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 윤정한

 

 

 

 

 

0730, 이별 이지훈의 기록

[우정전력 :: 읽지 않은 메시지 1]

 

 

 

 

 

 

 

w. (@hyemm_is_yoonr)

 

 

 

 

 

 

 

 

 

 

 

 

 

 

 

요 즈음 형은 한동안 쓰질 않던 휴대폰의 문자 기능을 자주 사용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를 끝마치고 인턴을 하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짤막한 밥 때에, 그 외의 언제든 휴대폰을 들어 올리면 항상 읽지 않은 메시지 1, 이라는 글자가 잠금화면 위에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간단한 용건이라도 목소리로 전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었으나, 형에게서 문자가 와 있을 때면 그저 별 수 없이 엄지를 놀려 답장을 꾹꾹 써 내려갈 뿐이었다. 형도 물론 전화를 더 좋아해서 얼마 전까지도 혼자 한 시간 씩이나 재잘재잘 제 얘기를 하고는 했다.

허나 이제는 그럴 수가 없을 테지. 나는 어렴풋이 생각만 할 뿐이었다.

 

 

 

 

 

[지훈아, 오늘도 밥 잘 챙겨먹고 있지? 형은 오랜만에 학원 나왔어. 트레이너 형이랑 이것저것 얘기도 하고, 잠깐 병원도 다녀오기로 했다? 근데 있지, 그 형이 네가 있는 병원으로 가자는 거야. 원래는 비밀로 하고 몰래 너 찾아가기로 했는데 바쁠까봐, 혹시나 싶어서 말해주는 거다, 알지? 시간 괜찮으면 잠깐 얼굴 봤음 좋겠다. ;; 오늘 못 봐두 내일 보기로 했으니까 기다릴 수 있어! 답장두 기다릴게, 이지훈 파이팅!]

 

 

 

 

 

형의 문자는 늘상 이런 식이어서 나는 대화를 할 때마다 편지를 뜯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꾸역꾸역 글자 수를 넘겨 MMS로 넘어가는 게 답 텀이 느린 내 탓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는 단어 하나에서 형의 목소리를 듣고, 조그만 이모티콘 하나에서 형의 표정을 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곧 사로잡힌다. 말려드는 입 꼬리를 저 하고 싶은 대로 두고서 자판 위로 양 엄지를 올렸다. 보낼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어느 순간 습관이 되어 있었다.

 

 

 

 

 

으음, 오늘은, 내가 곧, 회진 있어서, 힘들 것 같구

이지훈, 뭐 하냐? 또 문자질?”

 

 

 

 

 

자그마한 휴대폰 화면과 숙직실 벽의 절반을 채운 화이트보드달력처럼 생겨서, 일정표로 쓴다.를 번갈아보던 중, 어깨 위로 팔을 턱 걸친 전원우가 화면 위로 시선을 던지며 물어왔다. 저 새끼는 꼭 나 문자하고 있을 때만 친한 척 하더라. 얼굴을 팍 구기자 팔을 치우고 몸 사리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는 꼴이 웃겨, 나는 급하게 문장을 맺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책상 위로 휴대폰을 뒤집어 놓자 그제야 시선이 가셨다.

 

 

 

 

 

정한이 형이야, 잠깐 병원 들른대서.”

그래? 그럼 잠깐 내려가서 얼굴 보고 와. 너 또 거절했지, 바쁘다고.”

, 사실이잖아. 여기서 놀고먹는 것도 걸리면 아작인데, 그리고 난 이제 인턴 1년차거든요, 전원우 선배님. 너랑 나랑 같냐?”

그래도 너 요새 정한이 형 목소리도 잘 못 듣는다며. 그 형 아프다 그랬나?”

어어, 한 이 주 쯤 전에 감기 걸렸다 그래서 몰래 약 타줬는데, 잘 안 떨어지나 봐. 예민할 때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았는데, 좀 심각한가 보네.”

 

 

 

 

 

내 맞은편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고개를 주억거리는 전원우는 레지던트 6개월 차, 굳이 덧붙이자면 내 직속 선배이다. 개인 사정 상 군대를 면제받은 덕에, 내가 군 생활 하고 휴학하는 동안 인턴을 마쳤단다. 정한이 형과는 총학생회에서 만나 어째저째 아는 사이라고 했던 것 같고. 물론 인턴만 하겠냐만은 그래 봤자 정식 의사 된 지 1년도 못 채운 전원우가 자주 놀고먹는 것 같아 사실은 좀 고깝다. 그래도 형 얘기에 토 안 다는 게 어딘가 싶기도 하고. 전원우는 가운 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만년필을 습관적으로 손에 쥐고 빙글빙글 돌리며 퍽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정한이 형 목소리 들어 보긴 했어?”

, 전에 약 타줄 때랑, 지난 주 쯤이었나, 전화하다가 목 아프다고 그래가지고 끊었을 때랑. ?”

아니 뭐, 이런 얘기는 좀 그런데 감기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싶어서.”

……뜬금없이?”

원래 사람 아픈 건 뜬금없잖아. 물론 감기가 잘 안 떨어질 수도 있기는 한데, 그 전화 좋아하는 사람이 맨날맨날 그렇게 정성스럽게 문자하는 거 보면 답 나오지 않냐고.”

 

 

 

 

 

아이, , 나야 일개 레지라서 판단은 못 내리니까 그냥 생각은 해 두라고. 형 바빠서 가 본다.

제 딴에는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불편했는지, 전원우는 빙빙 돌려서 어물어물 말을 맺더니 이내 숙직실을 쏙 빠져나갔다. 나는 가만히 뒤집힌 휴대폰을 들어 본다. 14 : 38. 가는 선이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휘어져 숫자를 그려낸 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곧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밀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짧게 울리는 진동은 모른 척 했다. 사실은, 생각을 해 보지 않은 적 없어서 조금 착잡했거든.

 

 

 

 

 

나는 의과에 진학을 한 이후로부터, 전공 수업을 지겨울 만큼 들었던 시절을 지나, 인턴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항상 어떠한 딜레마에 사로잡혀 있었다. 병원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는 곳이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생을 마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전혀 상관없는 사이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세 부류의 사람이 단란한 가족인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후자의 경우에, 누군가의 삶을 쥐고 뒤흔들 만한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줄곧 고민해 왔다. 마치 내가 상대의 생명을 재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목적 없이 휴학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 전원우는 특유의 늘어지는 투로 내게 같은 말을 되풀이했었다. 어차피 사람은 한계가 있는 거고, 우리는 그냥 그 한계를 전달해 줄 뿐이지. 나는 머리로는 그 문장을 전부 이해하면서도, 끝끝내 내 맞은편에 앉은 형을 상상하고서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원우에게 되묻길 수십 번 했었지. 네가 나라면, 정한이 형한테 그런 말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느냐고.

 

 

그 때 전원우가 뭐라고 했더라. 답지 않게 멋있는 말이어서 좀 놀려줬었는데

 

 

 

 

 

훈아,”

…….”

지훈아!”

, . 죄송합니다.”

아냐, 안 그래도 오늘 힘들었지.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겨 버려서. 너무 마음 쓰지 말고, 퇴근해도 좋아. 수고했다.”

 

 

 

 

 

정신이 좀 팔려 있던 모양이다. 인턴 지도를 담당하시는 최 과장님은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 곧 제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뾰족한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과 닿아 공명하는 소리가 점차 옅게 흩어졌다. 나는 로비에 멍하니 선 채 목적 없이 시선을 옮기다가, 곧 숙직실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은, 그래, 일주일 정도 특정 범위의 병실 회진을 돌면서 인사를 몇 번 주고받았던 환자가 갑작스런 발작으로 급히 옮겨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서 있었다. 물론 내가 개입할 일은 아니었지만, 조금, 무서웠달까. 그 사람은 아마 지금쯤, 현대 의학이 손을 뻗어준 덕으로 가는 숨이나마 내쉬고 있으려나. 목에 걸린 명찰을 빼내어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는데, 뒷주머니에 꽂힌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짧고, 일정하게, 여러 번. 나한테 전화하는 사람 없는데, 중얼거리며 손을 옮겨 휴대폰을 쥐었다. 어깨로 숙직실 문을 밀어 들어가는 순간 진동이 멎었고, 액정 위에 떠 있는 몇 개의 단어. 참 낯익은데, 그만큼 낯설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 3]

[부재중 전화 1]

 

 

 

 

 

나는 배정받은 침대 위에 몸을 던지듯이 누이고, 내 옆으로 가운을 집어던지며 부재중 전화 발신자부터 확인했다. 저장이 되어있지는 않으나 낯익은 번호, 형의 학원 트레이너일 것이다. , 나한테, 전화를? 한 음절씩 뚝뚝 끊어 중얼거리며 메시지 창을 누르고서,

 

나는 잠시 동안 손가락이 굳어, 차마 메시지를 읽지 못하고 휴대폰을 허벅지 위로 떨어뜨렸다.

 

 

 

 

 

[지훈아 형 지금 병원 앞이야 벤치에 앉아있어]

[지훈 씨 바빠요? 전화 안 받으셔서 문자 남깁니다 정한이랑 방금 병원 들렀]

 

 

 

 

 

형에게서 온 문자는 두 통이었는데, 가장 최근에 온 문자가 그 전 것을 덮어 나는 다만 형이 병원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밖에 알지 못했다. 그리고 트레이너에게서 온 문자는 방금 전에 막 도착한 것이었고나는 굳이 그것을 열어보지 않아도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물어 본다. 적어도, 이것은 꿈이 아니며, 나의 상상도 아니나, 실재 가능한 상황 중 최악이다. 휴대폰을 세게 쥔 채, 나는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숙직실을 박차고 병원 밖으로 달렸다. 두 다리를 바삐 움직이는 동안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생각은 그것이었다. 주저앉지 않아서 다행이다.

 

 

 

 

 

형은 다 낡아빠진 가로등이 깜빡거리는 아래에 앉아, 병원 로비를 하염없이 응시하면서,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 꼬리를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공기 중에 드러난 팔 위로 꿉꿉한 감촉이 달라붙었다. 짜증이 확 솟구친다. 그럼에도, 나는 벤치에 걸터앉은 형의 어깨 위로 팔을 둘러, 할 수 있는 한 세게 형을 끌어안았다. 형은 가만히 품에 얼굴을 묻고서, 옅게 웃을 뿐이었다.

 

 

 

 

 

…….”

…….”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제발.”

 

 

 

문자, 안 읽었지. 그럴 줄 알았어. 이십 분이나 늦고.”

 

 

 

 

 

천 따위에 입술이 반쯤 막혀 웅얼거리는 형의 목소리가 들린다. 명백하게 거친, 목이 잔뜩 긁히는 쇳소리가 음성을 타고 흐른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두워진 시야 위로 가로등 불빛의 잔상이 어지럽게 점멸한다. 형은 여전히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 팔을 옮겨 가만가만 내 등을 두드리고, 성치도 않은 목소리를 자꾸만 내었다.

 

 

 

 

 

지훈아, 형이 항상 말하잖아. 너는 뭐를 해도 잘 할 거라고. 뭐를 해도, 성공할 거라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 스스로한테 좀 관대해졌음 좋겠어. 알지?”

……,”

그리고 덥다구 에어컨 빵빵 틀어놓고 자지 말구. 그러다가 감기 걸리고 냉방병 걸리는 거, 하아, 금방이니까, 몸 챙기면서 일 해.”

, 잠깐만,”

 

 

 

 

 

등을 토닥이던 형의 손이 멎는다. 곧 내 어깨를 쥐어 밀어내는 탓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눈가를 조금 찌푸린 형이, 시선을 당겨 저보다 위에 있는 나를 올려다본다. 눈가가 발간 게 누가 봐도 운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 와중에 입 꼬리가 예쁘게 말려 올라가 있어서, 나는 타의로 닫은 입술을 조금 벌려 헛웃음을 뱉었다. 곧 형이 나를 끌어당기어, 내 입술 위로 열이 오른 제 입술을 붙였다 뗀다. 보는 눈 운운하며 손잡는 것도 거절하던 그 답지 않아서, 나는 조금 울 것 같았다. 형은 입술을 반쯤 벌려 억지로 호흡을 고르고서, 몸을 일으켜 반쯤 돌아선다. 붙잡아야 하는데, 나는 머리가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서도 겨우 손만 뻗은 채 황망히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덥다, 들어가서 몸 식혀, 지훈아.”

……, 잠깐만요,”

 

 

 

 

 

억지로 팔을 뻗었을 때, 손가락 끝이 형의 어깨를 스치고, 그대로 공기를 한 움큼 쥐어 갈랐다. 나는 여전히 초점이 반쯤 나간 눈으로, 멀어지는 형의 모습을 한참 담다가, 점멸하는 가로등이 완전히 꺼지고서야 등을 돌린다. 숙직실로 향하는 몸이 무겁고, 다리가 무겁고, 전하지 못한 말들이 가득 쌓인 마음이 제일 무거웠다.

 

 

 

잔뜩 구겨진 가운이 널린 침대 위로 몸을 붙여 본다. 휴대폰을 어찌나 꽉 쥐고 있었는지, 열을 받아 뜨거운 기계를 침대 위로 떨어뜨리자 손바닥에 가득 땀이 배어났다. 나는 답답하게 막힌 침대 위를 멀거니 올려다보다가, 이불을 타고 느껴지는 진동에 고개를 돌린다. 읽지 않은 메시지, 3. 그 가운데 두 건은 형이 보낸 것이고, 나는 곧 그 문자들을 지울 것이다. 방금 온 것은 발신자표시제한. 나는 겨우 고개만 옆으로 돌린 채 화면 위로 시선을 꽂고, 길게 숨을 뱉는다. 정한의 이름자 위로 검지를 갖다 대고, 길게 그 위를 눌렀다. 손이 떨려서 입술을 깨문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고 침대 위로 얼굴도 묻어 버렸다.

마지막 문자는, 영원히 읽지 않을 것이다.

 

 

 

 

 

문득 전원우가 했었던, 멋진 말이 떠올랐다.

만약 정한이 형이 아프다 치자. 내가 너면 무조건 같이 있어줄 건데? 무섭잖아, 당사자가 아닌 사람도 무서워 죽겠는데, 선고 받는 당사자는 어떻겠어. 그러니까 옆에 있어 줘야지. 손도 잡아 주고, 울면 눈물도 닦아 주고.

나는 전원우의 목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지는 동안, 눈가가 뜨거워 쉬이 잠들지 못했다.

 

 

 

이것으로 이별, 이었다.

 

 

 

 

 

 

 

 

 

 

-

[발신자 표시제한

 

지훈아형이랑만나줘서고마웠어더잘해주지못해서미안해형이너많이사랑]

 

 

 

fin.

// 계간윤른 겨울호 참여글 업로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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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소재, 후반부 유혈 묘사 있습니다 //

 






김민규 × 윤정한 × 이석민

 

 

 

성년은폐(成年隱廢) ; 성년을 감추어 깨뜨리다.

 

 

 

 

 

w. (@hyemm_is_yoonr)

 

 

 

 

 

 

 

 

 

 

1.

 

 

 

2016. 인간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금방이라도 늘어질 듯하면서도 끊기지 않는, 팽팽한 대치상태. 낭떠러지를 등진 소년 셋은 무채색의 연구복 차림인 남자 다섯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정한이 손을 뒤로 뻗어 석민의 옷깃을 쥐고 끌어당긴다. 민규는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보다 픽 웃었다. 윤정한, 무서워? 농담조의 물음에 정한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민규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일순 낮게 깔렸다. 지랄하지 마. 정한의 손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긴 석민이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민규가 아래로 떨어뜨린 손을 세게 말아 쥔다. 반쯤 고개를 비틀어 석민을 스치듯 마주하고서 가볍게 웃어 보인 정한이 곧 잡고 있던 옷깃을 놓고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잔뜩 긴장한 상대의 얼굴을 쭉 훑은 그가 차분하게, 그러나 명확한 음성을 뱉었다.

 

 

 

 

 

차라리 기계 연구를 계속 하시지 그러셨어요. 우리보다 멍청하고, 감정도 없고, 심지어 도망치지도 않을 텐데.”

“S1004, 들어가서 얘기하지.”

인간은 바보가 아니에요. 감정도 있고, 그러니까 도망치는 거죠. 이제 인정하시겠어요?”

 

 

 

 

 

그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아오던 세계를 똑같이 살아가는 민간인과, 그 민간인이 소위 일컫는 초능력이라는 것을 가졌다는 이유로, 세계에 복종하도록 키워지는 이능력(異能力). 보통의 민간인은 이능력자의 화려한 겉치장만을 보므로정확히는 정부가 그렇게 선전하므로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거나, 그 이능력자 집단을 동경하고 더 나아가 질투하기도 한다.

 

 

 

 

 

백설화명(白雪花明), 절경의 설원으로.”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공중으로 하얗게 김을 내며 부서졌다. 그 순간정한의 까만 눈동자로부터 흰 빛이 일어, 고리 모양을 그리며 그의 몸을 감쌌다. 질겁하는 연구원들을 향해 정한은 한 쪽 입 꼬리만을 끌어올려 웃었다. 곧 빛의 고리가 강하게 수축하고 이완하여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듯 퍼져 나간다. 보도블럭과 그것을 딛고 선 발 사이의 아주 얇은 틈으로까지 빛이 흘러넘치고 나서야, 세상은 한순간에 하얗게 뒤덮인다. 땅도 하늘도 온통 백색으로 뒤덮여, 이따금씩 큼지막한 눈송이가 내리는그야말로 절경의 설원이 된 것이다. 정한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민규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재밌겠는데? 단정하게 채워져 있던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어 내리던 그의 팔을 왼쪽에 선 석민이 잡아 제 쪽으로 세게 당겼다. 함박눈이 두텁게 쌓여 묵직하기까지 한 언덕 위로 몸이 반쯤 파묻힌 민규가 미간을 좁혔다.

 

 

 

 

 

좀 기다려, 김민규.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 없잖아?”

또 뭔데?”

아직 불안정해. 윤정한이 뒤로 물러나면 그 때 가도 안 늦어.”

 

 

 

 

 

그러나 그 이면은 정반대.

 

 

 

 

 

관철복사(觀徹復事), 예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석민의 두 눈이 일순 형형하게 빛났다. 민규는 걸치고 있던 검은색 교복 마이 위에 앉은 눈을 손으로 툭툭 털었다. 두께가 얇은 탓에 금세 녹은 눈이 스며들어 군데군데 색이 짙어져 있었다. 석민은 민규를 제 쪽으로 좀 더 끌어당기고 언덕 뒤로 몸을 숨긴 채 두 눈만을 아슬하게 내어 반대쪽의 동태를 살폈다. 정한의 주위로 빛의 파장이 한 번 이완할 때마다 연구원들이 밟고 선 눈밭이 높게 솟아올랐다. 석민의 눈동자 위로 푸른빛이 스치고, 기관총을 꺼내 드는 군인의 잔상이 스친다. 인력 낭비네, 고작 우리 셋을 잡겠다고. 그는 입술을 감쳐물고 잘근, 뼈가 울려 소리가 들리도록 이에 힘을 주어 씹었다. 그 옆에 긴 몸을 접은 채 습관처럼 손가락뼈를 꺾던 민규가 몸을 틀어 물어왔다.

 

 

 

 

 

그래서 난 언제 나가면 되는데?”

앞으로 30초 뒤, 지원군이 합류할 거야.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적다고도 할 수 없어. 얼핏 봐도 스무 명은 되는 것 같았으니까.”

, 존나 쓸데없는 짓은 사서 하네.”

지금부터 10초 뒤에 윤정한이랑 자리 바꿔.”

 

 

 

그 다음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잘 하는 거 있잖아?

 

 

 

 

 

보통은 6세에서 13세 사이에 이능력이 발현된 아이들을 교외의 특수행정과 산하 연구기관, 통칭 이능력개발원으로 보내는 것이 최선의 방침. 기관으로 보내진 아이들은 이능력자만을 모아둔 학교에서 자라며, 궁극적으로는 정부의 친위대로 키워진다.

 

 

 

 

 

입 꼬리를 당겨 늘 하던 대로 웃어 보인 석민이 민규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등 뒤에서는 눈이 날리고, 밟히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섞이는 구둣발 소리. , , . 민규의 입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숨에 마지막 숫자가 섞임과 동시에, 눈밭에 파묻혀 버둥대는 연구원들 앞으로 전투 군인 이십 여 명이 죽 늘어서서 옆구리에 낀 기관총을 일제히 장전했다. 귀에 거슬리는 금속 마찰음이 한데 섞여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입술 끝을 깨물고 그 사이로 작게 욕지거리를 뱉은 정한이 제 어깨에 손을 짚은 민규를 돌아보았다.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술 끝이 이질적이어서, 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민규야, ‘그거할 거야?”

달리 할 게 있어?”

아니, 없지.”

네가 나한테 집착하는 유일한 이유잖아, 내 능력. 틀려?”

 

 

 

양화작열(煷火灼熱), 마지막 불꽃놀이를.

 

 

 

 

 

이능력개발원이 하는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최근 10년간 기술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기관은 6세에서 10세 사이의 아이들을 데려와, 실험을 통해 이능력을 심는다. 극한의 실험 과정에서 성공한 아이들은 이능력자 가운데에서도 상급으로 칭송받고,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한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줘 그를 등 뒤로 밀쳐낸 민규가 평소보다 반 톤 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뱉었다. 곧 눈동자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붉은 빛이 민규의 몸을 감싸고, 한 걸음 내딛자 빛으로부터 불길이 치솟아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화염의 구체가 떠올랐다. ‘사격 준비!’, ‘사살하라!’ 따위의 거친 외침이 민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한쪽 입 꼬리만을 당겨 올린 그가 오른손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리고 엄지와 검지를 맞부딪치자, 둥글게 뭉쳐 있던 화염체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공중으로 치솟았다. 빛의 파장에 둘러싸인 민규가 선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작게 소리 내어 키득이며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깨어진 화염체 파편은 연구원들이 파묻힌 설원과 일렬로 늘어선 전투 군인 쪽으로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강한 불꽃이 설원에 처박혀 눈발이 튀고 날렸다. 민규의 등 뒤에 서 있던 정한이 두 걸음을 내딛어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다정하고 사근한 음성이 전투의 소음에 섞여 들었다.

 

 

 

 

 

오늘도 멋있네, 불꽃놀이’.”

안 멋있으면 아마 꼰대들이 열 꽤나 받을 걸.”

그러겠지, 확실히 너한테는 애정이 꽤 있는 것 같던데?”

지랄, 애정보다는 실험욕이 아닐까.”

 

 

 

 

 

죽은 아이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알 수 없다.

 

 

 

 

 

날카로운 민규의 대답에 정한이 소리 내어 웃는다. 잔뜩 접혔던 두 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정한의 눈동자는 다시금 눈부시게 빛났다. 민규는 제 붉은 빛을 삼키는 정한의 빛 파장에서 시선을 떼어 멀리 상대 쪽을 응시했다. 선혈이 스민 눈발이 다시 하늘 위로 튀어올라 마치 분홍빛 눈이 내리는 것도 같았다. 사람 죽이는 주제에 예쁘긴 존나게 예뻐요. 씹어뱉듯 읊조린 혼잣말을 들었는지 정한이 꾹 다문 입술 새로 웃음을 흘렸다. 머리 위로 쳐든 그의 오른손 위로 민규의 화염체보다도 더 큰 빛의 구체가 형형하게 설원 위를 비추고 있었다.

 

 

 

 

 

마지막인데 좀 더 예쁜 걸 보고 죽는 게 훨씬 낫지 않아?”

……싸이코냐.”

그럴 리가. 그저 내 따뜻한 마음이고 배려의 일종인 걸?”

말이나 못 하면.”

백설화명(白雪花明), 설원 위의 빛으로 수렴하라.”

 

 

 

 

 

기관은 이런 식으로 생명을 다루는 것에 죄책감이 없기 때문에, 이능력이 늦게 발현되어 폭주한 민간인을 사살하는 권한을 정부로부터 빼앗았다. 그리하여 아주 드물게 중고등학교 등지에 그러한 민간인이 출현할 경우, 그가 얼마만큼의 피해를 줬는지에 상관없이 그를 사살한다. 또는 기관의 연구 대상으로서, 처참하게 파헤쳐진다.

 

 

 

 

 

감정이 지워진 얼굴을 하고서 헛웃음을 뱉는 민규를 따라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정한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곧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구체가 하늘 위로 빠르게 솟았다가, 점점 더 붉게 물드는 설원 위로 내리꽂힌다. 튀어 오른 눈 결정과 빛의 파편이 부딪쳐 강한 광선으로 바뀌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광선은 세 소년이 마주하고 있던 사 층짜리 건물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창문이 깨지고 벽돌이 으깨지는 소음이 바닥마저 진동시킨다. 언덕 뒤로 몸을 피하고 있던 석민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고, 가만히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보고 선 민규는 제 허리에 팔을 감아오는 정한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정한은 제 쪽으로 틀어진 민규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접어 웃었다. 굉음이 울리며 설원이 조각조각 깨어지기 시작했고, 발밑으로 도톰하게 쌓여 있던 눈이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아주 희미하게, 건물이 부서지는 틈으로 찢어지는 비명이 섞이기 시작한 것도 같았다.

 

 

 

 

 

가자.”

 

 

 

 

 

가운데 층이 뚝 잘려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을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하던 석민이 먼저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얇은 운동화 밑창에 닿는 보도블럭의 질감이 낯설었다. 정한은 민규에게 반쯤 기댄 채 몇 걸음 걷는 듯 하다가, 이내 손을 뻗어 석민의 교복 마이 자락을 꾹 쥐었다. 운동화 뒤축을 질질 끄는 소리가 민규의 걸음 뒤로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정부를 거스르려는 이유이다.

 

 

 

 

 

, 일련의 포격음이 터진다. 터질 것이었다. 석민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한 해의 끝자락이자, 명백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2.

 

 

 

성탄을 맞은 기숙사는 어수선하게 들떠 있었다. 사감이며 감시 전담 연구원들이 거의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머리가 좀 컸다 싶은 애들은 저마다 조를 짜서 교외로 놀러 나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개중에는 새로 출시된 FPS 게임을 할 생각에 들뜬 중학생도 있었고, 소위 말하는 데이트를 위해 남자친구의 손을 잡아끌고 먼저 걸음을 옮긴 여자애도 있었다. 사실 이것은 매 해 성탄절이 돌아올 때마다 일어나는 연례행사와도 같은 일탈이었다. 다만 올해는

 

 

 

 

 

좀 더 계획적으로 바뀐 것 같지?”

……그래?”

뒤 봐 주는 애도 있고, CCTV 꺼 주는 애도 생겼고. 다들 머리를 쓰기 시작한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어차피 저렇게 나가는 애들 중에 제대로 돌아오는 거 절반도 안 돼. 우리가 신경 쓸 일 아냐.”

 

 

 

 

 

기숙사 방에 작게 난 쪽창을 방충망까지 열어젖히고, 그 아래로 빠르게 걸음을 놀리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정한은 평가하듯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명백하게 긍정을 요구하는 물음 뒤로 민규는 던지듯 대꾸하며 제 침대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낡은 매트리스가 푹 꺼지며 삐그덕 듣기 싫은 소음이 울린다.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며 입술을 삐죽이는 정한에게, 석민은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솔직히 김민규 말도 맞잖아, 그게 팩트니까. 다정하게 방 안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별안간 꼴사나워서 민규는 입술 끝을 씹으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뒤척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질 만큼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창 밖에서 여과되지 않은 총성과 어린 아이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그 사이를 강하게 찢고 들어왔다. 정한은 금세 감정이 싹 지워진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망설임 없이 창문을 닫았다. 민규야, 그러니까 네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야. 창문에 등을 기대고 돌아 서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가 조금 들뜨게까지 느껴지는,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탈출을 하려면, 좀 더 체계적으로 해야지. 어차피 우리도 오늘 간 좀 보다가 괜찮다 싶으면 나가려고 했던 거잖아?”

…….”

우리야 저 애들보다 등급이 높다 치지만, 그래도 무작정 나갈 수 있다고 믿었으면 아마 지금쯤,”

다 죽었겠지. 한 명 쯤은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정한과 석민이 서 있는 창가로 걸음을 옮긴 민규가 뿌옇게 흐려져 반투명하기까지 한 창문 너머를 곁눈질하며 그렇게 대꾸했다. 뒷말을 채인 정한이 눈가를 가볍게 찡그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민규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건조해진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는 석민이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고개를 내저었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아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식어 갔고, 그 아래 시멘트 바닥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얇은 벽을 타고 세 사람보다 좀 더 어린 비명이 흘러들었다. 입 안쪽 여린 살을 가볍게 씹던 석민이 퍽 소란스러운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자동 소총 같은 걸 들여왔다고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았는데, 저런 데 쓰일 줄은 몰랐네.”

그거라면 소문으로 났었지 않아? 평소에는 CCTV와 같은 용도로 쓰이다가 여차하면 사람을 쏴 버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근데 단순히 이탈자가 발생한다고 해서 총을 쏘는 건 아닐 거야,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정한이 너도 봐서 알겠지만, 저 애들 중에는 탈출한 무리도 있고 그러지 못한 무리도 있어. 죽은 애들 공통점이 뭐인 것 같아?”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녹이 슨 창틀을 짚고 곁눈질로 창밖 어딘가를 응시하며, 석민은 민규에게 반쯤 가려진 정한에게 물음을 던졌다. 정한은 제 시야를 절반은 가리고 선 민규 쪽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굳게 닫아 뒀던 창문을 반쯤 열고 방충망 틈으로 1층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아플 만큼 선명한 적색의 시멘트 바닥, 그리고 선혈로 물드는 회색 교복을 걸친 대여섯 명의 아이들을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하던 정한이 느리게 미간을 좁힌다. 설마, 낮게 씹어뱉은 단어에 민규가 낮게 웃음을 뱉었다. 그렇게 눈썰미가 없어서야 탈출은 하겠냐? 반쯤 비아냥대는 투에 정한의 어금니가 까득, 소리를 내며 갈렸다.

 

 

 

 

 

지금 죽은 저 애들, 모두 교복 색이 회색이야.”

그 정도는 나도 봐서 알거든?”

그러니까 등급이 높다는 거잖아? 낮아 봤자 B 정도일 테고, 보통은 A급이겠지.”

……, 탈출했을 때 더 위험할 것 같은 애들만 죽인다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딸린 CCTV가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으니까 구별할 수 있는 건 기껏 해봤자 교복 색 정도일 테고. 그럼 우리가 저 문으로 빠져나간다 치면

 

 

 

 

 

즉사겠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냉정한 민규의 마지막 말이 차게 식은 내부 공기와 섞여 보이지 않는 곳으로 흩어졌다. 석민은 비틀린 입술 끝을 감쳐물고 정한이 열었던 창문을 굳게 닫았다. 다시금 정적이 내부로 스며들어, 서서히 세 사람의 목을 죄어 온다. 윤정한은, 그런 정적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민규의 말에 오류는 없었고, 그것이 사실이며, 곧 그 사실이 제 앞에 놓인 상황이다. 결말이 단 하나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어쨌든 정한은 죽음 앞에서 망설이게 되는 저 자신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삶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저 스스로 민규를 찾아온 그 날 부로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얇은 셔츠가 감긴 마른 몸이 느리게 움직여 민규와 석민을 마주하고, 일부러 물들인 듯 붉은 입술이 어울리지 않는 밝은 투의 음성을 뱉어낸다. 감정이 사라진 것만 같던 입 꼬리는 어느 사이에 예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근데 뭐, 살아 나갈 수 있었으면 진작에 나갔어야지. 지금 이 나이로 살아서 여길 걸어나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불가능한 거 아냐?”

…….”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엿 먹이자는 게 우리 목표잖아. 맞지?”

, 네 말이 맞아.”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 없네. 저 애들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죽지 않으려면, 좀 더 철저하게 계획해야지.”

 

 

 

 

 

생긋 미소 짓는 얼굴, 웃는 상으로 반쯤 접힌 두 눈. 그런 표정을 하고도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뱉는 정한을 민규는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제 날카로운 옆얼굴이 담긴 것도 같은 그 새까만 눈동자에서, 민규는 문득 살기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입술을 잘근 씹었다. 윤정한의 본질인 것 같으면서도 꾸며낸 것만 같은 낯선 기운은 정한이 민규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부터였을까. 정한에게 긍정하는 석민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도 구하려고했던 걸까. 이층침대 울타리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던 검은색 마이를 꿰어 입는 정한의 뒤통수를 응시하는 민규의 입술이 아프게 깨물렸다. 곧 단정하게 마이 단추를 채운 정한이 반 바퀴 돌아 민규의 앞에 선다. 아까보다도 더 밝은 미소가 그의 얼굴을 잔뜩 뒤덮고 있었다.

 

 

 

 

 

민규야,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해야 될 일은 연습밖에 없어.”

……알아.”

가자, 연습하러.”

 

 

가자, 올해의 끝자락에서 나랑 같이 죽으러.

 

 

 

 

민규는 어디선가 날카로운 이명과 더불어 뒤틀린 감정이 담긴 환청을 들은 것만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주머니에 꽂았던 제 손을 먼저 끌어당긴 정한이 먼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리하지 마, 민규의 뒤통수에 대고 충고하듯 말을 던져 뱉은 석민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규는 이제 그 시선 쯤 못 본 척 지나칠 수 있었다.

