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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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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노리플라이, 타루 - 조금씩, 천천히, 너에게

    여자친구 - 물들어요

 

 

 



반짝반짝 두근두근

[쿱정전력 별이 아름답네요]

 

 

 

 

 

w. (@HYEMM_SVT)

 

 

 

 

 

 

 

 

 

 

네에, 승철 씨. , , 이제 잘 거예요. 공부요? 맨날 하던 건데요, 그럼 잘 돼 가죠. 으응, 너무 걱정 마요. , 아 진짜, 제가 어린 애도 아니고. 안 잡아 가요, 걱정 마. , , 지금은 어디예요?

 

 

 

, 저 지금은 영국이에요. 이틀 뒤에 스페인으로 가려고요.

 

 

 

서울 변두리 달동네, 끝없이 늘어선 계단을 숨이 차도록 밟고 밟던 정한이 마지막 계단을 오름과 동시에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귀에 딱 붙인 휴대폰 아래 마이크를 막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것은 자꾸만 저를 걱정하려 드는 승철을 위한 일종의 연기인 셈이다. 조금 전에 도착해서 점심 먹을 시간을 놓쳐 버렸다는 승철의 은근한 투정에 몰래 미소 지으며, 정한은 손목시계를 곁눈질하고서 머리를 굴렸다. 아마 영국은 한 시 반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은 지금 열한 시 반. 정한의 머리 위로 달빛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밥 거르면 안 돼요. 승철 씨 영국 가면 피시앤칩스 먹어 본다고 했었지 않아요?”

, , 맞네, 그랬었죠? , 역시 사람은 정한 씨처럼 똑똑하고 봐야 돼. 제가 그럼 점심으로 먹어보고 어땠는지 꼭 말해 줄게요.

네에, 승철 씨 후기 기다리고 있어야겠다.”

, 뭐야. 아깐 곧 잔다면서요. 전화 끊고 바로 안 자면 내가 혼낼 거예요, 알았죠?

 

 

 

……알게써요오오. 승철이 단호하게 반문한 탓에 입술을 삐죽 내민 정한이 누가 들어도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다른 무엇보다 전화를 끊어야 할 타이밍이 다가오는 탓에 맘이 쓰린 까닭이다. 입술을 달싹이던 정한은 고개를 들어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보름이 다가오는 모양인지 통통하게 차오른 달이 낡은 가로등보다도 더 밝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겠다는 승철을 붙잡은 정한의 입 밖으로 오늘도 실없는 문장이 흘러나왔다.

 

 

 

, , 승철 씨.”

, 왜요?

, 여기 있잖아요, 오늘 달이 되게 예뻐요.”

, 진짜요? 그럼 사진 찍어서 보여 줘요. 이번에는 꼭 보내 줘야 돼요, 알았죠? 그럼 나 진짜 밥 먹으러 갈게, 이따 봐요!

 

 

 

늘 그랬듯이 사진을 찍을 것을 당부하며 마지막 인사를 남긴 승철에게 정한은 휴대폰 액정 위로 손바닥을 펴 휘휘 흔들었다. 아마 식당을 수소문하기 위해 발걸음을 막 옮길 승철 또한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휴대폰 위에다 손을 흔들 것이었다. 그래, 그 웃음에는 파란 하늘이 담겨 있고, 눈이 부신 달빛이 묻어 있고, 승철이 좋아해 마지않는 별빛이 물결치고 있겠지. 멀리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달을 올려다보던 정한이 금세 뻐근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천천히 발을 떼었다.

 

 

 

오늘도 실패했어, 오늘도. 윤정한 멍청이 아냐?”

 

 

 

장난스레 자책하는 말끝에 울음이 섞여들 것 같아서, 정한은 어깨 위에 무겁게 걸린 가방 끈을 꾹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작게 흐르는 한숨이 공기 중으로 빠르게 섞여 들었다. 달동네 꼭대기, 조그마한 옥탑방으로 향하는 정한의 걸음 뒤로 달빛이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가난한 내가 반짝반짝한 승철 씨를 사랑해서, 수백 번은 읽고 또 읽었던 시구를 농담처럼 중얼거린 그가 이내 자조하듯이 웃음을 흘리고 그 자리에 다시금 멈춰 선다. 휴대폰을 꺼내 들어 카메라 어플을 켜고, 한 뼘이 조금 안 되는 자그마한 프레임 안으로 달을 밀어 넣어 본다. 카메라 사양이 좋지 않아 달빛이 이리저리 산란되는 게 썩 보기 좋은 건 아니었지만, 중얼중얼 혼잣말을 뱉으면서도 승철에게 사진을 전송하는 정한의 입 꼬리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살짝 말려든 것도 같았다. 액정 위로 빠르게 움직인 손가락이 덧붙이는 문장 몇 개를 만들어냈지만, 정한은 다시 옥탑방 쪽으로 발을 떼며 그것을 모두 지웠다. 새로이 만들어진 말들은 늘상 반복되던 것들의 반복. 입술을 감쳐문 그가 열쇠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마당에 버려진 낡은 평상 위에 올려 두고서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둠 가운데 밝게 빛나는 채팅방에는 정한이 보낸 두어 장의 달 사진과, 그 아래 [사진 이상하죠ㅠㅠ][그래도 달이 예뻐요][그렇죠?] 하는 말들이 덧붙여져 있었다. 평상 위로 무거운 전공 책이 든 가방을 뒤엎고 나서야 열쇠를 찾아낸 정한이 손등으로 잘게 땀방울이 맺힌 이마 위를 쓸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액정 위로 그가 보낸 말풍선 옆의 숫자 1이 노랗게 떠 있다가 지우개로 지운 듯이 사라졌다. 쏟아 부은 것을 하나하나 챙겨 넣으며, 그는 승철이 제 꾸준한 달 얘기의 진의(眞意)를 모르길 바랐다. 액정 위로 승철의 말풍선이 통통 튀어 올랐다.

 

 

 

[와 달 ㅠㅠ 진짜 예뻐요 서울 가고 싶다..]

[거기는 안 더워요? 여기는 비가 와서 그런지 해 지면 쌀쌀해질 것 같아요]

[너무 걱정은 마요 조심할게요 ㅋㅋㅋㅋㅋ]

[이건 어제 찍었던 별 사진이에요 벨기에에서 ㅋㅋㅋ 벨기에 와플 짱 맛있었어요!]

[별도 예쁘죠?]

 

 

 

열쇠를 왼손에 꾹 쥔 채 가방을 한 쪽 어깨로만 둘러메고서 굽혔던 허리를 일으킨 정한이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액정을 내려다보며 작게 키득였다. 승철은 언제든지 말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말투로 문장을 구성해 왔었다. 그가 보낸 사진 위로 까만 하늘에 점찍은 듯 반짝이는 별들을 엄지로 괜히 문질러 본 정한이 조금 느려진 속도로 자판 위를 톡톡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별이 아름답네요, 하는 문장이 말풍선에 담겨 액정 위로 퐁 튀어 올랐다. 홀드 키를 눌러 화면이 까맣게 죽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은 정한이 그제야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츠메 소세키에 관한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달이 예쁘네요, 당신을 사랑해요.’ 라는 뜻으로, 그리고 별이 예쁘네요, 당신은 내 마음을 모르겠죠.’ 라는 뜻으로 번역했다는, 듣기만 해도 마음이 간질간질 떨리는 그런 이야기.

지난달에 만나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승철과 연락을 주고받는 동안 꾸준히 그런 말들을 남기고 있는 정한은, 오늘도 어제처럼 혼자 보내야 할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언제쯤 고백을 하겠냐고 늘 저를 자책하면서도, 지난달에 만났을 때부터 쭉 사랑에 빠져 버린 제 맘을 승철에게 들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을 안고서.

 

 

 

 

 

 

 

**

 

 

 

 

 

 

 

그러니까, 정한이 승철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5월 독일에서였다.

 

 

티오Table of Organization, 편성표라는 뜻이지만 주로 구직자들이 사람을 뽑다.’ 라는 뜻으로 씁니다가 늘 부족해서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3년 연속으로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나니 공부가 한순간에 딱 질려버린 탓이었다. 미친 척 하고 그날 부로 짐을 꾸렸다. 원래대로라면 시험에 합격한 이후 떠나려고 했던 독일 여행에 대해 정한의 부모님은 별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뒀다. 아마 제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로 들어가며 재밌게 놀고 올게, 했던 그의 눈가가 젖어있던 걸 아셨던 것일 테다. 생각보다 맛이 없었던 기내식을 푹푹 퍼 먹으면서 조금 울었던 것도 같았다. 대학교에서 수석 소리 듣던 건 전부 부질없다는 걸 독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겨우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울음을 삼킨 탓에 목이 잔뜩 멘 채 정한은 잠에 들었었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누가 잡아가도 모를 만큼 숙면을 취하고 있어서 승무원이 그를 깨워 줬었다. 어딘가 결연한 듯이 여행 가이드북을 손에 꾹 쥐고 게이트를 빠져나온 그의 첫 번째 행선지는 뒤셀도르프였다. 처음 여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베를린이나 뮌헨보다도 이곳이 먼저 눈에 들어온 까닭이라면 몇 가지를 들 수 있었다. 현지에 사는 한국인이 많아 여행하기가 편할뿐더러 국제 상업 도시인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한의 마음을 잡아 끈 것은 뒤셀도르프 소재의 톤 할레(Tonhalle)’였다. 클래식 연주회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콘서트가 열리는 이곳에 대해 음악적으로 끌린 것은 아니었고, 재건되기 전의 톤 할레에 세계 최대 규모의 천문대가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었다. 단지 그런 이유로 독일 여행을 계획한 것에 대해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측근들이 실없지 않냐는 말들을 똑같이 뱉고는 했지만, 다음 생에는 꼭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유년기의 다짐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는 정한으로서는 이곳이 최적이었다.

 

그래서거의 즉흥적으로, 아주 패기롭게 가이드북 하나만 든 채 뒤셀도르프 시내에 들어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 뭐야. 여기 아까 봤던 것 같은데.”

 

 

 

보기 좋게 길을 잃어버린 꼴이 되어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주위에서 다들 걱정할 때 큰소리를 뻥뻥 쳐댔던 정한은 과거의 자신을 자책하며 세 번째로 같은 골목에서 빠져나오고 나서 도로가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가이드북에서는 분명히 이 쪽 골목으로 들어가라고 했는데…….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퍽 아기자기한 그림체로 그려진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죽죽 그어 대던 정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여행 중인 한국인이라든가 현지에 사는 한국인이 지나갈까 싶어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따라 붙여 보았지만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이 몇 명 지나가지도 않았고, 그마저도 모두 출근하는 것처럼 정갈하게 옷을 차려 입은 누가 봐도 서양인들이었다. 자꾸만 터져 나오는 한숨을 애써 막지 않고 한참을 도로가에 앉아 있던 정한은 다리가 저려 올 때쯤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요금제 변경하고 올 걸……. 잔뜩 울상을 지은 채 가이드북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시야에, 문득 좀 전에도 이 길을 지나면서 스쳤던 것 같은 남자가 들어왔다. 유난히 검은 색 머리카락에 유난히 흰 피부, 딱 떨어지는 흰 셔츠에 차콜 색 슬랙스를 걸친 그는 셔츠 소매를 두 번 정도 걷어 접고서 목에 건 카메라를 들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피사체를 찾는 것 같았다. 사진작가인가. 작게 중얼거린 정한은 잘생겼네, 하는 뒷말이 나오려는 것을 급하게 입술을 깨물어 삼키고서 제 등 뒤를 두리번거렸다. 하필 이 타이밍의 도로가에는 저 남자와 그 둘 뿐이었다. 정한은 가이드북을 쥔 채 큰 결심이라도 한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봤자 그의 등 뒤에서 소심하게 손가락을 뻗어 어깨를 두드리고서 황급히 손을 숨겨 버렸지만.

 

 

 

……, 저기, , 익스큐즈 미.”

“Yeah, what’s the matter with you, sir?” (, 무슨 일이세요?)

, 그러니까, 캔 유……, 아 뭐였지?”

 

 

, 혹시 한국인이시면 편하게 하세요. 저도 한국인이거든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이름 대면 대개 감탄하는 대학교의 국어교육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한은 영어 수업도 곧잘 따라가는 명석한 학생이었으나, 안타깝게도 3년 간 내뱉지 않았던 기초회화가 급격히 퇴화된 탓에 영어 단어가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뒤섞였다. 목소리를 잔뜩 집어삼킨 채 한국말로 사족을 덧붙이며 누가 들어도 한국 사람이다 싶은 느낌으로 영어를 내뱉은 그에게, 눈앞의 남자는 입 꼬리를 당겨 웃음을 터뜨리며 별안간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정한의 눈동자가 흔들리다 못해 지진이 난 것처럼 요동치는 것을 마주하고 있던 남자는 이내 호탕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혹시 저 외국인인 줄 아셨어요? 그런 눈친데, 딱 보니까.”

, , 네에……. , 뭐랄까, 되게 외국인같이 생기셔서…….”

그런 소리 많이 들어 봤어요. 그치만 전 혼혈도 아니고 진짜 토종 한국인이에요. 고향은 대구고. 이제 편하게 물어 보세요, 제가 아는 한에서는 가르쳐 줄게요.”

 

 

 

조금 어색한 듯하면서도 유한 투로 대꾸하는 남자의 말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정한이 손에 쥐고 있던 가이드북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그 짧은 사이에 손바닥 위로 땀이 배어나와 허리춤에 손을 문질러 닦은 정한이 펼쳐진 가이드북 위로 지도에 그려진 궁전 모양의 건물을 손으로 짚었다. 저 여기 가려구요, 톤 할레. 근데 길을…… 자꾸 잃어버려서요. 금세 또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어뜨리는 정한에게, 남자는 양 볼의 보조개가 깊게 패도록 해사하게 웃어 보이고 가이드북을 덮어 제 옆구리에 꼈다. 멀거니 저를 바라다보는 정한과 시선을 맞추며, 남자는 마치 어느 영화에서나 나올 장면처럼 그렇게 내뱉었다.

