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노리플라이, 타루 - 조금씩, 천천히, 너에게

    여자친구 - 물들어요

 

 

 



반짝반짝 두근두근

[쿱정전력 별이 아름답네요]

 

 

 

 

 

w. (@HYEMM_SVT)

 

 

 

 

 

 

 

 

 

 

네에, 승철 씨. , , 이제 잘 거예요. 공부요? 맨날 하던 건데요, 그럼 잘 돼 가죠. 으응, 너무 걱정 마요. , 아 진짜, 제가 어린 애도 아니고. 안 잡아 가요, 걱정 마. , , 지금은 어디예요?

 

 

 

, 저 지금은 영국이에요. 이틀 뒤에 스페인으로 가려고요.

 

 

 

서울 변두리 달동네, 끝없이 늘어선 계단을 숨이 차도록 밟고 밟던 정한이 마지막 계단을 오름과 동시에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귀에 딱 붙인 휴대폰 아래 마이크를 막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것은 자꾸만 저를 걱정하려 드는 승철을 위한 일종의 연기인 셈이다. 조금 전에 도착해서 점심 먹을 시간을 놓쳐 버렸다는 승철의 은근한 투정에 몰래 미소 지으며, 정한은 손목시계를 곁눈질하고서 머리를 굴렸다. 아마 영국은 한 시 반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은 지금 열한 시 반. 정한의 머리 위로 달빛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밥 거르면 안 돼요. 승철 씨 영국 가면 피시앤칩스 먹어 본다고 했었지 않아요?”

, , 맞네, 그랬었죠? , 역시 사람은 정한 씨처럼 똑똑하고 봐야 돼. 제가 그럼 점심으로 먹어보고 어땠는지 꼭 말해 줄게요.

네에, 승철 씨 후기 기다리고 있어야겠다.”

, 뭐야. 아깐 곧 잔다면서요. 전화 끊고 바로 안 자면 내가 혼낼 거예요, 알았죠?

 

 

 

……알게써요오오. 승철이 단호하게 반문한 탓에 입술을 삐죽 내민 정한이 누가 들어도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다른 무엇보다 전화를 끊어야 할 타이밍이 다가오는 탓에 맘이 쓰린 까닭이다. 입술을 달싹이던 정한은 고개를 들어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보름이 다가오는 모양인지 통통하게 차오른 달이 낡은 가로등보다도 더 밝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겠다는 승철을 붙잡은 정한의 입 밖으로 오늘도 실없는 문장이 흘러나왔다.

 

 

 

, , 승철 씨.”

, 왜요?

, 여기 있잖아요, 오늘 달이 되게 예뻐요.”

, 진짜요? 그럼 사진 찍어서 보여 줘요. 이번에는 꼭 보내 줘야 돼요, 알았죠? 그럼 나 진짜 밥 먹으러 갈게, 이따 봐요!

 

 

 

늘 그랬듯이 사진을 찍을 것을 당부하며 마지막 인사를 남긴 승철에게 정한은 휴대폰 액정 위로 손바닥을 펴 휘휘 흔들었다. 아마 식당을 수소문하기 위해 발걸음을 막 옮길 승철 또한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휴대폰 위에다 손을 흔들 것이었다. 그래, 그 웃음에는 파란 하늘이 담겨 있고, 눈이 부신 달빛이 묻어 있고, 승철이 좋아해 마지않는 별빛이 물결치고 있겠지. 멀리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달을 올려다보던 정한이 금세 뻐근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천천히 발을 떼었다.

 

 

 

오늘도 실패했어, 오늘도. 윤정한 멍청이 아냐?”

 

 

 

장난스레 자책하는 말끝에 울음이 섞여들 것 같아서, 정한은 어깨 위에 무겁게 걸린 가방 끈을 꾹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작게 흐르는 한숨이 공기 중으로 빠르게 섞여 들었다. 달동네 꼭대기, 조그마한 옥탑방으로 향하는 정한의 걸음 뒤로 달빛이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가난한 내가 반짝반짝한 승철 씨를 사랑해서, 수백 번은 읽고 또 읽었던 시구를 농담처럼 중얼거린 그가 이내 자조하듯이 웃음을 흘리고 그 자리에 다시금 멈춰 선다. 휴대폰을 꺼내 들어 카메라 어플을 켜고, 한 뼘이 조금 안 되는 자그마한 프레임 안으로 달을 밀어 넣어 본다. 카메라 사양이 좋지 않아 달빛이 이리저리 산란되는 게 썩 보기 좋은 건 아니었지만, 중얼중얼 혼잣말을 뱉으면서도 승철에게 사진을 전송하는 정한의 입 꼬리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살짝 말려든 것도 같았다. 액정 위로 빠르게 움직인 손가락이 덧붙이는 문장 몇 개를 만들어냈지만, 정한은 다시 옥탑방 쪽으로 발을 떼며 그것을 모두 지웠다. 새로이 만들어진 말들은 늘상 반복되던 것들의 반복. 입술을 감쳐문 그가 열쇠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마당에 버려진 낡은 평상 위에 올려 두고서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둠 가운데 밝게 빛나는 채팅방에는 정한이 보낸 두어 장의 달 사진과, 그 아래 [사진 이상하죠ㅠㅠ][그래도 달이 예뻐요][그렇죠?] 하는 말들이 덧붙여져 있었다. 평상 위로 무거운 전공 책이 든 가방을 뒤엎고 나서야 열쇠를 찾아낸 정한이 손등으로 잘게 땀방울이 맺힌 이마 위를 쓸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액정 위로 그가 보낸 말풍선 옆의 숫자 1이 노랗게 떠 있다가 지우개로 지운 듯이 사라졌다. 쏟아 부은 것을 하나하나 챙겨 넣으며, 그는 승철이 제 꾸준한 달 얘기의 진의(眞意)를 모르길 바랐다. 액정 위로 승철의 말풍선이 통통 튀어 올랐다.

