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봄

[쿱정전력 청춘예찬]

 

 

            

w. (@HYEMM_SVT)

 

 

 

 

 

조별과제 공고가 붙었다. 주제는 청소년 문화에 대한 심층적 이해’. 게시판 앞에 선 방년 스물 셋, 과대 최승철은 줄줄 늘어진 글자들을 침착하게 눈에 담는다. 어떻게 복학하자마자 조별과제냐. 옆에서 어깨를 두드리는 동기들이 내적 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지는 사실이어서, 승철은 그 손을 단호하게 내쳤다. 아니, 복학하자마자 과대 일을 다시 떠맡은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조별과제야 과 특성 상 많은 게 당연한 거니까 그것도 별 상관 없었다.

그런데, !

 

 

 

[수강생들의 공평한 참여를 위하여 조는 임의로 편성하였으니 아래 붙임을 확인 후 과제를 수행하기 바랍니다.]

 

 

 

교수가 지 맘대로까놓고 말하면 조교가 랜덤 프로그램 돌린 게 확실하겠지만조를 정하냐 이 말이다. 승철은 왼쪽 눈에서 오른쪽 눈으로 지나가는 글자를 세 번이나 붙잡은 후에야 입속말로 욕설을 읊조려 보았다. 시발 뻐킹. 나지막한 음성에 동기들은 웃기다고 또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자신들도 랜덤 프로그램의 희생양임을 깨닫고 다급하게 손을 뻗어 공고 앞장을 넘긴다. 죽 늘어선 학번을 손끝으로 훑어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서로 같은 조가 되었다고 기뻐하다가도 제사 뒤진다. 집안 행사 뒤진다.’ 따위의 문장을 반쯤 장난 식으로 내뱉는 동기들도 있었다. 그리고 승철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제 학번을 찾아 글자들을 스캔하다가, 마지막 조 맨 위에서 굴러가던 눈동자를 멈추었다.

 

 

 

[6

 

조장 14017024 최승철

조원 14017016 윤정한

……]

 

 

 

그리고 승철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그의 등 뒤에서 난리 굿을 하던 동기들도 나열된 문자를 인식하고서 적당히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대여섯 명이 모인 게시판 앞이 조용해진 이유라면, 승철의 이름 아래에 1순위로 적힌 이의 이름자 때문이었다.

하아……. 적막을 깨듯 한숨을 내쉰 승철의 두 눈에 다시금 들어차는 이름의 주인공윤정한은, 조별과제를 하는지 마는지는 제 알 바가 아니라는 느낌으로, 과방에서 가장 구석지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가장 볕이 잘 드는 창가 근처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휴대폰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간간히 그 액정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더랬다.

 

 

 

 

 

그러니까, 청소년교육과 14학번 윤정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간단하게는 승철과 그 무리들의 동기였다. 그 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를 돌이켜 보자면, 임시 과대로 뽑혀 버린그의 대표 운명은 이때부터였을 지도 모른다승철이 듣기로 남자 신입생이 가장 많은 해라고 했었다. 얼만큼 가지고 놀 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신나 보이는 여자 선배들과 달리 남자 선배들은 어떻게 여학생이 세 명 뿐이냐며 이를 득득 갈았으나, 언제 왔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히 구석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윤정한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었다. 사실 그것은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승철이 길을 잘못 알려준 탓으로아슬아슬하게 참석한 동기들은 물론 승철과 함께 마지막으로 들어온 여자 임원진 선배들까지도 모두 똑같이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웬만한 여자도 어울리기 힘든 단발머리를 하고서 창 밖을 바라보는 얼굴에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다가, 선배들이 들어오자 슬쩍 미소를 짓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뻤던 것을 승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임원들 사이에 끼어서, 아마 그 때 승철은 정한의 웃는 얼굴에서 토끼나 새끼 고양이 따위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쟤는 귀여운 것만 닮았네, 하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다가 혼자 놀라 작게 소리를 질러 버린 것 또한 기억에 남아있을 테지.

 

그러나 개강 이후 맞은 윤정한은 오리엔테이션 때의 첫인상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도 선배들 앞에서는 적당히 웃어주고 적당히 대답해주는 것도 같은데, 다수의 동기들 가운데 문장으로 구성된 대답을 받아본 사람은 승철이 알기로 없었다. 정말, 없었다. 우선은 과방에 1학년 다수가 남게 되면, 윤정한은 마치 제 지정석인 것 마냥 볕이 잘 드는 구석 자리로 가서, 고고하게 다리를 꼬아 앉아서는 다음 강의가 있을 때까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는 했다. 이따금씩 누군가에게 문자나 카톡을 보내는 것도 같았고, 이따금씩 정체 모를 게임을 하는 것도 같았다. 간간히 미소를 띠는 것은 시종일관 바라보는 액정 속에 그 원인이 있을 터였고, 누가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어 보려고 앞을 얼쩡거린다 싶으면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다. 일례로 승철의 동기 중에 제일 인생 막 산다 싶은 놈이 고만고만한 다른 과 애들하고 윤정한 웃는 거 받기라든가, 되도 않는 내기를 했다면서 과감하게 구석 자리로 다가갔었는데, 휴대폰 속에 뭐가 들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말갛게 웃던 정한은 그가 가까이 와서 제 어깨를 두드리기가 무섭게 표정을 싹 지우고 적당히 긴 머리를 찰랑이며 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은 위협이라기 보다는,

 

 

 

— 야, . 나 지금 숙주 뽑는 거 안 보여?

……어, ?

너 때문에 이거 이거 다 못 뽑아서 죽었잖아. 네가 책임질 거야?

 

 

 

정확하게, 아주 정확하게 새끼 고양이가 다 자라지도 않은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한 마디로 앙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찰나의 정적, 이후 윤정한이 휴대폰 액정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과방을 울리고, 절망에 빠진 동기 놈이 무리 속으로 터덜터덜 걸어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승철을 포함한 나머지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삼켜 내려 갖은 미친 짓을 다 하고 있었다. 물론 다시 게임에 빠져든 윤정한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안중에도 없었고. 승철은 왜 웃느냐며, 자긴 진지하다며 울분을 토하는 동기 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결국 과방을 박차고 뛰어나와야 했다. 물론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앉은 동기 놈이 웃긴 이유도 있었으나, 복도 구석 자판기 앞에서 참았던 웃음을 뱉어내는 최승철을 건드린 것은 당연하게도 윤정한이었다. 게임 하느라 바쁘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스무 살 남자가 말을 저렇게, 귀엽게 하지? 누가 보면 미친 놈이라고 혀를 찼을 정도로, 승철은 정한이 뱉었던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으며 한참을 웃으며 제 옷으로 바닥 청소를 다 하고서야 과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청소년교육과 14학번 윤정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간단하게는 승철의 동기였고, 조금 덧붙이자면 하는 행동이며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여운 생명체임에도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줄곧 발톱을 세우는 새끼 고양이와도 같은 사람이다,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승철은, 잠깐의 과거 여행을 끝마치고서 자신의 위치를 절감한다. 2년 전의 제가 바닥 청소를 다 해가며 웃었던 그 일의 최대 피해자인 동기 놈이 저를 보면서 아까 전부터 징그럽도록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조별과제까지도 좋다, 같은 조가 된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윤정한은 과 내에서 5등 안에 들 만큼 학점이 좋았다—. 그러나 현재 휴대폰에 두 눈동자를 박은 이는 조별과제 공고가 떴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고, 따라서 조장인 승철이 직접 가서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건데, 다시금 돌아본 윤정한은 현재 게임으로 추정되는 활동에 매우 열중하고 있었다. 또 다시 고뇌에 빠진 승철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숙이는데, 그때 그 피해자였던 동기를 필두로 눈치를 깐 나머지 무리들이 그의 어깨를 반쯤 성의 없이 두드려 주었다. 그나마 승철과 마음이 잘 맞는다 싶은 동기가 그를 위로한답시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어차피 너는 그래도 좀 덜 쪽팔릴 거 아니냐. 그 때 저 새끼는 쟤한테 수작 걸어볼라고 간 거고, ? 너는 임마, 정당한 사유가 있잖냐.”

……같잖은 위로 안 받는다, 가라.”

, 그래. 빠이.”

 

 

 

그러나 이미 당사자가 된 승철에게 그 따위 위로가 통할 리 없었다. 이미 명당자리에 진치고 앉은 동기들은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저를 보며 잔뜩 비웃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무드 없는 남자기로서니 제가 거절해도 상투적인 멘트를 하나쯤은 더 뱉어줄 것만 같았던 동기 녀석도 가란다고 인사까지 건네며 명당자리로 발을 옮겼다. 이 와중에도 윤정한은 이 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제 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액정을 향해 반짝 빛나는 두 눈이 참 귀엽게도 생겼다, 고 승철은 무의식 중에 그렇게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결심한 듯 호흡을 골랐다. 이게 뭐라고 다가가는 몇 걸음이 그렇게 비장한지 저도 모를 일이었지만, 동기들 다 모인 앞에서 개 쪽 팔기는 싫었던 승철은, 정한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어깨 너머로 휴대폰 액정을 곁눈질하며 있는 대로 눈치를 다 보다가, 겨우 오른손을 뻗어 눈앞에 놓인 그의 어깨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때물고기들이 유영하는 화면을 지그시 바라보며 평화롭게 스크롤을 내리던 윤정한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그 바람에 스크롤이 한없이 위로 올라가며 얼떨결에 액정을 꾹 누른 탓에 이미 열 마리나 보유하고 있는 물고기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최승철은 어깨 너머로 이름 모를 게임 화면에서 빛이 번쩍이며 물고기 형상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는 걸 곁눈질하며, 속으로 절망한다. 창조된 물고기가 확대되어 화면 안을 헤엄치는 것을 잠시 동안 바라보고 앉았던 윤정한은, 누가 봐도 새침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반쯤 돌려 승철을 올려다보았다.

 

 

 

, . 나 지금 어비스리움 하는 거 안 보여?”

……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지금 너 땜에 분홍 돌고래 못 사고 블루탱 산 거 안 보이냐구.”

……아니,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니고—“

이거 생명력 모으려면 반나절은 더 걸리는데, 네가 책임질 거야?”