 

고쳐 잡은 정한의 손은 언제나처럼 차다. 그러나 김민규는이 손을 놓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

 

 

 

 

 

 

 

17세의 가을은 예년보다 유난히 더 추웠다. 다 낡은 방충망이 고작인 한 겹의 창문을 매서운 바람이 쥐고 흔들었다. 어느 방에서는 바람 때문에 창문이 깨져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소문마저 돌기 시작했다. 그런 탓으로 사감 측에서 창가로 접근하지 말라는 공지까지 내려졌으나

김민규는 그 날도 어김없이 낡은 걸상에 걸터앉아 창문 너머 흔들리는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로 내리깐 눈동자는 상념이 이리저리 뒤섞여 탁한 회색이다. 무채색으로 물든 그 옆얼굴을 마주하는 석민은 자꾸만 드는 묘한 괴리감에 입술을 자주 깨물었다. 세찬 바람이 창문을 뒤흔드는 소음 위로 민규의 목소리가 꽤 묵직하게 얹혔다. 이석민, 저거 보여? 바깥을 가리키는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자리에는 차체도 창문도 모두 검은색으로 덮인 승합차 한 대가 막 주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저 차, 지난주에도 저기다가 차를 댔던 것 같은데. 뭐에 쓰는 거지?”

꼰대들 타고 다니는 차 아냐? 아니면 일반 연구원 전용…… ?”

 

 

 

 

 

어느새 민규 가까이 몸을 붙이고 선 석민이 의뭉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뚝 끊기듯 시동이 꺼진 승합차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물음에 단순하게 대꾸하던 민규는 차 문이 열리기 무섭게 바깥으로 쏟아져 내리는 흰 빛에 눈을 크게 뜨며 하던 말을 멈추었다. 놀란 것은 석민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급하게 창문을 열어젖히고 방충망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거의 차에서 집어 던져진 사람은 그리 나이가 많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우선은 그 성별조차 파악하기 힘들 만큼 눈부신 빛이 그의 몸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비척이며 몸을 일으키고 선 그를 둘러 싼 고리 모양의 빛 파장이 제멋대로 이완하고 수축하기를 반복하더니, 곧 연구원 몇이 남아 있던 승합차 위로 묵직한 함박눈이 쏟아졌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승합차는 지붕이 반쯤 내려앉았고, 빛이 세상을 집어삼키듯 한 번 퍼질 때마다 연구원들이 밟고 선 자리에 눈이 쌓인 언덕이 솟아올랐다. 낯선 사람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괴로워하더니, 곧 무릎이 팍 꺾이며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다.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이 일순 자취를 감추면서 그가 만들어 냈던 눈 또한 빛 조각으로 부서져 사라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연구원 하나가 비척비척 걸어와 그에게 무언가를 채우고, 그대로 두 사람의 시야를 벗어났다. 그들은, 그제야 드물게 보이던 검은 승합차가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알 것만 같았다.

 

 

 

 

 

……, 이석민. 우리 지금 좀 봐서는 안 될 걸 본 것 같은데,”

저 사람, 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자인가 봐.”

근데 저렇게 폭주했으니까 아마 꼰대들이 가만 안 둘 걸?”

아니, 폭주해서가 아닐 거야.”

그럼?”

원래부터 죽을 운명이었어, 저 사람.”

 

 

 

 

 

입술을 세게 깨문 채 잇새로 꾹꾹 눌러 뱉은 말에 민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개소리야. 죽음에 잔뜩 민감해진 그가 억누르지 못한 감정을 마구 뒤섞인 음성을 씹어 뱉었다. 석민은 낯선 이가 사라진 자취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겨우 민규의 옆얼굴을 마주하며 냉정하게 대꾸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나이 대에 기관 쪽으로 오는 경우는 한 가지 경우, 그러니까 민간인 사이에서 능력이 발현된 것밖에 없어. 거기다가 그 사람은 여기서도 폭주했고. 즉 통제력이 전혀 없다는 건데. 석민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추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민규의 건조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서 부서졌다.

 

 

 

 

 

나도 알아.”

……,”

근데 마침 그 사람이 우리가 처음 들어올 때 입었던 흰 교복이 아니라,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지.

사살 대상이다. 그러니까 난 지금 그 사람 구하러 갈 거야. 넌 어떡할래?”

……? 너 미쳤어? 그러다가,”

구할 수 있어.”

 

 

 

 

 

확실한 미래를 무시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다시 안 해. 그러니까 넌 어떻게 할래?

 

 

민규는 가끔, 무서울 정도로 단언하는 제 친구가 낯설 때가 있었다. 바다와 닮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던 그는 대답 없이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뒀던 마이를 걸쳤다. 석민의 입 꼬리가 가볍게 당겨 올라갔다. 그가 보는 것은 언제나 가장 정확한 미래의 어느 시점. 그렇기 때문에 민규는 믿어야만 했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석민은 입술을 꾹 닫은 채 마이 단추를 채우는 제 친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이라기보다는눈에 보인 미래의 잔상이라고 하는 게 맞을 지도. 그의 눈동자에서부터 시작된 푸른색의 빛이 일렁이듯 퍼져 나와 그의 몸을 감싸고 흘렀다. 몸을 반쯤 틀어 석민을 마주한 민규는 그 시린 빛에 눈가를 찌푸렸다. 얘나 쟤나 존나게 눈부시네. 농담조로 뱉은 투에 석민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곧 그를 감쌌던 빛이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자취를 감춘다. 걸상 위로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킨 석민이 민규보다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가자. 단단한 음성이 가라앉은 공기 위로 하얗게 부서졌다.

 

 

 

 

 

석민이 본 미래를 밟아 간 곳은 지하 1층이었다. 필라멘트가 곧 끊길 듯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알전구가 드문드문 걸려 있고, 어디선가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다가 끊기는 것을 반복하는, 전체적으로 스산한 층이었다. 민규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기숙사 동 지하에 격리 시설 비슷한 게 있다는 건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진짜였을 줄이야. 작게 씹어뱉으며 아래로 떨어뜨린 주먹을 꾹 쥐자 석민이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김민규, 무섭냐? 그 말투가 시비가 아니라는 것쯤은 간단하게 알 수 있어서, 민규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곧 앞으로 뻗은 왼손 끝에서 조그마한 불길이 일어 시야를 밝게 비추었다.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 본 석민이 정면을 보고서 입을 열었다.

 

 

 

 

 

내 미래가 정확하다면,”

정확하니까 그런 사족 달 시간에 본론부터 말하는 걸로.”

, 아무튼 지금 여기에는 CCTV도 담당 연구원도 없어. 물론 배치된 병력도 없고. 격리라기보다는 방치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설 같아.”

꼰대들도 귀찮은가 보지. 위에서 쨍알대는 애들 관리하기도 바쁜데.”

그리고 아까 끌려간 그 사람은 여기서부터 열 번째, 왼쪽 방에 있어. 아마 실신한 상태일 거야. 그대로 두면 발현된 능력이 다시 폭주해서 아까보다 더 처참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구한 뒤에는 어떻게 할 건데? 그것도 다 봐 뒀어?”

본 건 아니지만, C등급은 워낙 사람도 많고 그만큼 많이 죽어 나가니까, 저 애 한 명쯤 끼워 둬도 괜찮지 않을까? 데이터 없는 애들도 널렸잖아.”

그래, ……. 꼰대들이 C등급 애들 하나하나 봐줄 만큼 한가한 놈들은 아니지.”

 

 

 

 

 

꼰대들이란 단어를 씹어뱉는 민규의 손에서 피어났던 불길이 크게 일렁이자 그는 입술을 비틀어 깨물었다. 반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곧 석민이 일러준 열 번째 왼쪽 방 앞에 별 어려움 없이 섰다. 문에 작게 난 창문 너머로 앳된 얼굴을 한 남자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그제야 남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민규는 망설임 없이 제 손에 피워 올렸던 불길을 구체 형태로 뭉쳐 문고리 쪽으로 집어 던졌다. 낡은 스테인리스 재질의 문고리가 압축된 화염에 순식간에 녹아 문 아래로 흘러 내렸다. 석민이 발을 들어 문 가운데를 세게 차자 굳게 잠겼던 것은 손쉽게 안쪽으로 밀렸다. 숨 막히는 냉기가 방 안에 고여 있다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두 사람을 감쌌다. 불길이 사라진 왼손이 빠르게 식는다. 민규는 입술을 깨물고 맨바닥에 웅크린 남자 앞에 발을 딛고 섰다. 석민 또한 남자의 머리맡에서 그를 내려다보다가, 곧 자세를 낮춰 창백하게 질린 뺨 위로 제 손을 가져다댔다. 석민의 눈동자에서부터 흘러 방 전체를 감싸듯 퍼져나가는 청색의 빛은 아까와 달리 다정하고 포근했다.

 

 

 

 

 

관철복사(觀徹復事), 치유.”

 

 

 

 

 

석민의 입에서 뱉어진 음성이 옅은 푸른색을 띠며 방을 가득 채운 빛 속으로 녹아들고, 곧 그의 손에 닿았던 남자의 뺨이 극단적인 백색에서 흰 기가 섞인 살굿빛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석민은 손을 거두고 잔기침을 하는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곧 그가 눈을 뜨자 어느 사이에 푸른 기가 싹 사라진 눈동자로 그를 마주했다. 민규는 반걸음 쯤 물러선 자리에서 남자가 눈을 뜨는 것을 바라보고만 서 있다가, 썩 유쾌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오른손 검지 위로 작은 불씨를 피워 올렸다. 텅 비어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가 닿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민규는 남자의 발목을 죈 낡은 금속 위로 불씨를 옮겼다. 반쯤 녹이 슬었던 족쇄는 자그마한 불씨가 스치고 지나가자 빠른 속도로 녹아 남자의 발목에서 뚝 떨어졌다. 뻐근한 발목을 몇 번 돌려 보던 남자는 곧 무릎을 모아 웅크렸다가, 석민이 내민 손을 어색하게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낯선 옷이 군데군데 찢긴 게 의아한 듯 입술을 깨물며 눈동자를 굴리는 그에게, 반쯤 등을 돌리고 선 민규가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이능력개발원에 온 걸 환영해. 환영할 곳은 못 되지만, 어쨌든 당신은 사살 위기에서 살아남은 거야. 아마 폭주 상태의 기억은 전혀 없을 테고. 그럼 그냥 궁금해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살아가면 돼. 지금 당신이 할 일은 그 다친 다리를 어떻게든 움직여서 3층의 빈 방으로 향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흰색 교복을 찾아 입는 것. 나머지는 같은 옷을 입은 애들이 가르쳐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몇 초 정도 남았지?”

전속력으로 달리면 1분 정도는 벌 수 있을 걸?”

그렇대.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남아.”

 

 

 

 

 

그 눈, 다시 보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민규는 뒷말을 꾹 눌러 삼키고 석민의 손을 쥔 채 냉기에 몸을 덜덜 떠는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어색하게 몇 발을 내딛은 그는, 곧 문 바로 앞에 멈춰 서서 입술을 잘근 씹다가 석민과 민규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망설이는 듯 달싹이던 입술이 열리고, 하얀 숨과 함께 작은 음성이 그의 입술 끝에서 부서졌다.

 

 

 

 

 

저기, ……윤정한이야.”

 

 

 

 

 

던지듯이 이름을 뱉고서, 남자정한은 금방이라도 꺾일 것만 같은 다리로 달려 나갔다. 그가 남긴 발소리가 복도 위로 빠르게 퍼지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석민은 오래 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내 답답하게 채워져 있던 마이 단추를 두어 개쯤 풀었다. 정적이 흐르는 방 안으로 초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무렵, 두 층쯤 위에서부터 귀에 거슬리는 포격음이 흘러들었다. 석민은 입술을 비틀었다. 바지 주머니 안으로 양 손을 꽂은 민규가 그보다 두 걸음 쯤 앞에 서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석민,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어떻게 신경이 안 써지냐?”

여기서 살아가는 건 쟤가 이겨낼 일이고, 더 이상 우리가 도와줄 일은 없어. 운이 좋았다면 지금쯤 3층에 도착했을 거야. 언젠가는, 볼 수도 있겠지.”

…….”

가자.”

 

 

 

 

 

그리고 그 날 이후, 윤정한이란 남자는 더 이상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다.

 

 

 

 

 

 

 

 

 

 

3.

 

 

 

그로부터 6개월 뒤유난히 춥던 그 해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윤정한이 민규와 석민의 앞에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면 정한이 두 사람을 찾아 온 것이었다. 최근 6개월 간 훈련 성과가 세 배 이상 수직상승한 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 참이었다. 설마, 그게 진짜일 줄이야. 석민은 현관에 선 정한을 마주하고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민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물론 소문이 진짜일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6개월 전 김민규는, 위층에서 포격음이 들린 순간부터 정한이 살아남았을 가능성을 어느 정도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저와 같은 검은색 교복을 걸친 정한은 처음 봤을 때보다 머리칼이 단발 수준으로 자라 있었고, ()를 담고 있던 눈동자는 형광등 불빛을 받아 예쁘게 빛났다.

 

그리고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해사한 미소. 민규는 말려 올라간 입 꼬리를 마주하며 찰나 동안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의식적으로 공기를 들이마셔야만 했다.

 

 

 

 

 

안녕. ……, 잘 지냈어? 나 기억하지, 그때 그 윤정한.”

 

 

 

 

 

현관 문지방을 밟고 선 채 대답을 기다리던 정한은 석민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두 걸음 앞으로 옮겨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정한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가 방 안을 훑고 지나간다. 민규는 등 뒤로 숨긴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주먹을 쥐었다. 곧 그 시선이 석민과 마주치자, 정한은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묘한 냉기를 띠는 까만 눈동자는 석민의 마이 왼쪽에 달린 명찰 위로 내려앉았다.

 

 

 

 

 

“S0218……. 하여튼 정이 없어, 여기 사람들은.”

…….”

나 네 이름 알아. 이석민, 맞지? 진급할 때 담당 연구원한테 물었더니 금방 가르쳐 주더라고. 어차피 S등급은 우리 셋밖에 없다나. 그때 나 살려줘서 고마웠어.”

, . , 그럴 때 아니면 언제 쓰겠어, 전투용도 아닌 능력.”

그리고 옆에 너는 김민규. 화염 능력자라고 들었는데,”

 

 

 

나 사실 너 찾아온 거야, 민규야.

 

 

 

 

 

정한의 두 눈이 어색하게 웃는 석민을 스치고 지나가 민규를 올곧게 마주했다. 여전히 비어있는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 위로 민규의 잔상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상대의 눈에 비친 저를 마주하면서 입술 끝을 감쳐문다. 웃음기가 담겨 예쁘게 휜 눈꼬리가 매력적인 만큼 이질적이었다. 그 불편한 느낌은, 윤정한의 시선이 바른 만큼 잔뜩 뒤틀린 감정만이 눈 안에 남아있기 때문인 걸까. 민규는 문득 과거의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음성을 떠올렸다. 무엇이든 얻게 되면, 또 무엇이든 잃게 되는 법이지. 사람으로서 얻지 말아야 할 것을 얻게 된다면, 사람으로서 반드시 가져야할 무언가를 결국 잃게 될 거란다. 그래도 하겠니? 귓가에 스치는 음성을 애써 무시한 민규의 입가에서 내뱉은 숨이 하얗게 부서진다. 대체, 저 윤정한은

정의(正義)가 통하지 않는 이 세계의 꼭대기에 서기 위해서, 뭘 얼마나 버린 것일까. 민규는 제게로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이는 정한의 어깨를 차마 밀어낼 수 없어서, 손바닥 위로 투박하게 자란 손톱을 몇 번이고 박아 넣을 뿐이었다.

 

 

 

 

 

 

민규야, 내 능력과 네 능력을 합치면 아무도 이길 수 없대.”

…….”

나랑, 전부 다 이기고 나서, 같이 죽자.”

 

 

 

 

 

웃는 낯으로 잘도 그런 무서운 소리를 뱉는 정한을, 민규는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따라서 처음 한 순간에는 그를 동정했으나, 그의 웃는 얼굴을 마주했을 때 민규는 동정하는 것을 포기했다. 감정을 흡수당한 것 마냥, 그의 입술 새로 공허한 웃음이 샜다. 그것이 석민에게는 조소(嘲笑) 쯤으로 비쳤을까. 민규는 왠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를 설명할 길은 없었지만.

 

 

 

 

 

정한이 석민과 민규를 찾아온 그 날 밤은 여느 밤처럼 왁자지껄하지도, 금세 고요한 숨소리로 채워지지도 않았다. 긴장감이 쏟아져 흐르는 적막이 방 안 가득 고여 있을 뿐이었다. 민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뒤척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한참동안 입을 닫고 있던 터라 낮게 가라앉은 석민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았다.

 

 

 

 

 

……김민규, 넌 어떡할래?”

뭐를.”

윤정한을 우리 계획에 끌어들일래, 아님 거절할래?”

…….”

난 후자 쪽이 좀 더,”

윤정한 데려갈 거야.”

 

 

 

 

 

차분하게 흘러나오던 음성을 뚝 끊은 민규가 허공에 대고 꽂아 넣듯 말을 끝맺었다. 석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민규가 누워 있는 침대 쪽을 돌아다본다. 여전히 그는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였다. 석민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민규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했던 말을 거둬들이지도 않고서 석민의 입이 열릴 때까지 가만히 흰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김민규, 그의 목소리로 뱉어지는 제 이름이 퍽 낯설 만큼 낮아서, 민규는 꾹 다문 입술 새로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너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

윤정한이랑 너, 상극이야. 넌 결국 걔 파장 못 이겨.”

알아.”

죽을 수도 있어.”

나도 알아. 어차피 인간 이하로 살다가 죽는 거, 운명일지도 모르는 사람하고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잖아?”

 

 

 

 

 

농담조로 뱉고 키득 웃는 목소리가 어딘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음을 석민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민규는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여 시야를 막는다. 까맣게 죽은 그 위로 소리의 잔상이 스쳐 곧 소음을 만들어낸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윤정한의 능력은 실제로도 강력하고, 그것을 품고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강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김민규의 능력은 충분히 강하지만, 그가 원래부터 품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능력이 이식된 민규의 몸은, 그의 말대로 인간 이하로 죽어가고 있다. 민규는 거기까지 자각하고 있었다. 석민의 선택도 이해가 갔다. 저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인 동시에, 정한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겠지. 어쩌면 이석민은……, 미래를 본 그때부터 정한이 살길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지난 6개월간 윤정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어둡게 내려앉은 시야 위로 끊임없이 상념이 밀려든다. 민규는 낡은 침대 시트를 세게 그러쥐었다.

 

 

빨려 들어가듯이 잠에 들기 직전 마주한 정한의 얼굴을, 민규는 피하지 못했다. 앞으로 영원히 그를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될 운명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제 눈앞에 별안간 그런 식의 문장이 떠오르기 무섭게, 민규는 끝없이 잠식해가던 몸을 일으키고 제 발밑의 땅을 디뎠다.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는 순간 저를 빨아들이는 공간 틈으로 흰 빛이 비치고, 조각나 사라지는 어둠의 끝에

 

 

윤정한이 있었다.

 

 

 

 

 

민규야, 괜찮아?”

……뭔데.”

그냥 누워있는 게 좋을 걸.”

 

 

 

 

 

회백색의 낡은 형광등 불빛 아래, 민규는 찬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가 상복부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입술을 씹으며 등을 대고 누웠다. 제 손을 꽉 쥔 정한은 표정이 잔뜩 굳은 채 입술 끝을 자꾸만 감쳐물었고, 머리맡에서 석민이 다가와 자세를 낮춰 앉았다. 눈 감는 편이 좋을 걸? 장난스러운 투였으나 꽤 진지한 눈빛이 닿자 민규는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 다시금 까맣게 차단되는 시야 위로 따뜻한 빛이 내려앉는다. 곧 흑백의 기억이 조각조각 꺼내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한이 이끄는 대로 훈련장에 도착했던 것 같고, 서로의 파장이 무너지지 않게 합을 맞췄던 것 같고, 그러다가 윤정한의 파장이……, 저를 베고 지나간 빛은 붉은색이었던가? 미간을 찌푸리는 민규의 귓가로 석민의 나지막한 음성이 닿았다.

 

 

 

 

 

관철복사(觀徹復事), 상실자에게 치유의 숨결을.”

 

 

 

 

 

온기를 지닌 빛이 몇 번이나 민규의 몸을 감싸고 흘러내렸다. 정한은 가만히 무릎을 모으고 앉은 채 그 푸른빛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바싹 마른 목 안쪽 어딘가에 숨결이 불어오는 것 같더니, 곧 쏟아져 흐르던 따스함은 공기 중으로 부서져 자취를 감추었다. 민규는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회백색의 형광등 불빛이 눈부시고, 정한의 까만 눈동자가 아래로 닿아오고, 동그랗게 깎여 있던 손톱이 잔뜩 물어뜯어 흉해져 있었으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석민은 침대에 기대어 천천히 숨을 골랐다. 민규는 잔기침을 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전체적으로 뻐근한 감이 있었지만 그런 대로 견딜 만한 것 같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석민의 음성이 귓가에 와 부서졌다.

 

 

 

 

 

기억은 났어? 아마 다 잊었을 거라고 정한이가 그러던데.”

, 대충은.”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얼마 안 남았

나도 알아. 내 몸은 내가 챙기니까, 너도 나 같은 데다 괜한 체력 쏟지 말고 네 몸이나 챙겨, 이석민.”

 

 

 

 

 

나 잔다, 민규는 툭 던지듯 덧붙이고 비척비척 제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어 썼다. 벽을 보고 돌아누운 뒤통수를 가만히 응시하던 석민이 다문 입술 새로 헛웃음을 흘렸다. 꼭 고마우면서 저런다, 츤데레 새끼. 석민은 침대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현관문 바로 옆에 달린 스위치 가까이 다가섰다. 끌어 모은 무릎 위로 턱을 괴고서 의미 없이 창밖을 내다보던 정한은 안 자? 묻는 석민의 말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밟았다. 침대에 누워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당기자 스위치를 눌러 불을 끈 석민이 제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은 것처럼, 방 안에도 어둠이 내려앉아 희미하게 새어든 달빛을 서서히 잡아먹었다. 민규는 봤을까, 창밖이 이렇게나 어두워졌다는 걸. 눈가를 찌푸린 정한이 석민의 침대가 놓인 쪽으로 돌아누웠다. 정한아, 피곤할 텐데 얼른 자.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자야지……. 잠이 안 와서.”

그래, 오늘은 좀 놀랐겠지만

나도 알아, 민규가 왜 그랬는지. 너 없었으면 아마 민규죽었을 거야.”

정한아, 나는 네가 살았으면 해.”

나는……, 민규가 살았으면 해.”

 

 

 

 

 

하지만 민규만큼, 내 부탁을 들어줄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정한은 뒷말을 억지로 삼키며 눈을 질끈 감고 등을 돌려 누웠다. 아주 희미하게, 누군가의 입술 끝을 타고 쓴웃음이 샌 것 같았다. 정한은 석민에게 고마워할 수도, 미안해할 수도 없었다. 민규에게는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고, 그가 놔야만 했던 것들이 있다. 윤정한은 그 모든 것을 갖고 싶었고, 가져야만 했다. 그래서 김민규를죽음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살기를 바라면서도. 아마 석민도 같은 마음이 아닐까, 깊은 어둠 속으로 잠식하는 정한의 마지막 의식 끝에 그런 추측이 걸렸다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엇갈리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다 한데 엉켜버린 채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는 밤이었다.

 

 

 

 

 

 

 

 

 

 

4.

 

 

 

명백한 한 해의 끝자락이다.

 

 

창밖으로 시리도록 파아란 하늘에 눈부신 해가 타오르듯 발광하는, 그야말로 아주 맑은 날씨였다. 마른 몸 위로 주섬주섬 교복을 걸친 정한은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시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눈을 굳게 감은 채 적막과도 비슷한 고요 가운데에 앉은 석민이 있었고, 까만 눈동자가 닿은 종착지에는 퍽 낯설어진 페트병에서 막 입을 떼는 민규가 있었다. 마실래? 민규가 별안간 다정한 투로 물어 오며 탄산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액체가 담긴 녹색 페트병을 내민다. 정한은 그것을 받아들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나 이거 마시면 너랑 간접키스 하는 거네? 민규는 늘 그래왔듯이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곧 석민이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떠 올린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희미하게 푸른빛이 섞여 있었다. 정한은 민규가 건넨 사이다 병을 입술 끝에 걸친 채 고개를 뒤로 젖혀 안에 담긴 액체를 들이키다가, 문득 바다와 닮은 그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바다보다는……, 오늘 한정으로 우주가 더 나으려나. 이제 먼저 고개를 돌리는 이는 정한이었다. 굳은 움직임으로 교복 마이 단추를 채우는 민규의 귓가로, 방 안을 가득 채운 낯선 비장감 위로 석민의 단단한 음성이 얹혔다.

 

 

 

 

 

우리가 밟아야 할 곳은 딱 두 군데야. 우선은 기숙사 동 1, 동편 복도 끝에 위치한 제어실. 거기에 있는 제어장치의 잠금을 풀면 이쪽으로 전력이 다량 이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아마 연구동 쪽은 적어도 정전일 거야. 그 때,”

연구동으로 가서, 무능력한 연구원 나부랭이를 좀 상대해 주다가 건물을 폭파하고 도망친다. 맞지?”

, 맞아. 우리가 연구동을 폭파하는 데까지는 걸리는 시간이 있으니까, 다른 아이들은 아마 그때 도망칠 거야.”

그 애들이 살고 죽고까지는 신경 못 써, 이석민.”

나도 알아. 그냥, 어차피 관여할 수 없는 거 좀 더 좋은 쪽으로 기울었으면하고 바라는 거지, . 사실은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석민에, 민규는 대답 대신 입 안쪽 여린 살을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릎을 모으고 앉아 그것을 올려다보던 정한이 작게 키득이며 몸을 일으키고 섰다. 민규야, 부끄러워? 자존심 상해? 한 발짝 민규 가까이 다가선 그가 허리를 조금 낮춰 그 단단한 어깨 위로 제 턱을 괴고 장난치듯 물었다. 민규는 망설임 없이 제 어깨를 털어 꽤 묵직하게 얹힌 정한의 얼굴을 떼어내고 대꾸했다. 윤정한, 지랄하지 마. 눈앞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긴 정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달리 덧붙이지 않고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얼마 안 가 웃음이 잦아든 방 안의 공기가 빠르게 식어 간다. 얇은 천 재질의 교복 마이 안으로 추위가 겹겹이 파고든다. 교복 마이 단추를 채우고 아래로 떨어진 석민의 손끝을 스치듯이 쥔 정한이 그보다 두 걸음 앞으로 나서서 민규의 옆에 나란히 섰다. 꽤 가파르게 경사가 진 시선이 찰나의 순간 맞닿는다. 정한은, 늘 그랬던 것처럼 눈을 접어 맑게 웃어 보였다.

 

 

 

 

 

출발하자, 이제.”

 

 

 

 

 

바닥으로 잠식하는 민규의 음성이 내부의 찬 공기를 울리고 그 안에서 부서진다. 먼저 발을 옮겨 현관문을 열어젖힌 그의 뒤로 정한과 석민의 발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였다. 곧 현관문이 세게 닫히고, 느리게 점멸하던 형광등이 필라멘트 타는 소릴 내며 꺼진다.

 

 

 

명백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

 

 

 

 

 

 

 

금방이라도 늘어질 듯하면서도 끊기지 않는, 팽팽한 대치상태. 낭떠러지를 등진 소년 셋은 무채색의 연구복 차림인 남자 다섯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정한이 손을 뒤로 뻗어 석민의 옷깃을 쥐고 끌어당긴다. 민규는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보다 픽 웃었다. 윤정한, 무서워? 농담조의 물음에 정한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민규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일순 낮게 깔렸다. 지랄하지 마. 정한의 손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긴 석민이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민규가 아래로 떨어뜨린 손을 세게 말아 쥔다. 반쯤 고개를 비틀어 석민을 스치듯 마주하고서 가볍게 웃어 보인 정한이 곧 잡고 있던 옷깃을 놓고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잔뜩 긴장한 상대의 얼굴을 쭉 훑은 그가 차분하게, 그러나 명확한 음성을 뱉었다.

 

 

 

 

 

차라리 기계 연구를 계속 하시지 그러셨어요. 우리보다 멍청하고, 감정도 없고, 심지어 도망치지도 않을 텐데.”

“S1004, 들어가서 얘기하지.”

인간은 바보가 아니에요. 감정도 있고, 그러니까 도망치는 거죠. 이제 인정하시겠어요?”

 

 

 

백설화명(白雪花明), 절경의 설원으로.”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공중으로 하얗게 김을 내며 부서졌다. 그 순간정한의 까만 눈동자로부터 흰 빛이 일어, 고리 모양을 그리며 그의 몸을 감쌌다. 질겁하는 연구원들을 향해 정한은 한 쪽 입 꼬리만을 끌어올려 웃었다. 곧 빛의 고리가 강하게 수축하고 이완하여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듯 퍼져 나간다. 보도블럭과 그것을 딛고 선 발 사이의 아주 얇은 틈으로까지 빛이 흘러넘치고 나서야, 세상은 한순간에 하얗게 뒤덮인다. 땅도 하늘도 온통 백색으로 뒤덮여, 이따금씩 큼지막한 눈송이가 내리는그야말로 절경의 설원이 된 것이다. 정한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민규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재밌겠는데? 단정하게 채워져 있던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어 내리던 그의 팔을 왼쪽에 선 석민이 잡아 제 쪽으로 세게 당겼다. 함박눈이 두텁게 쌓여 묵직하기까지 한 언덕 위로 몸이 반쯤 파묻힌 민규가 미간을 좁혔다.

 

 

 

 

 

좀 기다려, 김민규.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 없잖아?”

또 뭔데?”

아직 불안정해. 윤정한이 뒤로 물러나면 그 때 가도 안 늦어.”

 

 

 

 

 

관철복사(觀徹復事), 예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석민의 두 눈이 일순 형형하게 빛났다. 민규는 걸치고 있던 검은색 교복 마이 위에 앉은 눈을 손으로 툭툭 털었다. 두께가 얇은 탓에 금세 녹은 눈이 스며들어 군데군데 색이 짙어져 있었다. 석민은 민규를 제 쪽으로 좀 더 끌어당기고 언덕 뒤로 몸을 숨긴 채 두 눈만을 아슬하게 내어 반대쪽의 동태를 살폈다. 정한의 주위로 빛의 파장이 한 번 이완할 때마다 연구원들이 밟고 선 눈밭이 높게 솟아올랐다. 석민의 눈동자 위로 푸른빛이 스치고, 기관총을 꺼내 드는 군인의 잔상이 스친다. 인력 낭비네, 고작 우리 셋을 잡겠다고. 그는 입술을 감쳐물고 잘근, 뼈가 울려 소리가 들리도록 이에 힘을 주어 씹었다. 그 옆에 긴 몸을 접은 채 습관처럼 손가락뼈를 꺾던 민규가 몸을 틀어 물어왔다.

 

 

 

 

 

그래서 난 언제 나가면 되는데?”

앞으로 30초 뒤, 지원군이 합류할 거야.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적다고도 할 수 없어. 얼핏 봐도 스무 명은 되는 것 같았으니까.”

, 존나 쓸데없는 짓은 사서 하네.”

지금부터 10초 뒤에 윤정한이랑 자리 바꿔.”

 

 

 

그 다음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잘 하는 거 있잖아?

 

 

 

 

 

입 꼬리를 당겨 늘 하던 대로 웃어 보인 석민이 민규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등 뒤에서는 눈이 날리고, 밟히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섞이는 구둣발 소리. , , . 민규의 입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숨에 마지막 숫자가 섞임과 동시에, 눈밭에 파묻혀 버둥대는 연구원들 앞으로 전투 군인 이십 여 명이 죽 늘어서서 옆구리에 낀 기관총을 일제히 장전했다. 귀에 거슬리는 금속 마찰음이 한데 섞여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입술 끝을 깨물고 그 사이로 작게 욕지거리를 뱉은 정한이 제 어깨에 손을 짚은 민규를 돌아보았다.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술 끝이 이질적이어서, 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민규야, 연습하던 거 할 거야?”

달리 할 게 있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없지.”

네가 나한테 집착하는 유일한 이유잖아, 내 능력. 틀려?”

 

 

 

양화작열(煷火灼熱), 마지막 불꽃놀이를.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한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줘 그를 등 뒤로 밀쳐낸 민규가 평소보다 반 톤 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뱉었다. 곧 눈동자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붉은 빛이 민규의 몸을 감싸고, 한 걸음 내딛자 빛으로부터 불길이 치솟아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화염의 구체가 떠올랐다. ‘사격 준비!’, ‘사살하라!’ 따위의 거친 외침이 민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한쪽 입 꼬리만을 당겨 올린 그가 오른손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리고 엄지와 검지를 맞부딪치자, 둥글게 뭉쳐 있던 화염체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공중으로 치솟았다. 빛의 파장에 둘러싸인 민규가 선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작게 소리 내어 키득이며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깨어진 화염체 파편은 연구원들이 파묻힌 설원과 일렬로 늘어선 전투 군인 쪽으로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강한 불꽃이 설원에 처박혀 눈발이 튀고 날렸다. 민규의 등 뒤에 서 있던 정한이 두 걸음을 내딛어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다정하고 사근한 음성이 전투의 소음에 섞여 들었다.

 

 

 

 

 

훨씬 멋있네, 네 불꽃놀이.”

안 멋있으면 아마 꼰대들이 열 꽤나 받을 걸.”

그러겠지, 확실히 너한테는 애정이 꽤 있는 것 같던데?”

지랄, 애정보다는 실험욕이 아닐까.”