 

 

 

[와 달 ㅠㅠ 진짜 예뻐요 서울 가고 싶다..]

[거기는 안 더워요? 여기는 비가 와서 그런지 해 지면 쌀쌀해질 것 같아요]

[너무 걱정은 마요 조심할게요 ㅋㅋㅋㅋㅋ]

[이건 어제 찍었던 별 사진이에요 벨기에에서 ㅋㅋㅋ 벨기에 와플 짱 맛있었어요!]

[별도 예쁘죠?]

 

 

 

열쇠를 왼손에 꾹 쥔 채 가방을 한 쪽 어깨로만 둘러메고서 굽혔던 허리를 일으킨 정한이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액정을 내려다보며 작게 키득였다. 승철은 언제든지 말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말투로 문장을 구성해 왔었다. 그가 보낸 사진 위로 까만 하늘에 점찍은 듯 반짝이는 별들을 엄지로 괜히 문질러 본 정한이 조금 느려진 속도로 자판 위를 톡톡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별이 아름답네요, 하는 문장이 말풍선에 담겨 액정 위로 퐁 튀어 올랐다. 홀드 키를 눌러 화면이 까맣게 죽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은 정한이 그제야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츠메 소세키에 관한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달이 예쁘네요, 당신을 사랑해요.’ 라는 뜻으로, 그리고 별이 예쁘네요, 당신은 내 마음을 모르겠죠.’ 라는 뜻으로 번역했다는, 듣기만 해도 마음이 간질간질 떨리는 그런 이야기.

지난달에 만나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승철과 연락을 주고받는 동안 꾸준히 그런 말들을 남기고 있는 정한은, 오늘도 어제처럼 혼자 보내야 할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언제쯤 고백을 하겠냐고 늘 저를 자책하면서도, 지난달에 만났을 때부터 쭉 사랑에 빠져 버린 제 맘을 승철에게 들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을 안고서.

 

 

 

 

 

 

 

**

 

 

 

 

 

 

 

그러니까, 정한이 승철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5월 독일에서였다.

 

 

티오Table of Organization, 편성표라는 뜻이지만 주로 구직자들이 사람을 뽑다.’ 라는 뜻으로 씁니다가 늘 부족해서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3년 연속으로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나니 공부가 한순간에 딱 질려버린 탓이었다. 미친 척 하고 그날 부로 짐을 꾸렸다. 원래대로라면 시험에 합격한 이후 떠나려고 했던 독일 여행에 대해 정한의 부모님은 별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뒀다. 아마 제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로 들어가며 재밌게 놀고 올게, 했던 그의 눈가가 젖어있던 걸 아셨던 것일 테다. 생각보다 맛이 없었던 기내식을 푹푹 퍼 먹으면서 조금 울었던 것도 같았다. 대학교에서 수석 소리 듣던 건 전부 부질없다는 걸 독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겨우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울음을 삼킨 탓에 목이 잔뜩 멘 채 정한은 잠에 들었었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누가 잡아가도 모를 만큼 숙면을 취하고 있어서 승무원이 그를 깨워 줬었다. 어딘가 결연한 듯이 여행 가이드북을 손에 꾹 쥐고 게이트를 빠져나온 그의 첫 번째 행선지는 뒤셀도르프였다. 처음 여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베를린이나 뮌헨보다도 이곳이 먼저 눈에 들어온 까닭이라면 몇 가지를 들 수 있었다. 현지에 사는 한국인이 많아 여행하기가 편할뿐더러 국제 상업 도시인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한의 마음을 잡아 끈 것은 뒤셀도르프 소재의 톤 할레(Tonhalle)’였다. 클래식 연주회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콘서트가 열리는 이곳에 대해 음악적으로 끌린 것은 아니었고, 재건되기 전의 톤 할레에 세계 최대 규모의 천문대가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었다. 단지 그런 이유로 독일 여행을 계획한 것에 대해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측근들이 실없지 않냐는 말들을 똑같이 뱉고는 했지만, 다음 생에는 꼭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유년기의 다짐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는 정한으로서는 이곳이 최적이었다.

 

그래서거의 즉흥적으로, 아주 패기롭게 가이드북 하나만 든 채 뒤셀도르프 시내에 들어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 뭐야. 여기 아까 봤던 것 같은데.”