 

 

 

그 표정만큼이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침한 말투에, 승철의 등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앉은 동기들은 역시나 웃음을 삼키느라 갖은 난리 굿을 하느라 바빴고, 윤정한은 최승철의 뒷말 따위 듣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매몰차게 돌렸으며, 최승철은 그 자리에 선 채 그렇게 생각했다. , 좆됐다. 그 와중에도 어깨 너머로 곁눈질한 윤정한은 여전히 화면 속 바다를 누비는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홀드시키고 바닥에 놓인 제 가방을 집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차게 식어 있는 승철을 곁눈질하고서 인상을 조금 찌푸린 채 거기 서서 뭐 해?” 하고 물은 것은 어찌 보면 희망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아니, 그…… 우리 조별과제 공고 떴어.”

근데?”

그니까, 너랑 나랑 같은 조라고……. 그거 말하려고 했었는데,”

그래? 카톡 방 열면 답 할게, 앞으로 거기서 얘기해.”

아니, , 그건 당연한 건데, 그게 아니라—“

할 말 다 했지? 나 간다.”

 

 

 

하지만 그것이 희망이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한은 빠르게 제 의사를 전달하고서 승철과 나머지를 지나 과방을 벗어났다. 철제 문 닫히는 소리가 육중하게 울려 퍼지기 무섭게 둘러앉은 동기들은 참았던 웃음을 뱉어내느라 거의 울고 있었고, 승철은 정말로 이게 뭐지 싶어 멍하니 정한이 앉았던 자리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쯤 되니 그 때 그 동기 놈이 이런 기분이었나 싶기도 해서 승철은 되도 않는 연민의 심리까지 갖고 있었으나, 등을 돌려 이미 반쯤 오열하는 동기들을 바라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심각한 수치심을 느꼈다. 이대로 땅이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 발 한 발을 떼는 동안 동기들은 손등으로 촉촉해진 눈가를 훔치며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 아…… 존나 웃기네, 그래도 너는 저 새끼보단 말 더 많이 섞은 거 아니냐?”

그니까, 너 이 새끼 성공했다?”

, 최승철 윤정한이랑 말 섞었으니까 기념주 안 마시냐?”

저 새끼 지갑 훔치자. 아 존나 웃었네. 이번 달 중에 제일 웃겼다.”

근데 난 최승철 반응도 웃긴데 윤정한이 오졌다고 본다. 솔직히 스물 세 살 먹고 누가 저렇게 말하냐?”

 

 

 

제가 얼만큼 가까이 왔는지도 모르고 저들끼리 웃기 바쁜 동기들의 말을 가만히 선 채로 곱씹으면서, 승철은 무의식 중에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고 머리칼이 흩날리도록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과방을 뛰쳐나가든가 바닥에 머리를 박든가 혀라도 깨물든가 셋 중 하나는 하고 싶었다. 최소 2년은 더 볼 동기들 앞에서 쪽 판 건 그거대로 미치겠는 거였고, 무엇보다 동기 녀석의 말을 인용하자면스물 세 살 먹고 저렇게 말하는 윤정한이 제게 망신을 주는 와중에도 극도로 귀여워서 그거대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거 뭔 기분이 이 따위야. 얼굴을 잔뜩 구긴 승철이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기합 비슷한 것을 내지르자, 그때까지도 그가 가까이 있는 줄 몰랐던 동기들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몸을 뒤로 빼며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야, 최승철 왜 저래? 미쳤대?”

몰라, 존나 쪽팔린갑지.”

 

아 씨발! 다 싸물어, 이 도움 안 되는 새끼들아!”

 

 

 

최승철, 결국 폭주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내뱉고 가방도 챙기지 못한 채 과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쿵 소리를 내며 닫히는 철문 너머로 얼 빠진 듯한 동기들의 헛웃음이 들려온 것도 같았으나 그런 걸 신경 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과거 제 동기를 비웃었던 복도 끝 자판기 앞으로 달려가서, 또 한 번 옷으로 바닥 청소를 하며 실성한 듯 웃다가, 다시금 절망했다. 나 이제 쟤들은 둘째 치고 윤정한 얼굴은 어떻게 봐……. 고장 나 켜지지 않는 형광등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승철의 눈가가 약간, 아주 약간 촉촉한 것도 같았다.

 

휘몰아치던 감정이 조금 진정된 후에 주머니를 뒤져 찾아낸 잔돈으로 캔커피를 하나 뽑은 그는, 그래도 돈이 있어서 다행이다—,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과방으로 돌아왔다가, 텅 빈 내부에 제 가방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을 보고 낮게 욕지거리를 읊조렸다. 나 다음 필수전공인 거 왜 까먹었대……? 두꺼운 전공 책이 든 가방을 들쳐 메고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승철은 속으로 내질렀다.

 

 

 

시발, 나 오늘 왜 되는 일 없어!!

 

 

 

 

*

 

 

 

 

 

 

조별과제를 시작한 후로 3일이 지났다. 생각 외로 승철이 조장인 6조의 과제 상황은 굴곡 없이 평탄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승철은 사실상 하는 일이 없었다. 최승철 이십삼 세 인생 들어서 온갖 수모를 다 겪은 3일 전 저녁에 단체 카톡방을 열었을 때, 씻고 온 사이에 역할 배분이 끝난 걸 보고서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 보겠다고 제안했던 그는, [절대 안 돼] 라고 1초 만에 도착한 답장의 주인공이 윤정한인 것을 확인하고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가 한 일이라고는 자료 조사 때문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후배들을 불러다가 밥과 술을 사준 것, 과방에서 틈나는 대로 노트북을 붙잡고 프레젠테이션을 만드는 윤정한에게 커피며 각종 음료수를 사다 나른 것이 전부였다. 승철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도 않고, 괜히 무임승차하는 기분이 들어 정한을 마주칠 때마다 저도 프레젠테이션을 함께 만들겠다는 의사를 대놓고 비추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정한은 딱 잘라 거절하고서 그를 지나쳤다. 또 무시당한 건가, 중얼거리는 그에게 옆에 서 있던 동기는 어깨를 두드려 주며 그렇게 대꾸했다.

 

 

 

네 새끼 컴맹인 거 쟤도 모를 일 없지 않겠냐. 보노보노나 안 넣으면 다행이지, 그냥 닥치고 돈이나 써.

 

 

 

순간 발끈해 치켜 올라갔던 주먹은 말 없이 끄덕여지는 고개와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동기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이 사실이었다. 전자기기라고는 휴대폰밖에 사용할 줄 몰랐던 최승철이 1학년 때 발표 과제를 거하게 말아먹은 것을 같은 과라면 모를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날이면 날마다 지갑을 몇 번이고 열었다. 사다 나르는 음료수를 말 없이 받아 준 정한이 이제는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오늘, 과방 한 구석윤정한의 지정석에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앉은 승철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옆에 선 정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USB를 꽂는 손이 떨리는 것처럼 보여서, 살짝 웃었던 것도 같았다. 승철은 USB를 조심스레 연결 포트에 밀어 넣고, 감전이라도 되는 마냥 손을 급하게 떼고 후하후하 심호흡을 해댔다. 생 지랄이야, 지랄. 멀리서 외쳐 대는 동기의 조롱 섞인 목소리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이유라면, 정한이 3일 간 승철이 사다 준 커피와 음료 따위를 받아 마시면서 제작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제 노트북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심장께를 붙잡고 호흡을 느리고 길게 뱉는 승철을 또한 내려다보면서, 정한은 웃는 듯 마는 듯 알 길 없는 표정을 하고 마우스에 손을 얹어 느리게 커서를 움직였다.

 

 

 

“폴더가 빨리 안 뜨네……. 이거 폴더 뜨면 그냥 끌어다가 너 바탕화면에 옮기고 USB 빼서 나한테 주면 돼. 그 정도는 하지?

“어우, 그 정도는 당연히 하지.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멍청이 맞는 거 같은데…….

“아, 아니거든? 너도 나 놀리냐?

“아님 말구. 미안.

 

 

 

, 또 당했다. 윤정한 특유의 화법에 다시금 넋을 놓고 앉았던 승철은 —제 표정이 웃긴 게 분명했다조금 웃는 것도 같은 정한을 올려다보다가 그의 손가락이 화면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거기로 시선을 옮겼다. 띠링, 단조로운 알림과 함께 노트북 귀퉁이에 USB 실행 선택 창이 뜬 것이었다. 뭐 누르면 되지? 순식간에 당황스러워진 승철이 눈동자만 굴리며 허공에서 손을 휘젓고 있을 때, 정한은 그보다 빠르게 마우스를 잡아 ‘폴더를 열어 파일 보기’를 클릭했다. 그러고서 승철이 하는 짓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눈이 마주쳤고, 정한은 결국 못 이기고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아, 너 진짜 바보 같아.

“……기분 탓일 걸?

“컴퓨터로 아무것도 못 하면서 노트북은 사양 좋은 걸로 산 것도 신기해.

“아, 아까부터 자꾸 나 놀리냐고.

“안 놀리는데? 사실이잖아. , 폴더 떴다.

 

 

 

한 번은 이겨볼라 치면 금세 새침하게 표정을 바꾸는 정한에 승철이 작게 한숨을 내뱉는데, 때마침 화면 위로 떠오른 폴더를 커서 끝이 가리켰다. 줄곤 마우스를 붙잡고 있던 정한은 제 손을 떼고 승철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후하후하, 다시금 심장께에 손을 둔 채 심호흡을 내뱉던 승철은 너무나도 어색하게 제 마우스를 붙잡고 조심스레 커서를 움직였다. 한 발자국 옆에 선 정한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화면을 들여다보고 조종이라도 하는 것마냥 가만가만히 내뱉었다.

 

 

 

“이제 그거 문서 꾹 눌러서, , 바탕화면에 놓고 마우스에서 손 떼.

“……이거 꾹 누르라고?

“어, 두 번 말고 한 번만 클릭해서 폴더 밖으로 끌고 가.

“……이렇게?

“……”

“야, 제발 맞다고 해 줘…….

“어, 그거 하고 이제 손 떼.

