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쿱정 참여글 업로드합니다. 주석을 꼼꼼히 읽은 후에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 댓글, 방명록, 트위터 멘션 등의 피드백은 창작의 원동력이 됩니다 ^ㅁ^ //



*용어 설명 (작가 임의로 정한 단어에는 * 표시가 달려 있습니다.)

슈케이스 = 카드 슈 ; 포커류의 게임에서 카드를 담아두는 케이스를 칭하는 말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다른 뜻일 수 있으나 이 글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시프트 : Shift Time, 교대 시간을 뜻합니다.

드라이 진 : Dry GIn, 이 글에 자주 등장한 마티니를 만드는 주재료입니다. 도수는 40도 안팎으로 굉장히 높습니다. ()

스택 : 카드를 쌓아놓은 것을 뜻합니다.

오픈 카드 : 패가 모두에게 공개되는 카드입니다. / 히든카드 : 패가 공개되지 않는 카드입니다. 받는 사람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메이드 : 포커 게임에서 특정 족보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족보 : 포커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드는 카드 조합을 통칭합니다.

Die : 포커 게임에서 게임 진행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 : 포커 게임에서 상대가 베팅한 금액과 똑같이 베팅하는 것입니다. 즉 앞사람의 베팅 금액을 받겠다는 뜻이죠.

 

*게임에서 사용된 칩은 임의로 정한 머니 칩(금액이 명시된 칩)입니다. 글에 등장한 녹색 칩은 10달러, 회색 칩은 100달러, 검은색 칩은 5000달러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포커 룰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1. 카드는 A부터 K까지 총 13장이 4문양 당 사용됩니다. 즉 같은 숫자/기호가 4장씩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2. 숫자의 가치는 2 3 4 5 6 7 8 9 10 J Q K A 순서입니다. A 카드는 1 또는 K보다 높은 카드로 사용 가능합니다. 문양의 가치는 스페이드-하트-다이아몬드-클로버 순입니다.

3. 족보에 대해 간략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하이카드 : 어떠한 조합도 가능하지 않을 때 1장의 카드로 가장 가치가 높은 것

원 페어 : 값이 같은 2장의 카드

투 페어 : 페어가 두 개 있는 것

트리플 : 값이 같은 3장의 카드

스트레이트 : 문양이 다른 카드 5장의 숫자가 연속한 것

플러쉬 : 값이 다른 카드 5장이 모두 같은 문양인 것

풀 하우스 : 트리플 하나와 원 페어

포 카드 : 값이 같은 4장의 카드

스트레이트 플러쉬 : 문양이 같은 카드 5장의 숫자가 연속한 것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 문양이 같은 카드 5장이 10 J Q K A 순서인 것

4. 게임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세 장의 카드를 받습니다. 각자 카드를 확인한 후, 한 장을 오픈합니다.

오픈한 카드 가운데 가장 높은 패를 가진 플레이어가 먼저 오픈카드를 받습니다.

패가 높은 순서대로 베팅한 후 두 번째 오픈카드를 받습니다.

패가 높은 순서대로 베팅한 후 세 번째 오픈카드를 받습니다.

패가 높은 순서대로 베팅한 후 히든카드를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베팅한 후 7장의 카드로 원하는 패를 만들어 오픈합니다. 이것으로 승패가 가려집니다. 승리한 사람이 베팅 칩을 모두 가지며, 다음 게임의 선 플레이어가 됩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장면의 BGM입니다. 순서대로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디오테잎(IDIOTAPE) - Melodie

이디오테잎(IDIOTAPE) - Even Floor

Fall Out Boy - Centuries

 

 

 

 

 

 

[월간쿱정]

 

 

 

 

 

투 페어, 풀 하우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w. (@HYEMM_SVT)

 

 

 

 

 

MGM? 시끄럽지. 요란스럽고, 너무 눈부셔.

그러면서 거기 가서 뭐 하게?

너보다 더 돈 많은 남자 꼬셔서 인생 펴 보려고. , 맘에 안 들어?

 

 

 

3년 전쯤이었을까, 윤정한은 도심 한복판의 클럽 지하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와도 같던 도박판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에 반쯤 묻혔으면서도 그렇게 선명할 수 없었던 승철의 음성을 기억한다. 반문하는 저에게 누가 봐도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 내고서, 일부러 독한 담배연기를 제 얼굴 가까이 불어대던 것을 기억한다. 저는 그때 그에게 뭐라고 대꾸했더라, 자리를 벗어나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서 정한은 승철의 뒤통수를 집요하게 쫓으며 그랬었다.

 

 

 

꼬우면 너도 라스베가스 오든가! 빡쳤다고 나 놔두고 가겠다는 거야, 지금?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애 같은 발언이었음을, 정한은 잘 알고 있다. 승철은 아무 룸이나 박차고 들어가서 아무 술이나 잡아 따고서, 그걸 잔에다 부었던가. 제 머리 위로 쏟아지던 뜨겁고 싸한 알코올의 감촉을 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라스베가스 가서 딜러 하겠다는 너나, 위에서 몸 파는 년들이나.

 

 

 

고개를 내젓는 얼굴이 웃는 듯 하면서도 싸늘하게 굳어있었던 것 같았다고, 정한의 기억은 거기서부터 희미하게 흩어졌다. 제 머리칼 위로 쏟아져 얼굴이며 어깨를 잔뜩 적신 술이 드라이 진(Dry Gin)이었다는 건 반 쯤 취한 척 승철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뜬 이후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시답잖은 말싸움은 어떻게 끝이 났더라?

 

 

 

 

 

그 때 네가 그랬잖아, 잘생기고 돈 많은 양키 꼬셔서 인생 펼 거라고.”

물론 그러려고 했는데, 막상 와 보니까 잘생기면 돈이 없고, 돈이 많으면 못생겼더라고.”

 

 

 

3년 후윤정한은 과거 최승철의 품에서 취한 척 잠을 청했던 때와 비슷한 자세를 하고서 그를 올려다보고 작게 키득이며 대꾸한다. 좁은 침대 위에 긴 다리를 전부 올려두려고 잔뜩 접고 웅크린 꼴이 웃겨, 승철은 그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헤집으며 픽 웃었다. , 머리 꼬지 마. 짜증 섞인 정한의 앙탈 비슷한 것이 방 안으로 울려 퍼졌다.

 

 

 

그런 식으로 말꼬리 늘려 봤자 나한텐 안 통하니까 가만히 좀 있어.”

아아, 그러면 머리 엉킨단 말야.”

됐고, 그래서 나 봤을 때 느낌이 어땠어? 이거 한 세 번은 더 물은 것 같은데.”

안 말해줄 거야, 너 짜증나.”

 

 

 

인상을 팍 찡그린 정한이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키며 손을 들었다. 그대로 승철의 이마를 퍽 소리 나도록 세게 밀자 그의 몸이 밀렸다. 상체가 뒤로 넘어가 완전히 누운 꼴이 되면서도 승철은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했다. 입술을 앙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떠 그를 흘기며, 정한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고 손목에 걸린 머리끈으로 그것을 모아 묶었다. 그러고서 다시금 상체를 눕히자, 정한의 어깨에 아랫배가 눌린 승철이 부러 죽는 소릴 냈다.

 

 

 

안 들려, 안 일어날 거야. 너 진짜 짜증나.”

어차피, 내쫓지도 못할 거면서, 괜히 힘 빼는 거다, 그거. 어우 씨, 좀 일어나 봐.”

, 싫다고! 바라는 게 많아, 진짜.”

 

 

 

제 아래에 이상한 자세로 누운 승철이 몸을 뒤트는 게 어지간히 불편했는지, 정한은 인상을 팍 쓴채 날 선 투로 대꾸하면서도 자세를 고쳐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침대 밖으로 달랑거리는 다리를 착착 접어 끌어 모으자 다시금 상체를 일으킨 승철이 그의 눈가를 가린 머리칼을 쓸어 귀 뒤로 넘겼다.

 

 

 

대답은 언제쯤 해 줄 건데, 여왕님. 고고한 척이고 아양이고 나한테는 다 어린 애 지랄이라고 했잖아.”

네가 날 그 따위 난잡한 호칭으로 안 부르면.”

조건이 까다롭네, 고민 좀 해 봐야겠는데?”

지랄, 말이나 못 하면.”

 

 

 

정한이 실소 비슷한 것을 입술 끝으로 가늘게 흘리자 승철은 그것을 내려다보고서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예쁘게 접히는 두 눈가를 곧은 손가락으로 잘게 찔러 대던 윤정한은 닿아 오는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고 화제를 돌려 물었다. 근데 당신, 내일부터 게임하러 나올 거랬나?

 

 

 

, 네 근무 시간에 딱 맞춰서. 어때?”

할 수 있음 해 봐. 혹시 승부조작 같은 거 바라나?”

 

당연한 거 아냐? 당신이랑 짜고 치려고 온 건데, 싫다면 아쉽네.”

 

 

 

승철은 사실 그 이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윤정한이 딜러 일을 해서 돈 많은 남자를 꼬드길 수 있는 방법이라 하면, 오로지 그만을 위한 판을 만들어주는 것즉 짜고 치는 게임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았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는 더더욱. 그랬기 때문에 먼저 게임 얘기를 꺼내고 일부러 튕기듯이 물은 진의를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러 미련 없는 척 침대에서 일어나려 몸을 뒤척이는 최승철의 손목을, 당연하게도 윤정한이 먼저 잡아당겼다.