 

 

 

보기 좋게 길을 잃어버린 꼴이 되어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주위에서 다들 걱정할 때 큰소리를 뻥뻥 쳐댔던 정한은 과거의 자신을 자책하며 세 번째로 같은 골목에서 빠져나오고 나서 도로가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가이드북에서는 분명히 이 쪽 골목으로 들어가라고 했는데…….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퍽 아기자기한 그림체로 그려진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죽죽 그어 대던 정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여행 중인 한국인이라든가 현지에 사는 한국인이 지나갈까 싶어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따라 붙여 보았지만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이 몇 명 지나가지도 않았고, 그마저도 모두 출근하는 것처럼 정갈하게 옷을 차려 입은 누가 봐도 서양인들이었다. 자꾸만 터져 나오는 한숨을 애써 막지 않고 한참을 도로가에 앉아 있던 정한은 다리가 저려 올 때쯤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요금제 변경하고 올 걸……. 잔뜩 울상을 지은 채 가이드북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시야에, 문득 좀 전에도 이 길을 지나면서 스쳤던 것 같은 남자가 들어왔다. 유난히 검은 색 머리카락에 유난히 흰 피부, 딱 떨어지는 흰 셔츠에 차콜 색 슬랙스를 걸친 그는 셔츠 소매를 두 번 정도 걷어 접고서 목에 건 카메라를 들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피사체를 찾는 것 같았다. 사진작가인가. 작게 중얼거린 정한은 잘생겼네, 하는 뒷말이 나오려는 것을 급하게 입술을 깨물어 삼키고서 제 등 뒤를 두리번거렸다. 하필 이 타이밍의 도로가에는 저 남자와 그 둘 뿐이었다. 정한은 가이드북을 쥔 채 큰 결심이라도 한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봤자 그의 등 뒤에서 소심하게 손가락을 뻗어 어깨를 두드리고서 황급히 손을 숨겨 버렸지만.

 

 

 

……, 저기, , 익스큐즈 미.”

“Yeah, what’s the matter with you, sir?” (, 무슨 일이세요?)

, 그러니까, 캔 유……, 아 뭐였지?”

 

 

, 혹시 한국인이시면 편하게 하세요. 저도 한국인이거든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이름 대면 대개 감탄하는 대학교의 국어교육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한은 영어 수업도 곧잘 따라가는 명석한 학생이었으나, 안타깝게도 3년 간 내뱉지 않았던 기초회화가 급격히 퇴화된 탓에 영어 단어가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뒤섞였다. 목소리를 잔뜩 집어삼킨 채 한국말로 사족을 덧붙이며 누가 들어도 한국 사람이다 싶은 느낌으로 영어를 내뱉은 그에게, 눈앞의 남자는 입 꼬리를 당겨 웃음을 터뜨리며 별안간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정한의 눈동자가 흔들리다 못해 지진이 난 것처럼 요동치는 것을 마주하고 있던 남자는 이내 호탕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혹시 저 외국인인 줄 아셨어요? 그런 눈친데, 딱 보니까.”

, , 네에……. , 뭐랄까, 되게 외국인같이 생기셔서…….”

그런 소리 많이 들어 봤어요. 그치만 전 혼혈도 아니고 진짜 토종 한국인이에요. 고향은 대구고. 이제 편하게 물어 보세요, 제가 아는 한에서는 가르쳐 줄게요.”

 

 

 

조금 어색한 듯하면서도 유한 투로 대꾸하는 남자의 말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정한이 손에 쥐고 있던 가이드북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그 짧은 사이에 손바닥 위로 땀이 배어나와 허리춤에 손을 문질러 닦은 정한이 펼쳐진 가이드북 위로 지도에 그려진 궁전 모양의 건물을 손으로 짚었다. 저 여기 가려구요, 톤 할레. 근데 길을…… 자꾸 잃어버려서요. 금세 또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어뜨리는 정한에게, 남자는 양 볼의 보조개가 깊게 패도록 해사하게 웃어 보이고 가이드북을 덮어 제 옆구리에 꼈다. 멀거니 저를 바라다보는 정한과 시선을 맞추며, 남자는 마치 어느 영화에서나 나올 장면처럼 그렇게 내뱉었다.

 

 

 

따라 와요, 톤 할레라면 저도 자주 가는 곳이거든요. 이렇게 된 김에 오늘 하루 제가 가이드 해 주면 되겠다, 그죠?”

? ,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릴게요.”

 

 

양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꾸벅 숙인 정한에게 또 한 번 호탕하게 웃어 준 남자는, 가이드북을 아예 제 카메라 가방 안으로 밀어 넣고서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정한은 일단 이름도 모르는 마당에 고향이 대구인 것만 아는 이 남자를 따라가게 된 것이었다. 남자가 이끄는 길은 가이드북에 그려진 약도와는 정반대였는데, 얼마 안 가 정한이 그렇게나 찾던 톤 할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하고 웅장한 크기면서도 지붕처럼 얹어진 돔이 유려한 곡선을 그려내는 건물의 외양에 정한의 입이 천천히 벌어져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남자는 입구 앞에 서서 한참동안 위를 올려다보며 감탄해 마지않는 정한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다가, 이내 손가락을 들어 그가 제게 처음 말을 걸었던 것처럼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 저기, 안 들어갈 거예요? 웃음기 섞인 물음에 정한은 고개를 내저었으나,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야 끄트머리로 남자가 자꾸만 웃음을 짓는 게 왠지 묘한 기분이 들어서, 정한은 이리저리로 시선을 굴렸다.

