공기가 둘 사이를 부유하던 때, 먼저 시선을 떨어뜨린 윤정한의 달싹이던 입술은 굳게 다물렸고,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최승철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투 페어, 풀 하우스로 해. 스트레이트 플러쉬부터 의심하고 보더라고.”

라스베가스 특징이야,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당신이 존나 유능한 겜블러인 것처럼 소문 내 준다고 했잖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나 고개 못 들고 다녀.”

좋네, 그 잘생긴 얼굴 못생긴 여자들이 보고 반하면 어쩌려고.”

그런 논리라면 너도 꽁꽁 싸매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게임 좆도 못 하는 양키 놈들한테 여왕님 얼굴 보여드리기 싫은데.”

 

 

 

, 눈을 가늘게 뜨며 꽉 깨문 잇새로 조금 날 선 음성을 뱉은 정한이 아랫입술을 꾹 물며 제 머리 위로 손을 쳐들었다. 꽤 매서운 그 손이 승철의 어깨 위로 내리쳐질 때, 한 발 빠르게 손을 뻗은 승철이 정한의 손목을 쥐고 아프지 않게, 그러면서도 꽤 힘을 실어 제 쪽으로 잡아 당겼다. 졸지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마주 선 꼴이 되자 윤정한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죽을래? 당신 나한테 관심 있는 건 알았지만

죽일 거면 침대에서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관심은 당신이 나한테 있었던 거 아닌가?”

, 이 새끼가,”

 

 

 

입 속에서 맴돌던 말이 퍽 험악하게 터져 나올 때쯤, 승철은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양 소리 내어 키득거리며 겨우 두 사람 버티고 섰던 벽장과 침대 사이의 틈에서 빠져나갔다. 정한은 입술을 비틀어 꽉 문 채 승철 쪽으로 고개만 돌려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묶은 머리를 풀러 아까보다 좀 더 아무렇게나 묶었다. 최승철은 가만히 그 모양을 보고 서 있다가, 이내 느리게 뒷걸음질 치듯 현관 앞에 가 섰다. 여왕님, 진저리 날 만큼 불쾌한 호칭을 일부러 뱉는다는 걸 알면서도, 윤정한은 부르는 대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물론 그 예쁜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져 있었지만.

 

 

 

내일 시프트 언제야?”

알아서 내려 와. 그냥 라운지에 죽치고 있든가.”

일찍 자, 피곤하다고 나한테 와서 지랄하지 말고. 알았지?”

다정한 척 해 봐야 소용없으니까 그냥 빨리 좀 가.”

 

 

 

날 세워도 고양이 같은 건 여전하네.

금방이라도 룸 밖으로 나갈 것처럼 하다가, 문득 성큼성큼 걸어와 정한의 어깨를 잡아 챈 승철이 그렇게 속삭였다. 한 톤 더 낮고 퍽 진중한 음성이 그저 장난이란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살다 살다 고양이에, 여왕님에, 별 쓰레기 같은 건 다 들어보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에는 담지 못하고, 다만 윤정한은 습관처럼 입술만 잘근거릴 뿐이었다. 으득, 이 갈리는 소리가 선연하자 승철은 픽 웃었다. 그러고서 온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 다시금 현관 앞에 섰다.

 

 

 

, 빨리 가!”

한 마디만 더 하면 뭐 날아올 것 같은데.”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래?”

 

알았으니까 갈게. 내일 봐, 윤정한.”

 

 

 

끼익, . 생각보다 시끄러운 소릴 내며 닫힌 문 위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정한은 한숨같은 것을 작게 내뱉으며 그 쪽을 바라본 방향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착 가라앉은 공기가 느리게 부유하며 무릎을 모아 앉은 정한의 주위로 하강했다. 최승철에게 항상 간파당하는 이유를, 3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었다. 더불어, 묘하게 뒤틀린 관계가 어디서부터 이어지고 있는지도.

 

라스베가스에 도망 온 지 2년 만에, 제 이름 세 자를 정확한 발음으로 불러준 사람이 처음이었다고, 윤정한은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최승철 앞에서는 지랄이 차고 넘치는 고양이인 척 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으니까.

 

 

 

에이 씨, 지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조금 가라앉은날을 세운 척 하는 목소리가 방 안을 뱅뱅 맴돌다가 사라진다. 그 속에서, 정한은 한참을 같은 자세로 가만히 문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

 

 

 

 

 

 

 

투 페어, 풀 하우스. 윤정한은 그렇게 이어지는 족보에서 5년간의 추억 가운데 가장 큰 파편을 끌어낸다. 일부러 잡아당기거나, 억지로 파묻으려 하지 않았는데도, 그것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다가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긴 다리를 구기다시피 접은 채 불편하게 잠든 정한이 눈가를 찌푸리며 조금 뒤척였다.

 

 

5년 전 또 다른 세계의 한 구석에서, 거의 호기심을 이유로 접근했던 정한에게 승철은 가만히 시선을 두며 카드 더미를 내밀었다. 정한은 반복적인 패턴이 섞인 카드 뒷면을 내려다보다가, 느리게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승철은 손가락 끝에 걸린 마티니 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며 가라앉은 시선을 카드 위에 얹혀진 정한의 손 위로 옮겼다. 흘긋 그를 올려다보고, 윤정한은 조용히 카드를 셔플하며 중얼거렸다. 마티니 마시는 남자는 생각보다 더 멋있을 줄 알았는데. 용케 그 작은 목소리를 들은 승철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슈케이스 안으로 카드를 밀어넣은 정한이 고개를 들었을 때, 승철은 검정 슬랙스에 칼라리스 셔츠를 걸친 저 자신을 아래위로 훑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썩 멋지지 않다, 이거네?

「…아니 뭐, 내 판타지가 그렇다는 거지.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을 때 제일 멋진 거니까요.

생각보다 포장 잘 하시네. 당신 혹시 딜러?

관련 없는 물음 같지만 여하튼 전 전공자예요. 왜요?

 

 

 

 

그냥, 이 판에 뛰어든 딜러라면 당연히 짜고 치는 판 만들어 주려고 온 거 아니겠나 싶어서.

묘하게 짜고 치는을 강조하는 듯한 승철의 음성이 정한의 귓가 근처에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승부조작 같은 건가, 정한이 눈가를 찌푸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마티니 잔을 쥔 승철이 말을 이었다.

 

 

 

여기 왔음 알아서 적응해야 할 거야.

결론적으로 나 보고 배운 거 갖다가 법 어기는 데 쓰자는 거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할 말은 없는데, 당신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이상 스스로 배워 가야지, 어쩌겠어. , 팔려 온 건 아니잖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 거리에서 이 정도 목소리로 하나하나 짚어주는 것 밖에 없거든.

 

 

 

무색투명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승철의 입술이 잠시 닫혔다가 열리고, 띄엄띄엄 매달린 알전구 불빛에 반질거리는 칵테일 잔 끝이 그 입술 사이에 걸렸다. 정한은 왠지 거기에서 뱉어진 공기가 탁한 회색 같다고 생각하며 입술 끝을 감쳐물었다. 이런 덴 줄 몰랐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게 분명하겠지.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카드 슈에서 세 장을 빼내어 뒤집어진 채 승철 쪽으로 건네며 물었다.

 

 

 

그래서 난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나도 잘은 몰라. 딜러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것 외에는.

카드 슈나 스택을 조작하라는 건가요?

그런 식으로 한다는 사람도 있고, 의도적으로 필요한 패만 건넨다는 경우도 있고. 뭐가 됐든 제스처나 암호 같은 걸로 정보 공유하는 방식은 다 같더라고.

정보를 흘리면 당신이 메이드 할 수 있어요?

그거야 족보에 따라 다르지. 처음부터 네가 만들어서 줄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특정 패를 목표로 삼고 너한테 그걸 흘릴 수도 있는 거고.

 

 

 

일말의 소음 없이 테이블 위를 흘러 건네어진 카드를 받아 들며, 승철은 정한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마무리 지었다. 탁한 공기 탓에 순식간에 건조해진 눈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뗀 정한은 다시금 카드 슈에서 한 장을 빼내어 그것을 오픈시키고 승철 쪽으로 내밀었다. 하트 2,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그것을 내려다보는 승철의 입술 끝이 가볍게 말려 올라갔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정한은 손을 뻗어 뒤집어진 세 장의 카드 가운데 제 쪽에 더 가까운 것을 뒤집었다. 스페이드 2? 오픈된 카드로 시선을 내리꽂은 정한의 머리 위에서 승철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많이 놀랐나? 원 페어 정도야 우연으로도 쉽게 만들어지는데 뭘 그래.

하지만, 이건 히든카드였고―」

그러니까. 아직도 모르겠나 봐? 페어 정도는 당신이 직접 메이드 할 수 있다는 거잖아.

 

 

 

룰대로라면, 이 카드를 먼저 오픈해야 할 테니까.

벙 찐 상태 그대로 굳은 정한의 어깨 너머로 팔을 뻗어 카드 슈를 끌어당긴 승철은 제 마티니 잔을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놓고서 카드 한 장을 빼내어 망설임 없이 뒤집었다. 이번에는 하트 퀸이었다. 승철은 둥글게 잘린 카드 모서리를 손가락 끝으로 쓸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눈치가 없을 줄은 몰랐는데. 알고 온 거 아니었어?

아니, …… 자세히 알고 온 건 아니지만.

난 항상 그랬지만, 처음에 받은 두 장의 히든카드는 딱 두 번만 건드려. 처음 받았을 때, 그리고 게임이 끝났을 때. 매 턴마다 히든카드를 건드린다는 건, 게임이 잘 풀리고 있다는 얘긴 아니거든.

「―그래서 전 뭘 하면 된다고요?

카드 셔플을 너무 열심히 하려 들지 마. 어차피 원 페어는 거의 운이고, 그것만 만들면 턴이 앞으로 당겨지니까 투 페어는 금방 메이드 해. 첫 오픈카드를 받을 때 이미 원 페어가 만들어져 있도록 하는 게 당신이 할 일, 그리고 마지막 카드를 받을 때 투 페어를 만드는 게 당신이 할 일이야. 이 쯤 하면 알겠어?

 

 

 

오픈된 카드 세 장과 승철의 눈을 번갈아 마주하며, 정한은 퍽 다정한 투로 뱉어진 승철의 음성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딘가 결연한 눈을 하고서 팔을 뻗어 카드 슈를 집어 든 정한이 다시금 한 장을 빼내어 오픈시켰다. 클로버 퀸이다. 카드를 건네는 그의 입술이 유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승철은 히든카드 두 장을 끄트머리만 들어 보고, 이내 테이블 끝을 톡톡 두드리다 정한이 건넨 카드를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잘 하는데? 예의상 해준 말이라는 느낌이 팍 드는 투였음에도 정한은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가 승철의 눈치를 약간 보고 급하게 그것을 삼켰다. 승철은 테이블 중앙에 가져다 놓은 마티니 잔을 들어 또 한 모금을 들이킨다. 그의 반대쪽 손이 간헐적으로 테이블 끝을 두드리고 있었다. 정한은 손톱이 가지런히 정리된 그 손가락 끝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카드 슈에서 한 장을 빼내어 다시금 오픈시킨다. 이번에는 현재 오픈된 카드와 전혀 상관없는 패다이아몬드 에이스였다. 승철 쪽으로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승철이 가지런히 정리된 카드 패 오른쪽 끝에 내려놓았다. 손을 들어 괜히 잘 묶인 제 머리를 푸른 정한이 넌지시 승철에게 물었다.

 

 

 

아무 상관없는 패가하나쯤은 있어도 되겠죠?

있어도 되는 게 아니라 있어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누구든 의심할 테니까. 중요한 건 마지막 히든카드야. 그건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당신이 알아서 잘 해 봐.

 

 

 

뭐야, 다 챙겨주는 것처럼 굴더니. 좀 전보다 성의 없게 들린 마지막 말에 눈가를 살짝 찡그린 정한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 머리칼을 모아 묶고 카드 슈에서 한 장을 빼내었다. 그러더니 그것을 승철의 맞은 편 빈 테이블 위로 밀어 두고, 그 다음 카드를 승철에게 내밀었다. 가만히 그것을 받아든 승철은 히든카드 두 장 사이를 가르고 그것을 내려놓는가 싶더니, 아까처럼 테이블 끝을 가볍게 두드리며 처음에 받았던 히든카드 한 장과 위치를 바꾸어 오픈시켰다. 오픈 전 이미 투 페어가 완성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 게임이었더라도 승산이 전혀 없지는 않다. 정한은 가만히 뒤집어진 카드 모서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위층에서 울리는 기계음 잔뜩 들어간 음악에 맞추듯 승철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고, 음악이 멈춘 듯 주위가 낯설 만큼 고요해질 때 손을 들어 카드를 뒤집었다. 그 위에 그려진 여왕의 형상, 정한은 그것을 마주하고서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스페이드 2 두 장, 퀸 세 장. 풀 하우스였다. 승철의 입술이 가볍게 호선을 그린다.

 

 

 

생각보다 센스가 있는데? 카드 한 장 빼고 준 것도 그렇고.

어차피 게임을 혼자 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그치만 마지막에 준 카드는 오픈 안 했잖아요.

, 눈치 못 챘나 보네.

뭐를요? 특별히 한 행동이라고는 테이블 두드리는 것밖에,

보고 있었으면서도 몰랐나, 그건데. 내가 마지막 카드를 오픈조차 해 보지 않은 이유 말야.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마지막 카드를 오픈하지 않은 이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슈케이스를 의미 없이 두드리던 정한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손을 뻗어 승철의 앞에 놓인 카드를 끌어 모은 그는 슈케이스에 그것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가능성을 묻는 것이 아닌백 퍼센트 확신하는 말투. 승철은 정한의 손을 내려다보며 뜻 모를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거 혹시, 이미 원하는 걸 메이드 했다는 뜻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까 아까 당신이 히든카드를 들어 보고 그 이후로 계속 테이블을 두드렸었잖아요. 맞죠?

그래, 맞아. 아무것도 모르고 온 사람치고는 학습 속도가 빠른데?

빈말이라고 해도 고마워요. 그치만 아까 그건 정말로 운이었어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사람들이 늘 찾는 행운의 여신 같은 게 너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도 여기 올 거면 나랑 같이 일할래?

가만히 듣고 있기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승철이,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마티니 잔을 들어 남은 것을 한 모금에 집어삼키고서 물방울에 조금 촉촉해진 손을 정한에게로 내밀었다. 가만히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정한은, 얼떨결에 그 손을 잡았다. 맞닿은 손끝으로 조금 차가운 감촉이 전해진다. 정한은 왠지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한 것 같아 승철이 손을 놓기가 무섭게 손바닥을 제 허벅지에 문질렀다. 그러나탁하게 내려앉은 공기, 어두운 알전구 불빛, 제게로 내려앉는 승철의 시선과 퍽 다정한 말투, 그 모든 것을 피할 수 있었다면 진작 자리를 떴을 것이란 생각이 뇌리에 스미고 있었다.

 

 

나랑 일하면 뭐가 좋으냐고? 아마 평생 만져본 적 없는 돈을 만지게 될 걸? 농담 아니고 진짜로. 장난스레 사족을 덧붙인 승철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정한은 제 입술을 가볍게 감쳐물었다 놓으며, ‘최승철을 찾아 가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거다라고 속삭여 줬던 지인의 말에 홀린 듯 이 곳에 걸어 들어온 사실을 승철이 영영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돈이 아니라오늘 처음 본 이 남자에게 홀린 것 같다는 사실 또한.

 

 

 

 

 

 

 

암호를 정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승철이 먼저 넌지시 물은 것은 정한이 세 번째로 그를 찾아 클럽 지하에 몸을 밀어 넣은 때였다.

단발로 친 제 머리가 어색해 그 끝을 죽죽 잡아당기던 정한은 저를 마주하자마자 대뜸 그렇게 묻는 승철에게 일부러 글쎄요, 하고 반문하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새로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3일에 이틀 꼴로 자정 퇴근을 일삼는 것이어서 테이블 위로 반쯤 널린 채 턱을 괸 그의 눈가에 피곤이 잔뜩 묻어났다. 승철은 눈가를 가린 정한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암호를 정해야 게임을 하고, 게임을 해야 돈을 따지.

난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당장 내놓으라는 식으로 나오면 집에 갈 거예요.

「―그리고 돈을 따야 네가 좀 덜 피곤해할 거고. 그치?

 

 

 

항상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뜨거운 승철의 손끝이 정한의 눈가로 와 닿았다. 반쯤 내려앉은 눈꺼풀 위를 엄지로 꾹꾹 눌러 주며, 그는 작게 키득거렸다. 그러다 자겠다, 자겠어. 정한은 승철이 하는 대로 눈을 감으며 따라 키득 웃었다. 먼저 연락한 사람이 누군데요? 느리게 뱉어진 말은 질책이라기 보단 농담조에 가까웠다.

 

 

 

3일 전부터 연락해서 오늘은 볼 수 있는 거냐고 묻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든가요. 내가 진짜 피곤해서 죽어버리고 싶은 거 억지로 왔으니까 용건만 간단히, 알겠어요?

아쉽네. 너 데리고 노는 거 재밌는데. 표정 바뀌는 거 보는 것도 재밌고.

사람 데리고 노는 거 진짜 안 좋은 거예요, 알아요?

알아요, 이 직선적인 사람아. 맘에 안 들면 나랑 사귀는 걸로 하든가.

 

 

 

승철은 대체로 그런 식의 농담을 즐겨 하는 사람이었다. 정한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그를 마주한다. 손에 들린 맥주 캔을 뺏어 한 모금 크게 들이키자 승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 알면서도 그것을 쉽게 여기는 건지, 아님 원래 천성이 매사 쉽고 가벼운 사람인 건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입 안에 쌉싸름하게 퍼지는 알코올에 눈가를 찌푸린 정한이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장난칠 거면 나 집에 가요. 그니까 빨리 말 해.

어우, 무서워서 못 건들겠네. 피곤한 거 너무 잘 보여서 안쓰러워 죽겠으니까 빨리 말할게. 대신 잘 알아듣고 기억해 놔, 알겠지?

 

 

 

다시금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승철을 조금 올려다보던 정한의 두 눈 위로 맥주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옮겨 붙은 승철의 손바닥이 와 닿았다. 시야가 어두워진 대로 눈을 내려감은 정한은 잠에 들지 않으려 손가락을 들어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승철은 어딘가 결연하기라도 한 듯 목소리를 가다듬는가 싶더니, 고개를 좀 가까이 해 작지만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선 앞으로 게임할 때는 투 페어 풀 하우스, 아님 트리플 플러쉬 순서로 메이드 하는 게 좋을 거야. 처음에 나오는 거 보고 어디로 갈지 내가 흘려줄 테니까 잘 알아먹어. 그러니까, 너 영어 좀 하지?

전공이었다니까요. 나 이거 한 두 번 말한 것 같은데.

, 그랬었지. 암튼 크게 생각하려면 영어로 만드는 게 나아. 어디 가서 써먹기도 쉽고, 잘 안 걸리고. 그러니까, 일단 페어는 단순하게. 우선 게임 진행하는 네가 나 말고 다른 겜블러들 묶어서 커플이냐고 물어. 그렇게 보이든 말든 상관없이. 원이면 한 쌍, 투면 두 쌍으로. 걔네가 뭐라고 대답하든지는 내 알 바 아닌데, 카드 오픈 전에 메이드 되면 항상 하던 대로 테이블 치면서 내가 되물을게. 누구한테 물을 지는 상황 봐서 결정하는 걸로 하고. 됐지?

그니까페어는 내가 메이드해 줄 수 있으니까 먼저 요구하란 거잖아요. ‘페어니까 커플 언급하는 거고. 진짜 단순하네요, 생각보다.

단순해야 기억하기 쉬워. 그런 의미에서 트리플은 하트 3. 내가 너한테 있냐고 물어볼 거야. 그럼 트리플이 필요하단 걸로 알아. 도와주고 말고는 네 운이긴 한데, 만약 도와줄 수 있으면 하트 3이 아니라도 축하한다고 해.

……, Congratulations, sir, 정도로 말하면 돼요?

, 영어 발음 장난 아니네. 암튼 뭐 그런 식으로. 스트레이트는 머리 쓸 거 없이, 마티니가 있으면 필요한 걸로 알아 둬. 스트레이트가 필요한 경우면 항상 마티니가 옆에 있을 거고, 메이드 되면 잔 비울게. 물론 메이드의 기본 제스처는 테이블 두드리는 거니까 헷갈리지 말고. 다음 플러쉬는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겜블러하고 게임할 때만 쓸 거야. 당신이 카드 돌릴 때, 내가 일부러 하나 집어서 이게 필요하다는 식으로 할 거거든. 물론 당신은 그 카드를 나한테 줘도 되고, 안 쥐도 돼. 메이드 된 상태면 주는 카드 받으면서 필요한 거였다고 할 거고. 대충 어떤 식인지 알겠어?

대충은요. 예상은 전혀 안 가지만.

풀 하우스는 트리플에 페어 하나니까 당신 역할이 커. 그래서 당신이 만들도록 지시하는 편이 빠를 거야. 카드 찔러 주면서 교대 5분 전이라고 해. 웬만큼 큰 카지노는 교대 순서나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편이라고 했으니까 다른 놈들도 의심은 못 할 거야. 그리고 5분 뒤에 게임 끝내는 걸로 하고, 난 풀 하우스 메이드 하는 걸로 하고.

그리고마지막인가, 만들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이하 로스플는 일단 스트레이트가 있으니까 마티니가 있을 거야. 그리고 게임하면서 내가 당신한테 작업 거는 느낌으로 말 걸 거니까 알아서 마음의 준비 할 거면 하고. 오픈된 카드가 세 장 째일 때 내 차는 메르세데스다, 라고 할 거고 마지막 히든카드 받을 때 룸 넘버 말해줄게.

스케일 무지 크네, 로스플이라 그런가……. 메이드 해 본 적은 있어요?

 

 

 

텀을 여러 번 두고 그리 짧지 않게 이어진 승철의 말이 마무리 지어지자 눈을 떠 그를 마주한 정한이 넌지시 물으며 테이블에 반쯤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키고 한 쪽으로 기울여져 있던 목을 반대쪽으로 기울여 풀었다.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지는 것을 마주하며 승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정한은 그 대답에서 이상한 점을 단번에 발견하지 못하고 그것을 곱씹다가, 이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에게 반문했다.