 

 

 

따라 와요, 톤 할레라면 저도 자주 가는 곳이거든요. 이렇게 된 김에 오늘 하루 제가 가이드 해 주면 되겠다, 그죠?”

? ,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릴게요.”

 

 

양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꾸벅 숙인 정한에게 또 한 번 호탕하게 웃어 준 남자는, 가이드북을 아예 제 카메라 가방 안으로 밀어 넣고서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정한은 일단 이름도 모르는 마당에 고향이 대구인 것만 아는 이 남자를 따라가게 된 것이었다. 남자가 이끄는 길은 가이드북에 그려진 약도와는 정반대였는데, 얼마 안 가 정한이 그렇게나 찾던 톤 할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하고 웅장한 크기면서도 지붕처럼 얹어진 돔이 유려한 곡선을 그려내는 건물의 외양에 정한의 입이 천천히 벌어져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남자는 입구 앞에 서서 한참동안 위를 올려다보며 감탄해 마지않는 정한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다가, 이내 손가락을 들어 그가 제게 처음 말을 걸었던 것처럼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 저기, 안 들어갈 거예요? 웃음기 섞인 물음에 정한은 고개를 내저었으나,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야 끄트머리로 남자가 자꾸만 웃음을 짓는 게 왠지 묘한 기분이 들어서, 정한은 이리저리로 시선을 굴렸다.

 

 

 

아니, 근데 여기 진짜 멋져요…….”

안에는 더 멋질 텐데요?”

역시 그렇겠죠? 근데 정말, 정말로…… 벅찬 느낌이에요. 저 여기 꼭 와 보고 싶었거든요.”

, 진짜요? 보통은 베를린이나 뮌헨에 들렀다가 뒤셀도르프로 오던데, 오늘이 첫째 날이에요?”

, . 저 그, 뒤셀도르프 공항으로 바로 왔거든요. 여기가 예전에는 천문대였다고 해서 죽기 전에 꼭 와 보고 싶었어요. 제가 좀 그런 거에 대한 동경이 있거든요.”

아아, 그러시구나. , 근데 저희 일단 통성명부터 할래요? 일단 오늘 하루는 같이 다닐 텐데 저기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그죠?”

 

 

 

뭐에 홀린 듯 제 얘기를 쏟아 붓기 시작하는 정한의 눈이 빛나는 것을 그 모르게 응시하며, 남자는 먼저 한 발을 뻗어 계단 위를 밟았다. 어느새 시야 정면으로 들어온 남자의 물음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정한은 등 뒤로 둘러 멘 백팩 끈을 꾹 쥐고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스물여섯 윤정한이에요, 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마저도 남자가 직업이 뭐냐는 식으로 끊임없이 캐묻는 탓에 3년 연속 임용고시에 낙방했다는 것까지 다 말해 버렸지만.남자의 이름은 최승철이라고 했다. 우연찮게도 나이는 정한과 같고, 여행 작가라는 말을 덧붙였다. 보기와 다르게 퍽 낮은 그의 목소리가 두 사람이 막 몸을 밀어 넣은 공연장 내부의 텅 빈 공간으로 울려 퍼졌다. 정한은 남자의 이름승철, 을 입속에서 몇 번 굴려 보다가, 승철 씨, 하고 내뱉어 보았다. 꽤 기분 좋은 울림이 혀끝에서 맴돌다가 사라진다. 생긋 웃는 정한의 손목을 가볍게 끌어당기며, 승철 또한 그의 이름을 담았다.

 

 

 

정한 씨, 여기 안에 분위기 장난 아닌 카페 있는데, 아세요?”

, 검색하면서 본 것 같아요.”

잠깐 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가요, 우리. 제가 사실 여행 다니면서 별 사진을 찍은 게 몇 장 있는데, 그것도 보여 줄게요. 어때요?”

, 진짜요? 가요, 가요!”

 

 

 

별 사진이라는 단어에 다시금 잔뜩 들뜬 정한을 마주한 승철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마냥 차분한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걸음이 팔랑대는 정한에게 맞춰 주려 걸음을 빨리 하는 승철과, 그가 자연스레 잡아 쥔 손목이, 정한은 퍽 기분이 좋아서 그냥 웃어 버렸다.

왠지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아, 그의 웃음 속에는 파란 하늘이 물들어 있으니까. 무심코 떠오른 문장에 제가 놀라 고개를 내저은 정한은어쩌면 그 때부터 승철에게 반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승철은 정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프로페셔널한 여행 작가인 것 같았다. 특히 독일이 사진 찍기에 최적이라며 세 달째 살고 있다던 그는 거의 현지 가이드나 다름없었다. 이쯤 되면 팁이라도 줘야 되는 것 아니냐며 또 눈동자를 굴리던 정한에게 승철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오랜만에 여행하는 기분인데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고서 씩 웃는 승철을 마주하는 게 낯설도록 묘한 느낌이어서 정한은 괜히 잘 묶여 있던 머리를 풀어 다시 묶기를 또 몇 번 반복했다. 여행 첫째 날, 승철의 집 근처에 있다는 자그마한 식당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서 두 사람은 정한의 캐리어를 찾으러 공항 근처 전철역으로 향했다. 어찌 보면 혼자 가겠다는 정한에게 장난스레 길치를 들먹인 승철이 따라 붙은 셈이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지갑을 꺼내어 남아 있는 지폐를 세던 정한은 문득 승철에게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가성비 좋은 숙박시설 같은 거 있어요?

 

 

 

, 따로 호텔 예약 안 했어요?”

, 그런 편이 더 나은 것 같아서요. 계속 뒤셀도르프에 있을 것도 아니고, 베를린 쪽으로 갔다가 다시 여기로 와서 네덜란드로 갈 거거든요. 현지에서 직접 부딪쳐 보려고 했는데, , 사실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 혹시 정한 씨만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잠깐 있다 가실래요? 제가 쓰는 방 말고 다른 방 하나 비어 있거든요. 그래도, 혼자 다니면 좀 무섭고, 그러잖아요.”

 

 

 

일단 말을 던져 놓고서 생각보다 장황하게 이유를 끌어와 덧붙이는 승철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그를 바라보던 정한이 곧 표정을 풀고 입술 새로 웃음을 흘렸다. 승철 씨만 괜찮으면 그렇게 할게요. 진짜, 고마워서 어쩌지. 내일 아침에 제가 더 일찍 일어나서 밥 할까요? 장난스레 덧붙인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쉰 것도 같은 승철이 따라 키득 웃었다. 정한 씨 요리 잘 해요? , 아니요? 뭐예요, 그게. 그럼 승철 씨는 요리 잘 해요? , 아니요? , 진짜. 뭐예요. 시답잖은 대화 끝에 전철이 승철의 동네에 멈춰 서고, 그의 집으로 향하면서도 두 사람은 큰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웃는 일을 반복했다.

 

 

그런 영화 같은 만남이 자연스러워지고 익숙해질 무렵, 타지에서의 시간은 벌써 열흘이나 지나가 있었다. 승철은 4일간의 독일 여행 이후 네덜란드로 가겠다는 정한에게 또 한 번의 가이드를 자처했고, 네덜란드에서도 승철의 여행 작가다운 면모가 그가 찍어 놓은 별 만큼이나 빛나서 정한은 또 몇 번이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 일주일 여행을 계획하고 온 터라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공항 면세점에서 쇼핑을 해도 될 만큼 돈이 남아돌자 정한은 다시금 승철에게 엄지를 세웠다. 승철 씨 진짜 짱이었어요, 하는 말에 머쓱하게 웃는 승철의 등 뒤 창밖으로, 어제부터 내리던 봄비가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정한 씨 비행기 몇 시라고 했죠?”

, 저 두 시 비행기요. 직항이니까 한숨 자고 일어나면 한국일 거예요, 아마. 올 때도 그랬었거든요.”

잠이 되게 많으신가 봐요, 맞죠? 여행하는 동안은 어떻게 그렇게 일찍일찍 일어나셨대.”

, 그야 승철 씨 밥 챙겨 주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장난을 곧잘 쳐오던 승철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정한은 역시나 농담 섞인 투로 대꾸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손에 들린 여권과 그 사이에 끼워 둔 비행기 티켓을 내려다보는 것 같던 승철은 이내 시선을 끌어올리고 제 손을 뻗어 정수리 위로 붕 뜬 정한의 머리카락을 슥슥 빗어 내렸다.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 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 본 정한이 의자 옆에 뒀던 백팩을 당겨 멨다. 웃고 떠드는 사이에 벌써 한 시를 향해 분침이 달려가고 있는 탓이었다. 정한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승철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분신처럼 목에 걸린 카메라를 슬쩍 곁눈질하던 정한은 게이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승철에게 넌지시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의아해하는 승철에게, 정한은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는 못하고 띄엄띄엄 문장을 뱉었다.

 

 

 

아니, . 사진 있잖아요, 사진. 보내 준다면서요. 번호를 알아야 보내 주죠.”

, . 지금 정한 씨 내 번호 따 가는 거예요?”

아니 뭐, , , 아무튼요. 약속은 지켜야 되는 거예요, 알죠?”

알죠, 알죠. 입력했으니까 한국 도착해서 전화 한 통만 줘요. 안 자고 기다릴게요.”

에이, 피곤할 텐데 자야죠. 제가 문자 남길게요. , 이제 가 봐야겠다. 저 들어갈게요, 승철 씨. 여행하는 동안 진짜 재밌었고 고마웠어요!”

조심히 가요, 정한 씨. 나도 정한 씨 덕분에 진짜 재밌었어요. 한국 가서 열심히 공부해요, 내가 한국 들어가면 꼭 선생님 되어 있어야 해요. 알았죠?”

 

 

 

 

, 그러면 한 3년 쯤 뒤에 한국 들어오셔야 하는데?

왠지 아쉬움이 가득 남은 것 같은 승철의 표정을 풀어 보려 농담을 뱉은 정한에 결국 그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애매한 시간 탓에 조금 한산한 공항 게이트 앞에서 승철은 정한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여행하는 동안 늘 반쯤 접혀 있던 정한의 두 눈이 다시금 접혀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승철의 손을 맞잡아 흔들어 준 정한은 정말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승철 씨, 집에 조심히 들어가요. 꼭 연락할게요, 알았죠? 고개를 끄덕인 승철이 문득 등 뒤로 창밖을 돌아다보고 입을 열었다.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여행 마지막 날이고 많이 오는 것도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맞아요, 다행이야.

 

 

 

승철 씨, 저 진짜 들어갈게요. 집에 조심히 가세요!”

, 정한 씨도 조심히 들어가요. 안녕.”

 

 

 

머리 위로 손을 휘휘 흔들며 해맑게 웃어 보인 정한이 게이트를 통과하는 인파 속으로 섞여 모습을 감출 때까지, 승철은 그 자리에 서서 정한이 사라진 방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씁쓸해 보일 때쯤 등을 돌려 공항을 빠져나가는 승철의 손목에서, 엊그제까지 정한의 손목에 걸려 있었던 단색의 끈 팔찌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봄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아, 하루 종일 비를 뿌렸다.

 

 

 

 

 

 

 

**

 

 

 

 

 

 

 

잠에서 깬 정한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승철이 남긴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귀국한 후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일주일 쯤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잠이 덜 깨 오타 가득한 답장이 오지 않는 게 승철 쪽에서 오히려 더 어색하다고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별 사진 이후로 승철은 점심으로 챙겨 먹은 피시앤칩스와 트라팔가 광장의 사진이 차례로 도착해 있었다. 사진 아래에 달린 코멘트를 겨우 반쯤 뜬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정한은 옆으로 돌아누워 휴대폰을 쥐고 자판을 두드렸다.

 

 

 

[일어나보니까 2시네요ㅠㅠ 이게뭐야...]

[승철씨 진짜 제가 보고싶다한거 다 봤네요 그죠... 트라팔가 광장 진짜로 가보고 싶었는데 88]

[7시니까 아마 일어나셨겠죠? 저는 지금이라도 도서관 가려구요ㅠㅠ 공부 안 하면 안 되니까...]

[아침 꼭 챙겨 먹어요 알겠죠? 오늘도 좋은 하루 되기!]

 

 

 

예상치 못한 숙면으로 피로가 풀린 탓인지 잠이 확 깨 오타는 거의 없었다. 고심 끝에 노란 얼굴의 토끼와 초록색 공룡 비슷한 것이 종이 꽃가루를 뿌리고 있는 이모티콘을 골라 보낸 정한은 휴대폰을 뒤집어 베개 위에 두고 몸을 일으켰다. 아마 지금 씻고 나가면 적어도 세 시에 도착……. 난 대체 왜 알람을 끄고 다시 잔 거야! 어제의 다짐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개운한 몸이 괜히 원망스러워 침대 위를 쿵 내려치는데, 별안간 베개 위에 둔 휴대폰에서 짧고 경쾌한 알림음이 연달아 울렸다. 광고 문자겠거니, 하고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든 정한은 승철과의 채팅방 위로 왼쪽에 정렬된 말풍선 몇 개가 뜨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정한씨 잠꾸러기]

[저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났어요 벌써 아침도 먹었고]

[출발해야 되니까]

[근데 그 도서관 어디라고 했었죠?]

 

 

 

복숭아 모양의 이모티콘이 한껏 얄미운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는 이모티콘 아래로 달린 말풍선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정한은 별안간 던져진 물음에 조금 의아한 듯 했지만, 이내 손을 들어 답장을 써 내려갔다. 톡톡 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가볍게 울리고, 말풍선이 떠오르기 무섭게 숫자 1이 싹 사라졌다.

 

 

 

[? 저 그 정독도서관이라고]

[집에서 한 20분 거리? 종로구 쪽일 거예요 아마]

 

 

 

별 생각 없이 메신저와 연동된 검색 기능을 써 주소까지 찍어 준 정한은 다시금 제 말풍선 옆에 1이 생기자 홀드 버튼을 눌러 휴대폰 화면을 까맣게 죽였다. 그럼 그렇지, 우연의 일치였겠구나, 싶은 마음에 괜히 입맛이 씁쓸했다.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휴대폰이 몇 번의 알림음을 더 울려 댔지만 정한은 그것을 한 귀로 흘리고서 욕실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 이후로는 나갈 준비를 하느라 이렇다 할 겨를이 없었고, 승철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때는 마을버스에 몸을 실은 지 삼십 분이나 지났을 때였다.