 

 

 

아니, 근데 여기 진짜 멋져요…….”

안에는 더 멋질 텐데요?”

역시 그렇겠죠? 근데 정말, 정말로…… 벅찬 느낌이에요. 저 여기 꼭 와 보고 싶었거든요.”

, 진짜요? 보통은 베를린이나 뮌헨에 들렀다가 뒤셀도르프로 오던데, 오늘이 첫째 날이에요?”

, . 저 그, 뒤셀도르프 공항으로 바로 왔거든요. 여기가 예전에는 천문대였다고 해서 죽기 전에 꼭 와 보고 싶었어요. 제가 좀 그런 거에 대한 동경이 있거든요.”

아아, 그러시구나. , 근데 저희 일단 통성명부터 할래요? 일단 오늘 하루는 같이 다닐 텐데 저기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그죠?”

 

 

 

뭐에 홀린 듯 제 얘기를 쏟아 붓기 시작하는 정한의 눈이 빛나는 것을 그 모르게 응시하며, 남자는 먼저 한 발을 뻗어 계단 위를 밟았다. 어느새 시야 정면으로 들어온 남자의 물음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정한은 등 뒤로 둘러 멘 백팩 끈을 꾹 쥐고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스물여섯 윤정한이에요, 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마저도 남자가 직업이 뭐냐는 식으로 끊임없이 캐묻는 탓에 3년 연속 임용고시에 낙방했다는 것까지 다 말해 버렸지만.남자의 이름은 최승철이라고 했다. 우연찮게도 나이는 정한과 같고, 여행 작가라는 말을 덧붙였다. 보기와 다르게 퍽 낮은 그의 목소리가 두 사람이 막 몸을 밀어 넣은 공연장 내부의 텅 빈 공간으로 울려 퍼졌다. 정한은 남자의 이름승철, 을 입속에서 몇 번 굴려 보다가, 승철 씨, 하고 내뱉어 보았다. 꽤 기분 좋은 울림이 혀끝에서 맴돌다가 사라진다. 생긋 웃는 정한의 손목을 가볍게 끌어당기며, 승철 또한 그의 이름을 담았다.

 

 

 

정한 씨, 여기 안에 분위기 장난 아닌 카페 있는데, 아세요?”

, 검색하면서 본 것 같아요.”

잠깐 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가요, 우리. 제가 사실 여행 다니면서 별 사진을 찍은 게 몇 장 있는데, 그것도 보여 줄게요. 어때요?”

, 진짜요? 가요, 가요!”

 

 

 

별 사진이라는 단어에 다시금 잔뜩 들뜬 정한을 마주한 승철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마냥 차분한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걸음이 팔랑대는 정한에게 맞춰 주려 걸음을 빨리 하는 승철과, 그가 자연스레 잡아 쥔 손목이, 정한은 퍽 기분이 좋아서 그냥 웃어 버렸다.

왠지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아, 그의 웃음 속에는 파란 하늘이 물들어 있으니까. 무심코 떠오른 문장에 제가 놀라 고개를 내저은 정한은어쩌면 그 때부터 승철에게 반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승철은 정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프로페셔널한 여행 작가인 것 같았다. 특히 독일이 사진 찍기에 최적이라며 세 달째 살고 있다던 그는 거의 현지 가이드나 다름없었다. 이쯤 되면 팁이라도 줘야 되는 것 아니냐며 또 눈동자를 굴리던 정한에게 승철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오랜만에 여행하는 기분인데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고서 씩 웃는 승철을 마주하는 게 낯설도록 묘한 느낌이어서 정한은 괜히 잘 묶여 있던 머리를 풀어 다시 묶기를 또 몇 번 반복했다. 여행 첫째 날, 승철의 집 근처에 있다는 자그마한 식당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서 두 사람은 정한의 캐리어를 찾으러 공항 근처 전철역으로 향했다. 어찌 보면 혼자 가겠다는 정한에게 장난스레 길치를 들먹인 승철이 따라 붙은 셈이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지갑을 꺼내어 남아 있는 지폐를 세던 정한은 문득 승철에게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가성비 좋은 숙박시설 같은 거 있어요?

 

 

 

, 따로 호텔 예약 안 했어요?”

, 그런 편이 더 나은 것 같아서요. 계속 뒤셀도르프에 있을 것도 아니고, 베를린 쪽으로 갔다가 다시 여기로 와서 네덜란드로 갈 거거든요. 현지에서 직접 부딪쳐 보려고 했는데, , 사실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 혹시 정한 씨만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잠깐 있다 가실래요? 제가 쓰는 방 말고 다른 방 하나 비어 있거든요. 그래도, 혼자 다니면 좀 무섭고, 그러잖아요.”