 

 

 

그게 가능하기는 해요? 나도 족보로나 봤지, 실제로 게임에서 나온 적은 없었는데.

나도 두 번 정도밖에 없어. 물론 이것도 기적이라고들 하던데, 운이 잘 따르거나 딜러가 잡혀갈 각오 하고 카드 찔러주면 되긴 되더라고. 내가 너한테 후자를 바라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아.

그래서 로스플 메이드 해 볼 거예요? 나중에 언제가 되든 간에.

그거야 모르지, 운에 맡기는 거라고 했잖아.

만약 메이드 하면요?

 

 

 

그런 식으로 암호를 만든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거 아니에요?

정한은 주머니에서 짧게 진동한 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으며 떠 보듯 그렇게 물었다. 제 의도를 승철이 모를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흘린 것으로 비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한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승철은 가만히 정한의 손 근처에 시선을 두고 그 주위를 맴돌며 간단하게 대꾸했다. 적어도 윤정한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으리라. 최승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모르겠는데? 그래 보이는 것 같으면 룸으로 찾아오든가. 그럼 네가 바라는 게 있을 지도 모르지?

「……됐네요, 물어 본 내가 잘못이지.

 

 

 

나 갈게요, 알바 가야 해.

정한은 승철 몰래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뒤를 쫓으며 승철은 시답잖은 몇 마디를 덧붙여 물었다. 알바는 매일 가는 거냐, 몇 시까지가 원래 근무 시간이냐, 같은 것을 물어 오면서도 무슨 일을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적당히 예상이 간다는 건가. 정한은 저 혼자 생각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입술을 앙 다문 채 묵묵히 걸었다. 주차장으로 통하는 출구 앞에 서서, 그는 그제야 승철을 돌아보고 물었다.

 

 

 

어디까지 따라올 거예요?

오늘 알바 쉬어. 아님 내 차 타고 가든가. 지금도 충분히 늦었는데 혼자 돌아다니다가 누가 너 잡아가면 어쩌려고.

왜요, 내가 당신의 소중한 인력이라서?

……, 그런 의미도 없지는 않은데, 어쨌거나 우린 큰 그림이 있잖아. 이 바닥 뜨기 전까지는 조심히 살아야지, 안 그래?

 

 

 

그러니까 내가 태워 줄게, 따라와.

승철은 꽤 선심 쓰는 척 하기 좋은 말을 예의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내뱉으며 주머니를 뒤적여 차키를 꺼내었다. 스치듯 지나간 그것이 정말로 그가 언급한 메르세데스 벤츠의 차 키라는 걸 마주한 정한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것을 용케도 들은 승철이 정한을 돌아보며 씩 웃어 보인다. , 좀 멋있어 보이나? 그 물음에 고개를 주억일 뻔 한 것을 참아내고서, 그런 것도 같네요, 정한은 부러 그런 식으로 중얼거리며 그와 걸음을 맞추었다.

 

비싼 차라 그런지 승차감이 너무도 좋았던 탓에그 탓이라고 하는 편이 덜 우스울 것 같았다.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던 정한은, 승철이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지도 모르고 뒷자리에 거의 누운 채 새근새근 잘 자고 일어나서는, 제 집 침대에 누워 눈을 떴을 때 이미 동이 트기 시작한 것을 마주하고 작게 헛웃음을 지었더랬다. 휴대폰은 안 그래도 배터리가 간당간당하던 것이 결국 수명을 다해 차게 식어있었고, 협탁 위에 승철이 휘갈기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가 놓여있었다.

너 그렇게 피곤해하는 꼴 보기 그래서 그냥 재웠어. 필요하면 또 연락할게. 아침 챙겨 먹고. 텍스트에서 그 다정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아 정한은 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꾹 쥔 손아귀 안에서 승철의 글씨가 남은 종잇조각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윤정한은 다만 그것을 내다버리지 못하고 침대 한 구석에 집어던진 다음에, 거실로 나가 승철이 말한 대로 아침을 챙겨 먹었다. 기분이 묘하게 좋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나빴다.

 

 

다정한 말투에, 저를 신경 쓰는 듯한 행동, 그러면서도 별 생각 없이 쉽게 뱉어지는 말들, 교묘하게 기만하는 듯한 태도. 정한은 어디가 최승철의 진실인지를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이내 썅, 하고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최승철이 운운하던 큰 그림라스베가스로 가야겠다고, 정한은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승철과 함께, 가 아니라 승철보다 먼저 거기에 도착하겠다고. 몇 번이고 곱씹은 아침이었다.

 

 

 

 

 

 

 

*

 

 

 

 

 

 

 

침대에 반쯤 걸쳐진 채 잠들어 있던 정한이 눈을 떴을 때, 벽에 붙은 아날로그시계는 열한 시 반쯤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머리 바로 옆에 놓인 휴대폰은 LED를 반짝이며 문자가 왔음을 알렸고, 그는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헝클어진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잠이 덜 깨 멍하니 빈 벽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곧 휴대폰이 시끄러운 알람벨을 울려댔다. 언제부터 자고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까무룩 잠이 들어서는 꿈자리가 사나워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모두 떠올랐기 때문에잠을 설쳤으면서, 근무 시작 시간이 오후 1시란 것은 몸이 기억하고서 저를 수면(睡眠) 위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휴대폰을 쥐어 알람을 종료시키고 나서야 정한은 베개도 베지 않은 채 이상하게 누워 잠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 그의 얼굴에 뚝뚝 묻어나는 피로감은 비단 요상한 자세로 잠 들어 뻐근해진 몸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반쯤 틀어진 채 잠든 고개가 잘 돌려지지 않아 애를 먹은 정한은 교대를 20분 전후로 남기고서야 겨우 유니폼 넥타이를 조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게임을 하기에는 꽤 이른 시간임에도 호텔 투숙객또는 관광객으로 추정되는 사람 몇이 카지노 라운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들어 보고 아직 시간이 남았음을 확인한 정한은 바 스툴에 걸터앉아 덜 마른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렸다. 약간의 물기와 더불어 진한 샴푸 향이 손가락에 감긴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측면 벽을 따라 죽 늘어선 슬롯머신을 돌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그의 귓전을 울리고 지나간다. 아닌 척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던 정한은 문득 오른쪽 옆으로 제 생각을 한 치 오차 없이 읊어주는 음성이 다가오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슬쩍 거는 비즈니스용 미소. 목소리의 주인공승철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끄럽지? 요란스럽고, 눈부시고.”

당신 이제 하다하다 독심술까지 써?”

감정 못 숨기는 네가 여전한 거지.”

 

 

 

딱 떨어지는 블랙 수트를 갖춰 입은 승철은 손을 들어 부스스하게 뜬 정한의 뒷머리를 느리게 빗어 내렸다. 진한 샴푸 향이 그의 손가락으로도 물들어 간다. 정한은 제 귀 뒤에서 희미하게 불어오는 여자 향수 냄새 같은 것에 인상을 조금 찌푸리고, 이내 고개를 흔들어 승철의 손을 떼어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모아 묶어버리자 손을 거둔 승철이 또 한 번 장난스럽게 키득였다. 이내 그는고개를 돌려 하릴없이 슬롯머신 쪽을 바라보고 선 바텐더를 제 쪽으로 불렀다. Excuse me, 하는 부름에 푸른 눈의 백인 바텐더가 이쪽을 돌아보고서 다가와 섰다.

 

 

 

“Yes, sir. What can I do for you?” (,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A martini, please.” (마티니 한 잔이요.)

“Sweet or dry?” (스위트로 하시겠어요, 드라이로 하시겠어요?)

“A little MORE dry, please.” (조금 더 드라이하게 해 줘요.)

 

 

 

승철의 주문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바텐더가 자리를 뜨자, 승철은 스툴을 빙글 돌려 정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짧은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시계를 확인한 정한은 반쯤 틀어진 승철이 무색하도록 자리에서 일어선다. 카지노 입구 쪽 벽에 붙은 디지털시계에 12:50 이란 숫자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그대로 돌아설 것처럼 하던 정한은 문득 고개를 돌려 승철을 돌아본다. 그의 손에는 벌써 낯익은 칵테일 잔이 들려 있었다.

 

 

 

그런 대화를 한 시도 안 돼서 듣네. 웬만하면 주정뱅이는 취급 안 하고 싶은데 말야.”

난 취한 적 없어. 이런 거 마시면서 게임 하면 여자들이 좋아하던데.”

, 그럼 그 여자들이랑 게임 하시든가.”

오늘따라 튕기는 게 예뻐 보이네, 여왕님. 몇 번 테이블이야?”

, 몰라, 알아서 찾아 와.”

 

 

 

다시금 승철의 장난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하던 게 와장창, 비슷한 소릴 내며 깨지는 순간이었다. 부러 그 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고 딜러 대기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으며 들어온 정한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표정을 있는 대로 구겼다. 문 닫히는 소리에 대기실 안에 있던 딜러 몇이 그 쪽을 돌아보았으나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또 저래, 비슷한 반응일 테지. 정한은 아직 눅눅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입속말로 욕지거리를 씹어 삼킨다.

한편정한이 돌아서서 대기실로 들어가 버린 후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승철은 반동으로 큰 각을 그리며 회전하는 문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뜻 모를 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느리게 옮긴다. 입술 끝에 걸린 마티니 잔이 기울여지고 무색투명한 액체가 입술 사이로 흘러갈 때쯤 발걸음이 멈춰선 그 앞으로 정리가 한창인 테이블 모서리에 17이라는 숫자가 금박을 입고 박혀 있었다. 그 앞에 선 승철의 손가락 끝에 걸린 칵테일 잔이 가볍게 반 바퀴쯤 돌았다. 좀 전에열린 문틈으로 윤정한의 깨물린 입술 끝을 본 것도 같았던가, 싶은 생각이 어렴풋이 스몄다가 바닷물 빠지듯 흘러 나간다.

곧 자리를 잡고 스툴에 걸터앉은 승철의 시야로, 덜 자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넥타이를 조인 정한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희미하게 울리던 백 그라운드 뮤직BGM이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EDM으로 바뀌었다. 잘게 쪼개진 비트에 낮게 깔린 신디사이저 기계음이 은근히 집중력을 흩트리는 탓에 다리를 꼬고 앉은 승철은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며 손가락에 걸린 칵테일 잔을 가볍게 돌렸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카드를 셔플하는 정한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그의 시야 끝에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자리 잡는 것이 걸쳐졌다. 차르륵 소리를 내며 정한의 손 안으로 쏟아진 카드가 정리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승철은 칵테일 잔을 들어 마티니 한 모금을 들이킨다. 싸한 알코올이 목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조용히 눈가를 찌푸렸다. 샹들리에 조명이 밝고, 흐르는 음악이 시끄럽고,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치장이 요란스럽다.

습관적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던 승철의 시선이 문득 정한의 시선 끝에 걸리는 찰나, 52장의 카드 스택을 쥔 정한의 손이 그것을 철제 슈케이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 케이스 틈으로 밀려온 카드 뒷면의 어지러운 패턴에서 길게 뻗은 정한의 손으로 시선을 옮긴 승철의 귓가로 들리는 한 마디Welcome, lady and gentlemen.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Left is the first turn.” (왼쪽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손을 들어 승철을 가리킨 장한이 찬찬히 제 앞에 앉은 이들을 시선으로 훑으며, 슈케이스에서 카드 세 장을 빠르게 빼내어 승철 쪽으로 밀듯이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승철은 제 옆의 낯선 이들이 카드를 받을 동안 끄트머리를 들어 패를 확인하고서 뒤집어진 채 제 앞으로 끌고 와 가지런히 정렬해 두었다. 하트 5, 다이아 J, 그리고 스페이드 9. 승철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곧 카드 배분이 모두 끝나고, 슈케이스 위로 손을 가지런히 모은 정한이 입을 열었다.

 

 

 

“Choose one card, and turn it.” (카드 한 장을 선택해 뒤집어 주세요.)

 

 

 

그의 말이 끝나고, 승철의 바로 옆에 앉은 남자부터 카드 한 장을 뒤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스페이드 8이었다. 이어 승철이 뒤집은 카드는 가운데에 위치한 스페이드 J이었으며, 가장 오른쪽에 앉은 여자와 그 옆의 남자는 각각 하트 2와 하트 4를 뒤집어 내려놓았다. 적어도 다음 턴까지는 승철이 첫 번째 순서였다. 그는 오픈된 카드를 제 카드 맨 오른쪽으로 옮겨 정리하며 마티니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듯 한 모금을 들이켰다. 정한은 슈케이스에서 카드 한 장을 빼내어 쥐고 승철 쪽으로 내밀며 오픈시켰다. 첫 번째 오픈카드는 하트 9였다. 미묘하게 입 꼬리를 당긴 승철이 정한에게만 보이도록 살짝 웃어 보이고, 왼손을 들어 마티니 잔을 만지는 척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흐르는 EDM 비트에 맞췄다는 걸 놓칠 리 없는 정한은 역시나 승철에게만 보이도록 가볍게 웃어 보였다. 다음 순서의 플레이어에게 카드를 내미는 것을 꽤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승철은, 제 옆의 남자가 받은 카드가 클로버 8인 것을 확인하고서 미세하게 표정이 굳은 것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Hey, Mr. Navy suit.” (이봐, 남색 수트.)

“Me?” (?)

“Yeah. Are you a COUPLE?” (그래, . 혹시 너네 둘 커플인가?)

I and who?” (나하고 누구라고?)

“You and that guy next to you.” (너하고 네 옆에 있는 저 남자 말야.)

 

“Hey, he is MY boyfriend!” (이봐요, 이 사람은 내 남친이라고요!)

 

 

 

떠 보듯 장난스레 던져진 승철의 물음에, 질문을 받은 당사자남색 수트를 걸친 금발의 사내는 퍽 당황한 듯 보였고, 졸지에 게이 커플로 엮인 그 옆의 남자는 입을 닫고 있긴 했으나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 앉은 녹색 눈의 여자는 영국식 강세로 승철에게 쏘아 붙이듯 대꾸했다.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던 정한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가 웃음을 꾹 참아 삼키며 빼낸 카드를 여자에게 내밀었다. 다이아 9. 여자는 제 패가 나쁘지 않아 좀 전의 일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승철은 가만히 정한을 올려다보고, 슬쩍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보였다. 첫 번째 턴은 남색 수트의 남자 쪽으로 돌아갔다.

Your turn, 정한이 그를 가리키며 말하자 남자는 손에 쥐고 굴리던 녹색 칩 여러 개를 드문드문 칩이 놓인 베팅 존으로 밀어 놓았다. 그러나 뜬금없게도 그가 새로 받은 오픈카드는 다이아 2였다. 끝에서 여자가 비웃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승철은 가만히 그가 베팅한 칩의 개수를 헤아렸다. 한 개에 10달러니 총 50달러를 건 것이었다. 제 오른쪽에 색깔별로 쌓아 둔 칩들을 툭 건드려 쓰러뜨린 그는 좀 전의 남자가 건 것만큼의 칩을 가져다 베팅 존에 놓고 정한이 건네는 카드를 받아들었다. 하트 8, 제 옆의 남색 수트가 테이블을 가볍게 내려치는 것에 승철은 키득 소리 내어 웃었다. 턴이 돌아 세 번째로 카드를 받은 여자가 9 원 페어를 만들자 첫 번째 턴이 그녀에게로 넘어갔다. 말없이 가만히 카드를 확인하던 세 번째 자리의 남자는 제 턴이 되기 무섭게 카드를 뒤집으며 Die, 하고 읊조렸다. 승철이 세 번째 턴이 되자 정한이 문득 그 쪽을 응시했으나, 눈이 마주쳤을 때 최승철은 아랑곳 않고 경쟁자가 줄어든 것에 상당히 기뻐하고 있었다적어도 정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슬롯머신 쪽에서 누군가 잭팟이 터진 듯 소리를 지르는 틈을 타 한숨을 내쉰 정한은, 금세 표정을 싹 바꾸고서 가볍게 미소를 머금은 채 여자 쪽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뒤집어진 카드는 클로버 4였다.

 

 

 

“Oh, my luck is over.” (, 내 운은 여기까진가 봐.)

 

 

 

잔뜩 아쉬운 표정으로 제 남자친구에게 속삭인 여자는 이내 카드를 내려놓고 5달러짜리 칩 두 개를 베팅 존으로 던졌다. 승철은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두 번째 턴이었던 남색 수트의 카드가 별 볼 일 없는 것을 보고서 조용히 웃음을 흘려주었다. 남자는 승철의 카드도 별 볼 일 없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지만만약 그렇다 해도 우승은 그의 손을 들어주지 못한다. 그가 완성한 건 8 원 페어였으므로.

곧 정한의 손이 승철에게로 카드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승철은 기대감 없이 카드를 뒤집었다가, 이내 씩 미소 지으며 쌓아 둔 녹색 칩을 반쯤 뚝 잘라 베팅 존으로 내려놓았다. 차르륵 쏟아진 칩들이 대충 세어도 10개는 넘을 것 같았다. 정리된 카드 맨 오른쪽에 자리 잡은 세 번째 오픈카드 위에는 클로버 9개가 그려져 있었다.

투 페어 완성, 승철이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마지막 턴은 모두에게 히든카드가 돌아가는 턴이었다. 승철은 그것을 열어보지도 않고서 맨 왼쪽 끝으로 밀어 놓고 여유롭게 마티니 잔을 들어 홀짝였다. 제 옆에 앉은 남자는 마지막 카드에 목숨을 건 듯 했으나, 그마저도 쓸 만한 카드는 아니었던 듯싶었다. 원 페어 이상을 기대한 것 같았던 여자도 승철에게 J 원 페어가 메이드 되자 아예 포기해선 들고 있는 칩을 손에 쥐고 굴렸다. 중구난방으로 어질러져 있던 칩들을 색별로 정리하는 정한에게, 승철은 모르는 척 넌지시 물었다.

 

 

 

“Hey, Mr. Yoon. Do you have a boyfriend?” (윤정한 씨, 당신 남자친구 있어요?)

“Sir, sorry but I’m straight.” (고객님, 죄송하지만 전 스트레이트입니다.)

 

 

 

, 윤정한이 스트레이트? 웃기지도 않네. 승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채 일부러 연기하듯이 Oh, I’m sorry. 하고 대꾸했다. 눈가를 살짝 찌푸리는가 싶던 정한은 이내 개수가 제일 많은 녹색 칩을 10개 단위로 쌓으며 건성으로 물었다.

 

 

 

“Do you wanna be a COUPLE with me?” (나랑 연애라도 하고 싶은 거예요?)

“Yeah, It’ll be fantastic, isn’t it?” (그럼, 죽일 것 같은데. 아닌가?)

 

 

 

능청스런 대답에 정한이 픽 실소를 흘린다. 웃기지도 않아, 저 따위로 말해 놓고서 먼저 발 뺄 거면서. 조금 표정이 굳은 채 입술을 잘근 물었다 놓은 정한은 이내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플레이어들을 내려다보았다. 승철은 티라도 내듯 제 왼손을 정한의 시야에 걸리는 데다 놓고 일정하게 두 번씩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어 그의 음성이 들려온다. Game’s over. Turn your cards. (게임이 끝났습니다. 카드를 뒤집어 주세요.) 진작에 게임을 포기한 세 번째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각자 메이드한 패를 오픈해 딜러 쪽으로 밀었다. 결과는 최승철의 우승. 남색 수트는 8 원 페어를, 여자는 9 원 페어를 메이드 했다. 쌓여 있는 한 무더기의 칩을 모두 끌어 온 승철은 흐트러진 모양을 바로 잡아 정렬해 두고서 다시금 마티니 잔을 들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알코올에선 묘하게 단 맛이 났다.

 

 

 

“Total amount of bettings are 245 dollars. Five minutes later, next game. Thanks.” (총 베팅 금액은 245 달러입니다. 5분 뒤 다음 게임이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드를 쓸어 모아 가볍게 셔플한 후 뒤집어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은 정한은 목을 죄인 넥타이를 가볍게 풀며 자리를 슬쩍 떴다. 일부러 플레이어 쪽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그의 손끝이 승철의 등을 쿡 찌르고 지나갔다. 승철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정한의 발걸음이 향하는 반대편 구석진 곳으로 시선을 두다가, 이내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어깨를 돌리는 시늉을 하면서 그 쪽으로 향했다.

슬롯머신 돌아가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테이블 17 정반대편 구석에서, 정한은 벽에 기대어 선 채 입술을 잘근 씹었다. 떨어뜨린 그의 시야 안으로 잘 닦여 반질거리는 구둣발이 멈춰서고, 이내 단단한 손끝이 맞물린 입술을 문지르고 지나갔다. 고개를 든 정한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짓 좀 하지 마. 여기 내 일터야.”

알아. 일터라는 사람이 한낱 고객한테 나랑 사귀고 싶냐느니 하는 말을 하고 그러나?”

언제는 나보고 그렇게 하라며. 왜 시비야?”

네가 귀여우니까? 입술 깨물면 흉 져, 시간 없으니까 왜 불렀는지는 얘기해 줘야지?”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다시피 하고서 웃음을 가득 담아 보인 승철에 정한은 무어라 더 쏘아 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작게 내쉰 그가 무의식중에 입술을 꾹꾹 눌러 깨물다가, 집요한 시선이 입술에 와닿는 것을 느끼고 이내 혀를 내어 제 입술을 가볍게 축이며 목소리를 내었다. 승철의 손은 어느새 정한의 머리칼에 닿아 그것을 귀 뒤로 넘겨주고 있었다.

 

 

 

별 거 없어. 당신, 어디까지 갈 거야?”

? 모르지, 되는 데까지?”

다음 게임은 뭘로 할 건데?”

풀 하우스? 메이드 되는 거 보고 알려 줄게. 너무 초조해하지 마, 아무도 모르니까.”

 

 

 

누가 언제 초조해했다고, !