 

 

 

[그냥 궁금했어요 집이랑 많이 먼가 싶어서ㅋㅋㅋㅋㅋ 힘들잖아요 먼 데 다니면]

[쉬엄쉬엄 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변함없이,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승철 특유의 말투에 정한은 괜히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래 봤자 한국 올 것도 아니면서, . 입으로는 툴툴대면서도 손으로는 하트 모양 이모티콘을 찾아 헤매는 게 우스워서 종국에는 자조에 가깝게 웃어버리고 만 정한이었다. 이번에는 말풍선 옆에 숫자 1이 사라지지 않고 붙어 있는 게 좀 야속해서, 정한은 그것을 엄지로 문질러 보다가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만큼 무거운 가방을 메고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침부터 내린 비 탓에 덥고 습했으며, 바지 뒷주머니에는 데이터 사용으로 뜨끈해진 휴대폰이 잠들어 있었다. , 승철 씨 어디냐고 안 물어 봤네. 금세 무거워진 다리를 겨우 움직여 꼭대기에 도착한 정한이 도서관 로비로 들어서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 지금쯤 스페인이겠지. 손을 들어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는 에어컨 바람이 쌩쌩 부는 정독실 안에 가방을 내려 두고 지하 매점으로 향했다. 더워 죽겠네, 7, 8월에는 어떡하려고 이래? 손부채질을 하며 바삐 걸음을 옮기는 정한의 휴대폰은 여전히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지하 매점에 들어선 자그마한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정독실로 올라온 정한은 버릇 탓에 다 접힌 빨대가 꽂힌 커피 컵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방에서 전공 책을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 이른 시간도 아니건만, 평일이라 그런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이 어제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안 그래도 적막한 공기가 아예 바닥으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두툼한 책 세 권을 모두 꺼내어 칸막이에 세워 두고, 정한은 서랍 위쪽을 더듬어 스위치 버튼을 눌렀다. 자그마한 형광등이 팟소리를 내며 책상 위를 밝게 비추었다.

그리고 그 위에, 정한이 가져오지 않은 무언가가 책상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조심스레 의자를 끌어당겨 엉덩이를 걸친 그가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회색이 많이 섞인 연보라색 상자는 크기에 비해 생각보다 묵직했고, 그 위에 나뭇잎 같은 그림이 문양처럼 프린팅 되어 있었다. 가운데에 적힌 영어를 눈으로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정한은 무심코 작게 탄성을 내뱉고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WHITTARD위타드라 하면, 승철이 지난주 쯤 영국에 간다고 했을 때 농담 삼아 사오라고 했던 영국산 차() 브랜드였던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상자를 이리저리 돌리던 그는, 상자 뒷면에서 낯익은 글씨를 발견하고 입술을 꾹 눌러 깨물었다. 급하게 쓴 티가 나는 것 같으면서도 남자치고 꽤 정갈한 글씨체에, ‘여기도 비가 그치질 않네요.’ 라고 읊조린 문구는,

 

 

승철의 것이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정한은 상자를 꾹 쥔 채 정독실을 빠져나갔다. 급하게 일어난 탓에 의자가 바닥과 마찰해 기분 나쁜 소리를 냈지만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로비로 빠져나와 출입문을 마주하고 서기까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은 멎을 것처럼 벅차게 차올랐다. 정신없이 굴리던 시선을 비가 내리는 출입구 쪽으로 고정한 그 때, 정한의 시야 안으로 노란색 우산을 쓴 남자가 들어왔다. 아니그는 마치 정한이 자신을 담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적막한 로비 안으로 정한의 발소리가 잔향을 울리고 흩어졌다. 유리 문 하나만을 둔 채 가까이 다가섰을 때, 우산을 든 남자의 손목에는 조금 빛이 바랜 끈 팔찌가 걸려 있었고,

 

 

우산 사이로 드러나는 남자의 얼굴은, 양 볼에 보조개가 깊게 파이도록 끌어당긴 입 꼬리는, 그 모든 것을 통칭하는승철의 웃음은, 파란 하늘과 환한 달빛과 그가 좋아해 마지않는 별빛을 모두 담고 있었다. 제 심장께에 손을 댄 채 급하게 문을 열어젖힌 정한이, 승철이 채 우산을 끄기도 전에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 왜 말 안 했어요.”

저기, 정한 씨, 나 우산 좀 끄고,”

왜 말 안 했냐구요! 한국 올 거면 온다고 하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 아니 뭐, 그래도 다 알고 오면 재미없잖아요. 놀래켜 주려고 그랬죠. 난 정한 씨 눈치 빨라서 도서관 물어 볼 때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잔뜩 심통이 나 목소리가 한껏 높아진 정한을 겨우 떼어 낸 승철이 우산을 접어 제 손목에 걸고 그 유한 얼굴로 대꾸했다. 정한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잘근잘근 씹어 가며 눈물을 참아내려 애를 썼으나, 곧 비가 떨어진 것처럼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앞에 다가선 승철이 정한의 어깨를 감싸 제 품으로 끌어 당겼다. 울음을 삼키고 삼키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서, 정한은 괜히 주먹을 꾹 쥐어 승철의 어깨 위를 쾅쾅 내리쳤다.

 

 

 

정한 씨, 미안해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진짜 미안. 그래서 내가 이거, 위타드 들러서 이것도 사 왔잖아요.”

몰라요, 승철 씨 진짜 나빠……. 이런 게 어딨어요, 진짜.”

미안해요, 요새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나도 며칠 전에 급하게 결정한 거였어요. 그때라도 말해 줄 걸 그랬는데.”

진짜…… 승철 씨 바보예요? 그렇게, 사람 마음 갖고 놀고, 흐윽, 내가 뭐가 돼요 그럼…….”

 

 

 

울음이 잔뜩 섞여 반쯤 뭉그러진 발음으로 웅얼거리던 정한이 제 감정에 못 이겨 꼭꼭 숨겨 뒀던 마음을 터뜨리자 가만히 그걸 들으며 정한의 등을 쓸어내리던 승철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믿을 수 없게도 잉잉 소리 내어 우는 와중에 용케 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정한이 다시금 주먹을 쥐어 승철의 어깨를 내리쳤다. 결국 참지 못하고 아, 귀여워, 소리를 낸 승철이 그의 어깨를 잡아 제 품에서 떼어내고 눈물이 퐁퐁 솟아나 흘러내리는 두 눈과 시선을 겹쳤다. 점차 굵어지는 빗소리가 섞인 승철의 음성이 정한 씨, 하고 나지막히 흘러나올 때 정한은 입술을 꼭 문 채 손등으로 눈가를 부벼 댔다.

 

 

 

정한 씨, 내가 할 말이 있었어요. 두 달 만에 하게 돼서 진짜 미안한데, 혹시 그거 알아요?”

뭐요, 뭔데요 또!”

비가 그치지 않네요, 라는 말. 조금 더 곁에 있고 싶어요, 라는 뜻이에요.”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네요.

 

 

 

문득, 정한은 승철의 음성 위로 한 달 전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던 승철의 또 다른 목소리가 겹치는 것을 느끼고서 눈을 크게 떠 올렸다. 악력에 못 이겨 손에 쥔 상자가 다 구겨질 동안, 승철은 항상 메고 다니던 카메라 가방을 뒤적여 자그마한 책 한 권을 꺼내었다. 멍하게 저를 바라보고 선 정한의 눈앞으로 손을 휘휘 흔들고, 곧 초점이 돌아오자 승철은 그에게로 손에 들린 책을 내밀었다. 흰 배경에 하늘색 물감이 퍼져나가듯 일렁이는 표지 위로, ‘당신은 이런 내 마음을 모르겠죠.’ 라는 문구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색하게 손을 움직여 책을 받아 든 정한이 두어 장을 넘겨보는데, 낯익은 사진들과 함께 익숙한 손 글씨가 사진 아래 공간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다시금 입술을 감쳐물고 울음을 삼키느라 푹 떨어뜨린 정한의 고개 위로 승철의 음성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두 달 동안 찍었던 별들이에요. 정한 씨 천칭자리 맞죠? 그거 전부 천칭자리예요. 그 아래는 내 일기 같은 건데, ……, 사실 조금 더 모으려고 했거든요. 근데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급하게 제본 맡겼어요. 이 책은, 그러니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에요.”

……이게, 뭐예요.”

내 고백이에요. 그동안 숨기느라 나도 진짜 힘들었어요. , 그러니까 이제 돌려 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해주면 안 돼요?”

……, ?”

맨날 했던 거 있잖아요. 다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는데도 왜 모른 척 했냐고 물어 볼 거죠? 그냥, 한국 가면 듣고 싶었어요. 정한 씨가 이렇게 울 줄도 알았거든요.”

 

 

 

나긋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든 정한이 울음을 삼키며 승철의 두 눈을 마주했다. 이렇게 날이 흐리고, 하늘이 잔뜩 어두운 와중에도 승철의 두 눈은 별을 박은 듯 반짝반짝 빛났고, 그 속에 그를 마주하고 선 정한이 비쳤다.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정한이 겨우 사, 하고 운을 띄웠다가, 이내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가리며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 사는 동안 돈 많이 버세요!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승철이 유쾌하게 소리 내어 웃으며 정한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손목을 쥐어 가볍게 떨어뜨리고, 승철은 지그시 시선을 맞춘 채 속삭이는 것처럼 내뱉었다.

 

 

 

정한 씨, 내가 많이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첫눈에 반했거든요. , 그러니까, 이제 계속 내 옆에 있어 줘요. 내가 잘해줄게요.”

……, 아 진짜…….”

정한 씨, 내가 지금도 많이 사랑해요. 진짜로요.”

 

 

 

나도, 나도…… 많이 사랑해요, 승철 씨. 진짜 고마워요, 와 줘서 고마워요.

비에 젖은 듯 물기가 잔뜩 어린 채 터져 나온 서툰 고백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승철이 정한을 다시금 끌어안았다. , , 크고 빠르게 울리는 심장 박동이 맞닿은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것 같아서 정한은 벅차오른 숨을 내뱉고 또 내뱉었다. 엄지를 들어 정한의 눈가를 가볍게 문질러 닦은 승철이 입 꼬리를 끌어 올린다. 눈가가 발개진 채, 정한도 그를 따라 웃었다.

 

 

 

장마 같은 여름비가 시원하게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고, 조용한 도서관 로비에 선 두 사람은 가만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과 승철의 손 글씨가 담긴 차() 상자를 한 팔로 안은 정한은 제 머리칼을 넘겨주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고,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 버렸다. 따라 웃는 승철의 웃음은, 그래비 내린 후 맑게 갤 파란 하늘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정한 씨, 머리 잘랐네요. , 어때요? 이상해요? 아니요, 깔끔하고 예뻐요. 잘 어울려. , 진짜요? 다행이다. 고마워요, 승철 씨. ……, 있잖아요. 왜요? 손잡아도 돼요? ……, 뭐야. 그런 건 안 묻고 그냥 덥석 잡아 버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또 울 까봐 무서워서 물어 봤다, 됐어요? 아아, 진짜, 놀리지 마요. 싫어요, 앞으로 계속 놀릴 건데? , 승철 씨!

 

 

 

, 승철 씨는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저요?”

 

 

 

비가 그치지 않는 곳으로요. 구름 속에 가려진 달이라도, 참 예쁘네요하고 말할 수 있게.

 

 

 

 

 

fin.


// 월간쿱정 참여글 업로드합니다. 주석을 꼼꼼히 읽은 후에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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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설명 (작가 임의로 정한 단어에는 * 표시가 달려 있습니다.)

슈케이스 = 카드 슈 ; 포커류의 게임에서 카드를 담아두는 케이스를 칭하는 말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다른 뜻일 수 있으나 이 글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시프트 : Shift Time, 교대 시간을 뜻합니다.

드라이 진 : Dry GIn, 이 글에 자주 등장한 마티니를 만드는 주재료입니다. 도수는 40도 안팎으로 굉장히 높습니다. ()

스택 : 카드를 쌓아놓은 것을 뜻합니다.

오픈 카드 : 패가 모두에게 공개되는 카드입니다. / 히든카드 : 패가 공개되지 않는 카드입니다. 받는 사람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메이드 : 포커 게임에서 특정 족보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족보 : 포커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드는 카드 조합을 통칭합니다.

Die : 포커 게임에서 게임 진행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 : 포커 게임에서 상대가 베팅한 금액과 똑같이 베팅하는 것입니다. 즉 앞사람의 베팅 금액을 받겠다는 뜻이죠.

 

*게임에서 사용된 칩은 임의로 정한 머니 칩(금액이 명시된 칩)입니다. 글에 등장한 녹색 칩은 10달러, 회색 칩은 100달러, 검은색 칩은 5000달러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포커 룰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1. 카드는 A부터 K까지 총 13장이 4문양 당 사용됩니다. 즉 같은 숫자/기호가 4장씩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2. 숫자의 가치는 2 3 4 5 6 7 8 9 10 J Q K A 순서입니다. A 카드는 1 또는 K보다 높은 카드로 사용 가능합니다. 문양의 가치는 스페이드-하트-다이아몬드-클로버 순입니다.

3. 족보에 대해 간략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하이카드 : 어떠한 조합도 가능하지 않을 때 1장의 카드로 가장 가치가 높은 것

원 페어 : 값이 같은 2장의 카드

투 페어 : 페어가 두 개 있는 것

트리플 : 값이 같은 3장의 카드

스트레이트 : 문양이 다른 카드 5장의 숫자가 연속한 것

플러쉬 : 값이 다른 카드 5장이 모두 같은 문양인 것

풀 하우스 : 트리플 하나와 원 페어

포 카드 : 값이 같은 4장의 카드

스트레이트 플러쉬 : 문양이 같은 카드 5장의 숫자가 연속한 것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 문양이 같은 카드 5장이 10 J Q K A 순서인 것

4. 게임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세 장의 카드를 받습니다. 각자 카드를 확인한 후, 한 장을 오픈합니다.