 

 

 

내가 언제 싫다고 했나? 그치, 자기야.”

끼 부려 봐야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입력이 안 돼?”

, 라스베가스 애칭이거든? 무드 없는 새끼. 게임 때 네 말 하나도 안 들을 거야.”

해 봐, 할 수 있으면. 난 털어버리고 한국 가면 그만인데.”

 

 

 

 

침대 위에 앉아 자리에서 일어선 승철을 올려다보는 정한의 미간이 구겨진다. 입술 끝을 비틀어 깨문 그가 침대 시트를 초조하게 구겨 쥐다가, 그러쥔 승철의 손목을 느리게 놓았다. 손을 거두었음에도 서로를 마주한 두 갈래의 시선은 한참동안 물러서지 않았다. 미묘한 공기가 둘 사이를 부유하던 때, 먼저 시선을 떨어뜨린 윤정한의 달싹이던 입술은 굳게 다물렸고,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최승철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투 페어, 풀 하우스로 해. 스트레이트 플러쉬부터 의심하고 보더라고.”

라스베가스 특징이야,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당신이 존나 유능한 겜블러인 것처럼 소문 내 준다고 했잖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나 고개 못 들고 다녀.”

좋네, 그 잘생긴 얼굴 못생긴 여자들이 보고 반하면 어쩌려고.”

그런 논리라면 너도 꽁꽁 싸매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게임 좆도 못 하는 양키 놈들한테 여왕님 얼굴 보여드리기 싫은데.”

 

 

 

, 눈을 가늘게 뜨며 꽉 깨문 잇새로 조금 날 선 음성을 뱉은 정한이 아랫입술을 꾹 물며 제 머리 위로 손을 쳐들었다. 꽤 매서운 그 손이 승철의 어깨 위로 내리쳐질 때, 한 발 빠르게 손을 뻗은 승철이 정한의 손목을 쥐고 아프지 않게, 그러면서도 꽤 힘을 실어 제 쪽으로 잡아 당겼다. 졸지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마주 선 꼴이 되자 윤정한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죽을래? 당신 나한테 관심 있는 건 알았지만

죽일 거면 침대에서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관심은 당신이 나한테 있었던 거 아닌가?”

, 이 새끼가,”

 

 

 

입 속에서 맴돌던 말이 퍽 험악하게 터져 나올 때쯤, 승철은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양 소리 내어 키득거리며 겨우 두 사람 버티고 섰던 벽장과 침대 사이의 틈에서 빠져나갔다. 정한은 입술을 비틀어 꽉 문 채 승철 쪽으로 고개만 돌려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묶은 머리를 풀러 아까보다 좀 더 아무렇게나 묶었다. 최승철은 가만히 그 모양을 보고 서 있다가, 이내 느리게 뒷걸음질 치듯 현관 앞에 가 섰다. 여왕님, 진저리 날 만큼 불쾌한 호칭을 일부러 뱉는다는 걸 알면서도, 윤정한은 부르는 대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물론 그 예쁜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져 있었지만.

 

 

 

내일 시프트 언제야?”

알아서 내려 와. 그냥 라운지에 죽치고 있든가.”

일찍 자, 피곤하다고 나한테 와서 지랄하지 말고. 알았지?”

다정한 척 해 봐야 소용없으니까 그냥 빨리 좀 가.”

 

 

 

날 세워도 고양이 같은 건 여전하네.

금방이라도 룸 밖으로 나갈 것처럼 하다가, 문득 성큼성큼 걸어와 정한의 어깨를 잡아 챈 승철이 그렇게 속삭였다. 한 톤 더 낮고 퍽 진중한 음성이 그저 장난이란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살다 살다 고양이에, 여왕님에, 별 쓰레기 같은 건 다 들어보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에는 담지 못하고, 다만 윤정한은 습관처럼 입술만 잘근거릴 뿐이었다. 으득, 이 갈리는 소리가 선연하자 승철은 픽 웃었다. 그러고서 온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 다시금 현관 앞에 섰다.

 

 

 

, 빨리 가!”

한 마디만 더 하면 뭐 날아올 것 같은데.”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래?”

 

알았으니까 갈게. 내일 봐, 윤정한.”

 

 

 

끼익, . 생각보다 시끄러운 소릴 내며 닫힌 문 위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정한은 한숨같은 것을 작게 내뱉으며 그 쪽을 바라본 방향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착 가라앉은 공기가 느리게 부유하며 무릎을 모아 앉은 정한의 주위로 하강했다. 최승철에게 항상 간파당하는 이유를, 3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었다. 더불어, 묘하게 뒤틀린 관계가 어디서부터 이어지고 있는지도.

 

라스베가스에 도망 온 지 2년 만에, 제 이름 세 자를 정확한 발음으로 불러준 사람이 처음이었다고, 윤정한은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최승철 앞에서는 지랄이 차고 넘치는 고양이인 척 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으니까.

 

 

 

에이 씨, 지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조금 가라앉은날을 세운 척 하는 목소리가 방 안을 뱅뱅 맴돌다가 사라진다. 그 속에서, 정한은 한참을 같은 자세로 가만히 문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

 

 

 

 

 

 

 

투 페어, 풀 하우스. 윤정한은 그렇게 이어지는 족보에서 5년간의 추억 가운데 가장 큰 파편을 끌어낸다. 일부러 잡아당기거나, 억지로 파묻으려 하지 않았는데도, 그것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다가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긴 다리를 구기다시피 접은 채 불편하게 잠든 정한이 눈가를 찌푸리며 조금 뒤척였다.

 

 

5년 전 또 다른 세계의 한 구석에서, 거의 호기심을 이유로 접근했던 정한에게 승철은 가만히 시선을 두며 카드 더미를 내밀었다. 정한은 반복적인 패턴이 섞인 카드 뒷면을 내려다보다가, 느리게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승철은 손가락 끝에 걸린 마티니 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며 가라앉은 시선을 카드 위에 얹혀진 정한의 손 위로 옮겼다. 흘긋 그를 올려다보고, 윤정한은 조용히 카드를 셔플하며 중얼거렸다. 마티니 마시는 남자는 생각보다 더 멋있을 줄 알았는데. 용케 그 작은 목소리를 들은 승철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슈케이스 안으로 카드를 밀어넣은 정한이 고개를 들었을 때, 승철은 검정 슬랙스에 칼라리스 셔츠를 걸친 저 자신을 아래위로 훑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썩 멋지지 않다, 이거네?

「…아니 뭐, 내 판타지가 그렇다는 거지.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을 때 제일 멋진 거니까요.

생각보다 포장 잘 하시네. 당신 혹시 딜러?

관련 없는 물음 같지만 여하튼 전 전공자예요. 왜요?

 

 

 

 

그냥, 이 판에 뛰어든 딜러라면 당연히 짜고 치는 판 만들어 주려고 온 거 아니겠나 싶어서.

묘하게 짜고 치는을 강조하는 듯한 승철의 음성이 정한의 귓가 근처에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승부조작 같은 건가, 정한이 눈가를 찌푸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마티니 잔을 쥔 승철이 말을 이었다.

 

 

 

여기 왔음 알아서 적응해야 할 거야.

결론적으로 나 보고 배운 거 갖다가 법 어기는 데 쓰자는 거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할 말은 없는데, 당신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이상 스스로 배워 가야지, 어쩌겠어. , 팔려 온 건 아니잖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 거리에서 이 정도 목소리로 하나하나 짚어주는 것 밖에 없거든.

 

 

 

무색투명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승철의 입술이 잠시 닫혔다가 열리고, 띄엄띄엄 매달린 알전구 불빛에 반질거리는 칵테일 잔 끝이 그 입술 사이에 걸렸다. 정한은 왠지 거기에서 뱉어진 공기가 탁한 회색 같다고 생각하며 입술 끝을 감쳐물었다. 이런 덴 줄 몰랐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게 분명하겠지.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카드 슈에서 세 장을 빼내어 뒤집어진 채 승철 쪽으로 건네며 물었다.

 

 

 

그래서 난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나도 잘은 몰라. 딜러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것 외에는.

카드 슈나 스택을 조작하라는 건가요?

그런 식으로 한다는 사람도 있고, 의도적으로 필요한 패만 건넨다는 경우도 있고. 뭐가 됐든 제스처나 암호 같은 걸로 정보 공유하는 방식은 다 같더라고.

정보를 흘리면 당신이 메이드 할 수 있어요?

그거야 족보에 따라 다르지. 처음부터 네가 만들어서 줄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특정 패를 목표로 삼고 너한테 그걸 흘릴 수도 있는 거고.

 

 

 

일말의 소음 없이 테이블 위를 흘러 건네어진 카드를 받아 들며, 승철은 정한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마무리 지었다. 탁한 공기 탓에 순식간에 건조해진 눈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뗀 정한은 다시금 카드 슈에서 한 장을 빼내어 그것을 오픈시키고 승철 쪽으로 내밀었다. 하트 2,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그것을 내려다보는 승철의 입술 끝이 가볍게 말려 올라갔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정한은 손을 뻗어 뒤집어진 세 장의 카드 가운데 제 쪽에 더 가까운 것을 뒤집었다. 스페이드 2? 오픈된 카드로 시선을 내리꽂은 정한의 머리 위에서 승철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많이 놀랐나? 원 페어 정도야 우연으로도 쉽게 만들어지는데 뭘 그래.