 

 

 

마우스를 쥔 오른손을 벌벌 떨면서도 생각보다 시키는 대로 잘 해낸잘 해냈다고도 볼 수 없을 만큼 쉬운 작업일 테지만승철은 마우스에서 급하게 손을 떼고 상체를 뒤로 빼며 이동 진행 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막대 바에 색이 채워지며 순조롭게 파일이 이동되고 있는 것을 함께 바라보며, 정한은 특유의 새침한 말투로 “잘 했네.” 하고 던지듯 내뱉었다. 여전히 긴장을 놓지 못하고 화면을 바라보던 승철은 순간 노트북 화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띠링띠링 알림음을 울리다가 이내 저 알아서 종료되는 것 또한 멀거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그것을 함께 보고 서 있던 정한은 순간 당황한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이내 넋이 반쯤 나간 것처럼도 보이는 승철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 너 노트북 충전기 있어?

“……어, ?

“충전기 있냐구! 아 씨, 왜 충전을 안 하고 다니는 거야!

“아니, , 잠깐만, 기다려 봐봐.

 

 

 

이동 중이던 파일이 통째로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는 정한을 따라 저도 맘이 급해진 승철은 제 가방을 마구잡이로 뒤적여 겨우 노트북 충전기를 찾아냈다. 그것을 들고서 눈만 굴려 콘센트를 찾던 승철이 답답한 모양인지, 정한은 그의 손에 들려있던 충전기를 반쯤 뺏어 들어 제일 가까운 콘센트에 꽂고 노트북 전원을 켰다. 전력이 공급되자 노트북은 언제 제 맘대로 꺼졌냐는 듯 평소대로 부팅되었고, 마우스를 쥔 채 커서가 뜰 때까지 이리저리 그것을 움직이던 정한은 완전히 부팅된 이후 바탕화면 그 어디에서도 이동된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찾을 수 없어서 입술을 꾹 다물고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슬쩍 돌아본 승철은 이미 완전히 넋이 나가 마우스를 어색하게 쥐고 커서를 움직여 바탕화면 위를 마구 휘저었다. 할 말이 없어 입술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있는데, 뒤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던 정한이 승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서 야, 하고 부르는데 처음으로 위압감 비슷한 걸 느낀 승철이 몸을 반쯤 돌려 그를 마주하기 무섭게 정한의 두 손이 승철의 어깨를 잡아 그를 짤짤 흔들어 댔다.

 

 

 

“야, 최승철! 너 내가 3일 동안 맨날 과방에서 이거 만든 거 몰라서 이래?

“으억, 아니, 정한아, 잠깐만, 이거 놓고

“이제 파일 다 날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되는데 네가 책임질 거야 뭐야!

“아니, , 책임은 지는데,

“아 씨, 책임 지든가 말든가 난 모르겠으니까 너 알아서 해!

 

 

 

승철을 정말로 짤짤 흔들면서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톡톡 쏘아 붙인 정한은 그를 집어 던지기라도 하듯 놓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제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승철은 넋이 나갈 대로 나가서 이미 화면 보호기를 띄워내는 제 노트북 한 번, 전공 교재며 보조 배터리 따위를 주섬주섬 챙겨 제 가방에 밀어 넣는 윤정한을 한 번 바라보다가 이내 제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개를 양 무릎 사이로 처박았다. 나 새끼 왜 살아, 왜 살아!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머리채를 잡아 뜯는 동안, 짐을 다 챙긴 정한은 입술을 앙 다문 채 가방을 들쳐 메고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승철의 곁을 스쳐 과방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동기들도 저마다 과제를 이유로 과방을 빠져나갔고, 내부에 덩그러니 남은 승철은 휴대폰이 카톡 알림음을 울려 댔음에도 차마 그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덮어진 노트북 위에 제 머리를 처박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최승철을 내버려 두고 나온 윤정한은, 사실 오갈 데 없어 복도 끝 자판기로 향했다가, 주머니에 늘 있던 잔돈도 하필 오늘따라 보이지가 않아서 애꿎은 자판기를 운동화 앞코로 툭 건드리며 화풀이를 하고서 자리를 떴다. 무의식 중에 휴대폰 홀드를 풀었다가 승철과 한 카톡 대화창이 떠 있어서, 정한은 눈가를 찌푸리며 다시 휴대폰을 홀드시키고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다. ,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되는 일이 없어, 진짜. 부루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복도 벽에 부딪혀 울렸다가, 금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

 

 

 

 

 

그 후 또 다시 3일이 지나는 동안, 승철은 주기적으로 정한에게 갠톡을 보내 용서를 구했다. 물론 정한은 그것을 읽지 않고, 그저 알림이 울리면 울리는 대로 내버려 뒀다. 일부러 사람 미치게 만들려는 속셈은 아니었고, 다만 컴퓨터를 못 다뤄도 너무 못 다루는 승철이 괘씸했을 뿐이다. 그렇게 냅두고 가도 내일쯤 되면 다시 커피 같은 걸 사 들고 제게 와서 치근덕댈 줄 알았건만, 요 사이 일부러 과방에 들러도 승철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더랬다. 갠톡을 씹느라 단체 카톡방마저 확인을 못 하고 있었던 윤정한은 내심 그의 행방이 궁금하면서도 속으로 미쳤나 봐, 따위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원래 하던 대로 얼굴에 철판 깔고 치근덕대면서 웃는 얼굴로 사과나 하면 제 노트북에 틀만 잡아놓은 게 있으니 내용만 입력하면 된다하고 언질이라도 줄 텐데. 아예 등교를 안 하는 것 같아 정한은 여러모로 기분이 복잡했다. 제가 괜히 심하게 굴었나 싶기도 하고, 그랬다가도 고개를 내젓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낮이 되어서야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단체 카톡방에 들어가 버리고 만 윤정한이었다. , 읽을 생각 없었는데. 중얼거리며 입술을 꾹 물었다 놓고서 말과는 다르게 메시지 하나 하나를 꼼꼼히 읽는 게 저 스스로도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띄는 메시지는 이틀 전쯤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김민규

정한선배 어디계세요ㅜㅜ    오후 11:28

김민규

저지금 도서관인데 승철선배 프레젠테이션 만드신다는데여     오후 11:28

김민규 

제가좀도와드리고 기숙사 들어가시라고 햇는데 이거 다만들고 가신다고 하셔서요ㅠㅠㅠㅠ     오후 11:29

부승관

선배 어제도 밤새신거 같던데ㅜㅜ 무슨 일 잇엇어요???    오후 11:31

김민규

그거 나도 궁금해서 물어봣는데 선배 그냥 한숨쉬시고 그래서 그냥 더 안물어봣어..    오후 11:31

……]

 

 

 

그 아래로도 비슷한 내용으로 울음바다를 만들어 놓은 후배들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가, 맨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서 정한의 두 엄지가 액정 위로 놓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른 시각에 보내진 메시지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승철이었다.

 

 

 

[최승철

드디어 다만드럿ㅅ다     오전 3:47]

 

 

“……진짜 바보 아냐, 최승철.

 

 

 

습관처럼 입술을 꾹 물었다 놓은 정한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빠르게 손을 움직여 그 아래 메시지를 하나 보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지갑을 챙겨 들었다. 제가 책임 지라고 했다고 정말로 3일 밤을 새며 지지리도 못 하는 컴퓨터를 다룬 최승철이 답답하기도 하고, 왠지 대견한 것도 같고, 여하튼 이상하리만치 복잡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 지금 과방갈게] 하고 보낸 메시지를 읽었는지 카톡 알림음이 주구장창 울려 댔지만, 정한은 그것을 굳이 확인하며 느긋하게 걷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아, 더워, 최승철 있어?

“어……, 정한이 진짜 왔네.

 

 

 

평소 같으면 기숙사에서 빨리 걸어도 15분 내외로 도착할까 말까 한 과방에 10분 컷으로 도착한 정한은 제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벌컥 문을 열고 승철을 찾았다. 생각보다 꽤 넓은 과방을 쭉 둘러보던 그의 시선 끝에, 항상 제가 앉던 구석 자리에 책상과 반쯤 합체가 되어 마우스를 휘두르던 승철이 걸렸다. 다 잠긴 그의 목소리가 넓은 과방 내부로 울려 퍼졌다. 윤정한은 웃음인지 실소인지 모를 것을 앙 다물었던 입술 새로 흘려내며, 저 보라는 듯 노트북을 반대로 돌리고 마우스를 움직여 커서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승철을 바라보고서 이내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픽 웃어 버렸다.

 

 

 

“아…… 졸려 뒤질 거 같은데 어쨌든 다 만들었다.

“……야, 너 진짜,

“내가 어? 그래도 후배들이 많이 도와 줘서…… 볼 만 하게는 만들었는데, 그래도 맘에 안 들면 어쩔 수 없는 거긴 하고……. 암튼 그 때 좀 미안해서 밤 좀 새 봤다…….

“내가 그거 그냥 책임 지라고만 했지, 만들라고는 안 했는데,

“책임 지는 게 만드는 거지 뭐. 어차피 잘못 내가 한 거 맞는데

 

“아……. 너 지금 진짜 웃겨. 진짜로.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어기적어기적 제게 걸어와 선 승철을 똑바로 마주하며, 정한은 그 피곤과 잠에 찌든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귀엽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눈이 반쯤 풀린 채 정한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고 섰던 승철은 잠시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잘 지어지지도 않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평소 하듯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 밀었다.

 

 

 

“와, 윤정한 웃었네. 웃었다. 이거 화 풀린 거 맞지?

“아, 좀 저리 가, 너 진짜 너무 웃겨

“내가 3일 동안 갠톡 보냈는데 계속 안 읽어줘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 근데 화 풀렸네, 아 신기해. 나 이제 몸 그만 사려도 되는 거 맞지? 그치?

 

 

 

정말로 그 동안 많이 불안해 했었는지, 승철은 정한이 손을 뻗어 어깨를 밀고 얼굴을 잡아 돌리는데도 아랑곳 않고 그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며 화가 풀렸음을 확인 받고자 했다. 잔뜩 웃은 터라 급격하게 땅겨 오는 두 뺨을 양 손으로 감싸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정한은 승철의 어깨를 잡아 저를 등지도록 돌려 놓고서, 어색하게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렇게 대꾸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승철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질 만큼, 그 말투는 이전처럼 새침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 그거 만들어준 거는 고마운데, 나는 너한테 그냥 책임 지라구만 했지 만들라고는 한 적 없다?