오픈한 카드 가운데 가장 높은 패를 가진 플레이어가 먼저 오픈카드를 받습니다.

패가 높은 순서대로 베팅한 후 두 번째 오픈카드를 받습니다.

패가 높은 순서대로 베팅한 후 세 번째 오픈카드를 받습니다.

패가 높은 순서대로 베팅한 후 히든카드를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베팅한 후 7장의 카드로 원하는 패를 만들어 오픈합니다. 이것으로 승패가 가려집니다. 승리한 사람이 베팅 칩을 모두 가지며, 다음 게임의 선 플레이어가 됩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장면의 BGM입니다. 순서대로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디오테잎(IDIOTAPE) - Melodie

이디오테잎(IDIOTAPE) - Even Floor

Fall Out Boy - Centuries

 

 

 

 

 

 

[월간쿱정]

 

 

 

 

 

투 페어, 풀 하우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w. (@HYEMM_SVT)

 

 

 

 

 

MGM? 시끄럽지. 요란스럽고, 너무 눈부셔.

그러면서 거기 가서 뭐 하게?

너보다 더 돈 많은 남자 꼬셔서 인생 펴 보려고. , 맘에 안 들어?

 

 

 

3년 전쯤이었을까, 윤정한은 도심 한복판의 클럽 지하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와도 같던 도박판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에 반쯤 묻혔으면서도 그렇게 선명할 수 없었던 승철의 음성을 기억한다. 반문하는 저에게 누가 봐도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 내고서, 일부러 독한 담배연기를 제 얼굴 가까이 불어대던 것을 기억한다. 저는 그때 그에게 뭐라고 대꾸했더라, 자리를 벗어나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서 정한은 승철의 뒤통수를 집요하게 쫓으며 그랬었다.

 

 

 

꼬우면 너도 라스베가스 오든가! 빡쳤다고 나 놔두고 가겠다는 거야, 지금?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애 같은 발언이었음을, 정한은 잘 알고 있다. 승철은 아무 룸이나 박차고 들어가서 아무 술이나 잡아 따고서, 그걸 잔에다 부었던가. 제 머리 위로 쏟아지던 뜨겁고 싸한 알코올의 감촉을 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라스베가스 가서 딜러 하겠다는 너나, 위에서 몸 파는 년들이나.

 

 

 

고개를 내젓는 얼굴이 웃는 듯 하면서도 싸늘하게 굳어있었던 것 같았다고, 정한의 기억은 거기서부터 희미하게 흩어졌다. 제 머리칼 위로 쏟아져 얼굴이며 어깨를 잔뜩 적신 술이 드라이 진(Dry Gin)이었다는 건 반 쯤 취한 척 승철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뜬 이후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시답잖은 말싸움은 어떻게 끝이 났더라?

 

 

 

 

 

그 때 네가 그랬잖아, 잘생기고 돈 많은 양키 꼬셔서 인생 펼 거라고.”

물론 그러려고 했는데, 막상 와 보니까 잘생기면 돈이 없고, 돈이 많으면 못생겼더라고.”

 

 

 

3년 후윤정한은 과거 최승철의 품에서 취한 척 잠을 청했던 때와 비슷한 자세를 하고서 그를 올려다보고 작게 키득이며 대꾸한다. 좁은 침대 위에 긴 다리를 전부 올려두려고 잔뜩 접고 웅크린 꼴이 웃겨, 승철은 그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헤집으며 픽 웃었다. , 머리 꼬지 마. 짜증 섞인 정한의 앙탈 비슷한 것이 방 안으로 울려 퍼졌다.

 

 

 

그런 식으로 말꼬리 늘려 봤자 나한텐 안 통하니까 가만히 좀 있어.”

아아, 그러면 머리 엉킨단 말야.”

됐고, 그래서 나 봤을 때 느낌이 어땠어? 이거 한 세 번은 더 물은 것 같은데.”

안 말해줄 거야, 너 짜증나.”

 

 

 

인상을 팍 찡그린 정한이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키며 손을 들었다. 그대로 승철의 이마를 퍽 소리 나도록 세게 밀자 그의 몸이 밀렸다. 상체가 뒤로 넘어가 완전히 누운 꼴이 되면서도 승철은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했다. 입술을 앙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떠 그를 흘기며, 정한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고 손목에 걸린 머리끈으로 그것을 모아 묶었다. 그러고서 다시금 상체를 눕히자, 정한의 어깨에 아랫배가 눌린 승철이 부러 죽는 소릴 냈다.

 

 

 

안 들려, 안 일어날 거야. 너 진짜 짜증나.”

어차피, 내쫓지도 못할 거면서, 괜히 힘 빼는 거다, 그거. 어우 씨, 좀 일어나 봐.”

, 싫다고! 바라는 게 많아, 진짜.”

 

 

 

제 아래에 이상한 자세로 누운 승철이 몸을 뒤트는 게 어지간히 불편했는지, 정한은 인상을 팍 쓴채 날 선 투로 대꾸하면서도 자세를 고쳐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침대 밖으로 달랑거리는 다리를 착착 접어 끌어 모으자 다시금 상체를 일으킨 승철이 그의 눈가를 가린 머리칼을 쓸어 귀 뒤로 넘겼다.

 

 

 

대답은 언제쯤 해 줄 건데, 여왕님. 고고한 척이고 아양이고 나한테는 다 어린 애 지랄이라고 했잖아.”

네가 날 그 따위 난잡한 호칭으로 안 부르면.”

조건이 까다롭네, 고민 좀 해 봐야겠는데?”

지랄, 말이나 못 하면.”

 

 

 

정한이 실소 비슷한 것을 입술 끝으로 가늘게 흘리자 승철은 그것을 내려다보고서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예쁘게 접히는 두 눈가를 곧은 손가락으로 잘게 찔러 대던 윤정한은 닿아 오는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고 화제를 돌려 물었다. 근데 당신, 내일부터 게임하러 나올 거랬나?

 

 

 

, 네 근무 시간에 딱 맞춰서. 어때?”

할 수 있음 해 봐. 혹시 승부조작 같은 거 바라나?”

 

당연한 거 아냐? 당신이랑 짜고 치려고 온 건데, 싫다면 아쉽네.”

 

 

 

승철은 사실 그 이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윤정한이 딜러 일을 해서 돈 많은 남자를 꼬드길 수 있는 방법이라 하면, 오로지 그만을 위한 판을 만들어주는 것즉 짜고 치는 게임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았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는 더더욱. 그랬기 때문에 먼저 게임 얘기를 꺼내고 일부러 튕기듯이 물은 진의를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러 미련 없는 척 침대에서 일어나려 몸을 뒤척이는 최승철의 손목을, 당연하게도 윤정한이 먼저 잡아당겼다.

 

 

 

내가 언제 싫다고 했나? 그치, 자기야.”

끼 부려 봐야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입력이 안 돼?”

, 라스베가스 애칭이거든? 무드 없는 새끼. 게임 때 네 말 하나도 안 들을 거야.”

해 봐, 할 수 있으면. 난 털어버리고 한국 가면 그만인데.”

 

 

 

 

침대 위에 앉아 자리에서 일어선 승철을 올려다보는 정한의 미간이 구겨진다. 입술 끝을 비틀어 깨문 그가 침대 시트를 초조하게 구겨 쥐다가, 그러쥔 승철의 손목을 느리게 놓았다. 손을 거두었음에도 서로를 마주한 두 갈래의 시선은 한참동안 물러서지 않았다. 미묘한 공기가 둘 사이를 부유하던 때, 먼저 시선을 떨어뜨린 윤정한의 달싹이던 입술은 굳게 다물렸고,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최승철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투 페어, 풀 하우스로 해. 스트레이트 플러쉬부터 의심하고 보더라고.”

라스베가스 특징이야,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당신이 존나 유능한 겜블러인 것처럼 소문 내 준다고 했잖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나 고개 못 들고 다녀.”

좋네, 그 잘생긴 얼굴 못생긴 여자들이 보고 반하면 어쩌려고.”

그런 논리라면 너도 꽁꽁 싸매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게임 좆도 못 하는 양키 놈들한테 여왕님 얼굴 보여드리기 싫은데.”

 

 

 

, 눈을 가늘게 뜨며 꽉 깨문 잇새로 조금 날 선 음성을 뱉은 정한이 아랫입술을 꾹 물며 제 머리 위로 손을 쳐들었다. 꽤 매서운 그 손이 승철의 어깨 위로 내리쳐질 때, 한 발 빠르게 손을 뻗은 승철이 정한의 손목을 쥐고 아프지 않게, 그러면서도 꽤 힘을 실어 제 쪽으로 잡아 당겼다. 졸지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마주 선 꼴이 되자 윤정한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죽을래? 당신 나한테 관심 있는 건 알았지만

죽일 거면 침대에서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관심은 당신이 나한테 있었던 거 아닌가?”

, 이 새끼가,”

 

 

 

입 속에서 맴돌던 말이 퍽 험악하게 터져 나올 때쯤, 승철은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양 소리 내어 키득거리며 겨우 두 사람 버티고 섰던 벽장과 침대 사이의 틈에서 빠져나갔다. 정한은 입술을 비틀어 꽉 문 채 승철 쪽으로 고개만 돌려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묶은 머리를 풀러 아까보다 좀 더 아무렇게나 묶었다. 최승철은 가만히 그 모양을 보고 서 있다가, 이내 느리게 뒷걸음질 치듯 현관 앞에 가 섰다. 여왕님, 진저리 날 만큼 불쾌한 호칭을 일부러 뱉는다는 걸 알면서도, 윤정한은 부르는 대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물론 그 예쁜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져 있었지만.

 

 

 

내일 시프트 언제야?”

알아서 내려 와. 그냥 라운지에 죽치고 있든가.”

일찍 자, 피곤하다고 나한테 와서 지랄하지 말고. 알았지?”

다정한 척 해 봐야 소용없으니까 그냥 빨리 좀 가.”

 

 

 

날 세워도 고양이 같은 건 여전하네.

금방이라도 룸 밖으로 나갈 것처럼 하다가, 문득 성큼성큼 걸어와 정한의 어깨를 잡아 챈 승철이 그렇게 속삭였다. 한 톤 더 낮고 퍽 진중한 음성이 그저 장난이란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살다 살다 고양이에, 여왕님에, 별 쓰레기 같은 건 다 들어보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에는 담지 못하고, 다만 윤정한은 습관처럼 입술만 잘근거릴 뿐이었다. 으득, 이 갈리는 소리가 선연하자 승철은 픽 웃었다. 그러고서 온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 다시금 현관 앞에 섰다.

 

 

 

, 빨리 가!”

한 마디만 더 하면 뭐 날아올 것 같은데.”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래?”

 

알았으니까 갈게. 내일 봐, 윤정한.”

 

 

 

끼익, . 생각보다 시끄러운 소릴 내며 닫힌 문 위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정한은 한숨같은 것을 작게 내뱉으며 그 쪽을 바라본 방향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착 가라앉은 공기가 느리게 부유하며 무릎을 모아 앉은 정한의 주위로 하강했다. 최승철에게 항상 간파당하는 이유를, 3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었다. 더불어, 묘하게 뒤틀린 관계가 어디서부터 이어지고 있는지도.

 

라스베가스에 도망 온 지 2년 만에, 제 이름 세 자를 정확한 발음으로 불러준 사람이 처음이었다고, 윤정한은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최승철 앞에서는 지랄이 차고 넘치는 고양이인 척 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으니까.

 

 

 

에이 씨, 지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조금 가라앉은날을 세운 척 하는 목소리가 방 안을 뱅뱅 맴돌다가 사라진다. 그 속에서, 정한은 한참을 같은 자세로 가만히 문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

 

 

 

 

 

 

 

투 페어, 풀 하우스. 윤정한은 그렇게 이어지는 족보에서 5년간의 추억 가운데 가장 큰 파편을 끌어낸다. 일부러 잡아당기거나, 억지로 파묻으려 하지 않았는데도, 그것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다가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긴 다리를 구기다시피 접은 채 불편하게 잠든 정한이 눈가를 찌푸리며 조금 뒤척였다.

 

 

5년 전 또 다른 세계의 한 구석에서, 거의 호기심을 이유로 접근했던 정한에게 승철은 가만히 시선을 두며 카드 더미를 내밀었다. 정한은 반복적인 패턴이 섞인 카드 뒷면을 내려다보다가, 느리게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승철은 손가락 끝에 걸린 마티니 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며 가라앉은 시선을 카드 위에 얹혀진 정한의 손 위로 옮겼다. 흘긋 그를 올려다보고, 윤정한은 조용히 카드를 셔플하며 중얼거렸다. 마티니 마시는 남자는 생각보다 더 멋있을 줄 알았는데. 용케 그 작은 목소리를 들은 승철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슈케이스 안으로 카드를 밀어넣은 정한이 고개를 들었을 때, 승철은 검정 슬랙스에 칼라리스 셔츠를 걸친 저 자신을 아래위로 훑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썩 멋지지 않다, 이거네?

「…아니 뭐, 내 판타지가 그렇다는 거지.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을 때 제일 멋진 거니까요.

생각보다 포장 잘 하시네. 당신 혹시 딜러?

관련 없는 물음 같지만 여하튼 전 전공자예요. 왜요?

 

 

 

 

그냥, 이 판에 뛰어든 딜러라면 당연히 짜고 치는 판 만들어 주려고 온 거 아니겠나 싶어서.

묘하게 짜고 치는을 강조하는 듯한 승철의 음성이 정한의 귓가 근처에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승부조작 같은 건가, 정한이 눈가를 찌푸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마티니 잔을 쥔 승철이 말을 이었다.

 

 

 

여기 왔음 알아서 적응해야 할 거야.

결론적으로 나 보고 배운 거 갖다가 법 어기는 데 쓰자는 거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할 말은 없는데, 당신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이상 스스로 배워 가야지, 어쩌겠어. , 팔려 온 건 아니잖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 거리에서 이 정도 목소리로 하나하나 짚어주는 것 밖에 없거든.