정한의 귓가에 입술을 두고 읊조린 승철이 정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테이블 17 쪽으로 걸어 나가자 시선을 돌린 채 대꾸하던 정한이 입술을 꾹 깨물고 목소리를 조금 높여 그를 불렀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머리칼을 풀어 대충 손으로 빗어 내리고, 다시금 정갈하게 그것을 모아 묶은 그는 풀린 넥타이를 꽉 조이며 승철보다 조금 늦게 테이블로 걸어 들어갔다. 초조해하는 건, 나인 걸까. 아무도 모르게 실소를 흘린 정한은 슈케이스에서 카드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쌓아 둔 카드와 함께 셔플하고서 다시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게임은 승철이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전 판에서 부진하더니 처음 오픈한 카드가 스페이드 K였던 세 번째 자리의 남자는 곧 승철이 Q 원 페어를 만들자 두 번째로 밀려났다. 남색 수트는 메이드 할 여지가 전혀 없는 패에처음 받은 세 장 중에 그나마 오픈할 수 있었던 게 클로버 6인 것 같았다.승철이 원 페어를 만들자마자 포기를 선언했다. 아까와는 달리 입을 닫은 채 고군분투하던 여자도 카드를 테이플 위로 집어던지며 Die를 외쳤다. 이제 둘만 남은 것이다. 더 받을 수 있는 카드는 세 장, 현재 승철이 보유하고 있는 카드는 Q 원 페어하트, 다이아, 그리고 오픈되지 않은 클로버 Q와 스페이드 7.

그러니까이미 그의 손에는 트리플이 쥐어져 있었다.

 

 

승철은 지난 판보다 적게 쌓인 칩을 정리하는 정한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이내 제 왼손을 들어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아까보다 좀 더 빠른 비트의 EDM이 흘러나오는 것에 맞춰 손을 움직이자, 그것을 시야 끝에서 바라본 정한이 픽 실소를 흘렸다. 신났네, 입속말로 중얼거리고서 고개를 들어 올린 정한이 세 번째 오픈 카드를 승철에게 건넸다. 하트 7이다. 승철의 입 꼬리가 눈에 띄게 말려 올라간다. 정한은 그 쪽에만 들릴 듯 작고 빠르게 속삭였다.

 

 

 

“Five minutes later, shift.” (5분 뒤 교대예요.)

“Oh, I’m really sorry.” (, 정말 유감이네요.)

“You want more game?” (더 게임하고 싶으신가 봐요?)

“Yeah, with YOU.” (, 당신하고.)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뱉은 마지막 말은 승철이 함꼐 플레이 중인 세 번째 자리의 남자에게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었다.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싶어 승철을 응시했던 정한은 그가 씩 웃으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자 표정을 풀고서 그 남자에게로 오픈카드를 건넸다. 사실 그도 패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 현재 승철은 Q 원 페어였고, 남자는 J 원 페어가 막 메이드 된 상태였다. 그와 그의 여자친구 사이에 쌓인 칩에서 회색 칩 5개를 들어낸 남자가 베팅 존으로 그것을 던졌다. 500달러? 승철은 제 입술을 느리게 혀로 핥아 축이며 얌전히 뒤집어진 카드 끝을 들어 다시금 새겨진 숫자를 확인한다. 남자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만들어진 풀 하우스. 순서는 다시금 승철 쪽으로 돌아간다.

 

 

 

두 번의 카드 배분과 한 번의 베팅이 끝난 후, 베팅 존에는 꽤 큰 금액의 칩들이 드문드문 쌓여 있었다. 기본베팅 금액5달러을 제하더라도 좀 전에 남자가 건 500달러에 승철이 굳이 콜 할 필요 없으면서 똑같은 금액만큼을 건 탓으로 대략 1000달러 이상이 베팅된 셈이었다. 승철은 연신 테이블을 두드리며 칩을 정리하는 정한의 손끝으로, 가볍게 흘러내린 머리칼로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곧 칩을 가지런히 쌓아 둔 정한이 고개를 들어 게임의 끝을 알렸다.

 

 

 

“Game’s over. Turn your cards.” (게임이 끝났습니다. 카드를 뒤집어 주세요.)

 

 

 

결과는 보나마나 뻔했다. 남자가 투 페어를 만들기는 했으나승철의 패는 풀 하우스였다. 일부러 마지막에 받은 히든카드부터 차례로 오픈하는데, 먼저 스페이드 2가 나오자 기뻐하던 남자는 승철의 손끝에서 클로버 Q가 뒤집어져 나오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시금 베팅 존에서 칩들을 끌어 온 승철이 한 가득 쌓인 제 칩들 주위로 새로 딴 칩들을 줄지어 세워 두었다.

잠깐의 브레이크 타임, 정한은 테이블 위에 흩어진 카드를 모아 셔플했고 승철은 빈 마티니 잔을 굴리다 지나가는 웨이트리스를 잡아 새 마티니 한 잔을 주문했다. 남색 수트는 별 생각 없는 표정을 하고서 슬롯머신 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고, 커플은 무언가 전략을 짜는 듯 딱 붙어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까처럼 조금 더 드라이한 마티니가 승철의 손에 들릴 때, 카드를 슈케이스에 집어넣고 케이스 뚜껑을 닫은 정한이 세 번째 게임을 열었다.

 

 

 

“Game starts. Left is the first turn.” (게임을 시작합니다. 왼쪽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정한의 손이 움직이고, 그의 손끝에 달라붙듯 카드 세 장이 딸려 나온다. 승철은 새로 채워진 마티니 잔을 들어 한 모금을 천천히 들이켰다. 제게로 건네진 카드 세 장을 차례로 테이블에 놓고서, 역시나 끄트머리를 들어 숫자를 확인한다. 다이아 9, 스페이드 A, 그리고 스페이드 10. 승철은 한 쪽 입 꼬리를 당기며 고개를 들어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시선이 마주치고, 정한은 아주 미세하게 어깨를 으쓱하고서 다음 플레이어에게 카드를 건넸다. 테이블을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던 승철은 맨 오른쪽에 놓인 스페이드 10 위로 손을 두었다. 여자까지 모두 카드를 배분받은 이후 카드를 차례로 오픈하는데, 여자의 수중에는 다이아 K, 남색 수트에게는 하트 8이 들려 있었다. 전력의 일환인지 별 볼 일 없는 카드를 오픈한 세 번째 남자는 제 베팅 차례가 되자 게임 포기를 선언했다. 나름 머리 쓴 건가. 승철은 가만히 오픈된 스페이드 10 카드 위를 톡톡 두드리며 머리를 굴렸다. 여자가 첫 번째 턴을 가져갔고, 그는 정한이 칩을 정리해 놓는 동안 혹시나윤정한이 물리적으로 카드를 조작하는 경지에까지 이른 건가, 싶은 생각까지도 해 보고서 혼자 헛웃음을 웃었다. 한 가지 이유라고 하면, 여자가 받은 첫 번째 오픈 카드가 하트 K였기 때문에.

승철은 제게로 돌아온 하트 A를 받아들어 놓고 마티니 잔을 들어 반 정도를 단숨에 비웠다. 물론 남색 수트야 별 볼 일 없는 클로버 6을 받았다고 하지만, 여자는 두 턴 만에 K 원 페어를 메이드 해 버렸다. 물론 A 카드가 안 좋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썩 맘에 드는 것도 아닐 테지. 원 페어를 만들지 않고 게임을 끌고 나가는 건 스트레이트거나로스플이거나, 두 가지 선택지뿐이므로 승철은 다만 둘 중 어느 것이라도 메이드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여자가 이중 스파이인가를 고민해 봐야 하는 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승철은 한 쪽 입 꼬리를 당겨 쓰게 웃었다. 정한이 그것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제 의도와 상관없이 터진 여자의 운에는 적잖이 놀랐지만.

 

 

여자가 크게 베팅을 하면 그것에 콜 하는 식으로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베팅 존에는 꽤 큰 금액의 칩들이 쌓이고 있었다. 세 번의 베팅이 끝난 후 남색 수트는 6 원 페어를 만들었고, 여자는 K 트리플을 만들었으며, 따라서 승철은 세 명 가운데 세 번째 턴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현재 그의 앞에는 오픈된 스페이드 A, 하트 A, 스페이드 K, 그리고 오픈되지 않은 다이아 9와 스페이드 10이 자리하고 있다. 마티니 잔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손끝에서 가볍게 굴리며, 승철은 제가 가진 스페이드 문양의 카드 세 장을 곱씹는다. 정한이 만들어 줬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저도 몇 번 만들어본 적 없는 데다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더더욱 드문 전설의 패가 메이드 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체면만 좀 섰으면 된 거지. 승철이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이미 여자에게는 별 볼 일 없는 클로버 7 카드가 들어가 있었으며, 남색 수트는 다이아 6을 받아 6 트리플을 막 완성한 찰나였다.

승철은 느리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슈케이스에서 카드를 빼낸 정한이 그것을 오픈해 승철에게 건네는데, 아주 미세한 각도였으나 제 쪽으로 먼저 앞면이 보이게끔 오픈하던 것을 마주하고서 그는 픽 웃음을 흘렸다. 받아든 카드는 스페이드 Q. 그것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여자 쪽에서 부정확한 음성이 작게나마 들려 왔다. 의심하는 거겠지, 승철은 그러나거기서부터 확신이 선다. 5개 마련해 둔 블랙 칩 두 개를 집어든 그가 베팅 존에 그것을 슥 밀어 놓았다. 신경을 긁어내리던 EDM이 끝나고, 카지노를 가득 채우는 배경음악이 다음 노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Fall Out BoyCenturies? 승철은 익숙한 노랫말에 입속에서 울리듯 허밍을 덧붙이며 손을 거두었다.

 

 

 

일전에, 그러니까 정한과 암호를 공유하고 시간이 좀 흘렀을 때였을까정한이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었다. 카드를 셔플하는 연습을 하다가, 스트레이트를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카드를 섞는 방법을 연구해본 적이 있었다고. 승철 저야 어차피 카드 셔플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단순한 호기심에 그 방법을 물었었는데, 생각보다 어려워서 머릿속에 잠시 들어앉았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싹 지워졌던 것 같다. 다만 카드를 셔플할 때 의도적으로 한 문양으로 정렬된 카드 스택을 나머지 무더기에 사이사이 끼워 넣고 셔플하면 된다, 라고 했었던 것도 같았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정한과 처음 합을 맞췄던 지하 도박장에서, 승철은 겜블 인생에서 세 번째 로스플을 메이드 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 날 밤에,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간 도박장 안에 정한과 둘이 남아 몇 천 쯤 됐던 돈을 세면서 뭐라고 했었더라.

 

마지막 히든카드를 받아 들며, 승철은 베팅 존에 놓인 제 블랙 칩 5개와 기타 가진 칩의 절반가량이 쌓인 칩 무더기를 정리하는 정한의 손끝을 가만히 응시하고서, 그 때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로스플 메이드 한 건 네 셔플이 컸던 것 같다. 잘 했어.

그게 끝이에요, 설마?

이 돈 절반 너 준다니까. 뭘 더 바라?

 

당신, 나랑 잘래요? 로스플은 마티니에, 당신 차에, 당신 룸 넘버잖아.

 

 

 

그 때좀 더 자란 단발머리를 쓸어넘기며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생긋 웃던 윤정한에게, 최승철은 무슨 말을 했었더라. 손을 들어 넥타이를 살짝 당긴 승철이 얌전히 뒤집힌 히든카드 끄트머리를 들어 새겨진 숫자를 확인하고서, 고개를 들어 윤정한을 올려다보고, 이내 그 얼굴 가득 환하게 미소를 담으며 제 수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낯익은 문양이 새겨진 차 키, 승철의 메르세데스 벤츠였다.

 

 

 

“Mr. Yoon, you know that?” (윤정한 씨, 그거 알아요?)

“No, I don’t.” (아뇨, 모르는데요.)

“I said nothing, yet.” (나 아직 아무것도 안 말했는데?)

“What do you wanna say, then?” (그럼 뭘 말하고 싶으신데요?)

 

 

 

세 판의 게임 가운데 가장 많은 칩이 쌓인 터라 고개 숙여 그것을 정리하던 정한이 문득 고개를 들어 승철을 마주하는데,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승철의 왼손 바로 옆으로 낯익은 차 키가 놓여 있자 정한의 두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정말로 제 의도가 아니었던가. 승철은 백 그라운드 뮤직 비트에 맞추듯 손가락을 느리게 움직여 테이블을 두드리며 정한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정한이 늘 믿지 못하는, 그 낮게 깔린 음성이었다.

 

 

 

“Room 808, this is mine.” (808, 내 룸이에요.)

 

 

 

드럼 비트가 큰 음악 소리에 반쯤 묻히다시피 해서 그것을 전해들은 정한이 미세하게 입 꼬리를 끌어올린다. 그 쪽으로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있던 승철은 자세를 고치며 마티니를 들어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칩 정리를 마친 정한의 손이 단정하게 채워진 유니폼 베스트 마지막 단추 위로 겹쳐 놓여졌다. 게임 종료를 알리고, 여자와 남색 수트가 트리플을 메이드 한 자신의 패를 앞 쪽으로 밀어 모두에게 보이도록 했다. 승철은 느리게 손을 움직여 스페이드 A, K, Q를 차례로 앞 쪽으로 밀어 두고, 처음 받았던 히든카드 가운데 한 장을 뒤집어 앞으로 밀었다. 스페이드 10이다. 이어 마지막 카드를 집어든 그의 손이 뒤집어진 채로 먼저 그것을 앞으로 밀어 놓고, 제 쪽에서부터 느리게 뒤집는다.

 

스페이드 J.

승철의 앞에 줄 지어 놓인 카드 다섯 장,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다.

 

 

 

 

 

 

 

승철이 베팅 존 가득 쌓인 칩들을 모두 챙겨 일어설 때, 마침 정한의 교대 시간이 되었고, 여전히 의문을 감추지 않은 채 자리를 뜨는 남색 수트와 커플을 뒤로 하고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승철의 옆으로 넥타이가 조금 풀린 정한이 다가와 섰다. 별 말없이 승철의 어깨에 걸린 묵직한 가방을 들어 본 정한은 생각보다 꽤 되는 무게에 놀라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않고 여과 없이 뱉어냈다. 일정한 박자로 숫자가 바뀌는 전광판을 올려다보던 승철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신났네, 당신. 이래저래 돈 많이 벌고 좋으시겠어.”

가방 안 무거워? 같이 들까?”

됐네요, 여왕님한테 이런 거 맡겨서 뭐 해.”

 

 

 

눈에 띄게 기분이 좋은 티를 팍팍 내며 건네진 정한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한 승철이 곧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먼저 걸어 들어갔다. 정한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는 닫힘 버튼을 누르고, 반질반질해 얼굴이 비치는 엘리베이터 벽을 바라보며 부스스해진 제 머리를 다시 묶었다. 승철은 가만히 벽에 기대어 서서 정한이 하는 모양을 보고 있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라 작게 웃음을 흘렸다.

 

좀 전에그러니까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게임 중간에 떠올렸던 윤정한과의 과거에서, 자신이 그에게 무슨 대답을 했었는가가 떠오른 것이다. 그게 좀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었던가. 승철은 넌지시 그렇게도 생각해 보며 그 때의 제 대답을 곱씹는다.

 

 

 

그래 봤자 새끼고양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애 건드리는 거 별로다.

 

 

 

그리고 정한을 돌아본다. 놀리기에 귀여운 맛이 있는 그는 여전히 새끼고양이라는 애칭 아닌 애칭이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나최승철은 윤정한을 건드리고 싶어졌다. 윤정한이 숨길 수 없는 단 하나의 감정을 무시하고 싶지 않아진 것이다. 엘리베이터 전광판의 숫자가 막 5에서 6으로 바뀔 때, 거기까지 결론을 내린 승철은 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연다. 막 머리를 다 묶은 정한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서 그를 돌아볼 때였다.

 

 

 

윤정한. 너 나랑 잘래?”

……?”

, 싫어?”

 

 

 

이거 지금 진심인데, 장난 아니고.

엘리베이터 벽에 부딪쳐 잔뜩 울린 승철의 음성이 너무나도 일상적이어서, 정한은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가만히 그것을 보고 선 승철은 픽 웃음을 흘리며 한 걸음을 그 쪽으로 옮긴다. 세 걸음 째 되었을 때 정한의 등이 엘리베이터 벽과 완전히 닿고, 숨결마저 느껴질 법한 거리에서 두 사람의 맞닿은 시선이 이리저리 얽혔다. 유달리 진득한 승철의 시선을 다 받아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정한에게, 승철이 낮게 읊조렸다. 넌 여전히 고양이 같은 맛이 있지만

 

 

 

어쨌든 그게 날 끌어당기기에는 충분했어.”

…….”

여왕님, 그래서 싫어?”

 

 

 

장난스레 뱉어진 물음에 정한은 가까이 다가선 승철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서, 대답 대신 가볍게 미소를 걸며 제 입술을 승철의 입술 위로 맞댔다. 눈이 반쯤 접히는 웃음은 이전과 같았다. 명백한 도발, 승철은 입술이 맞닿은 채 실소를 흘리고, 이내 손을 들어 정한의 뒷머리를 감싸며 그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퍼즐 맞춰지듯 맞물린 입술 틈으로 순식간에 달아오른 두 개의 살덩이가 오가는 순간, 승철의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땡 소리를 내며 열린다. 그의 어깨를 쥐어 가볍게 밀어낸 정한이 조금 가쁘게 숨을 고르며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이내 어깨를 쥔 채 팔에 힘을 줘 열린 문 뒤로 밀어냈다. 승철이 뒷걸음질 치다시피 해서 제 룸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맞붙은 두 몸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고, 붉은 빛이 도는 정한의 입술 위로 잘게 입을 맞추던 승철은 제 룸 앞에 다다랐을 때 다시금 그것을 머금으며 뒷주머니를 뒤적여 카드키를 꺼내었다. 입 안을 바쁘게 헤집는 승철을 받아내던 정한은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다시금 힘 줘 그를 밀어내고, 카드키를 쥔 그의 손을 내려다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문 안 열어? 여기서, 뭘 더 어쩌려고.”

여기서 하는 것도 스릴 있지 않나?”

 

 

 

제발, 오늘은 당신한테 욕 하고 싶지 않아.

한쪽 눈을 가린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긴 정한이 승철의 손에 들린 카드키를 뺏어 들어 문을 열었다. 딱 붙어 엉키다시피 한 두 쌍의 구둣발이 겨우 룸 안으로 밀어 넣어지고, 현관에 선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맞물렸다.

 

 

 

철컹, 원주를 그리던 현관문이 퍽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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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봄

[쿱정전력 청춘예찬]

 

 

            

w. (@HYEMM_SVT)

 

 

 

 

 

조별과제 공고가 붙었다. 주제는 청소년 문화에 대한 심층적 이해’. 게시판 앞에 선 방년 스물 셋, 과대 최승철은 줄줄 늘어진 글자들을 침착하게 눈에 담는다. 어떻게 복학하자마자 조별과제냐. 옆에서 어깨를 두드리는 동기들이 내적 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지는 사실이어서, 승철은 그 손을 단호하게 내쳤다. 아니, 복학하자마자 과대 일을 다시 떠맡은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조별과제야 과 특성 상 많은 게 당연한 거니까 그것도 별 상관 없었다.

그런데, !

 

 

 

[수강생들의 공평한 참여를 위하여 조는 임의로 편성하였으니 아래 붙임을 확인 후 과제를 수행하기 바랍니다.]

 

 

 

교수가 지 맘대로까놓고 말하면 조교가 랜덤 프로그램 돌린 게 확실하겠지만조를 정하냐 이 말이다. 승철은 왼쪽 눈에서 오른쪽 눈으로 지나가는 글자를 세 번이나 붙잡은 후에야 입속말로 욕설을 읊조려 보았다. 시발 뻐킹. 나지막한 음성에 동기들은 웃기다고 또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자신들도 랜덤 프로그램의 희생양임을 깨닫고 다급하게 손을 뻗어 공고 앞장을 넘긴다. 죽 늘어선 학번을 손끝으로 훑어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서로 같은 조가 되었다고 기뻐하다가도 제사 뒤진다. 집안 행사 뒤진다.’ 따위의 문장을 반쯤 장난 식으로 내뱉는 동기들도 있었다. 그리고 승철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제 학번을 찾아 글자들을 스캔하다가, 마지막 조 맨 위에서 굴러가던 눈동자를 멈추었다.

 

 

 

[6

 

조장 14017024 최승철

조원 14017016 윤정한

……]

 

 

 

그리고 승철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그의 등 뒤에서 난리 굿을 하던 동기들도 나열된 문자를 인식하고서 적당히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대여섯 명이 모인 게시판 앞이 조용해진 이유라면, 승철의 이름 아래에 1순위로 적힌 이의 이름자 때문이었다.

하아……. 적막을 깨듯 한숨을 내쉰 승철의 두 눈에 다시금 들어차는 이름의 주인공윤정한은, 조별과제를 하는지 마는지는 제 알 바가 아니라는 느낌으로, 과방에서 가장 구석지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가장 볕이 잘 드는 창가 근처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휴대폰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간간히 그 액정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더랬다.

 

 

 

 

 

그러니까, 청소년교육과 14학번 윤정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간단하게는 승철과 그 무리들의 동기였다. 그 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를 돌이켜 보자면, 임시 과대로 뽑혀 버린그의 대표 운명은 이때부터였을 지도 모른다승철이 듣기로 남자 신입생이 가장 많은 해라고 했었다. 얼만큼 가지고 놀 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신나 보이는 여자 선배들과 달리 남자 선배들은 어떻게 여학생이 세 명 뿐이냐며 이를 득득 갈았으나, 언제 왔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히 구석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윤정한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었다. 사실 그것은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승철이 길을 잘못 알려준 탓으로아슬아슬하게 참석한 동기들은 물론 승철과 함께 마지막으로 들어온 여자 임원진 선배들까지도 모두 똑같이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웬만한 여자도 어울리기 힘든 단발머리를 하고서 창 밖을 바라보는 얼굴에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다가, 선배들이 들어오자 슬쩍 미소를 짓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뻤던 것을 승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임원들 사이에 끼어서, 아마 그 때 승철은 정한의 웃는 얼굴에서 토끼나 새끼 고양이 따위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쟤는 귀여운 것만 닮았네, 하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다가 혼자 놀라 작게 소리를 질러 버린 것 또한 기억에 남아있을 테지.