“어어, 알았어, 알았어.

“그리구 내가 화 났다고 한 적도 없다, ……뭐.

 

 

 

정한은 그렇게 말꼬리를 얼버무리고 제 머리를 헝클이며 돌아서다가, 여전히 저와 출입문을 등지고 선 승철에게로 다가가 그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근데 사실 나 할 말 있어.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얘기를 하는 게 저도 모르게 어려워서, 정한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가 겨우 말을 꺼내 놓고 승철을 먼저 과방 밖으로 떠밀었다. 복도 끝, 불이 고장 난 자판기 아래로 향하면서 정한은 승철보다 두세 걸음 늦게 걸으며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고 또 빗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 여전히 알 수 없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할 말이 뭔데? 해 봐, 여기 진짜 덥다.

 

 

 

자판기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음료를 고르는 정한의 뒤로, 어쩌면 놀리는 듯한 승철의 말들이 날아왔다. 정한은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등 뒤로 고개를 홱 돌리고서, 나 지금 음료수 고르고 있잖아! 하고 톡 쏘아 붙이고서는, 고심 끝에 캔 커피 하나와 탄산음료 하나를 뽑아 들었다. 차가운 표면에 몽글몽글 맺힌 물방울이 손바닥으로 스미는 것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가, 윤정한은 제 손에 들린 음료수를 승철 쪽으로 모두 내밀며 그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한 채 입을 열었다.

 

 

 

“이거 먹고 싶은 거 골라서 먹어.

“아, 나 주는 거야? 뭐 먹지.

“그리구 나 말 안 끝났어. ……사실 내가 그 때 너무 막, , 너 잡고 짤짤 흔들고 그래서 괜히 그런 거 같아서 이거 주는 거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 안 했음 좋겠어. 그리구, , 나 솔직히 기분 좀 이상해서 잘 모르겠긴 한데, 그래도 너 정도면 나 귀찮게 안 할 것 같아서 말 하는 거거든?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니까, 너 이제 나 옆에 와서 건드려도 되구, 나랑 같이 다녀도 되구……. 암튼 그렇다고.

 

 

“아, 그래서 우리 썸 타자고?

 

 

 

, ! 최승철 진짜 미쳤나 봐! 괜히 말했어!

잘 정리되지도, 듣기 좋게 여과되지도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놓고서 고개를 돌린 정한을 대놓고 놀리는 듯 그렇게 되물은 승철에게, 정한은 캔커피를 든 손을 높이 치켜 들었다가 입술을 앙 다물며 그를 등지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 팔이 높이 올라갔을 때 캔커피를 뺏어 든 승철은 등 뒤에다 대고 잘 먹을게—, 특유의 장난기 어린 말투로 중얼거리며 한 모금을 쭉 들이켰다. 아직 찬 기가 남은 탄산음료를 끌어 올려 조금 붉어진 듯한 제 뺨에 가만가만 대고서, 정한은 분명 날이 더워서 뺨이 뜨끈한 거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두 사람 사이만 봄인 듯 아닌 듯,


스물 세 살 최승철과 윤정한의 청춘(靑春)이 흘러가고 있었다.

 

 

 

깜빡, 깜빡, 깜빡, 깜빡. 일정한 속도로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흐린 시야 위로 흰 불빛이 점멸하듯 시야가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간헐적으로 모래가 잔뜩 섞인 바람이 불어 닥친다. 나는, 그 모래먼지가 속눈썹에 내려앉아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 이후에야 판단할 수 있었다. 첫째, 우주복이 파손되어 헬멧 유리면이 깨졌다. 둘째, 그러므로 이 무거운 기계장치는 내게 산소를 공급해 줄 수 없다. 셋째,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다.

잠깐, 죽지 않았다고? 그런 의문이 듦과 동시에 굳게 닫혀있던 시야가 순식간에 환하게 열렸다. 여과되지 않은 태양빛 같은 것이 쏟아져 들어오는 탓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눈이 시려 초점을 잡는 데도 애를 먹었다. 겨우 선명해진 눈앞에는 헬멧 유리면의 균열이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으며, 그 뒤로 약간 기울어진 프레임 안에 어두운 하늘과 황토색 땅이 반반씩 들어차 있었다. 느리게 숨을 집어삼켜 본다. 그리웠던 공기가 폐부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한 손을 움직여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등 뒤로 불쾌한 기계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내려다보이는 기계장치는 전원이 나간 채 내 몸을 무겁게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두 번째 난파였다.

또 다시 이름 모를 소행성에 버려진 것이다. 지구에…… 갈 수는 있을까. 시선을 떨어뜨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그 끝에 누군가의 발걸음이 걸린다. 아마 이 소행성의 주인이겠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허벅지를 다 덮는 길이의 짙은 남색 제복, 안에 받쳐 입은 교복흰 셔츠와 남색 니트 조끼, 남색과 금색의 배색 넥타이—,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주황과 노랑을 반씩 섞은 듯 묘한 색의 머리칼, 그리고 제복 깃에 달린 금색 나비 모양의 엠블럼.

마지막으로 짙은 밤하늘을 담은 두 눈동자. 나는 그 이방인의 시선이 점점 나에게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숨을 집어삼켰다. 찰나의 정적, 그리고 급하게 집어삼킨 내 숨이 입술 새로 흘러나올 때쯤, 그는 내 눈동자를 집요하게 바라보고서 입 꼬리를 끌어 당긴다.

 

 

그런, 극도로 해사한 웃음. 그 뒤로 별빛이 흐른다.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은그런 미소가 내게 흐르고 있었다.

 

 

 

 

 

이지훈 X 윤정한

 

 

난파 2 – 웃는 별

[우정전력 :: ‘난파’]

 

 

 

 

w. 허니콤보

 

 

 

 

0. 난파 1일차

 

 

 

눈동자가 정말 예뻐.”

…….”

그리고 당신의 눈에서는 바다 냄새가 나.”

 

 

……바다? 이방인의 입에서 환상처럼 터져 나온 말에 의아해졌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그의 흰 손가락이 내게로 뻗어져 왔다.

 

 

하지만 여기에는 바다 같은 건 없어.”

…….”

그래도 환영해. 지구에서 온 손님은 처음이니까.”

 

 

그는 빛이 나는 듯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망설임 없이 헬멧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난 그저 고개를 그 자리에 둔 채 눈만 굴렸다. 분명히 우스웠을 것이다. 그는 아이처럼 키득거리며 내 뺨 어딘가를 쿡 찌르듯 가리켰다. 짤막한 고통에 눈가가 찌푸려진다. 상처가 난 건가? 다른 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며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다쳤어.”

……,”

그리고 얼굴이 반짝반짝해.”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이며 손을 거둔 그의 손가락 끝에는 자잘한 유리 조각이 붙어 있었다. 헬멧이 깨질 때 안쪽으로 파편이 튄 것일 테지. 묵직한 기계장치에 둘러싸인 양 손을 들어올려 헬멧을 벗어 던졌다. 바닥을 구르는 기계장치 쪽을 바라보며 이방인은 다시금 키득거렸다. 자꾸 웃지 마. 나는 난파된 이후 처음으로 온전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해제장치가 망가지지는 않아 버튼을 누르는 대로 쓸모 없어진 기계장치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면서 별 생각 없이 등 뒤로 고개를 돌리는데, 반쪽이 완전히 망가진 듯한 우주선이 바닥에 머리를 박고 내던져져 있었다. 순간 머리가 아찔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저걸 수리해 지구로 가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지난 난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규모였기에 시간을 어림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일단은 내부 상태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 나는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고서 남은 우주복을 모두 해제하고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측면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힘을 줘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모서리가 찌그러진 문이 뜯어지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등 뒤로, 작은 뒤척임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안심할 수 있었던 이유라면, 대충 둘러본 내부는 거의 파손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정해 놓지 않았던 집기들이 떨어져 난장판이 되었으나, 그런 것쯤이야 치우면 그만이었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내부를 빙 둘러 걷는 중에, 문득 한 귀퉁이에 붙은 전신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우주복을 입기 위해 최소한의 이너웨어만 입었던 것을 이제야 인지한 것이다. 달리 걸칠 옷가지가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지구에서 입던 흰색 가운을 가져다 걸쳤다. 단추를 여미며 거울 앞에 서는데 왼쪽 가슴께에 달린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견습연구원 윤정한. 명찰을 떼어버릴까 하다가 그냥 그대로 뒀다. 적어도 이 행성의 아이 같은 주인은 견습, 이란 글자를 신경 쓸 것 같지 않았다. 해서 나는 거기에서 손을 거두고 거울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정말로 그가 말했던 것처럼 양 뺨에 유리조각이 잔뜩 붙은 것을 확인하고서 굴러다니는 생수 병을 집어 들었다. 아끼지 않는 마지막 물이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뚜껑을 열고 그것을 그대로 이마 위에서 뒤집었다. 쏟아지는 물이 유리조각을 쓸어 내려갔으나, 생각보다 크게 난 상처를 건드리는 탓에 눈가를 찌푸렸다. 옷 소매를 당겨 물기를 닦아낸 후에, 나는 대충이나마 말끔해진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까만 눈동자로 시선을 옮겼다.

 

어린 이방인은 내 눈에서 바다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나지막이 바다, 하고 중얼거려 본다. 어쩌면……, 이 소행성에 이 정도로 불시착하게 된 것도 가 불어 준 바다의 기운 때문이 아닐까. 조각난 기억들이 파도 치듯 밀려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난파, 바다의 별, 기억의 바다와 마지막의 바다,

 

 

그리고 그 별의 주인, 그레이프프루트 색 머리칼을 가진 인어.

 

 

— 어차피 난 널 그리워할 수밖에 없어. 시간이 흐르면 내가 널 더 사랑할 테고. 그럼 난 조용히 바다가 되었다가 시간이 더 지나서 네가 지구에 도착할 때쯤이면 널 잊고 다시 이 모습으로 새로운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수많은 인연들이 스쳐가는 동안 단 하나의 인연도 간직할 수 없다며 내게 이름조차 물어오지 않았던 그.

 

 

당신, 진짜……, 진짜 잔인해.