 

 

 

무색투명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승철의 입술이 잠시 닫혔다가 열리고, 띄엄띄엄 매달린 알전구 불빛에 반질거리는 칵테일 잔 끝이 그 입술 사이에 걸렸다. 정한은 왠지 거기에서 뱉어진 공기가 탁한 회색 같다고 생각하며 입술 끝을 감쳐물었다. 이런 덴 줄 몰랐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게 분명하겠지.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카드 슈에서 세 장을 빼내어 뒤집어진 채 승철 쪽으로 건네며 물었다.

 

 

 

그래서 난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나도 잘은 몰라. 딜러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것 외에는.

카드 슈나 스택을 조작하라는 건가요?

그런 식으로 한다는 사람도 있고, 의도적으로 필요한 패만 건넨다는 경우도 있고. 뭐가 됐든 제스처나 암호 같은 걸로 정보 공유하는 방식은 다 같더라고.

정보를 흘리면 당신이 메이드 할 수 있어요?

그거야 족보에 따라 다르지. 처음부터 네가 만들어서 줄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특정 패를 목표로 삼고 너한테 그걸 흘릴 수도 있는 거고.

 

 

 

일말의 소음 없이 테이블 위를 흘러 건네어진 카드를 받아 들며, 승철은 정한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마무리 지었다. 탁한 공기 탓에 순식간에 건조해진 눈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뗀 정한은 다시금 카드 슈에서 한 장을 빼내어 그것을 오픈시키고 승철 쪽으로 내밀었다. 하트 2,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그것을 내려다보는 승철의 입술 끝이 가볍게 말려 올라갔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정한은 손을 뻗어 뒤집어진 세 장의 카드 가운데 제 쪽에 더 가까운 것을 뒤집었다. 스페이드 2? 오픈된 카드로 시선을 내리꽂은 정한의 머리 위에서 승철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많이 놀랐나? 원 페어 정도야 우연으로도 쉽게 만들어지는데 뭘 그래.

하지만, 이건 히든카드였고―」

그러니까. 아직도 모르겠나 봐? 페어 정도는 당신이 직접 메이드 할 수 있다는 거잖아.

 

 

 

룰대로라면, 이 카드를 먼저 오픈해야 할 테니까.

벙 찐 상태 그대로 굳은 정한의 어깨 너머로 팔을 뻗어 카드 슈를 끌어당긴 승철은 제 마티니 잔을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놓고서 카드 한 장을 빼내어 망설임 없이 뒤집었다. 이번에는 하트 퀸이었다. 승철은 둥글게 잘린 카드 모서리를 손가락 끝으로 쓸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눈치가 없을 줄은 몰랐는데. 알고 온 거 아니었어?

아니, …… 자세히 알고 온 건 아니지만.

난 항상 그랬지만, 처음에 받은 두 장의 히든카드는 딱 두 번만 건드려. 처음 받았을 때, 그리고 게임이 끝났을 때. 매 턴마다 히든카드를 건드린다는 건, 게임이 잘 풀리고 있다는 얘긴 아니거든.

「―그래서 전 뭘 하면 된다고요?

카드 셔플을 너무 열심히 하려 들지 마. 어차피 원 페어는 거의 운이고, 그것만 만들면 턴이 앞으로 당겨지니까 투 페어는 금방 메이드 해. 첫 오픈카드를 받을 때 이미 원 페어가 만들어져 있도록 하는 게 당신이 할 일, 그리고 마지막 카드를 받을 때 투 페어를 만드는 게 당신이 할 일이야. 이 쯤 하면 알겠어?

 

 

 

오픈된 카드 세 장과 승철의 눈을 번갈아 마주하며, 정한은 퍽 다정한 투로 뱉어진 승철의 음성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딘가 결연한 눈을 하고서 팔을 뻗어 카드 슈를 집어 든 정한이 다시금 한 장을 빼내어 오픈시켰다. 클로버 퀸이다. 카드를 건네는 그의 입술이 유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승철은 히든카드 두 장을 끄트머리만 들어 보고, 이내 테이블 끝을 톡톡 두드리다 정한이 건넨 카드를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잘 하는데? 예의상 해준 말이라는 느낌이 팍 드는 투였음에도 정한은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가 승철의 눈치를 약간 보고 급하게 그것을 삼켰다. 승철은 테이블 중앙에 가져다 놓은 마티니 잔을 들어 또 한 모금을 들이킨다. 그의 반대쪽 손이 간헐적으로 테이블 끝을 두드리고 있었다. 정한은 손톱이 가지런히 정리된 그 손가락 끝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카드 슈에서 한 장을 빼내어 다시금 오픈시킨다. 이번에는 현재 오픈된 카드와 전혀 상관없는 패다이아몬드 에이스였다. 승철 쪽으로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승철이 가지런히 정리된 카드 패 오른쪽 끝에 내려놓았다. 손을 들어 괜히 잘 묶인 제 머리를 푸른 정한이 넌지시 승철에게 물었다.

 

 

 

아무 상관없는 패가하나쯤은 있어도 되겠죠?

있어도 되는 게 아니라 있어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누구든 의심할 테니까. 중요한 건 마지막 히든카드야. 그건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당신이 알아서 잘 해 봐.

 

 

 

뭐야, 다 챙겨주는 것처럼 굴더니. 좀 전보다 성의 없게 들린 마지막 말에 눈가를 살짝 찡그린 정한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 머리칼을 모아 묶고 카드 슈에서 한 장을 빼내었다. 그러더니 그것을 승철의 맞은 편 빈 테이블 위로 밀어 두고, 그 다음 카드를 승철에게 내밀었다. 가만히 그것을 받아든 승철은 히든카드 두 장 사이를 가르고 그것을 내려놓는가 싶더니, 아까처럼 테이블 끝을 가볍게 두드리며 처음에 받았던 히든카드 한 장과 위치를 바꾸어 오픈시켰다. 오픈 전 이미 투 페어가 완성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 게임이었더라도 승산이 전혀 없지는 않다. 정한은 가만히 뒤집어진 카드 모서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위층에서 울리는 기계음 잔뜩 들어간 음악에 맞추듯 승철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고, 음악이 멈춘 듯 주위가 낯설 만큼 고요해질 때 손을 들어 카드를 뒤집었다. 그 위에 그려진 여왕의 형상, 정한은 그것을 마주하고서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스페이드 2 두 장, 퀸 세 장. 풀 하우스였다. 승철의 입술이 가볍게 호선을 그린다.

 

 

 

생각보다 센스가 있는데? 카드 한 장 빼고 준 것도 그렇고.

어차피 게임을 혼자 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그치만 마지막에 준 카드는 오픈 안 했잖아요.

, 눈치 못 챘나 보네.

뭐를요? 특별히 한 행동이라고는 테이블 두드리는 것밖에,

보고 있었으면서도 몰랐나, 그건데. 내가 마지막 카드를 오픈조차 해 보지 않은 이유 말야.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마지막 카드를 오픈하지 않은 이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슈케이스를 의미 없이 두드리던 정한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손을 뻗어 승철의 앞에 놓인 카드를 끌어 모은 그는 슈케이스에 그것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가능성을 묻는 것이 아닌백 퍼센트 확신하는 말투. 승철은 정한의 손을 내려다보며 뜻 모를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거 혹시, 이미 원하는 걸 메이드 했다는 뜻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까 아까 당신이 히든카드를 들어 보고 그 이후로 계속 테이블을 두드렸었잖아요. 맞죠?

그래, 맞아. 아무것도 모르고 온 사람치고는 학습 속도가 빠른데?

빈말이라고 해도 고마워요. 그치만 아까 그건 정말로 운이었어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사람들이 늘 찾는 행운의 여신 같은 게 너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도 여기 올 거면 나랑 같이 일할래?

가만히 듣고 있기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승철이,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마티니 잔을 들어 남은 것을 한 모금에 집어삼키고서 물방울에 조금 촉촉해진 손을 정한에게로 내밀었다. 가만히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정한은, 얼떨결에 그 손을 잡았다. 맞닿은 손끝으로 조금 차가운 감촉이 전해진다. 정한은 왠지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한 것 같아 승철이 손을 놓기가 무섭게 손바닥을 제 허벅지에 문질렀다. 그러나탁하게 내려앉은 공기, 어두운 알전구 불빛, 제게로 내려앉는 승철의 시선과 퍽 다정한 말투, 그 모든 것을 피할 수 있었다면 진작 자리를 떴을 것이란 생각이 뇌리에 스미고 있었다.

 

 

나랑 일하면 뭐가 좋으냐고? 아마 평생 만져본 적 없는 돈을 만지게 될 걸? 농담 아니고 진짜로. 장난스레 사족을 덧붙인 승철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정한은 제 입술을 가볍게 감쳐물었다 놓으며, ‘최승철을 찾아 가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거다라고 속삭여 줬던 지인의 말에 홀린 듯 이 곳에 걸어 들어온 사실을 승철이 영영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돈이 아니라오늘 처음 본 이 남자에게 홀린 것 같다는 사실 또한.

 

 

 

 

 

 

 

암호를 정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승철이 먼저 넌지시 물은 것은 정한이 세 번째로 그를 찾아 클럽 지하에 몸을 밀어 넣은 때였다.

단발로 친 제 머리가 어색해 그 끝을 죽죽 잡아당기던 정한은 저를 마주하자마자 대뜸 그렇게 묻는 승철에게 일부러 글쎄요, 하고 반문하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새로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3일에 이틀 꼴로 자정 퇴근을 일삼는 것이어서 테이블 위로 반쯤 널린 채 턱을 괸 그의 눈가에 피곤이 잔뜩 묻어났다. 승철은 눈가를 가린 정한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암호를 정해야 게임을 하고, 게임을 해야 돈을 따지.

난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당장 내놓으라는 식으로 나오면 집에 갈 거예요.

「―그리고 돈을 따야 네가 좀 덜 피곤해할 거고. 그치?

 

 

 

항상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뜨거운 승철의 손끝이 정한의 눈가로 와 닿았다. 반쯤 내려앉은 눈꺼풀 위를 엄지로 꾹꾹 눌러 주며, 그는 작게 키득거렸다. 그러다 자겠다, 자겠어. 정한은 승철이 하는 대로 눈을 감으며 따라 키득 웃었다. 먼저 연락한 사람이 누군데요? 느리게 뱉어진 말은 질책이라기 보단 농담조에 가까웠다.

 

 

 

3일 전부터 연락해서 오늘은 볼 수 있는 거냐고 묻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든가요. 내가 진짜 피곤해서 죽어버리고 싶은 거 억지로 왔으니까 용건만 간단히, 알겠어요?

아쉽네. 너 데리고 노는 거 재밌는데. 표정 바뀌는 거 보는 것도 재밌고.

사람 데리고 노는 거 진짜 안 좋은 거예요, 알아요?

알아요, 이 직선적인 사람아. 맘에 안 들면 나랑 사귀는 걸로 하든가.

 

 

 

승철은 대체로 그런 식의 농담을 즐겨 하는 사람이었다. 정한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그를 마주한다. 손에 들린 맥주 캔을 뺏어 한 모금 크게 들이키자 승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 알면서도 그것을 쉽게 여기는 건지, 아님 원래 천성이 매사 쉽고 가벼운 사람인 건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입 안에 쌉싸름하게 퍼지는 알코올에 눈가를 찌푸린 정한이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장난칠 거면 나 집에 가요. 그니까 빨리 말 해.

어우, 무서워서 못 건들겠네. 피곤한 거 너무 잘 보여서 안쓰러워 죽겠으니까 빨리 말할게. 대신 잘 알아듣고 기억해 놔, 알겠지?

 

 

 

다시금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승철을 조금 올려다보던 정한의 두 눈 위로 맥주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옮겨 붙은 승철의 손바닥이 와 닿았다. 시야가 어두워진 대로 눈을 내려감은 정한은 잠에 들지 않으려 손가락을 들어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승철은 어딘가 결연하기라도 한 듯 목소리를 가다듬는가 싶더니, 고개를 좀 가까이 해 작지만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선 앞으로 게임할 때는 투 페어 풀 하우스, 아님 트리플 플러쉬 순서로 메이드 하는 게 좋을 거야. 처음에 나오는 거 보고 어디로 갈지 내가 흘려줄 테니까 잘 알아먹어. 그러니까, 너 영어 좀 하지?

전공이었다니까요. 나 이거 한 두 번 말한 것 같은데.

, 그랬었지. 암튼 크게 생각하려면 영어로 만드는 게 나아. 어디 가서 써먹기도 쉽고, 잘 안 걸리고. 그러니까, 일단 페어는 단순하게. 우선 게임 진행하는 네가 나 말고 다른 겜블러들 묶어서 커플이냐고 물어. 그렇게 보이든 말든 상관없이. 원이면 한 쌍, 투면 두 쌍으로. 걔네가 뭐라고 대답하든지는 내 알 바 아닌데, 카드 오픈 전에 메이드 되면 항상 하던 대로 테이블 치면서 내가 되물을게. 누구한테 물을 지는 상황 봐서 결정하는 걸로 하고. 됐지?

그니까페어는 내가 메이드해 줄 수 있으니까 먼저 요구하란 거잖아요. ‘페어니까 커플 언급하는 거고. 진짜 단순하네요, 생각보다.

단순해야 기억하기 쉬워. 그런 의미에서 트리플은 하트 3. 내가 너한테 있냐고 물어볼 거야. 그럼 트리플이 필요하단 걸로 알아. 도와주고 말고는 네 운이긴 한데, 만약 도와줄 수 있으면 하트 3이 아니라도 축하한다고 해.

……, Congratulations, sir, 정도로 말하면 돼요?

, 영어 발음 장난 아니네. 암튼 뭐 그런 식으로. 스트레이트는 머리 쓸 거 없이, 마티니가 있으면 필요한 걸로 알아 둬. 스트레이트가 필요한 경우면 항상 마티니가 옆에 있을 거고, 메이드 되면 잔 비울게. 물론 메이드의 기본 제스처는 테이블 두드리는 거니까 헷갈리지 말고. 다음 플러쉬는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겜블러하고 게임할 때만 쓸 거야. 당신이 카드 돌릴 때, 내가 일부러 하나 집어서 이게 필요하다는 식으로 할 거거든. 물론 당신은 그 카드를 나한테 줘도 되고, 안 쥐도 돼. 메이드 된 상태면 주는 카드 받으면서 필요한 거였다고 할 거고. 대충 어떤 식인지 알겠어?