 

그러나 개강 이후 맞은 윤정한은 오리엔테이션 때의 첫인상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도 선배들 앞에서는 적당히 웃어주고 적당히 대답해주는 것도 같은데, 다수의 동기들 가운데 문장으로 구성된 대답을 받아본 사람은 승철이 알기로 없었다. 정말, 없었다. 우선은 과방에 1학년 다수가 남게 되면, 윤정한은 마치 제 지정석인 것 마냥 볕이 잘 드는 구석 자리로 가서, 고고하게 다리를 꼬아 앉아서는 다음 강의가 있을 때까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는 했다. 이따금씩 누군가에게 문자나 카톡을 보내는 것도 같았고, 이따금씩 정체 모를 게임을 하는 것도 같았다. 간간히 미소를 띠는 것은 시종일관 바라보는 액정 속에 그 원인이 있을 터였고, 누가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어 보려고 앞을 얼쩡거린다 싶으면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다. 일례로 승철의 동기 중에 제일 인생 막 산다 싶은 놈이 고만고만한 다른 과 애들하고 윤정한 웃는 거 받기라든가, 되도 않는 내기를 했다면서 과감하게 구석 자리로 다가갔었는데, 휴대폰 속에 뭐가 들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말갛게 웃던 정한은 그가 가까이 와서 제 어깨를 두드리기가 무섭게 표정을 싹 지우고 적당히 긴 머리를 찰랑이며 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은 위협이라기 보다는,

 

 

 

— 야, . 나 지금 숙주 뽑는 거 안 보여?

……어, ?

너 때문에 이거 이거 다 못 뽑아서 죽었잖아. 네가 책임질 거야?

 

 

 

정확하게, 아주 정확하게 새끼 고양이가 다 자라지도 않은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한 마디로 앙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찰나의 정적, 이후 윤정한이 휴대폰 액정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과방을 울리고, 절망에 빠진 동기 놈이 무리 속으로 터덜터덜 걸어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승철을 포함한 나머지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삼켜 내려 갖은 미친 짓을 다 하고 있었다. 물론 다시 게임에 빠져든 윤정한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안중에도 없었고. 승철은 왜 웃느냐며, 자긴 진지하다며 울분을 토하는 동기 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결국 과방을 박차고 뛰어나와야 했다. 물론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앉은 동기 놈이 웃긴 이유도 있었으나, 복도 구석 자판기 앞에서 참았던 웃음을 뱉어내는 최승철을 건드린 것은 당연하게도 윤정한이었다. 게임 하느라 바쁘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스무 살 남자가 말을 저렇게, 귀엽게 하지? 누가 보면 미친 놈이라고 혀를 찼을 정도로, 승철은 정한이 뱉었던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으며 한참을 웃으며 제 옷으로 바닥 청소를 다 하고서야 과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청소년교육과 14학번 윤정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간단하게는 승철의 동기였고, 조금 덧붙이자면 하는 행동이며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여운 생명체임에도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줄곧 발톱을 세우는 새끼 고양이와도 같은 사람이다,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승철은, 잠깐의 과거 여행을 끝마치고서 자신의 위치를 절감한다. 2년 전의 제가 바닥 청소를 다 해가며 웃었던 그 일의 최대 피해자인 동기 놈이 저를 보면서 아까 전부터 징그럽도록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조별과제까지도 좋다, 같은 조가 된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윤정한은 과 내에서 5등 안에 들 만큼 학점이 좋았다—. 그러나 현재 휴대폰에 두 눈동자를 박은 이는 조별과제 공고가 떴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고, 따라서 조장인 승철이 직접 가서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건데, 다시금 돌아본 윤정한은 현재 게임으로 추정되는 활동에 매우 열중하고 있었다. 또 다시 고뇌에 빠진 승철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숙이는데, 그때 그 피해자였던 동기를 필두로 눈치를 깐 나머지 무리들이 그의 어깨를 반쯤 성의 없이 두드려 주었다. 그나마 승철과 마음이 잘 맞는다 싶은 동기가 그를 위로한답시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어차피 너는 그래도 좀 덜 쪽팔릴 거 아니냐. 그 때 저 새끼는 쟤한테 수작 걸어볼라고 간 거고, ? 너는 임마, 정당한 사유가 있잖냐.”

……같잖은 위로 안 받는다, 가라.”

, 그래. 빠이.”

 

 

 

그러나 이미 당사자가 된 승철에게 그 따위 위로가 통할 리 없었다. 이미 명당자리에 진치고 앉은 동기들은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저를 보며 잔뜩 비웃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무드 없는 남자기로서니 제가 거절해도 상투적인 멘트를 하나쯤은 더 뱉어줄 것만 같았던 동기 녀석도 가란다고 인사까지 건네며 명당자리로 발을 옮겼다. 이 와중에도 윤정한은 이 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제 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액정을 향해 반짝 빛나는 두 눈이 참 귀엽게도 생겼다, 고 승철은 무의식 중에 그렇게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결심한 듯 호흡을 골랐다. 이게 뭐라고 다가가는 몇 걸음이 그렇게 비장한지 저도 모를 일이었지만, 동기들 다 모인 앞에서 개 쪽 팔기는 싫었던 승철은, 정한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어깨 너머로 휴대폰 액정을 곁눈질하며 있는 대로 눈치를 다 보다가, 겨우 오른손을 뻗어 눈앞에 놓인 그의 어깨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때물고기들이 유영하는 화면을 지그시 바라보며 평화롭게 스크롤을 내리던 윤정한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그 바람에 스크롤이 한없이 위로 올라가며 얼떨결에 액정을 꾹 누른 탓에 이미 열 마리나 보유하고 있는 물고기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최승철은 어깨 너머로 이름 모를 게임 화면에서 빛이 번쩍이며 물고기 형상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는 걸 곁눈질하며, 속으로 절망한다. 창조된 물고기가 확대되어 화면 안을 헤엄치는 것을 잠시 동안 바라보고 앉았던 윤정한은, 누가 봐도 새침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반쯤 돌려 승철을 올려다보았다.

 

 

 

, . 나 지금 어비스리움 하는 거 안 보여?”

……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지금 너 땜에 분홍 돌고래 못 사고 블루탱 산 거 안 보이냐구.”

……아니,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니고—“

이거 생명력 모으려면 반나절은 더 걸리는데, 네가 책임질 거야?”

 

 

 

그 표정만큼이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침한 말투에, 승철의 등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앉은 동기들은 역시나 웃음을 삼키느라 갖은 난리 굿을 하느라 바빴고, 윤정한은 최승철의 뒷말 따위 듣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매몰차게 돌렸으며, 최승철은 그 자리에 선 채 그렇게 생각했다. , 좆됐다. 그 와중에도 어깨 너머로 곁눈질한 윤정한은 여전히 화면 속 바다를 누비는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홀드시키고 바닥에 놓인 제 가방을 집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차게 식어 있는 승철을 곁눈질하고서 인상을 조금 찌푸린 채 거기 서서 뭐 해?” 하고 물은 것은 어찌 보면 희망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아니, 그…… 우리 조별과제 공고 떴어.”

근데?”

그니까, 너랑 나랑 같은 조라고……. 그거 말하려고 했었는데,”

그래? 카톡 방 열면 답 할게, 앞으로 거기서 얘기해.”

아니, , 그건 당연한 건데, 그게 아니라—“

할 말 다 했지? 나 간다.”

 

 

 

하지만 그것이 희망이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한은 빠르게 제 의사를 전달하고서 승철과 나머지를 지나 과방을 벗어났다. 철제 문 닫히는 소리가 육중하게 울려 퍼지기 무섭게 둘러앉은 동기들은 참았던 웃음을 뱉어내느라 거의 울고 있었고, 승철은 정말로 이게 뭐지 싶어 멍하니 정한이 앉았던 자리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쯤 되니 그 때 그 동기 놈이 이런 기분이었나 싶기도 해서 승철은 되도 않는 연민의 심리까지 갖고 있었으나, 등을 돌려 이미 반쯤 오열하는 동기들을 바라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심각한 수치심을 느꼈다. 이대로 땅이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 발 한 발을 떼는 동안 동기들은 손등으로 촉촉해진 눈가를 훔치며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 아…… 존나 웃기네, 그래도 너는 저 새끼보단 말 더 많이 섞은 거 아니냐?”

그니까, 너 이 새끼 성공했다?”

, 최승철 윤정한이랑 말 섞었으니까 기념주 안 마시냐?”

저 새끼 지갑 훔치자. 아 존나 웃었네. 이번 달 중에 제일 웃겼다.”

근데 난 최승철 반응도 웃긴데 윤정한이 오졌다고 본다. 솔직히 스물 세 살 먹고 누가 저렇게 말하냐?”

 

 

 

제가 얼만큼 가까이 왔는지도 모르고 저들끼리 웃기 바쁜 동기들의 말을 가만히 선 채로 곱씹으면서, 승철은 무의식 중에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고 머리칼이 흩날리도록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과방을 뛰쳐나가든가 바닥에 머리를 박든가 혀라도 깨물든가 셋 중 하나는 하고 싶었다. 최소 2년은 더 볼 동기들 앞에서 쪽 판 건 그거대로 미치겠는 거였고, 무엇보다 동기 녀석의 말을 인용하자면스물 세 살 먹고 저렇게 말하는 윤정한이 제게 망신을 주는 와중에도 극도로 귀여워서 그거대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거 뭔 기분이 이 따위야. 얼굴을 잔뜩 구긴 승철이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기합 비슷한 것을 내지르자, 그때까지도 그가 가까이 있는 줄 몰랐던 동기들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몸을 뒤로 빼며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야, 최승철 왜 저래? 미쳤대?”

몰라, 존나 쪽팔린갑지.”

 

아 씨발! 다 싸물어, 이 도움 안 되는 새끼들아!”

 

 

 

최승철, 결국 폭주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내뱉고 가방도 챙기지 못한 채 과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쿵 소리를 내며 닫히는 철문 너머로 얼 빠진 듯한 동기들의 헛웃음이 들려온 것도 같았으나 그런 걸 신경 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과거 제 동기를 비웃었던 복도 끝 자판기 앞으로 달려가서, 또 한 번 옷으로 바닥 청소를 하며 실성한 듯 웃다가, 다시금 절망했다. 나 이제 쟤들은 둘째 치고 윤정한 얼굴은 어떻게 봐……. 고장 나 켜지지 않는 형광등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승철의 눈가가 약간, 아주 약간 촉촉한 것도 같았다.

 

휘몰아치던 감정이 조금 진정된 후에 주머니를 뒤져 찾아낸 잔돈으로 캔커피를 하나 뽑은 그는, 그래도 돈이 있어서 다행이다—,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과방으로 돌아왔다가, 텅 빈 내부에 제 가방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을 보고 낮게 욕지거리를 읊조렸다. 나 다음 필수전공인 거 왜 까먹었대……? 두꺼운 전공 책이 든 가방을 들쳐 메고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승철은 속으로 내질렀다.

 

 

 

시발, 나 오늘 왜 되는 일 없어!!

 

 

 

 

*

 

 

 

 

 

 

조별과제를 시작한 후로 3일이 지났다. 생각 외로 승철이 조장인 6조의 과제 상황은 굴곡 없이 평탄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승철은 사실상 하는 일이 없었다. 최승철 이십삼 세 인생 들어서 온갖 수모를 다 겪은 3일 전 저녁에 단체 카톡방을 열었을 때, 씻고 온 사이에 역할 배분이 끝난 걸 보고서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 보겠다고 제안했던 그는, [절대 안 돼] 라고 1초 만에 도착한 답장의 주인공이 윤정한인 것을 확인하고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가 한 일이라고는 자료 조사 때문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후배들을 불러다가 밥과 술을 사준 것, 과방에서 틈나는 대로 노트북을 붙잡고 프레젠테이션을 만드는 윤정한에게 커피며 각종 음료수를 사다 나른 것이 전부였다. 승철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도 않고, 괜히 무임승차하는 기분이 들어 정한을 마주칠 때마다 저도 프레젠테이션을 함께 만들겠다는 의사를 대놓고 비추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정한은 딱 잘라 거절하고서 그를 지나쳤다. 또 무시당한 건가, 중얼거리는 그에게 옆에 서 있던 동기는 어깨를 두드려 주며 그렇게 대꾸했다.

 

 

 

네 새끼 컴맹인 거 쟤도 모를 일 없지 않겠냐. 보노보노나 안 넣으면 다행이지, 그냥 닥치고 돈이나 써.

 

 

 

순간 발끈해 치켜 올라갔던 주먹은 말 없이 끄덕여지는 고개와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동기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이 사실이었다. 전자기기라고는 휴대폰밖에 사용할 줄 몰랐던 최승철이 1학년 때 발표 과제를 거하게 말아먹은 것을 같은 과라면 모를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날이면 날마다 지갑을 몇 번이고 열었다. 사다 나르는 음료수를 말 없이 받아 준 정한이 이제는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오늘, 과방 한 구석윤정한의 지정석에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앉은 승철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옆에 선 정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USB를 꽂는 손이 떨리는 것처럼 보여서, 살짝 웃었던 것도 같았다. 승철은 USB를 조심스레 연결 포트에 밀어 넣고, 감전이라도 되는 마냥 손을 급하게 떼고 후하후하 심호흡을 해댔다. 생 지랄이야, 지랄. 멀리서 외쳐 대는 동기의 조롱 섞인 목소리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이유라면, 정한이 3일 간 승철이 사다 준 커피와 음료 따위를 받아 마시면서 제작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제 노트북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심장께를 붙잡고 호흡을 느리고 길게 뱉는 승철을 또한 내려다보면서, 정한은 웃는 듯 마는 듯 알 길 없는 표정을 하고 마우스에 손을 얹어 느리게 커서를 움직였다.

 

 

 

“폴더가 빨리 안 뜨네……. 이거 폴더 뜨면 그냥 끌어다가 너 바탕화면에 옮기고 USB 빼서 나한테 주면 돼. 그 정도는 하지?

“어우, 그 정도는 당연히 하지.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멍청이 맞는 거 같은데…….

“아, 아니거든? 너도 나 놀리냐?

“아님 말구. 미안.

 

 

 

, 또 당했다. 윤정한 특유의 화법에 다시금 넋을 놓고 앉았던 승철은 —제 표정이 웃긴 게 분명했다조금 웃는 것도 같은 정한을 올려다보다가 그의 손가락이 화면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거기로 시선을 옮겼다. 띠링, 단조로운 알림과 함께 노트북 귀퉁이에 USB 실행 선택 창이 뜬 것이었다. 뭐 누르면 되지? 순식간에 당황스러워진 승철이 눈동자만 굴리며 허공에서 손을 휘젓고 있을 때, 정한은 그보다 빠르게 마우스를 잡아 ‘폴더를 열어 파일 보기’를 클릭했다. 그러고서 승철이 하는 짓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눈이 마주쳤고, 정한은 결국 못 이기고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아, 너 진짜 바보 같아.

“……기분 탓일 걸?

“컴퓨터로 아무것도 못 하면서 노트북은 사양 좋은 걸로 산 것도 신기해.

“아, 아까부터 자꾸 나 놀리냐고.

“안 놀리는데? 사실이잖아. , 폴더 떴다.

 

 

 

한 번은 이겨볼라 치면 금세 새침하게 표정을 바꾸는 정한에 승철이 작게 한숨을 내뱉는데, 때마침 화면 위로 떠오른 폴더를 커서 끝이 가리켰다. 줄곤 마우스를 붙잡고 있던 정한은 제 손을 떼고 승철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후하후하, 다시금 심장께에 손을 둔 채 심호흡을 내뱉던 승철은 너무나도 어색하게 제 마우스를 붙잡고 조심스레 커서를 움직였다. 한 발자국 옆에 선 정한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화면을 들여다보고 조종이라도 하는 것마냥 가만가만히 내뱉었다.

 

 

 

“이제 그거 문서 꾹 눌러서, , 바탕화면에 놓고 마우스에서 손 떼.

“……이거 꾹 누르라고?

“어, 두 번 말고 한 번만 클릭해서 폴더 밖으로 끌고 가.

“……이렇게?

“……”

“야, 제발 맞다고 해 줘…….

“어, 그거 하고 이제 손 떼.

 

 

 

마우스를 쥔 오른손을 벌벌 떨면서도 생각보다 시키는 대로 잘 해낸잘 해냈다고도 볼 수 없을 만큼 쉬운 작업일 테지만승철은 마우스에서 급하게 손을 떼고 상체를 뒤로 빼며 이동 진행 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막대 바에 색이 채워지며 순조롭게 파일이 이동되고 있는 것을 함께 바라보며, 정한은 특유의 새침한 말투로 “잘 했네.” 하고 던지듯 내뱉었다. 여전히 긴장을 놓지 못하고 화면을 바라보던 승철은 순간 노트북 화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띠링띠링 알림음을 울리다가 이내 저 알아서 종료되는 것 또한 멀거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그것을 함께 보고 서 있던 정한은 순간 당황한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이내 넋이 반쯤 나간 것처럼도 보이는 승철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 너 노트북 충전기 있어?

“……어, ?

“충전기 있냐구! 아 씨, 왜 충전을 안 하고 다니는 거야!

“아니, , 잠깐만, 기다려 봐봐.

 

 

 

이동 중이던 파일이 통째로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는 정한을 따라 저도 맘이 급해진 승철은 제 가방을 마구잡이로 뒤적여 겨우 노트북 충전기를 찾아냈다. 그것을 들고서 눈만 굴려 콘센트를 찾던 승철이 답답한 모양인지, 정한은 그의 손에 들려있던 충전기를 반쯤 뺏어 들어 제일 가까운 콘센트에 꽂고 노트북 전원을 켰다. 전력이 공급되자 노트북은 언제 제 맘대로 꺼졌냐는 듯 평소대로 부팅되었고, 마우스를 쥔 채 커서가 뜰 때까지 이리저리 그것을 움직이던 정한은 완전히 부팅된 이후 바탕화면 그 어디에서도 이동된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찾을 수 없어서 입술을 꾹 다물고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슬쩍 돌아본 승철은 이미 완전히 넋이 나가 마우스를 어색하게 쥐고 커서를 움직여 바탕화면 위를 마구 휘저었다. 할 말이 없어 입술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있는데, 뒤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던 정한이 승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서 야, 하고 부르는데 처음으로 위압감 비슷한 걸 느낀 승철이 몸을 반쯤 돌려 그를 마주하기 무섭게 정한의 두 손이 승철의 어깨를 잡아 그를 짤짤 흔들어 댔다.

 

 

 

“야, 최승철! 너 내가 3일 동안 맨날 과방에서 이거 만든 거 몰라서 이래?

“으억, 아니, 정한아, 잠깐만, 이거 놓고

“이제 파일 다 날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되는데 네가 책임질 거야 뭐야!

“아니, , 책임은 지는데,

“아 씨, 책임 지든가 말든가 난 모르겠으니까 너 알아서 해!

 

 

 

승철을 정말로 짤짤 흔들면서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톡톡 쏘아 붙인 정한은 그를 집어 던지기라도 하듯 놓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제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승철은 넋이 나갈 대로 나가서 이미 화면 보호기를 띄워내는 제 노트북 한 번, 전공 교재며 보조 배터리 따위를 주섬주섬 챙겨 제 가방에 밀어 넣는 윤정한을 한 번 바라보다가 이내 제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개를 양 무릎 사이로 처박았다. 나 새끼 왜 살아, 왜 살아!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머리채를 잡아 뜯는 동안, 짐을 다 챙긴 정한은 입술을 앙 다문 채 가방을 들쳐 메고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승철의 곁을 스쳐 과방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동기들도 저마다 과제를 이유로 과방을 빠져나갔고, 내부에 덩그러니 남은 승철은 휴대폰이 카톡 알림음을 울려 댔음에도 차마 그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덮어진 노트북 위에 제 머리를 처박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최승철을 내버려 두고 나온 윤정한은, 사실 오갈 데 없어 복도 끝 자판기로 향했다가, 주머니에 늘 있던 잔돈도 하필 오늘따라 보이지가 않아서 애꿎은 자판기를 운동화 앞코로 툭 건드리며 화풀이를 하고서 자리를 떴다. 무의식 중에 휴대폰 홀드를 풀었다가 승철과 한 카톡 대화창이 떠 있어서, 정한은 눈가를 찌푸리며 다시 휴대폰을 홀드시키고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다. ,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되는 일이 없어, 진짜. 부루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복도 벽에 부딪혀 울렸다가, 금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

 

 

 

 

 

그 후 또 다시 3일이 지나는 동안, 승철은 주기적으로 정한에게 갠톡을 보내 용서를 구했다. 물론 정한은 그것을 읽지 않고, 그저 알림이 울리면 울리는 대로 내버려 뒀다. 일부러 사람 미치게 만들려는 속셈은 아니었고, 다만 컴퓨터를 못 다뤄도 너무 못 다루는 승철이 괘씸했을 뿐이다. 그렇게 냅두고 가도 내일쯤 되면 다시 커피 같은 걸 사 들고 제게 와서 치근덕댈 줄 알았건만, 요 사이 일부러 과방에 들러도 승철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더랬다. 갠톡을 씹느라 단체 카톡방마저 확인을 못 하고 있었던 윤정한은 내심 그의 행방이 궁금하면서도 속으로 미쳤나 봐, 따위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원래 하던 대로 얼굴에 철판 깔고 치근덕대면서 웃는 얼굴로 사과나 하면 제 노트북에 틀만 잡아놓은 게 있으니 내용만 입력하면 된다하고 언질이라도 줄 텐데. 아예 등교를 안 하는 것 같아 정한은 여러모로 기분이 복잡했다. 제가 괜히 심하게 굴었나 싶기도 하고, 그랬다가도 고개를 내젓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낮이 되어서야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단체 카톡방에 들어가 버리고 만 윤정한이었다. , 읽을 생각 없었는데. 중얼거리며 입술을 꾹 물었다 놓고서 말과는 다르게 메시지 하나 하나를 꼼꼼히 읽는 게 저 스스로도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띄는 메시지는 이틀 전쯤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김민규

정한선배 어디계세요ㅜㅜ    오후 11:28

김민규

저지금 도서관인데 승철선배 프레젠테이션 만드신다는데여     오후 11:28

김민규 

제가좀도와드리고 기숙사 들어가시라고 햇는데 이거 다만들고 가신다고 하셔서요ㅠㅠㅠㅠ     오후 11:29

부승관

선배 어제도 밤새신거 같던데ㅜㅜ 무슨 일 잇엇어요???    오후 11:31

김민규

그거 나도 궁금해서 물어봣는데 선배 그냥 한숨쉬시고 그래서 그냥 더 안물어봣어..    오후 11:31

……]

 

 

 

그 아래로도 비슷한 내용으로 울음바다를 만들어 놓은 후배들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가, 맨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서 정한의 두 엄지가 액정 위로 놓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른 시각에 보내진 메시지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승철이었다.

 

 

 

[최승철

드디어 다만드럿ㅅ다     오전 3:47]

 

 

“……진짜 바보 아냐, 최승철.