맞아, 원래 인어는 다 잔인하지. 하지만 널 내 옆에 둘 수는 없어. 넌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지.

 

 

아직 내가 지구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도 내가 밀어 넣듯이 가르쳐 준 이름을 잊지는 않았을 텐데. 끝까지 이름 한 번 불러준 적이 없었다. 사실 그건,

 

 

— 날 잊어도 좋아. 하지만, 날 기억해 준다면…….

 

홍지수, 라고…… 그렇게 기억해 줘.

 

 

……홍지수.”

 

 

나도 마찬가지인걸. 나지막이 뱉어진 그의 이름자가 묘한 이질감을 띤 채 입 속에서 굴러다녔다. 그제야 내 까만 눈동자에 머무르던 시선이 측면 출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또 다른 이방인의 웃는 얼굴. 설마, 날 기다리기라도 했던 거라면?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어 조금 당혹스런 표정을 지은 것도 같이 입술을 반쯤 비틀어 깨물고 출입구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을 때, 예상 외로 어린 이방인은 쭈그려 앉은 채 내가 남기고 간 헬멧을 손끝으로 건드리듯 굴리고 있었다. 긴 제복 밑단이 바닥에 죄 끌리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허탈해져 출입구 문지방에 선 채 헛웃음을 뱉으려니, 그제야 그게 고개를 들어올려 나를 바라다본다. 나는 그 쪽으로 다가가다가 그의 입술 끝에 걸린 손가락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더 다가온 쪽은 그였다. 손 다쳤어? 반쯤 그랬을 것으로 치부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상처가 꽤 길고 깊다. 왜 그랬느냐고 물으려는데 그의 담담한 음성이 먼저 울렸다.

 

 

당신과 같은 방법으로 같은 상처가 났어.”

 

 

나는 그런 목소리를 내는 그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단지 상처가 난 후에 그렇게 생각했다고 전달한 것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일부러 나와 같은 상처를 내었거나. 어느 쪽이 되었건 그는 다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유달리 까만 눈동자는 제 키보다 높은 쪽을 응시하며 느리게 굴러갔다. 그 시선에서 결심 같은 것이 선다. 이번에는 정말로 왜 그랬느냐 묻기 위해 첫 글자를 입에 담기까지 했는데, 먼저 목소리를 낸 쪽은 이번에도 그였다.

 

 

있지, 내 장미는 줄기가 꺾여 흔들리는 동안 내게 화를 냈었어. 내가 너무 멀쩡하게 서 있었거든.”

……뭐?”

이렇게 하면 당신은 내게 화내지 않을 것 같았어. 당신과 같아진다는 건 이해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인간들은……, 이렇지 않아?

 

그는 좀 전까지 아주 쉽고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태연한 말투였으면서, 내게 동의를 바라는 듯 되물어 올 때에는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목소리를 죽이는 것이 내 눈치를 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낯선 이방인이다. 마냥 아이 같은 것도 아니고, 애어른 마냥 정신이 먼저 큰 것도 아닌, 이상한 아이. 나는 날 이해하기 위해 손가락을 다쳤다는 그에게 달리 대답해줄 말을 찾지 못해서, 조금 망설이다가 팔을 뻗어 그의 손목을 쥐었다. 우주선 쪽으로 잡아 끌다시피 데리고 들어오는 동안 그는 조용히 내 빠른 걸음에 맞추듯 종종걸음을 걸었다. 나는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내부를 둘러보다가 반쯤 기울어진 간이의자를 발견했으나, 저걸 꺼내오는 게 더 큰일일 것 같아 그를 그냥 침대 끄트머리에 앉혀 뒀다. 두 손을 허벅지께에 얌전히 모으고 앉은 그를 뒤로 하고 서랍을 뒤적여 지구에서 챙겨 온 연고와 반창고를 찾아냈다. 두 번째 난파로도 모자라,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이방인의 상처를 치료해주다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터졌지만, 그는 그런 내 동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약간의 호기심을 담은 얼굴을 하고서 가만히 있었다. 그의 옆에 걸터앉아 둘 사이에 반창고를 두고 그의 손을 덮은 소매 끝을 끌어당겼다.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그가 다친 손가락을 내밀었다. 과하다 싶을 만큼 짜낸 연고를 펴 바를 때 그는 아프다거나 간지럽다는 등의 얘기를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다만 눈가를 미세하게 찌푸렸을 뿐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가 약으로 번들거릴 때쯤, 시선을 내리깐 그가 낯설도록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기, 내가 틀린 거야?”

 

 

반창고를 집으려던 손이 잠깐 동안 공중에 멈춰있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뭐가? 하고 되물으며 반창고 껍질을 깠다. 상처가 완전히 가려졌을 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사실, 뒷말을 듣기도 전부터 해 줘야 할 대답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해한다는 건 같은 감정을 가지는 게 아닌 거야?”

음…… 아니?”

그럼 같은 감정을 가진다는 건 이런 게 아닌 거야?”

…그,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야, 같은 감정을 가지려고 해서 꼭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냥, 뭐랄까……. 그런 상황이라고 상상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는 거잖아.”

 

 

내 딴에는 공들여 한다고 한 대답이었으나,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깔끔하게 달라붙은 반창고 위를 문질거리던 그는,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시선을 끌어당겼다. 공중에서 두 개의 시선이 부딪친다.

 

 

…그치만 난 당신과 같아지고 싶어.”

 

 

그는 내 얼굴 어딘가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듯 하더니, 이내 팔을 뻗어 내 손에 들린 연고를 낚아 채 갔다. 줄곧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던 게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성한 손가락에 연고를 짜 내 뺨에 내려앉은 상처 위로 그것을 펴 발랐다. 잠깐 사이에 잊고 있었던 상처였는데, 조심스레 닿아오는 그의 손끝이 자꾸만 내 뺨을 간질거리고 지나갔다. 일말의 아픔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얼마 동안 상처 주위를 손끝으로 문질거리던 그는 이제야 제 성에 찰 만큼 약이 발라졌는지 손을 거두고 생긋 웃어 보였다. 이게 네가 원하던 거였어? 하고 묻자 그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덧붙이는 음성은 다시 좀 전처럼 담담해져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건 아픈 일이 아니니까.”

…….”

어쩌면 내 장미는 내가 자기를 이해하려고 할까 봐 화를 냈던 걸지도 몰라.”

…….”

이게 인간의 방식인 거 맞지?”

 

 

그러고서 이방인은 입 꼬리를 끌어당겨 웃는다. 오늘로써 두 번째로 마주하는 그의 극도로 해사한 웃음을 마주하고서, 나는 불가항력에 이끌리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웃어 보았다. 문득 그는 무언가 잊었던 걸 떠올리기라도 한 듯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그래서 말인데, 하고 운을 띄웠다. 장미를 피워줄 수 있어? 나는 그가 줄곧 장미 얘기를 했던 것을 상기시켜 보고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리기에 이르렀다가, 다시금 닿아 오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못해 우주선 내부에 식물 씨앗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으로 상념들을 덮어 버렸다. 지구에서 출발할 때를 더듬어 본 결과 꽃으로 추정되는 식물 씨앗 몇 개를 챙겨 넣었던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당장 그에게 주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게서 원하던 꽃씨를 건네 받은 그가 이 우주선을 등지고 떠나 버린다면, 난 정말 지구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나는 대답을 바라는 그의 눈을 마주하고서 내가 떠나는 날 그것을 선물하겠노라 일러 주었다. 그의 표정이 짧은 순간 경직되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끝낸 머릿속에서 다시금 가설의 가능성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치만 떠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야. 난 슬픈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렇게 약속해 줘.”

어떻게?”

내가 당신처럼 당신을 이해하는 날, 내게 장미를 피워 주겠다고.”

 

 

당신처럼 당신을 이해한다라……. 인간의 방식을 배우고 싶은 것일 테지, 나는 멋대로 해석하고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하라는 뜻에서였다. 이방인이 한층 더 밝아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우지야. 이름을 부르는 건 한 걸음 다가가는 거라고 했어. 당신도 다가올 거지?”

 

 

순서가 뒤바뀔 대로 뒤바뀌어서 이제야 이루어진 통성명이었다. 그의 혀 위를 구르고 공기 중으로 뱉어진 이름은 그를 닮아 자꾸만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애초에 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을 것도 아니었으나, 생각지도 않게 내 손이 먼저 뻗어져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번엔 좀 제대로 눈을 맞추고 입 꼬리를 끌어올린다. 맞잡은 그의 손에 붙은 반창고가 내 손등을 간질였다.

 

 

안녕, 나는 윤정한이야.”

 

 

맞잡은 손을 느리게 흔들면서, 나는 줄곧 세워왔던 가설에 마침표를 찍었다.

 

 

어리지만 어리지 않고,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실재하는 어린 왕자와의 요상한 첫만남이 기억 속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1. 난파 4일차

 

 

 

난파한 이후로 사흘이 지났다, 고 우지는 그렇게 말했다. 우주선 선수에서 바라본 하늘 위에 동쪽으로 지는 별을 세 번 봤으니 그런 거라고 설명도 해 주었다. 그 동안 나는 망가진 우주복에서 얻어진 기계 부품과 우주선 내부에 실려 있던 비상 공구함을 뒤져 찾아낸 자잘한 부품 따위를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는 일을 했다. 같은 시간 우지는 서쪽으로 별이 뜰 때 우주선으로 와서 동쪽으로 질 때 제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내가 특별히 주의를 줬다거나 부탁한 적 없었는데도 그는 청소를 도와 준다거나—어떤 날은 자기가 직접 청소를 하거나— 내가 버린 부품들을 관찰하며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말 없이 혼자 놀고는 했다. 어쩌면 나는 그런 그가 있었기에 좀 더 힘을 내어 우주선을 수리할 생각도 해 보고, 끼니를 챙긴다거나 잠을 자는 등의 일상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우지가 내 난파한 삶 깊숙이 파고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사흘 만에 첫 번째 과제를 끝낸 나는 오늘은 무조건 쉬겠다, 라는 일념 하나로 침대에 줄곧 누워만 있었다. 한참 전에 놀러 와 분류가 끝난 부품들을 정리해 준 우지는 날 보다 못해 그저께 제가 크레파스 씹듯이 먹었던 초콜릿을 용케 찾아와 내 입술 새에 디밀었다. 이름을 가르쳐 준 소용이 없이 그가 날 부르는 단어는 당신, 이 전부였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당신이 말한 휴식이 이런 거였어? 벌써 하루의 반이나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도 덜 쉬었다고 할 셈은 아니지?”