대충은요. 예상은 전혀 안 가지만.

풀 하우스는 트리플에 페어 하나니까 당신 역할이 커. 그래서 당신이 만들도록 지시하는 편이 빠를 거야. 카드 찔러 주면서 교대 5분 전이라고 해. 웬만큼 큰 카지노는 교대 순서나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편이라고 했으니까 다른 놈들도 의심은 못 할 거야. 그리고 5분 뒤에 게임 끝내는 걸로 하고, 난 풀 하우스 메이드 하는 걸로 하고.

그리고마지막인가, 만들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이하 로스플는 일단 스트레이트가 있으니까 마티니가 있을 거야. 그리고 게임하면서 내가 당신한테 작업 거는 느낌으로 말 걸 거니까 알아서 마음의 준비 할 거면 하고. 오픈된 카드가 세 장 째일 때 내 차는 메르세데스다, 라고 할 거고 마지막 히든카드 받을 때 룸 넘버 말해줄게.

스케일 무지 크네, 로스플이라 그런가……. 메이드 해 본 적은 있어요?

 

 

 

텀을 여러 번 두고 그리 짧지 않게 이어진 승철의 말이 마무리 지어지자 눈을 떠 그를 마주한 정한이 넌지시 물으며 테이블에 반쯤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키고 한 쪽으로 기울여져 있던 목을 반대쪽으로 기울여 풀었다.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지는 것을 마주하며 승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정한은 그 대답에서 이상한 점을 단번에 발견하지 못하고 그것을 곱씹다가, 이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에게 반문했다.

 

 

 

그게 가능하기는 해요? 나도 족보로나 봤지, 실제로 게임에서 나온 적은 없었는데.

나도 두 번 정도밖에 없어. 물론 이것도 기적이라고들 하던데, 운이 잘 따르거나 딜러가 잡혀갈 각오 하고 카드 찔러주면 되긴 되더라고. 내가 너한테 후자를 바라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아.

그래서 로스플 메이드 해 볼 거예요? 나중에 언제가 되든 간에.

그거야 모르지, 운에 맡기는 거라고 했잖아.

만약 메이드 하면요?

 

 

 

그런 식으로 암호를 만든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거 아니에요?

정한은 주머니에서 짧게 진동한 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으며 떠 보듯 그렇게 물었다. 제 의도를 승철이 모를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흘린 것으로 비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한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승철은 가만히 정한의 손 근처에 시선을 두고 그 주위를 맴돌며 간단하게 대꾸했다. 적어도 윤정한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으리라. 최승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모르겠는데? 그래 보이는 것 같으면 룸으로 찾아오든가. 그럼 네가 바라는 게 있을 지도 모르지?

「……됐네요, 물어 본 내가 잘못이지.

 

 

 

나 갈게요, 알바 가야 해.

정한은 승철 몰래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뒤를 쫓으며 승철은 시답잖은 몇 마디를 덧붙여 물었다. 알바는 매일 가는 거냐, 몇 시까지가 원래 근무 시간이냐, 같은 것을 물어 오면서도 무슨 일을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적당히 예상이 간다는 건가. 정한은 저 혼자 생각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입술을 앙 다문 채 묵묵히 걸었다. 주차장으로 통하는 출구 앞에 서서, 그는 그제야 승철을 돌아보고 물었다.

 

 

 

어디까지 따라올 거예요?

오늘 알바 쉬어. 아님 내 차 타고 가든가. 지금도 충분히 늦었는데 혼자 돌아다니다가 누가 너 잡아가면 어쩌려고.

왜요, 내가 당신의 소중한 인력이라서?

……, 그런 의미도 없지는 않은데, 어쨌거나 우린 큰 그림이 있잖아. 이 바닥 뜨기 전까지는 조심히 살아야지, 안 그래?

 

 

 

그러니까 내가 태워 줄게, 따라와.

승철은 꽤 선심 쓰는 척 하기 좋은 말을 예의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내뱉으며 주머니를 뒤적여 차키를 꺼내었다. 스치듯 지나간 그것이 정말로 그가 언급한 메르세데스 벤츠의 차 키라는 걸 마주한 정한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것을 용케도 들은 승철이 정한을 돌아보며 씩 웃어 보인다. , 좀 멋있어 보이나? 그 물음에 고개를 주억일 뻔 한 것을 참아내고서, 그런 것도 같네요, 정한은 부러 그런 식으로 중얼거리며 그와 걸음을 맞추었다.

 

비싼 차라 그런지 승차감이 너무도 좋았던 탓에그 탓이라고 하는 편이 덜 우스울 것 같았다.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던 정한은, 승철이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지도 모르고 뒷자리에 거의 누운 채 새근새근 잘 자고 일어나서는, 제 집 침대에 누워 눈을 떴을 때 이미 동이 트기 시작한 것을 마주하고 작게 헛웃음을 지었더랬다. 휴대폰은 안 그래도 배터리가 간당간당하던 것이 결국 수명을 다해 차게 식어있었고, 협탁 위에 승철이 휘갈기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가 놓여있었다.

너 그렇게 피곤해하는 꼴 보기 그래서 그냥 재웠어. 필요하면 또 연락할게. 아침 챙겨 먹고. 텍스트에서 그 다정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아 정한은 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꾹 쥔 손아귀 안에서 승철의 글씨가 남은 종잇조각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윤정한은 다만 그것을 내다버리지 못하고 침대 한 구석에 집어던진 다음에, 거실로 나가 승철이 말한 대로 아침을 챙겨 먹었다. 기분이 묘하게 좋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나빴다.

 

 

다정한 말투에, 저를 신경 쓰는 듯한 행동, 그러면서도 별 생각 없이 쉽게 뱉어지는 말들, 교묘하게 기만하는 듯한 태도. 정한은 어디가 최승철의 진실인지를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이내 썅, 하고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최승철이 운운하던 큰 그림라스베가스로 가야겠다고, 정한은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승철과 함께, 가 아니라 승철보다 먼저 거기에 도착하겠다고. 몇 번이고 곱씹은 아침이었다.

 

 

 

 

 

 

 

*

 

 

 

 

 

 

 

침대에 반쯤 걸쳐진 채 잠들어 있던 정한이 눈을 떴을 때, 벽에 붙은 아날로그시계는 열한 시 반쯤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머리 바로 옆에 놓인 휴대폰은 LED를 반짝이며 문자가 왔음을 알렸고, 그는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헝클어진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잠이 덜 깨 멍하니 빈 벽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곧 휴대폰이 시끄러운 알람벨을 울려댔다. 언제부터 자고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까무룩 잠이 들어서는 꿈자리가 사나워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모두 떠올랐기 때문에잠을 설쳤으면서, 근무 시작 시간이 오후 1시란 것은 몸이 기억하고서 저를 수면(睡眠) 위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휴대폰을 쥐어 알람을 종료시키고 나서야 정한은 베개도 베지 않은 채 이상하게 누워 잠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 그의 얼굴에 뚝뚝 묻어나는 피로감은 비단 요상한 자세로 잠 들어 뻐근해진 몸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반쯤 틀어진 채 잠든 고개가 잘 돌려지지 않아 애를 먹은 정한은 교대를 20분 전후로 남기고서야 겨우 유니폼 넥타이를 조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게임을 하기에는 꽤 이른 시간임에도 호텔 투숙객또는 관광객으로 추정되는 사람 몇이 카지노 라운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들어 보고 아직 시간이 남았음을 확인한 정한은 바 스툴에 걸터앉아 덜 마른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렸다. 약간의 물기와 더불어 진한 샴푸 향이 손가락에 감긴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측면 벽을 따라 죽 늘어선 슬롯머신을 돌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그의 귓전을 울리고 지나간다. 아닌 척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던 정한은 문득 오른쪽 옆으로 제 생각을 한 치 오차 없이 읊어주는 음성이 다가오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슬쩍 거는 비즈니스용 미소. 목소리의 주인공승철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끄럽지? 요란스럽고, 눈부시고.”

당신 이제 하다하다 독심술까지 써?”

감정 못 숨기는 네가 여전한 거지.”

 

 

 

딱 떨어지는 블랙 수트를 갖춰 입은 승철은 손을 들어 부스스하게 뜬 정한의 뒷머리를 느리게 빗어 내렸다. 진한 샴푸 향이 그의 손가락으로도 물들어 간다. 정한은 제 귀 뒤에서 희미하게 불어오는 여자 향수 냄새 같은 것에 인상을 조금 찌푸리고, 이내 고개를 흔들어 승철의 손을 떼어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모아 묶어버리자 손을 거둔 승철이 또 한 번 장난스럽게 키득였다. 이내 그는고개를 돌려 하릴없이 슬롯머신 쪽을 바라보고 선 바텐더를 제 쪽으로 불렀다. Excuse me, 하는 부름에 푸른 눈의 백인 바텐더가 이쪽을 돌아보고서 다가와 섰다.

 

 

 

“Yes, sir. What can I do for you?” (,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A martini, please.” (마티니 한 잔이요.)

“Sweet or dry?” (스위트로 하시겠어요, 드라이로 하시겠어요?)

“A little MORE dry, please.” (조금 더 드라이하게 해 줘요.)

 

 

 

승철의 주문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바텐더가 자리를 뜨자, 승철은 스툴을 빙글 돌려 정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짧은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시계를 확인한 정한은 반쯤 틀어진 승철이 무색하도록 자리에서 일어선다. 카지노 입구 쪽 벽에 붙은 디지털시계에 12:50 이란 숫자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그대로 돌아설 것처럼 하던 정한은 문득 고개를 돌려 승철을 돌아본다. 그의 손에는 벌써 낯익은 칵테일 잔이 들려 있었다.

 

 

 

그런 대화를 한 시도 안 돼서 듣네. 웬만하면 주정뱅이는 취급 안 하고 싶은데 말야.”

난 취한 적 없어. 이런 거 마시면서 게임 하면 여자들이 좋아하던데.”

, 그럼 그 여자들이랑 게임 하시든가.”

오늘따라 튕기는 게 예뻐 보이네, 여왕님. 몇 번 테이블이야?”

, 몰라, 알아서 찾아 와.”

 

 

 

다시금 승철의 장난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하던 게 와장창, 비슷한 소릴 내며 깨지는 순간이었다. 부러 그 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고 딜러 대기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으며 들어온 정한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표정을 있는 대로 구겼다. 문 닫히는 소리에 대기실 안에 있던 딜러 몇이 그 쪽을 돌아보았으나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또 저래, 비슷한 반응일 테지. 정한은 아직 눅눅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입속말로 욕지거리를 씹어 삼킨다.

한편정한이 돌아서서 대기실로 들어가 버린 후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승철은 반동으로 큰 각을 그리며 회전하는 문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뜻 모를 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느리게 옮긴다. 입술 끝에 걸린 마티니 잔이 기울여지고 무색투명한 액체가 입술 사이로 흘러갈 때쯤 발걸음이 멈춰선 그 앞으로 정리가 한창인 테이블 모서리에 17이라는 숫자가 금박을 입고 박혀 있었다. 그 앞에 선 승철의 손가락 끝에 걸린 칵테일 잔이 가볍게 반 바퀴쯤 돌았다. 좀 전에열린 문틈으로 윤정한의 깨물린 입술 끝을 본 것도 같았던가, 싶은 생각이 어렴풋이 스몄다가 바닷물 빠지듯 흘러 나간다.

곧 자리를 잡고 스툴에 걸터앉은 승철의 시야로, 덜 자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넥타이를 조인 정한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희미하게 울리던 백 그라운드 뮤직BGM이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EDM으로 바뀌었다. 잘게 쪼개진 비트에 낮게 깔린 신디사이저 기계음이 은근히 집중력을 흩트리는 탓에 다리를 꼬고 앉은 승철은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며 손가락에 걸린 칵테일 잔을 가볍게 돌렸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카드를 셔플하는 정한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그의 시야 끝에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자리 잡는 것이 걸쳐졌다. 차르륵 소리를 내며 정한의 손 안으로 쏟아진 카드가 정리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승철은 칵테일 잔을 들어 마티니 한 모금을 들이킨다. 싸한 알코올이 목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조용히 눈가를 찌푸렸다. 샹들리에 조명이 밝고, 흐르는 음악이 시끄럽고,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치장이 요란스럽다.

습관적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던 승철의 시선이 문득 정한의 시선 끝에 걸리는 찰나, 52장의 카드 스택을 쥔 정한의 손이 그것을 철제 슈케이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 케이스 틈으로 밀려온 카드 뒷면의 어지러운 패턴에서 길게 뻗은 정한의 손으로 시선을 옮긴 승철의 귓가로 들리는 한 마디Welcome, lady and gentlemen.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Left is the first turn.” (왼쪽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손을 들어 승철을 가리킨 장한이 찬찬히 제 앞에 앉은 이들을 시선으로 훑으며, 슈케이스에서 카드 세 장을 빠르게 빼내어 승철 쪽으로 밀듯이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승철은 제 옆의 낯선 이들이 카드를 받을 동안 끄트머리를 들어 패를 확인하고서 뒤집어진 채 제 앞으로 끌고 와 가지런히 정렬해 두었다. 하트 5, 다이아 J, 그리고 스페이드 9. 승철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곧 카드 배분이 모두 끝나고, 슈케이스 위로 손을 가지런히 모은 정한이 입을 열었다.

 

 

 

“Choose one card, and turn it.” (카드 한 장을 선택해 뒤집어 주세요.)