 

 

 

 

 

날카로운 민규의 대답에 정한이 소리 내어 웃는다. 잔뜩 접혔던 두 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정한의 눈동자는 다시금 눈부시게 빛났다. 민규는 제 붉은 빛을 삼키는 정한의 빛 파장에서 시선을 떼어 멀리 상대 쪽을 응시했다. 선혈이 스민 눈발이 다시 하늘 위로 튀어 올라 마치 분홍빛 눈이 내리는 것도 같았다. 사람 죽이는 주제에 예쁘긴 존나게 예뻐요. 씹어뱉듯 읊조린 혼잣말을 들었는지 정한이 꾹 다문 입술 새로 웃음을 흘렸다. 머리 위로 쳐든 그의 오른손 위로 민규의 화염체보다도 더 큰 빛의 구체가 형형하게 설원 위를 비추고 있었다.

 

 

 

 

 

마지막인데 좀 더 예쁜 걸 보고 죽는 게 훨씬 낫지 않아?”

……싸이코냐.”

그럴 리가. 그저 내 따뜻한 마음이고 배려의 일종인 걸?”

말이나 못 하면.”

백설화명(白雪花明), 설원 위의 빛으로 수렴하라.”

 

 

 

 

 

감정이 지워진 얼굴을 하고서 헛웃음을 뱉는 민규를 따라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정한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곧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구체가 하늘 위로 빠르게 솟았다가, 점점 더 붉게 물드는 설원 위로 내리꽂힌다. 튀어 오른 눈 결정과 빛의 파편이 부딪쳐 강한 광선으로 바뀌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광선은 세 소년이 마주하고 있던 사 층짜리 건물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창문이 깨지고 벽돌이 으깨지는 소음이 바닥마저 진동시킨다. 언덕 뒤로 몸을 피하고 있던 석민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고, 가만히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보고 선 민규는 제 허리에 팔을 감아오는 정한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정한은 제 쪽으로 틀어진 민규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접어 웃었다. 굉음이 울리며 설원이 조각조각 깨어지기 시작했고, 발밑으로 도톰하게 쌓여 있던 눈이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아주 희미하게, 건물이 부서지는 틈으로 찢어지는 비명이 섞이기 시작한 것도 같았다.

 

 

 

 

 

가자.”

 

 

 

 

 

가운데 층이 뚝 잘려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을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하던 석민이 먼저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얇은 운동화 밑창에 닿는 보도블럭의 질감이 낯설었다. 정한은 민규에게 반쯤 기댄 채 몇 걸음 걷는 듯 하다가, 이내 손을 뻗어 석민의 교복 마이 자락을 꾹 쥐었다. 운동화 뒤축을 질질 끄는 소리가 민규의 걸음 뒤로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 일련의 포격음이 터진다. 터질 것이었다. 석민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만큼이나 시린 빛이 그의 몸을 감싸고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민규는 걸음을 멈춰 선 석민의 뒤통수를 지그시 응시하며 아래로 떨어뜨린 손을 세게 그러쥐었다. 눈부시게 점멸하던 청색의 빛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제 옆에 선 정한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긴 석민이 한동안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를 내질렀다.

 

 

 

 

 

김민규, 엎드려!!”

 

 

 

 

 

순간 석민의 품에 반쯤 안긴 채 바닥에 무릎을 찧은 정한이 잔뜩 찌푸려진 인상을 하고서 제 왼손을 높이 쳐들었다. 민규의 등 뒤로 일제히 늘어선 친위대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그들과 민규 사이의 좁은 틈 위로 높게 눈 언덕이 솟아올랐다. 차갑고 거친 시멘트 바닥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는 정한의 머리 위로 묵직한 눈송이가 내려앉고, 한쪽 무릎이 꺾인 민규의 다리가 두텁게 쌓인 눈밭 위로 처박혔다. 정한을 감싼 백색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셔서 민규는 미간을 좁혔다. 등 뒤로, 두텁게 내려앉은 눈 더미를 뚫고 날카로운 금속의 마찰음이 거슬리도록 울렸다.

 

 

 

 

 

민규야, 괜찮아? 다친 데 없어?”

……, 보시다시피. 그러는 너는, 윤정한.”

나도 멀쩡해, 보시다시피!”

 

 

 

 

 

그러니까, 한 번 더 하자. 불꽃놀이.

 

 

표면이 거친 시멘트 바닥에 세게 찧은 무릎과 오른손 손바닥에서 핏빛이 비치고 있었으면서도, 정한은 애써 입 꼬리를 당기며 마치 주문이라도 외듯 그렇게 덧붙였다. 눈 위로 손을 짚어 몸을 일으킨 민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한의 옆에 선 석민이 입술을 짓씹으며 표정을 굳혔다. 김민규, 너 미쳤어? 아까보다 좀 더 갈라진 음성이 허공을 찢듯이 터져 나왔다.

 

 

 

 

 

그럼, 네가 어떡할 건데?”

, 그치만 그건 너무,”

나 다치면 네가 살리면 되잖아, 멍청아!”

……,”

그러니까 네 몸 간수나 잘 해!”

 

 

 

 

 

단호한 끝맺음에 석민의 입술이 아프게 씹혔다. 그의 옆에서 어색하게 웃어 보인 정한이 곧 제 오른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나는, 민규 믿어. 민규가 살려낼 거라고 믿어. 나지막한 음성은 석민에게만 겨우 닿을 정도로 작았다. 곧 치켜든 오른손 위로 내리는 눈이 소복소복 쌓여 공 모양을 하고 점점 그 크기를 키워 갔다. 그러니까, 하고서 잠시 말을 멈춘 정한이 찬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니까 다치지 마, 석민아. 거대한 구 형태의 눈덩이가 민규의 등을 지켰던 언덕을 반쯤 부수고 친위대 쪽으로 메다 꽂혔다. 그 순간 친위대의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긴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으며, 눈밭을 구른 민규의 눈동자에서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강하게 회오리치는 눈보라 속에서 친위대의 기관총은 공중으로 불을 뿜다가 이내 눈밭 깊숙이 박혔다. 여과되지 않은 총성이 땅을 울린다. 다시금 몸을 일으켜 서는 민규의 발밑으로 푸른 불꽃이 일었다. 입술을 깨문 정한의 머리 위로 태양과도 닮은 빛의 구체가 거대하게 그 살을 붙이고 있었다.

 

 

 

 

 

민규야, 뒤로 나와! 아님 내가 갈까?”

……윤정한,”

?”

그냥, 거기 있어. 오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씹어뱉는 민규의 목소리가 거칠다. 정한은 머리 위로 제 몸집만큼 커진 빛의 구체를 왼손으로 옮겨 들며 한 발을 떼었다. 그와 동시에 석민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아 지그시 눌렀고, 걸음이 막힌 정한이 이유를 묻기도 전에 민규를 감싼 적색의 빛이 강하게 이완하며 열기를 공기 중으로 쏟아 부었다. 선명한 적색을 띠는 빛이 닿는 곳곳마다 강하게 불이 옮겨 붙었다. 정한은 제 발 바로 앞 눈밭에 붙은 불씨를 내려다보고, 느리게 고개를 돌려 석민을 응시했다. 녹아 흐를 것만 같은 열기에 눈가를 찌푸린 석민이 낮게 목소리를 뱉었다.

 

 

 

 

 

……저건 아마, 김민규의 능력이 폭주한 상태일 거야.”

그치만, 얼마 전에는 저 정도도 아니었다고.”

지가 원했겠지. 널 살리고 싶다든가, 뭐 그런 거. 가끔은 간절히 원하면 들어주잖아.”

그럼, 그럼,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폭주는 나도 어떻게 못 해. 앞으로 김민규가 어떻게 할지 전혀 보이지도 않아. 꼭 도와주고 싶으면, 친위대와 김민규의 거리가 최대한 멀어졌을 때 날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조금이라도 가까우면 네 파장이랑 김민규 파장이 정면으로 부딪칠지도 모르거든.”

 

 

 

 

 

들어 올린 왼손을 꾹 쥐어 빛 파장의 끝을 쥔 정한이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길게 호흡했다. 정면으로 바라본 민규는 손을 치켜드는 족족 뜨겁게 이는 화염체를 되는 대로 집어던지고 있었다. 그가 지나간 눈밭 위로 자취를 그리듯 선혈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정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휘청거리는 민규는 곧 무릎이 꺾일 듯 꺾이지 않고 위태롭게 선 채 서서히 크기를 키워 가는 화염체를 머리 위에서 조각내어 눈앞으로 내리 꽂았다. 친위대가 임시방편으로 덮어둔 것 같은 보호막이 유리창 깨지듯 균열로 일그러졌다. 입술을 열어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 정한이 민규가 선 반대쪽으로 쥐고 있던 빛의 구체를 집어 던졌다.

 

 

그 순간, 아주 찰나의 순간에, 민규가 고개를 돌려 정한을 똑바로 마주했다. 입가를 타고 흐른 선혈이 민규의 발 아래로 뚝뚝 흘러내린다. 붉게 물든 그 입술이 느리게 열리고, 몇 번이나 달싹이던 입술이 하려는 말은 강한 폭발음이 집어 삼킨다. 무방비한 상태로, 흰 빛과 붉은 빛이 이리저리 뒤섞인 파장에 얻어맞은 정한이 시멘트 바닥을 몇 바퀴 쯤 굴렀다. 흔적도 없이 부서진 설원, 미동이 없는 친위대, 그리고……

 

 

 

 

 

, 정한……, 도망쳐……!!”

 

 

 

 

 

완전히 갈라지고 찢어져, 공중을 가르는 민규의 날카로운 음성. 정한은 급하게 시멘트 바닥 위로 다쳤던 손바닥을 세게 짓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가, 하복부를 찢는 통증에 비명 비슷한 것을 내지르며 한쪽 팔을 꺾고 엎드렸다.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감각이 목 내부를 타고 역류하는 것만 같다. 몇 번의 잔기침 끝에 뱉는 것은 묵직한 핏덩이였다. 정한은, 손목이 반쯤 꺾여 너덜너덜한 오른손을 들어 입가를 훔쳤다. 잔뜩 흐트러져 가려진 시야 왼쪽으로 석민이 다가오고 있었다. 숨을 깊게 집어 삼킨 그가 그나마 멀쩡한 왼발에 힘을 줘 몸을 일으켰다. 어깨를 감싸 안는 석민의 손끝에서 푸른색의 빛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정한아, 괜찮아?”

나는, 아마, 괜찮을 거야……. 너는?”

난 그렇게 직접적으로 파장을 맞은 건 아니라서, 아직 견딜 만 해.”

민규, 하아, 김민규는, 저렇게 죽는 거야?”

 

 

 

 

 

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아랫입술을 다시금 앞니로 찍어 누른 정한이 멀리서 타오르는 불길로 시선을 던졌다. 핏빛의 불꽃 내부는 시린 파랑으로 발광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안에, 김민규가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걸까,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타오르는 불꽃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과격하게 몸을 뒤트는 민규의 음성은 열기에 먹힌 지 오래였다. 정한은 뻐근한 턱을 움직여 입 안쪽 여린 살을 씹었다. 혀끝에서 비릿하게 피 맛이 나는 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변명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석민을 올려다보는 뒷목이 뻐근하고 코끝이 찡하니 아려서, 정한은 그저 뿌예진 눈동자 가득 타오르는 민규를 담으며 입을 열었다.

 

 

 

 

 

……석민아.”

가자, 정한아.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그동안 말해주지 못해서, 그것도 미안해.”

 

 

 

그치만, 나는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야. 그렇지?

 

 

 

 

 

제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은 석민의 팔을 떼어낸 정한이 그를 똑바로 마주하고, 눈을 접어 웃는다. 차오른 눈물이 예쁘게 휜 눈꼬리를 타고 뺨 위로 흘렀다. 석민을 처음 만났던 열일곱의 추운 가을처럼정한은 금방이라도 꺾일 듯 힘이 다 빠진 다리를 질질 끌어 숨통을 죄는 열기에 다가 섰다. 머리를 감싼 채 악을 쓰던 민규가 파장의 경계에 선 정한을 돌아보고, 고개를 젓는다. 안 돼, 오지 마, 돌아가, 달싹이는 입술이 그런 류의 단어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정한은 따라 고개를 저으며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울면서 웃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그의 얼굴에 내려앉은 그 자체가 극도로 아름다워서, 민규는 고통스러운 와중에 헛웃음을 뱉었다. 발광하는 태양의 색을 띤 파장 안으로 손끝을 밀어 넣은 정한이, 곧 입을 열어 나지막히 속삭인다.

 

 

 

 

 

백설화명(白雪花明)

 

 

()에서 무()로 수렴하라.

 

 

 

 

 

붉은 빛 안으로 반쯤 몸을 담근 정한의 등 뒤로, 마치 백색의 날개라도 펼쳐지듯 강한 빛이 쏟아져 공기 중으로 흘렀다. 강한 빛이 두 사람이 밟고 선 땅을 집어삼키고, 유난히 맑던 하늘을 집어삼키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비참한 표정을 한 석민마저 집어삼킨다. 두 파장이 완벽하게 겹쳐지는 찰나의 순간민규의 팔이 정한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윤정한, 낮게 읊조리는 음성에 정한이 파묻었던 고개를 든다. 핏빛으로 물든 민규의 입술이 열리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집어삼킨 빛이 저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고 강하게 찢어져 나간다.

석민은 조각난 파장이 제게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것을 피할 힘도, 귓가를 짓누르는 이명을 멈출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가, 공중에서 내던져지듯 시멘트 바닥 위로 처박혔다. 목소리 대신 터져 나온 잔기침 끝에 눈이 아플 만큼 새빨간 선혈이 흩뿌려졌다. 음성을 내는 법을 잊은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눈꺼풀을 들어올려, 최후를 맞은 다른 두 소년을 응시하는 것뿐. 찢어진 입술 끝으로 바람 빠지듯 헛웃음이 샌다. 이석민은, 김민규가 윤정한에게 최후에 반드시 했을 한마디를 알 것 같았다. 그거, 아마……,

 

 

 

고백, 이겠지.

곧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시야를 가린다. 억지로 말아 올린 입 꼬리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지막까지 시멘트 바닥을 짓누르고 몸을 지탱했던 왼손이 미끄러지면서, 석민은 끝없는 어둠으로 잠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민규가 가졌을 윤정한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석민의 낡은 손목시계는 유난히 초침 소리가 컸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혈향(血香)이 섞인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고, 유리판이 반쯤 부서진 시계는 잘도 그 톱니바퀴를 굴려댔다. 째깍, 째깍, 예리한 마찰음을 내는 날카로운 바늘 끝이 한 바퀴를 돌아12를 가리킨다.

 

 

 

어른이 되지 못한 세 소년의 손끝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 새해의 시작이었다.

 

 

 

 

 

 

 

 

 

 

혹시 그거 들어본 적 있어?

보나마나 또 소문이겠지, 전혀 신빙성 없는.

신빙성 없지 않다니까? 여기, 이능력개발원 말야, 스물이 되면 두 가지 길을 선택하게 해 준대.

, 그거라면 나도 들어본 적 있어. 아마, 친위대 쪽하고 민간인 쪽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진짜 도시전설 아냐?

믿기 싫으면 믿지 마세요, 김민규 씨. 하여튼 내가 알기로는 친위대 입대를 선택하든가, 아님 모든 능력과 기억을 지우고 민간인으로 살아가든가,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 해준대.

어디든 맘에 안 드니까 난 그냥 그 전에 도망칠래.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딨냐? 좀 슬프지만, 난 차라리 민간인으로 살래.

그래도 석민이 능력은 지우기에 좀 아깝다. 꽤 유용한 거잖아.

, 윤정한. 그러는 너는 뭘 고를 건데?

, 솔직히 말하면 어느 쪽도 고르고 싶지 않아. 군의 개가 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기억을 모두 잃는 건 너무 슬프잖아?

 

 

그러니까, 그냥 그 전에 죽자.

 

 

 

나랑 같이 죽자, 민규야.

 

 

 

 

 

소원이 이루어진 기분이 어때? 윤정한.

 

어떠냐고?

 

 

행복해. 진심으로.

 

 

 

 

 

성년은폐(成年隱廢), .

// Across the MilkyWay 참여글 업로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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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옆의 인물이 각 챕터를 이끕니다. 1인칭의 경우 이들의 시점에서 서술됩니다.

시점은 1인칭 3인칭 1인칭 순으로 변화됩니다.

BGM List : 불꽃심장 비밀, Stardust 별의 눈물 / 세븐틴 떠내려가 / 엄지 The Way

 

 

 

 

 

가자, 나락으로

 

 

 

w. (@hyemm_is_yoonr)

 

 

 

 

 

 

 

 

 

 

#1. 2학년 8반 이지훈

 

 

 

 

 

우리 학교에서 사람이 죽었다.

 

 

옥상에서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최근에 가지치기를 해서 뼈대만 겨우 남은 앙상한 나무 위로 사람이 곤두박질쳤다고 했다. 그 앞의 1학년 교실에서 몇 명이 흔들리는 커튼 틈으로 의식이 없는 몸뚱이가 나뭇가지에 처박히고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고도 했다. 현재 패닉에 빠져 넋이 나간 그 애들이 힘겹게 전한 바에 의하면, 상처로 얼룩져 지저분한 얼굴은 우는 듯 웃는 듯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더랬다.

이 모든 일이 한 시간 전에 일어났으며, 그런 이유로 학교가 숨 막히게 시끄러웠다. 나를 비롯해 동아리 실에 모인 이들은 숨을 죽인 채 눈만 굴리고, 입술만 씹어댔다. 우리에게 모든 사실을 전달해 준, 동아리 담당 교사 전원우를 올려다본다. 흐트러진 셔츠 위에는 점처럼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누군가의 손톱이 표면과 마찰하여 듣기 싫은 소음을 냈고, 순영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으며, 내 대각선에 앉은 지수가 책상 위로 머리를 박았다. 약간 열린 창문 틈으로 희미하게 앰뷸런스 사이렌이 새어드는 것 같았다. 이제야 도착하다니. 입속에서 맴도는 말을 삼키며 어색하게 입 꼬리를 당겼다. 실감은 전혀 나지 않는데, 입 꼬리가 잘게 경련하는 것이 느껴진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 공기가 습하다. 내 쪽으로 무너진 승관을 끌어당기고 느리게 어깨를 토닥였다. 전원우의 표정은, 뭐랄까, 눈이 시리도록 아팠다.

 

 

곧 굳게 닫힌 문을 박차고 형사 두 명이 동아리 실 내부로 들어왔다. 전원우는 그들에게 짧게 목례하나 싶더니 이내 동아리 실을 나가버렸다. 서로가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공중에서 뒤엉킨다. 나이가 꽤 되어 보이는 형사가 우리를 살피는 듯하더니, 함께 온 젊은 형사로부터 두께감이 있는 종이뭉치를 건네받았다. 반으로 포개놓은 것을 대강 펼쳐들고서, 그가 입을 열었다.

 

 

 

, 이것은 피해자의 투신 장소로 추정되는 옥상에서 피해자의 휴대전화 옆에 놓여 있었던 대본입니다. 이것이 단편영화 제작부 부원 여러분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여러분들을 피해자 윤정한의 자살 사건 참고인으로

……누가, 죽었다고요?”

 

 

 

울음이 잔뜩 섞인 순영의 물음. 일순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순영의 옆에 앉은 민규가 힘이 다 빠진 손을 들어 그를 말려보려 애쓰는 것 같았는데, 거의 제정신이 아닌 순영에게 그것이 먹힐 리 없었다. 겨우 눈물을 그쳤던 승관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가가 뻐근하게 시렸다.

 

 

 

다시, 다시 말해 봐요. 누가…… 죽었다구요?”

권순영, 그만 좀 해!”

흐윽, 이거 놔 봐! 넌 믿겨? 믿기냐고! 정한이 형이, 그 형이 왜 자살을 해, ……!”

 

 

 

순영은 처절했고, 그를 말리려던 민규의 눈가에도 금세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승철이 형사들 쪽으로 다가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아마 우리들의 진술이 필요한 것일 테다.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 승철이 우리 쪽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 고갯짓을 해 보였다. 거부할 수 없어 주춤주춤 중년의 형사를 따라 나가는데, 우연히 고개를 돌렸을 때 승철이 입모양으로 끝나고 전화해.’ 하는 것만을 겨우 포착할 수 있었다. 주머니 안에 차갑게 식었던 휴대폰을 꾹 쥐어본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쌩쌩 불어 들어오는 복도에 서서 형사는 주위를 두리번대다가, 곧 나에게 후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정문 쪽은 현장 수습이 한창일 테니 극도로 복잡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순순히 그를 후문으로 안내했다. 왠지 사건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면, 나를 여기까지 오도록 버티게 만든 무언가가 깨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세찬 바람으로 잘게 떨고 있는 유리문을 밀어 뒤뜰로 몸을 밀어 넣으면서, 형사는 내게 춥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는 최소한의 대화만을 할 것이다. 사실은, 바람을 맞아 붉어진 살갗보다도 마음이 더 추웠다. 창문 밖으로 내다 본 하늘이 꾸물꾸물 흐렸다.

 

 

 

우리 학교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의 이름은 윤정한, 그는 내가 속한 단편영화 제작부의 작가였다.

 

 

 

 

 

 

 

**

 

 

 

 

 

 

 

취조실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자그마한 알전구 하나가 아슬하게 매달려 있었으며, 차갑고 눅눅한 공기에서는 짙은 담배 향이 났다. 지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들으라는 듯 잔기침을 하며 주머니 안에 든 휴대폰을 꾹 쥐었다. 좀 전부터 울리던 진동이 멎은 걸로 보아 누군가 전화를 걸고서 받지 않으니 끊어버린 것 같았다. 형사의 무표정한 얼굴을 곁눈질하던 그가 별 수 없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고 의자를 당겨 앉자, 책상 위에 손바닥 크기의 수첩을 내려놓은 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 학생 학년 반 이름이 뭐죠?”

……2학년 8, 이지훈이요.”

그래요, 지훈 학생. 학생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3학년 7반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 소환된 상태시고, 정황 상 타살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진술 과정에서 크게 부담을 가지거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실 수 있지만, 대답 가능한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을 솔직히, 진실 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형사는 낡은 만년필을 쥐고 수첩에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써 넣었는데, 그 탓으로 말과 말 사이가 계속해서 벌어졌다. 지훈은 양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두고 그 위로 시선을 꽂은 채 묵묵히 형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형사의 물음에 대한 답은 시간이 약간 흘렀을 때 짤막하게 터져 나왔다. 만년필을 고쳐 쥔 형사가 수첩을 한 장 넘기고 맨 윗줄에 무언가를 휘갈기더니 곧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우선은이 단편영화 제작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지훈 학생이 무슨 일을 했었는지에 대해 좀 듣고 싶습니다.”

저희는, 정말 별 거 없이, 영화를 만드는 동아리예요. 학교에서 애물단지 취급하고, 친구들은 신기해하고, 뭐 그런 거요. 다들 취미로 모인 거고, 그래서 그냥 열심히만 했어요. 즐거우니까. 하다 보니까 영화 같은 게 만들어졌고, 그래서 출품했더니 우연히 상을 받아서그래서 지금까지 폐부(閉部) 안 되고 살아남아 있는 거겠죠. 저는 몇 달 전에 들어왔는데, 컴퓨터를 좀 할 줄 알아서 보통 영상 편집을 했어요.”

편집을 했다. 그렇군요. 편집은 보통 누구와 함께 했나요?”

편집은 저희 동아리 부장인 승철 선배하고 같이 했어요. 제가 들어오기 전에는 선배 혼자서 하시다가, 제가 들어온 이후로 나눠서 했어요.”

그럼 평소에 동아리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좀 구체적으로 답해 주셨으면 하는데.”

동아리 분위기……, 별다른 말을 덧붙일 것 없이 너무나 좋았어요. 제가 말했다시피 저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다들 편하게 대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게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어요. 저와 학년이 같은 친구들은 원래 다 알고 지내던 사이라서 그 친구들도 제가 적응할 수 있게 많이 도와 줬고요. 의지할 부분이 많고, 서로 다 형제처럼 지냈던 사이예요.”

 

 

 

어둠이 내려앉은 취조실 안으로 차분한 지훈의 목소리가 공중에 맴돌다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발밑으로 제 한 마디 한 마디가 쌓이는 것만 같아 그는 형사가 모르게 운동화 앞코를 간헐적으로 바닥에 내리찧었다. 형사는 알아보기 힘들 것 같은 필체로 수첩에 진술 내용을 휘갈겨 썼다. 만년필이 종이에 닿아 사각거리는 소리만 자그맣게 들릴 때쯤, 지훈의 휴대폰이 다시금 진동을 울렸다. 곧 끊어진 것이 아무래도 전화보다는 문자인 것 같았다. 안 받습니까? 묻는 형사에게 지훈은 고개를 내저었다. 문자를 카카오톡 메신저처럼 낭비하는 사람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형사는 곧 기록을 마치고 책상 위로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지훈은 그의 어깨 너머로 걸려 있는 시계를 올려다본다. 시침이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 7로 향하고 있었다.

 

 

 

, 그러면동아리 얘기는 이쯤하기로 하고,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의 관계는 어떠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지훈 학생.”

 

 

 

피해자, 윤정한. 형사의 한 마디에 지훈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진다. 형사는 그것을 마주하고 있으나, 별달리 덧붙이지 않고 그저 지훈을 낮게 깔린 시선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지훈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극도로 세게 깨문 탓에 결국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이 이 끝에 긁혀 터졌다. 혀를 타고 기분 나쁜 피 맛이 밀려든다. 지훈은 답답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사실 저는 정한이 형하고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냥 동아리 선후배에서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된 정도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먼저 다가와 준 쪽이 정한이 형이었어요. 저는 워낙 낯가림이 심해서 선배들하고는 말을 늦게 텄는데, 형이 먼저 말 걸어 주고 살갑게 대해 줘서 다른 선배들하고도 친해질 수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고마운사람이죠.”

특별히 친해지게 된 계기 같은 건 없나요?”

계기라기보다는…… 제가 들어오고 나서 영화제 출품 때문에 다들 영화 제작에 매달리고 있었어요. 그 때 승철 선배가 주연을 맡으셔서 늘 촬영을 해야 했으니까, 저는 승철 선배 대신 촬영도 하고, 편집도 하고 그랬었죠. 한두 시간 만에 끝나는 게 아니니까 주말에는 밤을 새서 편집하고 다시 들어 엎고 몇 번 했었는데, 어느 날 정한이 형이 저한테 쉬엄쉬엄 하라고 주스를 사 주시더라고요. 그 날 같이 저녁도 먹었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좀 오래 같이 있었더니 그 날 이후로는 먼저 인사를 건네고 싶어졌어요. 이것도 계기라면 계기겠죠.”

 

 

 

과거를 더듬는 지훈의 표정이 묘했다. 행복한 것도 같고, 슬픔을 애써 삼키는 것도 같은,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않게 일그러진 얼굴. 형사는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만년필을 들어 수첩 끄트머리에 피해자와의 특이사항 없음.’ 이라고 휘갈겼다. 지훈은 책상 아래로 떨어뜨린 손에 힘을 줘 주먹을 쥐며 울음을 삼켰다. 입술을 깨물 때마다 상처가 난 입술 안쪽 살이 함께 씹혀 들어갔다. 형사는 색이 조금 바랜 경찰 유니폼 점퍼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훈은 자신도 휴대폰을 꺼내어 문자에 답장이나 할까 생각했다가, 곧 관두기로 했다. 형사에게 어느 정도 예의를 차려서 나쁠 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따라 붙었다. 독수리 타법마냥 검지를 뻣뻣하게 펴 자판을 두드리던 형사는 문자를 성공적으로 전송하고서 휴대폰을 뒤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영화 얘기를 해 볼까 하는데. 넌지시 던진 그의 음성에 지훈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최근에 제작하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 있었어요. 아까 형사님이 주워 오신 대본, 그게 어제까지 저희가 만들던 세 번째 영화였어요.”

이 영화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실…… 저는 그 영화를 잘 몰라요. 정한이 형이 대본을 전부 썼다는 거하고, 정한이 형이랑 민규가 주연을 맡은 거 하고, 또 승철 선배가 책임지고 디렉팅이랑 편집까지 전부 다 하시겠다고 한 거하고, 이 정도 뿐이에요. 근데 이건 저 말고 다른 부원들한테 물어 보셔도 다 같은 대답일 거예요. 저는 이번 영화랑 아예 거리가 멀어서……, 아마 승철 선배나 민규가 제일 정확하게 알고 있을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그런 거 말이에요.”

한 마디로 영화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 말이네요. 맞죠?”

그런셈이겠죠. 왜요?”

 

 

 

지훈이 고개를 들어올린다. 수첩 한켠에 물음표를 크게 그린 형사가 만년필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지훈을 마주한다. 두 갈래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닿았다가 금세 엇갈렸다. 길게 자라 곧 부러질 것 같던 손톱을 기어이 부러뜨려 뜯어내던 지훈이 먼저 고개를 떨어뜨렸다. 형사는 다시금 만년필을 집어 들고 입을 연다. 공기가 탁해서 눈이 시린 것 같아, 지훈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떠올렸다.

 

 

 

피해자와의 관계도 그렇게 가깝지 않은 것 같고, 진행 중이던 영화에 대해서도 중심적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왜 피해자의 마지막 통화가 이지훈 학생인가요. 그것에 대해서 혹시 아시는 게 있다면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왜 형이 제게 전화를 걸어야만 했는지, 저에게도 의문으로 남은 부분이에요. 아마 정말로 죽기 직전이었다면, 가장 최근에 연락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을 거예요. 제가 아까 네 시 반쯤 형에게 원고를 갖다 줬었거든요.”

영화 원고를 갖다 줬다……?”

……, 형이 저한테 먼저 문자를 보냈었어요. 어디 있냐길래 교실이라고, 곧 동아리 실로 갈 거라고 했더니 그럼 지금 가서 편집실 안에 있는 원고를 자기한테 갖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걸 가져다가 형네 반에 갖다 준 게 다예요. 아마도 그게 형의 가장 최근 기록이어서 저한테 전화를 걸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때 휴대폰을 교실에 두고 와서 전화가 온 줄도 몰랐어요. 동아리 실에 있다가 승관이랑 휴대폰을 찾으러 갔던 게 여섯 시 넘어서였거든요.”

 

 

 

지훈은 거기까지 말하고서 입을 꾹 닫았다. 작게 한숨이 흘러나온다. 수첩을 한 장 앞으로 넘겨, 동아리 부원들의 이름이 명렬표처럼 죽 나열된 데에서 지훈의 이름을 찾은 형사는 그 옆에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손톱이 다 뜯겨 흉해진 손을 내려다보던 지훈은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 형사가 만년필 뚜껑을 닫고 그것을 수첩과 함께 점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가시죠, 하는 말에 지훈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내젓고 자리에서 일어나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경찰서 정문까지 지훈을 바래다주면서, 형사는 그에게 대뜸 그렇게 물었다.

 

 

 

지훈 학생, 배 안 고픕니까?”

……? 무슨

별 건 아니고, 아까 마지막 질문 이후로 좀 힘들어 보이는 것 같아서.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다고 해 주고 싶었습니다. 아마 피해자도 지훈 학생의 사정을 이해했을 거예요. 너무 걱정 말고, 혹시나 누가 연루되어 있다면 그건 우리 측에서 밝혀야 할 일이니까, 학생들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잘 버티고 있으면 된다고 전해 줘요. 다른 친구들도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고. 그럼 난 들어가 볼 테니까, 저녁 꼭 챙겨 먹어요.”

 

 

 

제 할 말만을 줄줄 늘어놓은 형사는 곧 지훈에게 손을 휘휘 흔들고서 건물 내부로 자취를 감추었다. 로비 계단 위에 서서, 지훈은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승철이 끝나고 전화해, 하던 것이 떠올라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 한 통, 문자 세 통. 발신자는 전부 승관이었다. 반대쪽 주머니를 뒤적여 이어폰을 연결한 지훈은 승철에게 전화를 걸면서 승관의 문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눈물을 의미하는 이모티콘이 주를 이룬 가운데 읽을 수 있는 거라고는 젊은 형사가 남아 있다, 승철과 한참을 얘기하는 것 같더니 우리를 하교시켰다, 정도뿐이었다. 자판 위에 손가락을 올려 둔 지훈이 느리게 답장을 입력하는데 승철이 전화를 받았다. 주위가 생각보다 시끄러워서 지훈은 이어폰 한 쪽을 빼 들고 볼륨을 몇 칸 낮추었다.

 

 

 

, 끝났어?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좀 전에 끝났어요. 선배 어디세요? 거기 되게 시끄러운데.”

, 지훈아. 형 지금 장례식장이야. 너도 와야지, 정한이네 부모님 두 분 다 해외에 계셔서 들어오기 힘드실 것 같다고 연락 왔거든. 우리라도 지키고 있어야지, 어떡하겠어.

……그럼, 제가 지금 거기로 갈까요?”

그럴래? 형이 자리 비우기가 좀 그래서. 너 도착하기 전에 지수 올 거니까 내가 병원 앞에 나가 있을게. 병원 위치 문자로 보낼 테니까 택시 타고 와, 형이 택시비 줄게. 돈은 있어?

카드 있어요. 지금 바로 택시 잡아서 타고 갈게요.”

 

 

 

, 하는 승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훈은 되는 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후우, 하고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길고 깊었다. 온 몸에 들어찬 산소를 다 빼내는 느낌으로 숨을 내뱉은 그가 곧 이어폰을 깊게 끼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플레이리스트를 뒤적이다가 랜덤 재생을 선택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으니 지난 두 번째 출품작의 메인 테마였던 인디밴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도로가에 서서 지훈은 택시 몇 대를 멍하니 떠나보내고, 네 번째 택시가 먼저 제 쪽으로 다가와 탈 거냐고 물을 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그 안에 올라탔다.