하지만, 이건 히든카드였고―」

그러니까. 아직도 모르겠나 봐? 페어 정도는 당신이 직접 메이드 할 수 있다는 거잖아.

 

 

 

룰대로라면, 이 카드를 먼저 오픈해야 할 테니까.

벙 찐 상태 그대로 굳은 정한의 어깨 너머로 팔을 뻗어 카드 슈를 끌어당긴 승철은 제 마티니 잔을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놓고서 카드 한 장을 빼내어 망설임 없이 뒤집었다. 이번에는 하트 퀸이었다. 승철은 둥글게 잘린 카드 모서리를 손가락 끝으로 쓸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눈치가 없을 줄은 몰랐는데. 알고 온 거 아니었어?

아니, …… 자세히 알고 온 건 아니지만.

난 항상 그랬지만, 처음에 받은 두 장의 히든카드는 딱 두 번만 건드려. 처음 받았을 때, 그리고 게임이 끝났을 때. 매 턴마다 히든카드를 건드린다는 건, 게임이 잘 풀리고 있다는 얘긴 아니거든.

「―그래서 전 뭘 하면 된다고요?

카드 셔플을 너무 열심히 하려 들지 마. 어차피 원 페어는 거의 운이고, 그것만 만들면 턴이 앞으로 당겨지니까 투 페어는 금방 메이드 해. 첫 오픈카드를 받을 때 이미 원 페어가 만들어져 있도록 하는 게 당신이 할 일, 그리고 마지막 카드를 받을 때 투 페어를 만드는 게 당신이 할 일이야. 이 쯤 하면 알겠어?

 

 

 

오픈된 카드 세 장과 승철의 눈을 번갈아 마주하며, 정한은 퍽 다정한 투로 뱉어진 승철의 음성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딘가 결연한 눈을 하고서 팔을 뻗어 카드 슈를 집어 든 정한이 다시금 한 장을 빼내어 오픈시켰다. 클로버 퀸이다. 카드를 건네는 그의 입술이 유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승철은 히든카드 두 장을 끄트머리만 들어 보고, 이내 테이블 끝을 톡톡 두드리다 정한이 건넨 카드를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잘 하는데? 예의상 해준 말이라는 느낌이 팍 드는 투였음에도 정한은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가 승철의 눈치를 약간 보고 급하게 그것을 삼켰다. 승철은 테이블 중앙에 가져다 놓은 마티니 잔을 들어 또 한 모금을 들이킨다. 그의 반대쪽 손이 간헐적으로 테이블 끝을 두드리고 있었다. 정한은 손톱이 가지런히 정리된 그 손가락 끝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카드 슈에서 한 장을 빼내어 다시금 오픈시킨다. 이번에는 현재 오픈된 카드와 전혀 상관없는 패다이아몬드 에이스였다. 승철 쪽으로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승철이 가지런히 정리된 카드 패 오른쪽 끝에 내려놓았다. 손을 들어 괜히 잘 묶인 제 머리를 푸른 정한이 넌지시 승철에게 물었다.

 

 

 

아무 상관없는 패가하나쯤은 있어도 되겠죠?

있어도 되는 게 아니라 있어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누구든 의심할 테니까. 중요한 건 마지막 히든카드야. 그건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당신이 알아서 잘 해 봐.

 

 

 

뭐야, 다 챙겨주는 것처럼 굴더니. 좀 전보다 성의 없게 들린 마지막 말에 눈가를 살짝 찡그린 정한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 머리칼을 모아 묶고 카드 슈에서 한 장을 빼내었다. 그러더니 그것을 승철의 맞은 편 빈 테이블 위로 밀어 두고, 그 다음 카드를 승철에게 내밀었다. 가만히 그것을 받아든 승철은 히든카드 두 장 사이를 가르고 그것을 내려놓는가 싶더니, 아까처럼 테이블 끝을 가볍게 두드리며 처음에 받았던 히든카드 한 장과 위치를 바꾸어 오픈시켰다. 오픈 전 이미 투 페어가 완성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 게임이었더라도 승산이 전혀 없지는 않다. 정한은 가만히 뒤집어진 카드 모서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위층에서 울리는 기계음 잔뜩 들어간 음악에 맞추듯 승철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고, 음악이 멈춘 듯 주위가 낯설 만큼 고요해질 때 손을 들어 카드를 뒤집었다. 그 위에 그려진 여왕의 형상, 정한은 그것을 마주하고서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스페이드 2 두 장, 퀸 세 장. 풀 하우스였다. 승철의 입술이 가볍게 호선을 그린다.

 

 

 

생각보다 센스가 있는데? 카드 한 장 빼고 준 것도 그렇고.

어차피 게임을 혼자 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그치만 마지막에 준 카드는 오픈 안 했잖아요.

, 눈치 못 챘나 보네.

뭐를요? 특별히 한 행동이라고는 테이블 두드리는 것밖에,

보고 있었으면서도 몰랐나, 그건데. 내가 마지막 카드를 오픈조차 해 보지 않은 이유 말야.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마지막 카드를 오픈하지 않은 이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슈케이스를 의미 없이 두드리던 정한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손을 뻗어 승철의 앞에 놓인 카드를 끌어 모은 그는 슈케이스에 그것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가능성을 묻는 것이 아닌백 퍼센트 확신하는 말투. 승철은 정한의 손을 내려다보며 뜻 모를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거 혹시, 이미 원하는 걸 메이드 했다는 뜻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까 아까 당신이 히든카드를 들어 보고 그 이후로 계속 테이블을 두드렸었잖아요. 맞죠?

그래, 맞아. 아무것도 모르고 온 사람치고는 학습 속도가 빠른데?

빈말이라고 해도 고마워요. 그치만 아까 그건 정말로 운이었어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사람들이 늘 찾는 행운의 여신 같은 게 너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도 여기 올 거면 나랑 같이 일할래?

가만히 듣고 있기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승철이,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마티니 잔을 들어 남은 것을 한 모금에 집어삼키고서 물방울에 조금 촉촉해진 손을 정한에게로 내밀었다. 가만히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정한은, 얼떨결에 그 손을 잡았다. 맞닿은 손끝으로 조금 차가운 감촉이 전해진다. 정한은 왠지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한 것 같아 승철이 손을 놓기가 무섭게 손바닥을 제 허벅지에 문질렀다. 그러나탁하게 내려앉은 공기, 어두운 알전구 불빛, 제게로 내려앉는 승철의 시선과 퍽 다정한 말투, 그 모든 것을 피할 수 있었다면 진작 자리를 떴을 것이란 생각이 뇌리에 스미고 있었다.

 

 

나랑 일하면 뭐가 좋으냐고? 아마 평생 만져본 적 없는 돈을 만지게 될 걸? 농담 아니고 진짜로. 장난스레 사족을 덧붙인 승철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정한은 제 입술을 가볍게 감쳐물었다 놓으며, ‘최승철을 찾아 가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거다라고 속삭여 줬던 지인의 말에 홀린 듯 이 곳에 걸어 들어온 사실을 승철이 영영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돈이 아니라오늘 처음 본 이 남자에게 홀린 것 같다는 사실 또한.

 

 

 

 

 

 

 

암호를 정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승철이 먼저 넌지시 물은 것은 정한이 세 번째로 그를 찾아 클럽 지하에 몸을 밀어 넣은 때였다.

단발로 친 제 머리가 어색해 그 끝을 죽죽 잡아당기던 정한은 저를 마주하자마자 대뜸 그렇게 묻는 승철에게 일부러 글쎄요, 하고 반문하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새로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3일에 이틀 꼴로 자정 퇴근을 일삼는 것이어서 테이블 위로 반쯤 널린 채 턱을 괸 그의 눈가에 피곤이 잔뜩 묻어났다. 승철은 눈가를 가린 정한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암호를 정해야 게임을 하고, 게임을 해야 돈을 따지.

난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당장 내놓으라는 식으로 나오면 집에 갈 거예요.

「―그리고 돈을 따야 네가 좀 덜 피곤해할 거고. 그치?

 

 

 

항상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뜨거운 승철의 손끝이 정한의 눈가로 와 닿았다. 반쯤 내려앉은 눈꺼풀 위를 엄지로 꾹꾹 눌러 주며, 그는 작게 키득거렸다. 그러다 자겠다, 자겠어. 정한은 승철이 하는 대로 눈을 감으며 따라 키득 웃었다. 먼저 연락한 사람이 누군데요? 느리게 뱉어진 말은 질책이라기 보단 농담조에 가까웠다.

 

 

 

3일 전부터 연락해서 오늘은 볼 수 있는 거냐고 묻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든가요. 내가 진짜 피곤해서 죽어버리고 싶은 거 억지로 왔으니까 용건만 간단히, 알겠어요?

아쉽네. 너 데리고 노는 거 재밌는데. 표정 바뀌는 거 보는 것도 재밌고.

사람 데리고 노는 거 진짜 안 좋은 거예요, 알아요?

알아요, 이 직선적인 사람아. 맘에 안 들면 나랑 사귀는 걸로 하든가.