진정한 휴식은 하루 종일 누워서 자는 거야.”

, 안 돼. 그럼 이거라도 먹어. 그리고 안 일어나면 이거 맘대로 본다?”

 

 

, 정말로 하루 종일 누워만 있고 싶었는데. 나는 우지가 내 입에 물려주고 간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고 입 안에서 잘게 조각 내며 겨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는 간이테이블 근처에서 무언가를 품에 안은 채 팔랑팔랑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게 짐짓 비장하게 말해 온, 딴에는 협박의 수단쯤으로 작용한 것일 테지. 느린 움직임으로 침대 아래에 두 발을 디딘 채 앉아 있으려니까, 제복 밑단을 팔랑이며 다가와 내 옆에 앉은 우지가 품에 안았던 것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손때가 잔뜩 탄 푸른 빛의 표지, 최대한 단정한 글씨로 적힌 내 이름자. 그러니까, 이건 바다의 별에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내 사진 앨범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부들부들한 표지를 몇 번 쓸어보다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우지에게 물었다.

 

 

이거 어디서 찾았어? 내가 찾을 땐 그림자도 안 보였는데.”

며칠 전에 청소하다가 찾았는데? 역시 이 우주선은 당신보다 날 좋아하는 것 같아.”

……너 이게 뭔지는 알아?”

. 발견했을 때 뭐가 그 안에서 떨어져서 내가 끼워 뒀어. 전부 사진밖에 없던걸? 당신처럼 인간들은 기억해 두고 싶은 것들을 사진으로 남긴다고 들었는데, 맞아?”

 

 

반문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표지를 넘기자 그가 끼워둔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몇 장이 허벅지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등 뒤에 앨범을 두고 사진을 집어 들자 내심 궁금했는지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쭉 빼었다. 하나를 뒤집어 보니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릴 적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었다. 키 작은 벚나무 아래 그보다 더 작은 어린 날의 내가 서서 순진하게 웃고 있는 것이 새삼 새롭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우지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사진 위를 문질거렸다.

 

 

이 나무는 이름이 뭐야? 내 바오밥나무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이건 벚나무야. 봄이 되면 벚꽃이 피는데, 어…… 그러면 이거 같이 구경할래?”

그래, 난 좋아.”

 

 

벚꽃을 설명할 길이 없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등 뒤로 손을 뻗어 앨범을 집어 들었다. 괜히 혼자 있을 때는 다시 펴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차라리 누군가와 같이 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우지는 내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쥐고 있던 사진을 다리 위에 올려두고 앨범을 펼치자 묵은 종이 냄새가 공기 중으로 퍼졌다. 몇 장을 뒤적이자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 사이로 교복을 입고 선 내 사진이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 사진을 가리켰다.

 

 

나 이 꽃 알아. 당신이 보여주려던…… 벚꽃 맞지? 예전에 지구에서 본 적 있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신이 나서 그 때의 경험을 줄줄 늘어놓았다. 꽃잎을 머리에 얹은 채 여기로 돌아오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내 또래의 여자애와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러 다녔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랬느냐며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 동안 내 손은 빠르게 움직여 사진 속 내가 어른이 된 시점에 멈추어 있었다. 이야기를 끝낸 우지는 시간이 좀 더 흐른 내 얼굴도 제 손가락으로 문질거렸다. 스물, 처음으로 연구원이 된 날 찍은 사진이었다.

 

 

이건 지금이랑 같은 옷을 입고 있어. 여기 오기 전이야?”

, 이건 재작년 사진. 처음 연구원이 된 날 찍은 거야.”

연구원이라는 건 당신처럼 우주여행을 다니는 사람인 거야?”

전부 다 그렇지는 않아. 난 정말 예외고.”

 

 

맞아, 정말 예외지. 3년 차 견습연구원이 단독으로 우주에 가다니. 작게 한숨을 내쉰 것을 용케 들었는지 내 쪽으로 팔을 뻗은 우지가 종이 끝을 잡아 넘겼다. 바람이 불어 날린 것마냥 팔랑이는 종이 위에는 하늘 위를 수놓은 불꽃놀이 사진이 여러 장 붙어있었다. 불꽃놀이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건, 정말 예쁘다……. 별 같아, 진짜 예뻐.”

지구에서 이런 건 본 적 없어?”

, 한 번도. 전부 별은 아니지?”

, 이건 불꽃놀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반짝반짝한 걸 만들어서 하늘로 쏘아 올리는 거야. 그럼 하늘에서 그게 터지면서 이렇게 되는 거지.”

 

 

이해했으려나, 싶어 다시금 그를 바라다 본다. 여전히 두 눈을 빛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그 사진들은 정말 절묘한 타이밍에 예쁘게 찍힌 것들이었다. 벌써 반 년 전의 일이었던가. 나는 팡팡 터지는 불꽃 아래서 미소를 지은 과거의 나를 우지가 그랬던 것처럼 손끝으로 문질거렸다. 내 옆에서 그는 불꽃놀이, 하고 입속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날, 정말 행복했었는데. 추억에 젖어 무의식 중에 보고 싶다, 하고 중얼거리자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어왔다.

 

 

뭐가? 이거 보고 싶어?”

, 이 날 진짜 좋았는데 싶어서. 그리고 예쁘잖아. 반짝반짝하고.”

……여기는 지구가 아니라서 볼 수 없을 텐데.”

그냥 해본 말이야. 지구에 돌아가면 볼 수 있겠지.”

그치만 난 보여주고 싶은데. 반짝반짝한 거.”

 

 

우지는 조금 시무룩해져서 그렇게 웅얼거렸다. 괜한 얘길 했나 싶어 사진 앨범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벅지에 올려져 있던 사진들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무언가 계산을 하는 듯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혼잣말을 하는 그에게 난 진짜 괜찮아- 하고 넌지시 말하며 자세를 낮춰 사진을 주워 들었다. 혀 끝에 초콜릿 맛이 감돌고 있었다. 내려놓았던 초콜릿을 들어 한 입 더 베어 무는데, 문득 우지의 손이 다가와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해사한 미소가 한 걸음 다가와 있었다.

 

 

저기, 나 성공했어.”

……뭐를?”

당신이 불꽃놀이를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건 지구에서밖에 볼 수 없으니까, 다른 예쁜 걸 보여주려고.”

아……. 지금까지 그거 계산하고 있었던 거야?”

. 근데 후회하지 않을 거야. 지금 나가야 해, 지금.”

 

 

확신에 가득 찬 말투가 내 등을 떠밀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체 다른 예쁜 게 뭘까 싶어, 반신반의하는 느낌으로 우지가 잡아 당기는 대로 따라가 측면 출입구 문을 열었다. 계단을 밟고 내려와 그가 이끄는 방향으로우주선 선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순간 팡, 하는 소리가 소행성을 가득 울렸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하늘 위를 올려다 보았을 때,

 

넓고 짙은 하늘 위로 유성이 마구 스치고 지나가나 싶더니, 이내 빨갛게 물든 별이 팡 소릴 내며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사방으로 흘렀다. 곧 푸르게, 노랗게 물든 별들도 하나같이 제 몸을 조각 내어 하늘을 빛으로 채우고 있었다. 팡팡 하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때렸다. 옆에서 조금 소리가 작은 우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인간이야. 나도 이거 본 지 꽤 오래 됐단 말야.”

……와, 이거…… 이거 뭐야?”

별 무덤이야. 가끔 내 행성에서 볼 수 있는 건데, 사실 저 별들은 다 죽어가고 있는 거야. 그치만 내가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죽는 것들이야.”
…….”

당신이 지구의 불꽃놀이에 대해 가르쳐 줄 때, 저게 생각났어. 그래서 계산해보고 있었던 거야. 당신이 떠나기 전에 별 무덤을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마침 오늘 별 무덤이 여기를 지나친다고 해서 나왔는데, 딱 맞췄다. 그치?”

 

 

숨이 막히도록 터져 흐르는 빛에서 고개를 돌려 내 시선 약간 아래에 있는 우지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늘 그래왔듯 예쁘게 미소 지으며 날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다시금 하늘 위를 올려다본다. 동그란 모양으로 터져 흐르는 별빛 사이로 유성이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며 지나가고, 또 다른 별이 빠르게 점멸하며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나는 우주선 안에 사진기가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이 순간의 하늘을 두 눈으로 담아가고 싶었다. 살아오면서 본 그 어떤 불꽃놀이보다도, 어둔 하늘 위의 별 무덤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어느 순간에 우지가 내 손을 잡아온 사실도 난 알지 못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어……. 엄청.”

그렇다면 나도 마음에 들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걸 당신에게 보여 줬으니까.”

그렇구나……. 고마워, 그래 줘서.”

이제 당신 눈에서 별이 반짝이고 있어. 정말 예뻐. 별도, 당신도.”

 

 

그를 돌아본 나의 두 눈동자로 그의 곧은 시선이 와 닿았다. 내 손을 맞잡은 그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다 보며, 네 눈에서도 별이 반짝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어서 그러지 못하고 웃기만 했다. 맞잡지 않은 그의 손이 다가와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겨 준다. 손 끝에 붙은 반창고를 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서서히,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더 이상 우리의 시선이 맞부딪칠 공중이 줄어든다. 나는 반쯤 환상 같은 그의 숨결이 느껴질 때쯤 눈을 감아 버렸다. 그는 작게 키득였다.

 

곧 메마른 내 입술 위로 부드러운 무언가가 날아 든다. 이전에 내 뺨에 닿았던 그의 손끝만큼이나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려서, 나도 모르게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살며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서 제가 놀라 고개를 뒤로 빼 버렸다. 입술이 닿은 순간은 찰나였지만, 서로의 시선이 엇갈리고 엇갈리다 한 번 부딪치는 때부터 마른 입술이 화끈거렸다. 앞니를 내어 입술을 약하게 감쳐 문다. 그는 제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문질거리고 있었다. 나는 고민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살짝 입 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는 내 쪽을 올려다보는 듯 하더니, 먼 우주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이제, 별들이 다 죽은 것 같아.”