 

 

실감이 나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무심코 바라본 창 밖에서 가는 눈발이 바람에 실려 날아다니고 있었다.

 

 

 

 

 

 

 

**

 

 

 

 

 

 

 

내가 택시에서 내렸을 때 승철은 병원 밖으로 막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발견했으나 그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반쯤 흐트러진 넥타이를 억지로 조여 맨 승철은 죽 늘어선 커피 자판기로 걸음을 옮겨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곧 자판기에 동전을 밀어 넣었다. 자판기 버튼을 눌러 놓고 그는 도로가를 마주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선 자리에 주저앉았다. 떨어지는 고개, 길게 내쉬는 듯한 한숨. 나는 가만히 서서 승철을 바라보고 있다가,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레 승철의 맞은편에 멈추자,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그가 내 운동화 앞코를 보고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길이가 짧은 차양이 막아주지 못한 눈발이 그의 머리 위에 앉았다가 순식간에 녹았다.

 

 

 

왔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좀 더 걸릴 줄 알았더니.”

택시가 바로 잡혀서요. 선배 자리 비워도 되는 거 맞아요?”

, 좀 전에 지수 왔어. 밑에 지수랑 승관이 있으니까 괜찮아. 어차피 오고 가는 손님도 몇 명 안 되니까. 너 저녁 먹어야지.”

괜찮아요, 생각 없어요.”

 

 

 

인사치레 비슷한 말들이 이어진다. 그런 진부한 대사의 나열, 그리고 내 단호한 대답에 승철은 별달리 할 말이 없었는지 작게 바람 빠지듯 웃어 보이고 자판기 안에 들어있던 종이컵을 꺼내어 내 쪽으로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핫초코가 종이컵을 반 정도 채운 채 찰랑거리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커피를 잘 못 마신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 손으로 종이컵을 쥐어 차게 식은 손끝을 녹이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퍽 퉁명스레 말이 나간 것 같아 금세 미안해졌으나, 승철은 다 이해한다는 느낌으로 내게 시선을 건네고 있었다.

 

 

 

고마워요, 선배. 잘 마실게요.”

에이, 뭐 그런 거 가지고. 다음에 너도 커피 쏴, 그럼 되지?”

알겠어요, 다음에는 자판기 커피 말고 비싼 커피 사 드릴게요.”

 

 

 

내 딴에는 꽤 진지하게 뱉은 말에 승철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기억해 둬야지. 하는 투가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느낌이 달랐다. 핫초코를 쥐고 한 모금, 입술을 적셔 본다. 금방이라도 질릴 것 같은 단 맛에 추위마저 잠시 잊히는 듯했다. 승철의 어깨 너머로 아까보다 굵어진 눈발이 휘날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날 잡아 끄는 탓에 이상한 스텝을 밟아 차양의 바운더리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승철이 먼저 나무 벤치에 걸터앉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물었다.

 

 

 

지훈아, …… 잘 하고 왔어? 어때?”

그냥, 생각보다 별 거 없던데요? 아는 대로만 말하면 될 것 같아요. 형사님도 꽤 좋은 분이신 것 같고.”

혹시, 우리 애들 중에 관련 있는 사람이 있을까?”

관련은 다 있겠죠. 그래도 타살처럼 보이지는 않는다고형사님께서 그렇게 말해 주셨으니까 일단은 믿어 보려고요.”

그래. 난 우리 애들 의심하고 싶지가 않다. 혹시나 관련이 있다고 해도.”

저도요. 그럼 형은 언제가세요?”

일단 내일은 순영이랑 지수가 다녀오기로 했어. 남아있던 젊은 형사가 그렇게 하자고 하더라고. 난 좀 뒤로 밀릴 것 같은데, 차라리 그게 낫지 싶다.”

 

 

 

특정한 단어가 쏙 빠진 대화였음에도, 우리는 끝까지 그 단어를 입에 담지 않은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마 내가 그렇듯이, 승철 또한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동아리의 부장으로서 누구보다 짊어지고 가야 할 감정이 많을 그는 그래 봤자 나보다 고작 한 살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사실, 난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단지 기분이 이상할 뿐이었다. 정말로, 이상하다고밖에 서술할 수 없는, 그런 기분.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종이컵 끝을 씹으며 멀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올려다보는데, 승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께에 앉은 눈을 털어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무릎에도 하얗게 눈발이 앉아 있었다.

 

 

 

지훈아. 혹시 집에 들어가 봐야 된다거나, 그런 거 있어?”

아뇨, 없어요. 열두 시 전까지만 들어가면 돼요.”

그래? 그럼 너도 밑에 잠깐 들렀다 가.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당연히 가야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승철이 내게 시선을 건넬 때 나는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다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을 뿐이다. 그 바람에 종이컵을 미처 버리지 못하고 벤치 위에 두고 왔다. 아마 바람에 날아갔겠지. 병원 특유의 이질적인 공기에 절로 입술이 깨물린다. 반쯤 멍한 정신을 하고 승철의 뒤를 따라 땅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찬바람에 바싹 마른 입술이 앞니에 깨물려 또 사방으로 갈라지는 것을 느낀다. 만약에, 정한을 마주했을 때에도 눈물이 나지 않거나 슬프지 않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잠깐 동안 십 수 번은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가장 조용한 구석자리, 사람이 없어 공허하게 빈 방 안에 널린 모포담요와 일회용 식기 몇 개, 딱 세 개 놓인 흰 국화, 그 위로 검정 테두리의 액자 안에 걸린 정한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짐을 느끼고 그 앞에 절망하듯이 주저앉아야만 했다. 이것은, 일종의 불가항력이었다. 걱정하던 대로 눈물이 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죽고 싶을 정도로 맘이 저렸다. 벽에 기대어 선잠이 들었던 지수가 내 무릎이 꺾여 바닥과 충돌하는 소리에 눈을 떠 이쪽으로 다가왔다. 지훈아, 괜찮아? 하는 물음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온 시간 가운데 가장 해사하게 웃고 있는 정한의 사진은, 지난 영화제 참가 후 그가 내 휴대폰을 가져다가 찍어 놓은 사진이었다. 제 머리 위로 팔을 높게 쳐들어 휴대폰을 휘젓던 그의 손, 사진을 단체 채팅방에 유포하겠다는 내 진지한 말에도 그러라며 웃어넘기던 그의 얼굴, 기어이 올라오고 만 그의 사진을 다 함께 저장하며 웃던 우리들. 그 모든 것이 영상 클립 재생하듯 눈앞으로 스치고 지나간다. 왠지 조용한 장례식장 한 구석에서 정한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국화를 쥐고, 한 단 아래에 내려 두고, 자세를 깊이 낮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이후 내가 피운 향이 반 토막 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정한의 영정 앞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실감이 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어디에선가 그가 나타날 것만 같고, 그의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 것만 같지만,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기분. 윤정한은 이제 정말로 곁에 없다, 라는 사실이 뇌리에 도장 찍히듯 강하게 박혔다. 밖에는 더 거세진 눈이 바람에 섞여 휘날릴 것이다.

 

날이 춥다. 그리고 맘이, 내 마음이 춥다.

끝까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2. 2학년 4반 권순영

 

 

 

 

 

정한이 형이 세 번째 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것은 지난 7, 영화제 참가 차 부산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였다.

방을 미리 예약하지 못해 겨우겨우 찾은 민박은 남자 고등학생 7명이 구겨서 잔다고 해도 너무나 비좁은 4인실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대한 몸을 웅크려 둘러앉은 채 가운데 빈 공간에 영화제 수상 트로피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숙소에 들어온 것만 해도 10시가 다 되었으니까, 두 시간 쯤 지나자 지수 형이 먼저 앉은 자리에서 상체를 뒤로 눕혀 몸을 구기더니 잠을 청했다. 내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승관은 곧 내 허벅지를 베개 삼아 지수 형과 다리를 이리저리 겹치더니 그대로 숙면에 빠져 들었다. 한 시 반 쯤 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나와 정한이 형, 승철이 형 정도였다. 민규는 눈은 뜨고 있었으나 부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쉴 새 없이 떠든 탓에 이미 정신은 잠에 든 것 같았다.우리는 소중한 트로피를 부엌 싱크대 옆에 놔두고 이리저리 뒤섞여 잠에 든 부원들을 굴리고 밀어 한데 모은 뒤에, 최소한의 베개를 머리 아래에 끼워 주고 최소한의 이불을 덮어 주었다. 거의 부엌으로 밀린 상태에서 다시 다리를 접고 몸을 웅크린 우리 셋은 각자 하나씩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기로 약속을 하고서, 탈탈 소리가 나는 낡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한 시간 정도 더 대화를 나누었다. 제 무릎에 턱을 괸 채 꾸벅꾸벅 졸던 민규가 점차 미끄러져 쿵 소릴 내며 바닥에 머릴 박고서도 잠을 잘만 자고 있을 때, 그런 민규를 잠깐 돌아본 형이 조용한 목소리로 먼저 그 얘길 꺼낸 것이었다. 다들 자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특유의 팔랑거리는 투가 사라진 목소리는 작으면서도 어딘가 진중한 느낌까지 들었었다.

 

 

 

, 세 번째 대본 쓸 거야. 이거 너네한테 처음 말하는 건데, 어때?

어떻긴, 우리야 네가 대본 쓴다고 하면 너무너무 좋지.

맞아. 형 대본이 그냥 나오는 거 아닌 거 우리도 다 알잖아. 혹시 계속 쓰고 있었어?

아니? 이제부터 쓰기 시작하려고. 그 전부터 구상은 대충 해뒀는데, 최근에 플롯이 제대로 잡혔어. 그거 조금 손 보고, 8월 초부터 작업 시작하려고.

, 진짜 멋있어. , 형은 진짜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프로다운 사람인 것 같아.

에이, 내가 뭘. 그냥 취미로 쓰는 건데. 딱히 재미있는 내용을 다루는 것도 아니잖아.

 

 

 

형은 내 칭찬에 겸손한 말들로 대꾸하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진심, 그것도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동아리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 이유라면 딱 하나, 역시 호기심으로 읽었던 정한이 형의 대본 습작 때문이었다. 맘대로 들춰본 것에 대해 사과할 생각도 못 하고, 그 날 이후로 형의 1호 팬을 자처하며 홍보를 가장해 승관, 민규, 지훈까지 동아리로 끌어 들였었지. 문득 잘 뒤섞여 자고 있는 애들을 돌아보았다. 이상하게도 나의 정한이 형 팬 활동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해 주는 승철이 형이 키득키득 웃으며 시답잖게 손을 들어 내 머리칼을 죽죽 쓸어 내렸다.

 

 

 

, 네 대본 좋잖아. 그래서 권순영이 너 1호 팬 할 거라면서, 저 애들 다 끌고 들어온 거 아냐. 순영이 아니었음 우리 동아리 벌써 없어졌을 걸?

아아맞아, 그건 인정. 그런 점에서 내가 순영이 많이 좋아하잖아, 그치?

, 순영이 심쿵!

 

 

 

새벽이라 그런지 다들 목소리도 낮고 분위기가 착착 가라앉는 것이 못내 맘에 걸려서 일부러 과장하며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더니 예상치 못하게 두 형 모두 박장대소했다. 괜히 뿌듯한 기분에 어깨를 펴고 으쓱이자 그걸 정면으로 마주한 정한이 형이 바닥을 때려가며 웃어댔다. 쓸 데 없이 우울한 분위기는 역시 우리 동아리에 어울리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며 형들이 진정하는 동안 팔을 쭉 뻗어 잠에 든 네 사람 위에 엉성하게 걸쳐진 이불을 곱게 펴 덮어 주었다.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승관의 팔을 고집스레 이불 속으로 밀어 넣고 나서 다시 형들 쪽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우리들 가운데에 놓인 승철이 형의 휴대폰이 길게 진동을 울렸다. 발신자는 담당 선생님. 승철이 형은 휴대폰을 조심스레 들어 전화를 받았다. 굳이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지 않아도 주위가 워낙 조용한 탓에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꽤 선명하게 들려왔다.

 

 

 

「― , 승철아. 혹시 자다 깼니?

아니요, 저 지금 정한이, 순영이하고 조용히 얘기하고 놀고 있었어요. 좀 이따 자려고요. 쌤 서울 도착하셨어요?

「― . 방금, 10분 전에 도착했어. 지금 집이야. 너희 내일 학교 안 간다고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너무 걱정 마세요. 내일 기차 예약 시간에 늦지 않게 준비시켜서 서울 안전하게 올라갈게요. 쌤 얼른 주무셔야죠, 벌써 시간이 두 신데.

「― 이거 끊고 바로 자려고. 승철이랑 나머지, 정한이랑 순영이도 전화 끊으면 씻고 얼른 자, 피곤하겠다. 잘 자고, 내일 조심히 올라오고.

쌤 순영이예요. 안녕히 주무시고 낼 모레 학교에서 봬요.

뭐야, 인사하는 거야? 쌤 저 정한이고요, 안녕히 주무세요.

 

 

 

승철이 형이 곧 전화를 끊을 것 같아 멋대로 끼어들어 인사를 한 탓에, 정한이 형도 급하게 쌤께 인사를 건넸다. 전화 너머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곧 잘 자, 하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휴대폰 상단에 뜬 시계가 두 시 반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야 눈이 좀 뻐근해 손등으로 이리저리 부비고 있으려니까, 내 가까이에 떨어져 있던 베개를 집어 든 정한이 형이 내 팔을 당겨 베개 위로 날 눕게 했다. 약간의 공간이 남은 구석자리에 누운 꼴이 되었을 때,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이불을 덮음으로써 말린 정한이 형이 그냥 자, 하고 덧붙였다. 반쯤 눈을 감은 채 그럼 형은 대체 어디서 잘 건데요, 하고 묻자 형은 어디서든 자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왠지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는지, 승철이 형이 정한이 형을 당겨 내 가까이에 눕게 하고 자기도 그 근처의 공간에 몸을 끼워 넣었다. 결국 우리 셋도 난잡하게 뒤섞인 채 누운 꼴이 된 것이다. 먼저 잠든 넷과 별 다를 바가 없자 누운 상태에서 웃음이 터졌다. 불 꺼진 방, 잠깐 동안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맴돌다가 서서히 흐려졌다.

 

 

 

잘 자, 얘들아. 내일 열 두 시 전에는 일어나야 된다. 알지?

너나 늦잠 자지 마, 승철아. 순영이 잘 자고.

형들 잘 자. 나 발로 차면 안 돼, 알겠지?

 

 

 

 

끝까지 제 할 말만 남기고, 각자 잠을 청하느라 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잠자리가 불편해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하려 눈을 꾹 감고 있었고, 승철이 형은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벌써 잠에 든 것 같이 저 멀리서 거센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눈을 감은 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점점 잠이 드는 것 같았다. 아마 정신이 먼저 꿈나라로 가 버렸을 때였나, 꿈을 꾸는 것처럼 정한이 형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영아, ? 자나.

형이 너한테, 세 번째 대본…… 제일 먼저 보여줄게.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세 번째 대본이 있다는 것 정도만 겨우 알고 지내왔었으니까.

 

아마 꿈이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진실을 밝힐 수 없는, 너무나도 생생한 꿈.

 

 

 

 

 

 

 

**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각, 쪽창 하나 없는 취조실은 그것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어두컴컴했다. 교복을 입은 채 취조실 안으로 주춤주춤 들어오는 순영은 여전히 눈가가 발갰다. 지칠 만큼 울었을 테니 어쩌면 눈가가 잔뜩 부어있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만년필을 손에 쥐고 굴리던 형사는 조심스레 의자를 끌어당기다 듣기 싫은 소리가 나자 화들짝 놀라는 순영을 바라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웃지 마세요. 민망했던 듯 작게 터져 나온 목소리가 반쯤 잠겨 있다. 형사는 만년필을 수첩 옆에 내려놓고 넌지시 물었다.

 

 

 

어제 많이 울었나 보네, 괜찮아요?”

, 진짜……. 저 진짜 괜찮아요, 앞에 보일 거 다 보이고.”

알겠어요, 알겠어. 눈이 안 보인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몰라요, 학교에서 오는데 승관이가 자기가 보호자 해야 된다고 박박 우겨서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하여튼 진짜…….”

 

 

 

순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고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며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겨울바람에 차게 식은 손이 눈에 닿아 뜨끈한 눈가가 그런 대로 식는 것 같았다. 형사는 작게 소리 내어 웃다가 곧 만년필을 손에 쥐고서 수첩을 열었다. 빈 종이에 숫자 2를 그린 그가 순식간에 진지해진 음성으로 본론을 꺼내었다.

 

 

 

, 그럼 시작해 봅시다. 친구도 기다리니까 빨리 하고 나가야지. 학생 학년 반 이름 말해 주세요.”

, 2학년 4반 권순영이요.”

그래, 순영 학생. 학생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의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서 현재 이곳에 와서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본 형사가 묻는 질문에 대해서 가감 없이, 진실 되게만 말해주시면 되고, 묵비권을 행사하실 수 있으니 억지로 다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순영 학생이 속한 단편영화 제작부에 대해서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평소 동아리 분위기가 이랬다든가, 그런 거 위주로요.”

 

 

 

시선을 둘 데가 없어 수첩 위로 만년필이 휘날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순영은 책상 아래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둔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서 한참을 꼼지락대며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곧 비장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형사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서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 그렇게 보시니까 또 웃겨서. 암튼 저희 동아리는요, 진짜로 빠지는 사람 하나 없이 다들 친하고, 분위기는 늘 좋았어요. 형들이 저 포함해서 2학년 친구들도 많이 챙겨 주셨고, 저희도 형들이랑 장난도 치고 잘 따르고 해서 늘 화기애애했어요.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있었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기억에 남는 일은 전부 다 웃고 즐기고 했던 것밖에 없어요. 저희 진짜 다 친했거든요.”

동아리 분위기가 꽤 좋았나 보네요. 그럼 거기서 순영 학생은 무슨 일을 했죠?”

저는 진행 팀이었어요. 민규랑 같이. , 진행 팀이 뭐 하는 거냐면요, 우선 처음 들어왔을 때는 슬레이트 치는 것부터 했었어요. 그러고서 촬영 장비도 옮기고, 장비 철수도 하고, 촬영장 정리 같은 것도 하고 그랬죠. 어쨌든 진행 팀이 영화 촬영 진행이 원활하도록 발 벗고 나서서 돕는 스텝이니까 특히 궂은일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심부름이라든가, 뭐 사오고 그런 거요.”

 

 

 

줄줄 얘기를 늘어놓는 순영은 어느새 추억에 젖은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있었다. 형사는 저도 모르게 슬쩍 입 꼬리를 끌어당기며 만년필을 쥐고 그의 이름이 적힌 아래에 특이사항 없음.’ 이라고 써 내렸다. 곧 만년필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그가 지그시 순영을 응시하고서 다음 질문을 입에 담았다. 공중에 떠돌다 흩어지는 음성에 순영의 얼굴이 차게 굳어 갔다.

 

 

 

그럼 순영 학생,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 해야죠. 정한이 형은, 어떻게 보면 저한테 정말 은인이고, 고마운 사람이고, 항상 존경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사실 이 동아리에 호기심으로 들어왔었는데, 우연히 정한이 형이 쓴 대본을 봤거든요. 그걸 본 이후로 동아리에 들어온 걸 후회하지 않아요. 형의 대본과 영화가 저를 지금까지 이끌어준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예요.”

정한 학생의 시나리오가 순영 학생을 완전히 매료시켰다는 거네요. 맞습니까?”

, 맞아요. 그래서 제가 자칭 타칭 정한이 형 1호 팬이다, 하고 다녔어요. 형도 저 많이 챙겨 주셨고, 저번에 영화제 출품작에서 제가 조연을 맡았었는데 그 때도 직접 연기 지도까지 해 주면서 격려 많이 해 줬었어요. 형은 정말, 그 자체로 너무나 좋은 형이에요.”

특히 더 상심이 컸겠네요.”

. 아직까지도 형이 왜 그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가요. 믿기지도 않고.”

 

 

 

정한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영의 얼굴은 웃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말을 마치고 금세 촉촉이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부비는 게 못내 안쓰러워서, 형사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의심사항 전무.’라는 글귀를 덧붙였다. , 나 왜 자꾸 울지? 혼자 중얼거리며 눈가를 꾹꾹 누른 순영이 겨우 눈물을 삼키고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아래로 떨어뜨린 손을 단단하게 쥐어, 그는 그때부터 제 허벅지를 간헐적으로 쿵쿵 두드리기 시작했다.

 

 

 

슬픈 게 당연하지, . 괜찮아요. 다 울고 털어내는 건데.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순영 학생?”

괜찮아요, 진짜! 저 아까만 잠깐 그랬고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좀 전에 언급한 민규라는 친구는 순영 학생과 어떤 사이인가요?”

, 민규요? 민규는 제 친구예요. 저랑 민규랑 승관이랑 같은 중학교를 나왔거든요. 그래도 제가 민규를 제일 오래 봐왔을 거예요. 제 간곡한 부탁으로 동아리에 들어 왔는데, 워낙 성격이 싹싹해서 형들이랑도 잘 어울리고 동아리의 핵심 인물이 됐죠. 민규 좋은 애예요. 근데 왜요?”

앞서 지훈 학생의 참고인 진술 과정에서 현재 진행 중이던 세 번째 영화에 대한 정보를 최승철 학생이나 김민규 학생이 갖고 있을 거란 얘기가 나왔습니다. 본 형사가 김민규 학생과 윤정한 학생 사이의 관계에 대해 조사해야 할 점이 있다고 판단되었는데, 둘 사이의 관계는 평소 어떻던가요?”

……. 저도 지켜보고 추측만 한 거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정한이 형이 민규한테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았어요. 정한이 형이 이번 영화 주연 맡은 것도 다 민규가 옆에서 많이 응원해 주고 도와준 덕분이었거든요.”

그럼 원래 윤정한 학생이 주연을 맡은 적은 없었다는 말인가요?”

, . 저도 승철이 형한테 들은 건데, 형이 원래는 연기자가 꿈이었대요. 근데 재작년에, ……,”

왜 그러시죠?”

이건, 이건제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아니라서……. 나중에 승철이 형한테 물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죄송해요.”

 

 

 

평소와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조심 말을 이어가던 순영은 곧 제가 뱉은 말에 제가 놀라 급하게 입을 꾹 다물었다.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굴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그는 이내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책상 위에 왼손을 두고 간헐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형사는 그런 순영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만년필을 들어 수첩 제일 아래에 과거 기록 조사 필요라는 문구를 덧붙여 적었다. 책상 아래로 내린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한참이나 손장난 치며 제 운동화 앞코를 응시하던 순영은, 곧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밀어 넣었다.

 

 

 

이제…… 끝난 거 맞죠?”

, 수고했어요, 순영 학생. 가 봐도 좋아요. 아까 친구가 기다린다고 했지 않나?”

 

 

 

, 그럼 저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애써 입 꼬리를 당겨 웃어 보이며 밝게 인사를 건넨 순영은 조금 비틀대듯이 어색한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그 좁고 어두운 공간을 빠져나갔다. 희미한 알전구 불빛 아래, 형사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서 만년필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곧 그의 만년필 펜촉이 지나간 수첩의 새 페이지에는 윤정한, 김민규, 과거라는 단어들이 차례로 휘갈겨져 있었다.

 

 

 

 

 

 

 

**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왠지 죄 짓는 기분이 들어 도망치듯이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승관은 경찰서 로비 계단에 쭈그려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발소리를 죽이고 뒤에서 다가가 어깨를 밀어버린다든가 하는 장난을 쳤을 테지만 그런 기분이 아니어서 그냥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을 뿐이다. 승관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슬쩍 입 꼬리를 당겨 웃어 주었다. 그의 전화가 길어지는 동안 그 옆에 비슷한 자세로 쭈그려 앉아 휴대폰을 꺼내 드니, 승철이 형과 지훈의 문자가 차례로 쌓여 있었다. 다들 본인 같은 문자를 보냈다 싶어 절로 터지는 웃음을 입술 새로 흘리며 답장을 하고 있으려니까, 승관이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키며 내게 물었다.

 

 

 

너 혹시 다시 학교로 간다거나, 그럴 생각은 없지? 지금 등교 거부한 애들도 좀 많아서 학교에서도 자체 휴교 생각 중이라는데. 어떻게 할 거야?”

학교 안 가면 어디로 가?”

어딜 가긴, 너 어제 그러고 울다가 장례식장도 한 번 못 들렀잖아. 그래도 얼굴은 봐야지. 승철이 형이 너랑 같이 오냐고 묻던데, 갈 거지?”

 

 

 

장례식장, 이란 단어를 억지로 한 귀로 흘리며 지훈의 문자에 대한 답장을 타이핑하고 있었는데, 퍽 태연하게까지 느껴지는 승관의 음성이 귓가를 떠날 생각을 않았다. 피하려고 피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닌데,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데, 어쩌면 나는 내 감정에 휘둘려 형을 피하려고 했던 거였나? 하는 생각이 수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승관은 이내 제 손을 아래로 내밀었다. 그것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같은 자세로 구겨져 있던 다리가 저릿하다. 두터운 패딩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은 승관은, 멀리 도로가를 바라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괜찮아. 나는…… 그렇더라고.”

?”

마음이 편하지 않은 거 나도 알아. 나도 어제 너 보내고 승철이 형이랑 둘이 가서 많이 울었어. 형이 나보고 그러다 네가 죽겠다고, 그만 좀 울라고 타박도 했어. 근데, 그러고 나니까 좀 괜찮아 지더라고.”

……그래도, 너랑 나랑 같겠냐.”

지금 당장 인정하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서 얼굴은 봐야 맘이 좀 덜 불편할 거 아냐. 내가 형 맘 편하게, 좋은 데 가서 살게 해 주려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 그런 얘기도 들려 줘야지. 형이 어디선가 듣고 있을 지도 모르잖아? 너 엄청 대견해할 걸? 우리 순영이 잘 했다하고.”

 

 

 

그렇게 말하고서, 승관은 아직까지 다리가 저려 허벅지를 콩콩 두드리고 있는 날 바라보며 입 꼬리를 끌어당겼다. 왠지 그 웃음에서 정한이 형의 얼굴이 비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시답잖은 몇 마디에 정체 모를 용기 같은 게 차오르는 것이었다. 그래, 울더라도 가서 얼굴 보고 울어야지, 싶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패딩에 몸을 파묻은 승관의 팔을 당겨 경찰서 건물을 천천히 벗어나면서 왠지 모르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귀신의 존재를 믿기를 잘했다는, 아마 승관이 듣는다면 한동안 이상한 놈 취급할 만한 생각. 도로가에 서서 승관이 콜택시에 전화를 거는 동안, 나는 햇빛이 반쯤 가려진 채 또 눈을 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저 위 어디에선가 정한이 형이 내 유치한 생각마저 모두 엿듣고서 혼자 키득키득 웃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승관이 분명히 생각보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병원 특유의 분위기가 싫어 병원을 가지 않는 나로서는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 자체가 이물감이 들었다. 조금 산소가 적은 공기가 내 몸을 감싼 느낌이랄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으려니까 승관이 엘리베이터의 하강 버튼을 누르고서 손을 뻗어 내 미간을 문질러 폈다. 인상 좀 펴라, 하는 말에 보란 듯이 입 꼬리를 당겨 웃어 주기는 했는데, 보나마나 엄청 이상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올 때까지만 해도 나를 둘러싸고 있던 원인 모를 용기가 병원 정문에서 다 털어져 나간 것 같았다. 불안, 초조, 그리고 그 비슷한 단어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배회하는 가운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승관은 내 등을 떠밀어 네모진 기계장치 안으로 날 집어넣으면서 옆에 착 달라붙었다. 아마 그에게는 내 기분이 저 바닥까지 깔릴 대로 깔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건 뭐랄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있지, 나 안 괜찮을 것 같아.”

? , 뭐가?”

무서워,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막연하게.”

…….”

눈을 감고 걸어가야 할까?”

 

 

 

장례식장이 늘어선 복도를 상상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들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승관이 내 말에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그냥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효과음을 내며 지하 2층에 멈춰 섰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병원 로비와는 다른 공기가 훅 불어 들어온다. 사람 향기가 많이 배어 있기는 한데, 어딘가 모르게 슬프고, 눅눅한 느낌. 무의식중에 승관의 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승관은 내게 왼쪽 팔을 붙잡힌 채 어색한 자세로 코너를 돌아 복도 끝으로 나를 이끌었다. 스쳐가는 사람들의 음성들. 어느새 뻗어진 승관의 팔이 내 어깨를 간헐적으로 두드리며 조심스레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기어이 도착한, 복도 구석 자리의 빈소 안에는, 흐트러진 셔츠를 걸치고 진녹색 모포 담요를 두른 채 선잠에 든 승철이 형과, 의미 없이 숟가락질을 하는 지훈과,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보이는 단상 위로 흰 국화에 둘러싸인 채 환하게 웃는 정한이 형의 얼굴이, 있었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 현실과 희망이 강하게 부딪쳐 희망이 산산조각 났고, 나는 그대로 입구에 주저앉았다. 그래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마치 불가항력의 힘이 나를 내리누른 느낌이었다. 승관은 내 옆에 서서 내게 시선을 주는 듯하다가, 곧 먼저 신발을 벗고 나를 지나쳐 갔다. 차라리 그게 낫다. 내 눈이 울고 있는지, 내 마음이 울고 있는지, 그마저도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제보다 눈물은 적게 났지만, 심장을 누군가 손으로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숨이 턱턱 막혔다. 눈물이라도 나면 좋을 텐데. 나는 단지, 형의 얼굴을 아주 잠깐 마주쳤을 뿐이었는데, 저 사진을 마주했던 우리들의 추억이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하자 견딜 수가 없어졌다. 고개를 숙여 좁아진 시야로 다가오는 지훈의 발이 눈에 들어온다. 선명하던 그의 발이 금세 뿌옇게 흐려졌을 때, 나는 그제야 내가 울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깨 위로 닿는 지훈의 손이 느리게 등을 쓸어내리고,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견뎌야 하는 현실이 무겁게 버티고 있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나는 지훈을 끌어안아 버렸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차라리 소리 내서 울어. 그게 나아.”

……, 지훈아, …… 나 너무 무서워.”

나도 무서워, 나도 무섭고승관이도 무섭고, 너도 무서워. 원래 다 그런 거야.”

다시, ……, 형이 다시 못 온다는 게, 너무 무서워…….”

그래, 그치만……, 저 선택을 한 선배는 얼마나 무서웠을까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선배를 좋은 곳으로 보내 줘야만 해.

차분한 지훈의 음성이 그의 품에 안긴 내게로 큰 잔향을 남기며 울려 퍼졌다. 순간, 심장을 옥죄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좀 전에 들었던 승관의 말들이 한쪽 귓가에서, 또 지훈의 잔향이 한쪽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 잘 하고 있는 거겠죠? 형이 어디선가 듣고 있을 거라고, 아니듣고 있어야만 한다고 집요하게 바라고 또 바랐다. 환청처럼, 어디선가 잘 하고 있어, 잘 했어, 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삶을 살아온 이래로 가장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또 울었다. 견뎌낼 수 없는 나의 공포감만큼,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던 형의 공포감을 위로해줄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이만큼이나 당신처럼 두려워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몸이 힘들도록 울었던 것 같다. 내 등을 규칙적으로 토닥이는 지훈도, 어쩌면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오고 가는 발길이 없어 조용하기 그지없는 장례식장을 채운 나의 설움에 승철이 형이 잠에서 깬 것 같았다. 흐려진 시야로 형이 다가오는 것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승철이 형은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나와 눈을 맞추는 듯하다가, 입 꼬리를 당기며 내 어깨를 느리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내 대신 단상 앞으로 가서, 정한이 형과 눈을 맞추고, 국화를 들어 한 단 아래에 내려놓고는 새 향을 피워 올렸다. 향냄새가 조용히, 서서히 이 안의 공기와 섞여 들고, 지훈은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부볐으며, 나는 입술을 깨물어 정한이 형의 영정을 마주하고서,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내 등 뒤를 스쳐 지나가는 승철이 형이 문득 승관에게 그렇게 물었다. 뒤를 따르는 승관의 발소리가 바닥을 타고 울린다.

 

 

 

승관아, 혹시 민규 연락 돼? 형 전화 계속 안 받는데.

그러니까요, 저도 어제 밤이랑 오늘 아침에 해 봤는데 안 받더라고요. 전원이 꺼져있는 건 아닌데…….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내 머릿속에도 흘러가듯이 의문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민규는, 어제 저녁 날 바래다 준 이후부터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으니까.

 

 

 

 

 

 

 

 

 

 

#3. 3학년 7반 홍지수

 

 

 

 

 

정한이 새 대본을 완결 냈다고 우리에게 공식적으로 알린 것은 원서 접수가 끝난 9월 말 어느 오후였다. 그가 세 번째 대본을 쓰고 있더라는 건 8월 초쯤엔가 지나가듯이 나와 승철에게 말해줬던 적이 있어서, 그 선언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저 대본 작업이 빨리 끝났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평소처럼 남는 책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던 정한은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서 놀란 표정의 후배들특히 승관과 순영을 바라보며 키득키득 소리 내어 웃었다. 사실 정한의 대본 작업이 끝났다는 말은 공공연히 촬영 시작이라는 말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승철도 의아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촬영한다고? 승철이 묻자 그제야 정한이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일단 그렇다고 알려주는 차원에서 얘기 꺼낸 거야. 당장 내일부터 촬영하기에는 승철이가 너무 힘드니까. 촬영은 10월 초부터 하고 싶어. 이번에는 내가 연기할 거거든.