 

 

 

그의 말이 끝나고, 승철의 바로 옆에 앉은 남자부터 카드 한 장을 뒤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스페이드 8이었다. 이어 승철이 뒤집은 카드는 가운데에 위치한 스페이드 J이었으며, 가장 오른쪽에 앉은 여자와 그 옆의 남자는 각각 하트 2와 하트 4를 뒤집어 내려놓았다. 적어도 다음 턴까지는 승철이 첫 번째 순서였다. 그는 오픈된 카드를 제 카드 맨 오른쪽으로 옮겨 정리하며 마티니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듯 한 모금을 들이켰다. 정한은 슈케이스에서 카드 한 장을 빼내어 쥐고 승철 쪽으로 내밀며 오픈시켰다. 첫 번째 오픈카드는 하트 9였다. 미묘하게 입 꼬리를 당긴 승철이 정한에게만 보이도록 살짝 웃어 보이고, 왼손을 들어 마티니 잔을 만지는 척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흐르는 EDM 비트에 맞췄다는 걸 놓칠 리 없는 정한은 역시나 승철에게만 보이도록 가볍게 웃어 보였다. 다음 순서의 플레이어에게 카드를 내미는 것을 꽤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승철은, 제 옆의 남자가 받은 카드가 클로버 8인 것을 확인하고서 미세하게 표정이 굳은 것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Hey, Mr. Navy suit.” (이봐, 남색 수트.)

“Me?” (?)

“Yeah. Are you a COUPLE?” (그래, . 혹시 너네 둘 커플인가?)

I and who?” (나하고 누구라고?)

“You and that guy next to you.” (너하고 네 옆에 있는 저 남자 말야.)

 

“Hey, he is MY boyfriend!” (이봐요, 이 사람은 내 남친이라고요!)

 

 

 

떠 보듯 장난스레 던져진 승철의 물음에, 질문을 받은 당사자남색 수트를 걸친 금발의 사내는 퍽 당황한 듯 보였고, 졸지에 게이 커플로 엮인 그 옆의 남자는 입을 닫고 있긴 했으나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 앉은 녹색 눈의 여자는 영국식 강세로 승철에게 쏘아 붙이듯 대꾸했다.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던 정한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가 웃음을 꾹 참아 삼키며 빼낸 카드를 여자에게 내밀었다. 다이아 9. 여자는 제 패가 나쁘지 않아 좀 전의 일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승철은 가만히 정한을 올려다보고, 슬쩍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보였다. 첫 번째 턴은 남색 수트의 남자 쪽으로 돌아갔다.

Your turn, 정한이 그를 가리키며 말하자 남자는 손에 쥐고 굴리던 녹색 칩 여러 개를 드문드문 칩이 놓인 베팅 존으로 밀어 놓았다. 그러나 뜬금없게도 그가 새로 받은 오픈카드는 다이아 2였다. 끝에서 여자가 비웃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승철은 가만히 그가 베팅한 칩의 개수를 헤아렸다. 한 개에 10달러니 총 50달러를 건 것이었다. 제 오른쪽에 색깔별로 쌓아 둔 칩들을 툭 건드려 쓰러뜨린 그는 좀 전의 남자가 건 것만큼의 칩을 가져다 베팅 존에 놓고 정한이 건네는 카드를 받아들었다. 하트 8, 제 옆의 남색 수트가 테이블을 가볍게 내려치는 것에 승철은 키득 소리 내어 웃었다. 턴이 돌아 세 번째로 카드를 받은 여자가 9 원 페어를 만들자 첫 번째 턴이 그녀에게로 넘어갔다. 말없이 가만히 카드를 확인하던 세 번째 자리의 남자는 제 턴이 되기 무섭게 카드를 뒤집으며 Die, 하고 읊조렸다. 승철이 세 번째 턴이 되자 정한이 문득 그 쪽을 응시했으나, 눈이 마주쳤을 때 최승철은 아랑곳 않고 경쟁자가 줄어든 것에 상당히 기뻐하고 있었다적어도 정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슬롯머신 쪽에서 누군가 잭팟이 터진 듯 소리를 지르는 틈을 타 한숨을 내쉰 정한은, 금세 표정을 싹 바꾸고서 가볍게 미소를 머금은 채 여자 쪽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뒤집어진 카드는 클로버 4였다.

 

 

 

“Oh, my luck is over.” (, 내 운은 여기까진가 봐.)

 

 

 

잔뜩 아쉬운 표정으로 제 남자친구에게 속삭인 여자는 이내 카드를 내려놓고 5달러짜리 칩 두 개를 베팅 존으로 던졌다. 승철은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두 번째 턴이었던 남색 수트의 카드가 별 볼 일 없는 것을 보고서 조용히 웃음을 흘려주었다. 남자는 승철의 카드도 별 볼 일 없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지만만약 그렇다 해도 우승은 그의 손을 들어주지 못한다. 그가 완성한 건 8 원 페어였으므로.

곧 정한의 손이 승철에게로 카드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승철은 기대감 없이 카드를 뒤집었다가, 이내 씩 미소 지으며 쌓아 둔 녹색 칩을 반쯤 뚝 잘라 베팅 존으로 내려놓았다. 차르륵 쏟아진 칩들이 대충 세어도 10개는 넘을 것 같았다. 정리된 카드 맨 오른쪽에 자리 잡은 세 번째 오픈카드 위에는 클로버 9개가 그려져 있었다.

투 페어 완성, 승철이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마지막 턴은 모두에게 히든카드가 돌아가는 턴이었다. 승철은 그것을 열어보지도 않고서 맨 왼쪽 끝으로 밀어 놓고 여유롭게 마티니 잔을 들어 홀짝였다. 제 옆에 앉은 남자는 마지막 카드에 목숨을 건 듯 했으나, 그마저도 쓸 만한 카드는 아니었던 듯싶었다. 원 페어 이상을 기대한 것 같았던 여자도 승철에게 J 원 페어가 메이드 되자 아예 포기해선 들고 있는 칩을 손에 쥐고 굴렸다. 중구난방으로 어질러져 있던 칩들을 색별로 정리하는 정한에게, 승철은 모르는 척 넌지시 물었다.

 

 

 

“Hey, Mr. Yoon. Do you have a boyfriend?” (윤정한 씨, 당신 남자친구 있어요?)

“Sir, sorry but I’m straight.” (고객님, 죄송하지만 전 스트레이트입니다.)

 

 

 

, 윤정한이 스트레이트? 웃기지도 않네. 승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채 일부러 연기하듯이 Oh, I’m sorry. 하고 대꾸했다. 눈가를 살짝 찌푸리는가 싶던 정한은 이내 개수가 제일 많은 녹색 칩을 10개 단위로 쌓으며 건성으로 물었다.

 

 

 

“Do you wanna be a COUPLE with me?” (나랑 연애라도 하고 싶은 거예요?)

“Yeah, It’ll be fantastic, isn’t it?” (그럼, 죽일 것 같은데. 아닌가?)

 

 

 

능청스런 대답에 정한이 픽 실소를 흘린다. 웃기지도 않아, 저 따위로 말해 놓고서 먼저 발 뺄 거면서. 조금 표정이 굳은 채 입술을 잘근 물었다 놓은 정한은 이내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플레이어들을 내려다보았다. 승철은 티라도 내듯 제 왼손을 정한의 시야에 걸리는 데다 놓고 일정하게 두 번씩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어 그의 음성이 들려온다. Game’s over. Turn your cards. (게임이 끝났습니다. 카드를 뒤집어 주세요.) 진작에 게임을 포기한 세 번째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각자 메이드한 패를 오픈해 딜러 쪽으로 밀었다. 결과는 최승철의 우승. 남색 수트는 8 원 페어를, 여자는 9 원 페어를 메이드 했다. 쌓여 있는 한 무더기의 칩을 모두 끌어 온 승철은 흐트러진 모양을 바로 잡아 정렬해 두고서 다시금 마티니 잔을 들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알코올에선 묘하게 단 맛이 났다.

 

 

 

“Total amount of bettings are 245 dollars. Five minutes later, next game. Thanks.” (총 베팅 금액은 245 달러입니다. 5분 뒤 다음 게임이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드를 쓸어 모아 가볍게 셔플한 후 뒤집어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은 정한은 목을 죄인 넥타이를 가볍게 풀며 자리를 슬쩍 떴다. 일부러 플레이어 쪽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그의 손끝이 승철의 등을 쿡 찌르고 지나갔다. 승철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정한의 발걸음이 향하는 반대편 구석진 곳으로 시선을 두다가, 이내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어깨를 돌리는 시늉을 하면서 그 쪽으로 향했다.

슬롯머신 돌아가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테이블 17 정반대편 구석에서, 정한은 벽에 기대어 선 채 입술을 잘근 씹었다. 떨어뜨린 그의 시야 안으로 잘 닦여 반질거리는 구둣발이 멈춰서고, 이내 단단한 손끝이 맞물린 입술을 문지르고 지나갔다. 고개를 든 정한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짓 좀 하지 마. 여기 내 일터야.”

알아. 일터라는 사람이 한낱 고객한테 나랑 사귀고 싶냐느니 하는 말을 하고 그러나?”

언제는 나보고 그렇게 하라며. 왜 시비야?”

네가 귀여우니까? 입술 깨물면 흉 져, 시간 없으니까 왜 불렀는지는 얘기해 줘야지?”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다시피 하고서 웃음을 가득 담아 보인 승철에 정한은 무어라 더 쏘아 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작게 내쉰 그가 무의식중에 입술을 꾹꾹 눌러 깨물다가, 집요한 시선이 입술에 와닿는 것을 느끼고 이내 혀를 내어 제 입술을 가볍게 축이며 목소리를 내었다. 승철의 손은 어느새 정한의 머리칼에 닿아 그것을 귀 뒤로 넘겨주고 있었다.

 

 

 

별 거 없어. 당신, 어디까지 갈 거야?”

? 모르지, 되는 데까지?”

다음 게임은 뭘로 할 건데?”

풀 하우스? 메이드 되는 거 보고 알려 줄게. 너무 초조해하지 마, 아무도 모르니까.”

 

 

 

누가 언제 초조해했다고, !

정한의 귓가에 입술을 두고 읊조린 승철이 정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테이블 17 쪽으로 걸어 나가자 시선을 돌린 채 대꾸하던 정한이 입술을 꾹 깨물고 목소리를 조금 높여 그를 불렀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머리칼을 풀어 대충 손으로 빗어 내리고, 다시금 정갈하게 그것을 모아 묶은 그는 풀린 넥타이를 꽉 조이며 승철보다 조금 늦게 테이블로 걸어 들어갔다. 초조해하는 건, 나인 걸까. 아무도 모르게 실소를 흘린 정한은 슈케이스에서 카드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쌓아 둔 카드와 함께 셔플하고서 다시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게임은 승철이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전 판에서 부진하더니 처음 오픈한 카드가 스페이드 K였던 세 번째 자리의 남자는 곧 승철이 Q 원 페어를 만들자 두 번째로 밀려났다. 남색 수트는 메이드 할 여지가 전혀 없는 패에처음 받은 세 장 중에 그나마 오픈할 수 있었던 게 클로버 6인 것 같았다.승철이 원 페어를 만들자마자 포기를 선언했다. 아까와는 달리 입을 닫은 채 고군분투하던 여자도 카드를 테이플 위로 집어던지며 Die를 외쳤다. 이제 둘만 남은 것이다. 더 받을 수 있는 카드는 세 장, 현재 승철이 보유하고 있는 카드는 Q 원 페어하트, 다이아, 그리고 오픈되지 않은 클로버 Q와 스페이드 7.

그러니까이미 그의 손에는 트리플이 쥐어져 있었다.

 

 

승철은 지난 판보다 적게 쌓인 칩을 정리하는 정한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이내 제 왼손을 들어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아까보다 좀 더 빠른 비트의 EDM이 흘러나오는 것에 맞춰 손을 움직이자, 그것을 시야 끝에서 바라본 정한이 픽 실소를 흘렸다. 신났네, 입속말로 중얼거리고서 고개를 들어 올린 정한이 세 번째 오픈 카드를 승철에게 건넸다. 하트 7이다. 승철의 입 꼬리가 눈에 띄게 말려 올라간다. 정한은 그 쪽에만 들릴 듯 작고 빠르게 속삭였다.

 

 

 

“Five minutes later, shift.” (5분 뒤 교대예요.)

“Oh, I’m really sorry.” (, 정말 유감이네요.)

“You want more game?” (더 게임하고 싶으신가 봐요?)

“Yeah, with YOU.” (, 당신하고.)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뱉은 마지막 말은 승철이 함꼐 플레이 중인 세 번째 자리의 남자에게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었다.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싶어 승철을 응시했던 정한은 그가 씩 웃으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자 표정을 풀고서 그 남자에게로 오픈카드를 건넸다. 사실 그도 패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 현재 승철은 Q 원 페어였고, 남자는 J 원 페어가 막 메이드 된 상태였다. 그와 그의 여자친구 사이에 쌓인 칩에서 회색 칩 5개를 들어낸 남자가 베팅 존으로 그것을 던졌다. 500달러? 승철은 제 입술을 느리게 혀로 핥아 축이며 얌전히 뒤집어진 카드 끝을 들어 다시금 새겨진 숫자를 확인한다. 남자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만들어진 풀 하우스. 순서는 다시금 승철 쪽으로 돌아간다.

 

 

 

두 번의 카드 배분과 한 번의 베팅이 끝난 후, 베팅 존에는 꽤 큰 금액의 칩들이 드문드문 쌓여 있었다. 기본베팅 금액5달러을 제하더라도 좀 전에 남자가 건 500달러에 승철이 굳이 콜 할 필요 없으면서 똑같은 금액만큼을 건 탓으로 대략 1000달러 이상이 베팅된 셈이었다. 승철은 연신 테이블을 두드리며 칩을 정리하는 정한의 손끝으로, 가볍게 흘러내린 머리칼로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곧 칩을 가지런히 쌓아 둔 정한이 고개를 들어 게임의 끝을 알렸다.

 

 

 

“Game’s over. Turn your cards.” (게임이 끝났습니다. 카드를 뒤집어 주세요.)

 

 

 

결과는 보나마나 뻔했다. 남자가 투 페어를 만들기는 했으나승철의 패는 풀 하우스였다. 일부러 마지막에 받은 히든카드부터 차례로 오픈하는데, 먼저 스페이드 2가 나오자 기뻐하던 남자는 승철의 손끝에서 클로버 Q가 뒤집어져 나오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시금 베팅 존에서 칩들을 끌어 온 승철이 한 가득 쌓인 제 칩들 주위로 새로 딴 칩들을 줄지어 세워 두었다.