 

 

 

승철은 대체로 그런 식의 농담을 즐겨 하는 사람이었다. 정한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그를 마주한다. 손에 들린 맥주 캔을 뺏어 한 모금 크게 들이키자 승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 알면서도 그것을 쉽게 여기는 건지, 아님 원래 천성이 매사 쉽고 가벼운 사람인 건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입 안에 쌉싸름하게 퍼지는 알코올에 눈가를 찌푸린 정한이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장난칠 거면 나 집에 가요. 그니까 빨리 말 해.

어우, 무서워서 못 건들겠네. 피곤한 거 너무 잘 보여서 안쓰러워 죽겠으니까 빨리 말할게. 대신 잘 알아듣고 기억해 놔, 알겠지?

 

 

 

다시금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승철을 조금 올려다보던 정한의 두 눈 위로 맥주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옮겨 붙은 승철의 손바닥이 와 닿았다. 시야가 어두워진 대로 눈을 내려감은 정한은 잠에 들지 않으려 손가락을 들어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승철은 어딘가 결연하기라도 한 듯 목소리를 가다듬는가 싶더니, 고개를 좀 가까이 해 작지만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선 앞으로 게임할 때는 투 페어 풀 하우스, 아님 트리플 플러쉬 순서로 메이드 하는 게 좋을 거야. 처음에 나오는 거 보고 어디로 갈지 내가 흘려줄 테니까 잘 알아먹어. 그러니까, 너 영어 좀 하지?

전공이었다니까요. 나 이거 한 두 번 말한 것 같은데.

, 그랬었지. 암튼 크게 생각하려면 영어로 만드는 게 나아. 어디 가서 써먹기도 쉽고, 잘 안 걸리고. 그러니까, 일단 페어는 단순하게. 우선 게임 진행하는 네가 나 말고 다른 겜블러들 묶어서 커플이냐고 물어. 그렇게 보이든 말든 상관없이. 원이면 한 쌍, 투면 두 쌍으로. 걔네가 뭐라고 대답하든지는 내 알 바 아닌데, 카드 오픈 전에 메이드 되면 항상 하던 대로 테이블 치면서 내가 되물을게. 누구한테 물을 지는 상황 봐서 결정하는 걸로 하고. 됐지?

그니까페어는 내가 메이드해 줄 수 있으니까 먼저 요구하란 거잖아요. ‘페어니까 커플 언급하는 거고. 진짜 단순하네요, 생각보다.

단순해야 기억하기 쉬워. 그런 의미에서 트리플은 하트 3. 내가 너한테 있냐고 물어볼 거야. 그럼 트리플이 필요하단 걸로 알아. 도와주고 말고는 네 운이긴 한데, 만약 도와줄 수 있으면 하트 3이 아니라도 축하한다고 해.

……, Congratulations, sir, 정도로 말하면 돼요?

, 영어 발음 장난 아니네. 암튼 뭐 그런 식으로. 스트레이트는 머리 쓸 거 없이, 마티니가 있으면 필요한 걸로 알아 둬. 스트레이트가 필요한 경우면 항상 마티니가 옆에 있을 거고, 메이드 되면 잔 비울게. 물론 메이드의 기본 제스처는 테이블 두드리는 거니까 헷갈리지 말고. 다음 플러쉬는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겜블러하고 게임할 때만 쓸 거야. 당신이 카드 돌릴 때, 내가 일부러 하나 집어서 이게 필요하다는 식으로 할 거거든. 물론 당신은 그 카드를 나한테 줘도 되고, 안 쥐도 돼. 메이드 된 상태면 주는 카드 받으면서 필요한 거였다고 할 거고. 대충 어떤 식인지 알겠어?

대충은요. 예상은 전혀 안 가지만.

풀 하우스는 트리플에 페어 하나니까 당신 역할이 커. 그래서 당신이 만들도록 지시하는 편이 빠를 거야. 카드 찔러 주면서 교대 5분 전이라고 해. 웬만큼 큰 카지노는 교대 순서나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편이라고 했으니까 다른 놈들도 의심은 못 할 거야. 그리고 5분 뒤에 게임 끝내는 걸로 하고, 난 풀 하우스 메이드 하는 걸로 하고.

그리고마지막인가, 만들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이하 로스플는 일단 스트레이트가 있으니까 마티니가 있을 거야. 그리고 게임하면서 내가 당신한테 작업 거는 느낌으로 말 걸 거니까 알아서 마음의 준비 할 거면 하고. 오픈된 카드가 세 장 째일 때 내 차는 메르세데스다, 라고 할 거고 마지막 히든카드 받을 때 룸 넘버 말해줄게.

스케일 무지 크네, 로스플이라 그런가……. 메이드 해 본 적은 있어요?

 

 

 

텀을 여러 번 두고 그리 짧지 않게 이어진 승철의 말이 마무리 지어지자 눈을 떠 그를 마주한 정한이 넌지시 물으며 테이블에 반쯤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키고 한 쪽으로 기울여져 있던 목을 반대쪽으로 기울여 풀었다.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지는 것을 마주하며 승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정한은 그 대답에서 이상한 점을 단번에 발견하지 못하고 그것을 곱씹다가, 이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에게 반문했다.

 

 

 

그게 가능하기는 해요? 나도 족보로나 봤지, 실제로 게임에서 나온 적은 없었는데.

나도 두 번 정도밖에 없어. 물론 이것도 기적이라고들 하던데, 운이 잘 따르거나 딜러가 잡혀갈 각오 하고 카드 찔러주면 되긴 되더라고. 내가 너한테 후자를 바라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아.

그래서 로스플 메이드 해 볼 거예요? 나중에 언제가 되든 간에.

그거야 모르지, 운에 맡기는 거라고 했잖아.

만약 메이드 하면요?

 

 

 

그런 식으로 암호를 만든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거 아니에요?

정한은 주머니에서 짧게 진동한 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으며 떠 보듯 그렇게 물었다. 제 의도를 승철이 모를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흘린 것으로 비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한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승철은 가만히 정한의 손 근처에 시선을 두고 그 주위를 맴돌며 간단하게 대꾸했다. 적어도 윤정한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으리라. 최승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모르겠는데? 그래 보이는 것 같으면 룸으로 찾아오든가. 그럼 네가 바라는 게 있을 지도 모르지?

「……됐네요, 물어 본 내가 잘못이지.

 

 

 

나 갈게요, 알바 가야 해.

정한은 승철 몰래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뒤를 쫓으며 승철은 시답잖은 몇 마디를 덧붙여 물었다. 알바는 매일 가는 거냐, 몇 시까지가 원래 근무 시간이냐, 같은 것을 물어 오면서도 무슨 일을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적당히 예상이 간다는 건가. 정한은 저 혼자 생각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입술을 앙 다문 채 묵묵히 걸었다. 주차장으로 통하는 출구 앞에 서서, 그는 그제야 승철을 돌아보고 물었다.

 

 

 

어디까지 따라올 거예요?

오늘 알바 쉬어. 아님 내 차 타고 가든가. 지금도 충분히 늦었는데 혼자 돌아다니다가 누가 너 잡아가면 어쩌려고.

왜요, 내가 당신의 소중한 인력이라서?

……, 그런 의미도 없지는 않은데, 어쨌거나 우린 큰 그림이 있잖아. 이 바닥 뜨기 전까지는 조심히 살아야지, 안 그래?

 

 

 

그러니까 내가 태워 줄게, 따라와.

승철은 꽤 선심 쓰는 척 하기 좋은 말을 예의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내뱉으며 주머니를 뒤적여 차키를 꺼내었다. 스치듯 지나간 그것이 정말로 그가 언급한 메르세데스 벤츠의 차 키라는 걸 마주한 정한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것을 용케도 들은 승철이 정한을 돌아보며 씩 웃어 보인다. , 좀 멋있어 보이나? 그 물음에 고개를 주억일 뻔 한 것을 참아내고서, 그런 것도 같네요, 정한은 부러 그런 식으로 중얼거리며 그와 걸음을 맞추었다.

 

비싼 차라 그런지 승차감이 너무도 좋았던 탓에그 탓이라고 하는 편이 덜 우스울 것 같았다.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던 정한은, 승철이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지도 모르고 뒷자리에 거의 누운 채 새근새근 잘 자고 일어나서는, 제 집 침대에 누워 눈을 떴을 때 이미 동이 트기 시작한 것을 마주하고 작게 헛웃음을 지었더랬다. 휴대폰은 안 그래도 배터리가 간당간당하던 것이 결국 수명을 다해 차게 식어있었고, 협탁 위에 승철이 휘갈기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가 놓여있었다.

너 그렇게 피곤해하는 꼴 보기 그래서 그냥 재웠어. 필요하면 또 연락할게. 아침 챙겨 먹고. 텍스트에서 그 다정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아 정한은 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꾹 쥔 손아귀 안에서 승철의 글씨가 남은 종잇조각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윤정한은 다만 그것을 내다버리지 못하고 침대 한 구석에 집어던진 다음에, 거실로 나가 승철이 말한 대로 아침을 챙겨 먹었다. 기분이 묘하게 좋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나빴다.

 

 

다정한 말투에, 저를 신경 쓰는 듯한 행동, 그러면서도 별 생각 없이 쉽게 뱉어지는 말들, 교묘하게 기만하는 듯한 태도. 정한은 어디가 최승철의 진실인지를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이내 썅, 하고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최승철이 운운하던 큰 그림라스베가스로 가야겠다고, 정한은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승철과 함께, 가 아니라 승철보다 먼저 거기에 도착하겠다고. 몇 번이고 곱씹은 아침이었다.