「……네가?

, 연기 해보려고. 지난 번 출품작 촬영하는 거 보니까 다들 재밌어 보여서. 무지 탐나는 거 있지?

 

 

 

정한은 눈을 접어 샐쭉 웃어 보이고, 측면에 앉아 있던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 이제 괜찮아.’ 하고서 입모양으로 말해 주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난 믿을 수 없어서 그렇게 되물으려다가, 동아리 실에는 그 일을 몰라야 할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나와 반대쪽 측면에 앉은 승철이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게 나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터지면서도 왠지 짠했다. 우리 말고 유일하게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순영이 눈을 크게 떠올리고 정한을 올려다보는데, 그는 나에게 했던 것처럼 순영에게도 괜찮아, 하고서 소리 내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조금 뒷자리에 앉아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지훈이 입을 열었다.

 

 

 

근데, 그럼 선배 혼자 주연 하시는 거예요?

아니, 투탑이야. 개인적으로 난 민규랑 같이 하고 싶은데, 어떤 것 같아, 승철아?

, 난 지수가 출품작 하면서 꽤 안정적으로 연기했다고 생각해. 그래서 지수가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정한은 자신이 이름을 뱉은 민규에게로 넌지시 시선을 던졌다가, 승철이 나를 거론하자 곧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길을 잠깐 동안 마주하고 있던 민규의 표정이 묘했다. 의아한 것도 같고, 조금 당황스러운 것도 같았달까. 하지만 배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으로써는 나 또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부원 모두의 시선이 승철과 정한 사이 어딘가로 집중되었고,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이 몇 갈래 느껴지자 승철이 멋쩍게 웃으며 선택권을 정한에게 넘겼다.

 

 

 

근데 지금 배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니까, 우리 작가님이 제일 어울릴 것 같은 사람으로 선택하시면 되겠다. 그치? 네가 주연이기도 하니까 배역이랑 잘 맞으면 연기하기도 편할 거고.

, 역시 그렇겠지? 내가 그 말 하려고 했었거든. 난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에는 민규가 지수보다 잘 어울릴 것 같아. 민규야, 같이 연기 할 거지?

? , . 열심히 해 볼게요, 감사해요.

 

 

 

주춤주춤, 눈치를 보던 승관이 와아아하며 분위기를 띄우듯 박수를 치자 그에 동조하듯 박수 소리가 서서히 커졌다가 잦아들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박수를 치면서도, 나는 왠지 어딘가 모르게 켕기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조금 전, 제안이 아닌 확인의 의미를 띄었던 정한의 물음과 어색하게 따라 붙은 민규의 대답. 아마도 상대 배역이 이미 정해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나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정한이나 민규를 의심할 마음은 없다. 원서 접수를 하느라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기분 탓이리라, 생각하고서 모임을 파하고 동아리 실을 빠져나가는 승철과 정한의 뒤를 따라 복도로 걸어 나왔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그 때 느꼈던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진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확히 10월 초, 세 번째 영화 촬영이 시작된 1일 이후로 정한과 민규, 그리고 감독인 승철을 뺀 나머지 네 사람은 동아리 실에 가는 일이 매우 드물어졌다. 정한이 새벽 세 시 쯤엔가 단체 채팅방에 영화는 우리들끼리만 단출하게 찍고 싶다는 뉘앙스로 글을 올린 것을 다들 나중에서야 보고 발걸음을 알아서들 끊은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주로 음악실에서 촬영되었고, 공식적인 동아리 모임 시간에 나를 포함한 우리 네 사람은 동아리 실에 덩그러니 앉아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교실로 돌아오고는 했다. 처음에는 오늘 하루겠지, 내일까지겠지, 했던 게 일주일 쯤 지나자 동아리 모임 시간이 되면 우리 넷은 저마다 문제집을 싸 들고 동아리 실로 들어왔다. 고요한 분위기,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밖에 울리지 않는 가운데 괜한 궁금증이 들어 나는 지훈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훈아, 너 혹시 승철이가 이번 영화 편집에서 빠지래?

? 아뇨,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건 아닌데, 이번 영화는 길이가 별로 안 길어서 혼자 작업해도 될 것 같다고만 말하셨어요.

, 근데 저도 얼마 전에 승철이 형이 진행 팀 별로 할 일 없으니까 동아리 시간에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따로 갠톡 왔었어요. 이거 뭐 있는 거 아니에요?

그래, 나도 승철이가 예술 팀 할 일 따로 없다고 하긴 했어. 배경음악만 좀 찾아주고, 상처 분장만 좀 해 주면 된다고 하긴 하던데.

 

 

 

지훈이 대답을 줄줄 늘어놓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순영이 무료하게 샤프 돌리고 있던 것을 멈추고 기다렸다는 듯 제 할 말을 뱉었다. 정말로 며칠 전에 승철이 내게 따로 연락해 그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나 그 얘기를 덧붙이니, 내게서 그것을 전달받았던 승관이 옆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들은 서로 엇갈리는 시선 가운데 뭔가 이상하지, 뭔가 이상한데, 같은 맥락의 말들만 줄줄 늘어놓다가 곧 이 묘한 기분을 촉발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문제집으로 시선을 꽂아야만 했다.

동아리 모임 시간이 끝나고, 청소를 위해 교실로 가려는데 문득 제 문제집을 챙기던 승관이 내 팔을 붙잡아 세웠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한참을 손장난만 치며 머뭇대던 그는 퍽 비장한 투로 내게 물어왔다.

 

 

 

, 혹시 영화 내용 뭔지 알아요? 승철이 형이나 정한이 형이 그런 얘기 안 해주나 싶어서요.

……, 승관아. 이게 진짜 이상한 게, 내가 정한이랑 늘 같이 다니는데 정한이가 영화 관련된 얘기는 전혀 안 하더라고. 애가 기분이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원래는 대본 쓰면 내용도 말해 주고 하던 게 이번에는 없더라고. 그래서 나도 내용에 대해서 들은 게 전혀 없어. 승철이는 아는 눈치인 것 같은데 내가 눈 마주치려고 하면 좀, 피하더라고.

그러니까, 이거 좀 이상하잖아요. 저번 주 토요일에, 형 원서 접수 때문에 바쁠 때 저 혼자 동아리 실에 있었거든요. 그때 정한이 형이 분장 좀 도와 달라고 해서 음악실까지 올라갔었는데, 얼굴이랑 손목인가, 그런 데에 진짜 상처가 막 있더라고요. 그래서 치료를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또 형이 해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틴트 꺼내서 칠해주긴 했는데 그건 진짜 상처였어요. 대체 어디서 다쳐 오셨는지…….

 

 

 

승관은 잔뜩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서 말을 마치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래, 얼마 전부터 정한의 몸 구석구석에 다치고 긁힌 상처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무심코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가 길게 긁힌 상처가 있기에 어디서 다쳤냐고 물었더니 말을 돌렸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어 인상을 구기고 있으려니, 내가 어지간히도 착잡해 보였는지 승관이 조심조심 다가왔다. 애초에 정한이 왜 연기를 쉬다가 다시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애한테 더 큰 부담을 줄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승관의 어깨에 장난스레 팔을 두르고 동아리 실을 벗어나 그의 반이 있는 방향으로 함께 걸어갔다. 별 일 없겠죠? 승관은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별 일 없을 거야. 애들이 누군데, 아마 내용에 엄청난 반전이 있어서 나중에 우리들한테 정식으로 보여주고 싶은 거겠지. 넌 너무 걱정 마. 혹시나 무슨 일 있을 거 같으면 형이 친구들한테 물어 볼게.

「…알겠어요. 형도 얼른 청소하러 가셔야죠.

, 이따 일 있으면 보자.

 

 

 

승관은 조금 찝찝한 듯 했으나 곧 표정을 풀고 내게 손을 흔들며 교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층 위인 우리 반으로 느리게 올라가면서 지금까지 내가 느꼈던 이상함을 논리적으로 끼워 맞추려 했지만, 그 구조 사이에 어딘가 텅 빈 공간이 자꾸만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될 대로 되겠지, 그렇게 치부하며 생각하는 걸 때려치우고 청소가 거의 끝나가는 교실에 들어가 앉았다. 내 대각선 앞자리인 정한은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변덕스런 날씨 탓에 접어올린 그의 교복 소매 밖으로 크게 붙은 반창고가 눈에 띄었다. 저기는 대체 어디서 다치고 온 거야. 금방이라도 정한을 깨워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굳이 건들지 않기로 했다. 이맘때쯤이면 정한도 저 나름대로 생각이 복잡해질 테니까. 어거지로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가 눈에 들어오는 게 하나도 없어, 나도 정한과 비슷한 자세로 엎드렸다.

 

 

우리의 세 번째 영화는 진행 팀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예술 팀은 다친 상처를 치료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

 

 

 

 

 

 

 

일교차가 큰 탓에 저녁 늦게 취조를 받으러 온 지수는 교복 위에 두꺼운 가디건과 패딩을 겹쳐 입고서 취조실 안으로 들어왔다. 의자를 끌어 당겨 앉은 그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어 무음 모드로 설정을 변경해 두고 조심조심 패딩을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 두었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고개를 든 형사가 수첩을 새 페이지로 넘기고 만년필을 돌리며 별 생각 없이 물었다.

 

 

 

저녁 먹고 오는 길이에요? 학교에서 온 건가, 교복이네.”

, 오늘은 계속 장례식장에 있었어요. 학교에서도 등교하지 말라고 해서……. 그래서 승철이랑, 아시죠? 저희 동아리 부장인데, 하여튼 걔랑 같이 저녁 먹고 여기 온 거예요. 형사님은 저녁 드셨어요?”

조사 끝내고 먹을 예정입니다. 그래서 지금 상당히 배고픈 상태고요. 질문이 빨라지더라도 이해 좀 해 줘요.”

 

 

 

형사의 너스레에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는 제 옆에 놓인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두들겨 모서리를 맞추고 그 위로 수첩을 올려놓고서 만년필을 바르게 쥐었다. 지수는 왠지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할 것만 같아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을 가지런히 허벅지 위로 내려놓았다. 형사가 곧 지수에게로 시선을 잠시 던졌다가 아래로 떨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학생 학년 반 이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3학년 7반 홍지수입니다.”

, 지수 학생. 학생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 수사에 도움을 줄 진술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본 형사의 질문에 진실 되게만 답해주시면 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면 묵비권을 행사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본인이 아는 대로 솔직하게만 답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아시겠죠?”

 

 

 

좀 전에 형사가 장난처럼 말한 대로 말이 좀 빨라진 것 같아, 지수는 멍하니 듣고 있다가 고개를 짧게 내젓고 곧 위아래로 끄덕였다. 동의를 표한 것을 확인한 형사가 수첩 위로 그의 이름을 써 넣고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최근에 촬영 중인 영화가 있었죠. 그 영화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근데 저는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고, 영화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들은 게 없어요. 정한이가 대본을 다 썼다는 얘기를 9월 말쯤21일이었나? 그 때쯤 하고 101일부터 촬영을 했거든요. 근데 촬영은 정한이랑 민규, 그리고 승철이 셋이서만 했어요. 저랑 다른 부원들은 동아리 실에서 자습을 할 정도로 할 일이 전혀 없었어요. 승철이가 따로 연락해서 다 뺐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 몰라요. 음악실에서 주로 촬영을 했다는 거 정도?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게 다예요.”

그렇다면 그 영화에 무언가 관련성이 있겠네요. 지수 학생은 동아리 내에서 어떤 역할을 했죠?”

저는 승관이라는 친구와 같은 예술 팀이요. 주로 배우 아이들의 의상을 점검해 주거나, 간단한 화장과 분장을 도맡아 했었죠. 영화 편집 때 쓸 만한 백 그라운드 뮤직을 찾는 일도 했어요. 그리고 제가 사진 찍는 게 취미라서 영화 스틸 사진도 몇 번 찍었었고, 승관이가 손재주가 좋아서 영화 포스터 제작도 했었어요. 아마 동아리 내에서는 제일 편한 일들을 해왔을 거예요

 

 

 

지수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제가 나열해 놓은 추억들이 눈앞에 선연했던 탓이리라. 미간을 찌푸린 채 퍽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고민하던 형사는 만년필 끝으로 책상을 쿵쿵 내리찍듯이 두드리다 지수의 이름 아래에 영화 관련 조사, 최승철이라고 써 넣었다. 맞은편에서 그것을 바라보던 지수는 형사의 손이 워낙 빠른 탓에 다 날아간 글씨를 해석하는 것을 포기하고 시선을 여기저기로 굴렸다. 쪽창 하나 없이 밀폐된 좁은 방, 희미한 알전구 불빛, 형사의 어깨 뒤 벽에 걸린 시계는 벌써 여덟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유 모를 싸늘함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아 지수는 입술 끝을 감쳐물었다. 형사는 곧 만년필을 손으로 빙빙 굴리며 두 번째 질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

 

 

 

지수 학생, 평소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의 관계는 어떠했죠?”

정한이랑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쭉 같은 반이었어요. 승철이가 정한이를 더 오래 알기는 했지만, 아마 저랑 가까이 붙어 지낸 시간이 더 길 거예요. 셋 다 다른 것 같으면서도 잘 맞는 데가 있어서 금방 친해졌고, 그래서 승철이랑 정한이가 동아리 만든다고 했을 때도 제가 제일 먼저 들어가겠다고 했죠.”

그럼 최승철 학생은 윤정한 학생을 고등학교 이전부터 알고 지냈단 말인가요?”

, 제가 알기로는 중학생 때부터 친구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승철이가 정한이를 더 잘 알기는 해요. 약간 뭐랄까, 먼저 나서서 챙겨주는 쪽이라고 보시면 돼요. 저나 정한이나 승철이가 많이 챙겨줬죠. 저는 뒤에서 얘기를 들어주고, 그런 쪽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정한이가 저한테 털어 놓은 비밀 얘기가 좀 많아요. 물론 나중에 승철이한테도 말하고 같이 머리 싸맸긴 한데, 그래도 정한이가 저한테 제일 먼저 와서 기대고, 또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었죠.”

상당히 친한 사이였네요. 그런데도 영화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얘기가 없었습니까?”

있었다면 제가 말씀드렸겠죠. 원래 정한이가 대본을 쓰면 저한테 먼저 와서 내용도 얘기해 주고, 이것저것 묻고 하는 앤데, 이번에는 대본이나 영화 관련된 얘기를 절대로 꺼내지를 않더라고요. 먼저 물어볼까 생각도 해 봤는데, 영화 촬영 시작되고 많이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그냥 때가 되면 알려주겠지, 했어요.. 근데 이렇게되어 버린 거죠.”

 

 

 

지수는 말을 마무리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한이 그렇게 되기 하루 전까지도 기분이 묘했고 짚이는 점은 많았으며 문제가 답답하게 막혀 풀리지를 않고 있었다. 어쩌면 제가 먼저 묻고 그를 챙겼어야 했던 걸까. 다 지난 후에 드는 후회 비슷한 생각에 반쯤 깨문 입술 새로 실소가 샜다. 조금은 자조적인 웃음이다. 형사는 가만히 지수를 응시하다가, 만년필을 수첩에 박은 채 가만히 있었던 탓에 잉크가 번진 부분을 손끝으로 괜히 문질러 보고, 위에 적었던 승철의 이름 밑으로 밑줄을 몇 개 더 그렸을 뿐이다. 만년필을 내려놓은 그는 이내 옆에 정리해 둔 서류 뭉치를 들어 몇 장을 휙휙 넘겼다. 형사는 시선을 옮겨 깨알같이 늘어선 글자들을 훑어 읽더니, 곧 거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수에게 물었다.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고 했죠?”

, 그 때 1학년 7반이었어요.”

윤정한 학생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달간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데, 무슨 일이었죠?”

 

 

 

형사의 입을 타고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질문에 책상 모서리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던 지수의 시선이 마구잡이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허벅지 위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던 손의 움직임도 일순 멎었다. 형사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손에 힘을 줘 만년필을 쥐어 들었다. 입술을 감쳐물길 몇 번, 망설이던 지수의 입에서 한숨처럼 대답이 새어 나왔다.

 

 

 

……그건, 제가 얘기해도 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정한이가 자기 멋대로 학교를 빠진 건 아니었고,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생각하기도 싫고, 입에 담기도 싫은 일인데 제가 먼저 알아채지 못해서 정한이가 많이 힘들어 했었어요. 이번 일이 그거랑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때 이후로 정한이가 연기자 하고 싶다는 얘기를 아예 꺼내지도 않았어요. 많이힘들었겠죠. 지금도 저는 그 때 생각하면 많이 힘들어요. 개인적으로 죄책감도 많이 느끼고.”

본인의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 제 불찰만 아니었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지 않았을까, 항상 생각해요. 그래서 혹시라도 정한이가 이렇게 된 게, 그 때 일과 관련 있을까 싶어서. 아직 제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죄책감을 덜지 못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지수 학생의 진술에 의하면 윤정한 학생이 고등학교 1학년 이후로 연기를 관뒀다는 거네요. 그런데 어째서 이번 영화에 주연을 맡게 된 거죠? 혹시 아는 것이 있나요?”

아마……, 제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민규가 많이 도와준 것 같아요.”

“2학년 김민규 학생 말입니까?”

, 민규는……, 걔는 좀 신기한 애였어요. 어린 것 같으면서도 생각이 좀 어른스러웠죠. 그래서 말도 잘 통하고, 특히 은근히 손 가는 데가 많은 정한이를 잘 챙겼어요, 민규가. 둘이 친한 건 알지만 그렇게 각별한 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정한이가 이번 영화 주연 결정하는 데 민규가 도움을 많이 줬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민규랑 같이 주연 후보에 올랐었는데, 정한이가 민규랑 같이 연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민규를 선택했어요. 그 상황에서 배역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고, 무엇보다 대본을 직접 쓴 정한이가 지목했기 때문에 저는 그러라고 했죠. 연기에 대한 미련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렇군요. 혹시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뭔가 더 아는 점은 없습니까?”

, 말씀드렸다시피. 죄송해요,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 것 같아서요.”

 

 

 

흐트러진 서류를 챙기는 형사를 따라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가 패딩을 챙겨 입으며 멋쩍게 웃었다. 형사는 만년필을 빙빙 돌리다 수첩 맨 아래 여백에 윤정한 과거에 김민규와 연관 있는지 조사라는 문구를 깨알같이 적어 넣고 뚜껑을 닫았다. 취조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지수를 올려다본 형사가 이제 가 봐도 좋아요, 조심히 들어가요. 하고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 주자, 지수는 그제야 짧게 목례하고서 취조실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시간은 9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경찰서 로비에 서서 올려다본 하늘은 새까만 가운데 굵직한 눈을 흩뿌리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차게 식은 휴대폰을 꺼내 들자 승철의 문자 두 통이 쌓여 있었다. 여기로 올 거지? 하고 물은 마지막 문자에 간단하게 긍정의 대답을 찍어 보낸 지수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눈송이들을 올려다보다가 곧 휴대폰을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고 바깥으로 몸을 내던졌다. 택시를 기다리느라 도로가에 서 있는 지수의 머리와 어깨 위로, 하얗게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쌓여 갔다.

 

 

 

 

 

 

 

**

 

 

 

 

 

 

 

내가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왔을 때, 승철은 집에 간 줄 알았던 승관과 함께 떡볶이를 집어 먹고 있었다. 날이 추운 탓에 한참 찬바람을 맞고 있었던 두 뺨이 얼얼하기까지 했다. 손을 내밀어 날 당겨 앉힌 승철이 어깨와 머리에 앉은 물기를 가볍게 털어 주었다. 내가 두 시간쯤 전에 경찰서로 향할 때 지쳐 잠든 순영을 업고서 무거워 죽겠다 툴툴거리면서도 그를 집까지 바래다 줬던 승관이 여기로 다시 돌아온 게 의아해서, 나는 어깨 위에 묵직하게 걸려 있던 패딩을 벗으며 물었다.

 

 

 

승관아, 너 집에 간 거 아니었어?”

, 저 순영이 네 들렀다가 집에 갔긴 갔었거든요. 근데 부모님 두 분 다 안 계시고, 장례식장에 승철이 형 혼자 있다고 하니까 누나가 막 가 있으라고 내쫓아서 여기 왔어요. 형한테 전화했더니 배고프다고 해서 오는 길에 떡볶이 좀 사왔는데, 형도 드실래요?”

아니, 지금 말고. 내 거 남겨 놔.”

 

 

 

얇은 이쑤시개에 빨간 물이 든 떡 하나를 쿡 찍어 내게 내미는 승관의 손을 잡아 그의 입가로 밀어 주고서, 나는 패딩을 구석자리에 내려놓고 다시 애들 근처로 돌아왔다. 멍하니 벽에 기대어 승철과 승관을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정한의 사진을 바라보기를 몇 번, 반 정도 남은 떡볶이 그릇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을 덮은 승관이 테이블 한 쪽으로 그것을 밀어 놓으며 내 맞은편으로 다가와 앉았다.

 

 

 

형은 집에 안 가보셔도 돼요?”

괜찮아, 부모님도 다 아셔. 어제 밤도 승철이 혼자 지켰는데, 오늘 밤에는 나라도 같이 있어 줘야지 덜 미안하지. 너도 여기서 자고 가려고?”

, 아까 누나한테 전화 왔었는데, 누나가 좀 이따가 데리러 온대요. 밖에 눈 많이 온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우산을 안 가져 왔거든요.”

 

 

 

승관은 퍽 애교 있는 투로 대꾸하고 옅게 웃어 보이다, 문득 제 옆에 놔둔 휴대폰이 징징 울자 내게 잠시만요, 말을 남기고서 전화를 받으며 장례식장 밖으로 나갔다. 테이블이 즐비한 식장 안쪽에서 다 쓴 나무젓가락 따위를 정리해 묶은 승철이 내 쪽으로 걸어와 앉았다. 승관이 어디 갔냐고 묻기에 전화 받으러 갔다고 하자 승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둘은 잠시 비슷한 자세를 하고 멍하게 흰 벽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승철의 손이 내 쪽으로 무언가를 잡아 내밀었다. 손때를 탄 흔적과 구겨진 흔적이 역력한 종이 뭉치 위에는 ‘<가자, 나락으로>’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너 아직 이거 안 봤지? 한 번 볼래?”

……봐도 돼?”

안될 게 뭐가 있어. 정한이도 아마 언젠가는 꼭 보여주려고 했을 거야. 난 너 읽으면 그 다음에 읽어 보려고. 사실 나도 시놉밖에 안 읽어 봤었거든.”

 

 

 

승철은 그렇게 말하고서 제 휴대폰을 두드리더니, 곧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다시 식장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수신자는 지훈인 것 같았다. 나는 대본을 든 채 덩그러니 앉아 있다가, 괜히 정한의 사진이 놓인 쪽으로 몸을 조금 틀고서 대본 표지를 넘겼다. 첫 페이지에는 주인공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정한이 맡은 역할로 보이는 세하라는 이름에 노랗게 형광펜 칠이 되어 있었다. 그 위를 손가락으로 괜히 문질러 보고, 나는 한 장을 더 넘겼다. 2페이지부터 시작되는 대본은 정한이 늘 써 오던 형식대로, 긴장감이 적은 신(Scene)들의 나열이었다. 경쟁하는 1등과 2, 아마 그것이 내용의 주일 것이다.

 

그러나, 세네 장쯤을 더 넘겼을까, 정한이 맡은 세하가 누군가의 음모로 손을 다치고 난 후의 신들을 마주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왠지 마음 저 아래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감쳐물었다. 세워 모은 무릎에 대본을 내려놓고, 오른손 검지를 세워 글자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머릿속으로 집어넣기 시작한다. 수평선을 긋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S# 31. 세하와 세하 친구, 불 꺼진 음악실에 나란히 앉아있다. 붕대가 감긴 손을 내려다보는 세하. 친구는 그 옆에서 말없이 어깨를 감싸고 세하를 끌어당길 뿐이다. 곧 입술을 깨무는 세하. 작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다.

 

 

세하 (잠시 망설이다가, 퍽 결연한 듯) 나 이제 피아노 그만 두려고.

세하 친구 ……?

세하 때려 칠 거야. 아니, 때려 쳤어. 내가 뭐라고 그걸 해.

세하 친구 아니, 그래도, 세하야다친 손은 나으면 그만이고, 의사 선생님도 재활하면 다시 음악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세하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울먹이는 듯이) 지수야, 나 요새 무서운 꿈을 자주 꿔.

세하 친구 (조금 두려운 듯이, 세하에게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간다.) 뭔데.

세하 네가, 나를 남겨두고 떠나가는 거야. 자꾸만, 더 먼 곳으로…… 떠나가.

세하 친구 (말을 잃은, 흔들리는 시선)

세하 나를……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지수야, 너는 나를안 떠날 거지?

 

 

 

거기까지 읽고서 나는 황급히 대본을 덮었다. 무릎 아래로 미끄러진 대본이 바닥과 부딪쳐 차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괜찮게 보이던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꺼림칙함과, 이유 모를 기시감. 정한이 직접 쓴 대본, 대사, 그리고 극 중 세하의 친구, 지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마주한 정한의 사진 위로, 생기를 잃은 음성 몇 마디가 재생되는 것을 느낀다.

 

 

 

나 연기 안 하려고. 때려 쳤어. 내가 뭐라고 그걸 해.

지수야, 나 요새 되게 무서운 꿈을 자주 꿔. 뭔지 알아?

너랑 승철이가, 나를 남겨두고 떠나가는 거야.

……, 나 두고 떠나지 마, 지수야.

 

 

 

나는 그 순간, 내가 두 눈으로 마주하고 있는 윤정한의 웃는 얼굴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두려워졌다. 저 웃음 속에 얼마나 큰 아픔을 숨기고 있었던 거니.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겨우 덮어 가렸다. 눈가가, 촉촉하다. 금세 뿌예진 시야로 보이는 정한의 사진은 여전히 해사한 웃음을 담고 있었다. 승철이 곧 내 옆으로 다가와, 흐트러진 대본을 정리하고, 내 어깨 위로 손을 짚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키는 동안에도, 두 손은 여전히 찬바람을 맞은 양 빠르게 저 자신을 떨어대고 있었다.

 

 

 

정한의 마지막 공간에 놓여 있던 대본, 그것이 어쩌면 정한의 자기 고백이 아니었을까. 마지막까지 남기려던 말들이, 숨겨 왔던 비밀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또 한 번 혼자 남은 정한을 먼저 발견해주지 못해서그래서 맘이 아팠다.

하루가 다르게 날은 추워져만 갔고, 눈발은 아직까지 그치지 않고 쌓일 것이다.

지나가는 말들로, 민규가 아직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4. 2학년 6반 부승관

 

 

 

 

 

한창 영화 촬영이 진행되고 있던 10월 초 쯤에 있었던 일이다.

 

그 날 나는 두 층 위의 음악실에서 하루 종일 영화를 찍는다기에 팔자에도 없는 주말 자습을 동아리 실에서 지훈과 단 둘이사실 지훈은 학교에 올 일이 없었으나 내가 멋대로 끌고 왔다.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지훈은 두꺼운 수학 기출 문제집을 풀었고, 나는 탐구 과목 문제집을 펼쳐 놓은 채 샤프를 굴리다 문제집 귀퉁이에 낙서도 좀 해 보고, 쉬는 시간 종이 치면 잠도 좀 자고 하는 식으로 설렁설렁 자습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연락이 올까 싶어 책상 모퉁이에 뒀던 휴대폰에는 애꿎은 순영의 문자만 잔뜩 와 댔고, 정작 우리 팀이 필요할 것 같다던 정한이 형이나 민규는 이름조차 비추지를 않았다. 아마 지금쯤 지수 형은 대학 면접 준비로 바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현재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은 내 자신이 좀 한심해지는 것도 같아서, 이번 시간은 문제집을 열심히 풀기로 마음을 먹고 샤프를 굳게 쥐었다. 생각보다 문제가 잘 풀려 벌써 문제집 두 장이 넘어가고 있을 때, 머리 위로 희미하게,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게 울렸다. 순간 놀라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지훈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 한 쪽을 빼며 내게 물어 왔다. 무슨 일 있냐기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데, 그와 동시에 책상 위에 뒀던 내 휴대폰이 길게 진동을 뱉어냈다. 발신자는 승철이 형. 지훈은 조금 의심하는 눈초리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 , 승관아. 지금 동아리 실이야?

, 그런데요? 형 혹시 학교세요? 아까 좀 전에 위쪽에서 쿵 소리가―」

「― , 들었어? 나 지금 교무실인데, 음악실 근처에서 큰 소리가 났다고 하더라고. 지금 정한이랑 민규 둘 다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런데, 네가 한 번 올라갔다 와 줄 수 있을까? 형은 지금 프린트 중이라 자리뜨기가 좀 그래. 부탁한다.

아아, 그럼 제가 바로 다녀와서 연락 다시 드릴게요!

 

 

 

형의 목소리가 꽤 다급하게 들려 나도 덩달아 맘이 조급해졌다. 누가 다치기라도 했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탓이었다. 지훈은 내가 전화를 끊자 그제야 의심을 거두고 내게 물었다. , 뭔데? 나는 일단 마음이 급하기도 했고 지훈이 괘씸하기도 해서, 나중에 말해 주겠다고 둘러대 놓고 동아리 실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두 칸씩 올라 음악실 앞에 선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어 젖혔다.

 

음악실 안은 난장판이었다. 대체 무슨 장면을 찍고 있었던 거지, 싶을 정도로 책걸상이 반쯤 엎어지고 뒤집어져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카메라 삼각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앞에 묵직한 카메라가 반쯤 분리된 렌즈를 겨우 달고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문 앞에 서서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써 보는데, 책걸상 안쪽 피아노 근처에서 들썩이는 누군가의 어깨가 눈에 띄었다. 절로 입술이 깨물린다. ‘촬영의 일부분이 맞기는 한 걸까부터 시작해 혹시 도둑이 든 건 아닐까까지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하며 발소리를 죽여 가까이 다가가는데, 짙은 밤색의 머리칼이 어깨 선 근처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제야 쓸 데 없는 상념이 반 정도는 지워진 것 같았다. 형의 등 뒤에 멈춰 서서 조심스레 정한이 형, 하고 불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형의 얼굴 여기저기에는 엊그제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상처가 더 늘어 있었고, 무엇보다

 

형이 꾹 쥐고 있는 오른손 손목 위로 손가락 가운데 마디가 뭐에 눌리기라도 한 것 마냥 새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 승관아. 어떻게 알고 왔어?

승철이 형이, 가보라고 해서……, 근데 손 이거 뭐예요? 어떻게, 무슨 일 있었어요?

, , 아니, 그냥 촬영하다가…….

이건 그냥이 아니잖아요!

 

 

 

자꾸만 말끝을 흐리고 시선을 피하는 정한이 형이 답답해 괜한 마음에 소리를 빽 지르고 형의 손을 끌어당겨 쥐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손에서는 뜨끈하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형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으면서도 손을 자꾸만 움직이려 하는 게 뼈가 부러지거나, 그 정도로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급한 대로 손부채질을 하며 형을 일으키고 피아노 의자를 끌어다 앉혔다. 문득 뚜껑이 닫힌 피아노 쪽을 돌아보니 불빛에 비쳐 무언가가 반짝 빛나는 것도 같았다. 형은 자꾸만 다친 손을 움직이려 애쓰면서 입술을 잘근 씹어댔고, 나는 여전히 난장판인 음악실 안을 둘러보다가 역시 사람이 더 중요하지 싶어 형의 성한 왼손을 잡아끌었다. 당혹으로 가득 찬 시선이 날 올려다보기에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었다.

 

 

 

, 손에 파스라도 바르러 가요.

승관아, 형 괜찮아. 진짜 괜찮으니까 가 봐도 돼. 잠깐 놀란 걸 거야.

아니, 지금 이렇게 손이 빨갛고 열도 나고 하는데 뭐가 괜찮아요. 빨리 일어나요, 잠깐만 갔다 오면 되잖아, ?

그래도, 지금 카메라도, 떨어졌고……」

카메라야 주워서 다시 조립하면 되는 거고, 형 손 다치면 오래 갈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오른손잡이인 사람이 당장 오늘 저녁을 어떻게 먹을 건지 걱정해야 될 상황인데 지금!

 

 

 

평소 같았으면 조그마한 상처에도 있는 대로 엄살을 부리며 내게 치료를 닦달했을 정한이 형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답지 않는 소리만 하길래 듣는 내가 더 답답해져서 또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감정이 격해지면 말이 빨라지는 습관이 있어서 순식간에 지나간 내 말을 멍하니 곱씹는 것 같던 형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렸다. 어지럽게 엎어진 책걸상 사이를 지나 형을 먼저 음악실 밖으로 내보내고, 안에서 문을 잠근 뒤 열쇠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서 문을 닫고 보건실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정한이 형은 늘어뜨린 머리칼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채 계속해서 오른손을 움직이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금방이라도 내 손을 뿌리치고 되돌아갈까 싶어 차오르는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보건실에 도착해, 나는 아무 파스나 찾아 형의 오른손이 번들거리도록 잔뜩 파스를 뿌려 주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왼손으로 모서리를 꾹 쥔 형은 미간을 구기다가 곧 내 시선을 마주하며 멋쩍게 웃었다. 아마 내 표정이 있는 대로 화가 나 차게 식어 있었을 것이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보건일지에 다 날아가는 글씨로 형의 이름을 적어 놓고, 서랍을 뒤져 압박붕대를 찾아냈다. 형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내 고집에 져 가만히 손을 맡겼다. 괜한 노파심이 일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 놔야 할 것만 같았다. 거의 감으로 붕대를 서툴게 감으며, 나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고 골라 겨우 형에게 물었다.