 

 

 

습관처럼 입술을 꾹 물었다 놓은 정한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빠르게 손을 움직여 그 아래 메시지를 하나 보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지갑을 챙겨 들었다. 제가 책임 지라고 했다고 정말로 3일 밤을 새며 지지리도 못 하는 컴퓨터를 다룬 최승철이 답답하기도 하고, 왠지 대견한 것도 같고, 여하튼 이상하리만치 복잡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 지금 과방갈게] 하고 보낸 메시지를 읽었는지 카톡 알림음이 주구장창 울려 댔지만, 정한은 그것을 굳이 확인하며 느긋하게 걷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아, 더워, 최승철 있어?

“어……, 정한이 진짜 왔네.

 

 

 

평소 같으면 기숙사에서 빨리 걸어도 15분 내외로 도착할까 말까 한 과방에 10분 컷으로 도착한 정한은 제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벌컥 문을 열고 승철을 찾았다. 생각보다 꽤 넓은 과방을 쭉 둘러보던 그의 시선 끝에, 항상 제가 앉던 구석 자리에 책상과 반쯤 합체가 되어 마우스를 휘두르던 승철이 걸렸다. 다 잠긴 그의 목소리가 넓은 과방 내부로 울려 퍼졌다. 윤정한은 웃음인지 실소인지 모를 것을 앙 다물었던 입술 새로 흘려내며, 저 보라는 듯 노트북을 반대로 돌리고 마우스를 움직여 커서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승철을 바라보고서 이내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픽 웃어 버렸다.

 

 

 

“아…… 졸려 뒤질 거 같은데 어쨌든 다 만들었다.

“……야, 너 진짜,

“내가 어? 그래도 후배들이 많이 도와 줘서…… 볼 만 하게는 만들었는데, 그래도 맘에 안 들면 어쩔 수 없는 거긴 하고……. 암튼 그 때 좀 미안해서 밤 좀 새 봤다…….

“내가 그거 그냥 책임 지라고만 했지, 만들라고는 안 했는데,

“책임 지는 게 만드는 거지 뭐. 어차피 잘못 내가 한 거 맞는데

 

“아……. 너 지금 진짜 웃겨. 진짜로.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어기적어기적 제게 걸어와 선 승철을 똑바로 마주하며, 정한은 그 피곤과 잠에 찌든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귀엽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눈이 반쯤 풀린 채 정한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고 섰던 승철은 잠시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잘 지어지지도 않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평소 하듯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 밀었다.

 

 

 

“와, 윤정한 웃었네. 웃었다. 이거 화 풀린 거 맞지?

“아, 좀 저리 가, 너 진짜 너무 웃겨

“내가 3일 동안 갠톡 보냈는데 계속 안 읽어줘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 근데 화 풀렸네, 아 신기해. 나 이제 몸 그만 사려도 되는 거 맞지? 그치?

 

 

 

정말로 그 동안 많이 불안해 했었는지, 승철은 정한이 손을 뻗어 어깨를 밀고 얼굴을 잡아 돌리는데도 아랑곳 않고 그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며 화가 풀렸음을 확인 받고자 했다. 잔뜩 웃은 터라 급격하게 땅겨 오는 두 뺨을 양 손으로 감싸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정한은 승철의 어깨를 잡아 저를 등지도록 돌려 놓고서, 어색하게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렇게 대꾸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승철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질 만큼, 그 말투는 이전처럼 새침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 그거 만들어준 거는 고마운데, 나는 너한테 그냥 책임 지라구만 했지 만들라고는 한 적 없다?

“어어, 알았어, 알았어.

“그리구 내가 화 났다고 한 적도 없다, ……뭐.

 

 

 

정한은 그렇게 말꼬리를 얼버무리고 제 머리를 헝클이며 돌아서다가, 여전히 저와 출입문을 등지고 선 승철에게로 다가가 그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근데 사실 나 할 말 있어.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얘기를 하는 게 저도 모르게 어려워서, 정한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가 겨우 말을 꺼내 놓고 승철을 먼저 과방 밖으로 떠밀었다. 복도 끝, 불이 고장 난 자판기 아래로 향하면서 정한은 승철보다 두세 걸음 늦게 걸으며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고 또 빗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 여전히 알 수 없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할 말이 뭔데? 해 봐, 여기 진짜 덥다.

 

 

 

자판기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음료를 고르는 정한의 뒤로, 어쩌면 놀리는 듯한 승철의 말들이 날아왔다. 정한은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등 뒤로 고개를 홱 돌리고서, 나 지금 음료수 고르고 있잖아! 하고 톡 쏘아 붙이고서는, 고심 끝에 캔 커피 하나와 탄산음료 하나를 뽑아 들었다. 차가운 표면에 몽글몽글 맺힌 물방울이 손바닥으로 스미는 것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가, 윤정한은 제 손에 들린 음료수를 승철 쪽으로 모두 내밀며 그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한 채 입을 열었다.

 

 

 

“이거 먹고 싶은 거 골라서 먹어.

“아, 나 주는 거야? 뭐 먹지.

“그리구 나 말 안 끝났어. ……사실 내가 그 때 너무 막, , 너 잡고 짤짤 흔들고 그래서 괜히 그런 거 같아서 이거 주는 거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 안 했음 좋겠어. 그리구, , 나 솔직히 기분 좀 이상해서 잘 모르겠긴 한데, 그래도 너 정도면 나 귀찮게 안 할 것 같아서 말 하는 거거든?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니까, 너 이제 나 옆에 와서 건드려도 되구, 나랑 같이 다녀도 되구……. 암튼 그렇다고.

 

 

“아, 그래서 우리 썸 타자고?

 

 

 

, ! 최승철 진짜 미쳤나 봐! 괜히 말했어!

잘 정리되지도, 듣기 좋게 여과되지도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놓고서 고개를 돌린 정한을 대놓고 놀리는 듯 그렇게 되물은 승철에게, 정한은 캔커피를 든 손을 높이 치켜 들었다가 입술을 앙 다물며 그를 등지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 팔이 높이 올라갔을 때 캔커피를 뺏어 든 승철은 등 뒤에다 대고 잘 먹을게—, 특유의 장난기 어린 말투로 중얼거리며 한 모금을 쭉 들이켰다. 아직 찬 기가 남은 탄산음료를 끌어 올려 조금 붉어진 듯한 제 뺨에 가만가만 대고서, 정한은 분명 날이 더워서 뺨이 뜨끈한 거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두 사람 사이만 봄인 듯 아닌 듯,


스물 세 살 최승철과 윤정한의 청춘(靑春)이 흘러가고 있었다.

 

 

 

깜빡, 깜빡, 깜빡, 깜빡. 일정한 속도로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흐린 시야 위로 흰 불빛이 점멸하듯 시야가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간헐적으로 모래가 잔뜩 섞인 바람이 불어 닥친다. 나는, 그 모래먼지가 속눈썹에 내려앉아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 이후에야 판단할 수 있었다. 첫째, 우주복이 파손되어 헬멧 유리면이 깨졌다. 둘째, 그러므로 이 무거운 기계장치는 내게 산소를 공급해 줄 수 없다. 셋째,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다.

잠깐, 죽지 않았다고? 그런 의문이 듦과 동시에 굳게 닫혀있던 시야가 순식간에 환하게 열렸다. 여과되지 않은 태양빛 같은 것이 쏟아져 들어오는 탓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눈이 시려 초점을 잡는 데도 애를 먹었다. 겨우 선명해진 눈앞에는 헬멧 유리면의 균열이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으며, 그 뒤로 약간 기울어진 프레임 안에 어두운 하늘과 황토색 땅이 반반씩 들어차 있었다. 느리게 숨을 집어삼켜 본다. 그리웠던 공기가 폐부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한 손을 움직여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등 뒤로 불쾌한 기계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내려다보이는 기계장치는 전원이 나간 채 내 몸을 무겁게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두 번째 난파였다.

또 다시 이름 모를 소행성에 버려진 것이다. 지구에…… 갈 수는 있을까. 시선을 떨어뜨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그 끝에 누군가의 발걸음이 걸린다. 아마 이 소행성의 주인이겠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허벅지를 다 덮는 길이의 짙은 남색 제복, 안에 받쳐 입은 교복흰 셔츠와 남색 니트 조끼, 남색과 금색의 배색 넥타이—,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주황과 노랑을 반씩 섞은 듯 묘한 색의 머리칼, 그리고 제복 깃에 달린 금색 나비 모양의 엠블럼.

마지막으로 짙은 밤하늘을 담은 두 눈동자. 나는 그 이방인의 시선이 점점 나에게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숨을 집어삼켰다. 찰나의 정적, 그리고 급하게 집어삼킨 내 숨이 입술 새로 흘러나올 때쯤, 그는 내 눈동자를 집요하게 바라보고서 입 꼬리를 끌어 당긴다.

 

 

그런, 극도로 해사한 웃음. 그 뒤로 별빛이 흐른다.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은그런 미소가 내게 흐르고 있었다.

 

 

 

 

 

이지훈 X 윤정한

 

 

난파 2 – 웃는 별

[우정전력 :: ‘난파’]

 

 

 

 

w. 허니콤보

 

 

 

 

0. 난파 1일차

 

 

 

눈동자가 정말 예뻐.”

…….”

그리고 당신의 눈에서는 바다 냄새가 나.”

 

 

……바다? 이방인의 입에서 환상처럼 터져 나온 말에 의아해졌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그의 흰 손가락이 내게로 뻗어져 왔다.

 

 

하지만 여기에는 바다 같은 건 없어.”

…….”

그래도 환영해. 지구에서 온 손님은 처음이니까.”

 

 

그는 빛이 나는 듯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망설임 없이 헬멧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난 그저 고개를 그 자리에 둔 채 눈만 굴렸다. 분명히 우스웠을 것이다. 그는 아이처럼 키득거리며 내 뺨 어딘가를 쿡 찌르듯 가리켰다. 짤막한 고통에 눈가가 찌푸려진다. 상처가 난 건가? 다른 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며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다쳤어.”

……,”

그리고 얼굴이 반짝반짝해.”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이며 손을 거둔 그의 손가락 끝에는 자잘한 유리 조각이 붙어 있었다. 헬멧이 깨질 때 안쪽으로 파편이 튄 것일 테지. 묵직한 기계장치에 둘러싸인 양 손을 들어올려 헬멧을 벗어 던졌다. 바닥을 구르는 기계장치 쪽을 바라보며 이방인은 다시금 키득거렸다. 자꾸 웃지 마. 나는 난파된 이후 처음으로 온전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해제장치가 망가지지는 않아 버튼을 누르는 대로 쓸모 없어진 기계장치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면서 별 생각 없이 등 뒤로 고개를 돌리는데, 반쪽이 완전히 망가진 듯한 우주선이 바닥에 머리를 박고 내던져져 있었다. 순간 머리가 아찔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저걸 수리해 지구로 가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지난 난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규모였기에 시간을 어림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일단은 내부 상태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 나는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고서 남은 우주복을 모두 해제하고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측면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힘을 줘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모서리가 찌그러진 문이 뜯어지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등 뒤로, 작은 뒤척임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안심할 수 있었던 이유라면, 대충 둘러본 내부는 거의 파손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정해 놓지 않았던 집기들이 떨어져 난장판이 되었으나, 그런 것쯤이야 치우면 그만이었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내부를 빙 둘러 걷는 중에, 문득 한 귀퉁이에 붙은 전신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우주복을 입기 위해 최소한의 이너웨어만 입었던 것을 이제야 인지한 것이다. 달리 걸칠 옷가지가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지구에서 입던 흰색 가운을 가져다 걸쳤다. 단추를 여미며 거울 앞에 서는데 왼쪽 가슴께에 달린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견습연구원 윤정한. 명찰을 떼어버릴까 하다가 그냥 그대로 뒀다. 적어도 이 행성의 아이 같은 주인은 견습, 이란 글자를 신경 쓸 것 같지 않았다. 해서 나는 거기에서 손을 거두고 거울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정말로 그가 말했던 것처럼 양 뺨에 유리조각이 잔뜩 붙은 것을 확인하고서 굴러다니는 생수 병을 집어 들었다. 아끼지 않는 마지막 물이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뚜껑을 열고 그것을 그대로 이마 위에서 뒤집었다. 쏟아지는 물이 유리조각을 쓸어 내려갔으나, 생각보다 크게 난 상처를 건드리는 탓에 눈가를 찌푸렸다. 옷 소매를 당겨 물기를 닦아낸 후에, 나는 대충이나마 말끔해진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까만 눈동자로 시선을 옮겼다.

 

어린 이방인은 내 눈에서 바다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나지막이 바다, 하고 중얼거려 본다. 어쩌면……, 이 소행성에 이 정도로 불시착하게 된 것도 가 불어 준 바다의 기운 때문이 아닐까. 조각난 기억들이 파도 치듯 밀려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난파, 바다의 별, 기억의 바다와 마지막의 바다,

 

 

그리고 그 별의 주인, 그레이프프루트 색 머리칼을 가진 인어.

 

 

— 어차피 난 널 그리워할 수밖에 없어. 시간이 흐르면 내가 널 더 사랑할 테고. 그럼 난 조용히 바다가 되었다가 시간이 더 지나서 네가 지구에 도착할 때쯤이면 널 잊고 다시 이 모습으로 새로운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수많은 인연들이 스쳐가는 동안 단 하나의 인연도 간직할 수 없다며 내게 이름조차 물어오지 않았던 그.

 

 

당신, 진짜……, 진짜 잔인해.

맞아, 원래 인어는 다 잔인하지. 하지만 널 내 옆에 둘 수는 없어. 넌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지.

 

 

아직 내가 지구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도 내가 밀어 넣듯이 가르쳐 준 이름을 잊지는 않았을 텐데. 끝까지 이름 한 번 불러준 적이 없었다. 사실 그건,

 

 

— 날 잊어도 좋아. 하지만, 날 기억해 준다면…….

 

홍지수, 라고…… 그렇게 기억해 줘.

 

 

……홍지수.”

 

 

나도 마찬가지인걸. 나지막이 뱉어진 그의 이름자가 묘한 이질감을 띤 채 입 속에서 굴러다녔다. 그제야 내 까만 눈동자에 머무르던 시선이 측면 출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또 다른 이방인의 웃는 얼굴. 설마, 날 기다리기라도 했던 거라면?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어 조금 당혹스런 표정을 지은 것도 같이 입술을 반쯤 비틀어 깨물고 출입구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을 때, 예상 외로 어린 이방인은 쭈그려 앉은 채 내가 남기고 간 헬멧을 손끝으로 건드리듯 굴리고 있었다. 긴 제복 밑단이 바닥에 죄 끌리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허탈해져 출입구 문지방에 선 채 헛웃음을 뱉으려니, 그제야 그게 고개를 들어올려 나를 바라다본다. 나는 그 쪽으로 다가가다가 그의 입술 끝에 걸린 손가락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더 다가온 쪽은 그였다. 손 다쳤어? 반쯤 그랬을 것으로 치부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상처가 꽤 길고 깊다. 왜 그랬느냐고 물으려는데 그의 담담한 음성이 먼저 울렸다.

 

 

당신과 같은 방법으로 같은 상처가 났어.”

 

 

나는 그런 목소리를 내는 그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단지 상처가 난 후에 그렇게 생각했다고 전달한 것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일부러 나와 같은 상처를 내었거나. 어느 쪽이 되었건 그는 다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유달리 까만 눈동자는 제 키보다 높은 쪽을 응시하며 느리게 굴러갔다. 그 시선에서 결심 같은 것이 선다. 이번에는 정말로 왜 그랬느냐 묻기 위해 첫 글자를 입에 담기까지 했는데, 먼저 목소리를 낸 쪽은 이번에도 그였다.

 

 

있지, 내 장미는 줄기가 꺾여 흔들리는 동안 내게 화를 냈었어. 내가 너무 멀쩡하게 서 있었거든.”

……뭐?”

이렇게 하면 당신은 내게 화내지 않을 것 같았어. 당신과 같아진다는 건 이해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인간들은……, 이렇지 않아?

 

그는 좀 전까지 아주 쉽고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태연한 말투였으면서, 내게 동의를 바라는 듯 되물어 올 때에는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목소리를 죽이는 것이 내 눈치를 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낯선 이방인이다. 마냥 아이 같은 것도 아니고, 애어른 마냥 정신이 먼저 큰 것도 아닌, 이상한 아이. 나는 날 이해하기 위해 손가락을 다쳤다는 그에게 달리 대답해줄 말을 찾지 못해서, 조금 망설이다가 팔을 뻗어 그의 손목을 쥐었다. 우주선 쪽으로 잡아 끌다시피 데리고 들어오는 동안 그는 조용히 내 빠른 걸음에 맞추듯 종종걸음을 걸었다. 나는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내부를 둘러보다가 반쯤 기울어진 간이의자를 발견했으나, 저걸 꺼내오는 게 더 큰일일 것 같아 그를 그냥 침대 끄트머리에 앉혀 뒀다. 두 손을 허벅지께에 얌전히 모으고 앉은 그를 뒤로 하고 서랍을 뒤적여 지구에서 챙겨 온 연고와 반창고를 찾아냈다. 두 번째 난파로도 모자라,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이방인의 상처를 치료해주다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터졌지만, 그는 그런 내 동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약간의 호기심을 담은 얼굴을 하고서 가만히 있었다. 그의 옆에 걸터앉아 둘 사이에 반창고를 두고 그의 손을 덮은 소매 끝을 끌어당겼다.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그가 다친 손가락을 내밀었다. 과하다 싶을 만큼 짜낸 연고를 펴 바를 때 그는 아프다거나 간지럽다는 등의 얘기를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다만 눈가를 미세하게 찌푸렸을 뿐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가 약으로 번들거릴 때쯤, 시선을 내리깐 그가 낯설도록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기, 내가 틀린 거야?”

 

 

반창고를 집으려던 손이 잠깐 동안 공중에 멈춰있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뭐가? 하고 되물으며 반창고 껍질을 깠다. 상처가 완전히 가려졌을 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사실, 뒷말을 듣기도 전부터 해 줘야 할 대답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해한다는 건 같은 감정을 가지는 게 아닌 거야?”

음…… 아니?”

그럼 같은 감정을 가진다는 건 이런 게 아닌 거야?”

…그,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야, 같은 감정을 가지려고 해서 꼭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냥, 뭐랄까……. 그런 상황이라고 상상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는 거잖아.”

 

 

내 딴에는 공들여 한다고 한 대답이었으나,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깔끔하게 달라붙은 반창고 위를 문질거리던 그는,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시선을 끌어당겼다. 공중에서 두 개의 시선이 부딪친다.

 

 

…그치만 난 당신과 같아지고 싶어.”

 

 

그는 내 얼굴 어딘가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듯 하더니, 이내 팔을 뻗어 내 손에 들린 연고를 낚아 채 갔다. 줄곧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던 게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성한 손가락에 연고를 짜 내 뺨에 내려앉은 상처 위로 그것을 펴 발랐다. 잠깐 사이에 잊고 있었던 상처였는데, 조심스레 닿아오는 그의 손끝이 자꾸만 내 뺨을 간질거리고 지나갔다. 일말의 아픔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얼마 동안 상처 주위를 손끝으로 문질거리던 그는 이제야 제 성에 찰 만큼 약이 발라졌는지 손을 거두고 생긋 웃어 보였다. 이게 네가 원하던 거였어? 하고 묻자 그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덧붙이는 음성은 다시 좀 전처럼 담담해져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건 아픈 일이 아니니까.”

…….”

어쩌면 내 장미는 내가 자기를 이해하려고 할까 봐 화를 냈던 걸지도 몰라.”

…….”

이게 인간의 방식인 거 맞지?”

 

 

그러고서 이방인은 입 꼬리를 끌어당겨 웃는다. 오늘로써 두 번째로 마주하는 그의 극도로 해사한 웃음을 마주하고서, 나는 불가항력에 이끌리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웃어 보았다. 문득 그는 무언가 잊었던 걸 떠올리기라도 한 듯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그래서 말인데, 하고 운을 띄웠다. 장미를 피워줄 수 있어? 나는 그가 줄곧 장미 얘기를 했던 것을 상기시켜 보고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리기에 이르렀다가, 다시금 닿아 오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못해 우주선 내부에 식물 씨앗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으로 상념들을 덮어 버렸다. 지구에서 출발할 때를 더듬어 본 결과 꽃으로 추정되는 식물 씨앗 몇 개를 챙겨 넣었던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당장 그에게 주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게서 원하던 꽃씨를 건네 받은 그가 이 우주선을 등지고 떠나 버린다면, 난 정말 지구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나는 대답을 바라는 그의 눈을 마주하고서 내가 떠나는 날 그것을 선물하겠노라 일러 주었다. 그의 표정이 짧은 순간 경직되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끝낸 머릿속에서 다시금 가설의 가능성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치만 떠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야. 난 슬픈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렇게 약속해 줘.”

어떻게?”

내가 당신처럼 당신을 이해하는 날, 내게 장미를 피워 주겠다고.”

 

 

당신처럼 당신을 이해한다라……. 인간의 방식을 배우고 싶은 것일 테지, 나는 멋대로 해석하고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하라는 뜻에서였다. 이방인이 한층 더 밝아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우지야. 이름을 부르는 건 한 걸음 다가가는 거라고 했어. 당신도 다가올 거지?”

 

 

순서가 뒤바뀔 대로 뒤바뀌어서 이제야 이루어진 통성명이었다. 그의 혀 위를 구르고 공기 중으로 뱉어진 이름은 그를 닮아 자꾸만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애초에 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을 것도 아니었으나, 생각지도 않게 내 손이 먼저 뻗어져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번엔 좀 제대로 눈을 맞추고 입 꼬리를 끌어올린다. 맞잡은 그의 손에 붙은 반창고가 내 손등을 간질였다.

 

 

안녕, 나는 윤정한이야.”

 

 

맞잡은 손을 느리게 흔들면서, 나는 줄곧 세워왔던 가설에 마침표를 찍었다.