 

 

 

일단 말을 던져 놓고서 생각보다 장황하게 이유를 끌어와 덧붙이는 승철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그를 바라보던 정한이 곧 표정을 풀고 입술 새로 웃음을 흘렸다. 승철 씨만 괜찮으면 그렇게 할게요. 진짜, 고마워서 어쩌지. 내일 아침에 제가 더 일찍 일어나서 밥 할까요? 장난스레 덧붙인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쉰 것도 같은 승철이 따라 키득 웃었다. 정한 씨 요리 잘 해요? , 아니요? 뭐예요, 그게. 그럼 승철 씨는 요리 잘 해요? , 아니요? , 진짜. 뭐예요. 시답잖은 대화 끝에 전철이 승철의 동네에 멈춰 서고, 그의 집으로 향하면서도 두 사람은 큰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웃는 일을 반복했다.

 

 

그런 영화 같은 만남이 자연스러워지고 익숙해질 무렵, 타지에서의 시간은 벌써 열흘이나 지나가 있었다. 승철은 4일간의 독일 여행 이후 네덜란드로 가겠다는 정한에게 또 한 번의 가이드를 자처했고, 네덜란드에서도 승철의 여행 작가다운 면모가 그가 찍어 놓은 별 만큼이나 빛나서 정한은 또 몇 번이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 일주일 여행을 계획하고 온 터라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공항 면세점에서 쇼핑을 해도 될 만큼 돈이 남아돌자 정한은 다시금 승철에게 엄지를 세웠다. 승철 씨 진짜 짱이었어요, 하는 말에 머쓱하게 웃는 승철의 등 뒤 창밖으로, 어제부터 내리던 봄비가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정한 씨 비행기 몇 시라고 했죠?”

, 저 두 시 비행기요. 직항이니까 한숨 자고 일어나면 한국일 거예요, 아마. 올 때도 그랬었거든요.”

잠이 되게 많으신가 봐요, 맞죠? 여행하는 동안은 어떻게 그렇게 일찍일찍 일어나셨대.”

, 그야 승철 씨 밥 챙겨 주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장난을 곧잘 쳐오던 승철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정한은 역시나 농담 섞인 투로 대꾸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손에 들린 여권과 그 사이에 끼워 둔 비행기 티켓을 내려다보는 것 같던 승철은 이내 시선을 끌어올리고 제 손을 뻗어 정수리 위로 붕 뜬 정한의 머리카락을 슥슥 빗어 내렸다.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 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 본 정한이 의자 옆에 뒀던 백팩을 당겨 멨다. 웃고 떠드는 사이에 벌써 한 시를 향해 분침이 달려가고 있는 탓이었다. 정한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승철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분신처럼 목에 걸린 카메라를 슬쩍 곁눈질하던 정한은 게이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승철에게 넌지시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의아해하는 승철에게, 정한은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는 못하고 띄엄띄엄 문장을 뱉었다.

 

 

 

아니, . 사진 있잖아요, 사진. 보내 준다면서요. 번호를 알아야 보내 주죠.”

, . 지금 정한 씨 내 번호 따 가는 거예요?”

아니 뭐, , , 아무튼요. 약속은 지켜야 되는 거예요, 알죠?”

알죠, 알죠. 입력했으니까 한국 도착해서 전화 한 통만 줘요. 안 자고 기다릴게요.”

에이, 피곤할 텐데 자야죠. 제가 문자 남길게요. , 이제 가 봐야겠다. 저 들어갈게요, 승철 씨. 여행하는 동안 진짜 재밌었고 고마웠어요!”

조심히 가요, 정한 씨. 나도 정한 씨 덕분에 진짜 재밌었어요. 한국 가서 열심히 공부해요, 내가 한국 들어가면 꼭 선생님 되어 있어야 해요. 알았죠?”

 

 

 

 

, 그러면 한 3년 쯤 뒤에 한국 들어오셔야 하는데?

왠지 아쉬움이 가득 남은 것 같은 승철의 표정을 풀어 보려 농담을 뱉은 정한에 결국 그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애매한 시간 탓에 조금 한산한 공항 게이트 앞에서 승철은 정한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여행하는 동안 늘 반쯤 접혀 있던 정한의 두 눈이 다시금 접혀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승철의 손을 맞잡아 흔들어 준 정한은 정말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승철 씨, 집에 조심히 들어가요. 꼭 연락할게요, 알았죠? 고개를 끄덕인 승철이 문득 등 뒤로 창밖을 돌아다보고 입을 열었다.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여행 마지막 날이고 많이 오는 것도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맞아요, 다행이야.

 

 

 

승철 씨, 저 진짜 들어갈게요. 집에 조심히 가세요!”

, 정한 씨도 조심히 들어가요. 안녕.”

 

 

 

머리 위로 손을 휘휘 흔들며 해맑게 웃어 보인 정한이 게이트를 통과하는 인파 속으로 섞여 모습을 감출 때까지, 승철은 그 자리에 서서 정한이 사라진 방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씁쓸해 보일 때쯤 등을 돌려 공항을 빠져나가는 승철의 손목에서, 엊그제까지 정한의 손목에 걸려 있었던 단색의 끈 팔찌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봄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아, 하루 종일 비를 뿌렸다.