 

 

 

촬영 잘 되어 가요?

「……, 그런 대로. , 궁금해?

당연히 궁금하죠. 시놉도 비밀, 배역도 비밀, 전부 다 비밀이잖아요. 좀 알려주면 안 돼요? 내가 비밀 지킬 테니까 나한테 살짝만 스포해 줘요.

「……미안, 승철이랑 약속했어. 완성된 이후에 공개하기로. 이거 어기면 나 걔한테 밥 사야 돼.

돈 쓰기 싫어서 사랑하는 동생의 알 권리를 거절한다 이거네? 형 진짜 너무했다.

그래도 진짜 미안, 약속은 약속이잖아. 그리고 이제 이런 일 없을 거야. 오늘은 좀, 위험한 장면이긴 했거든. 이제 그런 거 없어, 진짜로.

 

 

 

위험한 장면이라서 손도 다치고, 카메라도 떨어지고 책상도 다 들어 엎어요?

금방이라도 그 질문을 덧붙여 묻고 싶었지만, 형의 손에 투박하게 감긴 붕대가 끝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고 테이핑 밴드를 찾아 붕대 끝을 잘 고정시켰다. 묵직한 오른손을 몇 번 들어 올려 보던 형은, 나보다 먼저 보건실 출입문 쪽으로 걸어 나가며 한숨 쉬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촬영은 더 못 하겠네. 나는 걸음을 빨리 해 형 옆으로 따라 붙으며, 일부러 애교 섞인 투로 더 촬영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 쉬라고 말해 주었다. 기어이 웃음을 지어 보인 형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었다.

 

 

 

사실그 때 그 상황에서, 난장판이 된 음악실보다 제일 맘에 걸렸던 건 따로 있었다.

 

형이 그렇게 다쳐서 아파할 동안, 대체 김민규는 어디에 있었던 거지?

 

 

 

 

 

 

 

**

 

 

 

 

 

 

 

 

익숙지 않은 장판 바닥에서 얇은 모포 하나만으로 버티느라 밤새 잠을 설친 탓에, 패딩 위로 목도리를 칭칭 둘러 싸맨 승관이 뻑뻑한 눈을 부비며 취조실 안으로 들어왔다. 빈속에 자판기 커피를 들이붓고 있던 형사는 막 들어오는 승관과 눈이 마주치고서 짧게 목례하는 그의 인사를 눈인사로 받았다. 자리에 앉아 목도리를 풀어낸 승관은 문득 제 앞에 놓인 종이컵을 발견하고서 수첩을 뒤적이는 형사에게 물었다.

 

 

 

, 형사님. 이거 저 마셔도 돼요?”

당연히 되죠. 학생 마시라고 내가 뽑아다 둔 건데. 아침이라 피차 피곤할 거 아닙니까. 집에서 온 것 같지도 않구만.”

 

 

 

형사의 예리한 말에 고개를 어색하게 끄덕인 승관이 그럼 잘 마실게요,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고서 종이컵을 들어 그 안에서 찰랑거리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헤이즐넛 향이 강한 커피가 입 안으로 퍼지는 게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찬바람에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아 축인 승관이 종이컵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세를 바르게 해 앉았다. 수첩을 뒤적이다 빈 페이지를 찾아 낸 형사가 만년필 뚜껑을 열어 그 옆에 내려놓고, 제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는 승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학생 학년 반 이름부터 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학년 6반 부승관이에요.”

승관 학생, 학생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서 진술에 참여할 예정이며, 이 사건이 현재까지는 타살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학생 본인이 아는 한 진실 되게만 말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 친구들한테 물어 보고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왔습니다.”

신경 많이 쓰고 있었나 보네.”

 

 

 

기다렸다는 듯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승관을 보며 가볍게 웃음 짓던 형사는 곧 만년필을 들어 수첩 맨 윗줄에 승관의 이름을 적어 넣고 웃음기를 적당히 덜어낸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피곤해하는 순영과 지훈을 닦달하길 잘 했다, 싶어 괜히 뿌듯해졌던 승관은 형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자 금세 허리를 쭉 펴고 바르게 앉으며 허벅지 위에 둔 두 손을 모아 쥐었다. 만년필을 단단히 쥔 형사가 수첩에 무언가를 더 적으며 입을 열었다.

 

 

 

승관 학생이 속한 동아리에서 최근에 제작하던 영화가 있었죠. 그 영화에 대해서, 특히 내용적인 측면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근데 저는 내용은 진짜 몰라요.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어요. 전해들은 것도 없고, 그냥 영화를 찍는구나, 촬영 장소가 주로 음악실이구나, 그 정도밖에 몰라요. , 민규가 이번 영화 촬영 들어가고 나서 저한테 피아노는 대체 어떻게 치는 거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피아노 치는 학생들의 얘기겠구나, 하고 추측한 건 있었어요.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이에요. 저는 그냥, 예술 팀으로써 자꾸 늘어나는 상처에다 더 크게 다친 것처럼 틴트 칠을 해 줘야 하는 게 너무 속상했어요.”

승관 학생도 예술 팀이었나 보네요. 거기에서 어떤 일을 주로 했죠?”

, 지수 형이 말했겠구나. 저도 형이랑 같이 예술 팀이었는데, 솔직히 저희 팀이 크게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온 건 아니었어요. 화면에 배우를 담았을 때 좀 더 사실감 있으면서도 예쁘게 나오도록 하는 게 저희의 제일 큰 역할이었죠. 의상 점검하고, 아까 말했듯이 분장 간단하게 해 주고, 그런 정도였어요. 사실 저희 동아리에서 제가 민규 다음으로 손재주가 좀 있어서, 영화 제목을 손 글씨로 써서 직접 포스터를 만들어 본 적도 있었어요.”

 

 

 

승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형사는 역시나 그의 이름 아래에 특이 사항 없음이라는 문구를 써 넣었다. 승관은 둥글게 말아 쥔 손으로 제 허벅지를 콩콩 두드리다가 이내 오른손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수첩 위에 만년필을 내려놓은 형사가 다시금 질문을 꺼내었다.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는 어떤 관계였죠?”

, 정한이 형과는 집 방향이 같아서 항상 같이 하교를 했었어요. 형이 늦게 마치면 제가 정독실에서 한 시간 더 기다려 주고 그랬었죠. 정한이 형은 진짜 좋은 형이었어요. 장난삼아 툭툭 내뱉는 말 속에도 상대를 생각해주는 게 있고, 그런 마음이 항상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느껴졌어요. 그리고 항상 동아리 분위기도 밝게 만들어주고, 사람을 마주치면 먼저 인사하고 웃어주는 사람이어서 저는 형한테 아픔이라든가 상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승관 학생은 윤정한 학생의 자살 원인이 내적 상처라고 생각하는 군요.”

그렇지 않으면, 형이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넘겨짚는 걸 수도 있겠지만,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겠죠.”

그래요……, 그럼 승관 학생과 김민규 학생은 어떤 사이였나요?”

민규요? 민규는 저랑 순영이랑 같은 중학교를 다니면서 친해진 친구예요. 원래는 저랑 순영이랑만 친했는데 순영이가 민규라는 친구를 소개시켜 줘서 셋이 친해졌고, 그래서 같은 고등학교에도 오게 된 거예요. 민규는 우리 중에서 제일 어른스러운 면이 많은 친구예요. 타박하고 잔소리하면서도 먼저 나서서 챙겨주고, 초등학생 같은 면이 있으면서 또 멋진 말을 가끔씩 해 주더라고요. 성격도 좋아서 특히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하고 금방금방 친해지는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승관은 거기까지 말을 마무리하고서 괜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며칠 째 그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는 민규 때문이었다. 어디서 뭐 하나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어 기분이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을 애써 숨기기 위해, 그는 입술을 감쳐물어 잘근 씹어댔다. 수첩의 여백 위로 승관과 순영, 민규의 이름을 쓰고 그 사이를 실선으로 연결해 놓은 형사가 곧 수첩 앞장을 뒤적이는가 싶더니 승관에게 추가로 질문을 던졌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승관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키고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민규 학생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민규의 과거……, 사실 민규는 딱히 그런 모난 데가 있는 애는 아니었어요. 공부를 좀 못 하긴 했지만. , 생각났다!”

…….”

사실 이게 관련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민규 얘기는 아니고 민규 형 얘기예요. , 민규 형이 예전에 이 학교를 다니다가 정학 먹고 나서 연락이 뚝 끊겼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이 학교에서 소문처럼 떠도는 안 좋은 일에 민규 형이 끼어 있었나 봐요. 3 때 한 일주일이었나, 민규가 학교 안 나온 적이 있어서 새벽에 전화했더니 형 때문에 학교 못 가고 있다고, 집안 다 뒤집혔다고 했었어요. 오히려 그 일 있고 나서 민규가 형 몫까지 다 하느라 더 열심히 사는 것 같던데요?”

 

 

 

승관은 객관적으로 바라보기에도 민규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다. 형사는 조심스러운 투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정보들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낸 승관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무안해진 그가 먼저 시선을 피하고 나서야 저도 고개를 떨어뜨려 수첩 위로 시선을 두고 만년필을 종이 위로 톡톡 두드리다가 지난 지수의 진술 때와 같은 문구를 써 내려갔다. ‘윤정한과 김민규 형의 연관성 조사 필요라는 문구가 빈 여백을 가득 채웠다. 종이컵을 아예 쥔 채 커피를 홀짝홀짝 비워내던 승관은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쭉 들이키고서 입 안에 퍼지는 값싼 단 맛에 눈가를 가볍게 찡그렸다. 종이컵을 제 앞에 내려놓으려다 문득 형사의 앞에 비워진 종이컵이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 위로 제 컵을 겹쳐 두고, 마침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을 울리기에 수첩을 뒤적이기에 여념이 없는 형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 형사님. 저 잠시만 문자 답장 빨리 보내도 될까요?”

, . 그러세요.”

 

 

 

형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몸을 반쯤 돌린 채 휴대폰을 꺼내 든 승관은 예상치도 못한 지훈의 문자가 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눌러 화면 가득 띄웠다. [나 지금 경찰서 가는 길, 언제 끝나?] 무뚝뚝하게 물어오는 게 누가 봐도 지훈 같다 싶어 옅게 웃음을 흘린 승관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곧 끝날 것 같아, 하고 답장을 보내주었다. 휴대폰을 책상 위로 뒤집어 놓고 가만히 형사를 바라보는데, 그때까지도 수첩을 뒤적이던 형사가 문득 승관에게 물었다.

 

 

 

부승관 학생, 혹시 좀 전에 얘기했던 김민규 학생 형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아는 게 없는 거죠?”

, 그 때 민규한테 물어보려고도 했었는데, 민규가 너무 힘들어하고 그래서 차마 말을 못 꺼내겠더라고요. 미안하잖아요, 그런 거 괜히 들쑤시면. 그래서 그냥 안 좋은 일이었나 보다, 하고 넘어갔죠. 근데 왜요?”

아닙니다, 결과 추후에 나오면 다 알게 되실 겁니다. 참고인 조사는 이것으로 끝이고, 이제 가 보셔도 좋습니다.”

, . 아침부터 수고하셨어요. 식사 챙겨 가시면서 일 하세요, 형사님!”

 

 

 

늘 그렇듯이 애교 있게 끝인사를 덧붙인 승관이 제 목도리를 대충 두르고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서 취조실을 빠져나왔다. 내부가 한참은 어두웠던 터라 몇 배는 더 밝은 형광등 불빛에 눈가를 찌푸리던 그는, 곧 징징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들어 발신자가 지훈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 지금 나갈게, 여기 앞이야. 그 뒤에 뭐라 더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알았어, 빨리 와, 하는 말만 남기고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던 승관은 다문 입술 새로 픽 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조금 빨리 해 경찰서를 빠져나갔고, 오랜만에 맑게 갠 하늘 아래 사방으로 퍼지는 햇살을 받으며 도로가에 선 지훈에게로 다가갔다. 낯익은 번호의 차 안으로 올라탄 두 사람은날씨 탓인지 답지 않게 들뜬 것도 같았다.

 

 

 

 

 

 

 

**

 

 

 

 

 

 

 

나와 지훈이 장례식장으로 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순영과 승철이 형이 있었다. 형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끊임없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댔는데, 곧 입술을 눌러 깨물고서 빈소 밖으로 향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훈이 나서서 아침 먹은 흔적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순영의 옆에 앉아 그의 휴대폰 액정을 곁눈질하듯 들여다보았다. 다이얼과 최근 통화 목록을 번갈아 띄우던 순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민규가, 아직 연락이 안 돼.”

……아직도?”

아까 전부터 승철이 형이랑 민규 아는 친구들한테 전화 돌리고 있었어. 지수 형은 입시 때문에 학교 갔는데, 형도 혹시나 학교에 있을까 싶어서 찾아본다고는 하더라. 너한테도 연락 없어?”

……, 전화도 안 받고 문자에 답장도 안 와.”

 

 

 

민규는 정확히 삼 일째 연락이 뚝 끊긴 상태였다. 휴대폰을 꺼둔 건 아니었으나 전화, 문자, 하물며 페이스북 메시지까지 보내 봤는데도 전혀 답장이 없었다. 그 탓으로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순영은 기계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좌우로 번갈아 넘기다가, 곧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홀드시키고 바닥에 엎어 두었다. 얼핏 지나친 화면 위로 민규의 이름 옆에 십 몇의 숫자가 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식기들을 간이 싱크대 안에 담가두고 온 지훈이 우리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지훈아, 너도 민규한테서 연락 받은 거 없어?”

없어, 내가 민규 마지막으로 본 건 그 날 음악실에서였어. 나 끌려갔잖아, 조사받으러.”

굳이 따지면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봤긴 한데, 그 때 민규가 나 데려다주고 집에 간다고 했었단 말야. 자기가 연락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왜 연락이 없을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지훈에게도 내가 받은 질문을 건넸으나 기대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대신 내 얼굴이 어지간히도 구겨져 있었는지 지훈의 손가락이 다가와 미간을 눌러 펴 주었을 뿐이었다. 일부러 어감이 강한 단어로 자신의 행적을 요약한 그는 곧 배가 고프다며 빈소 안쪽으로 들어갔고, 다시 나와 순영 둘만 남아 멍하니 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영의 말이 옳듯이, 나도 그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던 민규의 뒷모습과 저음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민규가 사실만 말했더라면 그는 그 날 집으로 갔어야만 했고, 제가 먼저 순영에게 집에 왔노라고 연락을 했어야 하며, 지금쯤 이 곳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근데, , 무슨 이유로? 애꿎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아무 연락도 와 있지 않는 것에 실망하며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는데, 순영이 초점이 흐린 눈을 하고서 독백하듯 뱉었다.

 

 

 

김민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나. 진짜 어디 있기는 있겠지?”

, 민규 형 있다고 하지 않았냐? 형한테 간 거 아냐?”

 

 

 

그래, 민규에게는 한 살 터울의 형이 있었다. 좀 전에 내가 진술 받을 때 털어놓고 온, 바로 그 사람. 아마 순영은 민규의 형이 정확하게 어떻게 되었는지 모를 것이다. 연락만 안 될 뿐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하는 뉘앙스로 저렇게 물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민규의 형이 대략적으로 어떤 결말을 맞았는가 하는 것을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적이 있었다. 불현 듯 그런 생각이 스치자 반사적으로 안 돼!’하고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생각 자체를 멈추라는 경고인 것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겨우 붙잡은 것만 같은 순영의 얼굴에 대고, 하는 수 없이 사실을 털어 놓았다. 급하게 입을 다무는 걸 마주하는 게, 난 아무래도 형사 같은 건 못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규 형, 아마 여기…… 없을 거야.”

?”

민규가 지나가는 말로 그랬거든, 형 죽었다고.”

…….”

아냐, 민규 오겠지, 올 거야. 그치?”

그래, 걔가 김민규가 맞으면 와야지.”

 

 

 

우리는 뭐랄까, 허상을 진짜라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신도들 같았다. 순영은 그렇지 않았겠지만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왠지 민규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아주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서, 이상한 사람처럼 고개를 내젓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순영은 내려놓았던 휴대폰을 들어 아무 감정 없이 그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며 시간을 소모하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았다. 마침 승철이 형이 다시 빈소 안으로 들어왔으며, 한참을 부시럭대는 것 같더니 기어이 사과 두 개를 깎아 온 지훈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가져다 준 사과를 집어 먹으며 우리 넷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다시 내려놓고,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가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길 반복했다. 원하는 답이 언제쯤 되돌아올지 가늠할 수 없이, 시간이 무한대로 소모되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꼬박 삼 일을 보냈으니 이제 형을 보내줄 때가 되었으나, 승철이 형은 긴 말 대신 나와 지훈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병원 측에서 현재 대기자가 밀려 법적 보호자가 없는 우리 쪽을 우선순위로 당겨줄 수 없다고 했단다. 형은 쓰게 웃으며 학교로는 안 갈 테니 집에 가서 푹 쉬고 있으면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어젯밤 늦게 빈소를 찾은 지훈도, 결국 누나의 연락을 받지 못한 나도 승철이 형의 곁을 지키느라 새벽녘에 겨우 눈을 붙였기 때문에, 하룻밤 따뜻한 집에서 푹 자고 온 순영과 바통 터치를 하는 기분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지훈은 내 옆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시 이십분 쯤 된,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이어서 정류장에는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서 있었다. 교복을 입은 우리 둘을 곁눈질하는 것 같던 두 사람은 곧 시선을 돌렸고, 지훈은 발돋움을 해 제 눈높이보다 조금 위에 있는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10분 뒤에 이 정류장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땅 위로 처박히는 지훈의 운동화 앞코를 바라보며, 나는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혹시 있잖아, 민규랑 정한이 형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야 모르지, ?”

아니, 그냥. 의심하는 건 아닌데, 형사님이 굳이 민규를 콕 집어서 물어 보시더라고.”

그래? 나한테는 그런 질문 안 하던데. 아마 뭔가 발견됐겠지.”

그런가……. 그냥, 왠지 모르게 민규네 형이랑 정한이 형이 관련 있는 것 같아.”

……부승관, 혹시 너 뭐 아는 거 있어?”

 

 

 

주절주절, 진짜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은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지훈이 마치 나를 의심하는 것처럼 물어 오기에, 나는 예상치 못한 화살표 방향에 놀라 급하게 도리질부터 쳤다. 에이나도 잘 몰라, 추측이지 추측. 어색한 투로 대꾸하는데 지훈이 그제야 표정을 풀고 픽 웃음을 흘린다. 그러더니 제 손을 뻗어 내 손을 끌어내렸다. 모르는 새에 깨물어서 반쯤 부러진 손톱을 내려다본다. 손톱 무는 버릇을 지훈에게 걸릴 때마다 잔소리를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얼른 손을 등 뒤로 숨겼다.

 

 

 

, 내가 손톱 물지 말랬지.”

, 진짜 미안. 무의식중에,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내가 너 보고 의지가 약하다고 하는 거야, 알겠어?”

! 지훈아, 버스 간다!”

 

 

 

, 또 맨날 같은 레퍼토리. 지훈은 어쩜 그렇게 내가 손톱 깨무는 버릇을 눈엣가시로 생각하는지 모를 따름이다. 조금 과장된 투로 지훈의 어깨 너머 떠나가고 있는 버스물론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아니다를 가리키며 말하자 고개를 휙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던 지훈이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 너 이제 나를 속이는구나. 나는 그 말에 조금 자세를 움츠리며 장난스레 키득거렸다. 지훈의 의심은 정말로 장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소모적인 얘기를 나누며 지훈과 집에 가는 내내, 그에게 민규의 형 얘기를 꺼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괜한 의심을 사게 만든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내가, 그렇게 되도록, 민규를.

 

 

사람이 적은 버스는 라디오 방송도 켜 두지 않아서 침묵 속에 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우리 둘도 덩달아 묵언수행을 하며 동네 정류장에 얼른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 소음이 가득한 침묵 속에서,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싶어졌다.

지지난 달쯤, 민규가 나에게 숨기듯이 흘린 영화 이야기 중에서, 그의 배역 이름을 들었던 것만 같았다. 그 때 내가 민규의 배역 이름이그의 형 이름과 좀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둘 중 어느 것도 기억나지를 않았다. , 뭐였는데. 한참동안 재, 뭐였지, , 뭐였을까, 하고 입속말로 중얼거리다가 결국 포기해 버렸다.

 

오랜만에 날씨가 맑다 싶더니곧 두터운 구름 떼가 태양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5. 3학년 3반 최승철

 

 

 

 

 

나는 종종 동아리 실에서정확히 말하자면 동아리 실에 딸린 편집실에서 밤을 꼬박 새고는 했다. 편집을 하다가 하루를 넘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쯤 포기하고 그 안에 구겨져 있었던 것에서 비롯된 그 습관은, 우선 선생님들이 대체로 우리 동아리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건드리지 않는 데다 컴퓨터 사양이 월등히 좋았으며 학교가 낡아서 새로 지은 신관에 딸린 동아리 실과 편집실까지 방범 설비가 미치지 않는다는 점들로 인하여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 가끔은 지훈과 번갈아 잠을 자며 편집을 했고, 때로는 경비 아저씨가 돌아다니기 직전에 학교로 숨어 들어온 승관이나 순영과 밤을 샌 적도 있었다. 물론 그런 일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나 혼자서 긴긴 밤을 신 단위로 끊긴 영상물들과 함께 새야만 했다. 처음 동아리를 만들면서 내가 선택한 임무, 혹은 숙명 같은 것이었다. 같은 편집 팀 소속인 지훈에게도 밤샘 작업이라는 짐을 지워주기는 싫었다. 이상한 고집이었다.

 

 

 

그 날 밤도 매점에서 사 온 과자를 책상 위에 잔뜩 쌓아 놓고 오랜만에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이번 영화는 이전과는 달리 정한이 며칠을 들여가며 내게 부탁해 온 것 때문에 단 한 번도 촬영 현장에 함께하지 못했고, 따라서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러이러한 줄거리로 흘러가는 것이리라, 하고 반쯤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정한이 그다지도 간곡히 부탁하던 것은 그 자신과 민규 두 사람만이 촬영장에 남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들 이면에 무언가가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로 영화 촬영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카메라는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있는지, 영상을 통째로 날려버리지는 않았는지, 기타 잡다한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내게서 카메라를 빌려 간 101일부터 대략 이 주쯤 흘렀을 때, 그제야 정한으로부터 촬영분이 담긴 메모리 카드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우리 반으로 직접 찾아와 그것을 건넨 정한의 얼굴에 늘어가는 상처를 마주하며 나는 묻고 싶은 것이 더 늘어가는 기분을 느꼈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내키지도 않던 질문을 내던져 버렸다. 촬영 언제 끝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내 반응에 정한은 조금 반가워하는 것도 같이, 이번 달 안에 끝난다는 말을 남기고 제 반으로 돌아갔다.

 

 

어쨌든묻고 싶은 것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영화의 내용을 알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촬영 분 편집 작업을 꼭 해야 했다. 내 손바닥 반의 반 크기만큼 작은 메모리 카드를 본체에 꽂아 넣자, 좁고 어두운 편집실 안이 하드디스크 돌아가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수 분 뒤에 발광하는 모니터 위로 일련의 영상물이 담긴 폴더가 새 창을 띄웠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서른 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영상들 가운데에서, 나는 늘어선 썸네일을 꼼꼼히 살피며 이번 영화에서 내 손이 닿은 유일한 신인트로 촬영 분을 찾아내어 바탕화면으로 쭉 끌어당겼다. 우선은 촬영 분의 순서를 파악해 그것을 순서대로 폴더에 담아놓는 작업이 급했기 때문에, 일단 날짜순으로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해 뜨기 전에는 끝나겠지, 독백처럼 중얼거리고서 팔을 뻗어 과자 봉지를 뜯었다. 키보드 왼쪽에 과자를 두고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을 날짜대로 바탕화면에 당겨 오고 있는 와중에, 책상 끄트머리에 두었던 휴대폰이 짧게 두어 번 진동을 울렸다. 깊게 깔린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던 휴대폰은 곧 다시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무시할 수도 없게 긴 진동을 울려 댔다.

 

 

 

이 시간에 누구야, 대체.

 

 

 

머릿속으로 착착 정리되던 계획이 와르르 무너지려는 것을 겨우 잡아 세우고, 나는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었다. 아들의 부재를 이제야 안 엄마라든가, 동아리와 전혀 관련 없이 게임하느라 밤을 새우는 친구 놈들일 거라 생각했건만, 발신자는 정한이었다. 부르르 떨며 환한 빛을 뿜어내는 휴대폰 액정 위로 윤정한이름 세 자가 박혀 있자 반사적으로 전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모드를 스피커폰으로 바꿔 놓고 그것을 키보드 옆에 둔 채 마우스를 다시 잡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잡음에 문득 섞이지 말아야 할 소리 같은 게 섞인 것 같아 손이 멈췄다. 모니터를 곁눈질해 확인한 시간은 열두 시 이십삼 분. 정한은 소리를 잔뜩 죽인 채 울고 있었다.

 

 

 

「……정한아.

「― ……,

「…윤정한, 너 울어?

「― ……, 철아.

, 나 듣고 있어. 괜찮아? 무슨 일 있어?

 

 

 

― ……, 있잖아, 무서운 꿈을 꿨어. 엄청 무서운 꿈…….

휴대폰 사양이 썩 좋지 않아 잡음이 잔뜩 섞인 채 띄엄띄엄 들려오는 정한의 울음 섞인 음성에, 나는 본능적으로 컴퓨터에서 손을 떼야만 한다고 느꼈다. 팔을 뻗어 모니터 전원을 눌러 끄고, 완전한 어둠 가운데에서 양 손으로 휴대폰을 꾹 쥔 채 정한에게 물었다. 재촉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괜찮으니까 일단 설명해 달라고, 무슨 꿈인지 말해 달라고, 오래 전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처럼 울던 정한을 달랬을 때처럼 다정하게 묻고 또 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 동안 소리를 잔뜩 죽인 흐느낌이 들려오다가, 그저 무서운 꿈이었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나는, 지금 당장 그를 만나러 갈 수 없는 것에 한탄하며 깊게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숨이 넘어가듯이, 끅끅대는 정한의 울음이 애처로웠다.

 

 

 

「― , ……, 승철아, 나 진짜, 너무 무서웠어…….

그래, 그래. 그거 꿈이야, 꿈이잖아, 정한아. 지금 나랑 이렇게 전화하고 있잖아. 괜찮아, 다 괜찮아.

「― 네가, ……, 전화를, 받아서 다행이야…….

 

 

 

나는 왠지, 그 말을 들으면서 과거의 일이 자꾸만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다 털어낸 줄로만 알았던 상처가 지금의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에는 분명히 계기가 있고 이유가 있을 터, 그러나 마지막 말과 비슷한 대답을 입 밖으로 끌어내면서 눈은 우는 가운데 입 꼬리를 당겼던 정한의 얼굴이 공중에 떠오르는 것만 같아 객관적인 생각이 우선 불가능해졌다. 자꾸만 흐느낌을 목 뒤로 삼키는 그가 견딜 수 없이 애처로워서, 한참 동안은 어린 애처럼 소리 내어 울게 내버려 뒀다. 괜찮아, 괜찮아, 하는 단어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그저 그 슬픔을 받아내고 있는 편이 그에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날 끌어안고 그칠 듯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냈던 2년 전처럼, 그 날 새벽의 정한은 통화 시간이 30분을 넘어가는 동안 몇 마디 말도 하지 않고서 울음만을 뱉어냈다. 까맣게 빛이 죽은 편집실에 덩그러니 앉은 나는, 다만 그 꿈이 그의 과거 일이었겠구나어설프게 추측만 하며 그 슬픔을 마음으로 묻고 또 묻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기를 또 5분 쯤, 울음이 좀 잦아든 정한이 다 잠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 ……승철아, 최승철.

, 듣고 있어. ?

「― 나 걱정, 안 해도 돼. ……이제 괜찮아졌어, 진짜.

진짜 괜찮아졌어? 기분 좀 나아졌어?

「― , 진짜. 진짜로, 고마워, 전화 받아 줘서. 편집 때문에 바쁠 텐데.

에이, 그래도 네 전환데. 편집은 내가 알아서 할게, 걱정 말고. 이제 다시 자야지.

「― ……. 웬만하면, 지수한테는 내가 전화했다고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딴 건 아니고, 그냥, 쪽팔리잖아.

 

 

 

어느새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 같은 정한이 마지막 말은 장난처럼 내뱉고 작게 웃었다. 그 옅은, 바람소리와도 비슷한 웃음에 그제야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꿈 얘기를 좀 더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정한의 상처를 다시 들쑤시고 싶지 않아 말을 삼켰다. 우리는 이 이후로 십여 분 정도 시답잖은 얘기를 더 나누다가, 내가 먼저 정한을 재웠다. 전화가 끊어지자 편집실 안은 숨 막히는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 찼다. 잡음 하나 없이, 바깥과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좁은 방. 나는 그 안에서 왠지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겨우 팔을 움직여 휴대폰을 책상 위에 엎어둔 채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선잠에 들었다가 정확히 두 번 잠에서 깼다. 두 시 오십 몇 분 쯤, 그리고 네 시 반쯤. 두 번째로 깼을 때 정신을 차리고 편집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나는 그냥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대로 날이 밝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편집실에 발을 댈 수가 없었다. 나와 정한, 지수는 수능을 쳤고, 면접을 봤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체에 꽂혀 있던 메모리 카드는 제 자리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러니까나는 카메라가 기록하고 있던 것을 단 하나도 꺼내 볼 수 없었다.

 

 

 

 

 

 

 

**

 

 

 

 

 

 

 

한 평 남짓 되어 보이는 캄캄한 취조실 안으로 들어서며, 승철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2년 동안 방과 후 일상의 대부분을 보낸 편집실과 느낌이 매우 닮아있는 탓이었다. 피로감에 찌든 것이 역력해 보이는 형사는 승철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오늘 아침처럼 자판기 커피를 몸 안으로 쏟아 부으며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 뭉치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그 위로 해독 불가능해 보이는 글씨가 휘갈겨진 수첩이 놓여 있었다. 승철은 형사가 수첩을 들어 새 페이지를 찾는 동안 뒷면으로 비치는 글씨를 해석해 보려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으나, 곧 포기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빈 여백을 찾은 형사가 수첩을 서류 뭉치 위로 내려놓았고, 그 위로 희미한 알전구 불빛이 비쳤다. 적막 가운데 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학생 학년 반 이름부터 말씀해 주세요.”

, . 저는 3학년 3반 최승철입니다.”

승철 학생, 본인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서 현재 진술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본 형사의 질문에 대해서 진실 되게만 대답해 주시면 감사하겠고, 혹시 본인이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이 있다면 애써 얘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시겠죠?”

, 알겠습니다.”

 

 

 

형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승철이 짧게 끊어 대답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수첩 아래에 깔린 서류 뭉치를 각 맞춰 정리한 형사가 수첩 맨 위에 승철의 이름을 휘갈겨 쓰고 그 앞을 뒤적이며 첫 번째 질문을 건네었다.

 

 

 

최근에 촬영하던 영화가 있었죠? 그 영화에 대한 설명이 좀 듣고 싶은데.”

영화는, 저도 구체적으로 말할 입장이 안 돼요. 지금까지 진술 받았던 다른 친구들보다는 많이 알고 있겠지만, 사실 저도 촬영장에 머물렀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최승철 학생은 동아리 내에서 감독 일을 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그랬죠. 그랬는데, 이번 영화는 정한이가 먼저 부탁을 해왔었어요. 카메라를 설치해 두고 자릴 비워 달라고 했었거든요. 뭔가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는데,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제가 아는 것만 말씀드리면, 피아노를 치는 학생들의 이야기예요. 1등과 2등이 등장하고, 그 사이에서 얽히고설키는 관계가 있겠죠. 인트로 영상은 제가 찍었기 때문에 이 정도만 알고 있어요. 이 이후의 내용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는 게 없어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마 민규한테 물어 보시면 영화 관련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거예요. 돌아올 테니까요, 그 애는.”

 

 

 

그런 말을 덧붙인 승철은 민규의 귀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도 같았고, 그렇게 해서라도 내면의 불안감을 덜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같았다. 승철을 응시하던 형사는 전자보다 후자 쪽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의 이름 아래에 영화 : 김민규라고 써 넣었다. 책상 위에 손을 두고 간헐적으로 그 위를 톡톡 두드리던 승철에게로 두 번째 질문이 꺼내어졌다.

 

 

 

승철 학생이 동아리 내에서 한 역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데요.”

, 저는 일단 동아리 부장이에요. 부원들을 최종적으로 통솔하고 이끄는 자리죠. 그러면서 영화 총 감독이었어요. 촬영도 하고, 편집도 하고. 여러모로 바빴죠. 하지만 좋은 친구들이랑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더라고요. 아예 안 힘든 건 아니었는데, 두 배, 세 배로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이 아이들하고 같이 영화를 만들 수 있기를 항상 바라고 있었는데, 이제 그럴 일은 없게 되어 버렸네요.”

 

 

 

말을 마친 승철의 표정은 금세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아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형사는 만년필을 들어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글귀를 써 넣고 다시금 수첩을 뒤적였다. 차르륵,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희미한 잔향을 남기고 퍼져나간다. 승철은 문득 주머니에서 짧게 진동이 울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을 애써 확인하지는 않았다. 형사는 수첩의 다른 페이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럼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 승철 학생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정한이는 제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예요. 제가 지방에 살다가 전학 왔는데, 그땐 제가 사투리를 심하게 썼었죠. 근데 정한이가 먼저 다가와 주더라고요. 다른 친구들과 조금 다르게 말하는 너도 재밌는 것 같다고 말해준 걸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 알고 지낸 지는 한 5, 6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고등학교 입학 이후로는 같은 반이 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던데요.”