 

 

 

 

 

 

 

*

 

 

 

 

 

 

 

침대에 반쯤 걸쳐진 채 잠들어 있던 정한이 눈을 떴을 때, 벽에 붙은 아날로그시계는 열한 시 반쯤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머리 바로 옆에 놓인 휴대폰은 LED를 반짝이며 문자가 왔음을 알렸고, 그는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헝클어진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잠이 덜 깨 멍하니 빈 벽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곧 휴대폰이 시끄러운 알람벨을 울려댔다. 언제부터 자고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까무룩 잠이 들어서는 꿈자리가 사나워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모두 떠올랐기 때문에잠을 설쳤으면서, 근무 시작 시간이 오후 1시란 것은 몸이 기억하고서 저를 수면(睡眠) 위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휴대폰을 쥐어 알람을 종료시키고 나서야 정한은 베개도 베지 않은 채 이상하게 누워 잠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 그의 얼굴에 뚝뚝 묻어나는 피로감은 비단 요상한 자세로 잠 들어 뻐근해진 몸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반쯤 틀어진 채 잠든 고개가 잘 돌려지지 않아 애를 먹은 정한은 교대를 20분 전후로 남기고서야 겨우 유니폼 넥타이를 조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게임을 하기에는 꽤 이른 시간임에도 호텔 투숙객또는 관광객으로 추정되는 사람 몇이 카지노 라운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들어 보고 아직 시간이 남았음을 확인한 정한은 바 스툴에 걸터앉아 덜 마른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렸다. 약간의 물기와 더불어 진한 샴푸 향이 손가락에 감긴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측면 벽을 따라 죽 늘어선 슬롯머신을 돌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그의 귓전을 울리고 지나간다. 아닌 척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던 정한은 문득 오른쪽 옆으로 제 생각을 한 치 오차 없이 읊어주는 음성이 다가오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슬쩍 거는 비즈니스용 미소. 목소리의 주인공승철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끄럽지? 요란스럽고, 눈부시고.”

당신 이제 하다하다 독심술까지 써?”

감정 못 숨기는 네가 여전한 거지.”

 

 

 

딱 떨어지는 블랙 수트를 갖춰 입은 승철은 손을 들어 부스스하게 뜬 정한의 뒷머리를 느리게 빗어 내렸다. 진한 샴푸 향이 그의 손가락으로도 물들어 간다. 정한은 제 귀 뒤에서 희미하게 불어오는 여자 향수 냄새 같은 것에 인상을 조금 찌푸리고, 이내 고개를 흔들어 승철의 손을 떼어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모아 묶어버리자 손을 거둔 승철이 또 한 번 장난스럽게 키득였다. 이내 그는고개를 돌려 하릴없이 슬롯머신 쪽을 바라보고 선 바텐더를 제 쪽으로 불렀다. Excuse me, 하는 부름에 푸른 눈의 백인 바텐더가 이쪽을 돌아보고서 다가와 섰다.

 

 

 

“Yes, sir. What can I do for you?” (,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A martini, please.” (마티니 한 잔이요.)

“Sweet or dry?” (스위트로 하시겠어요, 드라이로 하시겠어요?)

“A little MORE dry, please.” (조금 더 드라이하게 해 줘요.)

 

 

 

승철의 주문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바텐더가 자리를 뜨자, 승철은 스툴을 빙글 돌려 정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짧은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시계를 확인한 정한은 반쯤 틀어진 승철이 무색하도록 자리에서 일어선다. 카지노 입구 쪽 벽에 붙은 디지털시계에 12:50 이란 숫자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그대로 돌아설 것처럼 하던 정한은 문득 고개를 돌려 승철을 돌아본다. 그의 손에는 벌써 낯익은 칵테일 잔이 들려 있었다.

 

 

 

그런 대화를 한 시도 안 돼서 듣네. 웬만하면 주정뱅이는 취급 안 하고 싶은데 말야.”

난 취한 적 없어. 이런 거 마시면서 게임 하면 여자들이 좋아하던데.”

, 그럼 그 여자들이랑 게임 하시든가.”

오늘따라 튕기는 게 예뻐 보이네, 여왕님. 몇 번 테이블이야?”

, 몰라, 알아서 찾아 와.”

 

 

 

다시금 승철의 장난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하던 게 와장창, 비슷한 소릴 내며 깨지는 순간이었다. 부러 그 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고 딜러 대기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으며 들어온 정한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표정을 있는 대로 구겼다. 문 닫히는 소리에 대기실 안에 있던 딜러 몇이 그 쪽을 돌아보았으나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또 저래, 비슷한 반응일 테지. 정한은 아직 눅눅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입속말로 욕지거리를 씹어 삼킨다.

한편정한이 돌아서서 대기실로 들어가 버린 후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승철은 반동으로 큰 각을 그리며 회전하는 문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뜻 모를 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느리게 옮긴다. 입술 끝에 걸린 마티니 잔이 기울여지고 무색투명한 액체가 입술 사이로 흘러갈 때쯤 발걸음이 멈춰선 그 앞으로 정리가 한창인 테이블 모서리에 17이라는 숫자가 금박을 입고 박혀 있었다. 그 앞에 선 승철의 손가락 끝에 걸린 칵테일 잔이 가볍게 반 바퀴쯤 돌았다. 좀 전에열린 문틈으로 윤정한의 깨물린 입술 끝을 본 것도 같았던가, 싶은 생각이 어렴풋이 스몄다가 바닷물 빠지듯 흘러 나간다.

곧 자리를 잡고 스툴에 걸터앉은 승철의 시야로, 덜 자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넥타이를 조인 정한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희미하게 울리던 백 그라운드 뮤직BGM이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EDM으로 바뀌었다. 잘게 쪼개진 비트에 낮게 깔린 신디사이저 기계음이 은근히 집중력을 흩트리는 탓에 다리를 꼬고 앉은 승철은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며 손가락에 걸린 칵테일 잔을 가볍게 돌렸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카드를 셔플하는 정한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그의 시야 끝에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자리 잡는 것이 걸쳐졌다. 차르륵 소리를 내며 정한의 손 안으로 쏟아진 카드가 정리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승철은 칵테일 잔을 들어 마티니 한 모금을 들이킨다. 싸한 알코올이 목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조용히 눈가를 찌푸렸다. 샹들리에 조명이 밝고, 흐르는 음악이 시끄럽고,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치장이 요란스럽다.

습관적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던 승철의 시선이 문득 정한의 시선 끝에 걸리는 찰나, 52장의 카드 스택을 쥔 정한의 손이 그것을 철제 슈케이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 케이스 틈으로 밀려온 카드 뒷면의 어지러운 패턴에서 길게 뻗은 정한의 손으로 시선을 옮긴 승철의 귓가로 들리는 한 마디Welcome, lady and gentlemen.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Left is the first turn.” (왼쪽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손을 들어 승철을 가리킨 장한이 찬찬히 제 앞에 앉은 이들을 시선으로 훑으며, 슈케이스에서 카드 세 장을 빠르게 빼내어 승철 쪽으로 밀듯이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승철은 제 옆의 낯선 이들이 카드를 받을 동안 끄트머리를 들어 패를 확인하고서 뒤집어진 채 제 앞으로 끌고 와 가지런히 정렬해 두었다. 하트 5, 다이아 J, 그리고 스페이드 9. 승철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곧 카드 배분이 모두 끝나고, 슈케이스 위로 손을 가지런히 모은 정한이 입을 열었다.

 

 

 

“Choose one card, and turn it.” (카드 한 장을 선택해 뒤집어 주세요.)

 

 

 

그의 말이 끝나고, 승철의 바로 옆에 앉은 남자부터 카드 한 장을 뒤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스페이드 8이었다. 이어 승철이 뒤집은 카드는 가운데에 위치한 스페이드 J이었으며, 가장 오른쪽에 앉은 여자와 그 옆의 남자는 각각 하트 2와 하트 4를 뒤집어 내려놓았다. 적어도 다음 턴까지는 승철이 첫 번째 순서였다. 그는 오픈된 카드를 제 카드 맨 오른쪽으로 옮겨 정리하며 마티니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듯 한 모금을 들이켰다. 정한은 슈케이스에서 카드 한 장을 빼내어 쥐고 승철 쪽으로 내밀며 오픈시켰다. 첫 번째 오픈카드는 하트 9였다. 미묘하게 입 꼬리를 당긴 승철이 정한에게만 보이도록 살짝 웃어 보이고, 왼손을 들어 마티니 잔을 만지는 척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흐르는 EDM 비트에 맞췄다는 걸 놓칠 리 없는 정한은 역시나 승철에게만 보이도록 가볍게 웃어 보였다. 다음 순서의 플레이어에게 카드를 내미는 것을 꽤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승철은, 제 옆의 남자가 받은 카드가 클로버 8인 것을 확인하고서 미세하게 표정이 굳은 것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Hey, Mr. Navy suit.” (이봐, 남색 수트.)

“Me?” (?)

“Yeah. Are you a COUPLE?” (그래, . 혹시 너네 둘 커플인가?)

I and who?” (나하고 누구라고?)