 

 

어리지만 어리지 않고,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실재하는 어린 왕자와의 요상한 첫만남이 기억 속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1. 난파 4일차

 

 

 

난파한 이후로 사흘이 지났다, 고 우지는 그렇게 말했다. 우주선 선수에서 바라본 하늘 위에 동쪽으로 지는 별을 세 번 봤으니 그런 거라고 설명도 해 주었다. 그 동안 나는 망가진 우주복에서 얻어진 기계 부품과 우주선 내부에 실려 있던 비상 공구함을 뒤져 찾아낸 자잘한 부품 따위를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는 일을 했다. 같은 시간 우지는 서쪽으로 별이 뜰 때 우주선으로 와서 동쪽으로 질 때 제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내가 특별히 주의를 줬다거나 부탁한 적 없었는데도 그는 청소를 도와 준다거나—어떤 날은 자기가 직접 청소를 하거나— 내가 버린 부품들을 관찰하며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말 없이 혼자 놀고는 했다. 어쩌면 나는 그런 그가 있었기에 좀 더 힘을 내어 우주선을 수리할 생각도 해 보고, 끼니를 챙긴다거나 잠을 자는 등의 일상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우지가 내 난파한 삶 깊숙이 파고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사흘 만에 첫 번째 과제를 끝낸 나는 오늘은 무조건 쉬겠다, 라는 일념 하나로 침대에 줄곧 누워만 있었다. 한참 전에 놀러 와 분류가 끝난 부품들을 정리해 준 우지는 날 보다 못해 그저께 제가 크레파스 씹듯이 먹었던 초콜릿을 용케 찾아와 내 입술 새에 디밀었다. 이름을 가르쳐 준 소용이 없이 그가 날 부르는 단어는 당신, 이 전부였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당신이 말한 휴식이 이런 거였어? 벌써 하루의 반이나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도 덜 쉬었다고 할 셈은 아니지?”

진정한 휴식은 하루 종일 누워서 자는 거야.”

, 안 돼. 그럼 이거라도 먹어. 그리고 안 일어나면 이거 맘대로 본다?”

 

 

, 정말로 하루 종일 누워만 있고 싶었는데. 나는 우지가 내 입에 물려주고 간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고 입 안에서 잘게 조각 내며 겨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는 간이테이블 근처에서 무언가를 품에 안은 채 팔랑팔랑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게 짐짓 비장하게 말해 온, 딴에는 협박의 수단쯤으로 작용한 것일 테지. 느린 움직임으로 침대 아래에 두 발을 디딘 채 앉아 있으려니까, 제복 밑단을 팔랑이며 다가와 내 옆에 앉은 우지가 품에 안았던 것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손때가 잔뜩 탄 푸른 빛의 표지, 최대한 단정한 글씨로 적힌 내 이름자. 그러니까, 이건 바다의 별에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내 사진 앨범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부들부들한 표지를 몇 번 쓸어보다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우지에게 물었다.

 

 

이거 어디서 찾았어? 내가 찾을 땐 그림자도 안 보였는데.”

며칠 전에 청소하다가 찾았는데? 역시 이 우주선은 당신보다 날 좋아하는 것 같아.”

……너 이게 뭔지는 알아?”

. 발견했을 때 뭐가 그 안에서 떨어져서 내가 끼워 뒀어. 전부 사진밖에 없던걸? 당신처럼 인간들은 기억해 두고 싶은 것들을 사진으로 남긴다고 들었는데, 맞아?”

 

 

반문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표지를 넘기자 그가 끼워둔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몇 장이 허벅지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등 뒤에 앨범을 두고 사진을 집어 들자 내심 궁금했는지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쭉 빼었다. 하나를 뒤집어 보니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릴 적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었다. 키 작은 벚나무 아래 그보다 더 작은 어린 날의 내가 서서 순진하게 웃고 있는 것이 새삼 새롭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우지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사진 위를 문질거렸다.

 

 

이 나무는 이름이 뭐야? 내 바오밥나무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이건 벚나무야. 봄이 되면 벚꽃이 피는데, 어…… 그러면 이거 같이 구경할래?”

그래, 난 좋아.”

 

 

벚꽃을 설명할 길이 없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등 뒤로 손을 뻗어 앨범을 집어 들었다. 괜히 혼자 있을 때는 다시 펴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차라리 누군가와 같이 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우지는 내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쥐고 있던 사진을 다리 위에 올려두고 앨범을 펼치자 묵은 종이 냄새가 공기 중으로 퍼졌다. 몇 장을 뒤적이자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 사이로 교복을 입고 선 내 사진이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 사진을 가리켰다.

 

 

나 이 꽃 알아. 당신이 보여주려던…… 벚꽃 맞지? 예전에 지구에서 본 적 있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신이 나서 그 때의 경험을 줄줄 늘어놓았다. 꽃잎을 머리에 얹은 채 여기로 돌아오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내 또래의 여자애와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러 다녔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랬느냐며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 동안 내 손은 빠르게 움직여 사진 속 내가 어른이 된 시점에 멈추어 있었다. 이야기를 끝낸 우지는 시간이 좀 더 흐른 내 얼굴도 제 손가락으로 문질거렸다. 스물, 처음으로 연구원이 된 날 찍은 사진이었다.

 

 

이건 지금이랑 같은 옷을 입고 있어. 여기 오기 전이야?”

, 이건 재작년 사진. 처음 연구원이 된 날 찍은 거야.”

연구원이라는 건 당신처럼 우주여행을 다니는 사람인 거야?”

전부 다 그렇지는 않아. 난 정말 예외고.”

 

 

맞아, 정말 예외지. 3년 차 견습연구원이 단독으로 우주에 가다니. 작게 한숨을 내쉰 것을 용케 들었는지 내 쪽으로 팔을 뻗은 우지가 종이 끝을 잡아 넘겼다. 바람이 불어 날린 것마냥 팔랑이는 종이 위에는 하늘 위를 수놓은 불꽃놀이 사진이 여러 장 붙어있었다. 불꽃놀이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건, 정말 예쁘다……. 별 같아, 진짜 예뻐.”

지구에서 이런 건 본 적 없어?”

, 한 번도. 전부 별은 아니지?”

, 이건 불꽃놀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반짝반짝한 걸 만들어서 하늘로 쏘아 올리는 거야. 그럼 하늘에서 그게 터지면서 이렇게 되는 거지.”

 

 

이해했으려나, 싶어 다시금 그를 바라다 본다. 여전히 두 눈을 빛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그 사진들은 정말 절묘한 타이밍에 예쁘게 찍힌 것들이었다. 벌써 반 년 전의 일이었던가. 나는 팡팡 터지는 불꽃 아래서 미소를 지은 과거의 나를 우지가 그랬던 것처럼 손끝으로 문질거렸다. 내 옆에서 그는 불꽃놀이, 하고 입속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날, 정말 행복했었는데. 추억에 젖어 무의식 중에 보고 싶다, 하고 중얼거리자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어왔다.

 

 

뭐가? 이거 보고 싶어?”

, 이 날 진짜 좋았는데 싶어서. 그리고 예쁘잖아. 반짝반짝하고.”

……여기는 지구가 아니라서 볼 수 없을 텐데.”

그냥 해본 말이야. 지구에 돌아가면 볼 수 있겠지.”

그치만 난 보여주고 싶은데. 반짝반짝한 거.”

 

 

우지는 조금 시무룩해져서 그렇게 웅얼거렸다. 괜한 얘길 했나 싶어 사진 앨범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벅지에 올려져 있던 사진들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무언가 계산을 하는 듯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혼잣말을 하는 그에게 난 진짜 괜찮아- 하고 넌지시 말하며 자세를 낮춰 사진을 주워 들었다. 혀 끝에 초콜릿 맛이 감돌고 있었다. 내려놓았던 초콜릿을 들어 한 입 더 베어 무는데, 문득 우지의 손이 다가와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해사한 미소가 한 걸음 다가와 있었다.

 

 

저기, 나 성공했어.”

……뭐를?”

당신이 불꽃놀이를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건 지구에서밖에 볼 수 없으니까, 다른 예쁜 걸 보여주려고.”

아……. 지금까지 그거 계산하고 있었던 거야?”

. 근데 후회하지 않을 거야. 지금 나가야 해, 지금.”

 

 

확신에 가득 찬 말투가 내 등을 떠밀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체 다른 예쁜 게 뭘까 싶어, 반신반의하는 느낌으로 우지가 잡아 당기는 대로 따라가 측면 출입구 문을 열었다. 계단을 밟고 내려와 그가 이끄는 방향으로우주선 선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순간 팡, 하는 소리가 소행성을 가득 울렸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하늘 위를 올려다 보았을 때,

 

넓고 짙은 하늘 위로 유성이 마구 스치고 지나가나 싶더니, 이내 빨갛게 물든 별이 팡 소릴 내며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사방으로 흘렀다. 곧 푸르게, 노랗게 물든 별들도 하나같이 제 몸을 조각 내어 하늘을 빛으로 채우고 있었다. 팡팡 하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때렸다. 옆에서 조금 소리가 작은 우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인간이야. 나도 이거 본 지 꽤 오래 됐단 말야.”

……와, 이거…… 이거 뭐야?”

별 무덤이야. 가끔 내 행성에서 볼 수 있는 건데, 사실 저 별들은 다 죽어가고 있는 거야. 그치만 내가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죽는 것들이야.”
…….”

당신이 지구의 불꽃놀이에 대해 가르쳐 줄 때, 저게 생각났어. 그래서 계산해보고 있었던 거야. 당신이 떠나기 전에 별 무덤을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마침 오늘 별 무덤이 여기를 지나친다고 해서 나왔는데, 딱 맞췄다. 그치?”

 

 

숨이 막히도록 터져 흐르는 빛에서 고개를 돌려 내 시선 약간 아래에 있는 우지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늘 그래왔듯 예쁘게 미소 지으며 날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다시금 하늘 위를 올려다본다. 동그란 모양으로 터져 흐르는 별빛 사이로 유성이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며 지나가고, 또 다른 별이 빠르게 점멸하며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나는 우주선 안에 사진기가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이 순간의 하늘을 두 눈으로 담아가고 싶었다. 살아오면서 본 그 어떤 불꽃놀이보다도, 어둔 하늘 위의 별 무덤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어느 순간에 우지가 내 손을 잡아온 사실도 난 알지 못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어……. 엄청.”

그렇다면 나도 마음에 들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걸 당신에게 보여 줬으니까.”

그렇구나……. 고마워, 그래 줘서.”

이제 당신 눈에서 별이 반짝이고 있어. 정말 예뻐. 별도, 당신도.”

 

 

그를 돌아본 나의 두 눈동자로 그의 곧은 시선이 와 닿았다. 내 손을 맞잡은 그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다 보며, 네 눈에서도 별이 반짝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어서 그러지 못하고 웃기만 했다. 맞잡지 않은 그의 손이 다가와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겨 준다. 손 끝에 붙은 반창고를 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서서히,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더 이상 우리의 시선이 맞부딪칠 공중이 줄어든다. 나는 반쯤 환상 같은 그의 숨결이 느껴질 때쯤 눈을 감아 버렸다. 그는 작게 키득였다.

 

곧 메마른 내 입술 위로 부드러운 무언가가 날아 든다. 이전에 내 뺨에 닿았던 그의 손끝만큼이나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려서, 나도 모르게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살며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서 제가 놀라 고개를 뒤로 빼 버렸다. 입술이 닿은 순간은 찰나였지만, 서로의 시선이 엇갈리고 엇갈리다 한 번 부딪치는 때부터 마른 입술이 화끈거렸다. 앞니를 내어 입술을 약하게 감쳐 문다. 그는 제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문질거리고 있었다. 나는 고민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살짝 입 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는 내 쪽을 올려다보는 듯 하더니, 먼 우주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이제, 별들이 다 죽은 것 같아.”

그런 것 같네. 저 별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아?”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될 거야. 흩어진 것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을 이루기도 하고, 혼자 살아나서 다시 반짝이기도 하고.”

신기한 일이네. 나도 몰랐는데.”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내뱉는 동안 간질거리던 마음 한 구석이 조금 편해지기를 바랐지만, 내 맘대로 되지를 않고 자꾸만 규칙적인 박동을 울렸다. 잡은 손을 그는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아닌 척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심장께를 손으로 짚고 서 있다가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칠 뻔 해 박동의 속도가 조금 빨라진다. 왠지, 나는 그가 이 울림을 들을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저기, 있지…….”

……어?”

큰일이야.”

뭐가?”

내 맘에서도…… 별들이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그가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제 심장께에 댄다. 나는 정말로 놀라 헛숨을 집어 삼킬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마구잡이로 떨리는 내 시선을 마주하고서 어색하게 웃는 그의 시선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박동이, 그의 심장에서부터 울려 퍼지고 있었다.


 






2. 난파 8일차

 

 

 

간단한 접촉사고처럼 일어난 나와 우지의 미묘한 관계 변화에 대해서, 4일이 지난 지금까지 틈날 때마다 걱정하고 속을 태우는 건 나뿐이었다. 그런 나와 달리 그는 다음날 잠든 나를 깨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침대 옆 바닥에 웅크려 잠드는 순간까지 입술이 닿았던 찰나의 기억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 자체를 하지 않았다. 아예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내게 다가오는 거리가 좀 더 좁혀졌다. 때로는 말도 없이 불쑥불쑥 손을 잡아오기도 했고, 우주선에서 함께 잠이 들면서 내가 눈을 떴을 때 한 뼘 거리에 제 얼굴을 두고 있기도 했다. 아무래도 키스 같지 않은 키스가 내게 전한 고백의 반쪽쯤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매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그가 싫은 건 전혀 아니었다. 자꾸만 그의 동선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고, 그와 맞잡은 손이 금세 뜨겁게 달아오르고, 그래서 심장이 규칙적으로 빠른 박동을 울리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우지와 거리를 좁히려 할 때쯤 의 기억이 머릿속 한 구석에서 스며들 듯 퍼져나갔다. 홍지수, 라고…… 그렇게 기억해 줘. 꽤 담담하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도 같은 그 인어의 이름 세 자를, 내가 우지에게 한 걸음 내디디면 금방이라도 잊을 것만 같았다. 억지로 밀어내고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는 내색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막바지 수리 작업을 한 4일 동안 우지는 하루도 다르지 않게 눈을 떠 내게 아침을 챙겨주고, 어질러진 우주선 내부를 꼼꼼하게 정리해 주었다. 부품이 모자라 우주선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또 어디서 발견했는지 모를 책들을 쌓아 놓고 침대 옆 바닥에 엎드린 채 그것을 읽고 있었다. 그가 뒤집어 놓은 책은 지구에서 챙겨온 시집이었고, 읽고 있던 책은 짐을 챙기다 딸려 온 프랑스어 시집이었다. 그것을 알아 먹느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했다. 당신이 한국어를 하길래 나도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야, 하고 덧붙였다. 또 잠깐 뒤에는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하고서 막 선수 쪽 수리를 반쯤 끝마친 나에게 뭉툭한 기계 덩어리를 내밀었었다. 대체 언제 우주선에 실렸는지 모를 필름식 사진기였다. 또 청소하다 발견했다고 중얼거리며, 그는 다짜고짜 내 얼굴 가까이에 그것을 들이밀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필름 돌아가는 소음이 선명하게 울렸다.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뺏어 들고 수리가 다 된 우주선을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의 모습을 연사로 찍었다. 그제야 제가 찍히고 있다는 걸 인지한 그의 멍한 표정을 마지막으로 필름이 다 돌아간 듯 더 이상 사진은 찍히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서 끝이야?”

, 들어가자.”

 

 

먼저 내 팔을 끌어당기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놓치는 방법을 깨달은 나는, 내 손을 등 뒤로 돌려 놓고서 그의 등을 떠밀었다. 반대쪽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우주선 안으로 들어선 그가 간이테이블 쪽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침대와 벽 사이 구석에 챙겨 둔 트렁크 안으로 카메라를 밀어 넣었다. 꼭 필요한 것들만 하나씩 챙겨 왔는데도 이틀 간 꽤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뭐 해? 이거 먹어.”

 

 

멀리서 부르는 우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거두었다.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대놓고 운운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부터 나는 몰래 짐을 싸고 있었다. 정말로, 떠날 날이 머지 않았다. 가까워지는 그와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하며 나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테이블 위에는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초콜릿 한 판이 맹물과 함께 놓여져 있었다.

 

 

아침에 청소하면서 두 번 찾았는데도 이거밖에 없더라고. 이거라도 먹고 자. 배고플 거 아냐, 그치?”

……어. 먹어야지.”

그러고 보니까 이제 먹을 게 없네. 돌아가겠지, 당신도?”

 

 

그의 물음에 그저 고개만이라도 끄덕이면 될 것을, 난 그러지 못해 시선만 떨어뜨린 채 초콜릿 껍질을 까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대답 없는 물음 뒤의 정적을 채웠다. 그러겠지, 당신은 지구에서 왔으니까. 한참 동안이나 내가 입을 닫고 있자 우지는 그렇게 덧붙이며 하하, 웃었다. 누가 들어도 명백히 쓴 웃음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문 채 손만 움직여 초콜릿을 조각 냈다. 어쩌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을지 모를 인어를 남겨두고 갈 때보다도 더 많이 울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첫 손님 치고는 정말 오래 있었어.”

…….”

당신이 있어 줘서, 난 정말 인간이 된 것 같아.”

…….”

떠나간대도, 잊지 않을게. 이제 당신이 내게 장미를 피워 줄 테니까. 그걸 당신인 셈 치고 매일 이야기를 들려 줄 거야. 나는, 그러니까, 다시 혼자가 될 테지만……. 그건 또 다른 의미에서 혼자가 아닌 거니까 괜찮아. 걱정하지 마.”

 

 

왜냐면, 그는 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난 다시 이 소행성에 난파할 수 없을 테고. 지구로 돌아갔을 때 내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많은 관계들이 있겠지만, 그는 기껏해야 내가 준 씨앗에서 자라난 꽃이 전부일 테니까. 나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서 작별을 고할 수 없었다. 차라리 같이 지구에 갈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이대로 우주선에 시동을 걸어 버린다면, 그렇다면 그와 살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고도 너무나 어린 생각이라 헛웃음이 터졌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는 동안 겨우 올려다 본 그는 입술을 닫은 채 손장난을 치고 있었고,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조각 낸 초콜릿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잘게 부서지는 초콜릿에서 처음으로 크레파스 맛이 났다.

 

 

있잖아, 나 할 말이 있는데. 지금 해도 될까?”

……해.”

떠난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 맞는 것 같아. 하지만, 그걸 인정해야 될 때는 인정해야 하는 것도 맞는 거겠지?”

…….”

근데 당신이 떠난다고 하면, 난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아. 보낼 수도 없을 것 같고, 당신을 자꾸만 잡고 싶을 것 같아.”

 

 

이렇게 될 거라고…… 아무도 말해준 적 없었단 말이야.

 

축축하게 젖은 그의 음성이 고요하게 내려앉은 공기 위로 섞이지 않은 채 부유했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가득 맺힌 그의 두 눈은 불빛을 받아 극도로 반짝이고 있었으나, 떨어질 듯 하면서 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고여 있었다. 마치 우는 것처럼 웃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서, 나는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다 뭉개진 목소리를 겨우 내는 동안,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 세게 쥔 내 손을 조심스레 감싸고 가만히 서 있었다.

 

 

……미안해, 널 두고, 내가…… 떠나게 돼서.”

괜찮아, 당신은 원래 당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해.”

너를, 내가, 흐윽……, 받아줄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해…….”

그것도 괜찮아. 당신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잖아.”

그치만, 정말로, 미안하다고 밖에……, 말 할 수가 없어…….”

난 하나면 됐어. 내가…… 당신처럼 당신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됐잖아.”

 

 

그렇게 대꾸하고서, 또 한번 내 손을 끌어다 제 심장박동을 들려주는 그에게서, 나는 내 생각이 애초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어쩌면, 내가 이 낯선 행성에 난파한 순간부터, 나만을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아니,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그를 올려다 본 내 눈가로 그의 엄지가 닿아 눈물을 닦아주었다. 정말, 나는, 울 자격도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켜냈다.

 

 

나는 정말로 행복해. 당신이…… 마지막까지 내게 가르쳐 준 게 있어서.”

흐윽, 으…….”

나는 그저,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당신을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다 보니까 당신과 같은 마음이 되어가고 있었어.”

…….”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그가 말을 멈추었다. 곧 눈 위로 따스한 것이 와 닿는다. 예쁜 말만을 담았던 그의 입술 새로 뱉어지는 숨결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내 두 눈 위로 입술을 붙인 채 서 있다가, 내 뺨을 감싸 쥐고 눈을 맞추었다. 흐려진 시야로 그의 눈물 어린 두 눈이 마주 보였다.

 

 

, 어느 순간부터, 그냥 당신이었던 것 같아.”

……아,”

그리고 지금도, 난 당신인 것 같아.”

 

 

얼떨결에 울음과 함께 숨을 집어삼킨 내 입술 위로, 내 눈에 닿았던 그의 입술이 부딪혀 왔다. 감은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방울 져 흘러내렸다. 그는 한 손으로 내 뒷목 어딘가를 감싸고, 반대 손으로 허공 중에 맴돌던 내 손을 붙잡았다. 맞잡은 두 손이며 닿은 입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느리게,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혀가 내 입술을 가르고 밀려 들어왔다. 초콜릿의 단 맛이 남은 입 안을 쓸어 내리고, 울고 있는 눈만큼 질척하게 젖은 두 개의 혀를 섞는 동안, 나는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프게 떨리는 그의 손을 힘 주어 잡았다. 나는, 차라리 이대로 뛰던 심장이 터져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끌어안자 맞닿은 가슴 위로 두 개의 심장이 바쁘게 뛰고 있었다. , , 하는 울림이 우주선 안을 가득 채우는 것만 같았다.

 

둘 다 울고 있었기 때문인지,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는 그리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올려다본 그는 제복 소매를 들어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무슨 용기에서였는지 그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품에 안긴 그의 온기가 곧 환상처럼 바스라질까 봐 무서워졌다.

 

 

저기 있지, 흐윽, 내가 있잖아…….”

천천히 말해도 돼. 나 듣고 있어.”

정말로, 너를, 너에게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나는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울어도 돼. 당신이 자꾸 울면 나도 슬퍼진단 말야.”

 

 

내 등에 닿은 그의 손이 느리게 움직여 나를 토닥거렸다. 그는 내게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고 나는 울음을 그칠 듯 하면서 다시금 울어버리고는 했다.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으나, 그는 끊임없이 나는 괜찮아, 하고 내게 속삭여 주었다. 그의 이름 한 번 불러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이름자, 사랑해 세 글자, 그것들로 가득 찬 목 끝이 아려오도록 메어서 울음 외에 그 어떤 말도 나오질 않았으니까. 그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내 등을 쓸어 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다정한 말투가 숨이 막히도록 슬펐다.