그런 것 같네. 저 별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아?”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될 거야. 흩어진 것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을 이루기도 하고, 혼자 살아나서 다시 반짝이기도 하고.”

신기한 일이네. 나도 몰랐는데.”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내뱉는 동안 간질거리던 마음 한 구석이 조금 편해지기를 바랐지만, 내 맘대로 되지를 않고 자꾸만 규칙적인 박동을 울렸다. 잡은 손을 그는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아닌 척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심장께를 손으로 짚고 서 있다가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칠 뻔 해 박동의 속도가 조금 빨라진다. 왠지, 나는 그가 이 울림을 들을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저기, 있지…….”

……어?”

큰일이야.”

뭐가?”

내 맘에서도…… 별들이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그가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제 심장께에 댄다. 나는 정말로 놀라 헛숨을 집어 삼킬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마구잡이로 떨리는 내 시선을 마주하고서 어색하게 웃는 그의 시선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박동이, 그의 심장에서부터 울려 퍼지고 있었다.


 






2. 난파 8일차

 

 

 

간단한 접촉사고처럼 일어난 나와 우지의 미묘한 관계 변화에 대해서, 4일이 지난 지금까지 틈날 때마다 걱정하고 속을 태우는 건 나뿐이었다. 그런 나와 달리 그는 다음날 잠든 나를 깨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침대 옆 바닥에 웅크려 잠드는 순간까지 입술이 닿았던 찰나의 기억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 자체를 하지 않았다. 아예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내게 다가오는 거리가 좀 더 좁혀졌다. 때로는 말도 없이 불쑥불쑥 손을 잡아오기도 했고, 우주선에서 함께 잠이 들면서 내가 눈을 떴을 때 한 뼘 거리에 제 얼굴을 두고 있기도 했다. 아무래도 키스 같지 않은 키스가 내게 전한 고백의 반쪽쯤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매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그가 싫은 건 전혀 아니었다. 자꾸만 그의 동선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고, 그와 맞잡은 손이 금세 뜨겁게 달아오르고, 그래서 심장이 규칙적으로 빠른 박동을 울리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우지와 거리를 좁히려 할 때쯤 의 기억이 머릿속 한 구석에서 스며들 듯 퍼져나갔다. 홍지수, 라고…… 그렇게 기억해 줘. 꽤 담담하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도 같은 그 인어의 이름 세 자를, 내가 우지에게 한 걸음 내디디면 금방이라도 잊을 것만 같았다. 억지로 밀어내고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는 내색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막바지 수리 작업을 한 4일 동안 우지는 하루도 다르지 않게 눈을 떠 내게 아침을 챙겨주고, 어질러진 우주선 내부를 꼼꼼하게 정리해 주었다. 부품이 모자라 우주선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또 어디서 발견했는지 모를 책들을 쌓아 놓고 침대 옆 바닥에 엎드린 채 그것을 읽고 있었다. 그가 뒤집어 놓은 책은 지구에서 챙겨온 시집이었고, 읽고 있던 책은 짐을 챙기다 딸려 온 프랑스어 시집이었다. 그것을 알아 먹느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했다. 당신이 한국어를 하길래 나도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야, 하고 덧붙였다. 또 잠깐 뒤에는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하고서 막 선수 쪽 수리를 반쯤 끝마친 나에게 뭉툭한 기계 덩어리를 내밀었었다. 대체 언제 우주선에 실렸는지 모를 필름식 사진기였다. 또 청소하다 발견했다고 중얼거리며, 그는 다짜고짜 내 얼굴 가까이에 그것을 들이밀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필름 돌아가는 소음이 선명하게 울렸다.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뺏어 들고 수리가 다 된 우주선을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의 모습을 연사로 찍었다. 그제야 제가 찍히고 있다는 걸 인지한 그의 멍한 표정을 마지막으로 필름이 다 돌아간 듯 더 이상 사진은 찍히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서 끝이야?”

, 들어가자.”

 

 

먼저 내 팔을 끌어당기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놓치는 방법을 깨달은 나는, 내 손을 등 뒤로 돌려 놓고서 그의 등을 떠밀었다. 반대쪽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우주선 안으로 들어선 그가 간이테이블 쪽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침대와 벽 사이 구석에 챙겨 둔 트렁크 안으로 카메라를 밀어 넣었다. 꼭 필요한 것들만 하나씩 챙겨 왔는데도 이틀 간 꽤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뭐 해? 이거 먹어.”

 

 

멀리서 부르는 우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거두었다.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대놓고 운운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부터 나는 몰래 짐을 싸고 있었다. 정말로, 떠날 날이 머지 않았다. 가까워지는 그와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하며 나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테이블 위에는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초콜릿 한 판이 맹물과 함께 놓여져 있었다.

 

 

아침에 청소하면서 두 번 찾았는데도 이거밖에 없더라고. 이거라도 먹고 자. 배고플 거 아냐, 그치?”

……어. 먹어야지.”

그러고 보니까 이제 먹을 게 없네. 돌아가겠지, 당신도?”

 

 

그의 물음에 그저 고개만이라도 끄덕이면 될 것을, 난 그러지 못해 시선만 떨어뜨린 채 초콜릿 껍질을 까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대답 없는 물음 뒤의 정적을 채웠다. 그러겠지, 당신은 지구에서 왔으니까. 한참 동안이나 내가 입을 닫고 있자 우지는 그렇게 덧붙이며 하하, 웃었다. 누가 들어도 명백히 쓴 웃음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문 채 손만 움직여 초콜릿을 조각 냈다. 어쩌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을지 모를 인어를 남겨두고 갈 때보다도 더 많이 울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첫 손님 치고는 정말 오래 있었어.”

…….”

당신이 있어 줘서, 난 정말 인간이 된 것 같아.”

…….”

떠나간대도, 잊지 않을게. 이제 당신이 내게 장미를 피워 줄 테니까. 그걸 당신인 셈 치고 매일 이야기를 들려 줄 거야. 나는, 그러니까, 다시 혼자가 될 테지만……. 그건 또 다른 의미에서 혼자가 아닌 거니까 괜찮아. 걱정하지 마.”

 

 

왜냐면, 그는 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난 다시 이 소행성에 난파할 수 없을 테고. 지구로 돌아갔을 때 내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많은 관계들이 있겠지만, 그는 기껏해야 내가 준 씨앗에서 자라난 꽃이 전부일 테니까. 나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서 작별을 고할 수 없었다. 차라리 같이 지구에 갈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이대로 우주선에 시동을 걸어 버린다면, 그렇다면 그와 살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고도 너무나 어린 생각이라 헛웃음이 터졌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는 동안 겨우 올려다 본 그는 입술을 닫은 채 손장난을 치고 있었고,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조각 낸 초콜릿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잘게 부서지는 초콜릿에서 처음으로 크레파스 맛이 났다.

 

 

있잖아, 나 할 말이 있는데. 지금 해도 될까?”

……해.”

떠난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 맞는 것 같아. 하지만, 그걸 인정해야 될 때는 인정해야 하는 것도 맞는 거겠지?”

…….”

근데 당신이 떠난다고 하면, 난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아. 보낼 수도 없을 것 같고, 당신을 자꾸만 잡고 싶을 것 같아.”

 

 

이렇게 될 거라고…… 아무도 말해준 적 없었단 말이야.

 

축축하게 젖은 그의 음성이 고요하게 내려앉은 공기 위로 섞이지 않은 채 부유했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가득 맺힌 그의 두 눈은 불빛을 받아 극도로 반짝이고 있었으나, 떨어질 듯 하면서 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고여 있었다. 마치 우는 것처럼 웃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서, 나는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다 뭉개진 목소리를 겨우 내는 동안,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 세게 쥔 내 손을 조심스레 감싸고 가만히 서 있었다.

 

 

……미안해, 널 두고, 내가…… 떠나게 돼서.”

괜찮아, 당신은 원래 당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해.”

너를, 내가, 흐윽……, 받아줄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해…….”

그것도 괜찮아. 당신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잖아.”

그치만, 정말로, 미안하다고 밖에……, 말 할 수가 없어…….”

난 하나면 됐어. 내가…… 당신처럼 당신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됐잖아.”

 

 

그렇게 대꾸하고서, 또 한번 내 손을 끌어다 제 심장박동을 들려주는 그에게서, 나는 내 생각이 애초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어쩌면, 내가 이 낯선 행성에 난파한 순간부터, 나만을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아니,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그를 올려다 본 내 눈가로 그의 엄지가 닿아 눈물을 닦아주었다. 정말, 나는, 울 자격도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켜냈다.

 

 

나는 정말로 행복해. 당신이…… 마지막까지 내게 가르쳐 준 게 있어서.”

흐윽, 으…….”

나는 그저,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당신을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다 보니까 당신과 같은 마음이 되어가고 있었어.”

…….”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그가 말을 멈추었다. 곧 눈 위로 따스한 것이 와 닿는다. 예쁜 말만을 담았던 그의 입술 새로 뱉어지는 숨결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내 두 눈 위로 입술을 붙인 채 서 있다가, 내 뺨을 감싸 쥐고 눈을 맞추었다. 흐려진 시야로 그의 눈물 어린 두 눈이 마주 보였다.

 

 

, 어느 순간부터, 그냥 당신이었던 것 같아.”

……아,”

그리고 지금도, 난 당신인 것 같아.”

 

 

얼떨결에 울음과 함께 숨을 집어삼킨 내 입술 위로, 내 눈에 닿았던 그의 입술이 부딪혀 왔다. 감은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방울 져 흘러내렸다. 그는 한 손으로 내 뒷목 어딘가를 감싸고, 반대 손으로 허공 중에 맴돌던 내 손을 붙잡았다. 맞잡은 두 손이며 닿은 입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느리게,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혀가 내 입술을 가르고 밀려 들어왔다. 초콜릿의 단 맛이 남은 입 안을 쓸어 내리고, 울고 있는 눈만큼 질척하게 젖은 두 개의 혀를 섞는 동안, 나는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프게 떨리는 그의 손을 힘 주어 잡았다. 나는, 차라리 이대로 뛰던 심장이 터져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끌어안자 맞닿은 가슴 위로 두 개의 심장이 바쁘게 뛰고 있었다. , , 하는 울림이 우주선 안을 가득 채우는 것만 같았다.