, 맞아요. 운명의 장난인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먼저 정한이를 찾아서 챙기는 편이었어요.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애였거든요. 정한이가 소개시켜준 지수랑도 의외로 잘 맞는 부분이 있어서, 처음 동아리를 열 때는 부원이 그렇게 달랑 세 명이었어요. 지수도 그랬지만 정한이는 특히 제가 하는 일에 있어서 누구보다 신뢰와 응원을 아까지 않았던, 그런 애였어요.”

 

 

 

승철은 여전히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건 채 대답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그 웃음에서는 왠지 자판기 커피 맛이 날 것만 같았다. 극도로 달고, 헤이즐넛을 가득 들이부었으면서도, 뒷맛이 묘하게 쓴. 그러니까 어쩌면, 인생의 축소판을 맛보는 느낌. 형사는 종이컵을 들어 반쯤 남은 커피를 한 숨에 모두 들이키고서 승철을 마주한다. 저 아이는, 저렇게도 어린 나이에 세상의 표면과 이면을 다 담은 얼굴을 할 수가 있었다. 괜히 기분이 쓴 탓에 형사는 질문을 잠시 멈추고 던지듯 뱉었다. 그동안 상심이 컸겠어요. 제 말이 위로가 되길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어색하게 웃어 보인 승철이 짧게나마 감사를 표하자 형사도 따라 입 꼬리를 당겼다.

 

 

 

승철 학생도 웃으니까 좀 낫네. 앞으로 자주 웃고 다녀요, 사건 끝나면. 아마 친구도 그걸 더 좋아할 거야.”

감사해요, 진짜. 저나 저희 애들한테 많이 신경 써 주셔서.”

아닙니다, 이게 내 일인데 뭐. ……, 그럼 혹시 승철 학생이 바라보는 피해자와 김민규 학생의 관계는 어떠했었나요?”

, 민규요? ……저는 사실, 민규가 맘에 많이 걸려요. 그러니까, 의심된다는 건 아닌데, 뭐랄까, 정한이가 민규와 사이가 많이 가까워진 이후로 평소답지 않은 행동들을 많이 했거든요. 이번에 주연 맡은 것도 그렇고.”

윤정한 학생 장래희망이 연기자라고 했었죠?”

,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항상 연기를 할 거라고 했었어요.”

정한 학생에게 연기를 포기할 만한 사건이 있었나 봅니다.”

그걸, ……, 아마 지수는 그걸 말 못 했겠네요. 저라고 정한이의 일을 남한테 전할 만한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관련이,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없지 않아 보이거든요.”

 

 

 

거기에서 말을 끊은 승철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책상 모서리에 반쯤 걸쳐진 손에 힘이 들어간다. 형사는 미리 정리해 두었던 서류 뭉치를 뒤적여 정한의 증명사진이 붙은 학교생활기록부를 펼쳤다. 맨 첫 페이지, 출결현황에 기록된 단문의 문구. ‘14.06.12 ~ 14.07.13 무단 결석 처리.’ 그것을 내려다보는 형사의 시선 위로 낮게 가라앉은 승철의 목소리가 천천히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재작년에그러니까 저랑 정한이랑 지수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이에요. 저희 학교가 남고인데다 정한이가 머리도 길고 외모적으로 여성스러운 부분이 좀 있었거든요. 그래서 정한이가 질 낮은 애들한테 괴롭힘을 당했었어요. 그 때 지수가 같은 반이어서, 지수는 자기 딴에 그걸 막아본다고 계속 먼저 정한이 챙겨서 다녔었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그 놈들이 지수한테도 협박 비슷하게 한 것 같더라고요.”

집단 따돌림 같은 겁니까?”

아뇨, 그런 느낌이라기보다는, 정한이가 맞기도 좀 맞고, 그런…… 성적인 괴롭힘이, 좀 많았어요. 어쩌면 그게 주였을 지도 모르죠. 그래서 정한이가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 놈들이, 여러 모로, 못할 짓을 많이 해서요. 한동안 병원 치료도 받았는데 정한이가 먼저 마음을 닫더라고요. 아예 고개를 못 들고 다녔어요. 저희 앞에서도 겨우 웃고. 그래서 연기도 그 일 때문에 때려 치겠다고 했었어요.”

그런 윤정한 학생이 먼저 나서서 연기를 다시 하겠다고 했지 않았나요?”

, 맞아요. 그런 애가, 다시는 연기 안 하겠다고 했던 애가 민규 때문에 다시 연기를 하더라고요. 많이 놀랐죠. 저도 모르고 지수도 모르고, 정한이랑 민규만 아는 무언가가 있었을 거예요. 사실 짐작도 안 가요,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래도 민규는 착한 애니까, 아마 정한이가 못 다 이룬 꿈을 펼치도록 뒤에서 많이 도와줬을 거예요.”

 

 

 

숨 대신 말을 뱉듯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승철은 매듭을 지은 후에야 깊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형사는 만년필을 들어 정한의 학교생활기록부 위, 무단결석을 알리는 문구 아래에 학급 내 집단 성폭력, 입원 치료, 왜 무단?’이라는 문구를 써 넣었다. 승철은 건조해진 두 눈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다, 이내 마른세수를 하며 길게 한숨을 뱉었다.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던 짐이 덜어진 것 같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어깨가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형사는 무언가 더 묻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추가 질문은 하지 않고 그대로 서류를 덮어 버렸다. 수첩을 들어 다 날아가는 글씨로 무언가를 써 내려간 형사는 두 줄쯤 더 적을 수 있는 여백을 남겨 두고서 승철에게 질문 하나를 더 던졌다.

 

 

 

혹시 담당교사 전원우 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 사실……,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전 굳이 의심하라고 하면 저희 쌤을 지목할 것 같아요.”

평소에 의심 가는 행동을 하셨던 적이 있나요?”

아뇨, ……. 그런 건 아니에요. 사실 쌤이 젊은 축에 속하시는데 수업도 잘 해 주시고, 또 저희 동아리도 잘 챙겨 주시거든요. 좋은 사람이에요. 근데이 얘긴 지수한테서 들은 건데, 정한이 그 일 관련해서요.”

 

 

 

승철은 또 한 번 말을 멈추고, 벅차도록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형사는 만년필 뚜껑 쪽으로 책상을 툭툭 소리 나게 두드리고 있었고, 그의 시야에 들어온 승철의 주먹 쥔 두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입술 끝을 비틀어 깨물었다 놓은 그가 말을 잇기 시작했다.

 

 

 

사실 지수가 많이 힘들어했던 게 협박받은 것도 있지만, 정한이가 정말 큰 상처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거든요.”

큰 상처라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폭력적 행위가 있었던 건가요?”

, , 그런……, 때리고 밟고 그런 것보다는, , 성적인그런 일이 있었죠.”

유사 성행위가 있었나 보군요. 이 일에 대해서는 제가 좀 더 조사하도록 하죠.”

, 아무튼, 저랑 지수랑 과제하느라 정한이 전화를 못 받아서, 일이 틀어진 거거든요. 그니까 그 놈들이 오기 전에 정한이를 구해줄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못 구해줬던 거죠. 그래서 그거 때문에 지수는 아직까지도 죄책감 갖고 있을 거예요, 아마. 암튼 그 날 지수가 나중에 전화 받고 먼저 정한이한테 갔었는데, 정한이가 정신 잃기 전에 지수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원우 쌤이 자기를 보고서 그냥 지나쳤다는 식으로. 깨어났을 때 정한이는 그 순간의 기억을 통째로 지워서 다시 물어볼 수는 없었죠.”

윤정한 학생 1학년 때 7반이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 그러니까요. 그래서 그냥 그것 때문에, 가끔씩 꺼림칙한 기분이 들긴 해요.”

 

 

 

말을 마친 승철이 손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풀고 숨을 고르는 동안, 형사는 문득 엎어 놓았던 서류를 다시 들어올렸다. 맨 첫 페이지, 출결현황 바로 위에 적힌 학생 이력,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적힌 ‘1학년 7, 담임 전원우.’ 형사는 그 위로 만년필을 대어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승철의 이름이 적힌 수첩의 마지막 여백에 전원우 윤정한 관련성 조사 필요라고 써 넣었다. 사각거리며 만년필이 종이 위에 닿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승철은 책상 아래로 몰래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9시 반이 넘어가고 있다. 빈소를 혼자 지키고 있을 순영에게로 괜히 걱정이 뻗쳐 간단하게 문자를 넣은 승철이, 수첩을 마구 뒤적이는 형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 형사님. 이거 언제쯤 끝나나요?”

혹시 바쁜 일 있습니까? 아마 오늘쯤이면 빈소 정리해야 할 텐데.”

, 내일 새벽에 정리하고 보내주기로 해서지금 후배가 잠깐 자리 지켜주고 있거든요.”

잠시만요. , 최승철 학생, 수고하셨고 이제 가 봐도 좋습니다.”

, . 수고하셨어요, 형사님.”

 

 

 

발인할 때 내가 못 들르지 싶어서, 미안해요. 친구가 승철 학생 많이 의지되겠어.

취조실을 빠져나가려 막 문고리를 잡은 승철의 뒤통수에 대고 형사가 그렇게 덧붙였다. 문득 고개를 돌린 승철은 형사와 눈이 마주치고서, 씨익 웃는 그를 따라 입 꼬리를 당겨 올렸다. 건물을 빠져나와 로비 앞에 서서, 승철은 조금 전에 문자를 넣었던 순영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상단바에 깨알 같은 글씨로 21:49 라는 숫자의 나열이 자리하고 있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새까맸고, 강하게 부는 바람 속에 먼지처럼 가는 눈송이가 섞여 날리고 있었다.

 

 

 

, 순영아. 형 지금 끝났어. , 택시 잡아서 바로 갈게. 좀만 기다려 봐. 어어, 끊는다.”

 

 

 

큰 의미가 없는 말들을 나열하고서 전화를 끊은 승철은 잠깐 동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바깥 공기 속으로 제 몸을 밀어 넣었다. 날이 춥고 바람이 세게 불어서, 도로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주머니 가장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정한의 장례가 이어지는 근 삼 일 간, 빠짐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

 

 

 

 

 

 

 

내가 빈소로 막 돌아왔을 때, 순영은 장판 바닥에 앉아 사과와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쟁반 위로 뚝뚝 끊긴 사과 껍질이 한가득, 조각하듯이 깎은 사과 한 개가 플라스틱 접시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반쯤 껍질이 깎여 나간 두 번째 사과를 든 채 한숨을 푹푹 내쉬던 그는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 환하게 웃었다. , 나 사과 깎아 줘! 패딩을 벗기도 전에 다짜고짜 사과부터 들이미는 게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나는 그냥 웃어버렸다.

 

 

 

기다려 봐봐, 형 이거 옷 정리 좀 하고. 밖에 눈 와서 택시 기다릴 때 다 맞았단 말야.”

, 밖에 눈 또 와? 오늘은 안 온다더니, 일기예보도 믿을 게 못 되네.”

근데 깎던 건 마저 깎으면 안 되냐? 도전정신이 있어야지, 사람이.”

 

 

 

패딩을 벗어 차곡차곡 접으며 장난스레 내뱉자 순영은 사과를 든 채 입술을 비죽이며 입속말로 꿍얼거렸다. 그 표정이며 행동들이 막연하게 귀엽고 웃겨서 나는 또 한 번 소리 내어 웃었다. 아마 요 근래 들어 가장 크게 웃는 것일 테다. 순영의 패딩과 교복 마이가 널브러진 빈소 구석 자리에 내 패딩을 겹쳐 두고 그의 옆으로 와 앉자, 순영은 기다렸다는 듯 칼과 반쯤 깎인 사과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오랜만에 집중력을 발휘해 껍질을 깎는 동안, 순영은 제가 깎아 놓은 사과를 들어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있었다. 사각사각하는 소리가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소리가 공기 중으로 느리게 퍼져나갔다.

 

 

 

, 형 사과 진짜 잘 깎는다. 형 올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다, 그치?”

배고팠어? 배고프고 졸리면 집에 가라니까, 왜 굳이 남아 있겠대?”

아니, 좀 그렇잖아. 나 혼자 집에 가기도 싫고. 형 그렇게 놔두는 건 더 싫단 말이야.”

어이구, 그랬어? 고마워 죽겠네. 근데 우리 잠 못 자, 알지?”

, , 피곤한데……. 그럼 우리 지금부터 뭐 해?”

 

 

 

한 입 가득 사과를 베어 물어 아삭아삭 씹던 순영이 반쯤 뭉그러진 발음을 하고서 물어 왔다. 딱히 생각해 놓은 대책 같은 게 없어서 그러게, 뭐 하지, 하고 김빠지는 답을 뱉은 난 다 깎은 사과를 들고 한 입 베어 물며 눈을 굴렸다. 3일 간 달라진 것이 없는 빈소 안의 풍경들, 그 가운데 정한의 영정이 놓인 단상 가까이 바닥에 내던져진 것처럼 놓인 종이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어제, 지수가 읽다 말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것이 저기까지 떠내려간 것이었다. 곧 순영이 바닥에 반쯤 눕다시피 하고 팔을 길게 뻗어서 대본을 집어 왔다. 이거 봐도 돼? 묻는 말에 나는 접시 위에 사과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보여준다고 했었다며, 좀 전에 저녁을 먹으면서 나눴던 얘기를 상기시키자 순영은 말끝을 흐리며 어물거렸다. 꿈일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당시 눕자마자 잠들어 버렸던 나로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대화였지만, 꿈이 아니었을 것만 같은 생각확신이 사라지지 않는다. 팔을 뻗어 순영을 끌어당기고, 나란히 앉아 표지를 넘겼다. 맨 앞장에는 내가 정한으로부터 받았던 시놉시스와 간단한 배역 설명이 적혀 있었다. 순영이 그것을 읽는 동안 나는 사과를 씹어 삼켰고, 그 뒤부터는 우리 둘 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으므로 곧 빈소 내부에는 사과 씹는 소리에 간헐적으로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영화의 내용은 내가 추측한 것만큼 간단하지가 않았다. 우선 정한이 맡은 세하역은 그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는 피아노 천재였고, 민규가 맡은 재연역은 항상 세하의 뒤를 쫓아야만 하는 만년 2등이자 비운의 영재였다. 초반부의 내용은 이 둘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신 몇 개가 들어가 있고, 둘이 그다지 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재연이 마냥 세하를 시기하지만은 않는다는 것 또한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1등과 2등의 클리셰다. 그러나 영화 중반부, 밤늦게 학교에서 연습을 하고 있던 세하가 누군가의 음모로 손을 다치고 한동안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면서 영화의 느낌 자체가 완전히 뒤집혔다. 누가 본대도 전형적인 클리셰였는데, 이쯤부터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갈변하고 있는 사과 심지를 잘근잘근 씹던 순영은 깊게 들이마신 숨을 깊게 내쉬고, 가득 쌓인 사과껍질 위로 그것을 내려놓으며 제 머리를 짚었다. , 머리 안 아파? 묻는 말에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머릿속에서 뒤엉키기 시작하는 문장 가운데 틈을 뚫고 빠져나온 것들은 전부 눈에 익었다. 2년 전, 정한이 입버릇처럼 해대던 말들이었다.

 

 

 

, 이거 뭔가, , 위험하지 않아?”

…….”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영화 대본 같지는 않은데, 형은 뭔가 알고 있을 거 아냐.”

……맞아, 아니야.”

 

 

 

뒷장으로, 더 뒷장으로 종이가 넘어갈수록 나는 묵직하게 내려앉는 심장을 더 이상 잡고 버틸 수 없었다. 추측이 확신으로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은, 절망하던 세하에게 손을 내밀고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재연이 자신을 다치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에서였다. 그것은, 어쩌면 비뚤어진 동경, 또 어쩌면 심각한 애증.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본 속의 재연 위로, 누군가가 겹치는 기분이 들었다. 정한이 그려가고 있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픽션이 아닌 팩트였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세하재연을 음악실로 불러낸다.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으므로, ‘세하와의 독대는 재연에게 꿀과 같은 시간일 것이다. ‘재연이 음악실로 들어서고, ‘세하가 문을 잠근다. 등 뒤로 두 손을 숨긴 채, ‘세하는 달콤한 말들로 재연의 발을 묶는다. 곧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러 껴안은 세하, 손 안에 숨기고 있던 것을 밖으로 꺼내든다. 그것은 라이터, 음악실 안 바닥에 찰랑이는 투명의 액체 위로 세하는 라이터를 주저 없이 내던진다. 빠르게 불이 붙고, 타오르는 교실 안에서 두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대본을 쥐고 있던 순영이 그것을 떨어뜨려서, 차르륵 하고 종이가 바닥에 부딪쳐 흩어졌다. 확신, 그래, 나는 정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문득 순영을 돌아본다. 넋이 빠진 얼굴을 하고 휴대폰을 집어든 그는, 전화 버튼을 눌러 질리도록 많이 누른 일련의 번호를 눌렀다가 지웠다.

 

정한이 우리에게 말하려던 것은 2년 전의 이야기다. 2년 전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그것은 현재의 이야기다. 다시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정한과, 그를 그 자리로 이끌어 준그러면서도 정한에게 또 하나의 깊은 상처를 남긴 민규와, 그리고

 

 

 

……, 나 기억났어.”

뭐가?”

민규, 형이, 2년 전에 우리 학교 다녔었다고 했잖아. 1학년 7.”

, 근데 그게 왜?”

 

그 형 이름이, 재연이잖아. , 재연.”

 

 

 

끝까지 비열한 얼굴을 거두지 않던, 자신의 비뚤어진 감정을 몰랐던, 2년 전 나와 같은 색 명찰을 달고 있던, 재연. 영화는 절대로 풀릴 수 없게 단단히 묶인 두 사건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정한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처음이자 마지막 수단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정리되고 나서, 나는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지워지는 것을 느낀다. 언어를 모두 까먹은 기분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액자 속의 정한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 웃음 뒤에 가려진 어둠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어쩌면 정한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 눈물이 날 자격이 있긴 한 걸까.

 

적막이 숨을 죄어오는 가운데, 바닥으로 미끄러진 순영의 휴대폰이 경쾌한 알림음을 두세 번 연속으로 울려 댔다. 초점을 잃고 떠돌던 순영의 눈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심스레 휴대폰을 주워드는 그의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발신자는 승관, 급한 일이 있을 때면 으레 문자 메시지를 카카오톡 메신저처럼 쓰는 버릇이 있어 이번에도 문자 세 통이 쌓여 있었다. 순영은 휴대폰을 꼭 쥔 채 내 쪽으로 몸을 조금 돌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문자 아이콘을 꾹 눌렀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화면 위로 떠오르는 글자의 나열. 그것이 구성하는 의미가 머릿속으로 입력되자 감쳐문 입술 새로 웃음이 샌다. 그것은, 명백한 절망. 내 옆에서 순영이 작게 탄식했다.

 

 

 

[순영아!! 민규 찾았대!! ㅠㅠㅠㅠㅠㅠ]

[근데 민규 지금 경찰서로 바로갔다는데]

[무슨일이야?? 혹시 아는거있어?]

 

 

 

발광하는 기계장치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것은명백한 절망. 벽에 걸린 시계가 세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6. 담당교사 전원우

 

 

 

 

 

정한의 발인은 동이 막 틀 무렵에 시작되었다.

담배를 한 갑 가까이 피워 대며 새벽을 지새우던 내게 승철의 연락이 닿은 것은 새벽 네 시 쯤, 어두운 방 안에 별안간 휴대폰 액정이 빛을 발하기에 확인한 문자는 뚝뚝 잘려나간 문장 몇 개를 담고 있었다. 감정이 잘려나간, 냉정한 투의 문자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선생님 정한이 발인 5시쯤 시작한대요. 장례식장도 한번 안 오셨는데 마지막 가는 건 보셔야죠.]

 

 

 

독한 니코틴을 술 마시듯 해도 또렷해지지 않던 정신은 문자를 받은 순간부터 발악하듯이 맑아졌다. 오가는 사람이 적은 새벽의 도로를 마구잡이로 질주해 병원에 도착했을 때가 네 시 사십 분이었다.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삼 일 동안 꾸준히 눈이 왔었다고 하더니, 아직 어두운 하늘은 질척한 진눈깨비를 뿌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자판기가 늘어선 자그마한 차양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주머니를 뒤적여 값싼 맛이 나는 자판기 커피를 빈속에 들이붓는다. 승철이 일러준 시간까지는 십여 분이 더 남았다.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거기에서 그 각도로 고개를 쳐든 채 눈발이 점점 굵어지는 것을 마주하다가, 다섯 시 하고도 십 분이 더 지나서야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벤치에 내버려 둔 종이컵이 바람에 날려 굴러가는 소리가 선연했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 막 화장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정한의 부모와 동아리 부원들만이 모인 가운데, 벌써부터 아이들 쪽에서 간간히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장의사가 정한을 닮은, 짙은 밤색의 나무 관을 가마 안으로 밀어 넣는다. 정한의 어머니가 아래로 무너졌고, 아이들의 고개가 모두 아래로 떨어졌다.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두 발자국 물러선다. 관이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질 무렵, 나는 없었던 사람처럼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저기 모인 아이들은 내가 왔었는지 모를 것이다. 몰라야만 했다. 그런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시린 눈을 굳게 떠 올리고, 병원 로비로 나섰다. 완전히 밝아진 하늘은 옅은 회색이었고, 굵직한 눈송이가 바람을 타고 유유히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정한이 과연 눈을 좋아했는가를 생각해 보다가, 나는 곧 생각을 멈추었다.

 

 

나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정한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애도하는 일 모두.

입 밖으로 작게 한숨이 터져 나온다. 나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종이컵을 든 채 입가에서 홀짝이던 중년의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일찍 나오셨네요. 오래 걸리실 것 같다더니.”

아닙니다, 제가 뭘 잘했다고 거기 계속 있겠습니까.”

포기하신 겁니까, 아니면

저는 그냥, 제게 책임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서에 가서 하시죠.”

 

 

 

승철의 연락이 오기 전에, 미리 나에게 연락해 왔던 정한의 사건 담당 형사였다. 서로의 말이 자꾸만 끊어질 무렵 형사가 대화를 정리하고 먼저 눈 내리는 바깥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그 쪽으로 내밀었던 오른쪽 손목은 여전히 텅 빈 채 시린 바람을 맞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내 몸을 실은 차는 경찰차가 아니었고, 형사는 수갑을 차 뒷좌석에 던져놓은 채 시동을 걸었다. 차 안은 고요했고, 엔진이 가동되는 소음만 간간히 울렸다. 나는 입술을 자꾸만 눌러 깨물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잘한 것이 없었으므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속이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

 

 

 

 

 

 

 

아침에 진눈깨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취조실이 습했다. 차갑고 눅눅한 공기가 피부에 닿자 원우는 반사적으로 눈가를 찌푸렸다. 먼저 들어와 자리에 앉은 형사가 알아보기 힘든 글씨들로 가득 찬 수첩을 뒤적이다가, 혹시나 싶어 챙겨 온 이면지를 펴 들었다. 의자를 빼내어 앉은 원우는 차게 식은 양 손을 맞잡았다. 곧 만년필을 꺼내어 뚜껑을 연 형사가 그것을 쥐고 원우를 마주한다. 엇갈리던 시선의 방향이 완전히 틀어질 때쯤, 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름과 나이, 소속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십 칠 세 전원우, 직업은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전원우 씨, 본인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서 현재 본 형사의 질문에 따라 진술을 할 예정입니다. 그저 진실 되게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고, 본인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셔도 무방합니다. 아시겠습니까?”

,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단편영화 제작부 내에서 전원우 씨의 역할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원우 위로 형사의 첫 번째 질문이 내려앉았다. 입술 끝을 비틀어 깨문 채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던 그는 차게 식은 손끝을 손바닥 안쪽으로 말아 넣어 꾹 주먹을 쥐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를 내는 원우의 입가에서 하얗게 김이 퍼졌다.

 

 

 

저는, 동아리 담당 교사였습니다. 아이들이 영화를 촬영하는 데 필요한 장비나 기자재를 구해 주는 일과 장소 대관을 주로 했습니다. 지난 영화제 출품 때처럼 학교장의 승인이 필요한 교외활동을 할 경우에 제가 그걸 결재 받는 일도 했었어요. 제가 초임 교사라 부족한 점이 항상 많은데, 아이들이 동아리를 잘 꾸려나가 줘서 특별히 손 가는 건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동아리 내에서도 피해자 윤정한 학생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정한이는…… 제가 처음으로 담임을 맡은 반의 학생이었어요. 입학 성적도 좋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꿈이 확고한 데다 그걸 포기하지 않고 펼쳐나가려는 게 기특해서 담임으로서, 교사로서 눈이 많이 갔던 아이입니다. 하지만……

 

 

 

원우는 거기까지 뱉고서 말을 멈추었다. 숨이 막힌 것처럼 말끝이 뚝 잘리자 시선을 아래에 둔 채 무언가를 휘갈겨 적던 형사가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입술을 비틀며 피가 몰리도록 잘근잘근 씹던 그가, 퍽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어떤 죄도 달게 받겠습니다. 단단하게 뱉어진 음성, 그 아래로 다리 위에 둔 원우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본인이 윤정한 학생 투신자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겁니까?”

……, 그렇습니다.”

윤정한 학생이 과거에 동급생으로부터 성적 괴롭힘을 당하고, 유사 성행위를 당한 사실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까?”

, 알고 있었습니다. 정한이가 직접 제게 와서 상담도 몇 번 한 적이 있었어요. 많이 힘들어 하더라고요. 아시다시피 저희 학교가 남자 학교인 데다, 질 낮은 학생들이 적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 해 다른 담임들도 쉬쉬했었죠. 개인적으로라도 처벌을 하려고 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처벌이 많이 약해졌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조사해 본 결과 당시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 가운데 대부분은 증거불충분으로 처벌조차 못 받고 풀려났네요.”

, 그래서 정한이가…… 상처를 크게 받았을 거예요. 저로서는 그 아이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죠. 제 능력이 부족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선생으로서 들지 말아야 할 감정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켜주고 싶었고, 그토록 유능한 아이가 서서히 무너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그 마음이란 게……, 순식간에 변질되더군요. , 이 아이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구나, 그런 생각으로 시작해서 나밖에 없어야 해, 결국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근데 그런 사람이 피해자를 최초로 발견하고도 그냥 지나치셨습니까?”

 

 

 

순식간에 원우의 표정이 굳는다. 완전히 경직된 얼굴, 흔들리는 눈동자는 한 곳에 초점을 두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굴러가고 있었다. 형사의 예리한 시선이 원우에게로 닿고, 그가 그것을 피하자 형사는 수첩을 뒤적여 승철의 진술이 적힌 페이지를 열었다. 쉽사리 터지지 않는 원우의 뒷말을 기다리며, 형사는 좁은 여백에다 전원우, 최초발견 O’를 덧붙여 적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급하게 숨을 고르던 원우는 겨우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그건, ……제 잘못이라고밖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한 번 마음을 비뚤하게 먹으니 쉽게 바로잡아지지 않더라고요. 그 때 제가 정한이를 처음으로 목격한 것이 맞습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찾아다닌 건 아니었고, 우연히 가해자 중 몇 명이 그 근처로 향하는 걸 알고는 있었죠. 반신반의해서 거기로 가 봤던 건데,”

피해자가 있었겠네요. 유사 성행위를 당했을 테니 성한 상태는 아니었을 테고.”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한이를 선뜻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를, 제가 지켜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피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단지 그런……, 감정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제가 그 자리를 뜬 이후에 바로 지수와 승철이가 왔다고 하더라고요. 정한이는 그 날 저와 마주친 일을 기억하지 못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전원우 씨께서는 죄책감이 크셨겠네요. 혹시 김민규 학생과 윤정한 학생의 관계는 알고 계셨습니까?”

, 그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정한이가 먼저 말한 적 있었거든요. 민규가, 요새 힘들게 한다는 식으로. 그때 제가 먼저 그 아이에게 묻고 나서서 도와줬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발 아래로 떨어뜨린 채, 원우는 말을 마치고 겨우 고개를 들어 형사의 얼굴을 마주한다. 비참한 얼굴과 비참한 목소리. 형사는 쓰게 웃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 원우가, 곧 책상 위로 이마를 박았다. 철제 책상과 맞부딪치는 소리가 잔향을 남기며 길게 공명했다. 형사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만년필 뚜껑을 닫고 제 수첩과 이면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원우의 표정은 담담했으나, 그의 입술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울 자격이, 없다. 입속말로 중얼거리는 원우의 두 눈에 빨갛게 핏발이 섰다.

그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

 

 

 

 

 

 

 

정한은 내 첫 제자였다.

 

 

2년 전, 초임 교사인 나는 집에서 거리가 좀 있는 남자 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었다. 책임질 것이 많고, 아직 포기하는 법을 모르는 나에게는 이끌고 나가야 할 아이들도 있었다. 1학년 7반의 스물여덟 명. 나는 그들 가운데 윤정한이라는 아이를 눈에 먼저 담기 시작했다.

 

정한은 입학 성적이 꽤 좋았다. 교탁에서 두 번째 자리, 가장 눈에 잘 띄는 명당자리에 앉아 항상 눈을 빛내며 수업을 들었다. 교무실에서도 그의 칭찬을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수업 태도가 정말 좋더라, 성격도 바르고 싹싹하더라,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것 같던데, 하는 말들을 머릿속에 꼭꼭 담아 두는 것이 일상의 낙이 되어갔다. 으레 그렇듯이 학기 초에 상담을 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정한은 진로가 명확하고 성격이 낙관적이었다. 연기가 하고 싶다며, 언젠가 유명해지면 날 잊지 않고 찾아오겠다며 너스레를 떠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아직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한이 동아리를 열겠다고 했을 때, 내게 담당 교사를 부탁했을 때 망설임 없이 수긍할 수 있었다. 그가 함께 데려온 아이들은 내 반의 학생인 지수와 1반 승철이었다. 학기 초 정한의 자기소개서에 그 둘의 이름이 적혀 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던 것도 같았다. 한동안 동아리에는 그 세 사람밖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항상 내가 동아리 실을 들를 때마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갖은 책임을 다 지며 동아리의 폐부를 반대했던 건,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십오 년간의 삶과 정확히 반대되는 행동들일 지도 몰랐다. 정한으로 하여금, 나라는 사람이 어느 정도 바뀌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정한을 조금 더 눈에 자주, 오래 담았다. 단지 그는 나의 제자, 그래내가 아끼는 제자였다.

 

 

정한을 향한 감정에 탁한 색이 들고 각도가 비틀어진 건 1학기 중반쯤 이었다. 그 당시 우리 반에는 학생부를 제 집처럼 드나들던 질 낮은 아이들이 한데 모여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정한이 괴롭힘을 당하더라 하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고 그런 애들이 끼어있는 만큼 질 낮은 소문이겠거니, 하고 넘겼던 것은 두 배 세 배가 되어 돌아왔다. 도를 넘은 얘기들이 교무실에까지 들어갔음에도 교사들은 쉬쉬했다. 징계위원회를 열고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학교 이미지 입장에서 좋을 일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개중에는 그때까지도 소문을 부정하는 교사 몇이 있었고,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던 내 믿음이 산산이 부서진 것은 정한이 교무실을 방문했을 때였다. 다 나아가는 상처 위로 또 몇 개의 상처를 달고, 정한은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아 교무실 밖 복도로 이끌었다. 극도로 불안해하는 그를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라, 나는 어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정한의 손을 붙잡고 교사 휴게실로 들어가 앉혔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오로지 나뿐임을 계속해서 확인하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 ……너무 힘들어요.

정한아, 무슨 일인데 그래. 선생님이 비밀 지켜줄 테니까 천천히 말해 봐.

혹시, 소문 같은 거…… 들어보신 적 없으세요?

「…소문?

그거, 소문 아니에요…….

 

 

 

……김재연이, 저를 괴롭혀요. 김재연이랑, 같이 다니는 애들도, 저를 괴롭혀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쥐어짜듯 뱉어낸 정한의 한마디에, 나는 무언가 이질적인 감정 두 개가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손대면 부서질 것만 같고, 깨질 것만 같은, 지금 내 눈앞에서 참았던 울음을 토해내는 이 아이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내 학급의 질 낮은 무리재연과 그 무리들이 정한을 망가뜨리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 나는 필사적으로 후자를 밀어내고 전자를 내 머릿속에 세뇌시키며 정한을 달랬다. 도와주세요, 를 반복하는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정한아, 쌤이 더 알아보고 꼭 도와줄게.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나는 그 허울과도 같은 약속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아 버렸다. 이전처럼 정한을 눈에 담는 느낌이 달라졌다. 이전과 똑같이 좀 더 오래, 좀 더 자주 그를 눈에 담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 한켠이 불편하게 저리고 숨이 막혔다. 정한은 그 이후로도 나에게 몇 번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고는 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제자를 사랑하여 그를 지키고 싶었으나 결국 그럴 수 없었던 나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던 정한에게 깊게 벤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악몽 같은 만남. 평소와 같이 교무실로 걸음을 옮기던 중 재연의 무리가 오래 전에 통행이 금지된 별관 쪽으로 향하는 것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딘가 상기된 듯한 그들의 표정이 꺼림칙했으나 나에게는 주어진 수업과 일이 있었으므로 더 돌아보지 않고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쯤 뒤였을까, 그 근처를 지나칠 일이 있어 걷고 있던 나의 발걸음을 붙잡는 희미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숨소리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한 그것은, 조금만 유심히 보면 충분히 보일만한 폐쇄구역 모퉁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느리게 걸음을 옮겨 모퉁이 너머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진다. 복도에 난 쪽창에서 빛이 들어와 내부를 비추었고, 나는 그 안에서 반쯤 뜯어진 교복을 겨우 걸친 채 헝클어진 머리를 한 정한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래서, 자리를 떴다. 그 순간 자리를 떠야만 한다고,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린 것 마냥 걸음이 빨라졌다. 교무실로 돌아와 나는 책상 위로 머리를 쿵쿵 처박았다.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나 나약한 존재였던가, 이렇게나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였던가. 후회하는 와중에도 나를 정확히 마주하고 뭐라 내뱉으려던 정한의 상처 받은 얼굴이 잔상처럼 남아 괴로워졌다. 얼마 안 가 지수가 내게 전화를 했다. 정한을 발견했다는 말을 하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 날 그렇게 학교가 뒤집힌 이후로 정한은 입원 치료를 받았고, 학교에서는 사건을 덮기 위해 그의 병결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따금씩 병원에 들렀을 때 그는 나에게도 그 부서질 것 같은 입 꼬리를 당겨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어 주었다. 사건 당시 나를 마주친 것을 기억에서 지워 버려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나를 저주했다.