“You and that guy next to you.” (너하고 네 옆에 있는 저 남자 말야.)

 

“Hey, he is MY boyfriend!” (이봐요, 이 사람은 내 남친이라고요!)

 

 

 

떠 보듯 장난스레 던져진 승철의 물음에, 질문을 받은 당사자남색 수트를 걸친 금발의 사내는 퍽 당황한 듯 보였고, 졸지에 게이 커플로 엮인 그 옆의 남자는 입을 닫고 있긴 했으나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 앉은 녹색 눈의 여자는 영국식 강세로 승철에게 쏘아 붙이듯 대꾸했다.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던 정한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가 웃음을 꾹 참아 삼키며 빼낸 카드를 여자에게 내밀었다. 다이아 9. 여자는 제 패가 나쁘지 않아 좀 전의 일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승철은 가만히 정한을 올려다보고, 슬쩍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보였다. 첫 번째 턴은 남색 수트의 남자 쪽으로 돌아갔다.

Your turn, 정한이 그를 가리키며 말하자 남자는 손에 쥐고 굴리던 녹색 칩 여러 개를 드문드문 칩이 놓인 베팅 존으로 밀어 놓았다. 그러나 뜬금없게도 그가 새로 받은 오픈카드는 다이아 2였다. 끝에서 여자가 비웃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승철은 가만히 그가 베팅한 칩의 개수를 헤아렸다. 한 개에 10달러니 총 50달러를 건 것이었다. 제 오른쪽에 색깔별로 쌓아 둔 칩들을 툭 건드려 쓰러뜨린 그는 좀 전의 남자가 건 것만큼의 칩을 가져다 베팅 존에 놓고 정한이 건네는 카드를 받아들었다. 하트 8, 제 옆의 남색 수트가 테이블을 가볍게 내려치는 것에 승철은 키득 소리 내어 웃었다. 턴이 돌아 세 번째로 카드를 받은 여자가 9 원 페어를 만들자 첫 번째 턴이 그녀에게로 넘어갔다. 말없이 가만히 카드를 확인하던 세 번째 자리의 남자는 제 턴이 되기 무섭게 카드를 뒤집으며 Die, 하고 읊조렸다. 승철이 세 번째 턴이 되자 정한이 문득 그 쪽을 응시했으나, 눈이 마주쳤을 때 최승철은 아랑곳 않고 경쟁자가 줄어든 것에 상당히 기뻐하고 있었다적어도 정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슬롯머신 쪽에서 누군가 잭팟이 터진 듯 소리를 지르는 틈을 타 한숨을 내쉰 정한은, 금세 표정을 싹 바꾸고서 가볍게 미소를 머금은 채 여자 쪽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뒤집어진 카드는 클로버 4였다.

 

 

 

“Oh, my luck is over.” (, 내 운은 여기까진가 봐.)

 

 

 

잔뜩 아쉬운 표정으로 제 남자친구에게 속삭인 여자는 이내 카드를 내려놓고 5달러짜리 칩 두 개를 베팅 존으로 던졌다. 승철은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두 번째 턴이었던 남색 수트의 카드가 별 볼 일 없는 것을 보고서 조용히 웃음을 흘려주었다. 남자는 승철의 카드도 별 볼 일 없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지만만약 그렇다 해도 우승은 그의 손을 들어주지 못한다. 그가 완성한 건 8 원 페어였으므로.

곧 정한의 손이 승철에게로 카드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승철은 기대감 없이 카드를 뒤집었다가, 이내 씩 미소 지으며 쌓아 둔 녹색 칩을 반쯤 뚝 잘라 베팅 존으로 내려놓았다. 차르륵 쏟아진 칩들이 대충 세어도 10개는 넘을 것 같았다. 정리된 카드 맨 오른쪽에 자리 잡은 세 번째 오픈카드 위에는 클로버 9개가 그려져 있었다.

투 페어 완성, 승철이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마지막 턴은 모두에게 히든카드가 돌아가는 턴이었다. 승철은 그것을 열어보지도 않고서 맨 왼쪽 끝으로 밀어 놓고 여유롭게 마티니 잔을 들어 홀짝였다. 제 옆에 앉은 남자는 마지막 카드에 목숨을 건 듯 했으나, 그마저도 쓸 만한 카드는 아니었던 듯싶었다. 원 페어 이상을 기대한 것 같았던 여자도 승철에게 J 원 페어가 메이드 되자 아예 포기해선 들고 있는 칩을 손에 쥐고 굴렸다. 중구난방으로 어질러져 있던 칩들을 색별로 정리하는 정한에게, 승철은 모르는 척 넌지시 물었다.

 

 

 

“Hey, Mr. Yoon. Do you have a boyfriend?” (윤정한 씨, 당신 남자친구 있어요?)

“Sir, sorry but I’m straight.” (고객님, 죄송하지만 전 스트레이트입니다.)

 

 

 

, 윤정한이 스트레이트? 웃기지도 않네. 승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채 일부러 연기하듯이 Oh, I’m sorry. 하고 대꾸했다. 눈가를 살짝 찌푸리는가 싶던 정한은 이내 개수가 제일 많은 녹색 칩을 10개 단위로 쌓으며 건성으로 물었다.

 

 

 

“Do you wanna be a COUPLE with me?” (나랑 연애라도 하고 싶은 거예요?)

“Yeah, It’ll be fantastic, isn’t it?” (그럼, 죽일 것 같은데. 아닌가?)

 

 

 

능청스런 대답에 정한이 픽 실소를 흘린다. 웃기지도 않아, 저 따위로 말해 놓고서 먼저 발 뺄 거면서. 조금 표정이 굳은 채 입술을 잘근 물었다 놓은 정한은 이내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플레이어들을 내려다보았다. 승철은 티라도 내듯 제 왼손을 정한의 시야에 걸리는 데다 놓고 일정하게 두 번씩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어 그의 음성이 들려온다. Game’s over. Turn your cards. (게임이 끝났습니다. 카드를 뒤집어 주세요.) 진작에 게임을 포기한 세 번째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각자 메이드한 패를 오픈해 딜러 쪽으로 밀었다. 결과는 최승철의 우승. 남색 수트는 8 원 페어를, 여자는 9 원 페어를 메이드 했다. 쌓여 있는 한 무더기의 칩을 모두 끌어 온 승철은 흐트러진 모양을 바로 잡아 정렬해 두고서 다시금 마티니 잔을 들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알코올에선 묘하게 단 맛이 났다.

 

 

 

“Total amount of bettings are 245 dollars. Five minutes later, next game. Thanks.” (총 베팅 금액은 245 달러입니다. 5분 뒤 다음 게임이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드를 쓸어 모아 가볍게 셔플한 후 뒤집어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은 정한은 목을 죄인 넥타이를 가볍게 풀며 자리를 슬쩍 떴다. 일부러 플레이어 쪽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그의 손끝이 승철의 등을 쿡 찌르고 지나갔다. 승철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정한의 발걸음이 향하는 반대편 구석진 곳으로 시선을 두다가, 이내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어깨를 돌리는 시늉을 하면서 그 쪽으로 향했다.

슬롯머신 돌아가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테이블 17 정반대편 구석에서, 정한은 벽에 기대어 선 채 입술을 잘근 씹었다. 떨어뜨린 그의 시야 안으로 잘 닦여 반질거리는 구둣발이 멈춰서고, 이내 단단한 손끝이 맞물린 입술을 문지르고 지나갔다. 고개를 든 정한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짓 좀 하지 마. 여기 내 일터야.”

알아. 일터라는 사람이 한낱 고객한테 나랑 사귀고 싶냐느니 하는 말을 하고 그러나?”

언제는 나보고 그렇게 하라며. 왜 시비야?”

네가 귀여우니까? 입술 깨물면 흉 져, 시간 없으니까 왜 불렀는지는 얘기해 줘야지?”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다시피 하고서 웃음을 가득 담아 보인 승철에 정한은 무어라 더 쏘아 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작게 내쉰 그가 무의식중에 입술을 꾹꾹 눌러 깨물다가, 집요한 시선이 입술에 와닿는 것을 느끼고 이내 혀를 내어 제 입술을 가볍게 축이며 목소리를 내었다. 승철의 손은 어느새 정한의 머리칼에 닿아 그것을 귀 뒤로 넘겨주고 있었다.

 

 

 

별 거 없어. 당신, 어디까지 갈 거야?”

? 모르지, 되는 데까지?”

다음 게임은 뭘로 할 건데?”

풀 하우스? 메이드 되는 거 보고 알려 줄게. 너무 초조해하지 마, 아무도 모르니까.”

 

 

 

누가 언제 초조해했다고, !