 

 

 

 

 

 

 

**

 

 

 

 

 

 

 

잠에서 깬 정한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승철이 남긴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귀국한 후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일주일 쯤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잠이 덜 깨 오타 가득한 답장이 오지 않는 게 승철 쪽에서 오히려 더 어색하다고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별 사진 이후로 승철은 점심으로 챙겨 먹은 피시앤칩스와 트라팔가 광장의 사진이 차례로 도착해 있었다. 사진 아래에 달린 코멘트를 겨우 반쯤 뜬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정한은 옆으로 돌아누워 휴대폰을 쥐고 자판을 두드렸다.

 

 

 

[일어나보니까 2시네요ㅠㅠ 이게뭐야...]

[승철씨 진짜 제가 보고싶다한거 다 봤네요 그죠... 트라팔가 광장 진짜로 가보고 싶었는데 88]

[7시니까 아마 일어나셨겠죠? 저는 지금이라도 도서관 가려구요ㅠㅠ 공부 안 하면 안 되니까...]

[아침 꼭 챙겨 먹어요 알겠죠? 오늘도 좋은 하루 되기!]

 

 

 

예상치 못한 숙면으로 피로가 풀린 탓인지 잠이 확 깨 오타는 거의 없었다. 고심 끝에 노란 얼굴의 토끼와 초록색 공룡 비슷한 것이 종이 꽃가루를 뿌리고 있는 이모티콘을 골라 보낸 정한은 휴대폰을 뒤집어 베개 위에 두고 몸을 일으켰다. 아마 지금 씻고 나가면 적어도 세 시에 도착……. 난 대체 왜 알람을 끄고 다시 잔 거야! 어제의 다짐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개운한 몸이 괜히 원망스러워 침대 위를 쿵 내려치는데, 별안간 베개 위에 둔 휴대폰에서 짧고 경쾌한 알림음이 연달아 울렸다. 광고 문자겠거니, 하고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든 정한은 승철과의 채팅방 위로 왼쪽에 정렬된 말풍선 몇 개가 뜨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정한씨 잠꾸러기]

[저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났어요 벌써 아침도 먹었고]

[출발해야 되니까]

[근데 그 도서관 어디라고 했었죠?]

 

 

 

복숭아 모양의 이모티콘이 한껏 얄미운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는 이모티콘 아래로 달린 말풍선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정한은 별안간 던져진 물음에 조금 의아한 듯 했지만, 이내 손을 들어 답장을 써 내려갔다. 톡톡 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가볍게 울리고, 말풍선이 떠오르기 무섭게 숫자 1이 싹 사라졌다.

 

 

 

[? 저 그 정독도서관이라고]

[집에서 한 20분 거리? 종로구 쪽일 거예요 아마]

 

 

 

별 생각 없이 메신저와 연동된 검색 기능을 써 주소까지 찍어 준 정한은 다시금 제 말풍선 옆에 1이 생기자 홀드 버튼을 눌러 휴대폰 화면을 까맣게 죽였다. 그럼 그렇지, 우연의 일치였겠구나, 싶은 마음에 괜히 입맛이 씁쓸했다.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휴대폰이 몇 번의 알림음을 더 울려 댔지만 정한은 그것을 한 귀로 흘리고서 욕실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 이후로는 나갈 준비를 하느라 이렇다 할 겨를이 없었고, 승철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때는 마을버스에 몸을 실은 지 삼십 분이나 지났을 때였다.

 

 

 

[그냥 궁금했어요 집이랑 많이 먼가 싶어서ㅋㅋㅋㅋㅋ 힘들잖아요 먼 데 다니면]

[쉬엄쉬엄 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변함없이,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승철 특유의 말투에 정한은 괜히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래 봤자 한국 올 것도 아니면서, . 입으로는 툴툴대면서도 손으로는 하트 모양 이모티콘을 찾아 헤매는 게 우스워서 종국에는 자조에 가깝게 웃어버리고 만 정한이었다. 이번에는 말풍선 옆에 숫자 1이 사라지지 않고 붙어 있는 게 좀 야속해서, 정한은 그것을 엄지로 문질러 보다가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만큼 무거운 가방을 메고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침부터 내린 비 탓에 덥고 습했으며, 바지 뒷주머니에는 데이터 사용으로 뜨끈해진 휴대폰이 잠들어 있었다. , 승철 씨 어디냐고 안 물어 봤네. 금세 무거워진 다리를 겨우 움직여 꼭대기에 도착한 정한이 도서관 로비로 들어서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 지금쯤 스페인이겠지. 손을 들어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는 에어컨 바람이 쌩쌩 부는 정독실 안에 가방을 내려 두고 지하 매점으로 향했다. 더워 죽겠네, 7, 8월에는 어떡하려고 이래? 손부채질을 하며 바삐 걸음을 옮기는 정한의 휴대폰은 여전히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지하 매점에 들어선 자그마한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정독실로 올라온 정한은 버릇 탓에 다 접힌 빨대가 꽂힌 커피 컵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방에서 전공 책을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 이른 시간도 아니건만, 평일이라 그런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이 어제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안 그래도 적막한 공기가 아예 바닥으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두툼한 책 세 권을 모두 꺼내어 칸막이에 세워 두고, 정한은 서랍 위쪽을 더듬어 스위치 버튼을 눌렀다. 자그마한 형광등이 팟소리를 내며 책상 위를 밝게 비추었다.