 

 

 

정한이 사건 당일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치료가 끝난 이후 학교에 돌아왔을 때 여전히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것은 그렇게 확신해오던 연기자로서의 장래희망을 포기하겠다는 것. 나뿐만 아니라 같은 동아리 부원이었던 승철과 지수도 정한을 설득했지만 그는 그저 연기 때려 쳤어요, 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래서 정한을 촬영 현장 안으로 이끌고 들어간 민규가 마음에 걸릴 따름이었다. 민규는 작년 여름방학 때쯤 입부한 정한의 한 학년 후배였는데, 서로 하는 일이 달라 처음에는 정한과 그렇게나 친한지도 알지 못했었다. 1년 쯤 지난 후에야 저렇게 친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었던 것 같다. 영화제에 다녀온 이후로 복도를 지나면서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을 꽤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정한의 옆에서 그저 말갛게 웃는 민규를 붙잡고 무슨 속셈으로 정한을 촬영장으로 이끌었느냐 물을 수 없었다. 단지 추측뿐이었고, 다만 정한이 나에게 조금 더 많이 의지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지난 10월 쯤, 정한은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 민규한테서,

김재연이 보여요.

 

나는 그 말을 하는 정한의 짙은 밤색 눈동자를 마주하다가, 별달리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정한이 민규로부터 상처받기를, 그리하여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려주기를 바랐는데.

그래, 나는 울 자격이 없다. 그를 지켜주고 싶었던 마음에 까맣게 물이 든 이후부터 줄곧.

 

 

 

 

 

 

 

 

 

 

#7. 2학년 4반 김민규

 

 

 

 

 

형의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 신, 형이 맡은 세하가 내가 맡은 재연을 껴안은 채 음악실에 불을 질러 함께 그 속에서 죽어가는 장면이다. 그 날도 나는 우리 둘과 CCTV같은 카메라만이 남은 음악실 책상에 걸터앉아서 대본을 팔랑팔랑 넘기고 있었고, 형은 무릎을 끌어 모은 채 의자에 앉아 내 쪽을 제 시야 절반 정도에 담고 있었다. 동아리 내 촬영 장비 중에서 가장 비싼 승철이 형의 촬영 카메라는 빨간 불을 빛내며 녹화 중이라는 것을 발악하듯이 알렸고, 나는 그 쪽으로 다가가 녹화 정지 버튼을 눌렀다. 오른손을 들어 손톱을 씹는 형의 교복 소매 사이로 빨갛게 그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 그 장면 찍을 거예요?

어떤 거?

마지막 장면이요.

 

 

 

몸을 돌려 고개를 들어 올린 형을 마주했다. 느리게 끄덕여지는 고개, 나는 그것을 두 눈에 천천히 담는다. 여전히 형의 소매 안으로 다 낫지 않은 상처의 붉은 색이 선연하다. 내가 다시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형의 입에서 나지막히 내 이름이 흘러 나왔다. 특유의 나긋한 음성으로 담는 내 이름을 듣기 위해서, 나는 형의 곁에 지독하게도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민규야.

, . 왜요?

나는 네가 그만했으면 좋겠어.

뭐를요?

「……알잖아, 그만 해 줘.

 

 

 

오랜만에 형의 시선이 오롯이 내 쪽으로 향했다. 눈물이 맺힌 두 눈을, 물기에 젖은 시선을 완전히 받아내며 나는 피하지 않고 형을 응시했다. 곧 형의 시선이 먼저 아래로 떨어졌다. 날 피하듯이 고개를 돌린 형의 머리칼 사이로 입술이 반쯤 깨물리는 게 보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형 쪽으로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기 위해 손을 뻗는데, 형의 오른손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아 내렸다. 나는 그 손목을 꾹 눌러 쥐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가, 애써 참아냈다. 형의 두 눈, 핏발 선 가운데 물기가 어린 두 눈이 나를 다시금 올려다본다.

 

 

 

손목 다친 건 왜 치료 안 해요, 아프게.

「……다친 거 아니야, 너도 알잖아.

알아요, 그러니까 왜 치료 안 하고 가만히 두냐고요.

「…난 진짜, 민규야,

형은 상처가 나면 상처가 난 만큼 예쁜데, 그런 상처는 볼 때마다 맘 아프단 말이에요.

 

 

 

나를 피하려고, 내게서 도망가려고 한 흔적이니까.

뒷말을 꼭꼭 씹어 삼키며 형의 교복 소매 위로 발갛게 비치는 상처 위에 엄지를 댔다. 한 겹의 천 아래 길게 그어진 흔적 위로 형의 심장이 느리게 박동했다. 형은 잠깐 인상을 찌푸리다가 곧 제 손목을 돌려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형의 손이 공중에서 맴돌다가 끌어 모은 무릎 위로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다시 손을 뻗어 꽤 길게 자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지난 8월 이후로 형이 머리를 묶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언젠가 형의 머리를 꼭 묶어줘야지, 하고 또 한 번 마음먹었다. 형의 짙은 밤색 눈동자는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카메라 근처에서 잠시 멈추고, 다시 나에게로 향한다. 눈동자 속에 내가 비친다는 건,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민규야. 이제 진짜 그만 둬.

뭐를요?

「……나는 네가 그만했으면 좋겠어. 의도가 뭐가 됐든 간에,

그치만 나는 형을 좋아해요.

 

 

 

하루에 한 번씩, 형이 그만두라고 할 때마다 내뱉는 나의 대답이었다. 내 마음을 가장 간단한 문장으로 서술한다면, 저 정도로 담백한 말이 될 것이다. 형을 좋아해, 사랑해, 같은 거. 내 말에 형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어쩌면 명백한 실소, 아니면 비소, 그것도 아니면 자조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평면적으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형은 자꾸만 내게 들으라는 듯이,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다.

 

 

 

민규야,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냐.

, 사랑의 의미는 그렇게 평면적인 게 아니에요.

네가 하는 건 사랑이 아니잖아.

사랑이라는 건 항상 전형적인 것만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아니라고, 민규야.

 

 

 

그 날은, 낯설도록 시선이 많이 마주쳤다. 스치고, 엇갈리다가도, 어느 순간 형이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형의 말투는 절박했고 눈빛은 간절했으나그에 반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늘 그래왔듯 달콤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 그래, 나는 형을 사랑하지. 항상 그래왔듯이, 형을 좋아하고 사랑하지, 그치 민규야? 마음 한켠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내게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속말로 중얼거리던 것을 내뱉어 본다. , 나는 형을 사랑해요. 내게 닿았던 형의 시선이 순식간에 유리창이 깨지듯 조각조각 나 부서졌다.

 

 

 

「……민규야.

, .

나는, 있잖아. 네가 그만두지 않는다면 말야.

어떻게 할 건데요?

난 나를 죽일 거야.

 

 

 

형은 그 말을 밖으로 뱉어내고서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휴대폰을 챙긴 채 음악실 출입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근래 들어 형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저것이었다. 나에게서 도망치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 같은 말들. 하지만 나는 형이 내게서 도망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씩 그것을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 근데 그럴 일 없을 거예요.

「…….

형도 날 좋아하잖아요.

 

 

 

문득, 고개를 돌린 형이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두 눈이 나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형의 어깨선 근처에서 길게 자란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끼이익, 기괴한 소리와 함께 음악실 문이 열렸고, 형은 그 밖으로 제 몸을 밀어 넣었다. 이것도 어쩌면 예상했던 결말. 며칠 째 나보다 먼저 촬영장을 뜨는 형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다시 돌아오니까.

 

나와, 값비싼 기계장치만 남아,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허한 음악실. 형 몫의 종이 대본이 창문 틈으로 새어 든 바람에 날려 차르륵, 소릴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

 

 

 

 

 

 

 

쪽창 하나 없이 자그마한 취조실, 그 안으로 잔뜩 피곤에 절은 형사가 들어서며 벽에 붙은 스위치를 눌렀다. 파밧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달린 알전구에 불빛이 들어오고, 그것이 다 퍼져 희미하게 철제 책상 위로 쏟아진 형사의 서류 뭉치를 비출 무렵 고개를 떨어뜨린 민규가 취조실 내부로 몸을 밀어 넣었다. 등 뒤로 뒷짐을 진 그의 왼손에 걸린 수갑이 저들끼리 부딪쳐 차가운 느낌의 소음을 냈다. 달랑 교복 셔츠 하나만을 걸친 그의 입에서 가늘게 숨이 흘러나올 때마다 입가에 하얗게 김이 피어났다. 형사는 재킷 주머니를 뒤적여 조그마한 열쇠 하나를 민규 쪽으로 내밀었고, 곧 시선을 돌려 수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이나 민규가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앉아 있자, 곧 형사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원래 수갑 풀고 조사받는 거예요, 김민규 학생.”

…….”

당신 아직 용의자 아니고 참고인이에요, 참고인.”

 

 

 

겨우 빈 페이지를 찾아낸 형사가 수첩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만년필 뚜껑을 열며 말을 마쳤다. ‘참고인이라는 단어에 악센트가 들어간 것을 모를 리 없는 민규가 입술 끝을 가볍게 깨물며 손을 뻗어 열쇠를 쥐었다. 수갑의 연결부에 나 있는 자그마한 구멍에다 열쇠를 밀어 넣어 돌리자 찰칵, 하는 소리를 내며 민규의 손목을 죄고 있던 철제 장치가 떨어져나갔다. 팔을 뻗어 수갑을 회수한 형사가 점퍼 주머니에다 그것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만년필을 들었다. 낮게 가라앉은 공기 위로 민규의 호흡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참고인 진술 시작하겠습니다. 학생 학년 반 이름 말씀해 주세요.”

……2학년 4, 김민규입니다.”

김민규 학생, 본인은 20161241726분에 발생한 윤정한 학생의 투신자살 사건의 참고인으로서 현재 진술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본 형사의 질문에 대하여 진실만을 말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혹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수첩 맨 윗줄에 민규의 이름을 써내려간 형사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고 묻는다. 형사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고 있던 민규는 우연히 시선이 맞닿자 입술을 잘근 씹으며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추위에 건조해진 입술이 바싹 말라 파고들어간 잇새를 경계로 갈라지는 것을 느끼며, 민규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선 동아리 내 민규 학생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진행 팀이었어요, 순영이랑 같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슬레이트를 쳤고, 주로 촬영 세트를 정리했어요. 조금 적응된 후에는 쌤을 도와서 촬영 기자재를 구하고, 그걸 또 학교로 날라 오고. 그런 것도 했죠. 순영이보다는 제가 힘이 세니까. 그리고 또대본 인쇄, 포스터 인쇄 같은 것도 했어요. 늘 행정실이나 교무실을 들락날락 거려서 교내에서 좀 유명했죠. 사고치는 애들 같았는데 어디서 상도 타 오고 하니까 쌤들도 나중에는 넘어가시더라고요.”

권순영 학생의 권유로 동아리에 입부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 맞아요. 순영이가 하도 부탁을 해서 속는 셈 치고 들어갔었는데, 너무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지금도 후회는 안 해요.”

적응이 꽤 빨랐던 모양이군요. 부원 가운데에서도 피해자와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였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수첩 위로 시선을 꽂은 채 동아리 내 특이사항 없음.’이라고 써 넣은 형사는 곧 수첩에서 펜을 떼며 민규를 바라보고 두 번째 질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 정자세로 앉아 있던 민규는 그의 입에서 피해자라는 단어가 흘러나올 때부터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형사의 말이 끝을 맺자 가지런히 뒀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비틀린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던 그는, 곧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한층 깊어진 시선이 형사를 응시하며, 민규의 입이 열렸다.

 

 

 

어떤 게 듣고 싶으세요?”

가능하면 전부 다.”

저랑 정한이 형은…… 일단 형 동생 사이예요. 지난 8월에 영화제 마치고 형이 대본 작업 시작하면서부터 더 친해졌어요. 사실 제가 가서 막 들이댔거든요. 맨날 옆에 붙어서 말 걸고, 물어보고, 뭐 그런 거요. 그랬는데 형이 귀찮아하지도 않고 늘 대답해주고, 저한테도 마음을 열어 줘서 그건 너무 고마웠어요.”

 

 

 

행복하고 즐거웠던 과거를 되짚어 늘어놓는 민규의 표정이 옅은 미소를 머금어 밝았다가, 금세 어두워지며 입을 꾹 닫았다. 굳게 다물린 입은 한참동안 열리지 않았다. 형사는 만년필 뚜껑을 수첩 위에 간헐적으로 두드릴 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고, 민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 안에서 모래처럼 까끌하게 굴러다니는 말들을 겨우 되삼켰다. 그의 입 꼬리가 당겨져 자조처럼 작게 웃음이 흘러나온 뒤에야, 집어삼킨 말들이 한숨처럼 뱉어졌다.

 

 

 

그치만……, 제가 형한테 해서는 안 될 짓을 많이 했죠. , 말씀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시작하세요.”

형이, 고등학교 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어요. 제가 그걸 알고 있었거든요, 알면서도, 형을 좋아해 버린 거죠. 그러니까, 형 동생 사이를 넘어서, 더 깊은…… 마음이 들었어요.”

피해자를, 사랑했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렇게 표현을 했었고, 형은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했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그냥 순수하게, 형을 더 많이 알고 싶었어요. 더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사람이…… 착하고, 너무 예쁘잖아요. 그랬는데, 형이 안 받아줄 줄 알았으면서도, 한 번 거절당하고 나니까 그때부터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독해졌다고 해야 하나, 마음이 좀 변질된 거죠.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가져야겠다, 그런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곁에서 감싸주는 척 하면서 둘만 있을 때 형을 많이 힘들게 했어요. 옛날 일도 건드려 보고, 막무가내로 고백도 해 보고, 교실도 들어 엎어 보고, 형한테 손도 대 보고…….”

지금 그 진술은 민규 학생 본인이 피해자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는 소립니까?”

, 딱 한 번. 촬영을 가장해서 형을 좀 과하게 때린 적이 있었어요. 생각보다 얼굴에 상처가 많이 남지는 않아서다른 형들이나 친구들도 다 쉬쉬하고 지나갔어요.”

알겠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확인이 힘들 것 같겠군요.”

 

 

 

형사는 입 꼬리를 당겨 쓰게 웃고, 만년필을 들어 수첩 위에 폭행 사실 시인, 증거 X’라고 써 넣었다. 오늘 새벽에 정한의 화장이 진행되었으니 상처를 찾으려면 한참 전에 찾았어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민규는 또 한 번 입술을 깨문다. 기어이 갈라진 입술이 터져 잇새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교복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자꾸만 진동했으나, 그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대본 작업 막바지였을 때니까, 아마 그래서 영화 내용이 형 상황이랑 많이 비슷했던 것 같아요. 형 딴에는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겠죠. 하지만 형이 먼저 마음을 닫아 버렸어요. 저를 배우로 컨택한 것도 형이었으니까, 일단은 둘이 해결할 일로 본 거겠죠. 형이 항상 하는 말이 있었어요. 네가 그만두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죽일 거야, 라고요.”

자살에 대한 암시인가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저는 형이 그렇게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형은 모든 걸 계획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그래서 영화를, 이런 식으로 흘러가게 만들어 뒀겠죠. 이 영화가 형의 유서 같은 역할을 하도록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김민규 학생, 혹시 김재연이라는 분에 대해서 아는 게 있습니까? 2년 전에 이 학교 다니다가 정학 처분이 내려진 걸로 아는데요.”

……저희 형이에요. 2년 전, 정한이 형 사건의 주동자였던.”

당시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형이 사라지고 나서 알게 됐어요. 저는 그때 중학교 3학년이었으니까. 정한이 형도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걸 아주 멀리서만 봤죠. 그때는 우리 형이 많이 원망스러웠어요. 한 번도 얘기 나눠본 적 없었지만 정한이 형한테 그냥 미안하기만 했고. 형은 잠수를 탔다가 자살한 상태로 발견됐어요. 시간이 지나서야 죄책감이 컸겠죠.”

 

 

 

저는 어쩌면지금 형이랑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는지도 몰라요.

체념한 듯 담담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진술을 이어간 민규는 마지막 말을 뱉고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것은 명백한 고소(苦笑), 또는 자조. 형사는 수첩 가득 민규의 진술 내용을 요약해 적었고, 다시금 적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만년필이 종이에 닿는 소리만 사각사각 울렸다. 민규는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형사를 바라보다가, 그가 만년필 뚜껑을 닫고 서류를 챙길 무렵 수갑이 채워져 있었던 왼손을 내밀었다. 형사님, 하는 소리에 형사가 고개를 돌렸고, 민규의 얼굴에 묻어난 웃음은 어쩐지 아프게 느껴졌다.

 

 

 

왜 부릅니까, 김민규 학생.”

지금 잡아넣으세요. 지금 아니면, ……안 될 거예요, 아마.”

 

 

 

형사는 헛웃음을 짓고, 그대로 등을 돌려 출입구 앞에 섰다. 연락하기 전까지 자택에서 기다리세요, 당신 아직 용의자 아닙니다. 딱 잘라 내뱉은 형사는 곧 고개를 슬쩍 돌려 민규를 곁눈질하다가,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김민규는, 한참동안 같은 표정을 하고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계속해서 잘게 떨리고 있었다.

 

 

 

 

 

 

 

**

 

 

 

 

 

 

 

되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내가 서 있는 곳은 경찰서 근처, 한강을 가로지르는 어느 다리 위였다.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는 탓으로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 위에 걸친 패딩이 무색하도록 교복 셔츠 안까지 뚫고 들어왔다. 내가 집에서 죽은 듯이 숨어 있던 삼 일 동안은 줄창 눈이 내렸었다고 했다. 지금은, 날이 맑다. 푸르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이 부셔 관뒀다.

 

저 위에, 형이 있겠지.

다시는 떠올려서는 안 되는, 형의 이름을 가만히 그리고 있으니까 우연처럼 4일 전형이 자살하기 하루 전날 나눴던 대화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민규야.

 

형은 그 날도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내 이름을 나지막히 불렀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형을 마주했다. 늘상 눈물이 맺힌 채 상처받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던 형은, 그 날 짙은 밤색의 눈동자 안에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조금 웃는 것도 같이. 항상 똑같이 네, , 하고 대답한 나에게 형은 별안간 그런 말을 했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사랑을 하지 못할 거야.

왜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 생각이 날 테고, 내 생각이 나면 넌 아파질 테니까.

왜 그렇게 단정 지어요, 내가 영원히 형만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형의 음성을 따라가듯, 내 목소리도 그날따라 낮게 내려앉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형은 가만히 듣고 있기에 너무도 마음 아픈 말만을 이어가서, 나는 차마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고 형의 앞에 가 섰다. 내려다보는 형의 얼굴은 어제와 같이 예뻤다. 그런데 오늘은머리를 묶고 있어서, 더 예뻤다.

 

 

 

민규야, 네가 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거짓말 마요.

형은 있잖아, 네가 좀 더 기다리면, 나를 기다려 주면……, 노력해 볼 생각도 있었어.

……거짓말.

근데 네가 날 기다려주지 못했잖아. 그래서 너한테 그만두라고 하는 거야.

…….

형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힘들어.

 

 

 

아팠다, 마음 한켠이 묵직하게 아렸다. 누가 본대도 아프게 웃는 얼굴로 날 올려다보면서 그런 말을 하는 형이 낯설 정도로 슬퍼 보여서,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등 뒤로 손을 숨겨 세게 주먹을 쥐어 보았다. 손바닥 위로 깎지 않은 손톱이 깊게 파고 들어가는 감촉이 선연했다. 그래서 제가 옆에 있어 주잖아요. 늘 하던 맥락의 말을 뱉는 게, 그 순간만은 모래를 삼키는 것처럼 힘겨웠다. 이런 낯선 감정을 느끼는 와중에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본 형은 너무나도 예뻤다. 그래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형은 머리 묶는 게 더 예뻐요하고 말해주기 위해서.

하지만 형은 또 한 번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나는 왠지 그 이름을 듣는 순간이 더 이상 없을 것 같아서 조급해졌다. 형에게 제일 해 주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한참을 찾다가 툭 던지듯 뱉은 것은 형의 이름. 사실은, 형의 이름만큼 간절하게 담고 싶은 것이 없었다. , 정한이 형, 하고 대답하며 형의 눈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형의 시선이 나를 향해 또렷한 화살표를 그리고 있었다.

 

 

 

네 형 이름이잖아, 네 배역.

…….

넌 형과 다르길 바랐는데, 내가 마지막에 바꿨어.

정한이 형,

네가……, 형을 너무나도 똑같이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형은, 아마 그 말을 남기고 음악실을 빠져나갔었지.

파란 하늘 위로 정갈하게 머리를 묶은 형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다가 곧 완전히 사라졌다. 나를 끝없는 회상에서 끌어올려 준 것은 주머니에 든 작은 기계장치.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진동에 무감각해 질만 하건만 오히려 더 생경하게, 형을 더 이상 추억하면 안 된다는 듯이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교각 난간에 두 팔을 걸친 채,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 세 통, 읽지 않은 메시지는 열 개가 넘게 쌓여 있었다.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서 문자메시지 보관함으로 들어갔다. 순영, 승철이 형, 승관의 문자가 차례로 쌓여 있었다. 가장 이른 시간에 도착한 순영의 문자부터 눌러 본다. [김민규전화받아] 하고, 띄어쓰기가 전혀 되지 않은 문자에서 순영이 많이 화가 난 것이 선연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냥 답장을 생략하고 승철이 형의 문자를 눌렀다. [민규야 전화 좀 받아 봐] 로 시작해서 [형이랑 얘기 좀 하자] 로 끝나는 일련의 문자, 그 속에서 승철이 형은 참 여전하게도 다정한 투였다. 나는 승철이 형에게도 답장을 생략하고, 조금 전에 마지막 문자를 보낸 승관의 이름을 눌렀다. 문자를 카톡처럼 보내는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못하고, 승관은 저 혼자 대여섯 통을 보내 놓았다. 승관에게는 왠지 답장을 보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양 손 엄지를 액정 위에 댔다.

 

 

 

[김민규 어디야?? 전화좀받아!!]

[민규야]

[너 살아는있지?]

[문자 답장이라도해라]

[너 이 문자 보면 나한테나 승철이형한테 바로전화해 알겠어?]

[야 김민규 너 진짜 죽었냐?? 답장 좀 하라고!! ㅠㅠㅠㅠㅠ]

 

 

 

누가 봐도 부승관이겠구나, 싶은 말투에 희미하게 웃음이 샜다. 뭐라고 문자를 보내야 승관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를 잠깐 동안 고민하다가, 나는 곧 그것을 때려치우고 내 맘대로 자판을 눌렀다. 몇 번을 썼다 지운 끝에 남은 글자는 단 두 자, 미안. 하지만 나는 그 짧은 단어가 내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생각해, 망설임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문자가 전송되었다는 알림이 뜨자, 나는 휴대폰을 손에 꾹 쥐었다가 반항하듯이 손을 폈다. 내 악력에 의지했던 기계장치가 보도블록 위로 곤두박질친다. 용케도 배터리가 분리되지 않은 채, 그것은 여전히 승관과의 문자 대화창을 띄워 놓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가, 바닥에 초라하게 떨어진 휴대폰을 돌아다보았다. 고요하던 그것은 곧 시끄럽게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미안.”

 

 

 

나지막하게, 뱉어 봤다. 승관이 내 심정을 이해해 줬으면 했다. 푸른 하늘이 쏟아질 것처럼 파래서, 나는 왠지 더 서러워 졌다. 목적지를 상실한 채 옮기는 걸음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지기를 반복했다.

 

 

 

미안, 했어요.

입 속에서 모래처럼 돌아다니는 말은 결국 끊임없이 목 뒤로 삼켜지고, 삼켜지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에는,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없어졌으므로.

내가…… 없앴으므로.

 

 

 

 

 

 

 

 

 

 

#8. 2학년 8반 이지훈

 

 

 

 

 

사건이 종결되었다.

민규는 2심까지 올라갔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고 했다. 직접 연락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복도를 걷다 마주친 민규의 담임이 내게 말해 준 것이다. 원래 정학이었던 그의 징계 수위는 며칠 전에 퇴학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전원우가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곧 사직서를 낼 것이라고, 마치 비밀 애기를 하듯이 우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착잡한 표정을 한 승철만이 동아리 실을 나가는 그에게 조심히 가세요, 하고 대꾸해 줬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정한의 발인 이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전원우가 떠난 후 남은 동아리 부원들은 방학에도 아랑곳 않고 꾸준히 동아리 실에 모였다. 주로 동아리의 존속 여부에 대한 얘기를 매일매일, 아주 오랫동안 나누었다. 늘 결론은 나지 않았고, 끝에는 행복했던 날들을 추억하다가 되레 슬퍼져서, 서로 말을 줄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했다. 결국 동아리를 폐쇄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귀결된 것은 나와 순영, 승철이 참석한 바로 오늘. 순영은 아쉬움이 큰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든 동아리를 잘 꾸려 보고자 했던 마음을 아는 나로서는 별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하지만 핵심 인물들이 듬성듬성 빠진 데다 제대로 낙인이 찍혀 버린 동아리가 앞으로 잘 굴러가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날 내 옆에서 입속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던 순영은 다만 승철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이 곧 입을 다물었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고서 고개를 숙인 채 먼저 동아리 실을 빠져나갔다. 승철은 책상 위에 걸터앉아 순영이 나간 출입구를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패딩 주머니를 뒤적여 자그마한 열쇠 하나를 꺼낸 그는, 내게로 그것을 내밀었다. 3개월 간 그 혼자만이 사용해 왔던 편집실 열쇠였다. 지훈아, 반쯤 잠긴 그의 목소리에 문득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영상…… 네가 알아서 처리해. 형 먼저 갈게.”

 

 

 

그는 내 손바닥 위로 열쇠를 떨어뜨리고, 입술을 콱 깨물며 동아리 실 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입술을 깨물어 본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서, 조심스레 열쇠를 꽂아 돌리고 편집실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왠지 이 안에, 정한의 영혼이라도 담겨 있는 것만 같아 절로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편집실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은 취조실과 같이 쪽창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이고, 전체적으로 어두우며, 스위치를 누르면 낡은 형광등이 건진지가 다 된 손전등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빛을 뿌렸다. 멍하니 출입구에 서서 스위치를 달칵달칵 움직여보다가, 기계처럼 걸음을 더 옮겨 컴퓨터를 켰다. 승철이 미리 넣어 둔 것으로 보이는 카메라 메모리 카드가 본체에 꽂혀 있고, 컴퓨터는 부팅되기가 무섭게 그것을 읽어 왔다. 폴더 안에 저장된 영상은 대략 사오십 개 정도인 것 같았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마우스를 움직여 폴더 내부에 줄지은 영상들 위로 푸르게 블록을 씌웠다. 모든 영상이 선택된 상태가 되자, 이내 키보드 위로 손을 내려놓는다. Shift 키와 Delete 키 위로 손가락이 느리게 얹어지고, 나는 힘 줘 그것을 눌렀다.

 

 

 

[이 파일을 완전히 삭제하시겠습니까?]

 

 

 

마치 나를 위협하듯이, 낭떠러지로 내몰 듯이 다시금 물어오는 경고 창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이며 Enter 키를 눌렀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영상들은 흔적 없이 날아가 버렸다.

 

 

 

……이제 안녕.”

 

 

 

텅 빈 편집실에서, 한참동안 닫고 있던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어 본다. 건조한 목소리가 마르게 편집실 안으로 퍼져 잔향을 남겼다. 나는 컴퓨터를 종료시키고, 마이 주머니 안에 불편하게 접혀 있던 종이쪽지를 꺼내어 느리게 펼쳤다. 사건이 종결된 직후에, 정한의 납골당을 다녀 간 젊은 형사가 유리 문 틈에 꽂아놓고 간 것이었다. 공책을 찢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 위에는 낯익은 필체가 얹혀 있어서, 나는 황급히 그것을 뒤집어 키보드 옆에 내려놓았다. 기계 특유의 소음을 내며 돌아가던 컴퓨터가 완전히 꺼지자 내부는 금세 어두워졌다. 형광등이 곧 나갈 것처럼 머리 위에서 깜빡거린다. 나는 손에 쥐고 있어서 뜨끈뜨끈해진 열쇠를 편지 위에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쪽에서 문을 잠근 뒤에 그것을 닫고 동아리 실로 다시 되돌아왔다.

다시는, 그 누구도 편집실로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문 앞에 서서 길게 한숨을 뱉는데, 내 뒤통수로 익숙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언제 왔었는지도 모르게,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두드리던 승관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나.”

?”

학년 부장이 너랑 나랑 조퇴하래.”

 

 

 

오늘, 49재잖아. 정한이 형. 너도 같이 갈 거지?

휴대폰 화면 위로 시선을 꽂은 채 띄엄띄엄 끊어 내뱉는 승관이, 어떤 심정인지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자신이 책임져야 할 때면, 마치 어린 애처럼 후나, 하고 나를 부르고는 했다. 나는 굳이 티를 내지 않고, 다만 승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먼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승관이 같이 가하고, 인위적으로 톤을 끌어올리며 내게 걸음을 맞추었다. 동아리 실 열쇠는 내 패딩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손에 쥔 채 등 뒤로 손을 뻗어, 손바닥이 보이도록 한 번 펼쳤다가 다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짤랑, 하는 소리가 우리 둘 뿐인 복도에 가볍게 울렸으나나와 승관 중 어느 한 사람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서 사람이 죽었다.

우리 학교에서, 사람들이 죽었다.

 

 

 

 

 

 

 

 

fin. 


안녕, 윤정한이야.

수신인이 부정확한 편지를 쓰는 건, 너희들이 나를 아프고 슬프게 기억할 것 같아서야. 누구든지 한 사람은 이 편지를 읽게 되겠지. 그럼 이건 그 사람을 향해 쓴 게 될 테니까, 그냥 그런 걸로 해 둬. 난 이 편지가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걸 원하지 않거든.

 

내가 쓰고 내가 연기한 세 번째 영화, <가자, 나락으로>는 어쩌면 내 얘기일 수도 있고, 내 얘기가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통해서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담은 건 맞아. 2년 전의 일에 대한 흉터 위로, 전혀 관련이 없는 줄 알았던 민규가 남긴 상처를, 더 가만히 놔둘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이게 너희들에게 도움을 청한 수단이 됐을지도 몰라. 미리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해.

사실 나는 너희 모두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어. 너희들이 좀 더 내 대본에 대해서, 내 이야기에 대해서 궁금해 했으면 했는데, 아마 다들 놀랐던 걸 거야. 연기를 한다고 한 것도 나름대로 상징이었고 암시였는데, 잘 전달되지 못한 점은 지금도 아쉬워. 마지막으로 내가 지훈이에게 전화를 걸었던 건, 지훈이와 주고받은 문자가 내 최근 통화기록 맨 위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야. 이 편지를 쓰기 직전 내가 느꼈던 극단의 공포 속에서 전화를 걸 사람을 고른다는 것 자체가 생각도 나지 않았었어. 결국 지훈이는 전화를 받지 않더라고. 오래 전 내 전화를 받지 않던 지수가 떠올랐어. 나는 다만, 그 둘이 큰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해. 이것도 어쩌면 내 운명일지도 몰라.

나는, 있잖아,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민규와 원우 쌤의 처벌을 원하는 건 아냐. 만약 원했다면 죽지 않고 필사적으로 버텼을 거야. 아마 그들이 처벌을 원한다 해도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될 거야. 나는 그저, 두 사람이 죄책감을 갖고 살기를 바라. 이 편지의 발신인이 될 너희들은 행복했으면 좋겠어. 민규가 이 편지를 볼 일이 없기 때문이 덧붙이자면, 나는 민규를 좋아했기 때문에 민규가 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너무 괴롭지는 않게. 나는 민규가 날 따라오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누가 됐든 민규를 꼭 잡아줬으면 해.

 

다들 고마웠어. 너희들이 남은 세상에는 세찬 겨울이 지나고 곧 새 봄이 올 거야. 내가 걷게 될 길에도 봄이 오겠지. 여기는 항상 봄이었으면 좋겠어. 혼자서 이겨내기 힘들 때는 꼭 서로에게 의지하길 바라. 나는, 여기서 행복하게 지낼게. 행복했던 우리를 잊지 말아줬으면 해.

안녕, 나의 나락은 낙원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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