정한의 귓가에 입술을 두고 읊조린 승철이 정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테이블 17 쪽으로 걸어 나가자 시선을 돌린 채 대꾸하던 정한이 입술을 꾹 깨물고 목소리를 조금 높여 그를 불렀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머리칼을 풀어 대충 손으로 빗어 내리고, 다시금 정갈하게 그것을 모아 묶은 그는 풀린 넥타이를 꽉 조이며 승철보다 조금 늦게 테이블로 걸어 들어갔다. 초조해하는 건, 나인 걸까. 아무도 모르게 실소를 흘린 정한은 슈케이스에서 카드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쌓아 둔 카드와 함께 셔플하고서 다시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게임은 승철이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전 판에서 부진하더니 처음 오픈한 카드가 스페이드 K였던 세 번째 자리의 남자는 곧 승철이 Q 원 페어를 만들자 두 번째로 밀려났다. 남색 수트는 메이드 할 여지가 전혀 없는 패에처음 받은 세 장 중에 그나마 오픈할 수 있었던 게 클로버 6인 것 같았다.승철이 원 페어를 만들자마자 포기를 선언했다. 아까와는 달리 입을 닫은 채 고군분투하던 여자도 카드를 테이플 위로 집어던지며 Die를 외쳤다. 이제 둘만 남은 것이다. 더 받을 수 있는 카드는 세 장, 현재 승철이 보유하고 있는 카드는 Q 원 페어하트, 다이아, 그리고 오픈되지 않은 클로버 Q와 스페이드 7.

그러니까이미 그의 손에는 트리플이 쥐어져 있었다.

 

 

승철은 지난 판보다 적게 쌓인 칩을 정리하는 정한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이내 제 왼손을 들어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아까보다 좀 더 빠른 비트의 EDM이 흘러나오는 것에 맞춰 손을 움직이자, 그것을 시야 끝에서 바라본 정한이 픽 실소를 흘렸다. 신났네, 입속말로 중얼거리고서 고개를 들어 올린 정한이 세 번째 오픈 카드를 승철에게 건넸다. 하트 7이다. 승철의 입 꼬리가 눈에 띄게 말려 올라간다. 정한은 그 쪽에만 들릴 듯 작고 빠르게 속삭였다.

 

 

 

“Five minutes later, shift.” (5분 뒤 교대예요.)

“Oh, I’m really sorry.” (, 정말 유감이네요.)

“You want more game?” (더 게임하고 싶으신가 봐요?)

“Yeah, with YOU.” (, 당신하고.)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뱉은 마지막 말은 승철이 함꼐 플레이 중인 세 번째 자리의 남자에게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었다.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싶어 승철을 응시했던 정한은 그가 씩 웃으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자 표정을 풀고서 그 남자에게로 오픈카드를 건넸다. 사실 그도 패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 현재 승철은 Q 원 페어였고, 남자는 J 원 페어가 막 메이드 된 상태였다. 그와 그의 여자친구 사이에 쌓인 칩에서 회색 칩 5개를 들어낸 남자가 베팅 존으로 그것을 던졌다. 500달러? 승철은 제 입술을 느리게 혀로 핥아 축이며 얌전히 뒤집어진 카드 끝을 들어 다시금 새겨진 숫자를 확인한다. 남자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만들어진 풀 하우스. 순서는 다시금 승철 쪽으로 돌아간다.

 

 

 

두 번의 카드 배분과 한 번의 베팅이 끝난 후, 베팅 존에는 꽤 큰 금액의 칩들이 드문드문 쌓여 있었다. 기본베팅 금액5달러을 제하더라도 좀 전에 남자가 건 500달러에 승철이 굳이 콜 할 필요 없으면서 똑같은 금액만큼을 건 탓으로 대략 1000달러 이상이 베팅된 셈이었다. 승철은 연신 테이블을 두드리며 칩을 정리하는 정한의 손끝으로, 가볍게 흘러내린 머리칼로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곧 칩을 가지런히 쌓아 둔 정한이 고개를 들어 게임의 끝을 알렸다.

 

 

 

“Game’s over. Turn your cards.” (게임이 끝났습니다. 카드를 뒤집어 주세요.)

 

 

 

결과는 보나마나 뻔했다. 남자가 투 페어를 만들기는 했으나승철의 패는 풀 하우스였다. 일부러 마지막에 받은 히든카드부터 차례로 오픈하는데, 먼저 스페이드 2가 나오자 기뻐하던 남자는 승철의 손끝에서 클로버 Q가 뒤집어져 나오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시금 베팅 존에서 칩들을 끌어 온 승철이 한 가득 쌓인 제 칩들 주위로 새로 딴 칩들을 줄지어 세워 두었다.

잠깐의 브레이크 타임, 정한은 테이블 위에 흩어진 카드를 모아 셔플했고 승철은 빈 마티니 잔을 굴리다 지나가는 웨이트리스를 잡아 새 마티니 한 잔을 주문했다. 남색 수트는 별 생각 없는 표정을 하고서 슬롯머신 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고, 커플은 무언가 전략을 짜는 듯 딱 붙어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까처럼 조금 더 드라이한 마티니가 승철의 손에 들릴 때, 카드를 슈케이스에 집어넣고 케이스 뚜껑을 닫은 정한이 세 번째 게임을 열었다.

 

 

 

“Game starts. Left is the first turn.” (게임을 시작합니다. 왼쪽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정한의 손이 움직이고, 그의 손끝에 달라붙듯 카드 세 장이 딸려 나온다. 승철은 새로 채워진 마티니 잔을 들어 한 모금을 천천히 들이켰다. 제게로 건네진 카드 세 장을 차례로 테이블에 놓고서, 역시나 끄트머리를 들어 숫자를 확인한다. 다이아 9, 스페이드 A, 그리고 스페이드 10. 승철은 한 쪽 입 꼬리를 당기며 고개를 들어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시선이 마주치고, 정한은 아주 미세하게 어깨를 으쓱하고서 다음 플레이어에게 카드를 건넸다. 테이블을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던 승철은 맨 오른쪽에 놓인 스페이드 10 위로 손을 두었다. 여자까지 모두 카드를 배분받은 이후 카드를 차례로 오픈하는데, 여자의 수중에는 다이아 K, 남색 수트에게는 하트 8이 들려 있었다. 전력의 일환인지 별 볼 일 없는 카드를 오픈한 세 번째 남자는 제 베팅 차례가 되자 게임 포기를 선언했다. 나름 머리 쓴 건가. 승철은 가만히 오픈된 스페이드 10 카드 위를 톡톡 두드리며 머리를 굴렸다. 여자가 첫 번째 턴을 가져갔고, 그는 정한이 칩을 정리해 놓는 동안 혹시나윤정한이 물리적으로 카드를 조작하는 경지에까지 이른 건가, 싶은 생각까지도 해 보고서 혼자 헛웃음을 웃었다. 한 가지 이유라고 하면, 여자가 받은 첫 번째 오픈 카드가 하트 K였기 때문에.

승철은 제게로 돌아온 하트 A를 받아들어 놓고 마티니 잔을 들어 반 정도를 단숨에 비웠다. 물론 남색 수트야 별 볼 일 없는 클로버 6을 받았다고 하지만, 여자는 두 턴 만에 K 원 페어를 메이드 해 버렸다. 물론 A 카드가 안 좋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썩 맘에 드는 것도 아닐 테지. 원 페어를 만들지 않고 게임을 끌고 나가는 건 스트레이트거나로스플이거나, 두 가지 선택지뿐이므로 승철은 다만 둘 중 어느 것이라도 메이드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여자가 이중 스파이인가를 고민해 봐야 하는 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승철은 한 쪽 입 꼬리를 당겨 쓰게 웃었다. 정한이 그것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제 의도와 상관없이 터진 여자의 운에는 적잖이 놀랐지만.

 

 

여자가 크게 베팅을 하면 그것에 콜 하는 식으로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베팅 존에는 꽤 큰 금액의 칩들이 쌓이고 있었다. 세 번의 베팅이 끝난 후 남색 수트는 6 원 페어를 만들었고, 여자는 K 트리플을 만들었으며, 따라서 승철은 세 명 가운데 세 번째 턴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현재 그의 앞에는 오픈된 스페이드 A, 하트 A, 스페이드 K, 그리고 오픈되지 않은 다이아 9와 스페이드 10이 자리하고 있다. 마티니 잔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손끝에서 가볍게 굴리며, 승철은 제가 가진 스페이드 문양의 카드 세 장을 곱씹는다. 정한이 만들어 줬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저도 몇 번 만들어본 적 없는 데다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더더욱 드문 전설의 패가 메이드 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체면만 좀 섰으면 된 거지. 승철이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이미 여자에게는 별 볼 일 없는 클로버 7 카드가 들어가 있었으며, 남색 수트는 다이아 6을 받아 6 트리플을 막 완성한 찰나였다.

승철은 느리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슈케이스에서 카드를 빼낸 정한이 그것을 오픈해 승철에게 건네는데, 아주 미세한 각도였으나 제 쪽으로 먼저 앞면이 보이게끔 오픈하던 것을 마주하고서 그는 픽 웃음을 흘렸다. 받아든 카드는 스페이드 Q. 그것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여자 쪽에서 부정확한 음성이 작게나마 들려 왔다. 의심하는 거겠지, 승철은 그러나거기서부터 확신이 선다. 5개 마련해 둔 블랙 칩 두 개를 집어든 그가 베팅 존에 그것을 슥 밀어 놓았다. 신경을 긁어내리던 EDM이 끝나고, 카지노를 가득 채우는 배경음악이 다음 노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Fall Out BoyCenturies? 승철은 익숙한 노랫말에 입속에서 울리듯 허밍을 덧붙이며 손을 거두었다.