잠깐의 브레이크 타임, 정한은 테이블 위에 흩어진 카드를 모아 셔플했고 승철은 빈 마티니 잔을 굴리다 지나가는 웨이트리스를 잡아 새 마티니 한 잔을 주문했다. 남색 수트는 별 생각 없는 표정을 하고서 슬롯머신 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고, 커플은 무언가 전략을 짜는 듯 딱 붙어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까처럼 조금 더 드라이한 마티니가 승철의 손에 들릴 때, 카드를 슈케이스에 집어넣고 케이스 뚜껑을 닫은 정한이 세 번째 게임을 열었다.

 

 

 

“Game starts. Left is the first turn.” (게임을 시작합니다. 왼쪽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정한의 손이 움직이고, 그의 손끝에 달라붙듯 카드 세 장이 딸려 나온다. 승철은 새로 채워진 마티니 잔을 들어 한 모금을 천천히 들이켰다. 제게로 건네진 카드 세 장을 차례로 테이블에 놓고서, 역시나 끄트머리를 들어 숫자를 확인한다. 다이아 9, 스페이드 A, 그리고 스페이드 10. 승철은 한 쪽 입 꼬리를 당기며 고개를 들어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시선이 마주치고, 정한은 아주 미세하게 어깨를 으쓱하고서 다음 플레이어에게 카드를 건넸다. 테이블을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던 승철은 맨 오른쪽에 놓인 스페이드 10 위로 손을 두었다. 여자까지 모두 카드를 배분받은 이후 카드를 차례로 오픈하는데, 여자의 수중에는 다이아 K, 남색 수트에게는 하트 8이 들려 있었다. 전력의 일환인지 별 볼 일 없는 카드를 오픈한 세 번째 남자는 제 베팅 차례가 되자 게임 포기를 선언했다. 나름 머리 쓴 건가. 승철은 가만히 오픈된 스페이드 10 카드 위를 톡톡 두드리며 머리를 굴렸다. 여자가 첫 번째 턴을 가져갔고, 그는 정한이 칩을 정리해 놓는 동안 혹시나윤정한이 물리적으로 카드를 조작하는 경지에까지 이른 건가, 싶은 생각까지도 해 보고서 혼자 헛웃음을 웃었다. 한 가지 이유라고 하면, 여자가 받은 첫 번째 오픈 카드가 하트 K였기 때문에.

승철은 제게로 돌아온 하트 A를 받아들어 놓고 마티니 잔을 들어 반 정도를 단숨에 비웠다. 물론 남색 수트야 별 볼 일 없는 클로버 6을 받았다고 하지만, 여자는 두 턴 만에 K 원 페어를 메이드 해 버렸다. 물론 A 카드가 안 좋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썩 맘에 드는 것도 아닐 테지. 원 페어를 만들지 않고 게임을 끌고 나가는 건 스트레이트거나로스플이거나, 두 가지 선택지뿐이므로 승철은 다만 둘 중 어느 것이라도 메이드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여자가 이중 스파이인가를 고민해 봐야 하는 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승철은 한 쪽 입 꼬리를 당겨 쓰게 웃었다. 정한이 그것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제 의도와 상관없이 터진 여자의 운에는 적잖이 놀랐지만.

 

 

여자가 크게 베팅을 하면 그것에 콜 하는 식으로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베팅 존에는 꽤 큰 금액의 칩들이 쌓이고 있었다. 세 번의 베팅이 끝난 후 남색 수트는 6 원 페어를 만들었고, 여자는 K 트리플을 만들었으며, 따라서 승철은 세 명 가운데 세 번째 턴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현재 그의 앞에는 오픈된 스페이드 A, 하트 A, 스페이드 K, 그리고 오픈되지 않은 다이아 9와 스페이드 10이 자리하고 있다. 마티니 잔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손끝에서 가볍게 굴리며, 승철은 제가 가진 스페이드 문양의 카드 세 장을 곱씹는다. 정한이 만들어 줬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저도 몇 번 만들어본 적 없는 데다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더더욱 드문 전설의 패가 메이드 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체면만 좀 섰으면 된 거지. 승철이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이미 여자에게는 별 볼 일 없는 클로버 7 카드가 들어가 있었으며, 남색 수트는 다이아 6을 받아 6 트리플을 막 완성한 찰나였다.

승철은 느리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슈케이스에서 카드를 빼낸 정한이 그것을 오픈해 승철에게 건네는데, 아주 미세한 각도였으나 제 쪽으로 먼저 앞면이 보이게끔 오픈하던 것을 마주하고서 그는 픽 웃음을 흘렸다. 받아든 카드는 스페이드 Q. 그것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여자 쪽에서 부정확한 음성이 작게나마 들려 왔다. 의심하는 거겠지, 승철은 그러나거기서부터 확신이 선다. 5개 마련해 둔 블랙 칩 두 개를 집어든 그가 베팅 존에 그것을 슥 밀어 놓았다. 신경을 긁어내리던 EDM이 끝나고, 카지노를 가득 채우는 배경음악이 다음 노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Fall Out BoyCenturies? 승철은 익숙한 노랫말에 입속에서 울리듯 허밍을 덧붙이며 손을 거두었다.

 

 

 

일전에, 그러니까 정한과 암호를 공유하고 시간이 좀 흘렀을 때였을까정한이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었다. 카드를 셔플하는 연습을 하다가, 스트레이트를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카드를 섞는 방법을 연구해본 적이 있었다고. 승철 저야 어차피 카드 셔플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단순한 호기심에 그 방법을 물었었는데, 생각보다 어려워서 머릿속에 잠시 들어앉았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싹 지워졌던 것 같다. 다만 카드를 셔플할 때 의도적으로 한 문양으로 정렬된 카드 스택을 나머지 무더기에 사이사이 끼워 넣고 셔플하면 된다, 라고 했었던 것도 같았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정한과 처음 합을 맞췄던 지하 도박장에서, 승철은 겜블 인생에서 세 번째 로스플을 메이드 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 날 밤에,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간 도박장 안에 정한과 둘이 남아 몇 천 쯤 됐던 돈을 세면서 뭐라고 했었더라.

 

마지막 히든카드를 받아 들며, 승철은 베팅 존에 놓인 제 블랙 칩 5개와 기타 가진 칩의 절반가량이 쌓인 칩 무더기를 정리하는 정한의 손끝을 가만히 응시하고서, 그 때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로스플 메이드 한 건 네 셔플이 컸던 것 같다. 잘 했어.

그게 끝이에요, 설마?

이 돈 절반 너 준다니까. 뭘 더 바라?

 

당신, 나랑 잘래요? 로스플은 마티니에, 당신 차에, 당신 룸 넘버잖아.

 

 

 

그 때좀 더 자란 단발머리를 쓸어넘기며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생긋 웃던 윤정한에게, 최승철은 무슨 말을 했었더라. 손을 들어 넥타이를 살짝 당긴 승철이 얌전히 뒤집힌 히든카드 끄트머리를 들어 새겨진 숫자를 확인하고서, 고개를 들어 윤정한을 올려다보고, 이내 그 얼굴 가득 환하게 미소를 담으며 제 수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낯익은 문양이 새겨진 차 키, 승철의 메르세데스 벤츠였다.

 

 

 

“Mr. Yoon, you know that?” (윤정한 씨, 그거 알아요?)

“No, I don’t.” (아뇨, 모르는데요.)

“I said nothing, yet.” (나 아직 아무것도 안 말했는데?)

“What do you wanna say, then?” (그럼 뭘 말하고 싶으신데요?)

 

 

 

세 판의 게임 가운데 가장 많은 칩이 쌓인 터라 고개 숙여 그것을 정리하던 정한이 문득 고개를 들어 승철을 마주하는데,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승철의 왼손 바로 옆으로 낯익은 차 키가 놓여 있자 정한의 두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정말로 제 의도가 아니었던가. 승철은 백 그라운드 뮤직 비트에 맞추듯 손가락을 느리게 움직여 테이블을 두드리며 정한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정한이 늘 믿지 못하는, 그 낮게 깔린 음성이었다.

 

 

 

“Room 808, this is mine.” (808, 내 룸이에요.)

 

 

 

드럼 비트가 큰 음악 소리에 반쯤 묻히다시피 해서 그것을 전해들은 정한이 미세하게 입 꼬리를 끌어올린다. 그 쪽으로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있던 승철은 자세를 고치며 마티니를 들어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칩 정리를 마친 정한의 손이 단정하게 채워진 유니폼 베스트 마지막 단추 위로 겹쳐 놓여졌다. 게임 종료를 알리고, 여자와 남색 수트가 트리플을 메이드 한 자신의 패를 앞 쪽으로 밀어 모두에게 보이도록 했다. 승철은 느리게 손을 움직여 스페이드 A, K, Q를 차례로 앞 쪽으로 밀어 두고, 처음 받았던 히든카드 가운데 한 장을 뒤집어 앞으로 밀었다. 스페이드 10이다. 이어 마지막 카드를 집어든 그의 손이 뒤집어진 채로 먼저 그것을 앞으로 밀어 놓고, 제 쪽에서부터 느리게 뒤집는다.

 

스페이드 J.

승철의 앞에 줄 지어 놓인 카드 다섯 장,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다.

 

 

 

 

 

 

 

승철이 베팅 존 가득 쌓인 칩들을 모두 챙겨 일어설 때, 마침 정한의 교대 시간이 되었고, 여전히 의문을 감추지 않은 채 자리를 뜨는 남색 수트와 커플을 뒤로 하고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승철의 옆으로 넥타이가 조금 풀린 정한이 다가와 섰다. 별 말없이 승철의 어깨에 걸린 묵직한 가방을 들어 본 정한은 생각보다 꽤 되는 무게에 놀라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않고 여과 없이 뱉어냈다. 일정한 박자로 숫자가 바뀌는 전광판을 올려다보던 승철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신났네, 당신. 이래저래 돈 많이 벌고 좋으시겠어.”

가방 안 무거워? 같이 들까?”

됐네요, 여왕님한테 이런 거 맡겨서 뭐 해.”

 

 

 

눈에 띄게 기분이 좋은 티를 팍팍 내며 건네진 정한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한 승철이 곧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먼저 걸어 들어갔다. 정한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는 닫힘 버튼을 누르고, 반질반질해 얼굴이 비치는 엘리베이터 벽을 바라보며 부스스해진 제 머리를 다시 묶었다. 승철은 가만히 벽에 기대어 서서 정한이 하는 모양을 보고 있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라 작게 웃음을 흘렸다.

 

좀 전에그러니까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게임 중간에 떠올렸던 윤정한과의 과거에서, 자신이 그에게 무슨 대답을 했었는가가 떠오른 것이다. 그게 좀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었던가. 승철은 넌지시 그렇게도 생각해 보며 그 때의 제 대답을 곱씹는다.

 

 

 

그래 봤자 새끼고양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애 건드리는 거 별로다.

 

 

 

그리고 정한을 돌아본다. 놀리기에 귀여운 맛이 있는 그는 여전히 새끼고양이라는 애칭 아닌 애칭이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나최승철은 윤정한을 건드리고 싶어졌다. 윤정한이 숨길 수 없는 단 하나의 감정을 무시하고 싶지 않아진 것이다. 엘리베이터 전광판의 숫자가 막 5에서 6으로 바뀔 때, 거기까지 결론을 내린 승철은 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연다. 막 머리를 다 묶은 정한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서 그를 돌아볼 때였다.

 

 

 

윤정한. 너 나랑 잘래?”

……?”

, 싫어?”

 

 

 

이거 지금 진심인데, 장난 아니고.

엘리베이터 벽에 부딪쳐 잔뜩 울린 승철의 음성이 너무나도 일상적이어서, 정한은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가만히 그것을 보고 선 승철은 픽 웃음을 흘리며 한 걸음을 그 쪽으로 옮긴다. 세 걸음 째 되었을 때 정한의 등이 엘리베이터 벽과 완전히 닿고, 숨결마저 느껴질 법한 거리에서 두 사람의 맞닿은 시선이 이리저리 얽혔다. 유달리 진득한 승철의 시선을 다 받아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정한에게, 승철이 낮게 읊조렸다. 넌 여전히 고양이 같은 맛이 있지만

 

 

 

어쨌든 그게 날 끌어당기기에는 충분했어.”

…….”

여왕님, 그래서 싫어?”

 

 

 

장난스레 뱉어진 물음에 정한은 가까이 다가선 승철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서, 대답 대신 가볍게 미소를 걸며 제 입술을 승철의 입술 위로 맞댔다. 눈이 반쯤 접히는 웃음은 이전과 같았다. 명백한 도발, 승철은 입술이 맞닿은 채 실소를 흘리고, 이내 손을 들어 정한의 뒷머리를 감싸며 그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퍼즐 맞춰지듯 맞물린 입술 틈으로 순식간에 달아오른 두 개의 살덩이가 오가는 순간, 승철의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땡 소리를 내며 열린다. 그의 어깨를 쥐어 가볍게 밀어낸 정한이 조금 가쁘게 숨을 고르며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이내 어깨를 쥔 채 팔에 힘을 줘 열린 문 뒤로 밀어냈다. 승철이 뒷걸음질 치다시피 해서 제 룸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맞붙은 두 몸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고, 붉은 빛이 도는 정한의 입술 위로 잘게 입을 맞추던 승철은 제 룸 앞에 다다랐을 때 다시금 그것을 머금으며 뒷주머니를 뒤적여 카드키를 꺼내었다. 입 안을 바쁘게 헤집는 승철을 받아내던 정한은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다시금 힘 줘 그를 밀어내고, 카드키를 쥔 그의 손을 내려다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문 안 열어? 여기서, 뭘 더 어쩌려고.”

여기서 하는 것도 스릴 있지 않나?”

 

 

 

제발, 오늘은 당신한테 욕 하고 싶지 않아.

한쪽 눈을 가린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긴 정한이 승철의 손에 들린 카드키를 뺏어 들어 문을 열었다. 딱 붙어 엉키다시피 한 두 쌍의 구둣발이 겨우 룸 안으로 밀어 넣어지고, 현관에 선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맞물렸다.

 

 

 

철컹, 원주를 그리던 현관문이 퍽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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