그리고 그 위에, 정한이 가져오지 않은 무언가가 책상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조심스레 의자를 끌어당겨 엉덩이를 걸친 그가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회색이 많이 섞인 연보라색 상자는 크기에 비해 생각보다 묵직했고, 그 위에 나뭇잎 같은 그림이 문양처럼 프린팅 되어 있었다. 가운데에 적힌 영어를 눈으로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정한은 무심코 작게 탄성을 내뱉고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WHITTARD위타드라 하면, 승철이 지난주 쯤 영국에 간다고 했을 때 농담 삼아 사오라고 했던 영국산 차() 브랜드였던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상자를 이리저리 돌리던 그는, 상자 뒷면에서 낯익은 글씨를 발견하고 입술을 꾹 눌러 깨물었다. 급하게 쓴 티가 나는 것 같으면서도 남자치고 꽤 정갈한 글씨체에, ‘여기도 비가 그치질 않네요.’ 라고 읊조린 문구는,

 

 

승철의 것이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정한은 상자를 꾹 쥔 채 정독실을 빠져나갔다. 급하게 일어난 탓에 의자가 바닥과 마찰해 기분 나쁜 소리를 냈지만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로비로 빠져나와 출입문을 마주하고 서기까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은 멎을 것처럼 벅차게 차올랐다. 정신없이 굴리던 시선을 비가 내리는 출입구 쪽으로 고정한 그 때, 정한의 시야 안으로 노란색 우산을 쓴 남자가 들어왔다. 아니그는 마치 정한이 자신을 담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적막한 로비 안으로 정한의 발소리가 잔향을 울리고 흩어졌다. 유리 문 하나만을 둔 채 가까이 다가섰을 때, 우산을 든 남자의 손목에는 조금 빛이 바랜 끈 팔찌가 걸려 있었고,

 

 

우산 사이로 드러나는 남자의 얼굴은, 양 볼에 보조개가 깊게 파이도록 끌어당긴 입 꼬리는, 그 모든 것을 통칭하는승철의 웃음은, 파란 하늘과 환한 달빛과 그가 좋아해 마지않는 별빛을 모두 담고 있었다. 제 심장께에 손을 댄 채 급하게 문을 열어젖힌 정한이, 승철이 채 우산을 끄기도 전에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 왜 말 안 했어요.”

저기, 정한 씨, 나 우산 좀 끄고,”

왜 말 안 했냐구요! 한국 올 거면 온다고 하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 아니 뭐, 그래도 다 알고 오면 재미없잖아요. 놀래켜 주려고 그랬죠. 난 정한 씨 눈치 빨라서 도서관 물어 볼 때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잔뜩 심통이 나 목소리가 한껏 높아진 정한을 겨우 떼어 낸 승철이 우산을 접어 제 손목에 걸고 그 유한 얼굴로 대꾸했다. 정한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잘근잘근 씹어 가며 눈물을 참아내려 애를 썼으나, 곧 비가 떨어진 것처럼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앞에 다가선 승철이 정한의 어깨를 감싸 제 품으로 끌어 당겼다. 울음을 삼키고 삼키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서, 정한은 괜히 주먹을 꾹 쥐어 승철의 어깨 위를 쾅쾅 내리쳤다.

 

 

 

정한 씨, 미안해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진짜 미안. 그래서 내가 이거, 위타드 들러서 이것도 사 왔잖아요.”

몰라요, 승철 씨 진짜 나빠……. 이런 게 어딨어요, 진짜.”

미안해요, 요새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나도 며칠 전에 급하게 결정한 거였어요. 그때라도 말해 줄 걸 그랬는데.”

진짜…… 승철 씨 바보예요? 그렇게, 사람 마음 갖고 놀고, 흐윽, 내가 뭐가 돼요 그럼…….”

 

 

 

울음이 잔뜩 섞여 반쯤 뭉그러진 발음으로 웅얼거리던 정한이 제 감정에 못 이겨 꼭꼭 숨겨 뒀던 마음을 터뜨리자 가만히 그걸 들으며 정한의 등을 쓸어내리던 승철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믿을 수 없게도 잉잉 소리 내어 우는 와중에 용케 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정한이 다시금 주먹을 쥐어 승철의 어깨를 내리쳤다. 결국 참지 못하고 아, 귀여워, 소리를 낸 승철이 그의 어깨를 잡아 제 품에서 떼어내고 눈물이 퐁퐁 솟아나 흘러내리는 두 눈과 시선을 겹쳤다. 점차 굵어지는 빗소리가 섞인 승철의 음성이 정한 씨, 하고 나지막히 흘러나올 때 정한은 입술을 꼭 문 채 손등으로 눈가를 부벼 댔다.