 

 

 

일전에, 그러니까 정한과 암호를 공유하고 시간이 좀 흘렀을 때였을까정한이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었다. 카드를 셔플하는 연습을 하다가, 스트레이트를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카드를 섞는 방법을 연구해본 적이 있었다고. 승철 저야 어차피 카드 셔플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단순한 호기심에 그 방법을 물었었는데, 생각보다 어려워서 머릿속에 잠시 들어앉았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싹 지워졌던 것 같다. 다만 카드를 셔플할 때 의도적으로 한 문양으로 정렬된 카드 스택을 나머지 무더기에 사이사이 끼워 넣고 셔플하면 된다, 라고 했었던 것도 같았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정한과 처음 합을 맞췄던 지하 도박장에서, 승철은 겜블 인생에서 세 번째 로스플을 메이드 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 날 밤에,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간 도박장 안에 정한과 둘이 남아 몇 천 쯤 됐던 돈을 세면서 뭐라고 했었더라.

 

마지막 히든카드를 받아 들며, 승철은 베팅 존에 놓인 제 블랙 칩 5개와 기타 가진 칩의 절반가량이 쌓인 칩 무더기를 정리하는 정한의 손끝을 가만히 응시하고서, 그 때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로스플 메이드 한 건 네 셔플이 컸던 것 같다. 잘 했어.

그게 끝이에요, 설마?

이 돈 절반 너 준다니까. 뭘 더 바라?

 

당신, 나랑 잘래요? 로스플은 마티니에, 당신 차에, 당신 룸 넘버잖아.

 

 

 

그 때좀 더 자란 단발머리를 쓸어넘기며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생긋 웃던 윤정한에게, 최승철은 무슨 말을 했었더라. 손을 들어 넥타이를 살짝 당긴 승철이 얌전히 뒤집힌 히든카드 끄트머리를 들어 새겨진 숫자를 확인하고서, 고개를 들어 윤정한을 올려다보고, 이내 그 얼굴 가득 환하게 미소를 담으며 제 수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낯익은 문양이 새겨진 차 키, 승철의 메르세데스 벤츠였다.

 

 

 

“Mr. Yoon, you know that?” (윤정한 씨, 그거 알아요?)

“No, I don’t.” (아뇨, 모르는데요.)

“I said nothing, yet.” (나 아직 아무것도 안 말했는데?)

“What do you wanna say, then?” (그럼 뭘 말하고 싶으신데요?)

 

 

 

세 판의 게임 가운데 가장 많은 칩이 쌓인 터라 고개 숙여 그것을 정리하던 정한이 문득 고개를 들어 승철을 마주하는데,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승철의 왼손 바로 옆으로 낯익은 차 키가 놓여 있자 정한의 두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정말로 제 의도가 아니었던가. 승철은 백 그라운드 뮤직 비트에 맞추듯 손가락을 느리게 움직여 테이블을 두드리며 정한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정한이 늘 믿지 못하는, 그 낮게 깔린 음성이었다.

 

 

 

“Room 808, this is mine.” (808, 내 룸이에요.)

 

 

 

드럼 비트가 큰 음악 소리에 반쯤 묻히다시피 해서 그것을 전해들은 정한이 미세하게 입 꼬리를 끌어올린다. 그 쪽으로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있던 승철은 자세를 고치며 마티니를 들어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칩 정리를 마친 정한의 손이 단정하게 채워진 유니폼 베스트 마지막 단추 위로 겹쳐 놓여졌다. 게임 종료를 알리고, 여자와 남색 수트가 트리플을 메이드 한 자신의 패를 앞 쪽으로 밀어 모두에게 보이도록 했다. 승철은 느리게 손을 움직여 스페이드 A, K, Q를 차례로 앞 쪽으로 밀어 두고, 처음 받았던 히든카드 가운데 한 장을 뒤집어 앞으로 밀었다. 스페이드 10이다. 이어 마지막 카드를 집어든 그의 손이 뒤집어진 채로 먼저 그것을 앞으로 밀어 놓고, 제 쪽에서부터 느리게 뒤집는다.

 

스페이드 J.

승철의 앞에 줄 지어 놓인 카드 다섯 장,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다.

 

 

 

 

 

 

 

승철이 베팅 존 가득 쌓인 칩들을 모두 챙겨 일어설 때, 마침 정한의 교대 시간이 되었고, 여전히 의문을 감추지 않은 채 자리를 뜨는 남색 수트와 커플을 뒤로 하고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승철의 옆으로 넥타이가 조금 풀린 정한이 다가와 섰다. 별 말없이 승철의 어깨에 걸린 묵직한 가방을 들어 본 정한은 생각보다 꽤 되는 무게에 놀라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않고 여과 없이 뱉어냈다. 일정한 박자로 숫자가 바뀌는 전광판을 올려다보던 승철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신났네, 당신. 이래저래 돈 많이 벌고 좋으시겠어.”

가방 안 무거워? 같이 들까?”

됐네요, 여왕님한테 이런 거 맡겨서 뭐 해.”

 

 

 

눈에 띄게 기분이 좋은 티를 팍팍 내며 건네진 정한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한 승철이 곧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먼저 걸어 들어갔다. 정한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는 닫힘 버튼을 누르고, 반질반질해 얼굴이 비치는 엘리베이터 벽을 바라보며 부스스해진 제 머리를 다시 묶었다. 승철은 가만히 벽에 기대어 서서 정한이 하는 모양을 보고 있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라 작게 웃음을 흘렸다.

 

좀 전에그러니까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게임 중간에 떠올렸던 윤정한과의 과거에서, 자신이 그에게 무슨 대답을 했었는가가 떠오른 것이다. 그게 좀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었던가. 승철은 넌지시 그렇게도 생각해 보며 그 때의 제 대답을 곱씹는다.

 

 

 

그래 봤자 새끼고양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애 건드리는 거 별로다.

 

 

 

그리고 정한을 돌아본다. 놀리기에 귀여운 맛이 있는 그는 여전히 새끼고양이라는 애칭 아닌 애칭이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나최승철은 윤정한을 건드리고 싶어졌다. 윤정한이 숨길 수 없는 단 하나의 감정을 무시하고 싶지 않아진 것이다. 엘리베이터 전광판의 숫자가 막 5에서 6으로 바뀔 때, 거기까지 결론을 내린 승철은 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연다. 막 머리를 다 묶은 정한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서 그를 돌아볼 때였다.

 

 

 

윤정한. 너 나랑 잘래?”

……?”

, 싫어?”

 

 

 

이거 지금 진심인데, 장난 아니고.

엘리베이터 벽에 부딪쳐 잔뜩 울린 승철의 음성이 너무나도 일상적이어서, 정한은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가만히 그것을 보고 선 승철은 픽 웃음을 흘리며 한 걸음을 그 쪽으로 옮긴다. 세 걸음 째 되었을 때 정한의 등이 엘리베이터 벽과 완전히 닿고, 숨결마저 느껴질 법한 거리에서 두 사람의 맞닿은 시선이 이리저리 얽혔다. 유달리 진득한 승철의 시선을 다 받아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정한에게, 승철이 낮게 읊조렸다. 넌 여전히 고양이 같은 맛이 있지만

 

 

 

어쨌든 그게 날 끌어당기기에는 충분했어.”

…….”

여왕님, 그래서 싫어?”

 

 

 

장난스레 뱉어진 물음에 정한은 가까이 다가선 승철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서, 대답 대신 가볍게 미소를 걸며 제 입술을 승철의 입술 위로 맞댔다. 눈이 반쯤 접히는 웃음은 이전과 같았다. 명백한 도발, 승철은 입술이 맞닿은 채 실소를 흘리고, 이내 손을 들어 정한의 뒷머리를 감싸며 그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퍼즐 맞춰지듯 맞물린 입술 틈으로 순식간에 달아오른 두 개의 살덩이가 오가는 순간, 승철의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땡 소리를 내며 열린다. 그의 어깨를 쥐어 가볍게 밀어낸 정한이 조금 가쁘게 숨을 고르며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이내 어깨를 쥔 채 팔에 힘을 줘 열린 문 뒤로 밀어냈다. 승철이 뒷걸음질 치다시피 해서 제 룸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맞붙은 두 몸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고, 붉은 빛이 도는 정한의 입술 위로 잘게 입을 맞추던 승철은 제 룸 앞에 다다랐을 때 다시금 그것을 머금으며 뒷주머니를 뒤적여 카드키를 꺼내었다. 입 안을 바쁘게 헤집는 승철을 받아내던 정한은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다시금 힘 줘 그를 밀어내고, 카드키를 쥔 그의 손을 내려다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문 안 열어? 여기서, 뭘 더 어쩌려고.”

여기서 하는 것도 스릴 있지 않나?”

 

 

 

제발, 오늘은 당신한테 욕 하고 싶지 않아.

한쪽 눈을 가린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긴 정한이 승철의 손에 들린 카드키를 뺏어 들어 문을 열었다. 딱 붙어 엉키다시피 한 두 쌍의 구둣발이 겨우 룸 안으로 밀어 넣어지고, 현관에 선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맞물렸다.

 

 

 

철컹, 원주를 그리던 현관문이 퍽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규정원] 가자, 나락으로  (2) 2017.02.27
[쿱정] 반짝반짝 두근두근 (*전력)  (0) 2016.10.09
[쿱정] 푸른 봄 (*전력)  (0) 2016.08.06
[우정] 난파 2 - 웃는 별 (*전력)  (0) 2016.07.17
솔정 조각/부치지 못할 편지  (0) 2016.07.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