 

둘 다 울고 있었기 때문인지,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는 그리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올려다본 그는 제복 소매를 들어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무슨 용기에서였는지 그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품에 안긴 그의 온기가 곧 환상처럼 바스라질까 봐 무서워졌다.

 

 

저기 있지, 흐윽, 내가 있잖아…….”

천천히 말해도 돼. 나 듣고 있어.”

정말로, 너를, 너에게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나는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울어도 돼. 당신이 자꾸 울면 나도 슬퍼진단 말야.”

 

 

내 등에 닿은 그의 손이 느리게 움직여 나를 토닥거렸다. 그는 내게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고 나는 울음을 그칠 듯 하면서 다시금 울어버리고는 했다.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으나, 그는 끊임없이 나는 괜찮아, 하고 내게 속삭여 주었다. 그의 이름 한 번 불러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이름자, 사랑해 세 글자, 그것들로 가득 찬 목 끝이 아려오도록 메어서 울음 외에 그 어떤 말도 나오질 않았으니까. 그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내 등을 쓸어 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다정한 말투가 숨이 막히도록 슬펐다.

 

 

당신이 하기 힘들다면 나중에 해도 괜찮아. 나는 항상 여기에 있을 거야. 여기서 당신의 말을 듣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해.”

……미안해, 흐윽, 내가…….”

당신이 지구에서 이 별을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항상 여기서 미소 지을 거야. 그럼 당신이 바라보는 하늘 어딘가에는 웃는 별이 떠 있겠지. 그럼 당신은 하고 싶었던 말을 거기에다 들려주면 되는 거야.”

…….”

정말 멋지지 않아? 웃는 별을 가지게 된 인간은 당신이 처음일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내 얼굴을 붙잡고 생긋 미소 지었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 극도로 해사한 웃음을,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차오르는 눈에 힘을 주고 그 웃음 하나하나를, 말려 올라간 입 꼬리와 휘어진 눈꼬리를 머릿속에 꼭꼭 채워 넣었다. 그는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고, 이내 손을 옮겨 제 제복 깃에 달린 엠블럼을 떼어냈다. 금색의 나비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내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떼어냈다. 그의 손바닥 위로 네모진 플라스틱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그가 건넨 엠블럼을 받아 들었다. 그는 내 명찰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이내 허전해진 제복 깃에 그것을 끼워 달았다. 클래식한 제복 위로 흰 명찰이 달려있는 모습마저도 잊고 싶지가 앉아서, 나는 어색하게 입 꼬리를 당기면서 그것을 두 눈에 담았다.

곧 그는 꽃씨가 있는 곳의 위치를 이미 알고 있다며 잠깐 자리를 떴다. 역시 청소하다가 발견했는데, 가져가고 싶었지만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의 손에 들린 지퍼백 안으로 꽃씨 세 개가 얌전히 담겨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에 단단히 챙겨 들고 다시 내 앞으로 와 섰다. 좁혀지는 그와의 거리만큼이나 작별의 시간도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나는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줘 눈물을 삼켰다.

 

 

안전하게 지구로 돌아가길 바라. 늘 기도하고 있을게.”

너도…… 잘 지내고 있어. 널 잊지 않을게.”

고마워. 나도 당신을 잊지 않을게.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웃는 얼굴과, 그 반짝이는 두 눈동자도 전부.”

……진짜 고마워. 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나도 알아. 난 이미 당신이니까, 다 알 수 있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그의 손이 다시금 내 손을 맞잡아 온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나도 그를 따라 웃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예쁘게 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눈물 자국이 남은 내 눈가를 쓸어 주고, 서서히 출입구 쪽으로 발을 떼었다. 나는 다만 의자에서 일어났을 뿐, 그를 따라 출입구 쪽으로 한 발도 내딛지 못했다.

 

 

이제 당신 눈에서 별 냄새가 나.”

…….”

불꽃놀이를 보던 그 날의 별 냄새야.”

……그래, 그 날도 고마웠어.”

당신의 눈에 담긴 바다 냄새와 별 냄새를, 다음에 만났을 때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나 이제 갈게. 조심히 돌아가, 윤정한 씨.”

 

 

, 그리고 탕. 눈앞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처럼 측면 출입구 문이 빠르게 열리고 닫힌 이후로, 우주선 내부의 공기가 극도로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실은 전부 환상이었던 걸까. 선수 쪽 창문 가까이로 다가가 밖을 곁눈질하듯 내다 본다. 조금 거리를 두고 선 그는 우주선을 등진 채 금방이라도 자취를 감출 듯 했으나,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까만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비척비척 걸어가 조종 관제실로 향한다. 전원을 켜고 시동을 걸자 고요하던 내부가 육중한 기계음으로 가득 들어찼다.

 

자동 운전으로 모드를 변경해 두고서, 나는 우주선 내부의 불을 다 끄고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뭐가 되었든 상관없이우주선이 망가져 떨어지든, 경로를 이탈해 블랙홀에 휘말리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시간이 이대로 멈춰 버리든, 다시 지구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 죽었으면 좋겠어. 나는 두 손으로 엠블럼을 꼭 쥔 채 영영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게, 다시 눈이 떠졌고, 선수 쪽에서 내려다 본 발 아래에는 야속하게도 파란 빛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

 

안녕, 윤정한이야.

나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저기 어디에선가 별들이 마구마구 터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쏟아지는 별빛 가운데 네 미소 지은 얼굴을 떠올린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이 꿈이나 환상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생생한 추억이어서 항상 상기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나는 마음이 아플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 위로 사랑을 전송하고는 한다. 소리내지 않아도 네가 들을 수 있을 거란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서, 입속말로 네 이름을 중얼거려 본다. 돌아설 때 마주한 별이 반짝이는 게, 네 미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난 이미 오래 전부터 너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별이 잘 보이는 밤이면 네가 보고 싶다. 오늘은 꼭 소리 내어 널 불러 보겠다. 내게 웃는 별이 되어 줘서, 정말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다.

 

 

 

잘 들리니? 난 아직 널 기억하고 있어.

 

네가 보고 싶어. 사랑해, 우지야.




「최한솔에게.

안녕, 형이야. 잘 지내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은 잘 지내고 있어.」



정한은 거기까지 쓰고서 손에 힘이 풀려 헛웃음을 지었다. 성치 않은 손으로 평생 잡을 일 없을 것 같던 필기구를 잡자니 영 글씨가 시원찮았지만, 어차피 부칠 수 없을 테니 꼭 알아봐야만 할 필요도 없었다. 자기합리화 비슷한 거다. 그는 헛웃음을 지어보이고 다시금 펜을 집어들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가 손이 벌벌 떨렸다. 정한은 이를 악 물고 필사적으로 손목을 움직여 펜을 놀렸다. 경직된 글씨가 질 낮은 종이 위로 뭉치듯 퍼져나갔다.



「오늘은 무척 춥더라. 거기는 좀 덜 추울 것 같은데, 그렇다고 간다는 건 아니고. 날이 추워서 따뜻한 거라도 사먹으려고 했는데 돈이 모자라더라. 그냥 집에 있으려고. 너는,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툭, 거짓말처럼 물방울이 종이 위로 떨어져내렸다. 눈물이다. 정한은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웃겨서 웃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파들거리는 입술을 앞니로 눌러 깨문 그가 몇 번이고 펜을 고쳐쥐었다. 싸구려 만년필의 검정 잉크가 눈물에 번져 파란색으로, 또 빨간색으로 흩어져 내렸다. 급하게 눈두덩을 부비어 눈물을 닦는 그의 왼손에는 투박한 모양의 의수가 끼워져 있었다.



「걱정은 하지 마. 네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다 보니까…… 그러다 보니까, 살아지더라. 그래서 그냥 그런 대로 살다가… 그러다가 네 곁으로 가려고. 일찍 가지는 않을 거야, 네가 타박할 테니까.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놈한테 그런 식으로 혼나고 싶지는 않거든.

보름달이 떴어. 네 얼굴이 비치는 것도 같아. 이만 줄일게, 내일도 아침 일찍 나가봐야 하거든.


오늘, 달이 참 밝다. 보고 싶다, 한솔아.」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본 적이 없어서, 정한은 그래서 많이 후회하고 있었다. 허나 언제까지나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면서도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해 저리 둘러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아름다움으로 치장하는 것을 한솔이 더 좋아할 것이라 합리화하며, 정한은 펜을 내려놓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떨구었다. 거칠어진 오른손과 딱딱하고 온기 없는 왼손이 그새 수척해진 얼굴을 모두 가리었다. 억눌린 흐느낌은 순식간에 틈을 비집고 터져나와, 종국에 그는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파아란 달빛이 시리게 비쳐 들었다.





- 첫눈에 반한다는 말, 믿어요?
- 나 당신한테 반한 것 같은데.
- 상해, 미라보 여관. 커피가 참 맛있다고들 하던데. 거기서 다시 만나는 걸로 하죠.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 지금 당신하고 입을 좀 맞춰야 될 것 같은데.


'동지, 그거 압니까?'
'말씀하세요.'
'제국의- 아, 제국 얘기를 꺼내서 죄송하긴 한데, 꼭 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들어 주시겠습니까?'
'듣고 있습니다.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잖습니까.'
'여하튼, 제국의 어느 소설가는 말입니다. I love you, 그 한 마디를 번역하기가 부끄러워 오늘 달이 참 밝네요-. 하고 번역했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오늘 달이 참 밝네요, 윤정한 동지.'





「1949년 2월 18일, 윤정한 씀.」


그것이 한솔에게 쓰는 열 번째 편지였으며, 그 날은 그의 서른 네 번째 생일이었다. 정한은 그럼에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하나 전하지 못하였다.

다만- 영영 부칠 수 없는 대답을 열 번째 편지에 실을 뿐이었다.








*

1933년 상하이 일대를 휩쓸고 다니던 최연소 청부업자 십팔세 최한솔.
1933년 조선 독립군 제3부대 좌포수 이십육세 윤정한.


오늘도 두 사람이 바라보는 달은 참 밝습니다.







* 리네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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