 

 

 

정한 씨, 내가 할 말이 있었어요. 두 달 만에 하게 돼서 진짜 미안한데, 혹시 그거 알아요?”

뭐요, 뭔데요 또!”

비가 그치지 않네요, 라는 말. 조금 더 곁에 있고 싶어요, 라는 뜻이에요.”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네요.

 

 

 

문득, 정한은 승철의 음성 위로 한 달 전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던 승철의 또 다른 목소리가 겹치는 것을 느끼고서 눈을 크게 떠 올렸다. 악력에 못 이겨 손에 쥔 상자가 다 구겨질 동안, 승철은 항상 메고 다니던 카메라 가방을 뒤적여 자그마한 책 한 권을 꺼내었다. 멍하게 저를 바라보고 선 정한의 눈앞으로 손을 휘휘 흔들고, 곧 초점이 돌아오자 승철은 그에게로 손에 들린 책을 내밀었다. 흰 배경에 하늘색 물감이 퍼져나가듯 일렁이는 표지 위로, ‘당신은 이런 내 마음을 모르겠죠.’ 라는 문구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색하게 손을 움직여 책을 받아 든 정한이 두어 장을 넘겨보는데, 낯익은 사진들과 함께 익숙한 손 글씨가 사진 아래 공간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다시금 입술을 감쳐물고 울음을 삼키느라 푹 떨어뜨린 정한의 고개 위로 승철의 음성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두 달 동안 찍었던 별들이에요. 정한 씨 천칭자리 맞죠? 그거 전부 천칭자리예요. 그 아래는 내 일기 같은 건데, ……, 사실 조금 더 모으려고 했거든요. 근데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급하게 제본 맡겼어요. 이 책은, 그러니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에요.”

……이게, 뭐예요.”

내 고백이에요. 그동안 숨기느라 나도 진짜 힘들었어요. , 그러니까 이제 돌려 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해주면 안 돼요?”

……, ?”

맨날 했던 거 있잖아요. 다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는데도 왜 모른 척 했냐고 물어 볼 거죠? 그냥, 한국 가면 듣고 싶었어요. 정한 씨가 이렇게 울 줄도 알았거든요.”

 

 

 

나긋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든 정한이 울음을 삼키며 승철의 두 눈을 마주했다. 이렇게 날이 흐리고, 하늘이 잔뜩 어두운 와중에도 승철의 두 눈은 별을 박은 듯 반짝반짝 빛났고, 그 속에 그를 마주하고 선 정한이 비쳤다.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정한이 겨우 사, 하고 운을 띄웠다가, 이내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가리며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 사는 동안 돈 많이 버세요!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승철이 유쾌하게 소리 내어 웃으며 정한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손목을 쥐어 가볍게 떨어뜨리고, 승철은 지그시 시선을 맞춘 채 속삭이는 것처럼 내뱉었다.

 

 

 

정한 씨, 내가 많이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첫눈에 반했거든요. , 그러니까, 이제 계속 내 옆에 있어 줘요. 내가 잘해줄게요.”

……, 아 진짜…….”

정한 씨, 내가 지금도 많이 사랑해요. 진짜로요.”

 

 

 

나도, 나도…… 많이 사랑해요, 승철 씨. 진짜 고마워요, 와 줘서 고마워요.

비에 젖은 듯 물기가 잔뜩 어린 채 터져 나온 서툰 고백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승철이 정한을 다시금 끌어안았다. , , 크고 빠르게 울리는 심장 박동이 맞닿은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것 같아서 정한은 벅차오른 숨을 내뱉고 또 내뱉었다. 엄지를 들어 정한의 눈가를 가볍게 문질러 닦은 승철이 입 꼬리를 끌어 올린다. 눈가가 발개진 채, 정한도 그를 따라 웃었다.

 

 

 

장마 같은 여름비가 시원하게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고, 조용한 도서관 로비에 선 두 사람은 가만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과 승철의 손 글씨가 담긴 차() 상자를 한 팔로 안은 정한은 제 머리칼을 넘겨주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고,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 버렸다. 따라 웃는 승철의 웃음은, 그래비 내린 후 맑게 갤 파란 하늘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정한 씨, 머리 잘랐네요. , 어때요? 이상해요? 아니요, 깔끔하고 예뻐요. 잘 어울려. , 진짜요? 다행이다. 고마워요, 승철 씨. ……, 있잖아요. 왜요? 손잡아도 돼요? ……, 뭐야. 그런 건 안 묻고 그냥 덥석 잡아 버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또 울 까봐 무서워서 물어 봤다, 됐어요? 아아, 진짜, 놀리지 마요. 싫어요, 앞으로 계속 놀릴 건데? , 승철 씨!

 

 

 

, 승철 씨는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저요?”

 

 

 

비가 그치지 않는 곳으로요. 구름 속에 가려진 달이라도, 참 예쁘네요하고 말할 수 있게.

 

 

 

 

 

fin.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