 

 

당신이 하기 힘들다면 나중에 해도 괜찮아. 나는 항상 여기에 있을 거야. 여기서 당신의 말을 듣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해.”

……미안해, 흐윽, 내가…….”

당신이 지구에서 이 별을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항상 여기서 미소 지을 거야. 그럼 당신이 바라보는 하늘 어딘가에는 웃는 별이 떠 있겠지. 그럼 당신은 하고 싶었던 말을 거기에다 들려주면 되는 거야.”

…….”

정말 멋지지 않아? 웃는 별을 가지게 된 인간은 당신이 처음일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내 얼굴을 붙잡고 생긋 미소 지었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 극도로 해사한 웃음을,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차오르는 눈에 힘을 주고 그 웃음 하나하나를, 말려 올라간 입 꼬리와 휘어진 눈꼬리를 머릿속에 꼭꼭 채워 넣었다. 그는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고, 이내 손을 옮겨 제 제복 깃에 달린 엠블럼을 떼어냈다. 금색의 나비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내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떼어냈다. 그의 손바닥 위로 네모진 플라스틱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그가 건넨 엠블럼을 받아 들었다. 그는 내 명찰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이내 허전해진 제복 깃에 그것을 끼워 달았다. 클래식한 제복 위로 흰 명찰이 달려있는 모습마저도 잊고 싶지가 앉아서, 나는 어색하게 입 꼬리를 당기면서 그것을 두 눈에 담았다.

곧 그는 꽃씨가 있는 곳의 위치를 이미 알고 있다며 잠깐 자리를 떴다. 역시 청소하다가 발견했는데, 가져가고 싶었지만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의 손에 들린 지퍼백 안으로 꽃씨 세 개가 얌전히 담겨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에 단단히 챙겨 들고 다시 내 앞으로 와 섰다. 좁혀지는 그와의 거리만큼이나 작별의 시간도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나는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줘 눈물을 삼켰다.

 

 

안전하게 지구로 돌아가길 바라. 늘 기도하고 있을게.”

너도…… 잘 지내고 있어. 널 잊지 않을게.”

고마워. 나도 당신을 잊지 않을게.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웃는 얼굴과, 그 반짝이는 두 눈동자도 전부.”

……진짜 고마워. 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나도 알아. 난 이미 당신이니까, 다 알 수 있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그의 손이 다시금 내 손을 맞잡아 온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나도 그를 따라 웃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예쁘게 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눈물 자국이 남은 내 눈가를 쓸어 주고, 서서히 출입구 쪽으로 발을 떼었다. 나는 다만 의자에서 일어났을 뿐, 그를 따라 출입구 쪽으로 한 발도 내딛지 못했다.

 

 

이제 당신 눈에서 별 냄새가 나.”

…….”

불꽃놀이를 보던 그 날의 별 냄새야.”

……그래, 그 날도 고마웠어.”

당신의 눈에 담긴 바다 냄새와 별 냄새를, 다음에 만났을 때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나 이제 갈게. 조심히 돌아가, 윤정한 씨.”

 

 

, 그리고 탕. 눈앞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처럼 측면 출입구 문이 빠르게 열리고 닫힌 이후로, 우주선 내부의 공기가 극도로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실은 전부 환상이었던 걸까. 선수 쪽 창문 가까이로 다가가 밖을 곁눈질하듯 내다 본다. 조금 거리를 두고 선 그는 우주선을 등진 채 금방이라도 자취를 감출 듯 했으나,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까만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비척비척 걸어가 조종 관제실로 향한다. 전원을 켜고 시동을 걸자 고요하던 내부가 육중한 기계음으로 가득 들어찼다.

 

자동 운전으로 모드를 변경해 두고서, 나는 우주선 내부의 불을 다 끄고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뭐가 되었든 상관없이우주선이 망가져 떨어지든, 경로를 이탈해 블랙홀에 휘말리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시간이 이대로 멈춰 버리든, 다시 지구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 죽었으면 좋겠어. 나는 두 손으로 엠블럼을 꼭 쥔 채 영영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게, 다시 눈이 떠졌고, 선수 쪽에서 내려다 본 발 아래에는 야속하게도 파란 빛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

 

안녕, 윤정한이야.

나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저기 어디에선가 별들이 마구마구 터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쏟아지는 별빛 가운데 네 미소 지은 얼굴을 떠올린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이 꿈이나 환상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생생한 추억이어서 항상 상기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나는 마음이 아플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 위로 사랑을 전송하고는 한다. 소리내지 않아도 네가 들을 수 있을 거란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서, 입속말로 네 이름을 중얼거려 본다. 돌아설 때 마주한 별이 반짝이는 게, 네 미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난 이미 오래 전부터 너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별이 잘 보이는 밤이면 네가 보고 싶다. 오늘은 꼭 소리 내어 널 불러 보겠다. 내게 웃는 별이 되어 줘서, 정말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다.

 

 

 

잘 들리니? 난 아직 널 기억하고 있어.

 

네가 보고 싶어. 사랑해, 우지야.




「최한솔에게.

안녕, 형이야. 잘 지내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은 잘 지내고 있어.」



정한은 거기까지 쓰고서 손에 힘이 풀려 헛웃음을 지었다. 성치 않은 손으로 평생 잡을 일 없을 것 같던 필기구를 잡자니 영 글씨가 시원찮았지만, 어차피 부칠 수 없을 테니 꼭 알아봐야만 할 필요도 없었다. 자기합리화 비슷한 거다. 그는 헛웃음을 지어보이고 다시금 펜을 집어들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가 손이 벌벌 떨렸다. 정한은 이를 악 물고 필사적으로 손목을 움직여 펜을 놀렸다. 경직된 글씨가 질 낮은 종이 위로 뭉치듯 퍼져나갔다.



「오늘은 무척 춥더라. 거기는 좀 덜 추울 것 같은데, 그렇다고 간다는 건 아니고. 날이 추워서 따뜻한 거라도 사먹으려고 했는데 돈이 모자라더라. 그냥 집에 있으려고. 너는,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툭, 거짓말처럼 물방울이 종이 위로 떨어져내렸다. 눈물이다. 정한은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웃겨서 웃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파들거리는 입술을 앞니로 눌러 깨문 그가 몇 번이고 펜을 고쳐쥐었다. 싸구려 만년필의 검정 잉크가 눈물에 번져 파란색으로, 또 빨간색으로 흩어져 내렸다. 급하게 눈두덩을 부비어 눈물을 닦는 그의 왼손에는 투박한 모양의 의수가 끼워져 있었다.



「걱정은 하지 마. 네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다 보니까…… 그러다 보니까, 살아지더라. 그래서 그냥 그런 대로 살다가… 그러다가 네 곁으로 가려고. 일찍 가지는 않을 거야, 네가 타박할 테니까.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놈한테 그런 식으로 혼나고 싶지는 않거든.

보름달이 떴어. 네 얼굴이 비치는 것도 같아. 이만 줄일게, 내일도 아침 일찍 나가봐야 하거든.


오늘, 달이 참 밝다. 보고 싶다, 한솔아.」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본 적이 없어서, 정한은 그래서 많이 후회하고 있었다. 허나 언제까지나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면서도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해 저리 둘러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아름다움으로 치장하는 것을 한솔이 더 좋아할 것이라 합리화하며, 정한은 펜을 내려놓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떨구었다. 거칠어진 오른손과 딱딱하고 온기 없는 왼손이 그새 수척해진 얼굴을 모두 가리었다. 억눌린 흐느낌은 순식간에 틈을 비집고 터져나와, 종국에 그는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파아란 달빛이 시리게 비쳐 들었다.





- 첫눈에 반한다는 말, 믿어요?
- 나 당신한테 반한 것 같은데.
- 상해, 미라보 여관. 커피가 참 맛있다고들 하던데. 거기서 다시 만나는 걸로 하죠.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 지금 당신하고 입을 좀 맞춰야 될 것 같은데.


'동지, 그거 압니까?'
'말씀하세요.'
'제국의- 아, 제국 얘기를 꺼내서 죄송하긴 한데, 꼭 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들어 주시겠습니까?'
'듣고 있습니다.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잖습니까.'
'여하튼, 제국의 어느 소설가는 말입니다. I love you, 그 한 마디를 번역하기가 부끄러워 오늘 달이 참 밝네요-. 하고 번역했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오늘 달이 참 밝네요, 윤정한 동지.'





「1949년 2월 18일, 윤정한 씀.」


그것이 한솔에게 쓰는 열 번째 편지였으며, 그 날은 그의 서른 네 번째 생일이었다. 정한은 그럼에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하나 전하지 못하였다.

다만- 영영 부칠 수 없는 대답을 열 번째 편지에 실을 뿐이었다.








*

1933년 상하이 일대를 휩쓸고 다니던 최연소 청부업자 십팔세 최한솔.
1933년 조선 독립군 제3부대 좌포수 이십육세 윤정한.


오늘도 두 사람이 바라보는 달은 참 밝습니다.







* 리네이밍
구상하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주말 내에 연성하지 못할 거 같아 썰이라도 쪄 보는 허니콤보.txt



(이 썰의 기본은 이전 썰인 순간썰을 기반으로 하며 기본 베이스가 된 시를 싣겠습니다)


일단 미리 말해두자면 2016년 현재 규 26 정 30이고 규는 신입 고등학교 국어교사. (공립고에는 이렇게 어린 쌤도 들어온다구 함) 정은 IT기업 디자인팀 팀장으로 일하고 있음. 둘이 처음 본 건 10년 전이고 사귀기 시작한 건 8년 전부터.

로 해서 일단 처음에는 규가 고백하던 날의 이야기를 할 것.
8년 전 여름으로 시점을 잡았긴 한데 지금 이맘때 쯤으로 해서 규는 하복 입고 정은 기말 공부 중이거나 치는 중이거나 해서 바빴으면. 근데 규는 정이랑 같은 학교 사범대 갈라고 (이건 처음 봤을 때부터 서서히 밀려온 생각인데 아직은 최근에 깨달은 걸로 앎) 시험 한 삼 주 전부터 교내 자습실에서 공부하고 있음. (진짜 이유 : 에어컨이 빵빵해서) 근데 규랑 정이랑 옆집 사는 사이거든 ㅋㅋㅋ 그래서 규 어머니가 정한테 지나가는 얘기로 다 말해줬음 좋겠다. 정은 그거 듣고 와 얘 진짜 열심히 하네 싶어서 내가 한 번 가볼까? 하고 학교 마치고 집 가는 길에 있는 규네 학교 운동장에서 기다리기 시작함. 그 날은 금요일이고 규는 정이 첫 날 기다릴 때부터 혼자 막 문자도 보내고 사진도 찍어서 보내고 하길래 오늘은 뭐 안 오나 기다리느라 숫자 한 개 쓰고 폰 보고 쓰면서 폰 보고 그러고 있고 ㅋㅋㅋㅋㅋ 정은 오늘도 심심하고 피곤하고 해서 발로 운동장에 막 글씨같은 거 쓰고 그러다가 좀 잘 쓴 거 같으니까 사진 찍어서 자기 손도 나오게 브이 하고 그거 규한테 보내줌. 규는 사진 띠롱 오니까 뭐지 하고 봤다가 !!! 아니 져난이형이...! (씹덕) 뭐 이런 느낌으로 심장 한 번 잡고 문 앞에서 지키는 감독쌤한테 갑자기 배가 너무 아프다며 엄청난 연기를 선보여서 빠져나옴. 정은 바닥에 지가 쓴 거 발로 슥슥 해서 지우다가 저기 멀리서 누가 가방 휘날리면서 달려오니까 가만히 서서 저거 혹시 밍구..? 하고 보고 있고 진짜 규니까 머엉. 아니 얘 못 나온다며? 막 그런 생각 하는데 규는 정 앞에 서서 숨 차니까 숨 몰아쉬고 있고. 정이 정신 차리고 야 너 못 나온다며! 하니까 규는 거기서부터 짝사랑밍아웃 하려다가 참고 형 피곤하다면서요, 나 형 심심하다면서요, 등으로 특유의 빙글빙글한 웃음 지으면서 대꾸할 것. 그래서 정은 좀 얼떨떨한 가운데 규가 먼저 걸어서 교문 빠져나가면서 오늘은 불금이니까 아이스크림 콜? 이러고 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정은 가만히 서 있다가 빵 터져서 웃고 같이 발 맞춰 걸어감.
둘이 사는 아파트 단지로 가는 골목길에는 편의점 없구 그 시간 (11시 넘음) 쯤 되면 거의 뭐 다들 자는 분위긴데 슈퍼 짜그마한 거 딱 하나만 장사를 그때까지 함. 왜냐면 고등학교 애들이 그 때쯤 집에 들어가고 그러니까 ㅇㅇ.. 그래서 규정도 거기서 아이스크림 사먹기로 하고 걷는데 규는 아이스크림 먹는 것도 신나고 정이랑 집 가는 것도 신나고 해서 엄청 들떠서 슈퍼 보이자마자 달려가서 냉장고 뒤지면서 뭐 먹을지 고민함. 고개 돌려서 멀리 있는 정한테 형 뭐 먹을래요? 묻고, 정은 맨날 스크류바만 먹어서 오늘도 그거 먹는다구 함. 그래서 정이 다 걸어갔을 때 규는 정의 스크류바와 자신의 메로나를 내밀면서 얼굴 무너지는 웃음 짓고 ㅋㅋㅋㅋㅋㅋ (계산하라는 뜻이지) 정은 잔돈 없나 주머니 뒤적이다가 규한테 지갑 달라고 할라 했는데 (아 사실 얘네 가방 바꿔서 멤) 규가 말 꺼내기도 전에 지갑 찾아서 주니까 또 멍 하다가 계산하러 들어가고. 그 동안 규는 과연 오늘 고백을 하는 것이 맞는가를 막 생각하다가 또 멍때리고. (둘 다 멍을 자주 때리네) 정이 나와서 아이스크림 건네 주니까 그거 받고 정이 규 뒤로 가서 가방에 지갑 넣고 같이 걸어가기 시작함. 규는 메로나 먹는데 6월이고 밤이어도 여름은 여름이라 금방 녹잖음? 그래서 빨리 먹는다고 막 베어 먹는데 정은 그거 차가워서 못 해서 챱챱 핥아먹다가 규가 한 입 베어 먹으니까 자기도 해 보다가 차가워서 혼자 난리치고 ㅋㅋㅋㅋㅋㅋ 규는 그게 귀여워서 막 웃다가 보니까 정 입술이 스크류바 빨간색 물들어서 빨갛고... 그래서 메로나 멍하니 들고 있다가 녹으니까 한 입 더 먹으면서 결심하는 거지. 아 난 고백해야겠구나. 그래서 정이 스크류바 반도 못 먹었을 때 메로나 우물우물하면서 형, 하고 부름. 할 말 있다고 하니까 정이 고개 규 쪽으로 돌려서 스크류바 챱챱 하면서 빨리 말하라고 재촉함. 그래서 규가 내적 심호흡 하고 딱 얘기함.

- …나, 형 좋아하는 거 같아요.
- 어?
- 나랑, 사귈래요?

그 말 하고 나서 뭔가 아이스크림 둘이 짠 듯 한번에 녹아서 막대 타고 흘러내림. 규는 계속 정 눈치 보면서 메로나 챱챱 하다가 반 정도 남은 거 다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하고 정은 여전히 못 깨물어 먹고 챱챱 먹으면서 아무 말 없고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아파트 단지까지 들어오는 규정.. 근데 또 규는 괜히 캐물으면 정이 이상하게 생각할 까봐 참고 또 참는데 같은 동 같은 층 옆집이니까 피할 수도 없고 아주 고역이었음. 그래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숫자 판만 계속 바라보다가 10층 사는데 한 7층 쯤 됐을 때 대답 안 해줄 거냐고 물으려는데 옆에서 정 목소리가 들려옴.

- 그래, 좋아.

근데 그게 진짜 너무너무 담담한 말투여서 규는 자기가 환청 들었나 싶었음. 약간 스크류바 좋아해? 응 좋아. 같은 느낌의 대답이어서 규 막 벙쪄 있다가 동공지진 하면서 정한테 그럼 우리 진짜 사귀는 거냐고 묻고 정은 웃으면서 고개 끄덕여주고 10층 다 돼서 문이 열림. 정은 현관문 앞에 가만히 서 있고 규는 계속 헤실헤실 웃으면서 열쇠 찾아서 문 열고 들어가면서 문자할게요, 형! 하고 집 안으로 쏙 들어감. 정은 도어락 버튼 누르는 거 열어논 채로 멍하니 생각하는 듯 하다가 이내 약간 될 대로 되겠지 느낌으로 웃으면서 집 안으로 들어감. (이거 뭐냐면 정은 규랑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거절하면 오히려 규가 자기 피할 거 같아서 받아준 거임)


그리고 나서 다시 현재로 돌아옴. 정은 대학 졸업하고 규 옆집에서 좀 더 번화가로 이사했는데 자그마한 투룸 집 ㅇㅇ. 그리고 규는 군대 제대하고 정네 집에서 하룻 밤 이틀 밤 자나 싶더니 칫솔이 거기 있고 저번에 산 옷이 거기 있고 임용고시 문제집이 거기 있고 등등 해서 들어가서 살게 됨. 같이 산 지는 사실 얼마 안 된 것. 근데 규가 인문계 고교 교사로 발령이 나 버리니까 정이 회식 없어서 집에 일찍 와도 애가 거의 없는 거지. (규 담임은 아니어도 고삼 수업 들어가서 맨날 공부해야 됨) 그래서 규가 미안해하는데 정은 약간 밝을 때 얼굴 본 지 오래 됐다 싶으면 규한테 오늘 저녁 먹으러 나올래? 하고 묻고. 그래서 규는 오늘도 정이랑 저녁 먹으러 나가는 길에 학생들이 메로나 먹고 돌아다니니까 매점에서 먹으라고! 하고 혼내킨 다음에 그 옛날 생각 하면서 약속장소로 가는 거지.
둘이 별 거 없고 저녁 때 약속 잡아서 만나면 주로 고기 먹고 감자탕 이런 거 먹고 가끔 무뜬금으로 정이 나 냉면 먹고 싶어 이래서 냉면 먹으러 가고 굳이 거창한 거 먹는 사이는 아니었음 좋겠다. 가끔씩 진짜 먹고 싶으면 약간 저렴한 일식집 같은 데 가고 ㅋㅋㅋㅋㅋ 그래서 그 날도 늘 가던 식당에서 고기 구워서 정은 회사 퇴근했으니까 술 마시고 규는 다시 들어가야 되니까 술 못 먹고 8ㅁ8 약간 정이 먼저 회사 얘기 자기 힘든 거 막 상사 욕 하고 그랬음 좋겠다. 아니 김 부장이 이거 저거 요거 다 오늘까지 하라고 그랬다니까? 아니 그거를 자기가 하나는 맡아서 하면 될 것이지 내가 주말에 약속 있다고 뻥 치니까 자기두 있대! 허 씨 맨날 골프나 치러 가는 주제에. 이러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규는 그게 너무 귀여워서 고기 구우면서 그랬어요, 그랬어요, 해 주고. 그러다가 정이 너는 뭐 힘든 거 없어? 하니까 생각하다가 3학년 부장이 자기 수업 안 하고 논다고 (사실 애들이 놀자고 떼씀) 갈군 거 생각나서 그거 얘기하고. 애들 얘기해 주고. 진짜 소소하다 그사세... 그래서 고기 먹고 시간이 한 30분 정도 남았길래 정이 그럼 커피 마실래? 하고서 바로 옆 옆에 카페로 감. 규나 정이나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는 느낌인데 개인적으로 둘 다 아메리카노 먹으면 규는 시럽 두 번 정도 넣어서 먹었으면. 그래서 정이 그거 계산하고 규 커피에 시럽 두 번 넣어주고 가져와서 건네주고 규는 또 막 반해 ㅋㅋㅋ 그러고 또 이런 저런 얘기하고 주말에 뭐 할 건지도 얘기해 보고 커피 쭉쭉 마시고 그러는 것. 그러다가 이제 정이 충격과 공포의 얘길 하는데 뭐냐면... 정말 자연스럽게 약간 이런 대화 가운데에서 나왔음 싶은데

- 형 이제 집 들어가면 뭐 할 거예요?
- 나? 뭐... 엄마한테 연락 드리고, 씻고, 너 기다리고?
- 나 기다릴 거예요? 아, 그냥 지금 집 들어가고 싶은데.
- 그러면 안 돼?
- 안 돼요, 나 또 혼나. 3학년 부장이 나 맨날 갈군단 말이에요.
- ㅋㅋㅋㅋ 알겠어. 빨리 마치구 와. 9시에 퇴근할 수 있잖아.
- 어.. 보고 가능하면 빨리 퇴근할게요. 졸리면 먼저 자도 되고.
- 아냐 기다려도 돼. 어차피 낼 주말인데 뭐. 아 맞다 나 할 말 생각났다.
- ? 뭔데요?
- 나 그 저번 주 주말에 너 출근했을 때 있잖아.
- 네에.
- 그 때 어디 사는 누구랑 선 봤어.

규 벙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고. 정은 아무렇지 않게 커피 빨아마시고 규 앞에 둔 커피 가져다가 마셔 보고 으억 달아 이러고 있고. 규는 문득 그런 정을 바라보다가 정이 올해 들어서 계속 어머니와 연락하는 거며 이렇게 저렇게 전화하는 걸 대충 듣고서 아 져난이형이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구나 싶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거지. 그러니까 언제부턴지는 알 수 없어도 정에게 규는 사랑의 의미와 거리가 멀어져 버린 것. 규는 사실 거기서 화 내고 싶었지만 이미 자기를 친한 동생 이상으로 보지 않는 정에게 화 내서 뭐 하겠냐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냥 한숨 내쉬고 정 손에 들린 지 커피 뺏어서 쭉쭉 빨아먹음. 마침 시간이 또 들어갈 때가 다 돼서 일어나니까 정도 커피 들고 일어남.

- 밍구야, 들어가야 돼?
- 네, 늦으면 또 한 소리 들어요.
- 알겠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와.
- 알았다구요. 길 잃어버리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요, 형.
- 그래, 그리구… / 근데요 형. (이때 말 겹침)
- 어? 아냐 너 먼저 말 해.
- …… 아니에요, 나 가볼게요. 이따 봐요.

그러고서 돌아서는 규. 정이 멍 때리고 있든가 말든가 상관 안 하고 그냥 학교로 돌아가면서 생각함. 아, 나는 이제부터 그냥 정의 옆에서 조용히 마음 정리해야겠구나. 저게 정의 이별선고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만 학교 도착해서 폰 보니까 정 문자 들어와있고 열어 보면 잘 들어가써?? 오늘 밤에 비 올 꺼 같으니까 빨리 들어와!! 이런 거 있고 답장 치고 있는데 문자 한 통 더 와서 보니까

[사실 너한테 진작 얘기할라구 했는데 엄마가 하도 뭐라구 나 막 볶아서 ㅜㅜ 일단 선 봤긴 봤어 나중에 어떻게 될 지도 모르겠구 너 오면 다 말해줄게 알겠지? ㅜㅠ 우리 밍구 화이팅!♡]

이런 거. 정도 내심 미안하긴 했는가 싶어서 또 흔들리는 밍구... ☆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일을 하고 앉아있다가 조용히 퇴근를 했다고 함. 정은 역시나 졸린 눈 하고서 규 기다리다가 들어오니까 반갑게 맞아 주는 거지.




장면 전환해서 그날 새벽 한 시 반쯤. 규가 9시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하고 정이 선 본 얘기 해주고 그러면서 술 먹고 하다가 규 약간 빡쳤다 해야 되나 정을 잃는 기분이 들어서 자려는 거 붙잡고 키스했다가 이 시간까지 몸 섞고 잠 들려는 정 겨우 깨워서 씻기고 옷 입히고 옆에서 재우는 중. 정네 투룸에는 침대 없고 거실 겸 잠자는 공간 해서 바닥에 이불 깔고 티비 틀어놓고 있는데 정이 벽 쪽에 누워있고 규가 티비 쪽으로 등 돌려서 있다가 벽 보고 돌아누운 정한테 괜히 미안해져서 허리도 콩콩 두드려 주다가 티비 확 꺼버리고 정 바로 눕혀 주고 이불 꼼꼼히 덮어 주고. 그러다가도 또 빡치는 게 분명히 선 본 얘기를 하는 건 알아서 정리하라는 뜻일 거고 이별 선고일 텐데 자기가 하자는 대로 했다는 거고. 그럼 난 뭐지? 섹파? 이런 생각까지도 드는데 규는 그런 자신이 아직 어리구나 싶어서 더 빡치고. 혼자 잠 못 들면서 뒤척뒤척 하다가 정이 옆에서 허리 아픈 듯 (아프겠지 방바닥인데) 살짝 앓는 소리 내면서 돌아 누우니까 규가 허리 받쳐주면서 제 쪽으로 끌어안아 토닥거리고. 정 머리 엉킨 거 손으로 빗어 주면서 토닥토닥 하고서 다시 새근새근 잠 드니까 가만히 안고만 있는데 그거도 그거 대로 웃픈 규인 것. 대답 안 할 거 알면서 약간 잠긴 목소리로 형 나 사랑은 해요? 하고 물었다가 픽 웃고. 아 나 진짜 어린애 같아. 중얼거리다가 정이 또 뒤척거리는 거 같으니까 등 쓸어내려 주고. 그렇게 잠 드는 규 위로 과거 회상이 겹쳤으면 좋겠다.

첫번째는 규정 첫키스. 언제냐면 규 수능 끝나고 나서 그 날. ㅋㅋㅋㅋㅋㅋㅋ 대망의 수능이 끝나고 규는 수능장에서 나오는데 정이 며칠 전부터 난 그 날 하루종일 잘 거야. 라고 해 놓고서 서프라이즈로 마중 나와준 것. 그 옆에 규 어머니도 있었는데 엄마고 뭐고 간에 우리 져난형이 마중을...! 이런 마음이 더 커서 규 진짜 대형견처럼 우다다 달려와서 무작정 정 안아주고. 정 당황 동공강진한 가운데 규 어머니는 그런 거 모르시고 규 등짝 때리면서 너 무거워 임마! 그러고 ㅋㅋㅋㅋㅋ 수능장 벗어나서 셋이 저녁 먹고 규 어머니는 볼 일 있으시다고 먼저 가시고 규정만 남음. 규가 눈 반짝거리면서 형 나 술 사주면 안돼요? 했다가 한 대 맞고 커피 마시러 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메리카노 두 잔 시켜서 하나는 시럽 두 번 펌핑해서 시럽 들어간 거 규 먹고 안 들어간 거 정 먹어라. 규는 시럽 두 번도 좀 썼지만 먹을 만 하기도 했고 뭔가 어른같이 보이고 싶어서 꾹 참고 ㅋㅋㅋㅋ 정은 그런 게 다 보이니까 귀엽기도 하면서 진짜 어른 티도 좀 나고 괜히 또 멋있어 보이는 거지. (이 때랑 규 대학생 때가 깨 볶는 피크인 걸로.. 얼마나 좋겠니...) 그래서 막 이런 저런 얘기하고 규의 위시리스트도 좀 들어주고 놀러가고 싶다니까 정이 그럼 나랑 같이 가. 담담하게 얘기해서 규 감동받고 ㅋㅋㅋㅋ 한 시간 쯤 뒤에 규 어머니가 안 들어오냐고 전화 와서 규가 가야 될 거 같다 하고 아쉽다고 대놓고 말해서 또 얻어맞고 (정 : 뭘 더 할라구, 일찍 들어가야지!) 역시 같은 아파트니까 함께 룰루랄라 걸어감. 엘리베이터에서도 규 아쉬운 티 팍팍 내고 정은 주말에 또 보면 되지-. 이러면서 내심 부끄러운지 규 눈 막 가리고 장난치고 ㅋㅋㅋ 그러다 보니까 벌써 10층이고 집 들어가야 됨. 정이 먼저 도어락 해제해서 현관문 여는데 나 갈게, 하고 돌아보니까 규가 존나 밍뭉이같이 서 있는 거. 그래서 정이 뭐 어쩌라고 이런 표정으로 보다가 현관문 안 닫히게 걸어 놓고 규 앞에 가서 딱 그럼.

- 공부 하느라 수고했어.
- …네에.
- 음… 그리구, 어… 주말에 나랑 놀아.
- 당연히 그래야죠.
- 이제 집 들어가고. 어머니 걱정하셔.
- 그게 끝이에요?
- 아 진짜, 뭘 더 바라.
- ……됐어요, 나 가께요.

규무룩_규무룩 해져서 터덜터덜 열쇠 쥐고 가는데 정은 그 모습이 넘 귀여운 거 ㅋㅋㅋㅋ 그래서 규 불러서 규가 돌아보니까 앞에 도도도 가서 뽀뽀 쪽 해주고 아씨 좀 쪽팔리네 이러고 돌아서는 거. 규 3초간 사고회로 정지됐다가 판단 내리고 돌아서는 정 끌어당겨서 그대로 입술 부딪침. 사실 정은 처음이 아니지만 규는 처음 하는 거였는데 규 잘함.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정 동공지진 하다가 그냥 눈 감고 기분 간질거려서 규 교복 마이 끝 꼭 쥐고 있어라. 처음이니까 그렇게 거칠게는 안 하고 좀 부드럽고 간지러운 느낌이었으면 함. 대신 시간은 오래. ㅋㅋㅋ 그래서 정이 숨 차서 먼저 밀어내니까 규가 눈 맞추고 씩 웃으면서 형 나 갈게요. 하고 돌아섬. 정은 손등으로 입술 슥슥 닦다가 규한테 가서 꼭 안아주고 지 딴에는 되게 야심차게 잘 자, 내 남친. 하고 쪽팔려서 도도도도 들어감. 규는 열쇠 놓칠 뻔 하다가 혼자 막 피식피식 웃으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음 좋겠다.

두번째는 규정 첫 응 그거... ㅎㅎㅎㅎㅎ 이건 규가 군대 갔다가 휴가 나왔을 때 일이었음 좋겠다. 그러니까 규21 정25 시점. 갠적으로 제복같은 거 좋아하니까 규는 의경이나 공군 갔으면... 그러고 여름에 휴가 나왔는데 정은 그때 따로 나와서 살고 있었고 그래서 규는 서프라이즈 해줄라고 일부러 정한테 연락 안 하고 엄마랑 밥 먹고 나온 날 밤에 제복 입고 정네 집으로 감. 정은 당시 회사 인턴이거나 대리 정도? 라서 야근 늦게까지 하고 몸 질질 끌고 집 가는 중이었는데 문 앞에 누가 쭈그려 있으니까 (사실 진짜 오래 기다림 ㅋㅋㅋㅋㅋㅋ) 저건 누구야 하고 막 의심하면서 다가가는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음. 그래서 설마 김구칠...? 하고 슬금슬금 가는데 고개 든 규랑 눈 마주치고 ㅋㅋㅋ 그래서 정은 뭐지 쟤 왜 나왔지 ;; 이런 생각으로 조심조심 다가가는데 규는 너무너무 반가운데 애가 진짜 지쳐 보이니까 말 없이 가서 꼭 안아줌. 정은 당황한 가운데 규가 밖에서 더운 제복 입구 기다린 게 보이니까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얼떨결에 안겨서 토닥토닥 해 주다가 확실히 짚고 넘어갈 건 넘어가야지 싶어서 애 어깨 잡아서 떼어내고 물음.

- 뭐야 너 어떻게 나왔어? 너 설마…
- 아, 형. 지금 나 의심해요?
-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 연락도 없이,
- 서프라이즈 해 주려고 그랬죠. 근데 형이 엄청 늦게 마쳤어. 안 피곤해요? 빨리 들어가서 쉬자, 우리.

정은 혹시나 애한테 피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어서 계속 불안불안해 하는데 규가 그거 눈치채고 일부러 막 능글거리게 웃으면서 정하고 눈 맞추면서 어깨 감싸고 그래서 정도 푸스스 웃으면서 집 문 열고 들어감.
그 이후에는 뭐 ㅎㅎㅎ... 아시자나여... 방바닥에 앉아서 둘 다 씻지도 않고 얘기하다가 문득 눈 맞아서 짧게 뽀뽀하고 그러다가 입술 닿으면서 자연스럽게 규가 정 바닥에 눕히고 입고 있던 제복 셔츠 단추 풀렀으면 좋겠다. 정은 눈 뜨고 규 마주보면서 막 웃는데 규가 손으로 눈 가려줬으면. 키스 좀 오래 하면서 손은 손대로 움직였음 좋겠는데 규가 정 옷 벗기고 지 옷도 벗으면서 바닥에 이불 하나 안 깔려 있으니까 허리에 팔 둘러서 받쳐줬으면. 믈론 나중에는 그런 자비 없겠지만 ㅋㅋㅋㅋㅋ 정은 또 규가 팔 둘러주는 게 좋아서 일부러 더 안겼으면. 둘이 떨어져 지내는 동안 서로 힘든 것도 있고 보고 싶었던 것도 있고 해서 그거 다 터진 마냥 엄청 격하게 몸 섞었으면 좋겠다. 그치만 아프지는 않게. 나중에는 정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규 끌어안고 소리 내질렀으면. 규는 정 눈가에 눈물 맺힌 거 쓸어 주는데 눈가 빨개가지고 다 풀린 눈으로 자기 보면서 띄엄띄엄 끊어 말하는 게 너무 보고싶었다고, 지금 너무 좋다고, 그런 말이니까 참다가 결국 핀트 나가버렸으면. 여기서 중요한 건 둘이 첫 응 그거도 물론 중요하지만 다 끝나고 나서 꼭 안은 채로 둘 다 숨 고르느라 정신없는데 정이 반쯤 잠긴 목소리로 규 부르고서 하는 말이

- 민규야, 하아……, 내가 진짜, 많이 사랑해, 너……

이것인 것. 이게 정말로 중요함. 규는 그 말 듣고서 나른하게 눈 깜빡거리다가 이내 새근새근 소리 내면서 잠든 정 바라보고 뒷처리 해주면서 이제 진짜 형 맘이랑 내 맘이랑 같아진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 그리고 이불 꼭 덮고 누운 정 바라보다가 혼자 좋아서 피식피식 웃고. 집 안 거의 난장판 비슷한데 그냥 냅두고 한 이불 덮고 꼭 안고 잤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장면전환해서 현재. 지금부터는 규에 좀 더 초점을 맞춰서 쓸 것이다. 그러니까 규의 일상도 써 보면 재밌을 것 같은데 분량 조절이 안 된다면 적당히 잘라야겠지. ㅋㅋㅋㅋ 규정은 이때까지도 같은 집에서 사는데 규는 그래도 8시까지는 출근해야 되니까 밥 차려서 정 깨워서 씻으러 들어가라 하고 같이 밥 먹다가 정 밥 먹는 거 보면서 출근함. 정은 규가 화요일마다 회의 있어서 정장 입고 가는 것도 보고 월수목금에 세미캐주얼이나 그냥 캐주얼 입고 가는 것도 보고 늘 옷매무새 정리해주고 규는 그런 정 보면서 밥이나 먹어요 형 ㅋㅋㅋ 하고 부스스한 머리 손가락으로 빗어주고? 그러고 먼저 출근하는 거지. 출근 이후는 디테일하게 안 나오더라도 정과 틈틈히 카톡하는 거나 주위 남선생님들이 규 반지 보고 막 궁예하는 거나 문과반에 수업 들어가서 여자애들이 첫사랑 얘기 해달라구 해서 지금 첫사랑이랑 사귀는 중. 이러고 말 그만 하는 거나 ㅋㅋㅋㅋㅋ 그런 소소한 거 몽타주처럼 샥샥 지나가게 넣고 싶다.
진짜 중요한 건 퇴근 이후. 둘 다 씻고 방바닥에 이불 깔고 누워서 잘라고 티비 보고 있다가 정이 규 뒤쪽에서 규 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는데 등 뒤에서 슬금슬금 와서 괜히 한 번 안아보고 간지럼도 태워 보고 ㅋㅋㅋ 규는 또 그런 장난 쳐주는 정이 귀엽기도 하고 뭔가 사랑을 돌려받는 느낌이라 정 손 끌어당겨서 자기 손에 가두고 부둥부둥 거리고. 그러다가 규가 몸 돌려서 정하고 눈 마주치다가 푸스스 웃으면서 뽀뽀 하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키스도 하고 응 그거도 했으면 좋겠다. 그냥 엄청 자극적이라거나 그 반대로 하다 잘 것 같다거나 ㅋㅋㅋ 그런 거 아니고 정말 보통 커플이 사랑 나누듯이 그렇게 했음 좋겠다. 그러다가 문득 첫날 밤이 생각나서 규는 약간 미련 가져 보고요... 그래서 좀 더 격해지는 감도 없잖아 있었으면. 정은 이번에는 막 울 정도는 아니고 그냥 늘 그랬듯이 눈가 발개진 채로 규 이름 간헐적으로 부르면서 숨 가쁘게 몰아쉬고 그랬으면. 그리고 끝이 나고 둘이 좀 안고 있다가 규가 정 내려다보면서 머리 귀 뒤로 넘겨주는데 정도 손 뻗어서 규 앞머리 정리해주고 뭐라 말하려다가 입 다무니까 규가 할 말 있어요? 묻고. 내심 기대하는데 정이 허리 살짝 짚으면서 상체 일으키고

- 그냥, 너 잘생겼다구.

하고서 씻으러 들어갔으면. 규는 3초간 멍때리다가 이내 좀 쓴 웃음 지으면서 뒷처리하고 옷가지 주섬주섬 주워서 빨래통에 집어넣고 뭐 이불 다시 깔고 그랬으면.
그리고 중간에 짜르고 새벽에 잠 들까 말까 한 상태에서 규는 등 돌려서 티비 보고 있고 정은 규 등 콕콕 찌르면서 장난치고 그러고 있는데 규가 문득 너무 어린 질문같지만 궁금해지는 거임. 정이 저번에 선 봤다고 한 것도 사실 안 잊혀지는데 그거 어떻게 됐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티비 소리 줄이고 떠 보듯이 물음.

- 형 저번에 그, 선 본 거는 어떻게 됐어요?

규 딴에는 내심 기대도 하면서 물은 건데 등 뒤에 정이 답이 없으니까 자나? 싶어서 고개 휙 돌려보는데 정이 눈 굴리면서 말 고르고 있는 거. 규 이제 촉 올 때 됐고요, 불안해 지고요... 근데 차마 빨리 말하라고 닦달도 못 하겠고 설마 자기가 예상하는 최악의 상황이겠나, 하는 생각만 계속 하고 있는데 정이 결심한 듯 딱 대답함. 이때 중요한 건 규 눈 피하는 것.

- 어… 나 사실, 그… 사람이랑, 결혼하기로 했어.
- ……결혼이요?
- 응, 엊그저께… 만나서 결정한 거구, 다음 달이나 다다음 달 쯤으로 날짜 잡기로 했어.

근데 규 눈은 못 보면서도 그 말투가 진짜 너무 담담하고 미안한 것 같지도 않아서 규는 진짜로 벙찜.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했는데 정이 말 마치고 입술 달싹이다가 나 잘게, 잘 자. 하고서 규 입 꼬리 쯤에다 뽀뽀 해주고 돌아누움. 그래서 멍 때리다가 현실 자각하고 돌아 누운 정 뒷모습 바라보다가 픽 헛웃음 짓고. 거기서 잔다는 애 돌려서 형은 나 사랑해서 만나는 거 아니었어요? 부터 그럼 오늘 나랑 왜 떡쳤어요? 까지 물으려다가 진짜 꾹꾹 참고 저도 등 돌려 누움. 입술 꾹 깨무는데 그 날카로운 송곳니에 걸려서 무지 아팠지만 참음. 그때서야 깨닫는 거지, 이게 스물여섯 규와 서른 정 사이의 선이구나. 그래서 규는 눈물이 나는데 입술 때문에 나는 거라고 합리화시키면서 조용히 울다가 잠이 듦.



그 다음 장면전환에서는 10년 전 규정의 첫만남이 조각처럼 스쳐 지나갔으면. 정은 오후 늦게 이사를 들어오고 있느라 무지 바빴고 규는 중3으로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다가 자기 동 앞이 복작복작하니까 뭔가 싶어서 기웃거려 봄. 그리고 엘리베이터 탈라고 동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기네 층인 10층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는 거. 빨리 집에 가서 티비 봐야 되는데 (기억하자 중3 밍구) 걸어가기도 애매한 높이라 발만 동동 구르고 막 있는 대로 짜증내는데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내려옴. 문 딱 열리는데 엘리베이터 내부에 벽 다치지 말라고 천 같은 거 깔아져 있고 안에서 무지 뽀얗고 야무지게 생긴 남자가 내리니까 아 저 사람이 이사왔구나 라고 생각한 다음에 아니 저 사람이...?! 하고 정 가는 대로 눈 굴러가는 거. 그러다가 다시 가구 들어올 때 얼떨결에 타서 구석에서 엄청 찌부되어 있었으면. 그리고 정이 버튼 근처에 있어서 규 보고 물어보는데 사실 그 때 규는 이미 반했다고 봐도 무방함.

- 저기, 친구야. 몇 층 살아?
- 어, 에, 저요?
- 응, 형이 눌러줄게.
- 아 저… 10층 살아요.
- 아 진짜? 무지 잘 됐네. 형은 여기 1004호에 이사왔어. 네가 그 1003호 아들이구나. 엄청 잘 생겼네.

이러고 그 좁은 틈새에서 눈이 마주치는데 규는 그 순간 천사를 본 것. 그래서 집에 가방 던져놓고 마이 막 벗어놓고 자기가 나서서 정 이사하는 거 도와주는 거지. 이사 끝나고 저녁 때쯤 돼서 정이 너무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짜그마한 초코바 같은 거 주는데 그날 집 들어와서 자기 전까지 초코바 못 까고 만지작거리기만 했으면 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규에게는 사실상 정을 처음 본 날부터 계속 짝사랑 중이었고 8년간 연애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때도 짝사랑 중이었다는 걸 드디어 깨닫게 되고서 물러나려고 하는 거.
사실 규가 퇴근하다가, 아니면 회식 가다가, 뭐 이런 저런 이유로 정이랑 정의 결혼할 여자가 같이 길을 걷는 걸 목격하는 장면도 생각했었는데 굳이 넣을 필요 없을 거 같았구 쓸 생각틀 하니 맘이 넘 아프다 그러니까 안 쓴다 그래서 규의 깨달음이 있은 이후의 밤 씬을 하나 넣고 싶다. 약간 뭔가 데면데면할 법도 한데 정은 아무렇지 않게 규한테 밥 먹자, 영화 보자, 술 마시자, 하고 규는 그게 정 그 자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옆에서 얘기 들어주고 약속 지켜주고 하는 거. 그치만 언젠가는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티비 보다가 역시나 제 등 쪽 보고 누워서 손장난치는 정에게 그럼.

- 형, 나 재단 기숙사 신청했어요.
- 어… 어?
- 재단에서 주는 기숙사, 그거 들어가기로 했다고요.
- 아…… 그래?
- 집 구하기 전까지는 거기서 살아야죠.

규는 그 말에다가 형도 이제 신혼집으로 갈 거고. 를 덧붙이려다가 말고 그냥 티비 끄고 정 쪽으로 돌아누움. 정은 혼지 동공지진 하고 있다가 규가 손으로 눈 덮어주고 자자, 우리. 하니까 눈 감고 조금 멋쩍은 듯이 웃어 보이고. 규도 아프지만 웃어 보이고 그렇게 약간 먼 듯 가까운 듯 거리 둔 채 잠들었으면.
사실 규는 기숙사 들어간 이후로 진짜 맘 접고 딱 친한 형 이상으로 정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게 쉽지 않은 것. 그래서 엔딩은 트위터에 풀었으니까 그거 사진 올리는 걸로 하구... 좀 맘 아프겠지만 정은 여전히 규와 사귈 때처럼 행동하고 거기서 규만 맘고생 하는 느낌으로 갔으면 좋겠다. 왜냐 내가 이런 거 좋아하니까. 끝까지 규가 아파서 맘이 참 그렇지만 그래도 규는 자기의 10년을 채운 정을 한번에 잘라낼 수 없었던 것. 규의 10년에는 정밖에 없었지만, 정의 10년에는 규가 그냥 우연히 들어왔길래 그런 대로 뒀을 뿐인 거지. 그래서 사진은 뭐냐면 아래에 있음.




결론 :: 이런 느낌의 아련하면서도 뭔가 이해 되고 그러면서도 아련한, 여름밤 같은 규정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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